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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색과 음의 불협화속에 있는 은근한 질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2)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년 06월 20일 21시 09분  조회:1783  추천:0  작성자: 강려
춤과 색과 음의 불협화속에 있는 은근한 질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2)
 
김철교(시인, 평론가)
 
 
3. <춤추는 음악-칸딘스키 ‘인상 Ⅲ-콘서트’> 읽기
 
 
 
<인상 III - 콘서트 (Impression III – Konzert)>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1911년 쇤베르크(A. Schoenberg, 1874〜1951)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그 느낌을 그린 것으로, 청각적 체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회화와 음악의 공감각을 표현한 것이다.
 
 
 
검은 색 부분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다.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에 있는 청중을 나타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좌우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은 쇤베르크의 음악이 홀을 가득채운 것을 그린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색들은 각종 악기들의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김광우, 『칸딘스키와 클레 – 추상미술의 선구자들』, 미술문화, 2015, 19~20쪽).
 
 
 
보다 관련 작품을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딘스키, 쇤베르크, 스크리아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의 창시자, 스크리아빈은 음을 색으로 표현한 선구자라는 점이다.
 
 
 
당시 칸딘스키가 다녀온 음악회에서는 쇤베르크의 ‘현악 4중주’와 ‘3개의 피아노 소품’이 무대에 올랐다고 하며, 이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회였다. 무조음악이란 악곡의 중심이 되는 장조(長調), 단조(短調) 등의 조성(調性)이 없는 음악을 말한다. 으뜸음도 없어서 모든 음은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의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모두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12음 기법을 창안하였다.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은 쇤베르크 이후 일반화되었다.
 
 
 
당시로서는 불협화음이 음악에 도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이 불협화음인지 화음인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불협화음을 음악에 편입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부조화와 삭막함을 예술에 담아내어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아도르노가 현실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현실을 왜곡하게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현실의 고통을 표현해서 사람들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며, 그런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고 아도르노가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의 신비주의 작곡가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은 자신의 음악에 시각적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음에 해당하는 빛을 투사하는 것을 시도한 바 있는데, C(도)=빨간색, D(레)=노란색, Db(레b)=자주색, E(미)=파란색, Eb(미b)=구리색, F#(파#)=군청색, G(솔)=오렌지색, A(라)=초록색, Ab(라b)=제비꽃색, B(시)=암적색, Bb(시)=철색이었다.(전상직, 『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4, 36쪽)
 
 
 
색의 삼원색은 상호조합에 따라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고, 모두 합쳐지면 검은 색을 나타낸다. 음(音)들의 어울림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표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역으로 어떤 음악을 떠올릴 수 있을까? 또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각 개인의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역동에 따라 똑같은 그림과 음악에서도 행복 혹은 불행, 질서 또는 무질서, 고요함 혹은 잡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시상(詩想)을 얻었는지 살펴보자.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인상 III-콘서트 (Impression III–Konzert)>, 1911,
 
캔버스에 오일과 템페라, 77.5x100Cm,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 뮨헨.
 
 
 
 
 
 
 
색깔 속에서 화음이 들리고
(조화롭지 않아도 된다)
무질서한 선(線)에서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캔버스에 콘서트 장이 서고
누군가 시를 낭송하면 된다
(시인이 아니어도 된다)
 
 
 
땀범벅 마당에서는
그렇게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和聲)이 완성된다
 
 
 
도는 빨간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자
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자
 
 
 
- 김철교 <춤추는 음악-칸딘스키‘인상Ⅲ-콘서트’>(『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이승하에 의하면, “이 시야말로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를 세우는 융ㆍ복합적인 시가 아닌가 한다. (······) 시의 제3연은 랭보의 시 「모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 「춤추는 음악」은 음악과 미술과 문학의 융ㆍ복합을 꾀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승하, 「그림을 본 관람객, 어떻게 시를 쓰는가」,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02~203쪽)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 <인상 III–콘서트>를 보면서, 음을 색으로 표현했던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을 생각한다. 스크리아빈은 음 높이와 색채의 상호관계를 연구하고 각 음계마다 색깔로 나타냈다. 빨간색, 푸른색, 오렌지색(노란색)은 도·미·솔을 은유한 것이다. 또한 시인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달에 홀린 피에로>를 떠 올린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들었다는 무조음악과 연관시켜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1연은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듣고 쓴 시이다. 처음에는 부조화(不調和)의 조화(調和)라할까 좀 생경한 맛이 있지만 자주 듣다보면 묘한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음들의 어울림, 조화로울 것 같지 않는 색들의 조화, 시인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대신하려는 시낭송가, 음악과 미술과 시가 어울리는 한마당이다. 화음이란 본래 조화롭다는 것을 말하지만, 조화로워야 할 화음이 조화롭지 않아도 조화로워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을 뭉뚱그린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이성적인 것이 현실이다. 서양에서 경영경제의 모든 이론들은 합리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아래 경제이론과 정책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영경제 현장에서 모든 결정이 이성적인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투자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일러(Richard H. Thaler; 1945〜)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연결시킨 ‘행동경제학’을 세상에 내놓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으로만 행동한다고 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경제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결정들이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그럴듯하게 어울려 경제 경영사회가 비교적 순항하고 있다. 무질서 속의 질서, 그것이 인간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학문에서 이제는 의사결정 주체들이 더 이상 이성적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간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의사결정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미가 전혀 없는 로봇이 경영하는 세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장·단조에 따라 화음을 잘 맞추어 오선지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도 현실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화폭에 오선지에 반영하고 있다. 표현주의 예술, 초현실주의 예술이 우리 삶의 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가 표현주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달에 홀린 피에로>에서 사용한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 1860~1929)의 시는 의미의 그림자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 시(詩)다.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는 악기들과 소프라노의 음성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소리로 더 초현실적이다. 전통적인 조성(調性)과 화성(和聲), 형식과 구성 등을 부정하여 당시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음악이다. 표현주의 음악은 20세기 초의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세계대전의 어두운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혁신적인 운동이다.
 
