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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홍문표 시창작 강의 노트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5
2019년 12월 21일 16시 38분  조회:749  추천:0  작성자: 강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홍문표
1. 시인의 꿈, 시의 꿈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의 「갈대」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1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1)
홍문표
1. 시인의 꿈, 시의 꿈
(1). 박완서의 「시인의 꿈」
소설가 박완서가 「시인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헐리고 궁전 같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거지같은 생활에서 궁전 같은 도시문명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궁전 같은 아파트촌 구석에 아직도 어느 노인이 사는 판잣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그걸 보고 놀라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걸 철거해야 한다고 시청에 진정도 하고 반상회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다. 아니 곧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다시 그 판자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그림책이 있어 열어보니 거기엔 수많은 곤충들 사진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이로운 것만 쓸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시가 있으면 살맛이 난다고 하면서 다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어를 수집하러 다니는데 요즘 말은 모두 욕심을 위한 말뿐이어서 시어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를 쓰려면 욕심이 없는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노인은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욕심으로 때 묻지 않은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과 욕망으로 때 묻지 않는 삶, 물질과 문명과 경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모두 제정신이 나간 이 황무지 같은 삶이 아니라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동이 있는 삶,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는 삶, 그것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고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아닐까.
(2). 워즈워드의 「무지개」
가슴이 울렁거리는 삶이란 말을 들으니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생각난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려서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하기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가
타고난 그대로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시인 워즈워드의 꿈은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마음, 그 감정, 그 순수함이 어려서나 커서나 늙어서나 한결 같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도 울렁거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울렁거림이 없는 시인, 울렁거림이 없는 독자, 울렁거림이 없는 시, 울렁거림이 없는 세상, 거기엔 시인도 죽고, 시도 죽고, 세상도 죽은 것이라는 것이 바로 워즈워드의 시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싶은 좋은 시란 울렁거림의 시가 아닐까.
울렁거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다. 충격이다. 호기심이다. 깨달음이다. 깨어남이다. 기쁨이고 반가움이고 충만함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2. 문학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가.
(1). 좋은 시의 구별은 우선 주관적인 평가의 문제다.
좋은 시란 평가적 용어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망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를 누가 비판할 경우엔 누가 감히 내 시를 평가할 것인가 내 시는 내가 잘 안다 라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땀 흘려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물에 부딪친다. 그때마다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고, 그 사물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평가는 불가피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려면 그 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만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저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다. 거기다가 과거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있고 미래에 대한 삶의 욕망도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떤 사물의 가치는 각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삶의 총체적인 인식이 된다. 이 때 나와 그 대상의 관계인식이 보다 긍정적인 때는 좋은 것으로 부정적일 때는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한편의 시를 보고 좋은 시라고 인식하는 것은 시에 대한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경험과 지식과 소망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나쁘다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문학비평에서 개인의 주관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는 비평을 인상비평, 또는 주관비평이니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2). 그러나 문학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나 소설이나 드라마라고 하는 이 문학의 장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개인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서 즐겨온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룰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제도와 관습을 갖고 있다. 제사에는 제례가 있고, 결혼에는 혼례가 있고, 공놀이에는 경기규칙이 있다. 특히 공놀이에는 축구도 있고 야구도 있는데 같은 공놀이이지만 저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를 상상력과 결합하여 즐기는 문학놀이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자 놀이이기는 하지만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룰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어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그 선수가 정해진 규칙, 즉 룰 안에서 공놀이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도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선수를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선수들보다 공놀이를 잘 하는 경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좋은 문학, 좋은 시를 말하는 것은 첫째는 문학이라는 장르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 다른 시인 다른 작품보다 개성 있게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좋은 시이냐 나쁜 시이냐 하는 작품의 평가는 개인적 지식과 경험과 욕구에 따라 주관적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사적 제도와 관습이라는 객관적 룰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3). 문학 평가의 네 가지 관점
그런데 문학을 인간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축구나 야구의 제도는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문학에서 제도와 관습이란 민족마다 시대마다 보는 관점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엘리옷 같은 사람은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한마디로 오류의 역사라고 지적한 바다 있다. 사실 문학이란 수치로 재기 어려운 사상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분명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 시는 소설과 다르고, 소설은 드라마와 다르고,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같은 시라고 해도 작품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째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른지를 구별해 보는 것이 비평이고 시학이고 시를 보다 잘 쓰려는 시인들의 관심이 된다.
