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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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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2019년 12월 16일 16시 15분  조회:987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대학을 나와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 8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구조주의(構造主義) 등 60년대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知的)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思考)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철학을 주저 《차이와 반복(1968)》에서 전개했다. 더 나아가서 F. 과타리와 공동으로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구성을 통합적으로 원용(援用)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파악하는 시도를 《반(反)오이디푸스(1972)》 《밀·플라톤(1980)》 등에서 전개하여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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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  
 
  DELEUZE Gilles, pp.301-331,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들뢰즈의 이 논문은 샤뜰레에 의해 1973년에 편집된 『20세기철학』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 논문에서 참고문헌 중에 최근 책이 1966년으로 되어있으며, 글의 내용상으로 1967년의 글일 것으로 우리는 추정한다.]
 
[후기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논문을 읽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후기 구조주의라는 것은 시간 즉 반복 존재론을 다루는 것을 말하며, 구조주의라는 것은 공간 즉 차이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 차이 존재론은 사실상 인식론의 관점의 형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조의 공리과 형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차이존재론은 자신이 배제되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트교의 부시와 이슬람교의 라덴은 둘 다 '신'과 '정의'를 말한다. 그 이름(대상)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의미(구조)에는 실체가 있는가? 중성인가?]
 
수학과 논리가 지니는 구조는 선 가정에서 온 것이며, 여기서 개념의 분절은 사유의 본질로 여기며, 기본적으로 약속에 의해서 이다. 반면에 생명과 심리의 구조는 체험 즉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자연적인 분절을 인정하며 표면과 내면의 구별(차이)에서 구체적 현상을 파악한다. 전자에서 이미 주어진 자료가 있다는 약속에는 공간의 전제를, 후자에서 체험된 과정을 자료로 삼으면서 공감(합의)에 의한 시간적 생성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공연히 '구조'라는 개념(signifié)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 문제의 접근 방식을 갖고 있다. 양자의 설명 또는 표현의 매카니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조'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서로는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구조'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들뢰즈의 논문 「구조주의를 무엇으로 재인식하는가?」를 우리는 읽고자 한다.
 
프랑스철학에서 실존주의를 말하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구조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먼저 누가 구조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언어학자로서 자콥슨(Jakobson), 사회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정신분석학자로서 라깡(Lacan), 인식론을 새롭게한 철학자로서 푸꼬(Foucault), 맑스주의의 문제를 재해석한 맑시스트 철학자로서 알뛰세르(Althusser), 문학 비평가로서 바르트(Barthes), 뗄 겔 잡지에 관계하는 그룹의 저술가들이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구조주의'라는 개념보다 구조(structure, structural)를, 다른 이들은 체계(systeme)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한편 구조주의의 기원은 소쉬르(Saussure)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학파, 프라하 학파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이런 기원과 더불어 구조라는 어휘는 다양하게 쓰인다. 언어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할 비의적(ésotérique)언어가 있다하더라도, 언어에는 구조가 있으며, 표출하는 무의식은 (언어로) 말한다는 정도에서 무의식에 구조가 있으며, 신체가 징후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같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체에 구조 있으며, 사물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침묵으로 표시(signes)를 내보낸다는 점에서 사물에도 구조가 있다. 여기서 구조는 기계의 골격이나 신체의 뼈와 근육의 구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표현하는 그 무엇의 내용(성질) 또는 능력(권능)을 포함하면서, 일정한 기간에 또는 사물의 특성에 따라 그 무엇이 (외연적이 아니라 내재적)동일성 유지하면서, 표출하고 실현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사실 사물의 타성적 표출도 항상적 표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지속하는 한에서 한 사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구조는 한 개체(단일자)를 설명하는 열려진 단위이다. 이 단위의 총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이 이전까지는 일방적이었는데 비하여, 이제 규정할 있는 방식자체를 문제 삼아보니까 위계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방식의 규정가능성이 등장한다. 이런 기준들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는 것은 방식들이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른 위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기준의 수렴과정과 다른 발산과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위상적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이런 차이가 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눈에 띄게 등장했을까?
 
1. 첫 번째 기준: 상징(le symbole)
 
철학은 한편 진리로서 실재적인 것과 있는 그대로의 실재적인 것의 대립에 의해밝히는 경우, 다른 한편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결합하는 보충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첫 번째 기준은 제 3의 질서로서 상징의 질서를 세운다. 이 상징을 실재와 상상 사이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뗄赉 그룹의 소설가, 푸꼬, 알튀세도 심층적 영역을 발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라깡(Lacan)이 중요하다. 라깡은 제3의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라깡에서 구조의 근본요소로서 상징은 발생(genèse)의 원리에 속한다. 라깡이 해석한 "늑대 인간"의 경우에서, 거세의 주제가 잘린 손가락이란 환각적 형태로 실재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거세의 주제가 상징화되지(배제. forclusion) 못했기 때문이다.
 
실재, 상상, 상징을 나열해 보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un)인데, [인식론적으로] 이중화된다.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하나는 놀이하는 광대의 아버지로, 다른 하나는 노동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된다. 그리고 나서 보면, 상징은 세 가지이다. 그래서 구조에는 3원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자체는 제 3의 것이다. 이 첫 번째의 기준에서 보면, 상징적 질서의 지위는 실재적 질서나 상상적 질서에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구조라는 것은 지성의 본질(진리로서 실재)도 감성의 형식(있는 그대로 실재)도 상상의 모습(인격으로 상정한)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forme)도 상상의 모습(figure)도 본질(essence)도 아니다. 알뛰세르가 말하듯이 구조는 "이론(théorie)"에 동일한 것으로 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상징은 독창적이고 사변적인 이론 대상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구조주의는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해석적이다. 공격적이란 상징의 궁극범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한 것이고, 해석적이란 이 상징이란 범주로부터 언어행위, 작품, 관념, 실천 등이 마주치는 근원적인 점(point original)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구조는 우선 상징으로 표상(재현)화 될 필요가 있다. - 구조는 대상도 표지도 아니고, 구조에는 하나님(아버지)과 같은 어떤 것이 상징으로 있다. 그것은 욕망의 거울에 있는 허상이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왕의 거울처럼 여왕의 부름에 등장하는 백설공주의 재현과 닮았다. 부르면 더 상위의 자격으로 또다시 나타나는...것처럼.]
 
2. 두 번째 기준 : 위치 즉 지위(local ou de position)
 
구조의 요소들(상상, 실재, 상징)이 지시화(désignation)도 의미화(signification)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에서는 이 요소들은 의미(sens)이다. 여기서 의미(sens)란 지위(position)이다. 그래서 구조란 공간이지만 비너비적 공간이며, 선존재 하는 공간이며, 순서적 의미를 지닌 인접에 의한 순수 공간(spatium)이다.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란 실재 존재와 사물이 관여하고 역할을 하는 것에 우선(première)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양적이 아니라 위상적이고 관여적이다.
 
