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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말도로르의 노래 / 로트레아몽

동시에 또는 끝없이 다 말하기 / 황현산
2019년 09월 19일 14시 59분  조회:1502  추천:0  작성자: 강려
동시에 또는 끝없이 다 말하기 /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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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도르 뒤카스, 일명 로트레아몽은 1846년 4월 4일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원래 타르브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 영사관 일등서기관으로 이 남미의 도시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시인이 태어난 지 20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뒤카스는 1859년에 프랑스에 들어와서 1862년까지 타르브와 포의 리세에서 기숙생으로 수학했다. 그는 1865년 포를 떠났다. 우루과이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러나 그는 1866년 파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보르도의 시 경연대회에 참여하게 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대회에 <말도로르의 노래>의 <첫번째 노래>를 제출했다. 이 <노래>는 1869년 초, 당시 대회를 주관했던 에바리스트 카랑스의 잡지 <영혼의 향기>에 수록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문학적 재능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아니면 뒤카스의 건강상태가 정규 교육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생활비을 대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것일까. 말도로르의 <첫번째 노래>는 1868년 저자의 이름 대신 '***'로 표시되어 출판되었다. 여섯 개 <노래> 전체를 인쇄한 것은 브뤼셀의 라크르아 출판사이며, 책은 로트레아몽이란 이름으로 서명되었다. 그러나 라크르아는 검열을 두려워하여 감히 책을 판매하지는 못했다. 이지도르 뒤카스는 이듬해인 1870년 그의 <시법(Poesies)>의 원고를 파리의 한 출판사에 맡겼으며, 출판사는 이 원고로 5월과 6월에 소책자 두 권을 인쇄했다. 로트레아몽은 1870년 11월 24일 파리에서 죽었으며, 그 죽음의 정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어떤 증언도 확보되지 않았다. 당시 파리는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상태였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생애, 기발하고 미완성 상태의 작품, 이 두 사실, 또는 사실 없음은 온갖 종류의 추측과 가정을 불러내고, 1930년대에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편집증 비평' 삽화에 이르기까지 그것들 사이에 온갖 병합을 가능하게 한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끊임없이 독자들을 의아하게 하고, 당황하게 하고, 상이한 열정들을 퍼붓게 했다. 천재인가 광기인가, 아니면 그 둘의 동시 발생이거나 논리적 교체발생인가. 착란의 낭만주의인가 극한의 명석함인가, 비범하고 예외적인 즉흥의 산물인가, 준비되고 계산된 작품인가. 재능의 조숙한 폭팔인가. 아이로니컬한 의식의 조건없는 극단화인가, 비의주의의 고백인가, 모든 주장이 제시되었고 방어논리를 만들어내기에 성공했지만, 이들 논의에는 진정한 발전이 없었다. 한 논의가 다른 논의보다 앞설 수도, 서로 간에 이해의 깊이를 줄 수도 없었으며, 종합적 발전이 시도될 수도 없었다. 오직 <노래>만이 어떤 심리적이거나 전기적 지침이 없이 여전히 덩그렇게 그러나 요란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로트레아몽은 낭만주의의 모든 유산을 그 두뇌 속에 끌어안고 그것들을 즉각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며 한편으로는 재검토했다는 점이다. 우선 로망 누아르의 작가들, 바이런, 미츠키에비치, 보들레르 등이 그에게 각기 다른 방식의 영감을 주었다. 그는 외젠 쉬의 작품에서 '로트레아몽'이라는 필명의 착상을 얻었으며, 동시대 작가인 퐁송 뒤 테라유를 읽었으며, 1870년에 발간된 아폴리트 텐의 <지성론>을 읽고 인용하였다. 장샤를 슈뉘 박사의 <박물지 백과사전>에서 몇 개의 문단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당연히 비슬레를 읽고 <노래>에 그 흔적을 남겼다. 로암 누아르는 그에게 주제나 이미지보다 그 시대의 문학에 유례가 없는 어떤 개성적인 작품, 문학의 개념 자체를 문제삼는 새로운 착상의 문학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노래>에서 19세기 말은 그에 합당한 시인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전인성, 패륜, 유혈 취향, 꿈과 강박관념의 악용 등이 때로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때로는 서투르고 황당하게 작품 속에 끼어들어와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말도로르의 노래>의 중심에는 하나의 드라마, 심리적이기보다는 윤리적이고, 윤리적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드라마가 들어 있어서, 인간 존재를 신에게 연결시키고, 창조물들을 창조주에게 연결시키는 관계 하나를 만들어낸다. 특히 로트레아몽은 창조주의 본질 속에서 악을 발견하며, 고통과 타락에 빠진 세계의 부조리와 공포에 저항하지만, 선과 정의의 미명으로 고통을 생산해내는 자에 대항하는 이 싸움이 무기력할 뿐임을 매번 의식한다. 로트레아몽이라는 이 신비로운 인물은 파우스트, 맨트레드, 카인같은 낭만주의적 반항자들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창설된 "질서"에 저항하여 그가 일으키는 반란은 논리적인 토론의 말로 번역되지 않는다. 강력한 분노는 과장과 비논리로 치닫고, 급기야는 창조된 인간 존재들의 태생적 결함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뒤카스가 사납고 악취나고 점액질에 덮인 동물 군상들을 자신의 동류로 삼으려 할 때, 그 정신은 변신 그 자체가 반역의 한 방식인 세계의 초상을 강조한다. 변신하는 자는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 집단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는 자이다. 그는 이렇게 변신으로 반역자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내부 성향 변질을 시도한다.
 