작품에서 느낌이 다르고 충격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품 감상이라고 하고 그 느낌이 왜 다른지를 구별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잣대가 있어야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는 애당초 물건과 달리 여러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
문학을 보는 잣대가 다양한 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단지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도 있고, 그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도 있고, 또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을 보는 데는 적어도 작품자체의 입장,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작품의 재료에 관한 입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사를 보면 작품 작가 독자 재료라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방론·표현론·효용론·존재론이란 관점의 잣대가 되어 저마다 평가해 왔으며 좋은 작품에 대한 입장도 이 네가지 관점에 따라 다름을 볼 수가 있다
모방론이란 문학이 아무리 날고뛰는 창작이라 해도 결국은 자연이나 인생이나 사회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단지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문학의 질서를 배우고 사회를 소재로 하여 문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회의 반영이니 인생의 거울이니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표현론의 입장은 문학이란 인생이나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감정이나 욕망이나 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을 촛불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존재가치를 실용성, 또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를 실용론 또는 효용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문학작품의 외적 조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작품 그 자체라는 것이며 그러기에 반영이니 표현이니 실용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작품이라는 구조 안에 수용되는 것이기에 문학의 가치평가는 작품 그 자체에 한해야한다는 존재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4). 네 가지 문학관에서도 좋은 시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기 관점은 단지 이론이나 관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은 작품 그렇지 않은 작품의 구별이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모방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문학은 현실을 잘 반영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이는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이런 시를 좋은 시로 추천한 경우가 있다.
자식이 진정한 자식이 되는 길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지상의 모든 자식의 의무는 부모를 이기는 것
부모를 이겨라
낡은 세대를 이겨라
조금은 가슴 아프게
조금은 배반 스럽게
- 박노해 「부모를 이겨라」에서
이 시는 젊은이들이 부모와 과거를 뛰어 넘어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라는 교훈적인 시다. 그러나 부모를 낡은 세대로 규정하고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시를 상상과 창조의 미학으로 본다면 이 시는 행갈이만 있을 뿐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다. 그런데도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 있다고 모두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신경림의 「갈대」를 추천한 경우가 더 많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의 「갈대」
이 시에서 갈대는 자신일 수도 있고, 갈대 같은 농민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울고 있는 갈대와 온몸이 흔들리는 갈대를 통하여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극적인 존재의 자각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시지만 앞의 박노해의 시와는 시적인 감동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같은 잣대의 시에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시의 경우도 그렇다. 다음 두 시를 보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의 「행복」
이 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로 추천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이기적인 세상, 이기적인 사랑으로 만연된 현실에 어르신 말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깃발」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이라는 데서 그 권위가 플러스되어 더욱 좋은 작품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같아서 독자를 긴장시키거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는 아니다. 같은 사랑의 시 일지라도 다음의 시는 느낌이 다르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유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도 하늘에도 네가 있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도 하늘에도 내 안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유치환의 「행복」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계인식과는 많은 편차가 있다. 유치환의 화자와 연인 간에는 매일 편지를 보내는 관계이고, 연연한 진홍 빛 양귀비꽃의 관계이고 사랑을 주는 시혜(施惠)적인 관계다. 그러나 유시환의 화자와 연인간의 관계는 물에 하늘에 내 안에 가득찬 관계다.
그들의 관계성을 각각 결론으로 말하는 대목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이고 훈계적인 고백이다. 그런데 유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그대와 내가 한 몸으로 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 크기에 늘 결핍을 느낀다는 패러독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시환의 작품은 내 안에 있는 이가 반드시 연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내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의 성찰을 가능하게도 한다.
