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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자獅子의 눈동자 /정현종
2019년 09월 20일 17시 46분  조회:570  추천:0  작성자: 강려
<특집 : 시인, 소설가, 예술가들은 왜 산문 ‧ 에세이를 ‘수필’이라 부르지 않는가?>

갇힌 사자獅子의 눈동자
정현종
(시인)

지금으로부터 한3년 전 일이다.(<지금으로부터>라는 말은 좀 우스운 감이 있으나 그냥 쓰기로 한다.) 하기는 말이 3년이지, 지난 3년을 정확히(!) 말하라고 한다면 <꿈만 같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꿈만 같다>는 말이 정확하다니! 이건 필경 필자가 역사의식이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 신화적인 역사의식! 그러고 보면 실제 역사는 역사적이 아닌데 역사의식만 항상 역사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나마,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역사의식도 실지 역사가 허용되지 않으면 뜨내기나 다름없게 된다. 하기는 이 경우 뜨내기도 상팔자일 법하다.
얘기가 잠깐 빗나갔는데, 하여간 3년 전쯤 나는 어떤 농원의 사자우리에 가서 사자와 눈싸움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사자우리 속으로 통로를 만들어 철책을 사이에 두고 사자들을 볼 수 있도록 해놓은 데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는 잘 설명 할 수 없는 충동에 따라, 사자와 눈을 맞춰보고 싶어져서, 얼굴을 철책에 바싹 대고 사자를 불렀다. 사자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 두 앞다리를 들어 올려 철책을 턱 집고 직립(直立)해서는 나의 얼굴을 바싹 마주 댔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 느낌은 사자가 나를 아주 맛있게 바라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 서로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갇혀있는 사자의 눈동자 속에서 아프리카의 밀림과 초원을 보았다. 다시 말하면 사자의 고향이며 살아야 할 곳인 밀림과 초원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그 광활한 밀림과 초원의 전개는 아주 선명했으며, 그래서 갇혀 있는 그의 눈동자는 그다지도 깊고 머나멀게 넓었다. 나는, 갇힌 맹수를 보면 늘 그렇듯이, 깊고 광활한 슬픔과도 같은 연민을 느꼈다.
그날 아마 사자도 내 눈 속에서, 내가 그의 눈 속에서 본 것과 똑 같은 광경을 보았음직하다. 사자의 눈동자는 다름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이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사실 사람은 여러 가지에 갇혀서 산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흔히 자신을 가두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마음 안팎의 여러 가지에 스스로 가두며 또 서로를 가두려고 한다.
그래서 장 그르니예라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인간들은 남이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만물 중에서 오로지 나는 새에 대해 거의 열등감을 느끼는 심리적 동기도 위의 문맥과 상관이 있을 법하다.
그리고 앞에서 갇힌 사자의 눈동자 얘기를 했지만, 또한 <말(언어)의 눈동자>를 생각해 본다.(1981)
(정현종 –삶과 詩에 관한 에세이 [생명의 황홀])
|작법 공부|
정현종 시인, 나에게 이 너무도 유명한 시인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틀림없이 든든하게 잠그고 나온 내 마음의 아랫도리 지퍼가 열렸다고 느닷없이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시인이다. 이 짧은 한 편의 산문을 읽으며 필자는 똑 같은 경기를 느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산문이 아니고 詩작품이다.
그날 아마 사자도 내 눈 속에서, 내가 그의 눈 속에서 본 것과 똑 같은 광경을 보았음직하다. 사자의 눈동자는 다름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이었을 테니까.
서두문장에서 <지금으로부터>라는 표현과 <꿈만 같다>는 표현에 대한 시인의 언어에 관한 걱정은 무엇을 말 해 주는가? 시인은 말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일상어는 말이 아닌 말도 무수히 사용한다. 그러나 詩에는 ‘말이 아닌 말의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산문의 기반은 일상어에 있다. 시인은 지금 운문이 아닌 산문을 쓰면서 산문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언어의 비언어성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종결어 ‘또한 <말(언어)의 눈동자>를 생각해 본다.’가 서두와 연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약에 정현종 시인이 사자의 눈 속에서 아프리카 초원만 발견하고 말았다면, -그래도 ‘隨筆’보다는 훨씬 창조적인 글이었겠지만- 시적 창조 글까지는 못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창조’ 곧 <말(언어)의 눈동자>가 빠졌을 테니까. (죄송하다. 대 시인의 글을 ‘신변잡기’에 비하다니!)
이 짧은 한 편의 산문이 운문으로 쓸 것을 산문으로 형상화한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의 창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사실은 사람은 여러 가지에 갇혀서 산다.” 이하의 문장이 아닐까? 시인은 우리에 갇혀 사는 자사의 눈 속에서 ‘여러 가지에 갇혀’ 사는 인간의 열린 지퍼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붓 가는 대로 隨筆’이 만약에 사자의 눈 속에서 아프리카라도 발견하는 글을 썼다면 처음부터 ‘신변잡기’ 혹평까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여러 가지에 갇혀’ 사는 지퍼 속까지 발견 할 줄 아는 문학이 되었다면 오늘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완전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가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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