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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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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시모음 1( 한국)
2019년 12월 21일 16시 58분  조회:1788  추천:0  작성자: 강려
가을의 환상 교향곡
 
 
 
마법의 성 구름옥탑에
4옥타브 공주가 창백한 달로 갇혀있다.
기러기 그림자만 독수리 날개처럼 창가에 머물다 간다.
달을 구하기 위해 흰 턱시도의 별 테너가
피아노 건반 3옥타브 G선의 나선 계단을 오른다.
고음의 절벽에서 미끄러진 오페라 왕자들이 추락한다.
입술에 한 방울만 적셔도 저주가 풀릴 이슬이 쏟아진 숲에서
첼로도 호른도 몽환 속에서 길을 잃고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바람만이 낙엽의 악보를 켠다.
부를수록 멀어지는 파란 하늘의 창문 틈으로
파리하게 시든 그믐달이 누웠다.
[출처] 가을의 환상교향곡|작성자 김기덕
 
 
달빛 처방전
                                                                         김기덕
                               
고양이의 눈에서 어둠을 먹고 초승달이 떠올라. 잠 못 이루는 것은 달이 커졌기 때문이야. 상자 속에 눈들은 빛을 싫어해. 달이 가늘어지면 쿨쿨 잠만 자지. 나른해진 몸은 아무리 튀어 오르려 해도 바닥에 눕게 돼. 목을 쓰다듬고 발바닥을 간질여도 생각들은 털 속에 숨으려고만 해.
 
상자 안의 고양이는 날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지. 밀폐될수록 달은 커지고, 발톱들은 날을 새우지. 이파리 사각거리는 소리에도 창가에 커다란 귀를 매달게 돼. 유리창으로 웅크린 고양이들이 노려봐. 똑, 똑, 똑, 핏방울이 떨어지는 초침소리가 들려.
 
언제부턴가 달은 악마들의 출구란 걸 알았지.
 
달이 차면 알약들을 몸에 묻고 시체놀이를 하지. 눈꺼풀을 밟고 잠이 올까봐 눈가에 까만 아이라인을 칠하지. 하지만 입 맞추는 밤은 늘 죽어 있어. 매니큐어로 지워버린 달은 한나절이 지나면 또 다시 떠오르곤 해. 눈 속에 까만 달은 저리도 매력적인데.
 
달빛 고인 침대 시트는 돌돌 말아 세탁기에 넣었어. 시계 위에 누워 아무리 바늘을 돌려도 제자리인 상자 속. 고양이 울음의 스위치를 끄는 거야. 손톱을 물어뜯어도 지지 않는 달. 손가락 하나 씩 잘라지는 쪽잠이어도 좋아. 피 묻은 자판을 두드려 방안 가득 검은 활자를 채우면 죽음처럼 찾아오는.
 
고양이의 눈 속에서 달이 지는 한낮.
[출처] 달빛 처방전|작성자 김기덕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등불을 켠다.
성냥불꽃 만큼 밝은 세상이 비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처럼 지나는 표정들이 깜박인다.
연탄이나 장작의 체온이 그리운 길거리마다 내걸린 아크릴 이름들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가로등은 밤새 피를 흘린다.
이 밤을 견딜 만큼 나는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있는가.
빛인 척 반짝이며 스테인리스와 유리들이 웃는다.
화살과 총탄과 질주의 무리들은 불꽃으로 박히기 위해 휘파람소리를 낸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유성들은 밤새도록 머리 위에 성수를 뿌린다.
유리벽에 반사된 얼굴들은 야경 속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물흐물 달의 살이 묻어난 골목길로
은 삼십을 받은 유다가 질질 어둠을 끌고 온다.
태양이 오기까진 뚝뚝 떨어진 목련이 어두운 길을 밝힐 거야.
하루살이들의 밤
가시관을 쓴 예수가 동녘의 구름을 쓴다.
[출처] |작성자 김기덕
 
만원의 이력서
 
나랏말싸미 듕궉에 달아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피를 받아 한국은행 일월오봉도에서 태어났다. 차원이 다른 홀로그램의 족보를 새기고, 등과 가슴에 용 문신으로 가문의 인장을 찍었다. 뼈 속에 쓴 일만만의 설법, 진짜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가슴에 품고 보현산 천문대 혼천의에서 우주를 꿈꿨다. 비스듬히 기운 각도에도 언뜻 비치는 성골의 요판잠상은 평범한 신분이 아닌 듯했다. 신출귀몰한 바람소리를 내며 한국은행 출신의 빳빳한 칼라들은 은빛 어깨띠를 두르고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동안 두툼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 블랙박스에서 몇몇 구름 속을 오간 후, 할머니 전대에 떨어진 뒤에야 알았다. 도가니탕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동그라미들의 무게감을. 노래방 아줌마의 젖가슴에 꽂혀 마이크를 잡다가, 도박판에 던져진 누런 배춧잎들과 함께 고리를 뜯다가, 창녀의 손에 침 발라 비벼지며 닳고 닳은 얼굴들을 봤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순간 황홀하게 만났던 육체들이 구겨진 채로 몸을 뒤집는다. 너덜너덜 뭉개진 몸에서 구린내가 난다. 지하도에서 떨고 있던 여인에게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UFO를 닮은 자선냄비 안에서 천상의 종소리를 듣는다. 산동네 양은냄비를 끓이는 할머니를 위해 마지막 연탄을 사랑해야지. 몸을 내어주고 얻는 최후의 어둠. 덜컹, 철문이 열린다.
[출처] 만원의 이력서|작성자 김기덕
 
악마의 중독
김 기 덕
 
 
염소가 검은 상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열어보였지.
젖이 범람한 젖꼭지에서 쓰디쓴 강이 흘렀어.
어둠 속에 뿔은 왕관처럼 반짝였고
이마에 새겨진 펜타 그램에선 게이의 웃음이 새어나왔어.
박쥐의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펼친 오른손에 선명했던 못자국
중지와 약지를 벌린 각인에 혀를 끼우고
왼손에 들었던 횃불로 바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메케하게 피어난 악성 루머들
사람들은 스스로 검은 상자에 매달린 중독성의 쇠사슬을 목에 걸었지.
자동조절 되지 않는 나의 몸에서도 고열이 일었어.
통증으로 웅크린 배를 독수리의 발톱이 휘젓자
거친 호흡으로 들썩이던 종잇장은 찢겨져
쏟아진 폐를 독수리가 인공호흡기처럼 입에 물고 숲을 흡입했어.
노을이 빠져나간 얼굴에서 금세 어둠이 흘러나와
달의 내장을 꺼낸 굴뚝이 목에다 뱀처럼 구름을 두르고 방안을 노려봤지.
구멍 난 튜브 속에선 지독한 황사와 매연,
미세먼지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의 목구멍에서도 뱀의 혓바닥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랐어.
독수리가 홀연히 날아간 후에야 검은 상자 위에 염소가 목의 쇠사슬을 풀었지만,
손바닥을 뒤집는 타로카드 15번
재가 된 사람들은 안개처럼 공중에 떠다녔지.
한 방울 눈물과 백색연기로.
 
