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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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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청소년 위한 SF세계명작소설

황혼의 타임 머신 -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2021년 03월 20일 14시 50분  조회:531  추천:0  작성자: 강려
황혼의 타임 머신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 SF작가 협회 편
 
강 민
o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수료
o 월간 「학원」 편집장
o 월간 「주부 생활」 편집국장
o 현대시인, 문인 협회, 팬클럽 한국 본부 회원
o 한국SF작가 협회 회원
o 현 금성 출판사 편집국장
 
■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원수․박홍근 / 문학 박사 최인학
공학 박사 양옥룡 / 이학 박사 김희규
전 교육감 김성목
표지 그림 신동우 / 속 그림 최충훈
<차 례>
 
이상한 통···················· 4
여기는 어디냐?················· 11
주문국과 솔본국················· 16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29
잊어버린 숙제·················· 36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43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49
황솔을 사로잡다················· 55
그림자 없는 적(敵)··············· 62
솔본국의 패배·················· 68
도둑맞은 타임머신················ 80
중대한 회의··················· 83
솔본국의 솔솔이················· 87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93
솔본의 화공(火攻)··············· 101
두 사람의 솔솔이················ 113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119
주스와 스테레오················ 126
강적(强敵), 왕호룡·············· 133
심야(深夜)의 활극··············· 141
온(溫) 솔솔이의 소원············· 149
솔솔아, 용서해라!··············· 155
연(鳶)과 로켓················· 165
드디어 결전(決戰)··············· 174
최후의 비책(秘策)··············· 181
슬픈 승리!·················· 187
 
■ 작품 해설·················· 194
 
이상한 통
 
저녁 노을이 비낀 서울의 거리는 벌써 건물의 그림자며 전신주와 그늘이 길게 뻗쳐 있었다.
쉴 새 없이 줄을 잇는 자동차의 행렬도 허둥지둥 클랙슨 소리를 울리고, 시장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발걸음도 바빠져 갔다.
아직도 훤한 하늘에 이미 네온사인이 깜빡이기 시작하며 얼마 후에 다가올 밤을 맞이하듯이 화사한 인공(人工)의 무지개를 그려 내고 있었다.
"철민아, 너 저기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가 본 일 있니?"
용재가 물었다.
"아니, 없어. 고물상이라면 옛날 골동품 항아리나 불상(佛像) 따위를 팔고 있는 곳 말이지. 넌 그런 곳에 무슨 흥미가 있니?"
"아냐, 그게 아냐! 그 고물상에는 말이야, 망가진 텔레비전 부속품이랑 전기 청소기의 모터 같은 걸 팔고 있어. 조금만 고치면 쓸만한 걸 말이야."
"허, 그래."
철민과 용재는 중학교 2학년생, 같은 학급의 친구였다.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둘이 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친한 친구 사이다.
"야, 철민아, 우리 잠깐 거기 좀 가 보자. 응, 재미있는 것들이 많단 말이야."
철민의 마음은 용재의 말에 완전히 이끌려 버렸다.
"그래 좋아 가 보자. 그렇지만 그걸 보면 곧 돌아가야 해. 너무 늦으면 집에서 혼나."
"알았어. 나도 그렇게 오래 있을 순 없으니까."
두 사람은 당장 눈을 반짝거리며 급한 걸음을 옮겼다.
고물상은 건널목 곁의 상점들이 늘어선 한 모퉁이에 있었는데,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민은 벌써부터 이 가게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안에 들어와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곰팡내가 나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가게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가게의 천장에는 불그스레한 백열등(白熱燈)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용재는 익숙한 듯이 주루루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 구석에 쌓인 쇠붙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것은 용재의 말대로 내장(內臟)을 드러낸 텔레비전이며 전기 청소기 따위의 잡다한 기계류의 더미였다.
"철민아, 이 텔레비전, 여기만 고치면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 넌 참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지."
"허, 이 모터면 아이들 하나쯤은 태우고 달리는 전차도 만들 수 있겠는 걸."
두 사람은 완전히 열중해 버렸다.
"철민아, 난 지금 신문 배달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돈을 모으면 이 모터하고 저기 저 소형 변압기(變壓器) 망가진 걸 사려고 해."
"그래."
그러는 동안에 철민은 숱한 먼지투성이의 기계류 속에 무슨 부속품인지 알 수 없는 묘하게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조그맣게 정돈된 무슨 장치가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직경이 10센티미터 가량의 둥근 통으로서 전에는 완전히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커버를 끼웠던 볼트의 구멍만이 남아서 그 내부의 매우 복잡한 배선(配線)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용재야, 이게 뭘까?"
"어디 봐."
용재는 얼굴을 맞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
"모르겠는데, 굉장히 배선이 복잡하구나. 그보다 이쪽에 있는 이 핸드 토키 좀 봐."
