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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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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외문학향기

김기덕 시모음 3 ( 한국)
2019년 12월 21일 17시 06분  조회:1747  추천:0  작성자: 강려
해장하다
 
 
 
술이 덜 깬 날엔 해장을 한다. 뚝배기에 담겨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해장국이 몸속에서 뼈가 녹는 진실을 풀어낸다. 몽롱함을 깨우며 불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한때 푸르렀던 무청과 아삭한 콩나물들이 뒤섞여 회색빛 아침을 깨운다. 싱거운 삶의 시간을 새우젓으로 간 하며 뼈대만 남은 간밤의 생각들을 떠올린다. 하루 종일 불에 달궈지며 한 끼니 식사를 위해 뜨겁게 살았다. 가마솥에 통째로 삶아지며 끓어오르는 내장을 물로 다스렸다. 귀도 잘리고, 간도 썰어져서 한 생의 순대를 채우기 위해 나도 국밥으로 끓어올랐다. 파 마늘에 선지들을 가득 담고 임계점을 넘어야만 맛이 나는 비법을 깨닫는다. 누군가가 내 몸에 연기를 피우고 불을 질렀던 것은 깊은 맛을 내기 위함이었다. 매콤한 다대기를 넣고 휘휘 저으며 칼, 칼을 휘둘러 칼칼하게 맛을 더했던 뚝배기 속에 수저를 담가 열정을 퍼 올린다. 콩나물과 시래기 뒤엉킨 식물성의 생각들을 건져 먹는다. 뱃속에서 해장이 풀어질 때 간밤의 서릿발도 말끔히 풀린다. 얼었던 뼈들도 녹아내려 살이 되고 피가 된다. 불에 달구어질 때 해장국 뚝배기와 나의 전성시대다. 뜨겁게 열 받을 때마다 밥풀떼기 차갑게 식어버린 빈 뚝배기를 조문한다.
[출처] 해장하다|작성자 김기덕
 
깃발이거나 플랜카드
 
 
 
 
몸 안에 것이 가끔씩 밖으로 내걸리는 것이 혀다. 입이 열리고 혀가 움직일 때 내면을 알 수 있다. 점막으로 덮여 미각과 저작을 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혀는 내면을 쓴 유일한 깃발이다. 아니 플랜카드다. 입이 열리고 나면 깃발이 펄럭이고 함성이 울린다. 플랜카드가 내걸린 벽엔 언어들이 춤춘다. 집집마다 혀가 내걸린 창문엔 저마다의 목소리와 의미들이 나부낀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에 빠진 집안의 내력은 알 수 없다. 무엇을 씹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얼굴, 입을 열고 혀를 내보일 때 우린 소통을 느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서로의 혀를 맞대지만 혀의 색깔이 왜 빨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혀가 왜 그렇게 부드러운지에 대해도 나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다. 색색으로 내걸린 플랜카드들이 유혹의 말을 흘린다. 코드를 찾은 사람들이 펄럭이고, 바람을 핥으며 내통한다. 단칼에 너를 밸 수도 있지. 혀 앞에선 늘 꼬리를 내보인다. 보이는 꼬리와 보이지 않는 꼬리 사이엔 원의 세계가 있다. 혀를 잘 놀려야 천국을 얻는 것이 아니라 혀가 꼬리를 물고 있어야 천국을 얻을 수 있지. 날마다 깃발들이 펄럭이고, 플랜카드가 나부끼는 창문에선 혀를 찾을 수가 없다. 붉게 물든 깃발들이 바람을 삼킨다. 몸 밖으로 나온 혀들이 서로를 피터지게 물어뜯는다.
[출처] 깃발이거나 플랜카드|작성자 김기덕
 
튀김들은 바삭거린다
 
 
 
 
검은 솥에서 기름이 끓는다. 모든 튀김들은 지옥을 경험한 후에 탄생한다. 바삭바삭 입에서 부서지는 지옥의 맛은 감동적이다. 살면서 지옥을 맛볼 때 튀김이 된다. 질기거나 익지 않음으로 먹을 수 없는 관계는 닭이나 오징어만은 아니다. 튀겨진 살과의 접촉, 익혀진 관계의 바삭거림은 행복하다. 양념을 입었어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지 않은 이들이 서로 피하며 등을 돌린다. 강한 고통만이 순간에 뼈와 살을 익힌다. 하루의 검은 솥에서 기름이 끓고 지옥의 고통으로 튀겨질 때, 죽어도 죽지 않는다. 지글거리며 등 뒤집고 부상하는 순간의 깨달음을 얻는다. 허옇게 부풀며 스스로 가벼워질 때 기름불에서 건져진다. 불 속의 순간은 짧아도 변화의 쾌락은 긴, 지옥 불을 경험한 이에게선 바삭한 튀김 냄새가 난다. 끓는 기름의 고통을 경험한 이는 뼈와 가시를 내세우지 않는다. 비릿한 풋내기의 생살을 드러내지 않는 고소함. 푹 삶아지고 고아져서 완숙의 꿈으로 떠오를 수 있는, 죽음은 바삭한 열매다.
[출처] 튀김들은 바삭거린다|작성자 김기덕
 
