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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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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2019년 06월 30일 19시 59분  조회:2020  추천:0  작성자: 강려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Lozano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서론
 
 
시와 시편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의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항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아날로지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고통받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시적 흐름을 유도하거나 변형시킬 때 현저히 다른 어떤 것 즉,
 
작품의 출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스타일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통의 스타일을 뛰어 넘으려 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을 갖지 않는다.
 
그때 생긴 이미지는 공동재산, 즉 미래의 역사가와 문헌학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저런 비슷한 돌들이 사용되어 예술적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 스타일은 일상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를 뛰어 넘는다.
 
더 적절히 말하면 반복불가능한 시적 행위,
 
즉 이미지, 색깔, 리듬, 비전등을 시편으로 용해시킨다.
 
 
시편이 가지는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성격은
 
그림이나 조각, 소나타나 춤, 기념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림과 송가, 교향악과 비극을 구별짓는 차이점을 뛰어넘어
 
그 모두가 동일한 우주를 선회하도록 하는 창조적 요소가 있다.
 
 
조형예술과 조음예술은 이러한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지만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은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한 쌍의 음과 양은
 
철학이고 종교이며, 춤이고 음악이며, 의미로 충만한 주기적 운동이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 언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특징짓기 위하여
 
조화 주기성, 혹은 대조법과 같은 표현을 내포한다.
 
 
모든 작품은 의미화작용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서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활동범위와 직업이 무엇이든, 예술가이든 수공업자이든,
 
인간은 원료, 즉 색깔, 돌, 금속, 말을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원료들이 맹목적인 자연의 세계를 포기하고 작품의 세계,
 
다시 말하면 의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각을 새기고 계단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사용한 재료인 돌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조각에 쓰인 돌과 계단을 만드는데 쓰인 돌이 동일하며
 
이것이 모두 동일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변형의 속성은 다르다.
 
산문작가와 시인의 손에 놓인 언어의 운명이 그러한 차이점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산문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이러한 작용이 바로 분석적 특성이며 이것의 실현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되는 법인데
 
왜냐하면 말은 다수의 잠재태의 기의(significado)들을 포함할뿐 아니라
 
다수의 방향성과 의미들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이런 현상은 형식, 소리, 색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 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 반대이다.
 
시적기능에 힘 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서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말, 소리, 색깔 그리고 그 박의 재료들은 시의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변화를 겪는다.
 
여전히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이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한다.
 
기술의 영역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변화는 원래의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들어간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실상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며
 
원래의 사물이란 태초부터 실재적인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각이 된 돌, 그림의 빨강, 시편의 말은 순수하고 단순한 돌이나 색, 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은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 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즉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리듬, 색깔, 기의-이며 동시에 다른사물, 즉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
 
그때의 작품은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이미지이며 반복불가능한 시이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결국,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언어가 무엇이든간에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기능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며 역사를 초월한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다.
 
우리들의 열정과 일상의 간만(干滿)에 모든 것이 화해하는 순간이 있다.
 
적대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한 순간 융합한다.
 
그것은 판단중지하는 것이며 이순간 시간은 멈춘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라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해 보았다.
 
사랑은 인간에게 열려있는 일치와 참여의 상태이다.
 
사랑의 행동에 의해 의식은 부서지기 전에 장애물을 넘어 충만한 상태로 일어서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충만한 일어섬 속에서
 
위를 향해 일어서는 힘과 중력등 모든 힘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다.
 
 
자력을 띤 사물.
 
그 덕분에 우리는 시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편은 가능성일 뿐이다.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컬는 상태에 참여 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他者性의 발현)
 
 
시편은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 한편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독자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된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제 1부
 
 
시 편 el poema
 
 
언 어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사람들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대상과 기호가 동일하다는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언어에 대한 학문들은 그들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말이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조악한 도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말없이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또한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카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모든 배움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의 계시로 끝난다.
 
혹은 무지의 고백인 침묵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의미화 작용이다.
 
말은 표상적 작용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의미화 작용은 지시적이고 감정적이며 표상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하여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언어와 신화들은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들이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은유는 실제의 한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말 하나하나와 혹은 구와 절은 하나의 은유이며 동시에 마법적인 도구이다.
 
즉, 말이란 다른 사물로 변화하기 쉽고 또 건드리는 것을 변용시키는 어떤 것으로,
 
예컨대 태양이라는 말이 빵이라는 말을 건드리면 빵은 별로 변한다.
 
그리고 태양자신은 빛을 내는 음식이 된다.
 
 
말은 상징을 발산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말 덕분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 되려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말들은 서로 충돌하여 금속성의 불꽃을 튀기거나 혹은 파랗게 빛을 내는 짝들이 된다.
 
말들로 수놓아진 하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천체들이 생겨난다.
 
차가운 비늘 위로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침묵을 떨구는 말들과 구들이
 
언어의 수면위로 날마다 솟아오른다.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시는 일어서는 언어다.
 
시는 원초적 언어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즉, 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었던 시간으로의 복귀이다.
 
혹은 사물과 이름이 동일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총체적 시의 실현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말과 대상 사이의 거리-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는 다른 현상의 결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존재 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가교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가거나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하여야 한다.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양자의 시도는
 
근대인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연유로 현대시는 양극사이를 운동하는데,
 
한 쪽 극은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다른 한 쪽은 혁명적 소명이다.
 
이러한 양극으로의 운동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역사적 실존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역사적 실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시도는 소외된 의식의 회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역사적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법칙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은 실존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인류는 두 번째의 결정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언어는 시이며 모든 말은 비밀스런 발화점이 건드리자 마자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은유의 전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무심의 언저리-텅빈 충만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면 ,
 
의지가 끝나고 순수한 수동성이 시작하는 곳을 분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정신작용은 총체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기능에는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용의 상태로 침잠해 있다는 것이 욕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증언 “없음을 욕망하며” 는 여기서 무한한 심리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즉, 욕망의 힘에 의하여 없음 상태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열반 nirvana 도 이와 똑같이 능동적 수동성의 조화를 요구하고 정중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수동적 상태들-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존재의 충만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원성을 깨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행사를 요구한다.
 
 
완벽한 요가 수행자는 적당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면서”
 
망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어한다.
 
무심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는
 
서구적 문명의 지배적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전체를 얻기위해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의 “텅빈 충만”이란 말을 상기해보자.
 
수동적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 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시키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을 뿌리채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채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이며
 
또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려는 중력의 힘이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의 말과 마주친다.
 
반면에 진정한 시인은 밑에서 위로, 공동체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움직인다.
 
작품은 곧바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일의 대상이 된다.
 
 
 
시의 모호성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참여는 재창조를 암시한다.
 
독자는 시인의 몸짓과 경험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엇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말인 것이다.
 
시는 필연적이며 교체할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고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떠한 수정이든 재창조이다.
 
즉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온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
 
쉼표 하나를 고치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시는 교체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살아잇는 총체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재창조에 다름 아니다.
 
 
 
 
계시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발전의 주체는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는 언어이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이다.
 
고통 혹은 열락의 외침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숨긴다.
 
즉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무엇 혹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 외침이 가리키는 실재는 결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막 나타나거나 혹은 이제 막 영우너히 사라지려는 순간처럼 저기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닥쳐올 것같은 급박함,
 
발전한다는 것은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소집을 의미한다.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인 시는 감정적 외침이 지시만 하고
 
이름 붙이지는 못하는 것을 계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게시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명이라면, 실재는 계시되지 않고 해명될 뿐이며 언어는 단지 이해될 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가 될 것이다.
 
감정적 외침인 경우에, 말은 ‘빔’을 향하여 던져진 외침이다.
 
거기에는 대화자가 부재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훼손 시킨다.
 
그러나 시인들은 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서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고
 
말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1부 시편
 
 
리듬
 
단어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들처럼 행동한다.
 
단어들은 언제나 ‘이것 그리고 이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동시에
 
‘저것 그리고 저것 너머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유는 단어 다스리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사유는 부득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단어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신뢰, 즉 사물과 이름은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이다.
 
단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들에 대한 회상이다.
 
즉, 자연엔 영이 깃들여 있고, 각각의 사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다.
 
객관적 세계의 닮은 꼴 언어에서도 역시 영이 깃들여 있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서로 상응한다.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집합이다.
 
가능한데까지 자동 기술법을 실천해 보았던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들의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호 연관 관계를 알고 있다.
 
불러드림 evocation과 불러모음 convocation.
 
브르통은 ‘단어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지들의 강에 휩쓸려서 우리는 순수한 실존의 끄트머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와 최종적으로 합일하는 통일된 상태를 예감한다.
 
조수에 대항하지 못한 채 의식은 요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은 최종적인 이미지에 닻을 내린다.
 
벽이 우리의 행로를 가로막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이와 반대의 상태들-의식의 지나친 긴장,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이해력들이 부딪혀 불꽃 튀기는 대화들, 내면적 성찰이 무한으로 증대되는
 
투명한 화랑들-역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느닺없는 구의 출현을 돕는다.
 
그것은 불멸의 정진 뒤에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다. 이성의 저항 뒤에 열리는
 
통로를 지나 우리는 조화로운 지대를 밟는다. 거기서 모든 것은 용이해 지고,
 
모든 것은 말없는 대립이며 기다렸던 암시가 된다.
 
우리들은 개념들이 운을 맞추는 것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사유와 구도 역시 리듬, 부름, 울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이며, 번쩍이는 물결이 우리를 건드리자 마자
 
몸을 떨게 된다.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은
 
똑같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전기 같은 힘을 가진 예기치 않은 구가 솟아오른다.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입으로 번개와 불꽃을 토했다.”........
 
저주받은 불순한 단어들이 난폭한 별처럼 폭발한다.
 
우주적 질서를 뒤흔드는 저주와 폭언.
 
사실 그러한 구들을 발설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자신 밖에’ 있었던 ‘타자’였다.
 
사랑의 대화들도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종종 ‘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휴지와 감탄사, 웃음과 침묵-은 동시에 발생한다.
 
대화는 합의 이상의 어떤 것, 즉 화음이다.
 
연인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입이 발음한 두 개의 조화로운 각운이다.
 
말은 처음에 말을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과 이후의 결별은 순수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즉,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탕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런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은 아날로지에 의거하여 창조한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이다.
 
리듬은 자석이다. 리듬을 재생산할 때-박자, 각운,변주,유사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 시인은 말들을 불러 모은다.
 
불모의 상태에 뒤이어 언어의 풍요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의 수문이 열리자 구들은 샘물처럼 혹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인과 마법사
 
시적 작용은 주문(呪文), 주술 그리고 다른 마법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행위는 마법사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시인과 마법사는 아날로지의 원리를 이용한다.
 