제2연에서“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이 완성된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인간 삶의 진면목이다. 인위적인 법칙과 질서, 지성만으로, 감성만으로 만들어진 예술, 정교한 이론에 의한 이루어진 화성, 그런 것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엉켜있으나 은근히 질서가 있는 삶, 그것이 이성적이지만은 않은 인간의 세계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토((Arthur Danto; 1924〜2013)가 『예술의 종말이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예술은 잘 정돈된 르네상스식의 예술이 종말을 고하고, 1964년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미술전시장에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기존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던 예술이, 이제는 인간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그대로, 즉 이성에 의해 간추려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예술의 시대, 음(音)과 색(色)과 시(詩)가 구분 없이 어우러지는 세계,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세계이며 진정한 삶의 세계인 것이다.
 
 
 
제3연을 보자.“도는 빨간 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는 마당. 전통예술의 정돈된 오페라의 무대, 원근법과 잘 복사된 현실을 나타내는 캔버스가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추는‘막춤’의 예술이, 예술의 진정한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무슨 법칙과 이성적인 흐름에 편승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하루 아니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 우리네 삶인 것이다.
 
 
 
시인이 경영대학원에서 지도했던 러시아 학생 중에‘나자’라는 학생이 있었다. 아주 춤을 잘 추었는데, 러시아에서 고등학교 때 정규과목으로 춤을 배운다고 했다. ‘나자’는 시인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하여 자주 유성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갔다. 시인은 짧은 시간에 스텝을 배울 수도 없어 그저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소위‘막춤’을 추게 되었다. 동행한‘나자’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한참 흥겨운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시인은 학생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막춤을 추면서 깔깔대며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춤의 기본을 배운 학생들은 내가 보기엔 멋대로 추는 것 같아도, ‘은근한 질서’를 갖추었을 것이었지만, 나는 그런 기본기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흥에 겨워 추는‘막춤’이었다. 격식에 맞는 춤, 원칙에 맞는 춤, 그런 춤은 재미가 없다. 공연장에서 점잔을 빼면서 감상하는 발레도 나름대로 좋겠지만, 그것은 관객인 ‘나’의 세계가 아니라 특수 계급 즉 전문 배우들, 발레리나들의 세계인 것이다. 관객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인 것이다.
막춤은 그저 흥겨운 대로 몸을 흔들어대는 무질서한, 그렇지만 보는 사람이나 추는 사람이나 함께 어울려 흥겨울 수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막춤같은 음악, 그것이 <달에 홀린 피에로>정신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시를 쓴 것이다.
 
 
 
제3연에서, 도, 미, 솔은 다장조 으뜸화음이다. 으뜸화음은 으뜸음을 기준으로 3도 위의 음과 5도 위의 음을 함께 표현한 화음을 말한다. 장조에서는 ‘도 · 미 · 솔’의 화음이, 단조에서는 ‘라 · 도 · 미’의 화음이 으뜸화음이다. 일반적으로 장조(major)는 밝고 깨끗한 느낌을, 단조(minor)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도·미·솔이 무질서하게 어울려도, 멋들어진‘자연스러운’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물론 그 무질서는 낙서와 달리, ‘은근한 질서’를 가진 무질서인 것이다. 예술혼이 무질서를 무질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은근한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가 무질서로 머물 때 그것은 낙서요 소음이다. 예술가에 의해 은근한 질서를 갖추어져 있을 때 비로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낙서 같은 한 줄의 글, 혹은 시장 잡배들의 상소리 같은 글들이 버젓이 시라는 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원색이 서로 엉켜 모든 색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화음과 비화음이 어울려서 또 다른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성과 비이성, 현실과 초현실, 의식과 무의식, 그것들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넘나들며 ‘조화로움’을 생산하는 것이 예술의 세계다.
 
 
 
절경을 잘 묘사해놓은 그림보다, 어린아이들이 투박하게 그린 그림에서 진실된 감동을 얻고, 유명한 서예가의 정돈된 서체로 써진 글씨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글씨들에서 우리는 더 푸근함을 느낀다. 정돈된 그림과 글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상해야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그림과 글씨를 보면, 우리의 이성을 무장해제 시켜 안온한 느낌을 주어,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에서 짓이겨진 우리 영혼을 치유해 준다. ‘예술의 전당’에서 가끔 전시되는 어린아이들의 작품 앞에서 머무를 때가 더 평화를 느끼는 이유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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