물론 유치환의 시 세계를 「행복」이란 작품 하나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비교할 경우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간의 차이는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과 「행복」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도 편차가 크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와 고독을 깃발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 애수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하여 독자들을 아득한 허공에서 울렁거리게 한다. 앞의 「행복」이란 작품에서 느끼는 떨림과는 전혀 강도가 다르다. 따라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또는 작품에 따라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감동은 많은 편차를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같은 모방론이나 효용론의 입장에서 쓴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와 신경림의 「갈대」라는 작품을 비교할 때 신경림의 「갈대」가 보다 감동이 있고 충격이 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표현론이나 존재론의 입장에서 쓴 유치환의 「행복」과 유시환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비록 유치환이 문학사적으로 훨씬 비중 있는 시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의 시적 담론은 유시환의 것이 훨씬 간절하고 적극적이라는 데서 보다 좋은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느냐에 따라서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이는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유치환의 경우 「행복」과 「깃발」은 확연히 느낌과 떨림에 차이가 있다. 물론 박노해의 「부모를 이겨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환의 「행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감동과 떨림이 시인의 꿈, 시의 꿈이라고 할 때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좀 더 비평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에는 그보다 분명 우위에 있는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우리는 시 몇 편 쓰고 시집 몇 권 냈다는 것으로 누가 내 작품을 평가할 것인가 라든지 작품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는 오만한 고집만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들 간에 이처럼 상대적 우위에 있게 되는 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비밀을 터득하여 보다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는 좋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성실한 시인이 되자는 것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2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2)
홍문표
3. 좋은 시는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다
(1). 제도와 관습은 문화적 룰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인 좋은 작품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앞서 같은 공놀이라도 축구와 배구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축구와 배구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우선 공에 차이가 있다. 경기장의 크기도 다르다. 선수 숫자도 다르다. 경기 방법도 다르다. 다시 말하면 축구와 배구는 경기규칙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와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어떤 차이가 시와 소설을 구별하게 하는가. 그것은 축구와 배구가 경기규칙이 다른 것처럼 시와 소설도 언어의 표현규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시와 소설의 규칙은 어느 날 몇 사람이 모여서 정한 운동규칙과는 다르다. 그러나 시와 소설과 드라마도 인류의 오랜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문화로 정착된 제도와 관습이 있고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도와 관습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행위란 무엇인가, 이는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알고 이를 창작에 잘 적용하는 것이다.
축구는 축구규칙을 잘 아는 선수들이 직접 경기장에서 그 규칙의 범위 안에서 상대방과 대결하는 놀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시적 규칙, 시적 장르의 제도와 관습을 충분히 익혀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독자들과 시적인 소통을 하는 언어놀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가장 기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적인 제도와 관습, 말하자면 시가 소설과 다른 규칙을 올바르게 숙지하는 일이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을 어긴 반칙선수는 관중의 비난을 받고 심판의 제제를 받는다. 문학에도 완장을 한 심판은 없지만 독자라는 심판관이 있고 비평가란 심판관이 있고, 문학사라는 심판관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또는 문인은 자기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룰을 확실히 습득하는 일에 충실해야 하고 이 기본적인 룰을 지키고서야 좋은 시를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를 모르고 멋대로 시랍시고 써대며 시인행세를 하려는 오늘의 많은 시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들을 시의 기초가 덜된 시인, 시가 뭔지를 모르는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시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시가 소설이나 드라마와 다른 가장 근본적인 제도와 관습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시를 시답게 하는 기본 규칙은 무엇인가. 이 말은 이 요소들이 빠지면 시의 기본적인 속성이 상실된다는 말이기도 한데 시를 시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필자는 리듬(rhythm) 메타포(metaphor) 코노테이션(connotation)이라고 말하겠다.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모든 언어의 의미는 기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밤과 밥의 의미가 왜 다른지를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밤’과 ‘밥’은 ‘바’에 ‘ㅂ’받침인가 ‘ㅁ’받침인가 하는 음운의 차이에서 올 뿐이다. 따라서 시가 소설과 다른 점은 시는 소설보다 리듬이 보다 강조되고 보다 메타포가 강조되고 보다 코노테이션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경우 이 세 요소 중 어느 한 요소가 미흡하면 좋은 시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시를 위해서는 이 세 요소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겠다.
(3). 시는 첫째로 리듬이다
⓵. 리듬은 음성만의 율동이 아니다.