용재는 아마 그 기계에는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철민은 그 기묘한 기계가 괜히 마음에 들었다. 똑같이 망가진 기계라도 모터나 전기 청소기보다는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가 더 공상(空想)을 자극한다. 마침내, 철민은 가게의 구석 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이 고물상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이 기계는 뭐예요?"
주인은 신문에서 눈을 떼고, 그 기계를 흘깃 보고는 다시 철민을 보고 말했다.
"아, 그것 말이지. 나도 뭔지 잘 모르겠다. 한 반년쯤 전에 다른 기계하고 같이 사들였는데, 어디다 쓰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구나. 그래서 어떻든 거기 놓아 두었는데, 넌 그게 뭔지 알겠니?"
"나도 모르니까 물었죠. 아저씨, 이것 얼마예요?"
주인은 신문을 놓고, 새삼스럽게 그 묘한 기계를 살펴보았다.
"글쎄, 한 500원 받을까?"
"500원이요? 너무 비싸요."
주인은, 다시는 철민이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철민아, 철민아, 이제 가자. 너무 늦었어. 집에 가면 혼날 거야."
용재가 서둘러댔다. 철민은 용재의 뒤를 따라 고물상에서 나오면서 다시 한번 돌아다보았다.
"500원……."
그 기계에 그 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 때 철민은 그 기계가 무척 갖고 싶었다.
언젠가 낡은 자명종 시계를 수리했을 때의 그 흥분이 온몸에 생생하게 소생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난 그 기계를 고쳐 볼 테야.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야지."
"그만 둬, 그 따위 것에 공연히 헛수고하지마. 그보다 그 텔레비전을 수리하는 편이 돈벌이가 될 거야."
용재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을 수리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아……"
철민이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이동생 솔솔이가 뛰어나왔다. 솔솔이는 초등학교 6학년생. 철민에게는 매우 다정한 동생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적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다.
"오빠, 용재 오빠하고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들어갔었지. 난 다 알았어."
"시끄러워. 잠깐 기계를 보고 왔을 뿐이야."
"나 엄마한테 일러 줘야지."
"요게!"
철민이가 주먹을 쥐고 한 걸음 다가서는데,
"엄마, 엄마 오빠가……."
하며 솔솔이가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뭐냐, 철민아! 넌 어디에서 놀다가 이제야 오고서 큰 소리냐!"
어머니의 음성이 철민이를 덮쳤다. 철민은 고개를 움츠리고 제 공부방으로 후퇴했다.
"그 기계, 500원 이랬지……"
이 달의 용돈은 이제 거의 다 써 버리고 100원 가량밖에 안 남았다. 생각하면 점점 더 갖고 싶어져서 도저히 내달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저 저금통을 부수자. 저 속에는 아마 300원쯤은 들어 있을 거야."
그 저금통은 은행에서 얻어 온 것인데 여태까지 학용품을 사고 남은 잔돈을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민이가 여름 방학에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해수욕장에 가기 위한 비용의 일부로 쓰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철민은 괴로웠다. 여태까지 쓰고 싶은 것을 참고 모아온 것을 여기서 부숴 버리고 꺼내기는 좀 억울하지만, 결국 유혹에 지고 말았다.
철민은 일어나 책상 위에서 저금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힘껏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 덜컥! 깨진 저금통 조각과 숱한 동전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철민은 열심히 세기 시작했다.
'어라, 420원이나 되는데, 됐어 됐어!"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는 많은 동전을 주머니에 털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현관으로 나왔다.
"어머니, 나 잠깐 문방구점에 좀 갔다 오겠어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기 전에 벌써 철민은 밖으로 뛰어 나오고 있었다.
고물상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손님도 없었다.
철민은 아까 본 기계 앞에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었다. 대부분의 기구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철민은 기뻤다. 복잡하면 할수록 연구해 볼만한 보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한 자명종 시계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저씨, 이것 주세요. 500원이라고 하셨죠. 자요."
"뭘 하려고 그러니, 그런 걸……."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 보겠어요."
"허, 그래. 알면 나한테도 가르쳐 주려무나. 뭔지 모르는 걸 팔면 어쩐지 마음에 걸리니까."
"아, 그러죠."
기묘한 둥근 통은 철민의 수중에서 싸늘한 금속의 살갗을 하고 있었다. 철민은 걸으면서, 마음은 그것을 분해할 때의 스릴에 가득 차 있었다. 나사못이며 핀을 하나씩 풀어낼 때마다 번호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분해해 간다. 그리고, 완전히 분해되었을 때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어느 틈엔지 철민은 가로등 불빛이 그리는 밝은 원 속에 서서 손에 든 둥근 통을 열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통 밑바닥에 조그만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손에 들고 걷고 있는 사이에 진동으로 거기가 차츰 느슨해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철민은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그것을 잡고 힘껏 돌렸다.
"빠져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손잡이는 텔레비전의 다이얼을 돌리듯 좌우로 자유롭게 회전시킬 수가 있었다.