알뛰세르의 경우는 경제구조에 대하여 말한다. 위치란 생산(연관)관계에 의해 규정된 위상적이고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이다. 푸꼬의 경우에, 위치를 인접성의 질서에 따라 역할 하는 지위의 성격부여(qualification) 즉 지위부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구조주의는 새로운 선험철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306). 이 점에서, 선험적 위상학이 경험적 심리학을 기초 지우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될까?
 
이 위상적 지위로부터 여러 귀결이 나올 수 있다. 첫번째로, 상징적 요소가 지시화도 의미화도 아니라면, 진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기표가 아닌 요소들의 결합에서 의미가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는 결과물이고 결과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부조리의 철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모자란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는 항상 의미가 과도하게 너무 많다. (그래서 알뛰세르는 과도한(포화된?) 규정(surdétermination)의 개념이 나온다.) 무의미는 불합리가 아니라 의미의 반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까뮈(Camus)에 힘입지 않고 루이스 케롤(Carroll)에 힘입고 있다.
 
두 번째로 놀이와 연극의 관점에서 구조주의가 어떤 취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카드놀이의 중요성을 환기 시켰고, 라깡은 브릿지와 장기놀에서 놀이자의 말 운행놀이보다 더 깊은(심오한) 순수공간(spatium)이 있다고 한다. 알뛰세르가 지위의 순수극장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조주의는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라 선언한다. [주사위에 관하여, 『니체와 철학(1962)』,Ch. I, s. 11, pp. 29-31.]
 
세 번째로 구조주의는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무신론, 새로운 휴머니즘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올 어떤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푸꼬에서 인간의 상상적 특성이 알뛰세르에서 인간주의(인문주의)의 이데올로기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지성의 자기반성에 의한 미신적 폐쇄적 종교성이 등장하는 매커니즘, 즉 베르그송의 우화적 기능이 나타난다. 상상적 특성들과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화적 기능인 셈이다.]
 
[상징으로 재현되는 구조는 (상상이든 실재이든) 놀이 할 수 자리를 마련한다. - 그래야 자리에는 요소(내용, 성질)들이 부여될 수 있으며, 그 구조는 (평면적 차이 상으로) 놀이할 수 있는 놀이터이다. - 프로이트의 꿈의 장면에서 꿈의 대상인 한 사물에 다양한 성질이 이전(déplacement)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베르그송에서는 신체(질료)라는 내부에서는 다양한 성질(과거 기억)들이 놀이(jouer)할 수 있고, 그것을 영혼(사유)라는 내부에서는 상상(imaginer)한다. (MM, 251)].
 
3. 세 번째 기준: 미분자와 단독자(le différentiel et le singuiler) (참조: 『차이와 반복』, CH. IV, s 2. p. 221- )
 
상징적 요소, 즉 지위의 단위(통일성)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실 구조의 내용성, 그중에서 외연적 구분을 다루면서 잠재성의 내용의 차이(공간적)를 구분한다. 이 구분 이후에 내재적 힘(권능, puissance)의 세분화(différenciation)로서 차이(시간적, 반복에서 오는 차이)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공간적 차이로서 미분화의 예는 언어학에서 기표의 차이를 다루면서 순수 형식적(논리적이 아니다) 차이를 다룬다. 그 구성에 대한 논의로서 언어학에서 출발한다. 언어학에서 음소(phoneme) b/p는 두 단어를 구별(차이)하는 최소단위이다. 이런 관계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요소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 3+2(산술적) 2/3 (기하적) 경우이다. 두 번째, x2 +y2 -r2= 0 경우이다. 항들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경우에서 [타원의 두 초점 사이 크기에서] 정해진 가치를 가진다. 셋째로 ydy +xdx =0, dy/dx = -x/y 경우가 있다. 각 항은 자체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관계에서 상호적으로 규정된다. 이런 상징적(symbolique, 기호적)관계는 미분적이다. 이런 구조주의 기원에는 수학자 집단 부르바키(Bourbaki)에서처럼 공리주의적(axiomatique) 측면이 있다. 들뢰즈는 부르바키 경우는 다른 측면의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공리라는 것은 상상적이며, 기호적(상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바이에르스트라스(Weierstrass)와 럿셀(Russell)의 정태적이고 서수적인 해석을 부여한 미분계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물에서 미분화에 의해서 생긴 가루들, 즉 미분들은 [무의식에서 정태적으로 구분된 심리적 개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독자들이다. 수학적으로 예를 들면, 단독자들은 삼각형의 각 꼭지점들이다. 그래서 상징적 요소(수학적인 기호)들의 상호 규정(détermination réciproque)이 단독적 점들의 완전 규정(détermination complète)으로 이어진다. 이런 전망에서 단독자란 구조가 있는 모든 영역에 속한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주사위들 위에 나타난 점(단독성)들에 연관이 있다. 모든 구조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고 할 때, 하나는 미분적 연관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단독성들의 체계이다. 이 단독성은 구조 속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수학적 은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중요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에 요소적 구조를 파악하는 경우에서이다. 그는 음소(phonème)와 같은 지위를 지닌 단위들로서 친족소(parentème)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친족관계에서 네 개의 연관, 즉 형제/자매, 남편/아내, 아버지/아들, 외삼촌/생질의 연관은 단순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형성처럼 (외디푸스) 신화 속에서도 신화소(mythème)들이 상호 규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조의 규정(détermination)은 구조가 작동하는 것을 표현하는 태도의 이론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단독성들은 기호적(상징적)요소들과 요소들의 연관에 상응할 뿐 이들과 닮은 점은 없다. 이 단독자들 중에 어떤 것은 변수가 되고 어떤 것은 함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것은 구조 내에서 명칭의 영역이 되고 다른 것은 태도의 영역이 된다. [한 단독자의 두 성격(속성) 한편으로는 대상으로서 몸짓으로(corporel), 다른 한편으로는 소리 등의 비형체적(incorporel) 표현으로 드러난다. 몸짓에 이름을 붙여주고 표현을 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미분화에서는 이 둘 모두가 동태적인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라는 의미에서 잠세태가 아니라 잠복기(잠재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깡의 제자인 르끌레르(Serge Leclaire)는 무위식의 상징적 요소가 어떻게 신체의 리비도 운동에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자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에서도 보인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각 생산양식은 관계들의 가치에 상응하는 단독자들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다. 진실한 주체가 구조 자체, 즉 미분자와 단독자, 미분관계와 단독적 점들, 상호규정과 완전규정 등이다. 생산관계에서 "진실한 주체는 참여자나 행정인... 이 아니라, 오히려 지위와 기능의 분배와 정함(définition)이다. [주체가 프로레타리아의 인간이란 측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지위와 그 실행방식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실행방식을 단독성으로 파악하여 보라.. ]
 
[언어학적으로 음소의 문제제기가 중요하다. 단어에 내재해 있는 음소가 개별적이지만, 위치가 있고, 그와 다른 음소와 차이를 나타내면서 순서적 상호 연관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미분에서, 특히 포물 곡선에서, 기울기인 접선은 순서적이고 정태적 연관에서 그 힘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과 닮았다(라이프니츠와 럿셀). 이 세 번째 기준까지는, 정태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식의 태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준은 의식의 내재적 힘으로서 무의식 내에서 기준을 발견한다.]
 