시의 기본 룰은 첫째로 리듬이다. 리듬(rhythm)의 의미는 율동(律動)이다. 이 말은 규칙적인 동작이란 뜻이다. 따라서 리듬은 소리의 일정한 규칙만이 아니다. 우리는 주로 리듬을 음악의 요소로만 배워왔고 고대시가의 경우 운문(verse, 韻文), 율격(metre, 律格),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 작시법을 말하고 있기에 리듬이라면 음악의 요소나 소리의 일정한 규칙으로 알고 있고, 시에서 리듬이라면 당연히 음성적인 규칙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러한 선입관을 버려야 시의 진실을 체득할 수 있다.
⓶. 리듬은 지상적인 인식의 단위다.
규칙적인 동작의 인식, 모든 것을 나누어 보고 같은 것끼리 모아보고 마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인간의 감성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사물의 변별성과 의미의 차이와 가치를 구별한다. 천상엔 영원한 시간 · 영원한 공간 · 영원한 감성만 있기에 길고 짧음, 시작과 끝의 변별성이 없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존재는 처음과 끝이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고, 모든 전체는 부분과 마디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⓷. 모든 생명체는 리듬이 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호흡과 맥박의 리듬이 있고, 탄생, 성장, 죽음이란 성장의 리듬이 있다. 인간의 경우 유아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한다. 시간의 경우도 과거 · 현재 · 미래, 역사의 경우는 고대, 근대, 현대라는 마디의 리듬이 있다. 따라서 리듬이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변화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에도 리듬이 있다. 해달 별들은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우주 질서를 유지한다. 따라서 문학, 특히 시가 생명력을 갖는 것도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⓸. 뿐만 아니라 리듬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문학의 생명은 감동이다 그런데 감동이란 변화와 반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자극의 길이, 강도, 성질에 따라 반응도 다르다. 따라서 리듬은 슬픔 · 기쁨 · 놀라움 등 인간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그 조절의 대표적 양식이 음악이고 시다. 음악은 소리의 리듬으로 감정을 조절한다. 시도 다양한 리듬을 통해 감정을 조절한다. 그러나 감정의 조절은 소리뿐만 아니라 색깔, 냄새, 일정한 동작과 의미 있는 언어의 반복으로도 가능하다.
⓹. 시의 리듬 만들기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난초도 거문고도 백자항아리도 버리고
장서도 가족들도 꽃밭도 버리고
바다만 앞에 있는
바다만 뒤에 있는
바다만 옆에 있는
바다 망망한 가운데 심해선 저쪽
일렁이는 파도 위를 알몸 누워 간다.
가슴에는 다만 하늘
가슴에는 다만 태양
갖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알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보고 싶던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처음 혼자 홀로인 혼자만의 나
순간이 그 영원
영원이 그 순간으로
출렁거리는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
동해 파도 한가운데 바다로 간다.
- 박두진「바다로 간다」
행과 연의 반복 – 이시를 보면 전체를 6연 19행으로 나누어 전체적인 리듬을 조성하고 있다.
문장의 반복 – 인용한 시를 보면 우선 “나 혼자 훌훌 떠나 바다로 간다”라는 문장이 처음과 끝에 반복된다.
구절의 반복 – 동일한 어구나 어절을 반복하는 경우다. 앞에 인용한 「바다로 간다」 에서 보면 이러한 방식이 두드러진다.
어휘의 반복- 인용한 시에서 ‘바다’라는 명사가 7회나 반복된다. 뿐만아니라 ‘간다’, ‘있는’, ‘버리고’, ‘싶던’, ‘아무것도’ 등의 낱말들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조사의 반복-조사의 경우 ‘도’ ‘는’ ‘만’ ‘에’ ‘로’ 등이 많고 어미의 경우 ‘ㄴ다’ ‘고’ 등이 있어 음악적 흥취를 고조시키고 있다.