 
[출처] 악마의 중독(미래시학, 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가위가 오린 풍경
김기덕
 
하늘을 오린 가위들이 황사로 날아왔다.
찢어진 헝겊조각처럼 펄럭이는 내 봄날의 모래바람
 
가위질할 수 없는 밤과 아침 사이로 빠져든 도시는 사막에 잠기고
낙타로 깨어난 차들은 느릿느릿 사구를 넘었다.
 
죽은 태양을 파묻은 땅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비릿한 악취를 풍겼지.
스펀지 같은 폐에 꽂힌 바늘들은 찢긴 상처를 꿰매지 못해
수풀로 짠 바람을 밀어 넣어도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찢어버리고 싶은 하루의 졸린 책장을 오리면
태양은 다시 떠오를까. 꽃과 아이들, 이슬방울 영롱한 아침과
가위를 부서뜨릴 바위덩어리. 가위! 바위! 보!
 
간밤에 내 몸을 짓눌렀던 검은 가위는 어디부터 나를 오려내고 싶었을까.
담배연기 찌든 폐, 이미지를 상실한 뇌
황사로 뿌연 내 가슴 한 귀퉁이도 오려내고 싶었겠지만,
난 공포감으로 상영 중인 가위 꿈의 필름을 소리 내어 잘라냈어.
 
비단 폭처럼 찢어진 어둠 속에서 보았지
잠든 여인의 눈부신 속살,
등 돌린 창가에서 그믐달이 새벽을 꿈꾸고 있는 것을.
아침이 동녘부터 야금야금 오려져 능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어.
 
흐린 유리창을 오리면 무지개가 뜨던
오늘밤 머리맡엔 어머니가 쓰시던 가위 하나 놓고 자야겠다.
[출처] 가위|작성자 김기덕
 
 
절벽에 선 나무
김 기 덕
 
바다로 향한 불빛들이 강물로 흘러갔다.
 
뼈만 남은 어깨엔 눈과 비와 바람을 채색한 
누더기뿐.
 
바람의 난간에 선 맨발
실금 하나 사이로 생존과 파멸이 공존하고 있었다.
뜬구름 접어서 종이비행기로 날려준 바람 줄을
나는 놓지 못하는 걸까.
 
힘줄이 불거진 발은 평생 수직의 길을 걸어왔다.
담쟁이 더듬거리던 길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못 박혀 직각의 모서리를 걸었다.
 
날개 접은 풍문들이 벼랑 끝으로 낙엽들을 몰아갔을 때  
달은 지프라이터에 갇혀 초승달로 사그라지고
별의 눈동자들은 담배 불빛 깜박이던 옥상에 올라 마지막 어둠을 태웠다.
 
절벽에 매달려서야 창틀의 위대함을 알았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유리창을 껴안고 절벽에 매달려 본 적이 있던가.
내 몸 하나도 붙들지 못했던 옹벽
 
바위를 껴안던 뿌리가 뽑혀
내 척추로 이식되던 밤
신경줄마다 흐르고 있는 이빨들의 강을 보았지.
 
이를 앙다문 뼈들이 절벽에 매달린 
​절규. 
[출처] 절벽에 선 나무(문학메카 2015. 9)|작성자 김기덕
 
 
사막의 연인(戀人) (문학메카 2015. 9)​
 
아담과 이브가 바람뿐인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퇴색된 열두 개의 생명나무 불꽃은 일 년 열두 달 검은 장미로 피어났어.
 
생크림을 핥는 뱀의 혓바닥 위로 노을이 지고 꽃잎이 떨어졌지.
 
선악을 알기 전의 남녀는 누드였단다.
서로를 알고 난 후부터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몸에서 솟는 붉은 가시들
 
녹색의 초원이 놓인 탁자 위로 에스프레소가 쏟아져 황무지가 펼쳐진다.
사막을 오가던 말들이 선인장이 되어 모래 속에 뿌리박고 피보다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동산엔 열두 개의 태양과 열두 개의 달이 뜨고, 보라색 옷을 입은 천사가 양팔저울에 해와 달의 열매들을 달았지.
 
구름이 치마끈을 풀고 능선에 앉아 엉덩이를 흔들면 산은 잔이 되고, 잔엔 옥수로 가득했던 눈물을 안 후,
 
다시 누드로 돌아갈 수 없는 아담과 이브가 라이브 카페의 난간에 앉아 마시는 치사량의 검은 유혹.
피 묻은 입술이 머그잔을 타고 흘러내린다.
 
카펫 위엔 엉겅퀴가 자라고, 독버섯이 피어났지.
구둣발에 짓밟힌 뱀들이 서로의 몸을 말며 물어뜯는 아담과 하와의 발뒤꿈치.
[출처] 연인|작성자 김기덕
 
 
<시문학 7. 10>
철탑 속의 황제
                                       김 기 덕
카페나 호주머니
낡은 가방 그 어디에도 황제는 있지
황홀을 든 태양의 눈동자가 물결 위를 지날 때마다
갈대들이 허리를 꺾던 강가 
갑옷 속에 감추어진 발톱이 물결을 할퀴며 건져 올린 안개의 거리는
마차소리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 
괴목의 뿔을 매단 절벽, 죽음의 부리만이 서로를 쪼아댔지
피로 번진 노을이 암투의 커튼을 드리운 하늘가
욕망이 치솟는 곳은 어디든 마천루였어 
달의 보주를 차지하기 위해 밤마다 강물 위로 별들은 폭죽처럼 쏟아졌지 
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왕관이 흘러 정박한 곳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독수리는 늘 땅으로 추락했어 
바위들이 송곳처럼 삐져나온 안개 속 철탑의 도시엔
뿔 달린 머리들만 문마다 내걸렸지
​아기의 울음이 헤롯의 칼과 창과 방패를 삼킨 후
스카이라운지나 전광판, 갤러리, 그 어디에도 황제는 없어
대관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로 떠나고
성난 군중들만 남은 광장에
붉은​ 십자가
[출처] 황제의 비밀|작성자 김기덕
 
 
권태기의 화학반응
김 기 덕
 
유기물과 무기물의 화학기호들로 결합된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H2O를 마시며 CO2의 언어를 내뿜는다.
 
시냅스가 전달한 한 남자의 페르몬 물질로 첫눈에 반해버린 신경세포들의 발작적 흥분이 죽어도 좋을 환각을 몰고 왔다.
뼈와 심장의 얼음까지도 다 녹일 수 있는 순수 가용성의 용매가 되고 싶어.
 
초고온으로 발생한 마이크로파가 플라즈마를 일으키는 자기장 속에서 한평생 서로를 밝히는 오로라가 되기로 했지.
외로움의 전자를 버리며 금속으로 만나든, 그리움의 전자를 얻으며 비금속으로 만나든, 서로의 이온결합을 만들며
분해되지 않는 화합물을 꿈꿨어.
 