"이걸 돌리면……."
철민은 그것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어딘가가 철민을 에워싼 공간의 한 부분이 세차게 찢어지는 듯한 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여기는 어디냐?
 
많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드높게 들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몸 곁을 아슬아슬하게 짐수레에 가득히 살림살이를 실은 사람들이 달려 지나갔다.
"왜 그럴까, 저 사람들은."
철민은 머리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심히 허둥대는 사람들……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어럽쇼!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쓰러져 있을까."
거기는 수풀에 에워싸인 조그만 마을의 변두리였다. 반쯤 잡초에 뒤덮인 밭이 마을의 뒤켠 수풀 저쪽에 펼쳐진 들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의 일부에 불이 나고 있었다. 붉은 불길은 수풀의 상공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그리고 난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철민이 여태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길도 방향도 모르겠는데, 대체 여기는 서울일까?"
철민의 가슴에 시커먼 불안이 솟아올랐다.
"그렇지! 난 고물상에서 그 둥근 통을 사오는 길이었지."
허둥지둥 둘레를 살펴보니, 그것은 방금 쓰러져 있던 곁에 떨어져 있었다. 철민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자기의 신상에 큰 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예감이 철민의 가슴을 숨막히도록 조여들었다.
우선 저기 불타는 마을로 가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아, 내가 혹시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려서……."
그것은 실로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소동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집이 불타서 쓰러지는 소리하며, 남녀의 비명,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폭풍처럼 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때 왼쪽의 숲 속에서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저마다 손에는 곡괭이며 죽창(竹槍) 따위를 들고 있다. 철민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붉은 불빛 속에 철민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은 우르르 뒤로 물러나 손에 든 무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엇인가 소리쳤다.
철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들을 항해 도리어 소리쳐 물었다.
"왜 그러죠, 모두들. 그리고 여긴 어디죠? 가르쳐 줘요."
집이 다 탄 모양으로 둘레가 한 순간 밝아졌다. 그 불빛 속에서 철민은 정말 깜짝 놀라도록 제 눈을 의심했다.
"뭐, 뭐예요! 그 모양은……."
그들 속에서 특히 몸집이 건장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게 취하고 무시무시한 살기(殺氣)를 풍기며 철민을 살폈다.
"네 놈도 솔본국 놈이냐?"
철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솔본국?"
"네 놈도 솔본국의 한패지. 잘 걸렸다 이놈. 남의 마을을 불사르고 네 놈들은 성할 것 같으냐! 덤벼라, 이놈!"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솔본국이니 마을을 불살랐다느니, 난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보다 불을 끄는 게 어때요."
"음, 이 나쁜 놈!"
사나이는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을 향해 총알처럼 덤벼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철민은 위기 일발에서 겨우 몸을 피했다. 정통으로 맞으면 틀림없이 몸을 다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으나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체육 시간을 좋아하고 운동 신경도 남달리 예민한 철민이었으므로 그 정도의 죽창 공격쯤은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왜 이래요. 그만 둬요!"
철민은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그 사나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공격을 피했을 때, 철민의 가슴에는 심한 노여움이 치솟았다. 순간,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야구 투수가 던지는 식의 강속구(强速球)로 상대방의 미간을 노려 던졌다. 사나이는 이마를 싸쥐며 땅 위에 뒹굴었다. 그 손에서 죽창이 날았다.
"보았죠! 대답하지 않으면, 저 사람처럼 되는 거예요. 빨리 대답해요. 빨리, 여긴 어디죠?"
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철민은 돌을 주워 들었다.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이 부근은 주문국의 XX마을이라고 합죠."
"주문국의 XX마을?"
"예."
"무슨 구(區)냔 말예요."
"무슨 구라니 무슨 소립네까?"
"이봐요, 여긴 서울이 아네요!"
"서울요? 글쎄요 들어본 일이 없는뎁쇼."
"그만둬요! 이젠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이상한 상투를 틀고 있는 거예요?"
"상투? 아, 이것 말입죠. 왜라니 그저……."
철민의 가슴은 차츰 크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서 머리 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필사적으로,
'침착해라, 침착해!'
하고 외치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이를 악물어 겨우 참았다.
꿈이냐, 생시냐! 아니,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미쳤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민은 어지럽게 밀려오는 심한 현기증 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난 아무래도 옛날로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아니, 틀림없다. 아, 이 일을 어쩐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담?'
절망이 철민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 솔본국 놈들이다. 솔본국 놈들이 왔다!"
사나이들은 금방 허둥대기 시작했다. 철민이가 보니까 마을 저쪽에서 짙은 갈색 옷을 입은 기묘한 차림의 사나이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철민이가 서 있는 것을 보더니, 그들은 날카로운 칼을 거꾸로 쥐고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달려들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떨어져 있는 죽창을 집어 들고는 몸을 낮게 굽히고 죽창을 겨누었다.
"음, 내가 이런 데서 죽을 줄 알구."