⓺. 의미의 반복
리듬이란 소리의 일정한 반복만이 아니다. 행동의 일정한 반복, 사고의 일정한 반복, 빛의 일정한 반복도 리듬이다. 모든 움직임의 규칙적인 반복이란 뜻이다. 따라서 현대시의 리듬, 현대시의 내재율을 이해하는 길은 반드시 시에 나타난 음성적 규칙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반복, 의미의 반복, 정서의 반복도 모두 시의 리듬이다.
님은 갔습니다(a1)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지고 갔습니다.(a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b1)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습니다.(b2)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 다.(b3)
- 한용운「님의 침묵」에서
위의 (a1) (a2) (a3)는 님과 이별 ‘갔습니다’의 의미상 반복 리듬이다.
(b1)(b2)(b3)는 님의 부재에 대한 심정의 반복리듬이다.
⓻. 이미지의 반복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a1)
비밀한 울음.(a2)
한 번 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 흘림(a3)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의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a4)
- 박두진「꽃」에서
이미지(a1) (a2) (a3) (a4)는 모든 이미지의 반복리듬이다.
시는 이처럼 크게는 행갈이나 연 갈이를 통해서 구절이나 어휘나 심지어는 의미나 이미지들까지도 반복적인 구성을 통해서 강렬하고 적극적인 감정을 들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시인과 독자 간에 떨림을 공유한다. 물론 산문도 리듬이 있다. 그러나 산문의 리듬은 완만하여 그것이 감각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못한다. 최근 시의 산문화 현상을 거론하는데 이는 산문과 다른 시의 제도와 관습이라는 원칙에서는 벗어나는 일이다. 시조 5백년사에 정형적인 평시조와 이를 이탈하는 엇시조, 사설시조, 즉 시조의 산문화현상이 있었는데 좋은 시로 성공하지 못했다.
감동적인 떨림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라면 시의 리듬이야말로 시의 존재성, 시의 변별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규칙이다.
(4). 시는 둘째로 메타포다.
⓵. 메타포의 바른 이해
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변별성을 첫째는 리듬이라고 했다. 그다음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메타포다. 메타포(metaphor)란 meta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과, phor 이동한다(carring)뜻의 합성어다. 기존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동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메타포를 수사법의 하나로 해석하면서 오해가 시작 된다. 수사법(修辭法, rhetoric)이란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의 수사학은 말을 꾸미고 변론하는 정치꾼이나 철인들의 화법이었다. 그래서 시에서 메타포라면 사물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란 오해를 하게 된다. 더욱 웃기는 일은 비유어를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이라 하여 메타포를 시의 보조적 기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이것도 메타포를 왜곡하는 것이다.
② 감추인 것의 드러냄
메타포의 본질은 첫째로 은유(隱 – 숨을 은 喩 – 깨달을 유)가 말하듯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존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멸의 고전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마 13:34―35)
비유의 본질은 감추인 것들을 드러냄에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 이다. 직유도 비유다. 그러나 직유는 수사적 요소가 있다. “꽃처럼 예쁜 그녀”, 여기서 꽃처럼은 다분히 수사적이다. 따라서 비유의 참뜻은 꾸밈이 아니라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表現, express)이고, 볼 수 없는 신이 인간에게 어떤 게시물을 통하여 보여주는 현현(顯現, epiphany, theophany)의 놀라운 신통력이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박두진의 「꽃」에서
박두진은 일상적인 꽃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이란 이미지를 발견하여 꽃의 감추인 내면을 보여준다.