4. 네 번째 기준: 차별자(le différenciant, 분사형에 주의 할 것), 차별화(la différenciation): 참조: 『차이와 반복』결론 s3 p. 358. .
 
구조들은 요소들, 연관, 점(단독자)들 덕분에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다.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고 소우주적 구조(micro-structure)이다. 쟈곱슨(Jakobson)이 음소의 질적 지위를 문제 삼으면서, 구조의 양태 또는 이론의 대상이 잠세성(virtualité)이라 한다. 여기서 잠재적이라는 것은 자신에 고유한 실재성(réalité)과 자신에 고유한 이상성(idéalité)을 지닌다. 그래서 구조에 대해 사람들은 현실적이지 않는 실재(réelle)이며, 추상적이지 않는 이상(idéale)이라 말하리라.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자주 일종의 저장소 또는 이상적 장부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모든 구조가 다수의 잠재적 공존(coexistence)이라 한다. 그리고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독창성이란 사회체계 요소의 공존과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방식에서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 속에 무엇이 공존하는가? 그것은 모든 요소들, 관계와 관계의 가치들, 관련된 영역에서 단독자들이다. 이런 공존은 혼융도 비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이다.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현실화(actualiser)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화 여기 지금 현실화된다는 것은 그런 관계, 관계의 그런 가치, 그런 단독성들이고, 다른 시각에 다른 곳에서는 다른 것들이 현실화된다. [이 현실화란 인간의 인격이 이런(이슬람) 문화에서 이렇게(이맘), 저런(힌두교) 문화에서 저렇게(브라만) 실현화(réalisation)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적 언어(langue)도 없고, 전체적 사회도 없으며, 우리가 덧보탠다면, 전체적으로 진과 선을 지닌 어떤 신적 존재도 없다는 것이 된다. 잠재성으로서 구조는 [공존이란 의미에서 보면] 미분화되어(différentiée)있다 하더라도, [공존의 속성들이 아직 발생적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아직 세분화되어(indifférenciée)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라는 것은 음소관계 t/c를 구성하는 différent/cation이라는 명칭으로 지적될 수 있는 이중적 측면을 분리할 수 없다.
 
모든 세분화 즉 현실화는 두 개의 길, 종과 그 부분들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류와 종이란 생물적(양적 개체) 분류와 다르다. 종과 부분들이란, 한 덩어리와 그 덩어리의 일부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덩어리의 현실화와 그 부분의 현실화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종과 부분들의 현실화의 과정에는 항상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잠재적 공존의 요소들은 다양한 리듬에 따라서 효과를 [시간 속에서] 발휘한다. 시간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에서 현실화로 이행하는 것이지, 한 현실적 형식에서 다른 현실적 형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질료(원질)의 자기 변형과정이며, 그리고 질료의 변형 과정에서 어떤 형태가 나타나났다고 해서 그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의 자기변형에서 일어나는(여기에 반복의 의미가 들어 있다) 것이다, 결국 질료의 자기 변형의 과정에서 보여진 단면들은 효과이며 결과물이며 사건인 셈이다. 이 사건에서 원형질료를 순수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순수사건은 기억의 혼재인 셈이다.] 이런 이행을 통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구조가 종들과 그 부분들을 생산한다(produire)고 들뢰즈는 말한다. 구조는 이들을 세분화된 종과 부분들처럼 생산한다. 그래서 생성(la genèse, 발생)은 시간처럼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로부터 구조의 현실화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내적 다양한 시간성과 정태적 순서로서 생성(발생)라는 두 개념은 구조의 놀이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생산을 스피노자에 비추어서 자연(질료)이 속성(종들)을 효과화하며 그 속성을 현실화하는 사물들(부분들)을 양태라 볼 수 있다. 이 양태가 질료적 차원과 달리 비형체적 차원에서 언어행위 즉 표현(문장)을 다룰 수 있다. 이 표현은 사유의 양태와 같다.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들뢰즈는 질료의 차원에서 보아 이 비형체적 사유의 양태가 형체적 사물의 양태와 동시에 생겨나는 두 가지 길을 묘사하려한 것이 아니다. 설령이 두 가지 길이 같은 시간에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기표와 기의가 서로 필연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서로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두 양태는 구조와 뗄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두 양태사이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스피노자에 여러 속성들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듯이 (생명 현상의) 발생적 차원에서 보면 두 개는 생산되고 있는 중이며, 또한 권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는 이 세분화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구조는 자체적으로 보면 미분화(différentielle)이나, 그 효과(결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분화의 작용(différenciatrice)이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이이용(Jean Pouillon)의 문제제기에 이어 뒤메질(G.Dumézil)은 종교들과 한 종교의 신들에서 류적차이와 종적차이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부처로 화한 것이 종이라면, 지혜를 밝혀주는 관음보살, 병을 고치는 약사여래, 성불로 이끄는 미륵 보살 등등은 부처의 부분들의 효과화 이다.] 이런 구별로부터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 상상적인 것은 [부분적인] 각 항들에 총합적 매카니즘의 총체적 효과를 집결시키는 것이라면, 상징적인 구조는 항들의 미분화와 그 결과의 세부화를 확인 시켜준다. 라깡의 융에 대한 비판이나 "신비평"의 바슐라르에 대한 비판은 상상에 대해서이다. 뒤메질을 논평한 오르티그(Edmond Ortigue)는 "사람들이 질료적 상상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감소하며 사람들은 동등성에로 향하고, 사람들이 사회의 형상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증가하며, 사람들은 구별된 형평성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제 들뢰즈는 탐험을 깊이로 향한다. 구조들은 무의식적이다. 구조들의 생산물 또는 결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결과(효과)로부터 구조들을 읽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재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의 제자 밀러(J.A. Miller)는 환유적 원인성(causalité métonimique)의 개념을, 알뛰세르(Althusser)는 구조적 원인성(causalité structurale)의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구조의 무의식이 미분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무의식이 구조이라는 측면에서 미분적이지만, 무의식이 생성의 권능으로 실현화의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세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밀러와 알뛰세르의 구조 읽기는 미분적 구조 읽기에 끝나는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작은 지각들을 미분적 무의식으로 제시했고, 반면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 힘들의 갈등 또는 욕망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의 기원의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욕망의 수준, 연합적 이미지의 수준, 대립 관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무의식을 욕망도 표상도 아니고, 항상 비어있다(toujour vide)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질료와 같아서 무미 무취 즉 비가치 개념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스피노자의 자연, 베르그송의 본성과 같다. 베르그송의 세 가지 본성은 구조(이마쥬)가 의미를 표출하는 장면인 셈이다.]
 