이지도르 뒤카스는 로트레아몽의 얼굴을 둘러쓰고, 로트레아몽은 말도로르의 인격을 자신의 인격으로 확보한다. 이 과정은 두번째 번혁으로 이어진다. 말도로르는 냉소적이고 용납하기 어려운 주의력을 사용하여 지속적인 관찰을 할 때 그 자신이 동물이나 사물의 모습을 둘러쓰고, 그 모습의 동물이나 사물로 변화한다. 이 몸과 의식의 대체는 뒤카스의 동급생이었던 다제가 첫 버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서로 교환될 수 없다 하더라도 변신이 가장 중요한 서사가 되는 한 세계가 구축된다. 이 <노래>의 끝에서 머빈은 팡테옹의 돔 위에 내던져지나 마침내 시체 이상의 어떤 것이 된다.
 
  바슐라르는 <노래>의 이미지들이 운동과 속도와 직접성을 특징으로 삼는다는 점을 통찰했다. 이 점에서 랭보의 시적 운동감과 전혀 다른 로트레아몽의 시적 박자는 그렇다고 해서 밀도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의 박자는 자주 웅변에 이르고, 웅변은 학술용어의 나열과 반복을 이용한다. 그것은 마치 강박증이 어떤 간결성을 요구하고 고정관념이그 반대급부로 풍요로운 지각으로 환화된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완화된 표현은 정열의 거침없는 분출에서 생겨난 것이어서 어떤 단일한 형식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창조주에게 던지는 분노는 신비논리와 양면감정을 요구한다. 악은 선과 분리될 수 없으며, 미와 그 세련의 개념은 추악함과 혐오의 현실과 균형을 맞추며, 불면의 강박증은 명철성에의 예찬과 짝을 이룬다. 의식은 날카로워야 하지만 예민한 의식은 당연히 고통을 빚어내기에 의식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거의 지속적인 긴장이 생겨나고, 폭력과 자주 냉소적인 위로의 교차운동이 성립하여, 우아함과 미에 대한 무서운 관상으로 연결된다.
 
  로트레아몽은 시 본래의 기능이 말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을 감염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퇴고한 흔적들을 살펴보면 너무 명백한 것들을 지우고, 한층 내적인 드라마를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적 도덕적 가치의 코드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는 한 청년의 비극이 드러나는 이들 문단은 독서의 잔영들을 닦고 있으며, 모든 시적 인습을 완전히 청산하고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모든 갈등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문단들이다.
 
  로트레아몽은 <노래> 이후 <시법>을 쓰면서, 그 어조와 의도에 믿기 어려운 변화를 드러냈다. 깊고 광범위한 사디즘은 냉정하고 계산된 유희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시적 혈맥이 고갈되는 기미를 보고, 또다른 연구자들은 정신병의 영향이 커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는 하나의 시 형식이 다른 형식으로 전화된 것일 뿐일까. 뒤카스는 <시법>에서 잠언의 형식을 빌려 말한다.
 