혹서와 한파를 지나며 서로 다른 비등점과 빙점을 확인해온 시간 속의 유리벽은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유기물을 분해하고 흡수하여 가스로 방출하는 일상의 기계적인 실습에서 흥미로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의무감으로 서로의 용액을 섞으며 무관심의 밀도를 잰다.
​더 이상 흥분 호르몬이 발생하지 않는 비환유의 뇌 속으로 연결된 소통의 회로들은 막다른 골목처럼 좁아져 갔다.
가슴 떨렸던 반응들이 멈추고 몽환의 기체들이 날아간 비커 속에 유리조각처럼 남은 추억의 불순물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굳어진 몸처럼 검은 구멍에서 뿜어진 독설로 흡열반응, 발열반응이 멈춘 무의식의 몸이 식어간다.
[출처] 권태기의 화학반응(미래시학, 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상자 속의 수평선
 
 
무쇠상자 안의 슈뢰딩거 고양이는 관찰을 통해서만 살아있다. 원자가 방사능을 방출하는 순간, 망치가 독가스 용기를 깨뜨리도록 고안된 상자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는 오십 대 오십. 어느 시점에서 고양이가 죽는 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다. 고양이는 발견을 통해서 죽는다. 고양이의 죽음은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다볼 때 결정된다. 관찰자가 상자를 들여다볼 때 고양이가 죽어있다면 그는 고양이를 죽인 것이다.   
 
 
 
핵이 붕괴하는 순간 분기점이 생기고,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분리되어 평행 우주를 만든다. 관찰되지 않는 나와 관찰되는 당신과의 사이엔 물과 기름의 길이 있다.  당신은 나의 의식속에 살고, 나는 당신의 무의식속에 산다. 
 
 
 
관찰되지 않는 태양은 영원하다. 나의 죽음이 발견되지 않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사랑은 확인되지 않기에 영원하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바람과 공기는 존재한다. 귀신과 영혼과 망령과 풍문들이 떠나지 않는 세계는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다. 무쇠상자 안의 고양이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영원히 산다.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관찰되지 않는다.
[출처] 상자 속의 수평선|작성자 김기덕
 
0과의 만남
 
 
 
 
 
음식을 비운 접시처럼
달은 어둠을 비우고서야 보름달이 되었다.
무소유의 달
대웅전 불당의 부처 얼굴이 달처럼 환했던 것도 어둠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속이 빈 시간의 굴렁쇠가 오늘도 태양의 길을 따라 굴러간다.
음과 양의 물줄기가 합쳐지며 동맥과 정맥의 피돌기를 시작한다. 
 
 
0이 더해진 숫자와 사물은 백지 위에 그리움이 되었다.
0을 뺀 숫자와 사물은 욕심을 오려낸 허공이 되었다.
0을 곱한 숫자와 사물은
나무속에 천년의 나이테를 채워도 0이 되는 하나일 뿐.
0을 나눈 숫자와 사물은
물결이 번지며 사라져가는 파문이었다. 
 
 
마음을 비웠다고 못 박은 0 하나
잘난 척 나설수록 십의 배수로 가치가 떨어졌다.
0.1, 0.01, 0.001……
마음을 비우고 못을 뺀 0 하나
뒤에서 따를수록 십의 배수로 가치가 상승했다.
10, 100, 1000……
 
 
0의 얼굴을  닮은 무중력의 비행체가 새처럼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0과 0 사이의 무한 공간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0을 그리며 사라져간다. 
웜홀과 블랙홀을 지나서 미래의 공간 속으로 달려가는 靈
0과 0이 손을 잡는다.
∞의 세상이 손끝에서 만난다. 
[출처] 0과의 만남|작성자 김기덕
 
오늘의 날씨
 
 
 
눈부신 태양은 매일 뜨지 않는다.
구름 옷 입고 출근하는 날씨의 하루는 비이거나 눈
천둥소리에 풀들은 고개를 움츠렸다.
회오리에 추풍낙엽의 증권들 핏빛으로 물드는 창문
사무실마다 썰물이 빠져나가고
사막의 도시엔 한 생의 발자국을 묻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안개 속을 잠행하며 자리를 지켜오던
김씨, 이씨, 박씨도 보이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날씨의 예상이 일기예보를 빗겨간다.
계절이 공존하던 객장엔 수축하는 시간의 지층이 쌓이고
동전만한 우박이 사선을 긋는다.
내려치는 번개에 후줄근히 등줄기가 젖는다.
쾌청을 꿈꾸는 실내와
구름 낀 실외와의 기온 차에 유리창엔 날마다 성에가 꼈다.
기쁨과 슬픔의 기상도가 교차하는 스크린
삼한사온을 오가던 엘리베이터의 로프마저 끈긴
수은주의 하강에
구겨진 날씨의 하루는 눈보라였다.
몸을 웅크린 노씨, 나씨, 남씨의 하루도 눈사태였다.
영원한 겨울은 없는 법, 영원한 여름을 꿈꾸지 않는다.
내일 먼 바다의 파고는 높음
강풍이 불수록 깃발들의 심장이 펄럭인다.
[출처] 오늘의 날씨|작성자 김기덕
 
달의 기원
 
달이 커지며 그녀의 가슴도 부풀었다. 늑대가 울고 광기가 차오르는 밤. 스톤렌지의 돌들은 그녀의 월경주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여자는 무엇으로 태어나는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분리가 있은 후 남자의 가슴엔 태평양이 생겼다. 조석간만의 애증이 출렁이며 눈물바다를 남겨주었지만, 왜 여자는 남자 주변에서 공전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도 진공은 아니다. 주변의 매개물인 미소행성체들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진 브레이킹, 오 부킹.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달은 주변의 바람들을 다 삼켰을까. 아니, 달은 지구의 관심으로 융합, 팽창하며 태어난 거야. 태양계의 행성들처럼 주변을 배회하며 한 마디의 말이나 표정까지 몸에 돌로 다져 넣었던 거야. 어느 날 내 허블망원경에 포착된 여드름투성이 얼굴. 내 안에 뜨기까지 충돌했던 파편들 치솟아 뭉쳐진 애증의 달. 서로 부딪칠 때마다 노아의 홍수가 일고 여호수아의 태양이 떴다구. 아니, 아니 달은 지구를 위해 설계된 신의 못질일 뿐, 일식과 월식의 관계를 만들며 서로 입 맞추고 그늘이 되는 필요충분관계야. 늘 한 면만 보여주는 그녀의 뒷모습이 나는 그립다. 어느 곳도 중력의 차이는 없다고 나를 향해서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달.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태양을 보여주지 못했다. 쿵, 떨어진 로켓에 달의 가슴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출처] 달의 기원|작성자 김기덕
 