무의식은 항상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인간에 관한 문제제기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제기한 방식을 따라가면 풀 수 있는 해결이 항상 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정신병환자의 치료처럼]. 알뛰세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제기된 문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우나, 라깡에 이어 르끌레르가 갈등의 전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제 양식[문제제기방식]에 의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제제기나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주관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니라, 객관적 카테고리이며 충만하고 전체적인 객체성(objectité)이라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조적 무의식이 미분적인 동시에, 문제제기적이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열(sériel)이 있다.
 
[구조는 규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다. 구조는 결과물로서 그 근원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결과라고 말할 정도로 인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결과의 효과나 의미는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서 성립한다. 얼마나 많은 결과들이 현실의 장에서 원인(동기)에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소멸하는가! 또한 의미 있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의미의 부여에서 계열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의미 부여자가 누구인가 라고 물음을 제기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가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대자아일 것이며, 자의식의 발동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
 
5. 다섯 번째 기준 : 계열(sériel)
 
지금까지 설명된 구조는 아직 작용(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위의 네 가지와) 다른 절반의 기준을 회복한다면 구조는 움직이며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미분화된 상징적 요소들이 계열로서(en série)조직화 된다. 하나의 우선적(première) 계열과 파생된 다른 부차적 계열은 서로 자치적이지만, [비형체적인 것과 형체적인 것으로서] 음소들(les phonèmes)과 형태소들(les morphèmes), 경제적 계열과 다른 사회적 계열 [경제적 상품 생산과 문화적 작품 생산], 또는 푸꼬가 말하는 [말과 경제활동과 인간] 언어적, 경제적, 생물학적, 삼원적 계열처럼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는다. 문제는 이 우선 계열이 기초를 형성하는지, 우선 계열이 기표이면, 다른 계열은 기의인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구조가 계열로 되어 있고 게다가 다양한 계열(multi-sérielle)이라고 만 말하자.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상상과 상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즉 한편으로 미분적 연관의 요소로서 동물 종의 계열과,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으로 파악된 사회적 지위의 계열 사이에 대치는 차이의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개별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고, 상호주관적(intersujectif)이다. 무의식은 계열로 전개되고, 기표와 기의로서 뿐만이 아니라 두 계열은 고려된 영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된다고 한다. 그가 포우(Edgar Poe)의 『훔친편지』에 대한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구조가 어떻게 두 개의 계열, 왕-여왕-장관 계열과 경찰-장관-뒤팡 계열을 연출하는지 보여주고, 프로이트의 『쥐 인간』에서 아버지-자식의 이중 계열을 기초로 하여, 각각(아버지와 자식)은 빚-친구, 가난한 여인-부유한 여인이라는 4개의 항들에게 역할을 한다.
 
구조가 계열로 조직화된 경우에 진실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의 결정은 상징적 요소들의 선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우선(일차적) 계열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차적(이차적) 계열의 구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음악과 가깝게 느껴진다. 그 예로서 솔러스(Philippe Sollers)의 소설『드라마(Drame)』와 페이(Jean-Pierre Faye)의 『유비들(Analogues)』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두 계열로 하여금 서로가 단순히 반영되지 못하게 하고 바로 그때도 그 항들 하나 하나에 정체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가? [우선 계열들이 상징적으로 연관 있기 때문이고, 그 연관이 실현화와 관련이 없으며, 단지 의식 내에서 구조적으로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 양상은 실재성도 아니고 상상성도 아닌 제 3의 것이다. 이 제 3의 것에는 다양하게 이전이 가능하다. 이 이전도 상징적 이전인데 두 부류로 은유적과 환유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꿈의 분석에서는 이 상징적 이전으로부터 상상성과 실재성을 구분하여, 환자의 병의 초발전조(초기 정신적 상흔)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상징적 이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나 그 환자에게는 고유하다. 왜냐하면 환자의 과거경험은 분명히 있었으나, 지금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 전조는 환자의 자아에 자리가 없으나, 무의식에서는 그 자리는 (정해진 크기도 위치 없이) 있으며(유크리트의 점처럼 크기 없이 위치도 없이, 산술에서 0처럼),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은유로든지 환유로든지, 채우려 들어온다. 왜 이런 방식을 취하느냐는 검열의 논의이다. 그런데 이 위치를 우리는 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무의식은 위상처럼 존속한다.] 자, 라깡의 『훔친편지』의 분석에 따르면 일차적 계열에서 장관은 이차적 계열에서 여왕의 위치에 있듯이, 『쥐 인간』에서 가난한 여인이 친구의 위치에 있듯이, 레비스트로스에서 높은 인격(personne d'en haut)으로서 쌍둥이(토템) 계열이 낮은 인격(personne d'en bas)으로서 새(토템)의 계열에 이른다. 이런 두 계열의 상대적인 이전(déplacement)은 전혀 부차적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 즉 싱징적이며, 본질적으로 구조의 공간 속에서 위치에 속해 있다. 구조주의가 [프로이트로부터 라깡이 주목한] 이 은유와 환유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둘(은유와 환유)은 상상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 전혀 아니며, 구조적 인자들(facteurs)로부터이다. 그 두 인자들은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한 계열에서 동일 계열의 내부로 이전의 자유의 두 정도를 표현한다. 상상적이지 않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이 둘은 이 둘에 의해 활성화된 계열들로 하여금 항들을 뒤섞게도 이중이 되게도 못하게 한다. 상대적 이전이란 구조 속에서 위치의 일부를 차지한다면, 그 상대적 이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상징으로서 위상은 아무 것도 무의식으로서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창고이다. 그 창고는 빈 창고로서 무(무능)가 아니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빈(의미) 창고라는 것이다. 즉 대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담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고는 상징이 만든 것으로 이데아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라깡의 분석을 따라가면, 최고 관념(신)의 이데아처럼 등질적 성질로서 빈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질료로서, 가득 찬 그러나 아직 의미가 발현되지 않은, 그 무엇과는 반대의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다섯 번째 기준인 계열에서 들뢰즈는 라깡을 충실히 따르면서 생물학적(질료적) 또는 심리학적(시간적) 관심으로서 시간성에 대하여 다루는 측면을 도외시 한 것 같다. 아니면, 이런 구조 해명으로 나아가 보라. 그러면 빈 것으로 밖에 안되지 않느냐라고 반어적으로 서술하고 난 뒤, 그 빈 것 자체가 무엇인가로 실재로는 충만 되어 있고.. 그리고 상징(징후)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6. 여섯 번째 기준 : 빈 상자(la case vide)
 
구조는 완전히 역설적(paradoxe)인 대상 또는 요소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훔친편지』에서 편지와 『쥐 인간』에서 빚의 경우에서 대상은 특출하게 상징적이다.
 