 
 
  나는 우울을 용기로, 의혹을 확신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악의를 선으로, 한탄을 의무로, 회의주의를 신념으로, 궤변을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오만을 겸손으로 대체했다.
 
 
 
  그는 모든 불안과 저항의 시를 거부하고, 장자크 루소, 보들레르, 앨런 포를 배척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위대한 물렁머리들"을 탄핵하고 새로운 사상의 지도에 자리를 잡는다. "감정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완전한 추론의 형식이다." 그는 1870년 2월 한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는 제 과거를 부인합니다. 저는 이제 희망만을 노래합니다." 
 
  이 모든 것이 유희나 연출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시법>의 두번째 책자는 정확한 계산에 전념하면서, 단테, 보브나르그, 라로슈푸고, 파스칼 등의 명구에 손질을 하고 이를 적당히 변형하고 꿰어 맞춘다. 그렇더라도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다. 로트레아몽은 자신의 "저주받은" 시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부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마침내 과학적 정신이 승리하는 성숙과 절제의 시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그가 신앙과 선과 겸손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시법>이라는 명명 자체가 냉소적인 것은 아닐까. 미래의 책에 붙일 프롤로그로서 <시법>은 깊은 모호성을 지키고 있다. <시법>의 아포리즘은 유명해진 저자들의 텍스트를 은밀하고 성상파괴적인 기쁨으로 다시 손질하는 어떤 재치처럼 거꾸로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경우건 <시법>은 냉정하고 지성적인 말도로르의 출현을 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래> 자체는 문학에 절대적으로 새로운 어조를 가져왔다. 신비의 인물 뒤카스-로트레아몽-말도로르는 그 유혈 낭자한 독신(瀆神)의 말과 함께, 낭만주의를 과장하고 새롭게 하는 방식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시적 사고의 양식 하나를 빚어내고 그 비전들을 세분하여 그 하나하나에 자율성과 고유의 힘을 남겨둠으로써 낭만주의가 낳은 가장 피상적인 마스크 아래에서까지 그 깊이를 측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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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트레아몽의 글쓰기 방식에 관해 특별히 말해야 한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여섯 편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노래들은 다시 산문시 혹은 '절'로 나뉜다. 각각의 절은 독립적인 '산문시'로서, 즉 시가 지닐 법한 치밀함과 풍부함을 보여주지만 시가 지니는 형식상 특징은 전혀 없다. 게다가 시적 기법 역시 다양하다. 첫번째 노래부터 세번째 노래까지, 개개의 절은 각기 개별적인 서사를 이루지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와 반복되는 테마를 갖추고 있다. 이와는 달리, 네번째 노래와 다섯번째 노래는 일견 의미에 닿지 않는 헛소리, 중간에서 잘린 이야기들, 의사(擬似) 과학적인 여담들, 시에 대한 견해들로 점철되어, 요컨대 횡설수설로 빠져든다. 마지막 여섯번 째 노래는 앞의 다섯 노래들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삼십쪽짜리 짧은 소설"이 이어질 것을 약속한다. 그런 다음 사악한 인물이 한 사춘기 소년을 유혹하는 이야기가 신문 연재소설, 특히 외젠 쉬가 유행시킨 스타일로 펼쳐진다(사실 뒤카스는 자신의 가명을 이젠 쉬의 한 인물, 라트레오몽에서 빌려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서사는 또 무너지면서 일견 종잡을 수 없는 여담들이 들어서고, 다시금 이야기가 개시될 때에는 거기 광적인 속도가 붙어 마치 초안용 개요처럼 읽힌다. 결말부에서 말도로르의 마지막 희생자인 청년 머빈은 손에 화환을 부여잡은 채, 프랑스의 저명한 인사들이 묻혀 있는 팡테옹의 돔에 매달려 죽는다. 로트레아몽은 이렇게 자신이 창조물인 머빈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프랑스 문학의 거장들 사이에 올려두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요소가 여섯 편의 노래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말도로르로서, 화자와 종종 동일시되는 이 기이한 주인공은 신과 인간에 대항하는 전투를 이어가면서, 신 혹은 신의 사자들과 일련의 유혈 낭자한 시합을 벌인다. 한계가 없어 보이는 그의 잔인성에 필적할 만한 것은 창조자의 잔인성뿐일 것이다(가령 그는 신이 인간의 몸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발각한다). 잡종 생물들 간의 기이한 싸움이, 마찬가지로 기이한 짝짓기(말도로르와 암컷 상어, 블독과 소녀)와 갈마든다. 인물들은 동물로, 심지어 괴물로 변신하고, 이 변신들이 서사를 구획짓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통일적 요소는 이 노래들이 자체의 문학적 상황을 끊임없이 돌아본다는 점이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문학의 역사 및 전통 수사학에 대한 성찰이 된다. 작품 첫 절부터 그 형세가 잡힌다.
 