수풀이 환하게 타올랐다.
 
주문국과 솔본국
 
정면의 사나이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왔다. 철민은 저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 사나이는 나는 새처럼 대지를 박찼다. 긴칼이 타오르는 불꽃에 붉게 빛났다. 일순 철민의 죽창이 원을 그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사나이가 용수철처럼 멋진 폼으로 뛰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손쉽게 죽창의 한 끝으로 툭 밀어 쓰러뜨렸다.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썰물처럼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심한 불꽃이 철민이들이 있는 위로 새빨간 눈보라처럼 떨어져 왔다.
"앗 뜨거!"
철민은 떨어지는 불꽃을 죽창으로 털었다. 그 틈을 노렸는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철민의 얼굴을 겨냥해서 날아왔다.
"에잇!"
철민은 재빨리 죽창 끝으로 그것을 쳐버렸다. 그런데 하나, 또 하나……. 그것은 총알처럼 울리며 날아왔으나 첫번째 것을 쳐내고 나자, 나중은 편했다.
딱! 딱! 딱! 철민의 발치에 맑은 금속음을 내면서 그것은 떨어졌다. 그것은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표창이었다. 철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 이것 큰일났구나. 아마 이놈들은 옛날의 무사(武士)거나 산적 패거리인 모양이다. 그림에서 본 것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저 표창만 해도 굉장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이런 기묘한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철민의 눈은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빛났다.
"에잇……."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은 맹렬한 기세로 달렸다. 가까이에 있던 한 놈의 몸 어딘가에 죽창이 예리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철민은 죽창을 마구 휘둘러 댔다.
"물러나라! 물러나!"
어디선가 누가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발맞추듯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자리에는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둘이 길게 뻗어 있었다.
철민은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미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몹시 지쳐 있었다.
화재가 난 곳의 불길은 낮게 땅 위를 기고 있다. 그 붉은 빛 속에 몇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달려왔다. 그 뒤에서 곡괭이며 낫을 든 사나이들이 조금 뒤떨어져 겁먹은 얼굴로 어슬렁어슬렁 따라 오고 있다. 선두에 선 몇 사람은 바지 가랑이를 추켜 올리고 긴 칼자루를 잡은 채 철민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수상한 놈, 순순히 말을 들어라!"
말투로 보아, 그들은 아마 치안(治安)을 담당한 무사들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들 이래요? 그리고 지금 몇 시쯤 됐죠?"
무사들은 철민의 말에 흠칫 놀란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심한 놀라움을 온 몸에 띄우며 돌부처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철민의 학생복이며 부수수한 머리 따위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어떤 놈이냐? 어디서 왔지?"
무사의 음성은 들떠서, 말끝은 우습도록 떨리고 있었다.
"난 돌아가고 싶어요. 여긴 어디죠?"
그들이 그 길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철민은 속으로 비는 듯한 심정으로 물었다. 겸손하게 굴면 어쩌면 철민을 도와 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내 이름은 철민이고 서울 ○○동 157번지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불식간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 곳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갑자기 철민의 가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솟아올랐다.
'아, 괜히 잠자코 집을 빠져 나왔구나. 저금통을 부수고……. 어머니.'
철민의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음식물의 냄새가 나던 부엌 옆방의 일체가 갑자기 환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큰일났구나.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쯤 집에서는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이제 곧 저녁 식사시간이거든.'
'아버지, 어머니, 솔솔아!'
철민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봐, 잠자코 있으면 알 수가 없잖아. 빨리 대답해 봐."
다급한 음성이 귓전에서 들렸다.
철민은 흠칫 놀라며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찔하던 철민의 고독감은 당장 현실로 되돌아 왔다. 무사들은 온몸에 살기(殺氣)를 띄우고 철민을 포위했다.
"저어, 나리,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는뎁쇼."
무사들 뒤에 있던 사나이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낫을 든 중늙은이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어떤 무사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음, 음, 그래. 그러면 저기에 쓰러져 있는 솔본국 놈들은 저 소년이 쓰러뜨렸단 말이지. 음, 그러면 우리편인지도 모르겠군. 어떻든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잠깐만……."
그 무사는 방금이라도 덤빌 듯한 동료들을 말리듯이 두 손을 좌우로 펴고,
"잠깐만, 지금 좀 묘한 얘기를 들었오. 저 소년은 아마 우리편인 모양이오."
"뭐라고? 저 소년이? 그럼 솔본국 놈이 아니란 말씀이오."
무사들은 갑자기 생기가 나며, 기분 나쁜 듯이 뒤로 물러섰다.