모래시계
 
 
 
 
모래 속에 박힌 해골 하나 입 벌리고 웃는다. 눈동자가 사라진 퀭한 구멍으로 나를 바라본다. 구멍 속엔 블랙홀이 담겨있고,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찬란했던 빛깔들은 어둠이 되었다. 오뚝하던 콧대마저 사라진 구멍 속으로 사막의 모래바람만이 드나든다. 몸의 감각을 다 지우고 나면 남는 해골 하나, 풍화작용하며 모래가 되어간다. 태양빛 입술과 볼의 노을을 지우고, 밤을 닦아 하얗게 탈색해 간다. 모래 속에서 반 쯤 머리 들고 바라보는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해골이 징상한 이빨로 웃는다. 사는 게 다 풍화작용이지. 감각 속에 울고 웃다가 무감각에 빠져드는 사막, 모래가 되다 만 해골 하나 사막에 누워 말이 없다. 모래가 모래가 되고, 모래가 다시 모래가 되어 미세입자가 되면 나는 누구와 만나 새로운 생명체가 될까. 분해와 결합의 반복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와 해골은 하나의 시간 속에 있다. 사막 속에 누운 해골과 사막을 걷는 해골이 마주보고 웃는다. 거꾸로 선 내 몸에서 모래들이 쏟아진다. 시간의 반복, 내가 모래 속에 눕고 해골이 사막을 걷는다.
[출처] 모래시계|작성자 김기덕
 
쓰레기 섬
 
 
 
 
 
버려진 이들이 태평양 한 가운데서 만났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흘러 다니다 바다에서 만나 섬이 되었다.
밟히고 차이며 품었던 독기를 숨겨 쓰레기의 영토를 세웠다.
상처투성이로 뚜껑이 열린 영혼들이 바다를 정복했다.
바다는 쓰레기의 식민지가 되고, 쓰레기들에게만 바다의 시민권이 주어졌다.
물고기들은 페트병의 살을 먹으며 군대로 키워졌고,
자살특공대원들은 뼈에서 살까지 플라스틱으로 세뇌되었다.
스티로폼의 명령에 물고기들은 수천 킬로를 헤엄쳐서 자살테러를 했다.
살을 나눠먹은 배신자들의 뱃속엔 비닐의 독 가루가 퍼지고,
사지가 뒤틀리는 죽음이 찾아왔다.
일회용 비닐봉지 하나 버려질 빼마다 쓰레기 나라의 인구는 늘어났다.
햇빛에 미세분말로 개체분열하며 불멸의 종족으로 무한번식 했다.
게릴라전을 준비해온 바다왕국엔 동원령이 내려지고,
밥상머리에서 바다와 안개전투가 시작되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물고기들로 평화는 깨져있었다.
하얀 소금으로 위장한 병사들도
맛을 내며 흥겨운 식탁을 점령해 갔다.
[출처] 쓰레기섬|작성자 김기덕
 
틀의 유전
 
 
 
아버지는 나를 위해 틀을 만드셨다.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이는 틀은 숨통을 조였다. 다리를 접고, 팔을 오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틀이 나를 기형적으로 만들어갔다. 물처럼 살아야지. 벽돌공장의 진흙처럼 너도 반듯하게 자라야지. 하지만 아버지, 제겐 저만의 모양이 있어요. 둥글지도, 각지지도 않은 상상할 수 없는 도형이 있어요. 아들아, 그걸 꿈이라고 생각하며 복잡한 도형을 만들지만 결국은 거대한 프랙탈에 갇히는 거란다. 단순한 원을 그리고, 세모, 네모를 그리자, 남들처럼. 아버지는 날마다 틀을 만들고, 나는 날마다 틀을 부쉈다. 틀 안에서 자란 형제들은 사각형이 되고, 삼각형이 되어 인기 있게 팔려갔지만, 나는 아버지의 열매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가출하고, 바람이 되어 들판을 헤매다가 길가에 변종의 씨앗을 뿌렸다. 상상의 가지를 뻗고, 무수한 꿈의 이파리를 흔들며, 영원을 향한 프랙탈을 그렸다. 지상으로 도형 하나 그려갈 때마다 내면으로 깊어가던 뿌리들. 나는 구름을 걸치고, 호수를 들여다보며, 사색에 잠겨 빗변을 걸었다. 내가 완전한 바람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였다. 겨울이 되면 옷을 벗어야 하는 나목이었다. 또 다른 틀에 갇혀, 아들아 둥글게 자라 거라. 꽃을 피우면서 꽃 아닌 틀을 만들었다. 아버지보다 더 견고한 틀. 이런 지독한 아버지 같으니, 나는 틀을 깨뜨렸다. 네모, 세모의 아이들이 기어 나왔다.
 