③ 변화와 확장과 창조
메타포의 본질은 둘째로 트롭(trope)에 있다. 그 어원은 전환(turn)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유를 전이(transform)라고 한 것과 같다. 시를 포에트리(poetry) 라고 하는데 이는 만들다. 창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메타포는 사물, 의미 등 모든 기존 개념을 전환하고 바꾸는 것, 재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전봉건의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엄원태,「물방울 무덤들」전문
④ 상호충돌과 낯설음
은유의 보다 근본적인 속성은 본래의 사물과 변경된 메타포의 사물이 대치나 전이를 통하여 두 사물 간에 낯설은 충돌, 각각의 존재들이 부딪쳐 낯설게 작용하는 구조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 곧 긴장의 원리로 보고 시의 경우도 이러한 투쟁의 원리가 은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투쟁이나 긴장은 두 사물의 유사성이나 친밀성보다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비 친숙의 관계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메타포도 리듬처럼 감동과 떨림의 메카니즘이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김종삼 「나의 본적」
⑤ 육화와 화해와 구원의 시학
메타포의 최대 사건은 하나님이 인자로, 불가시의 존재가 가시적 존재로 육화(Incarnation)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회복 된 화해가 이루어 졌고 이로써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를 데오 메타포(Theo Metaphor) 신적 메타포, 우주적 메타포라고 말하고 싶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앞서 시에서 꽃을 피 흘림, 본적을 마른 잎으로 메타포 했을 때 이를 드러냄 전환 충돌로 설명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분열된, 이질적인, 두 사물이 동격이 되고 하나가 되어 화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구원이다, 그런데 육화라는 신의 데오 메타포는 단지 문자로만 들어내고 전환하고 충돌하는 언어적, 시적 립 서비스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 실물로 나타나 메타포를 현실화 했다는 데서 시적 구원과 종교적 구원의 편차가 있다. 그렇지만 메타포가 구원을 모색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에서 메타포의 참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5). 시는 셋째로 코노테이션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세 번째 룰은 코노테이이션(connotation)이다. 코노테이션이란 내포 또는 함축이라는 뜻이다. 언어는 사상과 감정의 전달수단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언어라도 과학적 용법으로 쓰여 지는 기능과 문학 특히 시로 쓰여 지는 언어의 기능과 의미가 다르게 작용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두 기능을 외연(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로 설명한다, 외연은 언어가 지닌 사전적인 의미를 말하고, 내포는 그 언어가 풍기는 분위기, 다양성, 암시력, 연상과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뜻한다. 물의 외연적 의미는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수분이지만 시에서 물의 기능은 시의 문맥에 따라 생명, 탄생, 정화, 죽음, 이별, 마음 등 무수히 다양한 의미로 변신한다.
그러기에 리처즈는 시적 언어의 특성은 정서적이요, 내포적으로 사용된 모든 언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반대로 기술과 해명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의 특성은 지시적이요 객관적이요 말과 사물이 1:1의 관계다.
이와 같이 시적인 언어는 내포적이어야 하고 함축적이어야 한다. 소설의 언어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기에 객관적인 언어의 사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어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연적 의미 외에 묵시와 연상과 상징과 여운과 분위기를 수반하는 내포적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촌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에서
이 시에서도 시어가 갖는 다의적 내포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눈’은 외연적으로는 겨울의 눈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추위 · 괴로운 세상 · 시인 자신의 고독감일 수 있다. 매화향기 · 가난한 노래 · 백마 · 초인 · 광야 등도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보다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인’이란 말은 사전을 통해 보면 인간적인 것을 극복한 천재나 영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초인은 애국자 · 민족 · 시인 · 해방 · 미래 · 영광 · 권위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 인류가 시라는 제도와 관습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소설이나 희곡과 달리 기본적으로 시는 리듬도 있어야 하고 메타포가 있어야 하고 외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포적이고 함축적 의미인 코노테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의 근본적인 룰이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이러한 기본 조건들을 충실히 갖추고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불문율이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2-3
좋은 시의 조건과 창조시학(3)
홍문표
4.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시학
(1). 스타플레이어와 보다 좋은 시
모든 운동경기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특히 축구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것은 우선 선수가 경기규칙을 잘 지키는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경기규칙에 따른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경기하는 태도를 페어플레이(fair play)라고 한다. 따라서 페어플레이어는 경기에 대한 기본 규칙을 철저히 인지하고 이를 경기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이다.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시의 경우 시는 시적인 리듬과 메타포와 코노테이션을 충분히 알고 이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면 일단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으로 간주할만하다.