골프
 
十八界의 홀을 정복하기 위해 108구멍에 염주를 굴린다.
버디와 보기를 오가다 파로 끝나는 중생의 라운드
스코어는 나이 같은 숫자에 불과했다.
임펙트한 퍼팅보다는 비워야 할 루틴이 많았던 시간
롱 드라이브 아이언 샷으로 꿈의 깃발에 어프로치해 보지만
페어웨이보다는 러프와 벙커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죽음의 연못에 잠겨버린 순간들조차 또 다른 세상의 여정임을 알려주며
숲과 나무와 구름의 갤러리들이 손을 흔든다.
바람을 읽고 잔디의 굴곡을 재며 웃음으로 도반이 돼 주었던 캐디
리봇을 남기고 떠난 인연들을 일일이 손으로 덮어주며
이 세상 다녀간 그린 위에서 나의 흔적을 지운다.
잔기침마저 태풍이 되는 숲 속의 나비효과에도
핸디캡을 극복하고 흔들림 없이 스윙을 해야 해
깨달음의 이글을 날리며 홀인원했던 무아경의 돈오돈수
물과 불을 다스리는 가부좌를 틀고 우주를 굴린다.
[출처] 골프|작성자 김기덕
 
먼지 보고서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바람의 미세 혼령들 한통속으로 몸을 드나들며 구름을 일으킨다.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불을 피우고, 물을 뒤집어쓰며 풀풀 먼지만 피우다가
연기로 사라지는 미세먼지들
벽을 통과해 내 몸속에 둥지 틀고 기침을 한다.
어젯밤 꿈으로 분해된 초미세먼지의 빙의
아 무서워, 현실의 악몽들은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분해결합하며 공간 이동한 에어로졸들은 또 거미가 되고 세균이 되겠지.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내 안의 미립자들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메트로놈의 파장이 엔진을 돌린다.
먼지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들의 소리 없는 퍼덕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출처] 먼지 보고서|작성자 김기덕
 
 
황금비의 비밀
 
170센티미터의 아빠와 105센티미터의 딸이 손잡고 화랑을 걷는다. 현의 길이 1:2의 8도 화음, 2:3의 5도 화음, 3:4의 4도 화음이 섞이며 라파미, 미파라의 선율이 흐른다. 다섯 개의 꼭지점과 다섯 개의 면을 가진 피라미드가 별을 가리킨다. 살바도르 달리의 최후의 만찬장엔 고개 속인 제자들이 영의 양식을 먹고 있었다. 여신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숭배한 파르테논 신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풀처럼 기둥에 기대어 5분지2 바퀴마다 난 잎들을 세며 얼마나 햇빛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파보나치의 수처럼 커지는 내가 무서워. 내 안에서 앵무조개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태풍이 되든가 나선은하가 되든가 같은 비율에 갇히는 게 싫어. 몸의 중심인 배꼽에 컴퍼스를 대고 영향력의 한계를 그려보았다. 손끝과 발끝에서 만난 원이 알파와 오메가를 그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길이를 수직으로 긋고 뻗은 양팔의 길이를 가로로 그으니 정사각형의 땅이 생겼다. 다빈치의 아름다운 드로윙 속에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인 내가 최초의 인체 골격으로 서있었다. 몬드리안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티브이를 보고 담배갑을 매만졌다. 창문 안에 가득했던 책들은 액자가 되어 벽에 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을 간직한 피아노에서 피타고라스 원리인 직각삼각형의 파랑이 인다. 점점 커지는 소프라노의 하이 톤. 수학자인 신은 놀라운 비율의 분할을 숨겼고, 나는 바로 선 펜타그램과 거꾸로 선 펜타그램 사이에서 방황했다. 누가 동그라미와 세모와 네모 사이에서 프렉탈을 그리나. 시간의 원근법은 늘 하나의 꼭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황금비의 비밀(시문학)|작성자 김기덕
 
물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물이 흐르는 냇가에선 엔진소리가 난다.
울컥 눈물로 가동되는 물의 모터
눈물 마르지 않는 나무엔 물기둥들이 수직으로 오른다.
수십 층의 벽을 타고 오르는 물의 동력으로
콘크리트 건물은 살아있다.
직립하는 내 몸의 벽을 타고 오르는
바퀴들의 힘으로 나의 하루도 굴러간다.
   
몸에 시동을 거는 정액의 힘
들이켠 한 잔의 물이 온 몸에 바퀴를 굴린다.
계절의 바퀴
윤회의 바퀴
죽음과 부활의 바퀴를 굴리며 물이 흐른다.
파도들이 쓸려간 갯벌 위에 남겨진
타이어 자국들
기하학의 무늬 속엔 생명들이 가득하다.
   
엔진이 꺼진 바퀴들은 계곡을 미끄러져 폭포로 추락했다.
동력이 멈춘 물들의 하향곡선
바퀴가 정지한 호수엔 시간의 기어들이 녹슬어 갔다.
   
태풍이 몰려온다.
파도가 몸을 말며 굴러온다.
눈물의 엔진을 달고 지상에서 영원까지
무지개가 굴러간다.
대지의 자궁에서 바퀴를 굴리며 나오는 꽃들
만조로 차오른 달이 외발 자전거를 밟으며 하늘을 건넌다.
[출처] 물에는 바퀴가 달려있다.|작성자 김기덕
 
불의 기억
 
부싯돌 속에서 태어난 씨앗들은 별처럼 반짝거렸지.
마른 쑥잎에서 실연기로 성장해 바람결에 눈을 뜬 아이들은
석유나 나무나 양초 위에서 붉은 혓바닥을 놀렸지.
태풍의 풍문을 들으며​ 자란 불새들은 몸을 웅크리고
담배와 폭죽과 수류탄 속에 잠들어 있었어.
 
성냥골의 뇌관을 건드리던 불장난으로
단 한 번 불꽃이고 싶던 봉오리들도
재가 될 운명의 껍질 속에 몸을 숨겨왔지.
태양을 삼킨 잎들은 불꽃을 토하려 물을 뽑아 올리는데
단 한마디 기도이기 위해 침묵해온 향불
흐려질수록 태풍의 고요와 심해의 어둠이 감싸온 심장이 꿈틀거렸지.
가시덤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몸속에서 타오르지만 않았다면,
불이 빚어서 혼이 된 흙이
도자기처럼 끌어안고 싶었던 죄의 불
성화는 분수처럼 뻗쳐올랐어.
악을 담금질하며 녹슨 뼈를 연마하는 연금술사의 손이
풀무로 지나는 계절,
껍질이 깨진 은행에서 천년 동안 줄기와 가지들이 폭발하고​
아기의 입술에선 태초의 말씀이 울음을 터트리는데
재가 되기 전 마지막 바람의 입술을 기다리는 ​숯
[출처] 불의 집(과천문학)|작성자 김기덕
 
가로등
                          김 기 덕
 
 
달항아리에서 물이 넘친다.
화석이 된 어둠의 뼈를 녹이며 빛의 웅덩이를 만든다.
눈과 귀와 코와 입술이 떨어져나간
달의 얼굴에서 백설탕이 쏟아진다.
골탄의 검은 발바닥에 감각은 사라지고
별빛 물의 언어들만 밟힌다.
굽이굽이 책장을 넘겨 강으로 흘러온
푸른 경전 속의 활자들이 천 길 물줄기로 추락하다가
영겁의 불로 활활 송전탑을 가로질러와
철골에 혼불을 밝혔다.
수백 만 볼트 물의 혼령들이 유방을 열고
밤새 쓰레기와 도둑고양이와 부서진 자전거를 적신다 해도
젖지 않는 유리창 안의 풍경들
병아리를 품은 날개의 온도로 떨어지는 깃털들이
는개같이 내려 골목 가득 물안개를 피워도 좋아
아무리 비워도 샘솟는 달항아리의 물이
밤새도록 길 위에 넘친다.
[출처] 가로등(2015. 스토리문학)|작성자 김기덕
 