"저 옷차림이라든지, 지금 솔본국 놈들을 쓰러뜨린 재주로 보아 이건 확실히 보통 소년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이 문제는 차라리 사또께 여쭈어 보도록 합시다"
한 무사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탄 자리에서 약한 불길이 일었다. 거기에 물을 퍼붓고 다니는 사나이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검게 떠올라 보였다. 솔본국 무사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들의 집 내부에서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타다 남은 관가(官家)의 사랑채에서 철민은 사또라는 사나이와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난 이 고을 사또 정형룡인데, 아까의 활약은 굉장하셨소. 어떻든 이름 있는 분이겠소만, 지장이 없으면 성함을 알고 싶소."
"철민, 서울에 있는 △△중학교의 2학년생입니다."
"△△중학교? 허허허, 그건 무슨 중앙의 암행어사의 조직인가요?"
"암행어사 조직이요? 아닙니다."
"상당히 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건 무슨 제복(制服)이오?"
"참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네요."
"……?"
"어떻든 좋습니다. 그 보다 사또! 이 소동은 대체 무슨 일이죠?"
철민은 점점 귀찮아졌다. 이런 곳에서 돌대가리 무사들을 상대로 일일이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차츰 분노로 변했다.
"이봐요. 사또, 아까의 그 소동은 어찌된 일이냔 말입니다."
철민은 분노 끝에 그렇게 고자세로 윽박 질렀다.
사또의 얼굴에 별안간 두려움의 빛이 나타났다. 혹시나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가는 후일에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 상부에 무슨 보고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히 지체가 높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또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자,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약간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아, 그 문제에 대해선 전일에 상세한 보고를 상부에 올렸습니다만……. 여하간 솔본국 놈들은 조직적이고 기세도 당당해서 이쪽에서도 몰아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또는 우선 말씨부터가 공손히 달라졌다.
"솔본국 사람들이 어째서 침입해 오느냐 말입니다."
"전일에 상부에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상부에 보고한 건 알았으니까, 이제 나한테 설명해 달란 말예요."
그러면서 철민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예, 죄송합니다."
사또는 정말 걱정스러웠는지 몸이 굳어져,
"그게 좀 묘한 문제 때문입니다그려. 원래 우리 주문국과 솔본국은 한 나라였는데, 어느 땐가 두 왕자가 태어나서 당시의 왕께서는 나라를 둘로 갈라 두 왕자에게 계승케 했죠. 그래서 이후 이 두 나라는 좋은 형제 국으로 몇백 년을 이어 내려오다가 근래에 와서 주문국에 흉년이 들어, 변방의 백성들이 작당해서 솔본국에 몰려들어가 농산물을 훔쳐 오기가 일쑤여서 우리 주문국에서도 그 행패를 자율적으로 단속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솔본국에서는 앙심을 품고 조직적인 게릴라를 투입해서 우리 나라의 변방 마을을 불사르고 인명을 살상(殺傷)하게 되었소이다."
"허, 그래요. 남의 나라의 곡식을 훔쳐오는 주문국 사람들도 나쁘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솔본국도 나쁘군요."
"말씀대로 입니다."
그러면서 사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철민을 상부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쯤으로 알고 있는데, 주문국과 솔본국의 관계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철민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챘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그래,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또는 고개를 숙이고,
"예, 그래서 상부의 지원을 받아 유능한 무사 20여 명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만, 워낙 솔본국 게릴라들의 기세가 강해서 도저히 물리칠 길이 없소이다."
"물리칠 길이 없다니, 사또께서는 그렇게 멍청하니 있을 게 아니라, 무슨 방법을 생각해야 될게 아닙니까?"
"예, 예……."
사또는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때, 이웃 방의 장지문이 슬며시 열리며 한 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어사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이 아닌지요. 방금 아랫사람들이 가지고 왔습니다만……."
그들은 철민을 이미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로 단정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기묘한 둥근 통이었다.
"아, 그건 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철민은 두 손으로 둥근 통을 받았다. 그것을 본 사또는 바로 이 때라는 듯이,
"그럼, 이제 야식(夜食)이라도 드시고 편히 쉬시지요."
하며 허둥지둥 방에서 나갔다.
철민은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서 멍하니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솔본국이니 주문국이니, 정말 엉뚱한 곳에 휘말려든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면 어찌하나…… 아버지, 어머니도 못 만나고, 솔솔이며 용재, 그 밖의 다정한 친구들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빠져 버렸을까.
아아, 그 때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옛날로 날아올 만한 무엇인가 특별한 짓을 나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철민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그 건널목의 고물상 앞거리 가로등의 둥근 불빛 밑에서 나는 이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둥근 통의 밑바닥에 달린 손잡이가 느슨해진 것을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날 듯한 기대(期待)가 충격처럼 철민의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혹시! 아, 제발 그래다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둥근 통을 뒤집어 보니, 손잡이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정신 없이 그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찡하게 울렸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의 일부분이 세차게 찢기는 듯한 격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져 갔다.
…… 커다란 덤프 트럭이 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철민은 맥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 전에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뒤 같았다.
"왜 그러니? 어디 몸이라도 아프냐?"