 
 
 하늘의 뜻이 다르지 않아, 독자는 부디 제가 읽는 글처럼 대담해지고 별안간 사나워져서, 방향을 잃지 말고, 이 음울하고 독이 가득찬 페이지들의 황량한 늪을 가로질러, 가파르고 황무한 제 길을 찾아내야 할지니, 이는 그가 제 독서에 엄혹한 논리와 적어도 제 의혹에 비견할 정신의 긴장을 바치지 않는 한, 마치 물이 설탕에 젖어들듯이 책이 뿜어내는 치명적인 독기가 그 영혼에 젖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고전적 토포스(하늘에 대한 기원)로 말문을 열면서, <말도로르의 노래>는 스스로를 '시'로 규정한다. 마치 독자의 옷깃을 달기며, "이봐, 나도 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절의 나머지 부분 역시 두 차원에서 작동하여, '이야기' 혹은 '시'를 구성하는 동시에 이야기와 시에 대해, 특히 당대에 퍼진 시들에 대해 논평한다. 예를 들어, 서두용 기원문은 이미 그 자체로 시다. 그와 동시에, 이 기원문은 그 시적 속성을 독자에게 알리고("사납고" "음울하고" "독이 가득한" 지도 없는 영역으로서, 요컨대 위험하다). 독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의 목록을 작성하는 한편("대담"해질 것, "제가 읽는 글처럼 대담해지고 별안간 사나워"질 것. "엄연한 논리"와 "정신의 긴장"을 지닐 것). 우회 및 위반의 능력이 없는 "소심한 영혼"을 독자 대열로부터 제외시킨다("뒤이어지는 페이지들을 모든 사람이 다 읽는 것은 좋치 않다") 게다가, 이 기원문은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강령을 세운다. 읽기에 착수한다는 것은 황무하고 위험한 지대에서 길을 찾는 일에 가깝다. 소심한 독자를 이동중인 철새에, 즉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경로를 벗어나 "철학적이며 더욱 확실한 또하나의 길"로 접어드는 저 "추위 타는 두루미"에 빗대는 긴 비유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우회 및 방향전환 작전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말도로르의 노래>의 메타시학적 의미를 보여준다. (두루미가 폭풍을 피하는 식으로 불길한 텍스트를 피하지 않고) 읽기의 위험한 속성에 대한 경고를 실제로 읽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소심한 영혼"(읽지 않는 자)에 반대되는 존재로, 즉 독자로 규정한다.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자신이 "읽는 글만큼 대담해지고 또 별안간 사나워"지는데, 그러한 성질이 텍스트 특유의 것이어서라기보다는 '읽기'가 텍스트와의 관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관게가 마음을 녹이는 시의 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대담함과 사나움을 만들어낸다(그렇지 않으면 "마치 물이 설탕에 젖어들듯이 책이 뿜어내는 치명적인 독기가 그 여혼에 젖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도입절은 '텍스트'와 '독자'만을 언급하며, 이때 시인 자신, 서정적 자아의 부재가 눈에 띈다.<말도로르의 노래>에서 시의 소통은 '저자'를 거치지 않고 텍스트와 읽기 행위의 독특한 마주침으로 이루어진다. 읽기 행위는 그토록 사납고 대담해져 전통적으로 시인에게 속해 있다고 간주되던 힘을 찬탈한 것이다. 낭만주의 전통에서 시를 읽는 독자는 영감을 받은 '나'의 행로를 따르게 되어 있었던 반면, 로트레아몽은 이 시적 자아의 우선권 및 지배권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시법>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뒤카스는 "이 세기의 시적 신음소리들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맹렬한 비판에 착수한다.
 