[출처] 틀의 유전|작성자 김기덕
 
마지막 화살
 
 
주톳빛 광중(壙中)에 관을 내린다. 상·중·하의 세 흰 끈을 잡은 여섯 명의 친구들이 땅 아래 몸을 누인다. 관을 걷어내고 차디찬 땅에 내려놓아도 마포에 싸여진 몸은 말이 없다. 저승에서도 사용하라고 평소에 쓰던 명기를 주변에 묻고, 광(壙)에 흙을 채운다. 첫 삽을 뜬 상주의 흙이 주검 위에 투두둑 떨어진다. 동시에 자식들의 곡(哭)이 후드득 흔들리면서 천천히 한 사람이 땅 속으로 잠겨간다. 잘 생긴 얼굴 웃음 많던 이름이 말없이 지워져간다. 정해진 시간 지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는 한 생의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 살(殺)을 피해 등 돌린 사람들은 뒤돌아보지 말라 한다. 사라지면서 쏘는 마지막 화살에 명중되는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떠나는 자는 마지막 화살을 쏜다. 가장 강렬하고 치명적인 기억을 남기고 간다. 마지막 살에 급소를 맞은 자는 따라서 죽음을 맞거나, 평생 흉터처럼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아무에게도 추억을 남기지 않고 가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있었다. 화살을 피하고 싶다. 난 왜 어머니의 마지막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까. 즉사의 명중은 피했지만,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나는 또 하관(下官)의 순간 누구의 가슴을 맞출 것인가. 사라지는 자는 말이 없는데, 마지막 쏜 마지막 화살은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있다.
[출처] 마지막 화살|작성자 김기덕
 
철길 위의 하모니카
 
 
 
코스모스 피어있는 철길에 하모니카 소리 아다지오 완행열차로 지나고 바람은 들숨과 날숨으로 곡조를 만든다 차창으로 스치는 플라타너스 얼굴 내뿜는 한숨조차 단조의 연주가 되는 하모니카의 입맞춤은 악보 없는 레일 위의 선율로 흐르고 하고픈 말 다 하지 못해 도·미·솔·도 듣고 싶었던 말들이 귀를 열면 레·파·라·시·레 풀잎들도 말없이 하모니카 떨림으로 노래한다 철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지 하늘엔 뭉게구름 피어나고 기적소리 산허리를 돌아 끊겨진 철길 하모니카 이름은 구름 따라 떠가고 하모니카 구멍 속 눈물 담긴 화병에선 해마다 젖은 코스모스 꽃잎들이 피어난다
[출처] 철길 위의 하모니카|작성자 김기덕
 
핀셋을 든 여자
 
 
현미경 속의 불순물들을 핀셋이 집어낸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엔 은밀한 무리들이 살아있다. 손잡을 수 없다면 골라내야지. 살면서 만져서는 안 되는 부류들은 핀셋이 필요하다. 두 개의 금속을 붙여 만든 핀셋은 오므려지지 않는 탄성을 갖고 있다. 자기 고집이 강할수록 탄성은 강하고, 탄성이 강할수록 콕 집어 예리하게 집어낼 수 있다. 흑백의 하루에서 골라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내겐 더 뾰족한 핀셋이 필요해. 강하게 집어도 휘어지지 않을 탄성을 키우면서 뾰족한 감각을 세웠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거침없이 골라낸 주변엔 친구 하나 남지 않았다. 썩어서 골라내고, 덜 여물어서 집어내고, 벌레 먹어서 버렸다. 핀셋이 닿는 곳마다 상처를 남기며 뿌리들이 뽑혀나갔고, 고독은 늘어났다. 나중엔 핑계를 대서라도 억지로 괜찮은 놈들까지 콕, 콕 집어냈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거나, 이물질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는 핀셋에게 청부살인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다 어딜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주변을 집어낼수록 고독해졌다. 나는 내 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썩고 병든 주름 속에 벌레들이 가득했다. 어서 어서, 핀셋을, 사람들의 입엔 핀셋이 물려 있었다. 내 안의 이물질들을 집어낼수록 주변엔 좋은 이들로 채워졌다. 핀셋이 방에 콕 박힌 나를 들어 올렸다.
[출처] 핀셋을 든 여자|작성자 김기덕
 
통증을 모르는 아이
 
 
 