 중간숙주
 
  불뱀이닷! 광야에서 불타던 뱀이 종아리에서 꿈틀거린다. 물벼룩에 감염되어 내장에서 자라던 메디나의 뱀들이 수포를 일으키며 발뒤꿈치를 물어뜯는다. 물속에 알을 낳기 위한 저들의 뜻을 위해. 불에 덴 이빨자국을 물에 담그라하는 메디나충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물에서 짝짓기하기 위해 유인한 곤충들을 자살시키는 연가시의 지상명령은 계속된다. 위장에 암거하던 헬리코박터들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라한다. 요충들이 항문을 긁던 손으로 이웃을 위해 떡을 떼라한다. 노란 끈 같은 촌충이 알 밴 몸을 끊어내며 입맛을 돋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내 안에 존재들의 입덧 때문. 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아리 모양의 편충들이 빈 그릇을 채우라 한다. 주걱을 닮은 디스토마가 밥을 푸라한다. 살을 뚫고 다니던 스파르가눔이 환청을 들려주며 밤마다 꿈꾸게 한다. 간흡충, 폐흡충, 선모충들의 비위를 맞추며 나는 식단표를 고른다. 바이러스, 세균들의 눈치를 살피며 외출을 준비한다. 그녀와 공생관계가 깨지면서 내 의식에 뿌리박은 애증의 빨판들. 머릿니나 빈대처럼 집요하게 잠의 뼈를 갉아먹는다. 내 몸의 주인이 된 에이리언이 장기 어딘가에서 나를 조종하는지도 몰라. 가끔씩 전해지는 외계의 텔레파시.
[출처] 중간숙주|작성자 김기덕
 
 
통증은 말한다
 
편두통이 머리에 못질을 한다. 망치를 든 귀신을 쫒기 위해선 연기처럼 빠져나갈 틈이 필요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아무리 울어도 통증은 눈물에 녹지 않았다. 벌레를 잡기 위해 쪼아대는 딱따구리 약을 먹으며 플라시보 효과를 꿈꿨다. 몽환의 잠속에서 꽃의 원초적 뿌리를 캐보았지만 경련의 시작과 끝은 알 수가 없었다. 우울과 불안의 늪에서 물풀 같은 말초신경들이 손을 흔들었다. 물결무늬의 고통이 썰물과 밀물로 오가는 골짜기는 깨달음이 클수록 깊어졌다. 살아있음의 은유, 몸이 주는 메시지를 나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라오콘의 형상에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얼굴에서 읽을 수 없었던 통각신호기의 적색등이 깜박였다. 눈을 감아야 해. 귀를 막고 통증이 없는 낙원을 찾아야 해. 소리를 잃어버린 나환자들이 촛농처럼 녹아내린 손을 흔든다. 에테르 기체를 마신 사람들이 표백된 얼굴로 무덤에 누워있다. 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피부를 낚싯바늘로 꿰며 통각의 소리를 듣는다. 고통이 무거울수록 위로를 얻는 뼈의 외침을 듣는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영혼은 몸을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연금술사의 망치소리. 십자가에 못 박는 소리가 내 몸 안에서 천국 문을 두드린다.
[출처] 통증은 말한다|작성자 김기덕
 
동양화 보는 법
 
동양화가 집안에 들어왔다. 그림 현실이고 현실이 그림인 풍경 속엔 계절과 상관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퍼즐처럼 이를 맞춰 그려진 사물들, 참새와 까치가 입을 모아 기쁨을 노래했다. 70년 된 고양이가 수천 년 묵은 바위 위에서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수탉이 울어대는 공명의 울림, 백로들은 하나의 길로만 날아갔다. 부유한 집안에선 모란이 피고, 석류가 익으면 포도, 박 넝쿨 뻗으며 자손들이 자랐다. 누구에게나 피라미 시절은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꽃을 피워 부평초 같은 타향살이엔 원추리 어머니가 그리웠다. 장미꽃 청춘이 가고 붉게 복숭아는 익어갔다. 맨드라미, 닭 벼슬 같은 불을 꿈꾸며 일품의 두루미가 파도를 바라본다. 작은 잉어를 건진 후 큰 잉어를 건지는 과거시험, 장원급제한 오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대궐은 하나였기에 두 개일 수 없는 배반의 쏘가리들이 탁본된 벽 속에서 퍼덕였다. 관아에서 귀뚜라미들은 갈대로 게를 묶은 임금의 음식을 먹었다. 금옥만당에 금붕어들이 놀고 여러 신선들은 늙지 않는 색비름을 따고 있었다. 근검절약 속에 피어난 연꽃들, 마음을 비운 연뿌리들이 한 줄기 형제애로 통했다. 바다새우와의 해로偕老, 구리그릇에 평안을 담아 국화꽃 핀 뜨락에서 유유자적한다. 갈대와 기러기들도 춤추며 노안老安을 즐긴다. 게들은 바르게 걸어보지만 늘 반항적이었다. 팔랑팔랑 나비가 흰 사슴 뿔 위에 앉아 팔순을 축복한다. 난초 같은 자식들, 죽순 같은 손자들 바위와 대나무 우거진 숲에서 축수한다. 군자의 인품이 가득한 매‧난‧국‧죽의 꽃향기. 냇가에 앉은 노인이 빈 마음으로 발을 씻는다. 벽이 동양화이고 동양화가 벽인 창문을 연다. 새롭게 펼쳐지는 산수화. 호리병박, 포도가 열리고 소나무 등걸에 기대어 달이 산을 올려다본다.
[출처] 동양화 보는 법|작성자 김기덕
 
 
원시 다이어트
 
 
 