특출하게(éminemment)란 의미는 그 대상이 다른 계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해당하는 계열에서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계열에 동시에 내재하는 이것을 대상=x 즉 수수께끼의 대상, 대운동자(grand Mobile)이라 부르자. 라깡은 편지와 빚의 특별한 역할을 발견한 것을 인위적이며, 일반적 방법이며, 모든 구조에서 기준(critère)이라 하고 마치 노래에서 후렴처럼 순환한다고 한다. 그의 제자 그린(André Green)은 『오델로』에서 손수건이,『햄릿』에서 왕위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분석에서 상징적 대상(왕위)은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대상으로 본 라깡의 장점이다(제1기준에서)] 다시 한번,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첫 번째 차이가 있다. [여기서 실재(기표)와 상상(기의)과도 다른 상징은 구체적 대상(자의식, 무의식)이 아니라, 자의식이 만든 허구의 대상(빈 상자)이다. 왜 들뢰즈는 여기서 언어학적 도식에서 배제된 '구체적 실물'에 대한 언급 없이 허구의 대상을 언급하는 것에 머물까? 이 논문은 후기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탐험이 시간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논문은 라깡과 푸꼬의 영향권 내에서 푸꼬의 『말과 사물(1966)』이후에 그의 저술『차이와 반복(1968)』이전에 썼을 것이다.] 상상의 [실재에 대한] 전투적 성격에 반대하는 제3자(상징적인 것)는 본질적으로 상징체계 속에서 개입한다.
 
라깡의 분석에 따라, 수수께끼의 대상은 자체적으로 이전한다. 그 대상의 성질은 그것을 찾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자기 장소가 없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화폐라는 상징은 물건이 있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토지난 창고의 상품처럼 자기 자리가 있지 않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금본위라고 하지만 주식처럼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 이 분석을 잘 들여다보면 라깡 만큼이나 들뢰즈가 자본주의 물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물신, 이름을 부르는 신의 모습, 자기 배타적인 모습의 신과 지정학적 위상이 없다는 신의 모습, 모두를 지니고 있다.] 라깡은 『쓴 글들(Ecrits)』속에서(p.25)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C 4장)베르그송의 무의 분석에서 부정판단과 관련하여] 마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책을 찾으러 갈 때, 그 책의 목록카드가 표현하는 것처럼..." 목록카드는 그 책이 그 서가에 있지 않으면, 빈 종이 인 셈이다. 이 카드가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그래서 모든 구조는 원본인 제3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하고, 그런데 제3자는 자기의 기원이 없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대상, 즉 대상x는 차이 자체의 세분화능력(le différenciant)이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형상적 신을 잘 표현한 것인가? 기원이 없으면서도 존재하고, 그리고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상징이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에서 보면, 바람소리일 뿐인데, 이 표지(상징)가 실물을 대체하는 능력이 있으니... 어휴, 여기에 매여 얼마나 많은 인민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놀이에는 빈 상자가 필요하다. 빈 상자 없이는 아무 것도 전진하지도 작동하지도 못한다. [데모크리토스를 연상해야 하는가? ] 대상=x가 매번 위치 이전하는 것이 그 자리이라고 하며, 라깡은 브릿지 게임에서 버려진 패의 자리(la place du mort)를 상기시킨다. 푸꼬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벨라스케즈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왕의 위치(la place du roi)를 상기시킨다. 구조주의 있는 곳에는 Zéro(0) 등급이 있다. 솔러스와 페이 경우에는 문학에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맹점(la tache aveugle)을 상기하게 하며, 여기서 문학소들(littérèmes)로서 계열을 조직화하여, 문학을 허용한다. 밀러(Miller)는 프레게(Frege)에서 제로(Zéro)의 지위를 빌려왔다. 레비스트로스는 [토속 원주민 문화에서 권능있는 정령과 같은 실재인] "마나"(mana)를 "유동하는 기표"의 존재, 상징적 제로(0) 가치의 존재라고 인식한다(『의미논리』제8단원(p. 64)에서). 쟈콥슨의 경우에 음소 제로(le phonème zéro)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 비평의 대상은 언어행위 중에서 작품 속에 미리 존재하는 잠재성(virtualités)을 규정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자체는 자기의 고유한 잠재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캐롤(Lewis Carroll)과 조이스(Joyce)는 "단어들이 든 가방 (단어가방)"(mots-valises)란 개념을 창안한다. 『핀간의 각성(Finnegan's Wake)』속에서 한 글자가 우주이고, 세계의 모든 계열들을 재통합한다. 캐롤에서는 단어가방은 적어도 두 가지(말하고-먹고) 기초계열을 내포하고 있다. 신조어인 스나크(Snark, 『의미 논리』p. 60와 여러 곳에서)는 무의미(non-sens)이나 두 계열을 활성화시킨다. 이 단어는 문제 제기적(problématique) 대상, 즉 대상x를 지시하는 한, 단어x 이다. 이 대상x는 두 계열 사이의 홈을 파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을 채워 넣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마나"에 관해서 제시하고, 마나를 "거시기"(truc)나 "아무개"(machin)라 본다. 거시기라는 무의미는 의미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과도함(l'excès)이다. 이런 의미를 푸꼬가 분석한 루셀(Reymond Roussel)의 음소적 차이에 의한 테크닉에서, 말라르메(Mallarmé)의 계열들 사이의 연관적 체계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이중 측면을 지닌 빈 상자의 효과성을 주목한 것이다.
 
대상=x라는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것은 이 논문의 제목처럼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인식해야 할까」이며, 정체성을 표시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위의 문제에로 이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대상=x가 상징적 남근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 자기와 연관해서 항상 이전되어 있으면서, 어머니의 편에서 그것(상징적 남근)을 발견할 장소가 없다. 결국 상징적 남근은 편지, 빚, 손수건, 왕위, 스나크, 마나 등인데 비해, 아버지와 어머니 [왕, 장관, 여왕] 등은 상징적 요소들이다.
 
남근(팔루스)이 마지막 응답이 되지 못한다. 이 자리는 성적구조의 빈 상자에 특징을 부여하는 의문과 질문의 자리이다. 이 팔루스는 교환에 관계없는 "어떤 것"으로 있은 것이다. 이것이 "노동일반"으로서 가치이다. 가치와 팔루스, 경제적 물신과 성적 물신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 문제는 의미 없다고 한다. 하여튼 대상x가 정체성을 지니려는 것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고,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모든 위치에 연관해서 스스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대상x가 구조의 각 질서에서 빈 장소 또는 구멍 뚫린 장소이다. [정체성과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의미에서 신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구조의 질서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빈 장소에서 소통한다. [각 학문은 하나의 같은 계 내에서 공통적 원리를 갖지 못한다. 각각의 학문은 각기 자기 계 내에서 정합성과 무모순성을 확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적 사회구조를 위하여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언어학에서 구조들은 상징적 요소 즉 궁극적 기표로 간주될 수 없었다. 또한 푸꼬는 "매순간에 개인적 경험의 고유한 구조는 사회체계 속에서 몇몇 가능 한 선택들(과 배제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반대로 사회적 구조들은 그 구조들의 선택점들 각각에서 몇몇 가능 한 개인들(과 가능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한다."(『말과 사물』, p. 392)고 말한다.
 