양자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철학자, 기술자, 현자와 달리 마법사와 시인은 자싱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추출한다.
 
모든 마법적 작용은 정화를 위한 고통스런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내면적 힘을 필요로 한다.
 
마법적 힘의 원천은 이중적이다.
 
즉, 마법을 위한 공식과 그 밖의 방법들, 그리고 마법사의 정신적인 힘,
 
곧 자신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을 조화시켜주는 정신적 조율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내적 성찰 혹은 분석과 전혀 다른 탐색이다.
 
탐색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이다.
 
빈번히 마법사는 번역자와 비교된다.
 
마법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다른 모든 반역은 최초의 이러한 반역에서 출발한다.
 
주술사의 모습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긴장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서 신은 가정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처럼 달래고 사랑해야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유혹이거나 정복하거나 비웃어야 하는 힘이다.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위태롭고 신성모독적인 기도(企圖)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마법사는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다.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이며
 
사회성의 결여로 언제나 종국적으로 불모를 초래하는 것도 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 결단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긍심의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선물로 변모되지 못하는 모든 마법은
 
자신을 삼켜버리며 끝내는 창조자까지 삼켜버린다.
 
마법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힘으로, 잠재된 에너지의 핵심으로 본다.
 
마법사의 반역은 고독한데,
 
그것은 마법적 행위의 핵심이 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항하여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르는데,
 
그는 서구적 상상력이 창조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마법사나, 철학자나, 현자가 아니라 영웅이며 불을 훔친 자이고 박애주의자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반역은 인간이라는 종의 반역이다.
 
바위에 묶인 영웅의 고독에는 암시적으로 인간 세계로의 귀환이 내재되어 있다.
 
반면 마법사의 고독은 사회로 귀환하지 않는 고독이다.
 
마법, 즉 힘에 의한 힘의 탐색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서 끝을 맺기 때문에
 
마법사의 반역은 불임이다. 근대사회의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법사의 이중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우주와 생생하게 관계 맺으려 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교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법의 실현이 암시하는 것은 힘의 탐색 바로 그것이다.
 
마법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우주적 힘과의 의사소통과-인간이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될 때를 제외하고-
 
인간과 의사불통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은 생명-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흐름-의 친교 관계는 긍정하지만
 
인간사이의 친교는 부정한다.
 
시인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언어를 ‘생명의 사회’-카시러가 조화로운 우주의 마법적 비전을
 
정의한 것처럼-로 보는 시인의 개념은 마법의 개념에 접근한다.
 
시편은 주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지만, 안수기도의 방법으로
 
시인은 어넝의 비밀스런 힘들을 일깨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를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이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줄기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리듬에서 솟아난다.
 
리듬과 시 언어의 관계는 춤과 음악적 리듬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은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쫒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이다.
 
또한 리듬은 기념하기 위한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신화를 재생산 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적 운율의 닮은꼴로서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기우, 풍요로운 사냥, 혹은 적의 죽음-을
 
마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힘이다.
 
춤은 이미 씨앗 상태의 표상을 품고 있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신화와 제의의 이중적 현실은 그들을 품고 있는 리듬에 의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은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두 리듬의 혼합으로 보았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
 
그라네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음과 양은 서양적 의미의 관념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소리나 표시도 아니다.
 
우주의 구체적인 표상을 품는 기장이며 이미지이다.
 
실재들의 창조적 역동성을 갖는 음과 양은 서로 바뀌고, 서로 바뀌면서 총체를 낳는다.
 
그러한 총체 속에는 아무것도 말소되거나 추상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모습이 특수성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존재한다.
 
음은 겨울이며 여성들의 게절이고 집이며 그늘이다.
 
그것의 상징은 문門 이며 어둠 속에서 성숙하는 것, 숨어 있고 닫힌 것이다.
 
양은 빛이며 농사일이고 사냥이며 낚시이고 대기이며 남성들의 시간이고
 
열려 있음이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충만한 시간과 결핍의 시간, 남성적 시간과 여성적 시간-용의 모습과 뱀의 모습-
 
그러한 것이 생명이다.“
 
우주는 상호 대립하며 교류하고 보완하는 리듬의 양가적 체계이다.
 
리듬은 식물의 성장과 제국의 팽창, 수확의 증대와 제도의 확장을 다스린다.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이 도이다.
 
우주를 리듬의 모임, 흩어짐, 그리고 다시 모임으로 느낀 것은 중국인 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리듬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 유한한 존재, 죽을 운명의 존재,
 
그리고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여, ‘다른 것’ 즉 죽음,신,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리듬은 하나의 태도이며 의미이고 세계에 대한 사이하고 독특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삶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태도-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이다.
 
운율은 구체적인 시간성, 즉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이다.
 
단테는 항성들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을 사랑이라고 인식했다.
 
노자와 장자는 상보적 대립물로 된 다른 리듬을 듣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듬을 투쟁으로 여겼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우주적 리듬과 신화
 
 
어떤 사회나 두 개의 달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상의 삶과 세속적 행위들을 다스린다.
 
다른 하나는 신성한 시간, 제의 그리고 축제를 다스린다.
 
세속적 날짜와 달리 신성한 날짜는 측량단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현현하는 초자연적 힘을 싣고 있는 생생한 실재이다.
 
 
모든 문화는 ‘시간의 종말’에 대하여 공포를 느껴왔다.
 
‘출입(등장과 퇴장)의 제의’가 존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불의 제의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별의 언덕에 모닥불이 피워지자마자 그때까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멕시코 시 전체가 반짝였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신화가 현현했다.
 
공허한 연속성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시간이 재생하는 것이다.
 
삶은 적어도 그 순간이 다 소모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의 재생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배grial의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고, 사멸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낡은 시간의 완고함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이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게는 불모가 지배한다.
 
평원은 고갈되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나감(퇴장)의 제의’는 낡은 시간으로 하여금 젊은 후계자에게 평원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는 거의 언제나 젊은 영웅의 구세주적 개입에 근거한다.
 
신화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매듭이다.
 
신화는 과거이며 과거는 또한 미래이다.
 
신화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영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과거이다.
 
신화는 원형적 시간에서 진행된다.
 
원형적 시간이란 신화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성한 달력이 리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현재에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미래적 과거이다.
 
시간의 일상적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신화적 질서는 용어들을 전도시킨다.
 
과거는 현재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
 
현재 속에서 총체적인 현존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껴안고 있는 원초적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는 문들이 있지만, 세속적 달력은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총체 속에 포괄한다.
 
리듬을 통하여 원형적 과거를,
 
다시 말해 현재에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잠재적 미래인 과거를 현실화 한다.
 
우리가 ‘좋았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처럼 흐름 속에 죽어간다.
 
반대로 신화적 시간은 죽지 않고 반복되어 현현한다.
 
시간에 대한 다른 표상들로부터 시화적 시간을 구별짓는 것은 원형적 특성이다.
 
언제나 오늘이 될 수 있는 과거로서의 신화는 언제나 반복하여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부동하는 실재이다.
 
 
리듬의 반복에 의해 신화는 되돌아온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위베르와 모스는 신성한 달력의 불연속적 성격을 보여주며
 
리듬의 마법에서 이러한 불연속성의 기원을 발견한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들이 시는 아니지만 모든 시는 신화이다.
 
신화에서처럼, 시에서도 일상적 시간은 변화를 겪는다.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것, 다시 현현할 무엇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이나 지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이다. 재생되는, 재현되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재현된다.
 
첫째는 시적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둘째는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히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이다.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을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들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욕망은, 최고의 욕망인 사랑의 충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리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같은, 제발 ....했으면’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
 
즉, 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욕망이 행동을 취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비교하거나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유발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재창조 된다는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이다.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 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은-어린아이, 원시인들, 그리고 요컨대 가장 깊숙하고 자연적인 자신의 본능을 붙잡아 매었던
 
고삐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을 때의 모든 인간들처럼 – 직업적 모방자라고 확신해도 역설은 아니다.
 
그러한 모방은 독창적 창조이다.
 
시간의 근원에 있고 모든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시간 그 자체와 혼동되고 우리 자신과 혼동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어떤 것을
 
불러내고 부활시키고 그리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적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자신을 현재화actualization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
 
리듬은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오래되고 항존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일상어보다 앞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 할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런 중력의 법칙에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또한 사유가 언어인 한에 있어서, 사유도 동일한 매혹을 경험한다.
 
사유를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리듬으로 돌아간다.
 
이성은 교감으로 변화되며, 삼단논법은 아날로지로 변환되고
 
이성적인 행진은 이미지의 흐름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산문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시대에 속한다.
 
반면 산문은 특정사회의 고유한 표현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시는 진보나 진화를 무시하며, 시의 기원과 종말은 언어의 기원이나 종말과 혼동된다.
 
원래 비판과 분석의 도구인 산문은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시가 닫혀진 질서처럼 보이는 반면에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의 모습이 되려고 한다.
 
발레리는 산문을 행진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다.
 
산문이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형상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시는 원형 혹은 구형으로 주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어떤 것, 즉 자족적인 우주로,
 
그안에서 종말은 되돌아 오고, 반복되고 재창조 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가 다름아닌 리듬이며,
 
밀려갔다 밀려오고,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수(潮水)이다.
 
산문의 작위적 성격은 산문작가가 언어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마다 증명된다.
 
시인, 혹은 음악가의 방법처럼 언어의 흐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언어에 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힘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자마자,
 
산문작가는 합리적 인 사유의 법칙을 위반하고
 
시의 울림과 교감의 분위기에 진입한다.
 
많은 현대 소설에서 바로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라사키 부인이 쓴 <겐지 이야기>는 끊임없이 산문과 리듬 사이에서,
 
개념과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설의 모호성을 가장 멀리 밀고나갔던
 
프루스트를 연상시킨다.
 
모든 언어적 리듬은 자신 안에 이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완전한 시구를 구성한다.
 
운율은 리듬에서 생겨나서 리듬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양자 간의 경계는 희미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율은 고정된 형태로 결정화 된다.
 
광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마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언어의 간만(干滿)의 흐름에서 고립되면 시행은 소리나는 음격으로 변하고 만다.
 
언어는 산문과 시, 리듬과 담론사이에서 흔들린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에서처럼 정신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며,
 
상호적이고 상응적이다.....모든 것은 상형문자이다....그리고 시인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즉 번역자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혁명적 시로 평가받았다.
 