숲이 나뭇잎을 털어낸다. 해독을 위해 토해내는 붉고 노란 빛깔들, 최소한의 식단을 위해 꽃은 피우지 않기로 했다. 원 푸드에 길들여진 포도알을 씹는다. 미더덕처럼 터지는 배반의 껍질들, 풍선으로 부풀려진 세포마다 침을 꽂고 비파나무 같은 효소를 심었다. 지방흡입용 호스를 타고 빠져나가는 바람에 내장들이 쪼그라든다. 산화되지 못한 불꽃들이 물이 되어 흐른다. 위절제술은 이제 뿌리부터 행해질 거야. 식욕억제제를 먹으며 한겨울을 버텨야 해.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구토하는 나뭇잎들의 얼굴이 붉다. 거리마다 부는 구조조정 바람 때문일까. 가지치기할 때도 아닌데 꼬마 인형들이 오른팔을 분질러 뽑는다. 이삿짐을 싼 방은 곧 얼음동굴이 될 것이다. 겨울왕국에 눈이 쌓이고, 일만 년 쯤 빙하기가 찾아온다 해도 상대성이론의 시간이라면 버티기엔 하루나 이틀로 충분해. 말라깽이 모델이 활보하던 쇼룸에 불이 꺼지고 성형외과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요요현상의 함박눈들을 쏟아낸 하늘이 구름을 마구 집어 삼킨다. 거식증에 걸린 위벽이 딱딱하게 굳어진 땅에 빈혈로 쓰러진 하얀 풀잎들 좀 봐. 굶어죽은 혼백들이 나풀거려. 골다공증이 찾아온 내 골반뼈를 인수분해하며 빈 마음의 방정식을 푼다. 부질없는 공식들을 꿰맞추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 복잡한 선들을 지우고 단순화된 도형을 세운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압축파일들은 지금 즉시 천국으로 보내고 싶어. 참선하고 고해성사하던 나무들이 뼈만 남아 도장을 새기는 길거리에서 바다가 고무줄놀이를 한다. 해안선을 따라 복식호흡하는 아스팔트 위에 섬들. 구석기의 식탁을 차리면 나는 원시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겨울마다 계절은 허리띠를 조이고 밥을 굶는다. 실반지처럼 가늘어진 허리, 비틀거리며 초승달이 검은 스테이지를 밟는다.
[출처] 원시 다이어트|작성자 김기덕
 
 
살풀이
 
 
 
생의 반쪽들이 갈고리에 걸려 물구나무를 섰다.
0을 가리키는 기울기의 눈금엔
잘려진 시간의 핏물이 고여 있었다.
 
 
 
칼을 맞고 일어서는 냉동의 살들
해체되는 의미 속엔 뼈도 눈물도 없었다.
세월의 등살에
새겨진 물결무늬마다 하루가 풍랑이고 폭풍이었던 여정이 끝났다.
 
 
 
푸른 도장을 받기 위해
문자와 글자들의 건초더미를 되씹던
언어의 사체에서 한 근의 채끝살을 바르기 위해 살아서 고뇌 중인데,
죽은 자의 칼이 산자의 살을 바른다.
광란의 바람이 이는 ㄱㄴㄷㄹ
 
 
 
소가 환전된 금고를 열면 목쉰 쇠방울소리가 울렸지
 
 
 
벌판에서 울부짖던 메아리들만 뼈 속을 맴돌았다.
난도질 할수록 부드러운 칼의 속삭임, 현란한 혀의 놀림에 상처는 깊었다.
무덤 속 벌레들의 섬뜩한 미소 같은
하늘을 품고 되새김질해 온 말씀들이 일어나 칼춤을 춘다.
헝겊처럼 얇게 썰어지며 리듬을 탄다.
 
 
 
해의 시즙이 묻어나는 언덕 위로 밤새 뚝, 뚝
떨어진 달의 꽃무늬들
이글거리는 불꽃 속으로 눈송이들이 몸을 던진다.
[출처] 살풀이|작성자 김기덕
 
 
길 잃은 방
 
 
 
입에서 언어들이 부글거린다.
찌그러진 냄비의 얼굴
라면가닥 같은 생각의 통로들이 끊겨있다.
창문에 오려붙인 구름에서 유아기의 옹알들이 떨어진다.
배수관을 타고 오른 벌거벗은 냄새들만
쿨룩거리며 기침을 토한다.
산에 막혀 길을 잃은 아들이 흐느낀다.
바다에 갇혀 섬이 된 어머니가 깔깔거린다.
막혀서야 차오른 강물의 정은 마그마처럼 뜨겁다고
광야마다 구리뱀의 눈물이 흐른다.
댐을 넘어선 물이 오열하며 낙차 큰 절규로 발전을 시작하면
차단된 기억의 방에도 전기가 들어올까.
소통 없는 수위를 다스리며
강물은 누워 바람의 젖을 물리는데
빛을 만드는 저항의 필라멘트처럼
뼈에 박힌 다이오드들만 부루치 같은 내 심장을 밝힌다.
아스피린의 냇물이 마르며
툭, 길이 끊어진 숲의 어둠에 갇힌 어린 아이가
뇌혈관처럼 펼쳐진 가지들의 푸른빛을 풀어
털실로 짠 방에서
무덤처럼 열리는 내세를 본다.
[출처] 길 잃은 방|작성자 김기덕
 
 
바람의 영양제
김 기 덕
 
 
 
파도의 혓바닥이 태양을 삼킨다. 밤의 목구멍을 넘어 아침의 능선에서 꽃씨를 뿌리는 햇살, 파랗게 열린 길 위로 바람이 인다.
 
 
 
비타민은 채소의 언어였다. 순식물성의 말속엔 엽록소가 담겨있었다. 신진대사를 부르던 언어들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한 알의 씨앗은 산과 바다를 풀어놓았다. 심해를 헤엄치는 상어 떼들, 근육질로 영그는 산비탈에 씨알들. 한 계절의 농익은 얼굴들이 토마토를 심는다.
 
 
 
바람은 계절 내내 나무들의 유방에 볼을 부비고, 이파리를 흔들며 젖을 물렸다. 햇살 밴 과실의 유두를 빨면 꿀물이 쏟아지던 하늘.
 
 
 
바람이 빠져나간 골다골증의 땅들은 황무지로 변해갔다. 끼니때마다 밥을 떠 넣으며 양분을 채워도 무의식의 토양에서 나무들은 고사목이 되어갔다. 랩을 씌우고 비닐 포장한 안개의 날들. “새로운 태양이 필요해” 바람의 알갱이들이 플라스틱 병에서 달그락거렸다. 하늘 사방에 매인 구름의 묵시록.
 
 
 
바람의 말씀은 미네랄이 되었다. 식이섬유의 알약을 삼킨 뿌리마다 풀냄새가 났다. 컹컹 짖어대는 어둠속에서 뼈의 백색분말들은 눈물로 녹아들었다.
 
 
 
가시만 남은 입으로 어머니의 젖을 빤다. 독으로 박힌 파편들이 뼈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고래들이 뛰는 맥을 짚어 노을을 넣고 숲의 바람으로 빗어낸 캡슐. 목구멍으로 넘기자 초신성이 타오른다. 온 몸으로 번지는 붉은 파도. 입에서 나온 말들이 딸기밭에 불콰하다.
 