지나가던 사람이 철민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철민은 둥근 통을 들고 일어섰다. 벌써 시간은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자,
"철민아! 너 여태까지 어디 갔다 왔니? 저녁도 안 먹고……."
평소엔 상냥한 할머니도 지금은 무서운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았다. 철민은 변명하는 것도 잊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저금통을 부수고 돈을 꺼내 갔었구나. 그 돈을 쓸 때는 어머니하고 상의한 다음에 쓰기로 하구서. 무얼 했니?"
"이거예요. 묘한 기계가 있어서……."
"아무리 묘한 기계가 있더라도 저녁 식사도 안하고 잠자코 가는 법이 어디 있니!"
솔솔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오빠, 저금통을 깨뜨렸으면 나한테 꾼 돈 갚아야 될 게 아냐."
철민은 한껏 무서운 얼굴로 솔솔이를 노려보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들고나서도 철민은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오늘의 그 기묘한 경험이 아직도 온 몸에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첫째, 그 둥근 통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옛날로 가 버렸다. 그리고 왼쪽으로 다시 돌렸더니 이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어쩌면 언젠가 책에서 읽은 타임 머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분해해서 내부를 조사하느니 조그만 더 그대로 두고 다시 써 보자.
둘째,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싸웠다. 무사들이란 굉장한 무술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스포츠를 했고, 또 영양분이 풍부한 것을 실컷 먹고 있다. 이쪽이 체력도 있고 운동 신경도 더 발달해 있는 셈이다. 그 놈들의 표창보다 학교의 야구부에 있는 이태현 군의 속구(速球)가 오히려 더 빠른 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태현 군의 투구를 가끔 홈런을 날리지 않는가.
"그렇지!"
철민은 벌떡 일어났다, 집 안은 모두 잠들어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전등을 켜고 벗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긴 끈을 끄집어내어 둥근 통을 묶어 가지고 목에 걸었다. 손전등과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또 책상 서랍에서 딱총 알을 움켜서 종이에 싼 후 이것도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으로 나왔으나, 신발을 신으려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양말을 둘 껴 신었다.
"이제 됐다!"
둥근 통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약간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결단을 내려 오른쪽으로 돌렸다.
다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찢어지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며 희미하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철민은 허리까지 닿는 풀숲 속에 서 있었다. 아까 왔던 마을 뒤켠에 있는 들판인 것 같았다. 철민은 풀밭을 헤치면서 조용히 마을로 다가갔다. 불타버린 집의 기둥이 기분 나쁘게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집을 지나 철민은 마을로 들어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유령의 거리 같잖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희미하게 공기가 움직였다. 그것은 발자국과는 다르다, 인간의 호흡에 의해 흩어지는 공기의 흐름 같았다.
"누군가 숨어 있구나!"
철민은 걸음을 멈추고 땅 위에 몸을 낮게 웅크렸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에게 발견되지 않고 이쪽은 어두운 밤하늘에 상대방을 비쳐 볼 수가 있는 것이다.
20미터 가량 전방의 한 그루 나무 밑에 한 사나이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바짓단을 동여매고 등에 칼을 메고 있다.
"이놈은 솔본국 놈일까, 아니면 주문국의 무사일까?"
이윽고, 그 사나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민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향해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접근해 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잘 보이도록 철민도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쉿!"
말이 되지 않는 기합 소리가 튀어나오며 그 사나이의 오른손에서 무엇인가가 날았다. 쨍그렁! 쨍그렁!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핫하하!! 네까짓 주문국 놈들한테 잡힐 줄 아냐,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표창에라도 얻어맞은 듯한 주문국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낮게 들렸다. 철민은 그늘 속에서 뛰쳐나갔다.
솔본국 무사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전등을 내밀고 재빨리 켰다 껐다 했다. 그 빛을 받고 갈색의 옷을 입은 사나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어때, 눈이 부시지? 이것이 유명한 광선 눈가리개다!"
철민은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며 그를 놀려댔다.
뒤켠 지붕 위에서 소리없이 또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음, 이 괘씸한 놈!"
그 그림자는 괴물처럼 두 손을 벌려 철민의 머리 위로 바람을 일으키며 떨어져 왔다.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순간, 철민이 옆으로 몸을 피하며 손에서 무엇인가를 뿌린 것과 그 뿌려진 것 위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탕! 탕! 탕탕-!
무서운 폭음이 어둠을 찢었다. 검은 그림자는 그 폭음 한 가운데서 정신 없이 손발을 휘젓고 있었다.
"음, 내가 실수를 하다니……."
어금니를 악문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핫하하, 딱총 폭탄 위로 떨어지다니, 바보 같은 녀석!"
어디선가 철민의 드높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고막이 터지고 기력과 함께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지둥 달아나려던 솔본국의 무사는 경비하던 주문국 사람들에게 당장 붙들려 버렸다.
"아, 정말 훌륭하셨오, 어떠한 무술인지 모르지만 정말 귀신이 곡할만한 활약이었소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중앙 당국에 대한 체면상, 언제까지나 진압을 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사또의 목이 잘릴 위험도 있다.