그것의 주제는 단순히 냉혹한 근대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적 질서에서 모범을 찾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엘리엇은 근대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적 질서를 대립시켰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를 다시 수용하고 변화시켜서 이교도들의 오래된 풍요의 제식에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독교적 가치의 세계, 그것의 중심은 천국과 지상과 지옥 사이의 보편적 아날로지
 
혹은 상응인데, 이러한 세게가 사라진 뒤에 인간에 남은 것은 사유와 이미지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연상뿐이다.
 
근대세계는 의미를 상실하였고 그러한 방향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언은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리듬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념들이 일으키는 연상의 자동성이다.
 
<황무지>의 반대편에 <신곡>이 있으며 바로 앞의 선례는 <악의 꽃>이다.
 
<악의 꽃 의 원제목이 ‘지옥의 변방limbos' 이었으며, 엘리엇 자신의 말에 의하면
 
<황무지>가 표상하는 것은 지옥이 아니라 연옥이라는 것을 새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근대의 위기 앞에서 엘리엇과 파운드는 과거로 눈을 돌리고 역사를 현재화 하였다.
 
즉, 모든 시대는 바로 이 시대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다시 세우기를 원했고, 파운드는 과거를 다른 형태의 미래로 이용하였다.
 
실상 파운드는 언제나 미국인이었고 유토피아를 꿈꾼 휘트먼의 적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가치와 미래는 동의어였다.
 
즉, 미래를 담보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막 태어나서, 현재 저 너머의 아직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빛을 띠고
 
반짝이는 모든 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파운드의 해박함은 정복을 위한 탐험 뒤에 치러지는 잔치이고
 
엘리엇의 해박함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준거의 탐색이다.
 
즉,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에서 불변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파운드의 작품은 우리를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은 여행이며
 
엘리엇의 작품은 조상의 집을 찾는 탐색이다.
 
파운드와 엘리엇-반역에 반역하는 자들, 불가능한 지중해적 전통을 찾는 이단자들-
 
과는 달리 예이츠는 결코 자신의 전통을 거역하지 않는다.
 
기이하고 예사롭지 않은 사유들과 시학들의 영향은 그가 핵심적인 낭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신화, 힌두교의 신비주의, 그리고 프랑스의 상징주의는 서로 유사한
 
음조와 의미를 지닌 영향들이다.
 
이러한 모든 흐름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확신한다.
 
그러한 모든 흐름들은 그리스도와 로마 이전의 잃어버린 전통과 지혜의 상속을 요구한다.
 
결국, 그런 흐름들에는 오직 시인만이 읽을 수 있는 기호들로 수놓인 하늘이 비친다.
 
아날로지는 시인의 언어이다.
 
아날로지는 리듬이다.
 
예이츠는 블레이크이 계보를 잇는다.
 
엘리엇은 다른 박자의 시간을 가리킨다.
 
예이츠에게서는 리듬의 가치가 위의를 차지하고, 엘리엇에게는 개념적 가치가 상위이다.
 
시인의 불행은 하나의 미학을 세웠는데, 그것은 에외, 즉 불규칙한 아름다움이 진정한
 
전범이라는 미학 위에 세워졌다.
 
꿈과 현실 사이의 상응을 강조하고 자연을 상징들의 책으로 일괄성있게 바라보는
 
독일적 사유의 전염성은 관념의 영역에서만 제한될 수 없다.
 
만일 말이 우주의 닮은 꼴이라면, 언어는 정신적 경험의 장이다.
 
관념이란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일련의 사라지기 쉬운 형태,
 
즉 시간적 정렬을 통하여 시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실재이다.
 
언제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관념은 총체적으로 관조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 즉 귾임없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의 프리즘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은 세분화된 관념이다.
 
우리의 이해는 부분적이며 연속적이다.
 
시적 세계
 
루벤 다리오-
 
모데르니스모 시학은 그 시대의 잔재들을 벗어버리고 고티에의 조각적 이상주의와
 
상징주의 음악사이에서 망설인다.
 
다리오는 “나는 내 스타일이 찾지 못하는 형 形을 좇으며 내가 찾는 것은 다름아닌
 
도망치는 말이다....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흰 백조의 목“이다.
 
우주의 ‘최상의 통일성은’ 리듬에 있다.
 
시인은 소라고둥에서 “깊은 해저음과 신비로운 바람소리”를 듣는다.
 
“소라고둥은 심장의 형태와 같다.”
 
음악과 색채, 리듬과 관념의 상응이며 보이지 않는 현실과 운율을 맞추는 감각의 세계이다.
 
그 중심에는 “절반쯤 벌어져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응시키는 관능적 장미”같은
 
여인이 있다.
 
시인의 사명은 세계와 감각과 정신 사이에 다리를 만들기 위하여 창조의 리듬을 듣는 것,
 
그러나 동시에 보는 것이며 만지는 것이다.
 
이미지
 
이미지는 상상적 결과물이다.
 
시적 이미지란 수사학에서 말하는 비교, 직유, 은유, 말의 유희,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등으로 불리우는데 이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는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하므로서 물의를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 사유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다고 말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고,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변증법적 입장에서 볼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고,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순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은 그러하지 않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어떤 시인들은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들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를 발전시키고자 제안했다.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상보성이 원리는 많은 이미지들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모든 이미지를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도 선언한다.
 
각각의 용어가 갖는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이러한
 
화해는 아직껏 서양 사유가 뛰어넘지도 뚫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벽이다.
 
동양적 사유의 발견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확연한 경계를 그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낸 최초의 구분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념 위에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들’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서양의 역사를 가능케 한 이러한 관념의 건축물은 그런 원리를 통하지 않고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처단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비주의와 시는 종속적이며 은밀하고 왜소한 삶을 영위해 왔다.
 
그 추방은 끔찍한 것이었으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시를 추방시킨 참혹한 결과는 날마다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다.
 
즉, 인간은 우주적 운행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마침내 유아론에 닻을 내리고 만 사실을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유아론을 깨기 위해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시도가 사유의 건강성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견고한 변증법의 유리성은 결국 거울의 미궁임이 드러났다.
 
훗설의 관념론 역시 유아론으로 끝났다.
 
하이데거도 파르메니데스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며 존재를 고착시키지 않는 해답을
 
찾기 위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실존에서 존재를 발견하려는 그의 시도가 벽에 부딪혔음은 알려져 있다.
 
마지막에 그는 시로 돌아갔다.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즉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라고 볼수 있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 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서양은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동양적 사유는 ‘타자’에 대해서, 존재이며 동시에 비존재인 것에 대해서
 
서양이 가지고 있는 공포감을 갖지 않는다.
 
서양적 세계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세계이며,
 
동양적 세계는 ‘이것 그리고 저것’ 심지어 ‘이것이 저것’인 세계이다.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에서도 상반되는 것들의 통일성의 원리를 확실하게 긍정하고 있다.
 
“너는 여자다. 너는 남자다. 너는 노인처럼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다....
 
너는 사계절이며 물결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긍정을 “네가 바로 저것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압축하고 있다.
 
이러한 명제는 위대한 불교철학자들과 힌두교 철학자들이 숙고를 거듭한
 
한결같은 주제였다.
 
도교도 똑같은 경향이 보인다.
 
모든 교리들이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은
 
상대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것이지만, 배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장자는 상반되는 것들의 기능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것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저것의 작용으로 존재한다.
 
이것과 저것의 상호의존성의 원리도 이러하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이다.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한 긍정이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에 의지하려 한다면 저것을 부정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의 긍정과 부정을 함께 내포한다.
 
즉, 이것 안에는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다.
 
고로 진정한 현자는 이것과 저것을 버리고 도에 귀의한다.“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이 합일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이존에도, 이후에도 있지 않고, 시간의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있지 않다.
 
그 순간은 유아기 때 혹은 태어나기 이전의 낙원이 아니며, 이세상 너머의 천국도 아니다.
 
그 순간은 직선적 시간의 왕국, 즉 상대적인 대립물들의 왕국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속에 있다.
 
그 순간은 매 순간이다. 그순간은 생성하고 흘러 넘치면서 끊임없는 새로운 시작인
 
죽음을 향해 열려있는 시간 그 자체이다.
 
분출, 샘, 실존의 한 복판에서, 혹은 살아잇는 매 순간의 한가운데에서 돌과 깃털,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것,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도상에 있고, 어느새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 할 수 있게 된다.
 
靜中動이며 滿中虛. 텅빈 충만.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신 이전에
 
우파니샤드는 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 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하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인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것의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과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너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뒤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인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陰陽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의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채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 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인 앎은 말로 전달 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햇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知不知)이다.
 
그래서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도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도를 도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 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논리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립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도덕경)
 
결국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 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이란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바는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때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如如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 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루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이다. 작품세계의 풍경은 실제 세게의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 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시는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이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덜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자신을 기억해 준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어버렸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깊숙히 숨어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하여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시심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달리 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시는 산문이나 의사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시키지만 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즉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말과 사물사이 에서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
 
 
다시말하면,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
 
언어는 이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다.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
 
언어는 가리키며 표상한다.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면, 단지 ‘보여줄’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성취한다. 고로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자체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고 현실을 문자 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 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 연금술적 작용이다.
 
그래서 시는 ‘이사람’ 과 ‘저사람’을 변화시켜 자기 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 종교, 그리고 그 밖의 체제들과 접해왔다.
 
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
 
항성, 눈물, 신발, 전차, 수양버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소통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은 마침내 그의 욕망 –그 자신-을 실현시킬수 있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이다.
 
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
 
시는 ‘존재로 들어가기’이다.
 
활과 리라 제2부
 
시적 계시
 
피안(彼岸)
 
 
인간은 그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인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스스로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시 낭송은 축제요 교감이다.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 용어와 뒤섞이고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과 가까워진다.
 
이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 시적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은 우리가 흔히 인간존재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성이나 윤리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하는 모든 것은 , 그 옛날 소위 원시인
 
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재(實在)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태도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 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제에 대하여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마법, 신성, 변화, 도약
 
프레이저는 ,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하여 취하는 가장 오래된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었다고 믿었다.
 
또한 유사과학이라고 믿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앗다.
 
한편 레비-브롤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前논리적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그것은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 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라는 것은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 거의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신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비단 시인, 광인,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축제 혹은 사회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 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원시적’이란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다.
 
제의, 축제, 신화, 전설등 ‘물질화’ 되었다고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상화 되고 사물화되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제도 뿐이라는 것이다.
 
축제에 참석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위하여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 현상으로 포용해야할 것이다.
 
그 경험은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포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이나 스페인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경의 중국 선사 혜능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반야심경)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지혜-피안-도달의 뜻이다. ...마하란 무엇인가? 크다는 뜻이다. 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피안에 이르다(도피안到被岸)의 뜻이다. 차안(此岸)이라고 불리우는 대상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浮沈)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피안에 이름’이다.
 