 
 
태풍이 몰려온다. 가득 수액을 실은 바퀴를 밀고와 후드득 뿌리마다 바늘을 꽂는다. 새파랗게 일어서는 핏줄.
[출처] 바람의 영양제|작성자 김기덕
 
 
블랙박스
 
 
 
  젖은 그림들이 판화처럼 찍힌다. 네거티브 필름으로 현상되는 암실의 풍경, 검은 동공이 하늘을 열고 X-ray 눈으로 뼛속까지 어둠을 찍는다. 구름의 눈, 바람의 셔터, 물의 렌즈들, 보지 않는 것은 신의 눈뿐이다. 잎사귀들 엿듣는 밤을 헤드라이트 불빛이 순간복사한다. 번개처럼 스쳤다 사라지는 허상들, 가드레일을 넘어 뜨겁게 키스한 차들처럼 내겐 사랑할수록 파편들로 가득해진다. 중앙선을 넘나드는 철제 심장으로 횡단보도를 간통하며 깜박깜박 영상을 찍는 신호등을 무시하며 살았다. 천수보살 관음상의 풀과 나무들, 순간도 놓치지 않는 별들의 기록은 누구에게로 흘러갈까. 유성의 속달 메신저가 사라진다.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들을 손가락질하다 도시의 십자가 무덤에 누워 내시경을 하고 MRI를 한 후, 내겐 영혼이 없음을 들켜버렸다. 뉴런을 타고 가는 도파민의 검은 웃음을 흘리며 항히스타민제를 먹은 벌레들이 머릿속을 찍어댄다. 어젯밤에 뱉은 나의 말들이 뛰어다니며 검은 발자국을 남기는 마룻바닥, 피사체 속의 어린아이가 웃는다. 눈부신 거울은 렌즈에 잡히지 않는데 벽에 못 하나 나를 꼬나본다
[출처] 블랙박스|작성자 김기덕
 
꿈꾸는 금연
 
  남자가 여자를 빨아들인다. 흰 종아리부터 불꽃이 일며 머리카락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혼미하게 타다만 이파리들이 누렇게 얼룩지며 머릿속에 달라붙는다. 너 없인 못살아. 필터 같은 입술을 부비며 걸었던 손가락 사이에서 백색가루들이 흩어진다. 솟구치는 검은 타르의 배반은 갑 속의 누구를 선택해도 마찬가지. 치아를 부딪치며 혀를 핥아도 다 태워지지 않는 건 늘 자신이었을까.
 
  빨아들인 독사과 향의 혼, 아무리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바람을 토해내며 소유할 수 없는 구름으로 보낸다. 남은 것은 니코틴의 채취와 거친 호흡의 파동뿐. 물에 젖은 우울의 습도에 다시 태울 수 없는 육체들이 사라져간다. 안개, 그리고 눈물.
 
  남자를 흡입한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안개꽃들이 흔들린다. 붉은 루주의 도취, 검은 손톱에 파인 배꼽에서 불꽃으로 피가 흐른다. 수축되었던 뱃속으로 막소주 같은 기억들이 차오르며 손과 발이 떨어져 나간다. 몽상의 도넛들이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다 주고 싶어도 섞일 수 없는 뜨거운 폭풍들이 휭 하니 빠져나간 저녁. 몽롱이 피어오르는 순간의 미학으로 또 하나의 석양이 저문다.
 
  구둣발에 비벼지는 불꽃 심장. 침을 뱉고 돌아서는 빙석의 뒷모습은 언제나 절벽이었다. 두려움으로 담배를 꺼낸다. 두려움으로 불을 붙인다. 매번 시작하는 마지막 사랑은 늘 첫사랑으로 끝났다. 날마다 최후의 담배를 쥐며 파르르 떠는 손. 다시 원점에 서있다.
[출처] 꿈꾸는 금연|작성자 김기덕
 
달리의 꽃 
 
  달걀 속에서 꽃들이 부화한다. 초콜릿처럼 녹아내린 시간 위에 알들이 깨지며 시침이 검은 잎을 피운다.폭탄같이 웅크렸던 꽃봉오리가 남자의 몸에서 폭죽으로 터진 후 시작된 검은 우주의 빅뱅, 하늘엔 거위 알 같은 별들이 눈을 떴다. 동굴의 문이 열리며 열꽃을 피우던 여드름투성이 얼굴이 스친다. 풀어헤친 머리칼에서 풀 비린내가 번진다. 술병 마개가 빠진 안개의 숲, 팝콘처럼 터진 잎을 물고 배꽃 웃음이 쏟아진 곳에서 나의 뿌리를 찾는다. 어둠이 내려 푹푹 발이 빠지던 늪에서 연꽃처럼 개화를 꿈꿨었다. 창밖엔 천둥소리로 흙탕물이 흘러갔고 계절은 지독한 거름 내를 풍기며 썩어갔다. 늑골의 유정에서 불꽃을 길어 올리는 창세기. 몸 안의 용연향이 풀어지며 배꼽에서 꽃들이 부화한다. 흐물흐물 시계들이 녹는 사막의 땅으로 향수병이 넘어진다
[출처] 달리의 꽃|작성자 김기덕
 
 
종이비행기
   
  소녀의 팔은 접혀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밴 붉은 꽃물로 온통 꽃밭인 화단엔 깃발처럼 스커트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의 손에서 놓인 구름은 비가 되었고 꽃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줄기를 놓친 지상의 나뭇잎들은 절벽으로 떨어졌고, 할딱이는 심장들은 비에 젖어 상처가 아물어 갔다. 연서처럼 안개가 피어오르며 나뭇가지마다 그리운 나라의 엽서가 매달릴 때면 초록 글씨들은 꽃이 되고 열매가 되었다. 노을을 접어 날리는 언덕 위로 빨간 우체통 안의 석류 알 같은 얼굴들이 흩날린다. 밀랍으로 붙인 하루하루가 이카로스 날개처럼 떨어진다. 몸을 흔드는 꽃잎들. 하강기류에 휘말린 엔진들은 정지하고, 강철 심장의 새들마저 둥지로 비상하지 못한 채 깃털로 흩어진다. 탯줄을 자른 눈송이들은 땅에 닿자마자 불꽃 눈물로 태어난다.
   
종이비행기
소녀의 팔은 접혀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밴 붉은 꽃물로 온통 꽃밭인 화단엔
깃발처럼 스커트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의 손에서 놓인 순간
구름은 비가 되었고 꽃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손을 놓친 지상의 나뭇잎들은 절벽으로 떨어졌고
할딱이는 심장들 위로 비가 내려 상처들이 아물어 갔다.
 
연서처럼 안개가 피어오르며
나뭇가지마다 그리운 나라의 엽서가 매달릴 때면
초록 글씨들은 꽃이 되고 열매가 되었었지.
 
노을을 접어 날리는 언덕엔
빨간 우체통 안의 석류 알 같은 얼굴들이 흩날린다.
 
밀랍으로 붙인 계절의 이카로스 날개들이 떨어진다.
꽃잎들이 몸을 흔든다.
 
하강기류에 휘말린 엔진의 정지
박동이 멈춘 강철 심장의 프로펠러
새들도 둥지로 비상하지 못한 채 깃털로 흩어진다.
 