 
통각의 보호막 속에 나는 물처럼 담겨있다. 비닐봉지에 담긴 물은 바늘이나 가시의 상처에도 쉽게 새버린다.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내용물이 쏟아져서 빈 껍질로 돌아간다. 나를 부풀게 하는 것은 아직 찢어진 막이 없기 때문이다. 살가죽이 물과 피와 정신을 감싸고 있는 줄만 알았지만, 새는 것을 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통각이 없다면 누가 언제 내게 칼을 던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미세한 누수나 작은 외부의 침입도 감지할 수 있는 통증의 피막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비닐 팩은 그저 물만 담고 있을 뿐, 예리한 칼이나 송곳의 침입을 막을 수 없지. 줄줄 물이 새서 쪼글쪼글해져도 비닐 팩은 소리 지를 수 없지.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가죽이나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바늘 하나 침투할 수 없이 온 몸을 밀봉하고 있는 통증이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몸에 붙어 있을지라도 내가 아니고, 죽은 것이다. 굳은살이나 사마귀 같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나도 통각을 잃어갔다. 통증은 공감인데도 무관심으로 피하기만 했으므로.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넘어져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고관절에 금이 가도 망가져가는 나를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또 손가락 하나를 잘라 먹었다. 모두가 아픔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통증 없는 곳이 지옥이다. 두려움과 연약함을 깨우치기 위한 신의 선물이 내겐 없다. 덜렁거리는 무릎을 흔들며 논다.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는 아직 어린아이. 성숙한 이는 통증의 두려움을 안다.
[출처] 통증을 모르는 아이|작성자 김기덕
 
마지막 보시
 
 
나귀에 망자를 싣고 천장으로 떠나는 길은 라마승과 천장사뿐이었다. 가족도 없이 떠나는 길은 외롭고 멀었다. 하늘이 맞닿은 천장터에 망자를 누이고 라마승이 주문을 외운다. 망자를 인도하는 독수리를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종을 울린다. 뼈피리를 불며 덧없는 한 생의 바람을 보낸다. 이생에 미련이 남은 자에겐 독수리가 오지 않는 법. 인연을 끊고 환생을 꿈꿀 때만 독수리들은 날아온다. 아낌없이 제 몸을 보시하고 돌아가는 자를 위해 까맣게 허공을 덮는 하늘의 십자가들. 눈을 쪼고, 코를 쪼고, 입술을 찢으면서 한 세상 살아온 욕망을 뜯어먹는다. 감각은 사라지고 백골만 남아서 빈 마음이 되면 훨훨 저승까지 가리라. 독수리의 인도 따라서 껍데기를 벗고 날아오른 망자의 혼은 어디에서 다시 환생했을까. 독수리들이 떠나자 천장지엔 방울소리 잦아들고, 타던 향불도 꺼졌다.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망자가 떠나는 천장터, 뼈를 씻는 비가 내렸다.
[출처] 마지막 보시|작성자 김기덕
 
 
 
 
 
통을 옮기다가 넘어져 구르면서 나도 하나의 통임을 알았다. 숫자를 세며 머리통을 굴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악, 소리가 먼저 울림통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몸통이 중력 작용으로 언덕 아래 굴러 떨어졌다. 통 안의 내장들이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허리와 다리통엔 상처가 났다. 서있는 통들은 견고히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 내면에 가득 내용물이 채워진 통일수록 흔들림이 없다. 두드려 보면 알 수 있는 깊은 내면의 무게. 꿈이 가득 채워진 통은 어떠한 바람에도 넘어지거나 구르지 않는다. 가벼운 통에서만 울리는 얄팍한 불만의 울림. 속이 빈 통들의 공명은 요란하다. 출렁 하고 넘어진 술꾼의 입에서 오물들이 쏟아진다. 누구나 통 안에 감추어진 내용물은 함부로 쏟지 말아야 하는 법. 수십 년 묵은 장일수록 함부로 뚜껑을 열지 않는다. 튼튼한 다리통에 힘을 주고, 허리통을 동여매어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내 안에 오랠수록 썩지 않는 내용물로 가득 채우고, 단 한 번 비밀의 뚜껑을 여는 순간, 아낌없이 주기 위해 함묵하리라. 숨통이 다하는 날까지.
[출처] |작성자 김기덕
 
톱이 놓여진 시간
 
 
 
톱이 한 생명의 밑둥치를 자른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다 쓰러진 나무의 부러진 가지들이 진액을 흘린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엔 하얀 목질의 살점들이 묻어있다. 쩍 소리를 내며 쓰러지던 마지막 비명이 계곡에 메아리로 울렸다. 수십 년 다져온 삶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톱이 발등에 놓일 때 그 섬뜩한 기운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야금야금 내 살 속을 파고들 때 단단히 톱날을 붙들고 놓지 말았어야 했다. 잘 생겼다는 바람의 말 한 마디, 쓰윽. 꼭 필요한 데 쓰일 거라는 구름의 말 한 마디, 싸악. 쓱쓱 싹싹 뼈가 잘리는 줄 모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밑둥치 잘리는 줄 모르고 푸른 이파리 펄럭였다. 한 눈 파는 동안 발목에 섬뜩한 톱날이 놓인다. 춤추는 순간 옆구리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박힌다. 시계의 톱날들은 날카롭고 촘촘하다.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이빨들이 밑둥치를 물고 놓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강하고 튼튼하다고 생각한 곳에 톱날이 놓인다. 쓱쓱 싹싹 발목을 자르는 시간. 밤과 낮의 반복되고, 하얗게 발밑엔 회한의 톱밥들이 쌓인다.
[출처] 톱이 놓여진 시간|작성자 김기덕
 