많은 반야바라밀다 게열 경전들의 끝부분에는 여행 혹은 도약의 개념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오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버린 이여.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비록 영세, 영성체, 각종 성사 혹은 통과의례들이 모두 이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도약’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의례들은 흔히 우리가 막 탄생했거나 혹은 중생했다고 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새이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원초적으로 경험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태아로서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서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번 죽고 한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울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를 우리 속으로 끌어 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 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차안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의 사슬을 끊어 버린다.
 
이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동시에 세게의 모습도 변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 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 버린다.
 
악한이 구원 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찾아 헤매던 것으로부터 도망한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흔들어 놓는다. 성聖의 체험은 여기가 기라고 믿게한다.
 
몸은 편재한다. 공간은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질이다.
 
어제는 오늘이다.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시간과 사물들의 그 특이한 존재방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밀고 당기고,
 
고양시키고 추락시키며 움직이고 멎게하는 어느 중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고,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우주는 자장(磁場)으로 변한다.
 
어떤 리듬의 흐름이 시간과 공간을 , 감정과 사고를, 판단과 행위를 각각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하나의 천을 짠다.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구토와 감미가 하나로 역인 천을 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이다. 모두가 현존한다. 모두가 존재하고, 모두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충만 속에서, 요행으로 믿었던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 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로렌초는 태양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타버린 잔혹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한다.
 
낯설음이란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은 소위 ‘명백함의 땅’이
 
우리 눈앞에서 두쪽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
 
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
 
이 가공스러움은 세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1) 성스러운 공포이다. 이것은 특별한 공포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2) 현존 혹은 출현의 위엄이다.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3)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 번째로 등장한다.
 
 
우리를 전율케하는 신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듯한 놀라움이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성-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 앞에 일깨우는 첫 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무서움으로 느껴진다.
 
무서움 안에는, 뒷걸음 쳐지는 공포와 현존과 합치되고자 하는 매혹이 포함되어 있다.
 
무서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극서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현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이며,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준다.
 
 
보들레르는 잔혹미와 불규칙미에 대한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 미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례를 받은 ‘타자의 육화’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은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매혹에 빠지기 전에 몸이 굳어진다는 테마는
 
신화나 전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장면은 크리슈나 신의 현현이다.
 
비쉬누는 ‘우주의 집’이며. 그가 출현할 땐 삶과 죽음의 모습 등 모든 형태가 뒤범벅되어
 
나타나기에 무서워 보이는 것이다.
 
무서움은, 근접할 수 없는 충만한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한다.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공’이라는 말과 동격이다.
 
실제로,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 번째 움직임의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타자’는 우리의 머리칼을 주뼛쭈뻣 서게 만든다.
 
심연, 뱀, 환희,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괴물, 그리고 이 물러섬에 이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단애의 저 깊은 바닥을 향하여 몸을 숙인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바로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매혹을 느끼다는
 
감정을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서로 합쳐진다.
 
뒷걸음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서 일상이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힌다. 언제 그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 본 그 세계는 그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 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 -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친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없인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인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친밀한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지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 너무나도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
 
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이제 둘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시킬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사랑과 신성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같은 연원에서 흘러나오는 현상들이다.
 
단지 각 존재의 상위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뿐이다.
 
손쉬운 예를 들어보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자의 본성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성스런 음식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본성이나 원초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여인은 지고한 육체적 먹거리이다.”
 
성적 식인에 의해 인간은 변화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종교 행위와 모든 신화,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에서 까지 등장하는 회귀의 개념은
 
사랑의 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인은 우리를 고양하여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원래의 우리에게 돌아가게 한다.
 
떨어지는 것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에 대한 허기는 죽음에 대한 허기이다.
 
에너지의 약동, 분출, 존재의 팽창은 곧 게으름, 우주적 무기력, 무한으로의 전락이다.
 
‘타자’ 앞에서의 낯설음은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존재와의 궁극적 일치와 동일화의 경험이다.
 
신성(神聖)은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사회제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에로티시즘이지만, 성적 충동을 초월하는 무엇이며 또한 사회 현상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세 가지 경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 경험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우너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낯설음과 친숙함, 상승과 하강, 외경과 경배, 거부와 매혹 등 그것이 표현되는
 
상반적인 운동과 그 화해를 엿보고, 우리는 그 운동들의 통일성으로 용해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일까?
 
진정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미래의 나를 앞당긴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그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을 이룬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하이데커가 말한 시간성이나, 마차도가 말한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은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만일 인간이라면, ‘그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는 욕망의 존재이며, 존재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우리는 분리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과일이며 동시에 입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와 시는, 마차도가 ‘존재의 본질적인 이질성’이라고 부른,
 
그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종교적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한다. 그때 우리 자신인 그 ‘타자’가 나타난다.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하지만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반면 종교적 언어는 ,정의 그대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상이성은 종교와 시 사이의 유사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시는 리듬과 이미지로, 종교는 신의 현현과 제식으로,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구체화 되어 갈라지는 것일까?
 
시란 일종의 종교의 혹이거나 또는 신성의 어둡고 희미한 예시인가?
 
 
루돌프 오토는, 신성이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로 구성되는 선험적(a priori)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이성적 요소는 “어떠한 감각적 지각에도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필연적이고, 실체론적 관념인데...이런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버리도록 하며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이성에 속하며 정신 그 자체의 원천적인 성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과 함께 오토는 ‘더 고양되거나 혹은 더 깊은 것을 구성하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神性이나 성스러움, 혹은 神聖이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神聖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이성적 표현은 신성의 본질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성은 통합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그것은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신화에서, 악마적인 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움터 나온다.
 
그것은 숨겨진 것의 발현이다. 동시에, 모든 드러남은 시간이나 공간의 단절을 수반한다.
 
그 상처나 틈새로 우리는 존재의 ‘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두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조란 무의 심연에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현기증이 엄습해 온다.
 
 
종교란 이성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너무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불교의 니르바나(열반涅槃)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는 부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 개념으로, ‘타자성’을 밝히는 진정으로 신성한 상형문자이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종교적 근본인 초월의 개념이 심각한 균열을 겪게 된다.
 
인간은 ‘신의 손끝에 매달린’ 존재가 아니라, 신이야 말로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대상은 항상 내부에 있고, 모든 신비적 경험이 시작하는
 
텅 빔의 다른 얼굴, 즉 긍정적인 면으로 주어진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서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시가 탄생한다.
 
즉, 성스러움은 근원적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한다.
 
숭고함 속에는 언제나 측량할 길없는 미지의 것이 출현할 때의 신적인 공포가 자아내는
 
두려움, 불편함, 마비, 숨막힘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 속에는 에로틱한 힘이 강력히 개입하기도 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신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자아의 기저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는 신에 몸을 맡긴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창작의 순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인간은 놀라는 존재다.
 
인간이 놀랄 때,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찬양한다.
 
사랑에는 놀라움과 시와 신성과 대상에 대한 숭배가 들어 있다.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함을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긴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먼지와 재’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특정적 차이가 이 ‘의존’을 다른 의존들과 구분 짖는다.
 
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죽음 뒤에 이르기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의존은 ‘스스로에게 의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정신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이다.
 
항상 현존하며 결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오토는 이 근원적 감정을 ‘피조물의 상태’라 부른다.
 
이제 중력의 중심이 바뀐다.
 
진정으로 특징적인 것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말은,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리고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스스로 뽑혀서 어느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매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득한 느낌’이 피조물의 상태이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으로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의하면
 
고뇌와 두려움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에 이르는 문을 열고 닫는
 
서로 대립되고 대칭적인 두 개의 통로이다.
 
스스로의 공동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신성함의 경험으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인간존재의 조건인 ‘우연성과 유한성’을 붙잡게 된다.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 터나온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우리들의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부족함으로 인하여, “신성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
 
희생을 통해 신이 우리에게 존재의 가능성을 되돌려 주는 구원과
 
우리를 정화하는 희생인 속죄는 이 근원적인 자격미달의 감정에서 태어난다.
 
종교는 이렇게 ‘죄의식’과 ‘죽을 운명’이 같은 차원의 용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죄는 속죄를 요구하고, 죽음은 영원을 요구한다.
 
죄와 속죄, 죽음과 영원한 삶은, 특히 기독교에서, 상호 완성되는 하나의 짝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양의 종교들은 구원을 약속하지 못했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존재로 상승하거나 무로 추락할 수 있는 힘에는 자유가 포함된다.
 
한편으로 우연은 자유를 생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우연 혹은 원초적 결함을
 
치료하고 순화시키는 가능성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추락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이다.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은총이란 구원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은총에 굴복한다.
 
우리의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간이란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하였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죽음을 죽임으로써, 종교는 삶도 죽이게 된다.
 
영원은 순간을 불모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한다. 우리는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매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종교는 우리로 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우리에게 삶도 빼앗는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종교처럼 시도 인간의 원초적 상황, 즉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
 
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 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시인도 나름의 부정적인 경로로 언어의 가장자리에 닿는다.
 
그 가장자리는 침묵이며 백지다.
 
침묵은 매끄럽고 조밀한 호수와 같다.
 
말들은 그 수면 아래 잠겨 있다.
 
빔 다음에 충만함이 오듯이, 영감은 불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그러나 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시 언어는 이 땅위의 삶을 긍정한다.
 
다시 말해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해, 아킬레스 혹은 장미에 대해,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빛 혹은 파도에 대해, 무엇을 말하거나 간에
 
시적 언어는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이다.
 
실존 그 자체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한다.
 
 
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판단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다.
 
솟구쳐 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이제,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갖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 앞에서 놀라는 것은 , 세게가 낯설고 황량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는 것은 , 세계 속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란 고작해야
 
인간의 존재 가능성이 세계에 부여하는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죽음인데, 애냐면, 인가은 태어나자 마자 곧 죽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낯설고 황량한 곳에 머물러 있는 극도의
 
불유쾌한 상태에 놓여있다.
 
인간의 삶이 불유쾌한 것은 인간이 향해가는 것이 무이며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결핍’ 혹은 ‘부재’는 원천적인 것이지 후천적인 것은 아니며,
 
결핍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다시말해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완2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인간 존재란
 
“현재를 사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 즉 죽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확실히 인간에게 신의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배제되어 있으며,
 
근거없는 결핍과 구원없는 부채가 주어졌을 뿐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태어난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태어남은 이미 죽음을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해석이 가져온 역할을 우리에게 폭로한 하이데거의 분석은 결국
 
우리가 속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만일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그리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하이데거는 스스로 이러한
 
‘비존재’ 즉 인간의 존재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부정적 사실이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혹은 무엇인가 결핍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결핍된 그 어떤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는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킨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러가는 것은 긍정적이다.
 
