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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3>/심 상 운
2019년 07월 26일 18시 26분  조회:1083  추천:0  작성자: 강려
*월간 <시문학>2007년 4월호에 발표 <이기철/신현정/이재훈 시인의 시>
 
이기철 시인의 시- 「고요의 부피」「들판은 시집이다」
 
 
저 새의 이름이 뭐더라, 저 풀의 이름이 뭐더라 하는 동안
해가 진다
땅의 가슴이 더워질 때까진
날아간 새의 이름을 부르지 말자
어제의 산이 그늘을 데리고 와서
이제 그만 세상을 미워해라, 이제 그만 세상을 발길질해라 하며
문설주에 산그늘을 걸어 놓는다
조그만 생각을 끌고 가던 물이
마른 풀잎 끝에 고드름을 단다
청둥오리가 날아가고 짧은꼬리할미새가 날아와도
차마 그곳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바람이 시든 깃고사리 위로 버석거리는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
지금쯤 찌르레기, 벌새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늙은 밤나무는 다 안다는 듯 한 겹 더 껍질의 옷을 껴입지만
아직도 숲이 추운 곤줄박이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바쁘게 날아 다닌다
춥다고 산 것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숲이 깊은 숨 쉬고 새가 길게 날면
고요의 부피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저물면 낯 선 것들이 낯익어진다
해지는 광경만큼 황홀한 음악은 없다
-------「고요의 부피」전문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들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의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이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들판은 시집이다」전문
 
 2000년대 들어와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새로운 외래어로 크게 유행하더니 이제는 우리말이 된 것 같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행복, 안녕, 복지, 복리라는 의미의 이 말을 우리말로 ‘참살이’라고 하자고 의견을 내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보았다. 행복이나 안녕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휴일이면 아파트의 규격화 된 공간 속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찾는 등산화의 발길이 도시의 인근 산을 누비고, 식탁에는 인공식품보다 신선한 채소류가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연성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자연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여하튼 자연이 인간에 끼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현대인들이 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다행이다.
 
 현대시에서도 이 자연성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화두(話頭)가 된다. 원래 동양의 시인들에게 자연은 시의 원적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정신에 대응하는 동양정신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神)의 개념도 동양에서는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들은 자연을 관념화하여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숨결이나 욕망의 몸짓이나 무언의 언어를 충실하게 시에 담아내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 나오는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도 멋진 비유와 풍자의 언어는 되지만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 즉 ‘산 속의 푸르고 맑은 냇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 상황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된다.
 
 이기철 시인의 시「고요의 부피」는 인공식품 같은 지식과 관념들이 지배하는 의식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연과의 사실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신선하고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참살이’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을 쉬고 사는 시인의 생활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도 배경에 넣지 않은 그의 언어는 식탁 위에 놓인 채소의 신선한 향기를 풍기며 온갖 인공 조미료 같은 관념에 절어진 독자들의 미적 감각을 회복시킨다. <마른 풀잎 끝에 고드름을 단다/청둥오리가 날아가고 짧은꼬리할미새가 날아와도/차마 그곳의 이름을 부르지 못 한다/바람이 시든 깃고사리 위로 버석거리는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지금쯤 찌르레기, 벌새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늙은 밤나무는 다 안다는 듯 한 겹 더 껍질의 옷을 껴입지만/아직도 숲이 추운 곤줄박이만/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바쁘게 날아 다닌다>라는 구절을 그냥 읽어만 봐도 관념<언어> 이전의 자연<사물, 생명>의 실체가 살아서 숨 쉬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도道의 경지다. 아니 도라는 관념의 옷마저 벗어버린 무아(無我)의 경지다. 이때 자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 속에서 숨 쉬고 퍼덕거리고 날개 짓을 한다.
 
「들판은 시집이다」는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은유의 구조를 시의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관념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잎처럼 돋아난 단순한 비유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념을 뛰어넘는다.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이 없는 논밭/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는 구절은 자연과 한 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접근도 하지 못 할 실제의 세계다. 인간 세상의 시시비비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세계를 시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21세기 현대시의 ‘자연의 재발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은 누구나 시의 재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생활을 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기철 시인의 자연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도달한 거리낌 없는 정신의 경지를 가늠해본다.
 