카멜레온의 이름들
 
 
 
구두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전자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5센티 숨겨진 깔창. 난 이미 가식적인 사람이란 걸 안다. 순수했던 내가 아니다. 치아를 교정했고, 머리염색을 하며, 숨겨진 옆구리의 살들을 감추고 산다. 성형미인을 보고 험담을 했고, 짙은 화장의 얼굴을 보고 비웃었다.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유리하게 변호할 때 카멜레온의 이름을 붙였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반칙과 트릭의 일상에서 나도 강자인양 주변에 맞는 보호색을 띠며 깃털을 세워 몸집을 부풀렸다. 거친 욕을 하며 광란의 질주를 하고, 추월과 끼어들기에 능해졌다. 들킨 자는 비판 되고, 들키지 않은 자는 용납되는 은폐의 숲에서 살아남기를 한다. 발가락의 뼈들이 휘었다. 목과 눈가에 칼자국이 남았다. 호스로 빨아들인 나의 지방덩어리들은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과감히 나의 일부를 잘랐다. 일부의 공장은 폐쇄됐고, 발전소의 불들은 꺼졌어도 함몰된 젖가슴을 감추며 고상하게 살아간다.
[출처] 카멜레온의 이름들|작성자 김기덕
 
고치 속은 따뜻하다
                                                                
 
 
찜질방의 벌레집 같은 공간에 몸을 밀어 넣는다 온탕 냉탕을 오가며 사우나에서 땀을 뺐다 날아갈 것 같은 가벼움으로 나비를 꿈꿨다 방과 하늘이 통하는 구멍에서 육체의 한계를 느꼈다 거북의 등껍질을 벗은 사람들은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고 오락을 했다 낮선 얼굴들이 둘러앉아 계란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잠을 청했다 코를 골아도 깨우지 않고 통로 복판에 큰대자로 누워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으면 다 똑같은 족속이지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동굴 속의 공간 따뜻하고 습한 기운에 세균들도 달라붙어 잠을 청한다 시간을 갉아먹다 찾은 인간도 한통속이 되어 벌거벗고 목욕하고 시원한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꿈틀 돌아눕는다 세상에 피난처 하나쯤 있다는 게 좋은 거야 제 맘대로 뒹굴며 시간 때울 수 있는 벌레들의 자유, 한 잠 자고나면 찜질한 몸에선 날개가 돋고 나방들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날 테지 나방과 나비의 차이는 생각에 있었지 육체를 벗어나려는 나비 한 마리 언젠간 내 품을 찢고 날아가겠지 등이 가려운 사람들이 서로의 등짝을 밀어주다가 봄날의 방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 날개를 기다리는 시간, 고치 속은 참 따뜻하다
[출처] 고치 속은 따뜻하다|작성자 김기덕
 
장고
                                                           
 
 
 
 
변죽만 두드리며 살아왔지.
 
울림통의 한복판에서 신명나게 장단을 맞춰 궁채 한 번 놀리지 못한 채, 세요고의 가는 허리 조이며 뼈를 깎아 살아 온 몸. 탕개에 걸린 목숨 줄만 팽팽히 당겨져 붉고 흰 조임줄에 묶여있었지. 낮과 밤의 채편과 북편을 두드려 덩 · 덕 · 쿵 · 더러러…. 명고수를 만나야 해. ‘덩’ 하고 가슴을 울리고, ‘덕 · 쿵’ 뼈마디를 울리며, ‘더러러’ 말초신경까지 뻗어가도록, 오른손 말가죽은 높은 음을 내고, 왼손 소가죽은 낮은 음을 내어 오동나무 붉은 가슴을 울려줄 운명을 만나야 해. 해와 달의 궁채를 들고 온 이가 피 묻은 십자가를 울린다. 털썩 주저앉아 자지러질 것 같은 울림의 만남.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 가막쇠를 걸고 있는 조임줄을 당기며 하늘의 북소리를 울린다. 말씀을 씌운 방망이가 ‘쿵’, 쪼개진 우레 소리 ‘더러러’ 동서남북을 울리는 장고소리에 발을 맞춰. 비스듬히 어깨에다 장고를 둘러메고, 덩실덩실 춤추며 흥청흥청 놀다가도. 이웃들 부추겨 추임새 넣어주고, 빠른 장단 휘몰아쳐 신명나게 도약하며, 초로인생 흥을 돋워 장엄하게 끝맺으세. 덩 · 덕 · 쿵 · 더러러, 덩 · 덕 · 쿵 · 덩덕쿵.
 