죽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열려있는 공간, 즉 빔이다.
 
산다는 것이 죽음에 던져져 있음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죽음은 단지 삶 안에서, 삶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태어남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죽음 역시 태어남을 끌어안고 있다.
 
 
삶과 죽음, 존재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다.
 
부정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하이데거가 존재란 무의 체험으로부터 솟아오르거나 혹은 싹튼다고 단언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며, 모든 것이
 
각자 속으로 침잠하며, 모든 것이 표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혼돈으로의 추락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대해 이름을 붙인다면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에 죽음을 끼워 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죽음과 삶을 재 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무를 통해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근거’이면서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인간의 하찮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의 경험
 
사랑의 경험은 대립되는 것들이 순간적이지만 완전하게 합일되는 것을
 
섬광처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합일이 존재한다.
 
하이데거도,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 앞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우리 자신과의 만남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인간의 모든 움직들처럼, 사랑은 ‘찾아가는 것’이다.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의 전존재는 앞으로 향한다.
 
그것은 열망이며,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끝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의 가능성인 어떤 것- 그녀의 출현-을 향한 쏠림이다.
 
기다림은 우리를 잠 못 이루게 만든다.
 
즉, 자신 밖으로 나와서 서성이게 하는 것이다.
 
일 분 전만해도,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정착하여 사물과 존재들 사이에
 
거리를 느끼지 못 할 만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움직였다.
 
이제 초조함과 열망이 증가할수록, 풍경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고,
 
마주선 벽들과 사물들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 속으로 숨으며, 시계는 더욱 느리게 간다.
 
모든 것이 우리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별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세계는 낯선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홀로 있다.
 
기다림 자체도 절망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만남의 희망이 확실한 고독으로 전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없으리라. 아무도 없다. 나 자신 역시 아무도 아니다.
 
우리 발 밑에 무가 열린다.
 
그리고 그 순간에 예기치 않은 일, 이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의 급작스런 출현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기절할 것만 같은 것이다.
 
땅이 꺼지고 말문이 막히며, 기쁨으로 호흡이 멈춘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다.
 
자기 자신 속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던 ,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세계가 갑자기 일어서고, 솟아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향해
 
비상한다.
 
세계는 누군가의 눈길에 의해 자성을 띠게 되고, 신비로운 균형의 상태를 이룬다.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했고, 우리는 난폭한 실존의 벼랑 끝에 놓여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빛을 발하고 의미를 획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를 회복시킨다.
 
더 적절히 말하면, 혼돈 속으로 추락하던 존재를 끄집어내서 새롭게 창조한다.
 
존재는 무로부터 태어난다.
 
그러나 네가 나를 쳐다봐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시 혼돈 속으로 추락하고
 
나 역시 그 속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팽팽한 긴장이며, 심연 위에서 춤추는 것이고, 칼날 위를 걷는 것이다.
 
세계를 푸는 암호, 나 자신을 푸는 암호, 존재의 암호인 너는 여기, 바로 내 눈 앞에 있다.
 
 
사랑은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우리는 태어나면서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사랑은 죽음의 탄생이다. 마차도는 “여인은 존재의 이면이다.”라고 말했다. 여인은 순수한 현존이며 존재는 그 속에서 떠오르며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속에 가라앉으며 숨는다.
 
이렇게 사랑은 존재와 무의 동시적 드러냄이다.
 
그 드러냄은 수동적 드러냄, 즉 연극 공연처럼 우리 눈앞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자연 앞에서의 우리의 행위도 이와 비슷한 변증법을 보여준다.
 
자연을 마주 대했을때 우리가 첫 번째 느끼는 감정은 낯설음 혹은 분리의 감정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실존을 보유하는, 우리와 다른 어떤 것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떨어져 있음은 곧 적대감으로 변한다. 나뭇가지들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 수풀 속에서는 누군가 우리를 엿본다. 모르는 생물체들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비웃는다. 바위는 더 견고해지고 불투명해지며, 사막은 더욱 텅비어 깊이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문을 닫아버린 수많은 실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대한 관조가 지속되고 두려움이 우리를 마비시키면, 우리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정에서 그 반대의 상태로 넘어간다.
 
 
파도의 리듬은 우리 몸 속의 피의 리듬과 박자를 맞춘다.
 
바위들의 침묵은 우리 자신의 침묵이다.
 
숲의 두런거림은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한다.
 
우리는 전체의 부분을 이룬다. 존재는 무로부터 솟아오른다.
 
동일한 리듬이 우리를 움직이고, 동일한 리듬이 우리를 둘러싼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부손이 아름답게 노래한 것처럼 사물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다.
 
 
흰 국화꽃 앞에서
 
가위는 한순간
 
망설인다.
 
 
그 순간은 존재의 통일성을 드러낸다.
 
정중동.
 
죽음은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죽음이 곧 삶이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시적 경험과 인간 조건
 
시적 경험은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이다.
 
그리고 그러한 드러냄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창조로 귀결된다.
 
그 드러냄은 저기 낯설게 있는 어떤 외부의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발견하는 것은 드러나려고 하는 것, 즉 존재 그자체의 창조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란 우리의 실존이 의지하고 있는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아무것에도 의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거는 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존재는 매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붙잡고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의 존재는 단지 존재의 가능성에 근거할 뿐이다.
 
존재란 되어지는 수밖에 없다.
 
존재의 원초적 결핍-수동성의 근거-은 존재로 하여금 자신을 넘치거나, 혹은 충만하게 창조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창조하도록 던져져 있다.
 
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간 조건의 힘이 근거한다.
 
결국, 우리의 원초적 조건은 단지 부족도 아니고 넘침도 아니며, 가능성이다. 인간의 자유는 가능성에 근거하며 그곳에 뿌릴르 내리고 있다.
 
그런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 가는 인간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우리의 실존이 존재하며, 실존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 조건이 의탁할 곳 없이 버림받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정복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그러한 비전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인간의 조건을 초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은 초월을 요구하며, 우리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또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일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시적 창조는 그런 가능성 중의 하나이다.
 
 
시가 긍정하는 것은 몽테뉴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죽음을 예비하는 것’도 아니며, 실존적 분석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죽음을 위한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실존은 우리의 조건인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반대되는 것들의 화해 가능성을 포함한다.
 
삶을 최고로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비극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죽음을 산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브르통이 말하는 그러한 상태, 즉 ‘삶과 죽음, 실제와 상상, 과거와 미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모순되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영원한 삶도 아니고, 시간 밖에 저기에 있는 삶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며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대립적인 것을 껴안도록 운명 지어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태어났을 때 이미 자신안에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인간이 그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타자들을 나타내고 타자들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과업이며 시인의 과업이다.
 
 
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비할 바 없는 삶의 생동감’이라고 칭하엿던 것을 엿보게 한다.
 
시적 경험은 존재의 샘을 여는 것이다.
 
한 순간이며 결코 어느 순간도 아닌 순간,
 
한 순간이며 영원한 순간,
 
과거이며 미래인 현재의 순간,
 
한 순간에 태어나고 죽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이며 죽음이고, 이것이며 저것이다.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적 계시는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이다.
 
반대로, 시는 인간 조건의 계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한 인간 창조가 된다. 계시는 창조이다.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즉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서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이다.
 
인간을 세우고 인간 스스로를 드러내주는 행동은 시이다.
 
시는 모든 생명이 품고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시는 인간을 재창조하며, 삶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분열적인 모습이 아니라 백열의 단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이 총체가 되는 인간의 진실한 조건을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영감
 
 
우리의 존재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언어적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 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시는 언어의 경험이라고도 말 할 수 있는데,
 
그 시적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런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시인은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의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거침없이 글을 써나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는 부인 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글을 쓰는데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 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들어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들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을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 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타자의 의지의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 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 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에서 말하길 ‘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졸르 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멋진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그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 모방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개념은 다소간 신비적인 물활론에 의해 영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했다. 따라서 시적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내부에서 끄집어 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 존재한다. 천사,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하게 한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근대적 직관주의는 외부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엿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세게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엿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게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에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외부현실은 하나의 대상 ,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 온다.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인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극서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그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을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은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서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들의 싸움터였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 인가의 본성 속에는 시적창조를 가능케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 부르기로 이루어진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능력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 밖에는 존재치 않았던 것-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하였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이하 삽입>
 
 

 
김 춘 수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하여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하여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여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사랑, 기쁨, 고뇌, 권태, 고독, 향수, 분노-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 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다른 목소리
 
초현실주의는 신, 자연, 역사, 인종 등의 외부요인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함으로서, 시인의 저항과 추방을 멈추게 만들었다. 영감은 인간 속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며, 인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위대한 발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종종 ‘방심’ 우연, 부주의 등이 끼어든다는 것이 밝혀졌다. 브르통은 명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에 매혹되어, 인간과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타자성의 선택된 장으로서 ‘객관적 우연’이라 불리우는 신비한 메카니즘을 규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찾거나 혹은 찾는 것을 멈출 때, 여인, 이미지, 수학이나 생물학적 법칙들이 그 모든 신대륙의 대양의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이 교차하는 자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전부다. 우리는, 세심한 주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솟아나오는 것을 안다.
 
 
데쟈뷰 현상
 
그는 여전히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서, 다시 듣고, 기억해 내는 것 같다. 타자성의 느닷없는 출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들어본 일이 있으며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 잘 알수 없다는 브르통의 고백이 나름대로 타당함에 주목한다.
 
 
시적 창조란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말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혹은 이 반대로 어떤 특수한 순간에 시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말들이 돋아 나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마음 깊은 곳’이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 별과 뱀과 보석과 맹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부동의 경직된 존재는 더욱 아니다.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 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 때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매일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 내야한다.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 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하여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과 목소리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게 아니다. 그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해서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우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모든 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 즉 인간과 인간의 언어와 세계를 쉬지않고 파괴하고 창조하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끊임없는 ‘타자성’을 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사적이며 공동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무엇을 말한다.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그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이 자유는 좀 더 충만해지기 위하여 우리 자신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저 너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있다.
 
 
인간은 세상을 자화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를 겨냥해야하나?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이 되기 원하며, 그의 존재는 그를 항상 자신 너머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 헛발을 짚고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존재이기를 상상하지만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타자와 조우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 고유한 존재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인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그때, 도약의 절정에서, 인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작렬하는 한 순간, 그는 순간적인 충만과 충만한 존재로의 생성 속에서 동시에 이것과 저것,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 삶과 죽음이 된다.
 