* 이기철(李起哲): 197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낱말추적」「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우수의 이불을 덮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웠다」등
 
 
신현정 시인의 시- 「별사탕」「극명(克明)
 
 
별들 속에서도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이 꿈인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
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
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 앞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별을 봉지째 팔았다
---------------「별사탕」전문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 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 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다들 날아 간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克明)」전문
 
 
 언어의 형이상학적 추구의 결과로 언어가 ‘존재의 집’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실상)가 될 수 없고 단지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여서 선(禪)이나 직관(直觀)을 통한 존재의 파악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에서는 언어를 ‘존재의 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를 떠나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시에서 불가능한 일이고 시의 예술적 본질과도 상충되기 때문에 현대시에서 언어를 탐구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포착하는 행위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으로 여전히 중요시된다. 따라서 언어와 존재의 이런 관계 즉 허상을 통한 실상의 발견과 포착은 현대시에서 언어와 존재에 대한 시인의 투명한 인식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허식(虛飾)이나 실감이 없는 관념적 언어로는 존재의 그림자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현정 시인의「별사탕」은 이런 언어와 존재(실상)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게 하는 시로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별사탕’ 즉 ‘별+사탕‘이라는 언어를 포착하여 인간의 꿈을 인식하게 하고 꿈의 맛과 아름다움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차츰 희미하게 색이 바랜 어린 시절 꿈의 세계를 환기시켜 독자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언어인식의 투명함이 시 속에서 움직이는 에너지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움직이는 인식의 에너지는 천진하고 열린 상상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처럼 펼치는데, 그것이 언어의 허상이 아닌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가 되어서 존재의 실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라는 엉뚱하고 단순한 의미의 구절들이 생명력을 얻은 언어가 된다.
 
 이런 그의 인식능력은「극명(克明)」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침에 참새들이 앉아다 떠나간 나뭇가지를 보면서 ‘반짝이는’이라는 심리적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별사탕」처럼 언어를 통한 인식이 아니라 현장의 사물을 보고 발견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에 더 삶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탈-관념화 된 투명한 인식의 눈은 어쩌면 분별심이 가득한 육안(肉眼)을 넘어서서 빛의 경지인 천안(天眼)이나 혜안(慧眼) 쯤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침에 참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나뭇가지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누구나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정경이지만 거기서 ‘반짝이는’ 느낌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것은 남다른 마음의 눈에 의한 직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눈은 어둠도 밝은 빛의 세계로 보는 눈이다. 그래서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라는 구절이 경이로운 감각으로 살아난다. 그 자신도 그런 인식의 경지가 너무 놀라워서 ‘극명(克明)’이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눈이 밝아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여 보이는 것으로 변환할 수 있다. 신현정 시인은 오랜 시업(詩業)의 수련을 통해서 밝은 눈을 얻게 된 것 같다. 나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는 그의 시「별사탕」과「극명(克明)」을 거듭 읽으면서「극명(克明)」은 그가 포착한 오도(悟道)의 한 순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나름대로 확인해 본다.
 
* 신현정(申鉉正): 1973년 <월간문학>에 「그믐밤의 수(繡)」가 당선 되어서 등단. 시집 「대립」등
 
 
이재훈 시인의 시-「보길도 갯돌」「황홀한 무게」
 
 
돌은 시간의 은유다
긴 세월 동안 견뎌온 피부는 거칠어졌다가
이내 속살처럼 안락하다
만질한 자갈이 된 사연, 선술집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
등, 역마살로 떠돈 자의 주름잡힌 미소, 생일날 아침 공복의
커피, 할증시간 택시기사의 붉은 눈, 술이 깨는 새벽 라디오
소리, 노트에 적어 넣은 정지된 시간들, 그리고 서서히 딱딱
해지는 연보
네 기억이 드문드문 찾아오게 되면
모든 사물은 굳은 껍질로
스스로의 집을 만든다
딱딱함 속에 들어앉은 기억들이
제 몸을 뒹굴어 내는 소리
나는 너의 눈을 기억한다
너의 하얀 이를 기억한다
구르고 굴러
환멸까지도 그리움이 돼버린
이 소란스러운 돌의 은유
                                               --------「보길도 갯돌」전문
 