좌뇌와 우뇌를 울리는 영혼의 소리
[출처] 장고|작성자 김기덕
 
빨강색 통신
                                                           
 
 
 
 
 
  빨간 몸통의 전화기를 사랑했다. 수화기를 들면 전해지는 하트의 언어들, 귓가에서 함박눈이 속삭였다. 일방적으로 받을 수만 있었던, 하늘의 음성들이 시작된 번호를 나는 알지 못한다. 누가 내게 하늘로 거는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을까. 액정화면엔 발신자의 번호가 뜨지 않았지만 늘 세상엔 함박눈이 내렸다. 나는 가끔씩 전화선 복구를 위해 새벽이면 교회를 찾기도 했다. 강대상에 선 목사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하늘이 닿을 것 같은 긴 선을 늘였다. 나는 책을 덮었다 폈다 하며 ON/OFF 스위치를 작동했지만, 끊기는 전화 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지국은 구름 속 어딘가에 있다고 사람들은 수런댔다. 하지만 전봇대가 세워진 방향은 늘 서산 너머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성경 속의 문장들을 다 이으면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지 나도 문장들을 꺼내 틈틈이 이어보았다. 페이지를 열어 다이얼을 돌려봐도 빨간 성경책에선 발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먹통이 된 전화기는 차갑게 식어있었고, 나는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언제쯤 하늘의 벨소리는 울릴까. 하늘엔 구름만 가득하고 아직 눈발은 내리지 않는데, 곧 겨울이 올 거라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출처] 빨강색 통신|작성자 김기덕
 
밝음 조명가게
 
 
밤이 찾아오고 밝음 조명가게에 불이 들어오면 또 다른 은하계가 열린다. 빛을 얻고 살아 숨 쉬는 기구들 모여 새로운 세상의 별을 꿈꾼다. 한 세상을 비추기 위한 생명들이 다양한 빛깔과 모양으로 태어났다. 길거리에 세워지고, 천장에 매달리고, 벽에 걸리고, 바닥에 매몰되어서도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빛을 발하리라. 자신의 빛깔과 온기를 품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주변을 위해 살아가는 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안개등이 샹들리에를 시기하지 않고, 형광등이 백열등을 질투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남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는 등불들이 빛난다. 광원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 굴절, 투과시키면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는 눈부신 얼굴들. 투광기는 건물의 벽이나 공항·경기장·분수를 비추고, 정원등은 정원을 비추고, 가로등은 길을 비추고, 특수효과를 위한 무대등은 눈과 구름, 불길을 만들며 무대를 비춘다. 아무리 작은 소형전구라 해도 그의 삶은 빛난다. 태양이 뜨기 전까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며 어두운 세상에 꿈과 희망을 나눈다. 겸허히 어둠을 물리치며 주어진 공간을 지키다가 태양빛을 품고서야 잠든다. 빛의 주인이 돌아오는 날 세상의 어둠은 사라지고 불빛들은 휴식을 얻으리라. 아침마다 가장 크고 광휘로운 십자가 앞에서 작은 십자가들이 무릎 꿇는 것을 보았다.
[출처] 밝음 조명가게|작성자 김기덕
 
지퍼의 웃음
                                                               
 
지퍼의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자 촘촘한 이빨들이 가지런히 웃는다.
첫 인연은 막음쇠에 발을 들이밀면서였다.
우린 두 개의 테이프 가닥으로 살다가 서로 이가 맞물려 인연을 이뤘다.
똑딱단추나 갈고리단추보다 견고히 뼈를 맞대고 살아.
함께 옷깃을 여미며 바람 한 점 새지 않게 문단속을 하지.
방심 하나에 이빨 하나 빠지고,
원활하던 슬라이드에도 장애가 와서 와이(Y)라는 물음이 많아지면
가지런히 웃어주던 미소는 사라지고 지퍼가 안의 지저분한 내용물이 보여.
벌어진 입으로 바람이 새며 급격히 서로의 결속은 무너지지.
헤픈 여자들 앞에선 함부로 지퍼를 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벼운 입 앞에선 지퍼를 열지 말아야 했는데,
지퍼가 벌어지자 수치스러운 내장들이 쏟아졌지.
바느질 자리 촘촘히 꿰맨 실밥으로 굳게 입을 다문 지퍼들
단단히 이빨을 앙다물며 우린 사랑해야 해.
한 번 벌어지면 다물기 어렵고,
이 맞지 않은 채 진행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슬라이드의 길은
늘 처음이 중요하다.
이가 어긋나 옴짝달싹하지 않는다면 이별보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바람 부는 세상, 단단히 서로를 껴안을 때까지.
지퍼가 웃는 건 웃는 게 아냐.
[출처] 지퍼의 웃음|작성자 김기덕
 
십자가 침술원
 
 
 
 
 