  간단히 말해, 로트레아몽은 낭만주의 명사 인명록에 폭탄을 던진다. 그뿐만 아니라, 고전주의와 결별한 낭만주의가 시인 개인의 영감, 달리 말하면 독창성을 떠받들었던 반면, <말도로르의 노래>는 뻔뻔스럽게 다른 작가들에 의해 전범이 되다시피 한 테마, 상황 설정, 문체 등을 차용한다. 보들레르, 단테, 괴테, 위고, 라마르틴, 사드, 스콧, 세익스피어, 쉬 등의 텍스트가 누가 봐도 빤할 정도로 비쳐 있다. 게다가 로트레아몽이 제공하는 상호텍스트의 풍경은 엄밀한 의미의 문학 바깥까지 뻗어나간다. 그는 과학 텍스트들에서 - 특히 장샤를 슈뉘의 <박물지 백과사전>(1850~1861)에서 - 단락 전체를 그대로 옮겨온다. 현대문학의 절묘한 묘기 중 하나로 인정되는 단락을 예로 들자면, 로트레아몽은 슈뉘 박사에게 '빌려온' 찌르레기떼에 대한 긴 묘사로 다섯번째 노래를 시작하는데, 이들의 복잡한 비행 방식이 교묘하게도 <말도로르의 노래>의 작법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되어, 시적 음성의 고유성 및 권위를 무너뜨린다.
 
 
 
  찌르레기 군단은 그들 나름의 비행 방식이 있어서, 일사분란하고 규칙적인 어떤 전술을 따르기라도 하는 것 같은데, 오직 대장 한 사람의 목소리에 정확하게 복종하는 훈련된 군대의 전술이 그럴 터이다. 찌르레기들이 복종하는 것은 본능의 목소리인 바, 비행 속도는 끊임없이 새들을 바깥쪽으로 끌어가는 나머지, 자성(磁性)을 띤 동일한 한 점을 향하려는 공통된 경향으로 결속된 이 새들의 집단은 쉴새없이 오고가고 온갖 방향으로 순환하고 교차하는 가운데, 일종의 매우 격렬한 소용돌이를 형성하니, 그 덩어리의 총체는 명확한 방향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그 자기를 돌며 자전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 각 부분이 저마다 순환운동을 하는 결과인지라, 그 중심은 끝없이 확산되려는 경향을 지니면서도, 그 주변을 옥죄는 대열의 반동에 의해 끊임없이 압박받고 제한되어, 이들 대열 가운데 어떤 대열보다 밀도가 높으며, 주변 대열들도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더 밀도가 높다. 이런 소용돌이치기의 기이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찌르레기들은 보기 드문 속력으로 주변 공기를 찢고, 그들 피로의 종점과 그들 순례의 목적지를 향해 매초마다 한 뼘씩 소중한 비행공간을 뚜렷하게 정복한다. 그대도, 마찬가지로, 이 장절들 하나하나 노래하는 나의 기이한 방법에 마음쓰지 말라.
 
 
 
  찌르레기의 비행도, 로트레아몽의 글쓰기도 얼핏 방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찌르레기들도, 그의 문장들도 각기 제가 날아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이제 글쓰기에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강령은 없다. 찌르레기 한 마리 한 마리가 동시에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듯이, 뒤카스의 글쓰기는 그의 모든 욕망이 동시에 제가 원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찌르레기는 로트레아몽에게도 비행과 글쓰기에는 그들 원하는 방향이 있다. 글의 목표를 위해 순간을, 그 순간의 욕망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브르통이 특히 <초현실주의 제2선언>에서 '무결점의 선배'라고 말하던 뒤카스의 초현실주의적 글쓰기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말도로르의 노래>에서는 한 인간의 모든 기억과 욕망이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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