 
마차도가 말하길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에로틱한 의미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우리들의 존재 속에 갈증과 ‘타자성’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다른 몸, 다른 존재-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신에게서 꺼내는 이상한 목소리이다. 존재는 다름아닌 존재의 욕망이기에 욕망의 목소리는 존재 자신의 목소리이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 자신인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명사들은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끝이고 한계이며 모든 언어를 양육하는 비밀스럽고 언명 불가능한 다른 대명사의 변조이며 굴절어이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 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3부
 
시와 역사
 
순간의 성화
 
 
시편은 철저히 역사적 말의 짜임이며 동시에 모든 역사적 시점 이전의 행동, 즉 모든 사회적 혹은 개인적 역사 이전의 원초적 행위이다.
 
시적인 말은, 사회적 생산물이며 또한 모든 사회의 실존에 앞서는 조건이라는 상호보완적이고 분리불가능하며 모순적인 두 개의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말의 기원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과거에 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현존해 있으면서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적 시점의 과거가 아니며, 엄격히 말해 과거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를 갈구하며 시간 위에 부동(浮動)하는 시간적 범주다. 그것은 누군가가 육운각의 시를 낭송하자마자 다시금 발생하는 어떤 것이며, 끊임없이 시작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역사는 시적인 말이 육화하는 장소이다.
 
 
시편은 원초적 경험과 그 뒤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의 중재이다. 즉, 그 행동과 경험들은 시편이 성화하는 원초적 경험의 관계에서만 일관성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수학자의 공리, 물리학자의 진리 혹은 철학자의 개념과는 달리, 시편은 경험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살아있고,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가득 찬 순간이며, 동시에 다른 순간에 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자신의 빛으로 새로운 순간들, 새로운 경험들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safo자신이나 그녀의 사랑은 되풀이 될 수 없으며 역사에 속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편은 살아있으며, 리듬 덕분에 무한히 새롭게 육화되는 시간의 파편이다. 그것은 스스로 충만한 세계이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인 유일하고 원형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편이 되기 위해서 시편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하고, 역사 속에서 육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모든 창조처럼 시편은 역사적 생산물 즉 시간과 공간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역사 이전에 있지만, 그러나 역사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원형적 실제이며, 영원한 시작이며, 총체적이고 자족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이전이다. 한편 단지 시적인 교감의 순간에만 육화되고, 새롭게 육화되면서 반복되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 안에 있고 더 나가서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결론적으로 시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역사적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생산물로서 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창조물로서 이지만, 이것이 진정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편이 다시 역사 속에서 육화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법은 특별한 시간적 범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잠재적이며 영원히 현재인 시간이며, 한정된 바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현재화됨으로서만 실현되는 시간이다. 시편은 원형적 시간이다.
 
 
시편은 영원한 현재의 물을 퍼내며, 그 현재는 동시에 가장 먼 과거이며 가장 가까운 미래이다.
 
즉, 시편은 역사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시키며, 그러한 원형을 다시 특정한 역사적 현재로 육화한다.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 본래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존재 방법이다.
 
 
이미지와 리듬에서 다소간 투명하게 드러나는 계시는 언어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보다 앞서 있으면서 시편의 모든 언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 어떤 것이란 인간의 최종적 조건이며, 건드리자마자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면서 쉼 없이 인간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운동,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운동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러한 계시는 언제나 시편으로 육화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언어로 육화된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시적 교감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적언어는 결코 완전히 이 세계에 속하는 적이 없이, 언제나 우리를 저너머 다른 땅으로 다른 하늘로 다른 진실로 데려간다. 시가 역사적 중력의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시의 언어가 결코 온전히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즉, 이미지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한다. 심지어는 ‘이것이 저것’이라고 말한다.
 
 
시적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매순간 인간은 총체로 실현되기를 원하며, 각각의 그러한 시간은 순간적 영원성의 기념물이 된다.
 
자신의 시간적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 속에 더 완벽하게 함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과 융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영원한 삶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일하며 한 번 뿐인 순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에 기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타자가 되도록 이끈다. 타자가 됨으로서만 인간은 충만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시적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이다. 만일 자유가 존재의 운동으로서 인간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것이라면, 그 운동은 늘상 무언가를 지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일정한 가치나 경험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스 연극의 유일한 주제는 신성모독, 즉 인간의 자유-자유의 한계와 고뇌-이다. 우주적 정의와 인간의지 사이의 투쟁, 영웅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갈등과 최종적인 화해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은 존재와 인간 자체에 대한 계시이다.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운행이나 신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맹목적인 소립자처럼 우주 속에 매몰되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이란 우주를 구성하는 일부분이지만, 인간과 우주의 관계는 자유이다. 이러한 양의성에 인간 존재의 비극적 성격이 존재한다. 다른 어떤 민중도 이처럼 과감하고 훌륭하게 인간조건을 드러내지 못한다.
 
영웅적 세계
 
호메로스의 주제는 트로이 전쟁이나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라기보다는 영웅들의 운명이다. 영웅들의 운명은 신들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또한 우주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종교적 주제가 된다.
 
영웅은 두 개의 세계-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가 합류하며 투쟁하는 장소이다. 영웅의 본질은 두 세계의 투쟁이다. 모든 비극은 영웅의 서사적 개념 속에 고동치고 있다.
 
제거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특징이 알아낸 것은 사물의 내재적 합법성에 대한 의식이다.’
 
 
이러한 관념은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우주적 법칙, 충동, 리듬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역동적인 총체의 개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을 그러한 총체성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부분으로 보는 관념이다. 이것은 사실 모순적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유명한 단편은 우주적 합법성의 관념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법칙에 의하여, 사물들은 상호간의 부정에 의하여
 
저질러진 죄를 속죄하고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이것은 존재를 정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솔론의 정치적 세계와 유사한 우주로 보는 비전이라는 점이다. 정치적 정의와 우주적 정의는 사물들의 본성에 근거하는 법칙이 아니며,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호간의 운동 속에서 상생 상극하는 사물들 자신들이다. 이렇게, 정의는 우주적 질서, 존재의 자연적인 운동, 도시의 정치적 움직임-서로의 과도함을 응징하면서 이해와 열정의 자유로운 유희를 하는-과 동일시된다. 다시 말해, 정의와 질서는 존재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조화, 운동, 혹은 대립물 사이의 주기적인 충돌이며 또한 그들의 조화, 운동 혹은 정연한 춤이기도 하다.
 
 
 
영웅들과 신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주, 즉 살아있는 총체이며, 그것의 운동은 정의, 질서, 운명이라고 불리운다. 탄생과 죽음은 이러한 생생한 조화의 협주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음표이며,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나타난다. 위태롭다고 한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가 합류하는 장소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이고 우주적인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죄악인 휘브리스(hybris: 모이라를 넘는 초과를 뜻한다)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의 오만함, 아이아스의 시기심은 휘브리스의 파괴적인 힘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총체적인 자연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도 우주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영웅의 광기나 병약함은 우주 전체로 전염되어, 하늘과 땅을 위태롭게 한다.
 
절제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각자가 차지하는 공간이다. 자신을 초월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의 한계를 위반하는 것이며, 동시에 타인들과 타존재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절제를 깰 때마다, 우리는 우주 전체에 상처를 내게된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존재의 비전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킨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는 ‘사물들은 자신의 과도함을 속죄한다.’ 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언급에서 이미 그 싹을 보이고 있다. 세계는 휴식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존재를 생성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인간을 우주적 투쟁이 전개되는 장소로 여긴다. 인간이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는 인간은 지상과 천상의 모든 힘들이 서로 어울려 투쟁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자유는 인간의 특질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이해하여야 한다. 인간의 신비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의 한 매개체, 즉 거대한 협주곡의 화음이며, 또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불협화음이다. 그리고 의식은 존재의 리듬과 화음을 이룬다. 운명의 신비는 그것이 자유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자유가 없이는 운명도 완수되지 않는다.
 
 
 
 
운명과 자유
 
아이스킬로스는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의지가 참여하는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하였다. 고통, 불행, 재난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를 초과하려는 , 다시 말해서 각자가 위치하는 영역의 극한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 너머로 감으로써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형벌이다. 절제란 각자가 위치하며 살아가는 공간인데, 이를 넘어감으로써 불협화음, 무질서, 혼란이 일어난다. 그의 연극에서 운명이 슬프고 암울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거가 살라미나 병사의 ‘문제적 긴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고통이 운명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때, 그러한 긴장은 누그러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인간은 우주적 정당성의 비전에 닿게 되고, 그의 불행은 만유의 조화의 일부분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형벌을 감수하면, 인간은 전체와 화해해도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외침은 고통은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역시 비극적 행위가 운명이 갖는 우월한 힘 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의를 완수함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참여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겪음으로서, “어떤 인간도 풀 수 없는 스핑크스의 신비를 받아들이라.”라고 말하는 비극적 비전에 이르게 된다.
 
비극이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적인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드리는 일이다. 인간의 기질은 운명 안에서, 운명에 대항하여 정련되는 것이며,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인간의 자유는 외적 숙명과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웅이 운명을 비극적으로 수락함으로써, 합창단은 오이디프스에게 “너를 쓰러뜨린 신들이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소포클레스의 이 말은 프로메테우스의 절규에 대한 대답이 된다. 즉, 운명을 인식하게 되자마자, 고통은 변질되고 멈추게 된다.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도 운명이 사물의 내재적 정당성의 표현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우주적 법칙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의식의 구원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의식이란 우주를 다스리는 힘들에 대한 뛰어난 직관이라고 인식했다.
 
운명과 자유라는 모순되면서 상보적인 두 개의 단어 덕분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세계는 세계일 수 있다. 비극성은 이가적(二價的)대립물을 동등하게 보며 절대적으로 긍정하는데서 연유한다.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 운명은 인간을 파멸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오는 프로메테우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를 왜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크게 만든다. 그들로 인하여, 그들 안에서 존재는 완수되고 혼돈은 재발되지 않는다.
 
가혹한 운명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에게 만유적 질서의 빛을 던져주는 유일한 것은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자유와 운명은 서로 대립되며 상보적인 단어이다. 그것의 신비는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아모레 파티-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우주적 합법성의 신성함과 정의로움에 관해 감히 터놓고 질문한 첫 번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존재의 영역을 버리고 도덕적 비판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과오는 이제 객관적 저주가 아니고, 주관적이며 심리적 개념으로 변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영웅들은 우리에게 운명은 제정신이 아니며, 변덕스럽고,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운명의 정의로움을 부정하자마자, 고통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혼란이 찾아온다. 운명의 침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자신 안에 숨거나 혹은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 개인적인 신비, 정치적 유토피아는 객관적 적법성을 상실한 세계가 나아갈 수 있는 출구이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에우리피데스의 대답은 양면성을 지닌다. 즉, 운명의 신성함을 부정하고 인간의 결백을 주장한다. 운명에 대한 그의 주장은 비극적 갈등을 부순다. 왜냐하면 맹목적 우연이나 열정의 희생자가 되는 것과 우주적 정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결백한 것은 그의 과오가 실제로는 자신의 과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뛰어난 의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있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우리는 결백하면서 죄인이다.
 