"사또!"
"예!"
철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사또를 흘겨보았다.
체격이 좋은 철민 쪽이 15센티 가량이나 키가 컸다. 그렇지 않아도 사또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다.
"솔본국 놈들이 둘이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주문국 쪽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이렇게 경비가 소홀해서야 쓰겠습니까?"
"진정 면목이 없소이다. 하지만 우리편 무사들도……"
"아니, 그래 가지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약간 환멸을 느꼈습니다."
사또는 몸둘 바를 모르고 움찔움찔했다.
"참 그렇게 하지…… 이봐요 사또, 내가 주문국의 무사들에게 신식 무술을 가르쳐 주기로 하죠."
여태까지 책에서 읽은 여러 개의 무용담이며, 갖가지 무술이 철민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신식 무술이 과학적이어야만 되는 것이죠. 즉, 합리적이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 예, 예……."
사또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철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님은 젊었을 적에 당시 한학자(漢學者)로서는 상당히 유명했던 박한수(朴漢洙) 선생에게서 희귀하도록 학문을 쌓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 이 기묘한 소년의 말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또는 내심 당황함과 동시에 등줄기에 오한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겠죠, 사또?"
"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올시다."
사또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르면 안다 모른다가 문제가 아니다. 그저 면접 시험을 받는 학생처럼 겁이 났다.
"자기 혼자서만 공을 독점할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여러 사람에게 협력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죠."
"예, 예."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면 어디에 숨어야 하는가, 무엇을 이용하면 좋은가, 자기가 벌레나 작은 동물이 된 기분으로 생각해 봐야 되는 거죠. 이것은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오. 알았죠, 사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철민의 말투에는 어느덧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반말기가 섞였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곧 주문국의 무사들을 부르시오."
"예!"
경비하는 무사 몇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모였다. 모두들 깊은 호기심과 다소의 두려움을 품고 모닥불에 비치는 철민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당신들의 대장은 누구요?"
철민의 말에 호응하여 한 사나이가 일어났다. 몸집이 작은 사나이였지만 바위 덩어리처럼 탄탄한 체격이었다.
"주문국의 땅벌이라고 합니다."
"땅벌? 이상한 이름도 있군."
"죄송합니다."
원래는 무사로서의 점잖은 이름이 있겠지만, 그들은 주문국 연방 경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비밀 조직의 요원인 관계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로 죄송할 것은 없소. 그런데 땅벌 대장, 여러 가지 가르칠 일이 많지만, 우선 당신들이 입고 있는 옷, 그것은 말이오. 이건 도리어 좋지 않소. 밤에 활동하는 데는 짙은 그린 색이거나 초콜릿색이 좋은 법이오."
그러자 땅벌 대장은 긴장하여 반문했다.
"그 뭡니까…… 그린 색이라든가 초콜릿색은 대체 어떤 색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짙은 녹색이거나 갈색에 가까운 붉은 빛을 말하는 것이오. 밤이라고 해도 그 옷 빛깔처럼 주위가 새까매지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도리어 더 눈에 띄기 쉬운 거요. 밤의 어둠 속에서는 짙은 녹색 같은 것이 어둠에 흡수되어 눈에 덜 띄게 되는 것이오."
"예, 예!"
"당장 옷 빛깔을 바꾸시오. 그리고 야간에는 절대로 칼을 빼지 마시오. 별빛을 받아 반사하니까 자기가 있는 곳을 알리는 셈이 되는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적을 쓰러뜨리죠?"
"적을 쓰러뜨릴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적에게 쓰러지지 않을 생각을 해야 하오. 아무래도 칼을 빼야 할 때는 칼집 채 빼시오."
"으음,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분의 말씀은 모두 우리 주문국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비전(秘傳)속에 있는 것이오. 철민 선생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소이다. 아까 보이신 솜씨라든가, 그저 탄복할 뿐이외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우리들의 두령이 되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의사는 없으신지?"
"이끌어 달라면, 즉 명령해 달라 이 말씀인가요? 좋습니다."
철민이도 이제는 자유로이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속이 편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땅벌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우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좋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두령으로서 너희들을 지휘한다. 땅벌 다음의 간부들은 이름을 대라!"
"철새랑입니다."
"매미랑입니다."
"돌쇠랑입니다."
"저는 수풀랑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괴상한 이름의 네 사나이가 공손히 절을 했다. 그 사나이들은 모두들 굉장한 전투력을 지닌 육체의 소유자였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아까부터 줄곧 무엇인가 집념이 가득한 눈초리로 철민을 지켜보는 한 사나이가 있는 것을 이 때 철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면 4사람이 한 조가 되어 분대를 만든다. 이 4사람은 절대 흩어져서는 안되며 늘 함께 행동한다. 그리고 땅벌랑 지금 경비에 나서고 있는 사람까지 합쳐서 모두 몇 사람이 되오?"