탯줄을 자른 눈송이들은
땅에 닿자마자 불꽃같은 눈물이 되었다.
[출처] 종이비행기|작성자 김기덕
 
 
시소의 법칙
 
빛과 어둠이 시소를 타는 놀이터에서
나는 땅으로 기울고 아이는 하늘로 기운다. 
모래알 같은 언어의 지층을 뛰며
타이어의 탄력에 별이 되고 달이 되다가도
산의 무게에 아이는
차가운 철재 손잡이에 매달려 지구 끝에서 대롱거렸다.
기울어진 평균대 위에 발이 흔들리고
창이 가려진 하늘엔 천칭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팔이 부러진 병신 저울들이 춤추는 세상에
가로놓인 절벽,
입구까지 엉덩이를 들이 민 바위들로
기우뚱 마을이 기울고
사람들은 거꾸로 길에 매달려 거미줄 같은 집으로 종종걸음 친다. 
철봉 위에 무중력 아이가
삐걱거리는 관절소리를 들으며 철탑으로 성장한다.
시간의 파도타기에 
낙엽이 되어가는 나
방향이 바뀐 바람에 꽃잎들이 떨어진다.
일어섰던 풀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서로의 무게를 양보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늘 사다리를 타는
계절의 메트로놈 소리에
해와 달이 널뛰기 하는 골목
3옥타브 C 쯤의 가을이 내 어깨 위로 ♭ 된다.
[출처] 시소의 법칙|작성자 김기덕
 
달의 암자
 
죽 그릇 속에 담긴 핏기 없는 얼굴들
흰 밥알로 풀어져 형광등 하늘을 비춘다.
 
사발에 새겨진 竹竹竹
 
竹音이 들린다.
 
숟가락을 뜨지 못하고
풀어진 눈동자들
희멀건 밥풀이 목구멍에 달라붙는다.
 
화장실 변기에 엎드려 토해본 후 알았다.
몸 안의 죽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역겹던 가스와 마그마
 
활화산 같은 암자엔
죽 쑤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릇을 비우는 게지.
暗, 癌, 庵
 
粥飮을 맛본다.
 
막걸리 푸고 길바닥에 게풀어져 오장육부 게워낸
보름달
창가에 빈 사발만 남았다.
[출처] 달의 암자|작성자 김기덕
 
휴대폰 하나님
 
 
 
가게에서 별을 샀다.
별 속에 길을 내고 빛을 밝혀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여호와는 지구별의 하나님
나는 검은 별의 하나님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
패턴인식으로 문을 연 세상엔 상징들로 가득했다.
집집마다 태양이 뜨고
손끝에서 사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터치패드의 새로운 인사가 시작되었다.
 
E.T의 손끝에서 만나는 별들의 교신
 
지하철은 신들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행성에 문자를 보내고 메시지를 날리며
계시를 입력했다.
서로의 중력을 확인하며 다운로드한 복음들이 가득한 행성
목마른 영혼들이 게임을 즐겼다.
전쟁을 즐겨온 신들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피조물로 전락한 자폐아들은
땅을 피로 물들이고도 스위치를 끄지 못했다.
 
신이 된 별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우주로 뻗어간다.
기계와 인간이 접속하여 응시하는 하늘의 창
은하의 별들이 뜨고
상형문자들이 흘러간다.
 
한시도 하늘을 보지 않으면 불안한 중독
아이들은 매일 접신 중이다.
[출처] 휴대폰 하나님|작성자 김기덕
 
단풍나무 별
 
 
별이 쏟아진 언덕엔 심장들이 할딱이며 피를 흘렸다.
새의 부르튼 발자국들은 길을 잃고
밤이 늦도록 단풍나무 아래를 서성였다.
숭숭 구멍 뚫린 날개를 접은 거울 속의 빛바랜 눈빛들
풍선처럼 부푼 달빛에 산산조각 난 옷자락들은 새털처럼 흩어지고
눈동자는 땅에 묻히어 해가 떠도 하늘은 검은 가면이었다.
중력에 끌려 행성이 된 남자만
풀어헤친 밤의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유성우의 칼날에 바람의 편지들이 풀잎처럼 허공에 찢겨질 때
노을이 묻힌 무덤가에서 흐느끼던 실루엣의 그림자
별이 지고서야 단풍나무 별 하나 가슴에 품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며 푸른 시트가 걷히는 언덕
파란 약병에서 쏟아지는 붉은 알약들
뼈만 남은 단풍나무는 흰 달빛에 실려 가고
비처럼 내리던 빛들이 검은 입속에서 초록빛으로 피어났다.
[출처] 단풍나무 별|작성자 김기덕
 
비 개인 아침
 
 
 
옥상 위에 지렁이들이 물음표를 그린다.
승천하던 용들이 떨어져 지렁이가 된 건 아닐까.
간밤의 천둥 번개가 수상했다.
 
 
 
하늘엔 비룡이 살고
바다엔 해룡이 살고
성경엔 리워야단이 산다는데
땅에는 토룡이 산다.
 
 
 
여의주 같은 이슬을 물고
어둠 속에서 흙을 삼켜 빛을 토해낸다.
기꺼이 제 몸을 두더지나 뱀에게 내어주고
어혈을 풀어주면서
토막이 나서까지 생명을 낚는 낚시 밥이 된다.
 
 
 
밟힌다 해도 꿈틀 돌아누우며
온 몸으로 참아내는 묵언수행의 민초들
헌신의 용상에 올라
예수로 부활하고
석가로 환생한다.
 
 
 
흰 스티로폼 상자에 흙을 채워
하늘빛으로 상추와 깻잎을 가꾸신 어머니
품 같은 옥상에서
 
 
 
승천도 마다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목숨이 다해 전하는 상징의 기호들
동그라미를 그린다.
알파와 오메가를 그린다.
세상과 하늘과 내가 하나 되는 한일자를 쓴다.
[출처] 비 개인 아침|작성자 김기덕
 
달의 항해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銀絲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반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면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
손 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겨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출처] 달의 항해|작성자 김기덕
 
날마다 선택된다 
 
바람 속에서 춤추던 4g의 고무공들이  
빛을 뚫고 세상에 나온 0.1초의 순간, 운명은 결정되었다. 
비너스의 몸에서 나온 60억분의 일의 확률로 나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닌, 
가난과 굶주림의 전장이 아닌 
대한민국,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과천에 산다. 
당첨번호는 62, 10, 2, 8 
권천성, 수천성, 귀천성, 예천성의 별들이 반짝이고 
날마다 다이아몬드 태양이 떠오른다. 
상금으로 받은 재산과 아이들, 최고의 행운은 그녀의 과녁을 맞힌 화살이었다. 
황금 달과 지폐다발을 세는 바람 
평생 쓰고도 남을 물과 공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화살을 쏜다. 
서울역 근처 와이티엔 빌딩 앞 명당에서 로또를 사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녹번동 은평구청 사거리  
편의점 바이더 웨이에서 즉석 행운을 긁는다. 
시간의 통 속엔 64궤의 공들이 돌아가고 384의 효들이 춤춘다. 
지금 내가 뽑은 공은 33번째  
천산돈(天山遯), 세상을 피해 잠시 몸을 숨겨야 한다. 
백 번째 여자에게서 태어난 우레가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대는 밤 
벼락 맞을 확률에 돈을 걸고 
돼지나 불타는 집이나 물난리 꿈을 꾸진 않았어도 
회차와 당첨금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린 이미 꽃이 된 구름을 따고, 눈물이 된 강을 마시고 
백지 같은 땅을 구겼다 폈다하며 날마다 복권(福權)을 누린다. 
비너스의 문이 열리는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 빗방울 하나에도 환성과 탄식이 교차한다.
[출처] 복권|작성자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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