 
내 몸의 막힌 혈을 뚫기 위해 침술원을 찾았다. 허리에 찾아 온 통증과 하반신 저림이 잘못 된 나의 자세 때문이라고 의사가 일침을 놓았다. 장침이 뻐근하게 뼈 속까지 찔러왔다. 내 어릴 땐 회초리 드시던 어머니 말씀이 정체된 혈을 뚫어주었지. 비위가 약해 조그만 일에도 심사가 뒤틀리고 맥이 뛰지 않던 체증에 사관을 놓았다. 혈이 막히는 것은 생각이 막히는 것이란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래, 평소 나의 자세가 삐딱했었지. 음양의 기운을 다스리며, 변하고 순환하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통通하여 정심正心하지 못했다. 비딱해진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지 못했다. 막힌 혈을 뚫고 내 몸 안에 고인 옹종의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피침이 필요했다. 살을 째고 고름을 도려낼 칼의 침.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침뿌리 끝까지 찔러 넣어 혈을 뚫어야 한다. 간절한 기도가 봉침이 되어 허리에 꽂혔다. 끔찍하도록 다리 끝까지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고서야 깨달음이 전해졌다. 침침했던 눈이 밝아지며 침로針路가 보였다.
[출처] 십자가 침술원|작성자 김기덕
 
충치
 
 
 
 
뼈를 갉아먹으며 벌레들이 이빨에 구멍을 뚫는다. 잠시 한눈 판 사이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와 집을 지었다. 설마 강철도 씹을 수 있는 단단한 뼈를 무너뜨릴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을 두드리며 밤마다 집요하게 내부로 파고드는 망치질을 느낀 후엔 이미 늦었다. 먹고 마시며 씹었던 쾌락의 침입자는 벌써 나의 한쪽 성벽을 허물고 있었다.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지면 방어할 수 없는 적들이 몰려올 것이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겠지만, 성벽이 무너지기까지는 조짐들이 있었다. 성을 지키는 일은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멀리 했어야 할 술과 사탕, 달콤한 언어들이 치석을 만들고 부패의 관습이 되었다. 안일한 피로감에 무시해버린 칫솔질이 엄청난 파문을 가져왔다. 벌레는 단순한 벌레로 끝나지 않았고, 망치질은 일회성 위협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마다 암벽을 뚫는 착암기의 진동에 골이 흔들리고 세상이 진동했다. 통증의 진앙이 퍼지며 발끝까지 아파왔다. 의사를 찾아야 해. 병든 뼈를 허물고 금을 녹여 새로운 뼈로 채워줄 의사를 만나야 해. 흰 날개옷의 천사가 입을 벌리고 구멍 뚫린 뼈 속에 정금 같은 말씀을 채운다. 어떤 벌레도 접근하지 못할 뼈있는 말씀이 내 안에 기둥을 세웠다.
 
[출처] 충치|작성자 김기덕
 
자르고 싶은 촉수들
 
 
 
흡반의 입술이 내 입을 덮쳤다. 끈적이며 달라붙은 입술이 입을 빨아들이며 머리와 몸통을 끌어당겼다. 어느 새 촉수들이 팔과 다리를 휘감고 빨판을 붙이고 있었다. 실낱같던 촉수들은 커져 동아줄 같았고, 고무줄처럼 조여 왔다. 그 사내는 촉각으로 나를 맛보았다. 감각의 세계가 해파리의 나른한 끈으로 풀리며 너풀거렸다. 포식의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손을 뻗었다. 어느새 수십 개의 빨판이 달린 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끈적이는 촉수들이 내 몸의 구멍들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며 흔드는 촉수에 몽롱한 눈꺼풀이 풀려갔다. 잘라내야지. 내 몸을 파고드는 파충류의 혓바닥들, 문어발의 끈적이는 뿌리들을. 길바닥엔 잘못 뻗은 촉수들이 나뒹굴고, 담벼락엔 함부로 놀린 혓바닥들이 달라붙어있었다. 날름거리는 촉수들을 피해 우린 아름다운 산호 밭을 살아왔다. 평화를 가장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촉수들의 뻘밭을 헤엄쳐왔다. 아니, 내겐 예리한 칼날이 있었지. “안 돼요.” 사정없이 붉고 긴 혀를 내밀어 칼을 휘둘렀다. 나를 빨아들이던 입술들이 소릴 지르며 하나둘 추락했다. 나무뿌릴 옥죄던 빨판들의 힘이 풀려 단두대에 섰다. 몽롱하게 끈적이던 물길이 투명해졌다.
[출처] 자르고 싶은 촉수들|작성자 김기덕
 