 
세 사람의 위대한 비극 시인들에게서, 운명과 인간의 의식이라는 적대적인 이가적 대립물 중의 하나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없는 갈등이 확연해진다. 비극을 인간의 가장 뛰어난 시적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갈등에서 충만되고 심오하게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 즉, 기본적인 인간조건의 드러남이다. 인간은 운명, 숙명, 자연, 역사, 우연, 욕구, 혹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을 자신의 너머로, 자신의 한계너머로 데려가는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구별 짓는 차별적 특성과 인간 존재의 신비는 이러한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의 위대성은 이러한 개념에 도달했다는데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가적 대립물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육화시켰다는 데 있다. 극도의 광기와 일탈 속에서도 비극적 영웅들은 의식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의 존재를 조건 짓는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한다. 우리는 진실로 자유로운가? 우리는 죄인인가? 무자비한 신들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운명은 신성한가? 정의란 무엇인가?
 
 
비극시인들은 가장 성스러운 행동들과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까지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스핑크스로부터 테베를 구했을 때 오이디푸스는 파멸한다.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 오레스테스는 우주적 질서를 재건한다. 비극은 신성모독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이며 예매한 가치-구원하고 벌하며, 벌하며 구원하는-에 대한 검토이다. 영웅들이 모두 파멸하는 것은 성스러운 한계, 즉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을 맨 처음으로 안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이다. 운명은 인간의 자유에 의존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는 운명의 인간적 차원이다. 인간이 없이는 운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주적 질서는 깨진다.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무익한 열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운명이 갖는 여러 얼굴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없으면 숙명도, 조화도, 우주적 건강함도 없을 것이며, 세계는 붕괴될 것이다. 비극은 우주와 인간의 이미지이다. 비극은 이가적 대립물의 원리로 존재한다.
 
모든 비극적 행동, 모든 갈등은 한 가지로 환원되는데, 그것은 자유라는 필연성의 조건이다. 이것이 비극의 독창성이며,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이다. 그리스인에게 삶은 꿈도 악몽도 그림자도 아니고, 자유와 운명이 얽혀 풀리지 않는 매듭을 엮어내는 무훈이다. 그 매듭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자유에 의존하는 운명은 만유의 리듬이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 정의가 표명된 것인데, 정의는 상과 벌, 선과 악이 아니라, 우주적 화음이다.
 
유한하며 늘고, 병들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심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에 의해 선택된 주체이다. 그러한 선택은 인간의 수락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우주를 진동시키고, 그의 행위는 삶의 과정을 회복시킨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육화되지 못한 언어
 
 
소설과 연극은 비판적 정신과 시적 정신 사이에 상호개입을 가능케하는 형태이다. 특히 소설은 그러한 개입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소설의 본질자체가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정시가 노래하는 것은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은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열정과 경험들이다.
 
‘저주받은 시인들’은 낭만주의 산물이 아니라, 동화되지 않은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상상력은 이성의 기초이며 상상력의 기초 위에 세워진 이성은 인간에게 인식과 판단을 가능케 한다. 더 나아가서 콜리지는 상상력을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인식을 상징과 신화로 표현하는 능력으로 여겼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상력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최상의 앎이다.
 
 
“상상력은 존재의 형상이거나 진실로 지금-여기의 유일한 지식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상상력의 상징적 표현일 때만 실제적이다.” 원래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던 상상력과 이성은 상징적 표상, 즉 신화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는 자명함 속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상상력은 원초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인데, 신화와 상징을 통하여 최상의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콜리지는 시는 스스로를 비판하는 정신의 경쟁적 원리이며, 또한 과거의 신성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설명한다. 시는 종교의 진리가, 억압적 강요와 가면적 은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서 숨쉴 수 있는 태초의 원리가 된다.
 
 
노발리스는 “종교는 실천적 시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종교란 생활 속에 육화된 시라는 뜻이다. 그는 콜리지보다도 한층 더 용감하게, 시는 인류의 원초적 종교“라고 확신했다.
 
시인의 임무는 사제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빗나간 태초의 말을 재건하는 것이다. “감옥은 율법의 돌들로 만들어 졌으며, 유곽은 종교의 벽돌로 만들어졌다.” 블레이크는 감옥을 부수고 교회로부터 신을 구출해낸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노래했다.
 
 
인간의 적은 우리젤(이성)이라고 불리우는 ‘조직의 신’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갇혀있는 포로이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 즉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본래적인 인식기관은 감각도 아니고 추론도 아니다. 양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최종적 본질인 끝없는 욕망에 대립된다. “그 무엇도 인간을 만족 시킬 수 없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인간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로 육화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사랑의 무아경은 인간이 이미지로 육화된 것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 즉 신화이다.
 
 
블레이크는 그의 예언적 시집들에서 인간의 역사를 신화적 이미지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 중인 역사이며,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로 종결되는 역사이다. 그의 위대한 시들은 상상력의 역사, 즉 태초의 아담이 겪는 흥망성쇠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신화적 역사이며, 성경이고, 기원의 책이다. 모든 시간에 앞서는 원형적 시간을 드러내는 원초적 과거의 계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인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예언하는가? 그것은 율법이 말하는 죄의 무거움을 극복하고, 본성을 회복한 인간의 도래이다. 죄로부터 가벼워진 인간은 하늘을 날며, 천개의 눈과 불타는 머리칼을 지녔으며, 만지는 것마다 입맞추고, 사유하는 것마다 불태워버린다. 그는 이미지이며 행동이다. 욕망과 욕망의 실현은 동일하다.
 
 
그리스도와 아담은 서로 화해하며 우리젤은 구원된다. 그리스도는 ‘끝없이 에너지를 훔치는 도둑이 아니라, 팽팽하게 긴장되어 행동을 향해 발사된 에너지 그 자체이다. 상상력은 욕망이며, 욕망은 행동이다. “에너지, 영원한 무상의 기쁨” 시인은 성경의 오류를 씻어내어 죄라고 읽혔던 곳에 무죄라고 쓰고, 권위의 자리에 자유를 쓰며, 영원이라고 씌어졌던 곳에 순간을 쓴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욕망과 상상력은 그의 날개이며, 손에 닿는 곳에 있는 천국의 이름은 과일, 꽃, 구름, 여자, 행동이다.
 
 
‘영원은 시간의 작품들을 사랑한다.’ 블레이크가 예언한 왕국은 시의 왕국이다. 시인은 다시 예언자가 되며 그의 예언은 시적인 말이 초석을 이루는 도시의 건설을 선언한다.
 
노발리스의 교감은 구체를 이루는 두 부분의 화해이다. 사랑의 밤과 동일한 죽음의 밤에 그리스도와 디오니소스는 하나가 된다. 위대한 시적 흐름들이 교차하는 자력을 띤 지점이 있다. 죽음은 밤이며 질병이며 기독교적이면서 동시에 에로틱한 포옹이고 ‘바위가 살로 변하는 축제’이다.
 
향연에서 나누는 빵은 빛나는 시의 빵이다. “우리는 빛의 포도주를 마시고 별이 될 것이다.”라고 노발리스는 말한다. 시의 교감인 독일 낭만주의의 만찬은 블레이크의 예루살렘에 대한 응답이다. 블레이크와 노발리스의 비전에서 우리는 아담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인 최초의 인간을 찾아서 시간의 기원으로 내려간다. 그들에게서 ‘가장 고양된 육체적 양식인 여성’은 중개자이며 구체를 이루는 두 부분이 조약을 체결하는 피안에 이르는 문이며,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들과 하나가 된다. 낭만주의적 밤에 “모든 것은 환희이며, 모든 것은 영원한 시편이고, 우리를 비추는 태양은 신의 장엄한 얼굴이다.” 밤은 태양이다.
 
 
시는 이중적 얼굴을 갖는다. 즉,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위대한 선구자들인 휠더린, 블레이크, 네르발의 태도는 더욱 확실하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디오니소스이며 악마이고 오르페우스다.
 
모네로는 근대시의 역사를 영지주의파의 역사와 신비주의 전통을 유지한 자들의 역사와 비교하였다. 우리시대에 가까운 시인들인 예이츠, 게오르게, 릴케, 부르통은 말할 것도 없고, 네르발, 위고, 말라르메 같은 시인들에게 두루 미친 연금술 철학과 영지주의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근대 시인은 고독하다. 그들은 추방된 자들이다.
 
 
시인의 사회적 실존이 상실되어가고, 시인의 작품이 공적으로 유통되는 일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시인에게는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의 절반과 접촉하는 일이 증가되었다. 근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중적 시의 유행, 꿈과 섬망 상태에 의지하는 일, 우주의 열쇠로 아날로지를 채택하는 일,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 신화로의 복귀, 밤으로의 하강, 원시예술에 대한 애정 등은 모든 잃어버린 인간을 찾는 편력이다. 자신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실존을 박탈당하고, 돌과 돈으로 만들어진 도시를 떠도는 유령인 시인은 팔짱을 낀 채 인간 모두가 어떤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빔/허무-역사,시간-에 던져져 있음을 어렴풋이 바라본다. 자기 자신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은, 고독의 극단까지 가서야 형벌이 멈추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변방에서만 ‘타자’가 출현하며 ‘전인간(全人間)’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던져져, 모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고독한 인간이 바로 원초적 인간이며, 실제적 인간이고, 잃어버린 반쪽이다. 원초적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다.
 
 
삶을 시로 변화시켜서 정신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삶에 결정적인 혁명을 일으키려는 초현실주의의 계획은,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려고 한 쉴레겔과 그의 동지들의 기획과 다르지 않다. 그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은 주관성에 의탁했다. 즉, 시화를 위한 첫걸음인 개관적 현실의 파괴는 객체에 주체를 삽입하는 것으로 달성될 것이다.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와 초현실주의의 ‘유머’는 서로 손을 잡았다.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랑과 여성이었다. 완전한 성애적 자유는 유일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었다. 여성은 빔과 진리의 문을 연다. 사랑의 결합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경험중의 하나이며,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인간은 존재의 양면-죽음과 삶, 밤과 낮-을 건드린다.
 