그런데 축구 경기를 보게 되면 규칙을 잘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규칙을 잘 지키면서도 또한 다른 선수보다 재빠르고 날렵하게 정말 신기에 가까울 만큼 볼을 잘 다루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꼴 문을 가르는 돋보이는 선수를 본다. 이 때 우리는 열광적인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그를 스타플레이어(star player)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단에서도 기본적인 시의 제도와 관습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시인보다 월등하게 감동이 오고 충격이 오는 작품을 쓰는 시인이 있다면 이는 분명 스타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작품에 분명 리듬도 있고, 메타포도 있고, 의미의 코노테이션도 있는데 어째서 작품마다 감동이 다르고 떨림이 다른 것인지, 따라서 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시는 모두 좋은 시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처럼 보다 감동적인 시는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똑같은 재료로 음식을 했는데도 음식 맛이 다르고 그 중에서도 더 맛이 있는 음식이 있는데 그 비밀은 또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좋은 시 위에 더 좋은 시의 해법이 있는 것이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랑그라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빠롤이라는 언어다. 랑그(langue)는 언어활동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룰의 언어이다. 반면 빠롤(parole)은 그 규칙을 바탕으로 하되 현장에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능력으로 개성 있게 드러내는 언어다.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바로 보편적인 룰, 시의 경우 제도와 관습이라는 장르적 룰이다. 이처럼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대화현장에서는 같은 규칙의 말이라도 억양 태도 단어 구사 등이 달라 반응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공통의 룰인 랑그에도 충실하지만 실제 사람들과 소통하는 현장에서 그때그때 개성을 발휘하여 설득력 있게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문학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공통적인 장르적 룰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 창작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같은 소재 같은 주제라도 보다 뛰어나게 표현해 낸다면 이는 좋은 작품에서 보다 좋은 작품으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서 이처럼 보다 좋은 시로 평가되는 비밀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다 놀라운 상상력이나 보다 뛰어난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포괄적으로 말하여 필자는 보다 창조적인 시 즉 창조 시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이 창조 시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 장르의 기본적인 제도와 관습이 리듬 · 메타포 · 코노테이션인 만큼 보다 좋은 시의 조건은 보다 창조적인 리듬 ·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 보다 창조적인 코노테이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리듬
앞서 시인의 꿈을 울렁거림이라 했다. 울렁거림은 놀라울 때,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시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데 일상을 벗어나려면 변화를 위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돌팔매질이 있어야 파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파동은 지속적일 때 보다 효과가 있다. 시에 있어서 리듬이란 바로 잔잔한 호수에 돌팔매질이고 그 돌팔매질의 강도와 지속성에 따라 물결도 다르게 반응한다. 좋은 시와 보다 좋은 시의 논의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과거에는 시의 리듬을 엄격하게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충실 한 시를 좋은 시라 했다. 그 당시로서는 시의 리듬규칙을 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다보니 익숙해져서 충격도 약해지고 떨림도 약해졌다. 첫사랑은 정말 떨림이 대단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황홀했던 떨림이 무뎌진다. 우리에겐 계속 떨림이 필요하다. 떨림이야말로 삶의 변화와 개혁과 활력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적인 리듬 규칙을 깨고 새로운 리듬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현대 자유시의 리듬 정신이다. 그렇다면 자유시의 리듬은 언제나 고정적인 것을 거부한다.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것은 고인 물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창조적 리듬이 시의 기본조건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있다. 시의 존재이유가 독자에게 떨림과 충격을 주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떨림이 더욱 신선하고 강도가 있고,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것이 되도록 계속 창조정신을 발휘해야한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그대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곤하던
목너머 마슬로 가는
나지막한
이 오솔길
인기척 혼자내고 가는
항가새꽃
핀, 이 길
서벌 「뒤 늦게 캔 느낌」