눈이 나뭇잎에 앉았다가 햇살을 참을 수 없어 제 몸을 녹였
다 사람들은 그것을 학대라 부르기도 하고, 혁명이라 부르기
도 한다 체 게바라가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을 죽여 또 한 생
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혜화동, 시위대가 장대 깃
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깃발을 두 명이 잡고 겨우 걷는다
나는 그 행렬을 보는 대신 버스에서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몇 사람들은 그들이 깃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
는 지금 내 가방도 무겁고, 늦어진 약속도 무겁다고, 혼잣말을
했다 한 아저씨가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힘내요, 파이팅!
싸락눈이 비로 바뀌었다 나대신 깃발을 지고 가는 사람, 제 몸
을 거리에 내버린 풍경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황홀한 무게」전문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는 현대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관념의 극단과 물리적 이미지의 극단은 시의 성립에 위태로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덕수시인은 그의 시론 ‘수퍼비니언스의 원리(2005년 시의 날 주제 발표)’에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 현대 시사(詩史)를 간략히 조감하면서 현대시의 과제로 “형식주의 (언어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론은 한국 현대시에서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 즉 현실참여의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의 조화(調和)를 강조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재훈의 시편들은 비교적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아서 시를 읽는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것은 그의 시가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조작된 모더니즘 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물론 한 두 개 정도의 이미지를 통해서 확장되는 의미의 세계를 안고 있으며, 그 속에 구체적인 현실이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새로운 시의 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풀어야할 과제로 남는다.
 
「보길도 갯돌」은 ‘돌의 은유’라는 발상이 시의 폭을 넓힌다. 그 돌은 인간의 삶을 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개성적인 관념으로서 독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유인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보길도 갯벌에는 바닷물에 쓸린 돌들이 널려있다. 그 돌들도 처음에는 예리하게 각이진 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에 쓸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진 돌들은 만질만질한 자갈이 된 것이다. 그것을 그는 <만질한 자갈이 된 사연, 선술집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등, 역마살로 떠돈 자의 주름잡힌 미소, 생일날 아침 공복의/커피, 할증시간 택시기사의 붉은 눈, 술이 깨는 새벽 라디오/소리, 노트에 적어 넣은 정지된 시간들, 그리고 서서히 딱딱/해지는 연보>라고 한 생애의 고단한 삶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구르고 굴러/ 환멸까지도 그리움이 돼버린// 이 소란스러운 돌의 은유>라고 연민의 정까지 넣어서 독자와 밀착시킨다. 하지만 이 시는 독자들에게 시적 상상 속에서 삶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해줄 뿐, 어떤 사고思考를 유발하거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는 삶에 대한 성찰은 들어있지만 생의 에너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황홀한 무게」는「보길도 갯돌」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혜화동 버스 안에서 시위대를 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을 시로 형상화 하면서 젊은 시인답게 자신을 죽여 또 한 생을 꿈꾸었다는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내 가방도 무겁고, 늦어진 약속도 무겁다고, 혼잣말을/했다>라고 솔직하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감정의 드러냄은 독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킨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소극적이지만 생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끝부분 <한 아저씨가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힘내요, 파이팅!/싸락눈이 비로 바뀌었다 나대신 깃발을 지고 가는 사람, 제 몸/을 거리에 내버린 풍경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라는 구절은 그의 정직성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적 공간을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공간이 시인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이 아니라는데 의미가 있다.「황홀한 무게」라는 이 시의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꿈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공간은 현실만이 아니라, 생의 허무를 무너뜨리는 에너지가 함축된 심리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재훈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현실인식이 들어있는 시적 상상과 젊은 정신이 생동하는 감성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 이재훈 : 1998년 <현대시>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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