[구조를 무엇으로 재인식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대상x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상x는 자기 질서 속에 다른 구조적 질서들을 종속시킨다. 다른 질서라는 것은 현실화 영역으로서 개입한다. 2) 대상x는 다른 질서들 속에 있는 그 다른 질서에 대상 자체가 종속된다. (대상x는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에만 개입한다.) 3) 모든 대상들x와 구조의 모든 질서들은 서로 서로 소통한다. 각 질서는 우선적인 종의 차원으로 규정된다. 4) 이런 조건들로부터, 그런 역사적 계기 또는 그런 경우에서, 구조의 질서에 상응하는 그런 차원은 스스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서의 현실화에 복종한다(여기서 라깡의 "배제"(forclusion)의 개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들뢰즈는 구조에 대한 재인식의 방식을 6가지로 해명하면서 공간적 의미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 반복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로 탐험은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대상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것은 빈 것이라고 한 점에서 최고 형상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데아를 빈자리이라고 하면, 종래에 이데아의 등질적 충만성과는 다른 차원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존재로서 이데아는 플라톤의 실재적 존재로서 이데아와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데아의 실재적 존재의미를 살리자는 것이다. 이데아라는 것이 내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성립하는가? 이 말의 성립이 존재, 즉 시간의 역동성,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무엇인가? - 조각으로 흩어진 개체들, 단독자들(singuliers)이다. ]
 
7. 마지막(일곱번째) 기준: 실행에 놓여 있는 주체(Du sujet à la pratique)
 
이런 의미에서 장소(위치)는 구조가 현실화되는 정도에서 실재적인 존재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장소(위치)는 상징적 요소들로 채워진다. 존재자들에 채워지기 앞서 후자들이 채워진다는 점에서 후자가 우선적이다. 이것을 빈상자의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이 빈 것은 비 존재가 아니다. 푸꼬는 "이 빈 것은 모자람을 구멍파는 것도 아니고, 채워야 할 빈칸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사유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의 펼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말과 사물』p. 353) 고 한다.
 
이 빈 장소에는 장소의 이전이 뒤따르는 특출하게 상징적인 심급(l'instance)이 있다. 주체(le sujet)가 정확히 빈 장소를 뒤따르는 심급이다. 또한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intersubjetif)이다. 신의 죽음을 알리고, 인간조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어떻게라는 방법만 남는다. 니체가 절대 신이 여러 방식으로 죽는다고, 그리고 신들은, 하나의 신이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웃으면서 죽는다고 제시하려 했을지 모른다. 구조주의는 주체를 제거하는 사상이 아니라, 주체를 바수어서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서 주체는 항상 노마드(유랑하는) 주체이며, 비인격적인 개별화로 되어 있고, 전 개별적(pré-individuelle, 개체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전의 개체)인 단일자로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꼬는 "산개"에 대해 말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주관적 심급을 대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 조건들에서 진리체계가 "동시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의 두 가지 큰 우발사건(accident)은 유동하는 빈 상자가 진실한 결핍이거나 또는 빈상자가 채워져 정착적 결과로 사라지거나 이다. 언어학적으로 표현하면, 기표가 사라지거나, 기의가 사라지거나 이다. 신학-인간학 용어로 말하면, 신이 사막을 증가시키거나 [황폐화를 증가시키거나], 인간이 그것을 채우거나 이다. 인간과 신은 땅, 즉 구조의 두 질병이다.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은, 대상=x를 가치로 보는 빈 상자의 구조가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본주의 구조를 특징 지우는 상품, 화폐, 물신, 자본 등으로 표시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모순이 구조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제시한다. 모순은 상상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모순은 구조에 고유한 내적 시간 속에서 결과에게 구조의 자격을 부여한다. 모순은 구조 속에서 빈 위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생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일반적 규칙으로 보면,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이 양자의 관계는 시초에서 우선적 결과들을 가지는 구조적 작동에 의해 항상 부차적으로 생겨난다. 조금 전에 우발사건들이라 불렀던 것이 구조에 도달하는 것은 밖으로부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대로 내재적 "경향성"이다. 구조의 빈 상자 또는 주체에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념적 사건(l'événenemnt idéel)들이 중요한데, 이 사건들을 들뢰즈는 우발적인 것(accident)이라 부른다.
 
복잡한 문제들의 집합이 구조주의에서 제기되고 있고, 푸꼬의 구조적 "변환"(mutation)이나 알뛰세르의 "이전 형식"(formes de transition)이란 것도 구조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들은 빈 장소에서 해결될 문제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영웅도 있다. 이 영웅은 신도 인간도 인격도 보편도 아니며, 정체성도 없다. 이 영웅은 과도와 결함으로 타격 입은 구조의 분열(l'éclatement)을 확신한다. 그리고 영웅은 자신의 이상적 사건(l'événement déal)을 우리가 이미 정의했던 이상적 사건들에 대립시킨다. 이 영웅이 새로운 구조에 속한다는 것은 이 영웅의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힘에 의존하고 위치 이전을 뒤따르고 간직하는 민활성에 의존한다.
 
"주체에서 실천으로"라는 마지막 기준은 가장 모호하며, 미래의 기준이다. 앞선 여섯 가지를 통하여 다양한 영역들을 탐험할 수 있다. 구조의 수준차이에 따라, 실재와 상상, 실재적 존재들과 이데올로기들, 의미와 모순 등은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결과"들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어떤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조주의에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찬성하는", 그리고 그것을 생산할 줄 아는, 책들이 중요하다.
 
[이 주체에 대한 연구에서 전자 현미경이나 고도의 분석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독자의 진솔한 그대로 말씀 즉 진솔한 기록의 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결국 들뢰즈는 라깡이 분석한 진솔한 '작은 자아'를 설명한 것이다. 이 자아가 아직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아이다.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은 미래와 연관 있다. 미래의 문제는 기억을 포함하는 자기의 반복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논문은 그 당시(1967,?) 구조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인 셈이다.]
 
                                                  ***
 
"차이와 반복(1969)" 영문판 서문에 관한 견해  
  들뢰즈 pp. xv-xvii
 
우리는 이 서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를 먼저 말하자.
 