수백 년 간 헌법처럼 지켜온 3장 6구의 시조리듬이 서벌에 이르면서 고정적인 리듬을 탈피하고 보다 창조적인 시조의 리듬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랑그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개성 있는 빠롤의 창조적 모험을 통해 충격과 떨림을 신선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철시조와 같은 3행시를 아직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떨림의 강도나 신선도에 분명 차이를 느끼게 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꽃의 시듬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새로이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김동명의 「내마음은」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의 다양한 반복리듬을 시도하고 있어 좋은 시이기도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고 규칙적이어서 노랫말이 되었다. 각 연이 2행으로 고정 되어 있고 시어 구성도 일정한 틀에 맞춘 느낌이어서 개성 있는 리듬의 창조성이 약하다. 반면 김현승의 「눈물」은 행과 연과 시어들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오는 충격과 떨림이 신선하다. 개성적인 리듬의 창조가 보다 떨림이 좋은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 보다 좋은 시와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시어에 메타포는 시가 산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세계의 드려냄이고 기존의 존재 의미를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조한다는 데서 변별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시를 시이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시의 문학성 · 시의 예술성 · 보다 좋은 시의 논거는 바로 얼마나 시가 창조적으로 메타포를 구사했느냐에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 시조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박두진「하늘」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볕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꽃」
같은 시조라도 앞의 정철의 시조와 황진이의 시조는 리듬은 동일한데 너무나 시적 떨림이 다르다. 무엇 때문일까, 창조적 메타포의 문제다. 황진이의 시조에는 밤의 허리, 춘풍 이불, 굽이굽이 펴리라는 뛰어난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조 중 황진이의 시조가 가장 애송되는 것은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박두신의 시이지만 「하늘」과 「꽃」은 충격과 떨림이 다르다. 「하늘」도 “하늘이 내게로 온다” “나는 하늘을 마신다”에서 하늘에 대한 시인의 메타포가 좋은 시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은 호수처럼 푸른 하늘이고 향기로운 하늘이어서 하늘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드러내거나 새롭게 변형하여 독자에게 다가오는 은유적 충격이나 떨림이 약하다. 다만 하늘과 동화되는 자연 친화의 일반적 주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꽃」은 꽃의 상투적인 인식을 벗어나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흘림”, “엇갈림의 핏방울”, 등의 다양한 메타포를 통하여 꽃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드려내고 새롭게 변형하여 충격과 떨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가 구사되어 보다 좋은 시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략-
5. 그렇다면 결국 좋은 시란 무엇인가.
좋은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동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시다. 그래서 시인은 저마다 떨림의 시를 꿈꾼다. 물론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쓴 창작인데 좋은 시니 떨림이니 하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가 하는 비판도 있고 보는 관점에서 다르다는 이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떨림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그 떨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떨림의 차이의 비밀, 즉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축구나 배구에도 룰이 있듯이 시와 소설도 각기 다른 제도와 관습이 있는 만큼 그 제도와 관습을 기본적으로 익히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시를 시답게 하는 핵심적인 제도와 관습, 그 기본적인 룰은 리듬, 메타포, 코노테이션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인은 이 기본적인 룰을 충분히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기본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시를 쓰려면 보다 창조적인 리듬, 보다 창조적인 메타포, 보다 창조적 코노테이션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기본 룰에 더하여 끊임없이 개성적인 창조적 리듬, 창조적 메타포, 창조적 코노테이션을 위하여 노력하는 창조시학의 스타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논의해본 창조시학의 골자다.
그렇다면 아직 스타 시인도 아니고 보다 좋은 시로 각광받지 못하는 오늘의 대다수 시인들은 시인도 아니고 시도 아니란 말인가.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다시 정리한다.
첫째, 내가, 좋으면 좋은 시다. 요즘 같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 따라서 남들이 뭐라든 내가 좋고 내가 만족스러우면 좋은 시다. 그러한 작업 속에서도 자신에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나 남들도 좋아하면 더 좋은 시다. 시는 우선 내가 좋아야 쓴다. 그런데 남들까지 좋아한다면 나도 시적으로 구원받고 남도 구원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더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셋째, 나도 좋고 남들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읽을수록 새롭고, 읽을수록 떨림이 있고 읽을수록 깨달음이 있는 시는 더더욱 좋은 시다. 시는 일시적인 유행가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유명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더더욱 좋은 시는 언제나 살아있고 떨림이 있어야한다.
넷째,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좋아 하는 시는 명시(名詩)다. 시간과 공간과 인종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나 좋아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명시다.
다섯째, 하나님까지 좋아하면 성시(聖詩,Theo Poetry)다. 인간들끼리만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신들도 좋아할 수 있는 영적인 시, 천상의 시, 신령한 영역까지 떨림일 수 있는 시야 말로 인간적인 정서적 구원을 넘어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신령한 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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