 
영감은 공동의 자산이다. 이미지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시인이며, 느릅나무에서 배가 열리기를 청하는 것처럼(綠木求漁), 불가능처럼 보이는 것이실현되기를 바라야 한다. 블레이크는 ‘시적 천재성에서 모든 사람은 엇비슷하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는 꿈, 무의식적 구술, 말의 집단화에 의지하여 위의 사실을 보여주려했다.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연금술적 시-그리고 시인이란 선택된 자이며 외톨이로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개념-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무서운 습격을 당한다. 즉,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과 시, 시 작품과 독자, 너와 나라는 이율배반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은 자동 기술법이다. 자아의 껍질이 깨어지고 의식의 칸막이가 부서지고, 솟구쳐 오르는 샘처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다른 목소리에 사로잡혀서 인간은 의식이 탄생하면서 떨어져 나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언어가 상징하는 것은 이질적인 두 개의 현실, 즉 인간과 인간이 명명하는 사물을 관계 맺어주기 때문이다. 언어란 한편으로는 개개의 구체적인 사물들의 이질성을 등가치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 인간이 일반적인 상징을 이용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시가 의도하는 것은, 사물이 자신의 구체적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는 동시에 개별적 인간이 사라지지도 않는 상태에서 등가치(그것이 은유-메타포이다)를 발견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회전하는 기호들
 
근대시의 역사는 탈선의 역사이다.
 
시적 모험에 대한 실패가 근대시 역사의 어두운 면이라면, 다른 면은 근대시의 작품들로 밝게 수놓았다.
 
시와 행동을 , 즉 살아있는 말들과 체험된 말을 화해시키고, 나아가 공동체의 창조와 창조적인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사회를 구상해보는 것은 진정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시가 없는 사회는 언어가 결핍될 것이다. 모두가 같은 말만 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는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 모두가 획일화 되거나 아니면 개개인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시는 사회적 삶을 시화하려고 하고, 사회는 시어를 사회화하려 한다. 한쪽에서는 사회를 창조적인 공동체로, 살아있는 시로 만들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를 사회적 삶으로, 육화된 이미지로 만들려고 한다.
 
창조적 공동체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외적 필요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직물처럼 개개인의 숙명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어우러지는 그런 보편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그 사회는 자유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그 사회를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사회는 연대감이 넘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에 의지하지 않고, 개개인이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인식력과 예지력으로 작금의 현실을 쳇바퀴처럼 맴도는 지옥의 모습으로 꿰뚫어본 최초의 시인은 어쩌면 랭보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 사회에 대한 처형이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인,<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동시에 시에 대한 단죄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인은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하는 보편적 언어’를 창조하며, 행동에 리듬을 부여하기 보다는 그 것을 예고할 것이라고 랭보는 생각했다. 시인은 ‘진보를 향한 행진’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진보를 배가시키는 매체’가 될 것이다. 랭보는 말하기를,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다. 시인은 현재를 발견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미래를 깨워서, 현재로 하여금 다가오는 시간과 만나도록 이끈다.
 
 
고대에는 우주가 하나의 형태와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의 운동은 순환적 리듬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고, 그 리듬의 형상은 여러 세기 동안 도시와 법과 예술 작품의 원형이 되었다.
 
플라톤적 순환 시간관은 끝없고 직선적인 연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성들은 더 이상 우주적 조화와 임지가 되지 못했다. 세게의 중심과 신은 쫓겨나고, 관념과 본질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홀로 남게 되었다. 우주의 형상이 바뀌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던 개념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세계였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총체였다. 이제 공간은 팽창하여 분열되고, 시간은 불연속적인 것이 되었다. 세계, 전체는 조각조각 파편화되었다. 인간은 분산되고, 그 역시 분산되어 떠도는 공간 속에 미아가 되었다.
 
 
그러나 자아가 현실성이 없어졌다거나, 우리가 그것을 환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자신의 흩어짐은 자아를 배가시키고 강화한다. 연속성을 잃고 중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체 하나 하나가 유일한 자아로 받아들여져서, 예전의 자아보다도 훨씬 더 닫혀지고 완고한 것이 된 것이다. 자아의 흩어짐은 다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반복이다. 동일성을 고집하는 자아는 언제나 눈먼 자아와 맹목적으로 싸운다. 동일성의 번식과 전파.
 
 
시는 ‘나는 너’라 하지 않고, ‘나의 나는 바로 너’라고 말한다. 시적 이미지는 ‘타자’이다. 의사불통이라는 근대의 현상은 주체의 복수성이라기 보다는 개별 의식의 구성요소서 ‘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들과 말할 수 없는 것은 ,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의 암세포 같은 증식은 세계가 이미지를 상실한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세계 속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고대 인간은 스스로의 자아를 발견하고 이어 다른 이들의 자아를 느꼈다. 오늘 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소는 같은 장소이며, 천지사방은 아무것도 아닌 장소들 뿐 이기 때문이다. ‘나’가 ‘너’로 바뀌는 것- 모든 시적 이미지를 포괄하는 이미지-은 먼저 세계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과거의 작품들은, 우주적 원형에 대한 이중적 의미의 대답이었다. 즉, 보편적 모델의 복사이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시의 각운과 연들은 우주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세계의 상징이면서 세계와의 대화이기도 했다. 상징인 이유는 우주 이미지의 재생산이기 때문이고, 대화인 이유는 인간과 외부 현실 사이의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그 작품들은 하나의 언어이다.
 
시인은 동시에 두 가지 모순적인 방법으로 현재를 산다. 즉, 마치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살면서, 동시에 지금 당장 끝나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력이 제안하는 것은 오늘의 구체적인 삶을 회복하여 고양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이란 현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획일적인 삶과는 정반대인 진실된 삶이다. 브르통은 ‘진실된 실존은 저기에서이다.’라고 말했다. 그 ‘저기’는 여기, 항상 여기 이 순간에 있다. 진정한 삶은 일상적인 삶에도 영웅적인 삶에도 대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어떤 행동 속에서라도 타자성의 번갯불을 자각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출현은 예기치 않은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다고 해서 특별히 정신적인 공적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 삶이 삶에게 보여주는 신호이다.
 
 
우리들의 일상행위의 직물로 짜여진 경험인 ‘타자성’의 발현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자신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로 동시에 타인이라는 순간적인 지각을 유발한다. 또한 우리가 한발도 떼어놓지 않았음에도, 우리들의 진정한 존재는 다른 곳에 있게 되는 경험이다. 다른 곳이라는 말의 의미는, 즉 내가 이것이나 저것을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또한 나는 홀로 있으면서, 어디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항상 여기인 그곳에서 너와 함께 있다. 너와 함께 여기서,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여기 있을 때, 우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끝없이 미끄러지고, 정의내릴 수 없고, 예견할 수 없고, 우리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타자성’은 종교와 시와 사랑 그리고 기타 유사한 경험과 혼동된다.
 
 
신성의 개념을 제거하면서 이성주의는 인간을 왜소화시켰다. 자아의 우상화는 소유의 우상화로 연계된다. 서구 기독교 사회의 진정한 신의 이름은 다른 이들에 대한 지배욕이다. 세계와 사람들을 ‘나의’ 재산과 ‘나의’ 물건으로 여긴다. 끝없이 순환하는 지옥 같은 작금의 삭막한 세계는 시적 능력을 거세당한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계량화나 수량화를 거부하는 실재의 광범위한 영역, 종과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순수한 질인 그 모든 것, 즉 생의 본질 자체와 접촉하는 길이 봉쇄당하고 말았다.
 
 
낭만주의 시인들과 근대에 그들 후계자들의 반란은 신의 추방에 항거하는 단순한 항의표시가 아니라, 잃어버린 반쪽의 추구이며 ‘타자’와 접촉하는 지역으로의 하강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혹은 오르페우스, 루스벨(악마) 혹은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가 신성 혹은 ‘차자’라고 부르는 그 현실을 찾았다. 20세기 시인들의 상황은 이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그점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존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항상 완성되지 않는 것-비록 그 미완성 속에서 완전하지만-이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시를 쓰고 이미지를 만든다.
 
너무 늦은 것은 신들과 그들의 찬란한 유산들은 희미한 빛 속에서 모든 과거의 신화를 삼키는 수평선 너머로 이미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인 이유는 존재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와 진정한 현존을 만나러가는 핵심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순간적으로 분리와 재결합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어느 날 그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자신 속에 있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시간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어 보여줄 때,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얼굴과 또한 별똥처럼 사라지는 한마디 말과 흘끗 마주친다.
 
어느날 오후 들판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눈이 마주칠 때, 비록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방금 그 잎새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늘이 어떻게 떨렸는지, 저녁 무렵의 황금빛 햇살에 흰 벽이 어떻게 반사되었는지를 반추해 본다.....우리는 혼자이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존재’를 보았고 ‘존재’ 역시 우리를 보았다. 그것이 다른 삶인가? 그건 차라리 진정한 삶, 매일 매일의 삶이다.
 
 
나는 자아의 구원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하는 존재를 갈망한다. 나의 관심은 저 너머의 ‘다른 삶’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 타자성의 경험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맛보는 ‘다른 삶’이다. 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위로해 주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던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말라르메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보기에 우주란 하나의 커다란 관계와 상응의 체계 같다고 말하였다.
 
 
블레이크는 모든 사물이 형상을 감추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드러나고자(현현顯現) 하는 욕구이며 스스로를 투사하는 욕망이다. 즉, 상상력의 사명이란 바로 에너지에 상징적이고 감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는 파괴가 아니라 의미의 추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의미는 지금 말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밝아지지 않는 수평선 저 너머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은 얼굴없는 실재이면서, 우리들의 앞, 저기에 벽으로서가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또한 축제인 시는 하나의 이미를 찾는 기호들의 총체, 자기 자신을 맴돌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상형문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가 이 책이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이제 책이 끝나감에 따라 그 이미지가 다시 떠오른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 자리를 마련해 준다. 활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모든 시적 창조는 역사성을 띠지만, 반면 모든 시는 역사적 직선성을 부정하고 영속하는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 너머로 가고자 하는 초월이라면, 시는 그 계속적인 초월하기의, 그 끊임없는 상상하기의 가장 순수한 기호이다.
 
 
인간은 이미지인데, 왜냐하면 그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과 하나가 되고자 하고, 자기 자신과 또한 자기와 닮은 이웃과 재결합하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세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는 분리의 의식이며 떨어져 나온 것과 다시 합치려는 시도이다. 시 속에서 존재와 존재에의 욕구는 입술과 과일을 깨무는 것처럼 한 순간 화해한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시는 현존이 될 것이다. <끝>
 

2013년 3월6일 지담 장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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