우리는 들뢰즈(Deleuze)가 베르그송의 철학적 문제제기방식과 프로이트의 심리적 문제제기 방식과 동일한 방향에서 철학사적 개관을 하고 있다고 본다 . 물론 대 철학자는 철학사적 흐름에 대한 견해에서 거의 동등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에서도 천상과 제작자와 생성의 3차원의 구분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사유의 사유가 있고,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의 합일로서 실현태가 있으며, 질료인으로서 잠세태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 현상에 대한 실재, 실재를 총괄하는 원리를 구분하는 개체성에 관한 논의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미 죽은 것에서 생명의 현상을 보는 19세기에 와서야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재성이 이미 수 억년의 역사와 기억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죽은 시체는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과거의 축적이며, 살아있는 생명체도 살아온 과정의 축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서장에 나오는 파라독스 3 가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분신(쌍둥이) 파라독스 (P. des doubles) [일자(원리)-다자 관계 - 고대철학]
 
대칭 파라독스 (P. des objets symetriques) [일자(주체)-타자 관계 - 근세철학]
 
무덤 파라독스 (P. des des sepultures) [일자(자아)-내재성 관계 - 현대철학]
 
이런 견해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제3장 "명제논리의 세 파라독스"에서 설명하는 지시화, 표출화, 의미화의 세 파라독스와 같은 맥락이다. 지시체, 표출체, 의미체의 세 경우를 설명하는데, 이 설명에서 각 대상은 이미 구체적 개별 물체와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가 현실적(위부의) 물체와 연관 없다고 하듯이 명제 의미는 구체적 사건의 진상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연관 있는 문맥 즉 지정학적 위상과 관계를 말한다. 이는 진리와 허위라는 가치가 문맥에만 연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위상이 일어난 사실의 내용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현상의 연결방식을 담론자가 의미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도 실재와 사실의 총체는 있었다. 문맥의 연결은 시각 즉 세계관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시각이 개념화되었다는 들뢰즈의 입장을 수긍한다. 그러면 총체와 내용은 개념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가? 어떻게 말하든, 말을 하는 것 자체는 표현이고 또한 시각이다. 이 시각들이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노마드의 세계이다.
 
들뢰즈는 노마드(nomade)의 세계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 또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까?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monad)는 자신 속에 모든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개체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과정 중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시각을 보충하고 확충하면서 부풀어 간다. 말하자면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시각의 자기 확장인 것이다.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시각에 만족하고 있다면, 노마드에서는 시각의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본다. 천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자아는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고자)넘어서 - 왜냐하면 그 본성이 자신의 한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 자아의 새로운 형성 즉 자기 형성에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이는 자신의 형성을 넘어서 개체들 공동의 형성체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제대로 보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 자체가 무덤으로부터 이탈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도 아니다. 무덤을 뒤에 유성처럼 달고 살아가며, 죽음의 신체를 데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무덤 즉 신체는 인간이 갖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체 이다. 왜냐하면, '삶의 양식'이란 문법에서, 또는 ?의미논리?라는 위상적 도식에서 죽음(무덤) 과 신체(추억)는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직접적 연관 중에 있음(연속성-기억)을 간직하고 표출하고 의미화 한다. 말하자면 이런 죽음과 신체를 반대 즉 대상(문자 그대로 앞에다 놓는)으로 여기고, 적으로 또는 무화 시키려는 의식자체가 병든 의식이다. 왜냐하면, 상대 없는 자신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다. 상대가 있는 긴장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다른 한편 상대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천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그리스트교인은 믿는다. 마치 기하적 점이 위치와 크기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천국의 세계가 있단다.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 명제자체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이다"만큼 더도 덜도 아닌 만큼 의미 있다. 자족적 존재가 있는 세계에서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미 현실적 세계와의 문맥이 없는 백색의 세계에서 의미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이와 같다. 스스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살아가려는 생명체가 남(타 생명)의 살을 먹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도사들의 삶에서도.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지상의 세계이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세계도 의미 있다. 채소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다른 의미란 전자의 두 세계와 후자의 세계의 차이로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비는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의미이다. 의미는 기본적으로 문장들 간의 관련 맺는 정도에서 의미가 표출된다. 누구(무엇)와 연관 맺었는가? 수 억겁의 인연 연기를 말할까? 그러고도 무엇으로 어디에서 진리와 가치를 말할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하여 한 시각.(Russ, 1993) .***
 
뤼스(Jacquline Russ) p. 237. Atlas de la philosophie, Kunzmann et 2, Paris, LGF, 1993, (Munich, DTV 1991)
 
독일에서 출판한 이 철학의 위상적 지도(Atlas de la philosophie)를 프랑스판을 만들면서 프랑스철학자 몇 명을 첨가했다. 그 중에 뤼스는 들뢰즈에 관해 반쪽을 할애한다. 여기서 그녀는 차이와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 "차이와 반복(1968)"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시각이 출현함을 알립니다. 들뢰즈는 사유된 실재를 익명의 영역 즉 주체 또는 인격적 개별성이 박탈된 영역으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주체의 정체성(동일성)은 부서져야 한다. 인격적 나(je)와의 모든 관련를 넘어서 자아의 동일성도 없고 주체도 없는 무한정한 우주가 나타난다. 결국 존재에는 인격이 없다.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72)와 더불어 인격 없는 욕망의 영역을 재발견하다. 이 욕망이 삶(la vie)을 감싸고 있고 또한 생활(la vie)도 생산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의 창조이자 권능의 의지이다. 이 욕망은 결함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권능이다. *-
 
[우리는 여기에 몇마디 보태자. 뤼스의 견해는 정신 분석적 담론에 상당히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 또는 자아의 부서짐은 소자아(moi)의 행태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미신과 환상에 빠진 주체를 넘어서, 소자아라는 현상(겉모습)을 표출하는 권능인 실재 즉 대자아(Moi)를 발견한다. 이 빙산의 물밑에 있는 의식과 같은 대자아는 욕망이다, 대자아는 어느 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이다. 존재는 인격도 사물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는 삶의 여러 양태를 생산하는 기본적 동력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있게 하는 근원이다. 들뢰즈의 사상의 전개로 보아, 차이와 반복에서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권능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고서, 안티-외디푸스에서 존재적 능력이 실현하는 방식과 실현한 사태들에 주목한 것이다. 이 생산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긍정 죽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영역판 서문의 개략***
 
철학사를 쓰는 것과 철학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사상가의 도구와 광활한 영역을 연구한다. 다른 한편 나의 도구를 잘 가다듬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작업의 결과물 다른 말로 하면 발견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흄, 스피노자, 니체, 프루스트를 열심히 연구한 후에 그가 '철학한다'는 노력으로 차이와 반복을 썼단다. 이 책에는 가타리와 함께 했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왜 차이와 반복과 같은 특별한 문제에 대해 집착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많이 다루어진 문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는 차이를 동일률에, 동일자에, 유사성에, 대립자에, 유비추리에 종속시키며, 또한 이 차이를 개념의 정체성에 도입했으며, 차이를 개념자체에 두고,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에 도달했다.
 