 
악마의 빛깔
김 기 덕
 
 
커피의 분말엔 코피가 묻어 있다
흑인 소녀의 뼛가루 같은 열매를 얻기 위해
늘 멍이 들던 하늘에
2달러짜리 태양이 시들면 쓰디쓴 밤이 찾아왔다
매를 맞으며 지옥불에 볶아져서 태어난 악마의 빛깔
검은 뼛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영혼을 거른다
창가엔 밤의 앙금만이 쌓이고
한 스푼의 천사와 한 스푼의 악마와 두 스푼의 사랑으로 믹스된
내 몸에도 에스프레소의 피가 흐른다
한 개비 고독과 절망이 타다 남은 타르와 니코틴처럼
몸에 스미는 마성의 수액
초콜릿이라도 믹스할까
검은 네 속셈에 크림을 부어봐 하트가 그려지는지
아무리 백설탕을 넣어도 지워지지 않는
유혹의 빛깔이 독해질 땐 휘핑크림이라도 넣어야지
하늘에 담긴 어둠을 바람의 스푼이 휘젓고 가면
별들이 각설탕처럼 녹는다
달의 입술에서 생크림 빛이 흘러내려도 여전히 캄캄한 창밖
흑인 영가 소리를 내며 나뭇잎들은 떨고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가 물결의 파문으로 흔들린다
어둠을 마실수록 환해지는 불면의 밤
흑인 소녀의 영혼을 마신 혀끝으로
향기로운 악마의 잔상이 노을처럼 감긴다
[출처] 악마의 빛깔|작성자 김기덕
 
중심에 서면
김 기 덕
 
가위질 소리를 내며 시계가 시간을 자른다. 긴 가위가 한 바퀴 돌면 1분씩 잘려나가는 시계의 중심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고속주행 하는 고속도로 위에 바퀴들도 중심엔 속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깊은 중심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아. 중심을 잡지 않으면 디스크의 음악은 흐르지 않지. 부드러운 멜로디, 행복에 겨운 박자들도 중심에서 탄생하는 것. 돌고 도는 이 땅의 사계절, 매일 다른 365일도 중심의 힘이야. 중심에 서면 세상을 다 얻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는 한 사내 포장마차에서 나와 비틀비틀 어디로 가는가. 시간의 중심에 서면 영원하고, 바퀴의 중심에 서면 흔들림이 없어. 바람의 중심은 늘 하나의 점. 중심이 되는 순간 태양도 나를 향해 돌고, 별들도 나를 향해 뜨지. 무수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은 십자가의 중심. 하나의 점 위에 서면 중심이 되지. 시계는 시간을 자르고, 자는 세상을 잰다 해도 중심은 언제나 영원한 제자리이다.
[출처] 중심에 서면|작성자 김기덕
 
지문을 읽다
김 기 덕
 
 
출근지문인식기에 손가락을 대자 기계가 나를 읽는다. 죽어서도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마크가 내 몸에 숨겨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객사하거나,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죽거나, 영영 기억을 잃었을 때 나를 확인하기 위해 누가 내 몸에 지문을 새겨놓았는가. 손가락 끝의 살갗무늬, 방금 한 나의 행동들도 도어 록과 유리창, 주전자와 커피 잔, 내 손이 닿는 데마다 지문은 흔적을 남겼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온 나만의 물결무늬는 어느 바닷가 모래밭에서 새긴 파도의 흔적일까. 아니면 감자 심고, 고구마 캐던 어느 밭고랑의 무늬일까. 손가락 끝마다 새겨진 등고선은 내가 살면서 넘어야 할 험한 산일거야. 내 몸에 보물지도처럼 새겨진 지문을 찍으며 권리를 행사하고, 지문을 찍으며 출근을 확인한다. 아무도 나라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는 아침, 지문인식기만이 진짜 나임을 확인해준다. 너, 아직 잘 살아있었구나.
[출처] 지문을 읽다|작성자 김기덕
 
지팡이 댄스
김 기 덕
 
 
 
지팡이를 든 신사가 경쾌한 스텝을 밟는다
 
정장의 날씬한 몸매가 빙글 돌며 지팡이를 흔들자
지팡이는 박자를 맞추는 스틱이 되었다가
빙그르 한 바퀴 더 돌면 적을 물리치는 칼이 되고
빙글빙글 돌면 펼쳐진 우산이 되었다
 
지팡이 하나면 두려울 것 없지
마법의 지팡이는 원 안에 혼령을 부르고
황홀은 생사를 결정하고
산신령의 지팡이는 연기 속에 순간이동을 했지
평생 함께 갈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구름이어도 좋을 역마살인데
 
가누기 힘든 몸의 다리가 되고
외로워 다정히 손잡아 주면서
미끄러운 언덕을 오를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의 뼈가 필요해
중절모를 벗어 들고 빙글
신사복의 앞단추를 풀고 빙그르르
장단을 맞추며 지팡이를 흔든다
 
모세의 지팡이는 광야에 구리뱀이 되고
예수의 지팡이는 세상에 십자가가 되었지
 
지팡이를 의지해 땅을 두드리며
지팡이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어 봐
중절모에 선글라스 신사가 빙글빙글 돈다
무대가 돌고
세상이 돌고
하늘이 돌다가
펄쩍 지팡이만 의지해 양발을 차고 오른 하늘
 
지팡이 끝에서 지구별이 돈다
[출처] 지팡이 댄스|작성자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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