우리는 차이를 여러 방식으로 종속시킬 것이다. 먼저 차이를 생각하기 위해서(즉 개념 또는 주어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종적 차이는 류적 형식에서 동일적 개념을 미리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킨다. 그 다음 차이를 (지각의 관점에서) 유사성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술어의 관점에서) 대립에, (판단의 관점에서) 유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차이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은 차이의 유기적(organique) 표상을 제공하고, 라이프니츠와 헤겔과 더불어 영(혼)적(orgique *1) 표상을 제공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차이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반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방식으로 반복도 동일성으로, 유사성으로, 동등 또는 대립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경우에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서 취급한다. 그래서 두 가지(차이와 반복)는 둘 다 정확히 동일한 개념으로 표현되더라도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반복한다. 반복이 변화를 일으킨 모든 것은 반복을 감추고 동시에 은폐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양한 변종은 반복을 감추기 위하여 반복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종이 바로 반복의 조건, 반복의 구성적 요소, 특히 반복의 내부 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런(반복이란) 개념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변장하고 이전하는 것은 반복의 일부이며 차이의 일부 즉 공통적 이동과 흩어짐이다. 극한에서 차이와 반복의 하나의 힘이 있기보다, 다자 속에서 작용하고 다수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힘이 있지 않을까?
 
모든 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연관을 맺는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해 말하는 자기 방식을 갖춘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다. 철학은 초소한의 우월성조차 요구할 수 없어진 이래로 철학의 개념을 만들고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가지고 과학적 기능이나 예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 개념을 과학적 기능과 예술적 구조와 혼동해서 안되며, 과학의 이런 저런 영역에서 또는 예술의 스타일에서 이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과학적 내용과 예술적 내용은 매우 기초적이며, 이 내용이 과학 또는 예술을 진보하게 하기보다 얻어진 기능과 구조로부터 철학적 개념을 형성함으로서 철학이 진보한다. 철학은 과학 또는 예술에 대해 독립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념의 각각의 수준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이 두 개념 사이에 안정적 관계는 없는 지를 물으면서, 철학적 개념을 미분화(diffrentiatio)의 수학적 함수와 차이화(differenciatio)의 생물학적 기능으로 구성하고자 노력한다. 예술 과학 철학은 동적(mobile)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은 자체의 방식으로 서로서로 대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의 힘은 사유의 전통적 이마쥬를 문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마쥬에 의해서 우리는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할 때, 목표를 결정하는 사유의 다소 은밀한 선가정적 이마쥬가 있다는 것을 들뢰즈는 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유란 훌륭한 본성을 소유하며 사상가는 (당연히 진리를 '원하는') 선한 의지를 소유한다고 가정한다. 인지과정을 모델로,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또는 가정된 동일한 대상에 관한 모든 능력의 사용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오류 단지 오류일 뿐인 것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진리는 해결에 관여한 것, 다른 말로 하면 대답에 사용할 수 있는 명제인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고전적 사유의 이마쥬이다. 비판이 이런 이마쥬의 중심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사유에 대해 이런 문제 - 명제적 양상을 넘어서 지적하는 문제 - 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모든 인지를 벗어나는 뜻밖의 만남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그 사유와는 아주 다른 진실한 적과 대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사유를 사유의 자연적 무감각과 악명 높은 나쁜 의지로부터 멀어져가게 하며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비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들뢰즈에게] 이제, 사유의 새로운 이마쥬, 오히려, 새로운 이마쥬를 가두는 저[고전적] 이마쥬들로부터 사유의 해방이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 차이와 반복에서 이런 탐구는 자치적이며, 이것은 이들 두 개념을 발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것은 제3장이다. 이 제3장은 사유의 식물적 모델을 환기시킬 가타리와 더불어 행한 탐구에 이어갈 책의 입문으로 쓰인다. 사유의 식물적 모델(vegetal model)은 나무에 대립되는 뿌리이며 잔가지로 나뉜 사유 대신에 뿌리-사유(rhizome-thought)가 될 것이다.
 
*1) 뒤마는 'orgique가 그리스어 οργη에서 나왔다고 하고 격정(bouillonnement)으로 설명한다.
 
고전 그리스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orge: I. agitation interieure qui gonfle l'ame, - disposition naturelle de l'ame
 
II. sentiments violents ou passionnes, - ressentiment, colere - vengence, d'ou puniton, hatiment
 
 
참조 2)
 
경험론과 주관성 1953 [흄에 관한 연구]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니체와 철학 1962, 니체 1965
 
푸르스트와 기호 1964 - 증보 1970.
 
[왜 이서문에서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를 제외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송주의 1966]  
 
안티외디푸스 1972(avec Felix Gattari)
 
카프카 - 미세 문학을 위하여 1975 (avec Felix Gattari)
 
뿌리 1976 (avec Felix Gattari)
 
천개의 고원 1980 (avec Felix G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avec Felix Gattari) 
 
참조 3)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에 대한 한 견해 (Oriol, 1979)***
 
오리올(Timmt Oriol), p. 193, Histoire de la philosohie, Nathan 1979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68)에서 자식-부모관계에 근거한 전통적 정신분석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 "어린이는 아빠-엄마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법사 놀이, 카우보이놀이, 술래잡기놀이(도둑과 순경) 기차놀이, 작은 자동차놀이도 한다. 기차는 아빠가 결코 아니며, 기차역은 어머니가 아니다." 확실히 어린이의 '욕망하는 기계(기관 *4)(Les machines desirantes)' (충동들과 기관이 지향하는 다수의 대상들의 이상야릇한 통합인 기관차)는 부모관계를 위한 한 지위, 즉 단지 한 지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지위를 허용한다.
 
(리샤르 견해) 또한 오리올은 리샤르(Michel Richard)가 다음과 같이 썼다고 소개한다. ?만일 사람들이 안티-외디푸스에서 아빠-엄마-얘기라는 삼각관계의 밀접하고 폐쇄된 영역에서 작은 욕망들과 큰 욕망(le Desir)을 가두고 있는 부르주아 정신분석의 비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들뢰즈가 이 작은 욕망(ce desir)을 생명의 활기와 복잡성에 닮은 보편적 흐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욕망과 무의식적 힘들 때문에 그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관"이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욕망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임과 동시에, 특히 욕망의 혁명적 능력 지칭하고자 한다. 욕망은 개인적 무의식에서 보다, 큰 조직체와 억압장치에 대해 욕망이 대항하여... 항의하는 모든 형식들에서 더 [그럴듯한] 기준이 된다..."
 
(72년 들뢰즈 자신의 견해) 또한 오리올은 클레망(Catherine, Backes-Clement)이 대담한 들뢰즈와 가타리와의 대담(LArc, n. 49, 1972)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하는 것,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천에서 정신분석학 자체이다. 가족적이거나 분석적이거나 간에 외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기관을 억압하는 장치이지, 무의식 자체의 형성체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를 너무나 허락하는 우리들의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성관계보다 소위 더 낫다는 이상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더럽고 작고 가정적인 비밀'로 환원되지 못하는 성관계의 이름으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디푸스의 상상적 변이들과 구조적 불변이체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두 끝에는 욕망하는 기관들의 똑같은 막다른 골목과 똑같은 붕괴가 있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신경증으로 만든다. 이런 신경증화 작업은 또한 정신병적인 사람을 외디푸스로 만들려는 작업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4) 여기서 기관은 기계적 기관이 아니라, 생명적 나아가 영(혼)적 기관이란 뜻으로 우리는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외화된 정신과 같은 형상이 아니라, 형성 과정 중인 질료적 성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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