"모두 17명입니다."
"좋소, 그럼 4개 분대를 만들 수 있겠군. 4분대의 분대장 철새랑, B분대는 매미랑, 알았나. C분대는 수풀랑, D분대는 돌쇠랑이 맡는다. 땅벌랑은 내 부관(副官)이다!"
"예이!"
"D분대는 이 곳에 남아 예비대(豫備隊)가 된다. A․B․C 각 분대는 마을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을 지켜라."
"두령, 그러면 남쪽은 어떻게 합니까?"
"남쪽은 비워 둬라. 그곳으로 솔본국 놈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적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고요?"
"들여놓지 않고는 언제까지나 승패가 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보다는 일부러 틈을 주어 마을로 들어오게 한 후에 독 안에 든 쥐 꼴로 만들어 대번에 처치해 버리는 것이다."
땅벌랑은 이 대담한 전술에 완전히 넋이 나가 그저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그와 함께 점점 더 철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깊어진 것 같다.
"땅벌랑, 사또에게 전달해서 마을 남쪽에 개인호를 파게 하시오."
"개인호라면……?"
"정말 바보 같은 친구로군.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참호 말이오. 그곳에 사또의 부하를 한 사람씩 숨겨두는 거요."
"알았습니다."
땅벌은 그림자처럼 달려갔다. 잠시 동안 마을 남쪽의 나무들 사이에서 비밀히 작업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그것도 끝났는지 으슥한 밤의 고요가 물 속처럼 둘레를 에워쌌다.
"오지 않는군요."
어둠 속에서 땅벌랑의 말이 들렸다.
"아무리 솔본국 놈들이라도 밤낮으로 침입해 오지는 않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하품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면, 평소 같으면 지금쯤은 벌써 잠자리에 들 있을 시간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돌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궁둥이가 아팠다.
"두령, 내가 일어나 있을 테니까 저리 가서 한잠 주무시지요."
땅벌랑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그럴까."
철민은 일어나서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한 번 잠이 오면 견딜 수가 없다. 철민의 지금 소망은 그저 잠자리에 드는 일 뿐이다. 이제는 주물국도 솔본국도 통 생각이 없었다.
 
잊어버린 숙제
 
"철민아, 철민아,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학교에 늦는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아침에 늑장을 부리다니……. 쯧쯧!"
어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야단났구나!"
철민은 벌떡 일어나 던져 두었던 바지를 꿰어 입고 웃옷을 걸쳤다. 베갯맡의 시계는 이미 8시 20분을 지나 있었다. 앞으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 속에 던져 넣자 현관을 뛰쳐나갔다.
"철민아! 너 어젯밤에 그렇게 늦게까지 어디 갔다 왔니? 그 말을 하기 전에는 학교에 못 간다."
어머니의 화난 음성이 배후에서 철민의 등줄기를 찔렀다. 이어서 더욱 두려운 제 2 탄이 날아왔다.
"철민이 너 요즘 통 공부를 하지 않더구나. 웬일이냐?"
평소에는 말이 없는 아버지까지도 꾸중을 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철민은 문득 발을 멈췄다. 어제 밤이라니? 늦게까지? 일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철민의 마음 속에서 작열했다.
"아차!"
그랬었구나. 그 때 나는 잠에 못 이겨 잠자리에 들 작정으로 집에 돌아와 버린 것이다. 땅벌 녀석이 저리로 가서 자라는 바람에 그만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주문국 사람들은? 그 후, 솔본국 놈들이 침입해 오지나 않았는지.
철민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몸이 굳어졌다.
"철민아, 어서 대답해 봐. 어젯밤엔 아버지랑 솔솔이까지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어제 어딜 갔다 왔느냐 말이야?"
안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아,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면 못 써!"
이제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당할 판이다. 철민은 가방을 옆에 끼자,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처럼 현관에서 달려나갔다. 어떻든 학교에 늦어서는 안 된다. 주문국 사람들과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지만 학교에 늦으면 방과후에 청소 당번을 해야 한다.
그리고 클래스의 결의로 금주엔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클래스 위원인 민식이놈은 까다롭단 말이야.'
철민의 클래스에서는 아침 조회 전에 위원이 지각한 사람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어디 두고 보자!"
철민은 달리면서 중얼거렸다. 솔본국 무사의 얼굴과 출석부 조사 위원의 모습이 불꽃처럼 교차되었다.
철민이 숨을 헐떡거리며 교실로 뛰어드는 것과 담임 선생인 강미화 선생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민식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연필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철민아, 너 겨우 시간에 대어 왔구나."
여느 때의 철민이라면 여기서 한 마디 하겠지만 오늘 아침엔 그대로 제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첫째 시간은 수학…….
수학은 좋아하는 학과 중의 하나였다.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겨우 문제를 풀었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런데도 성적이 더 오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시험이 되면 다소 당황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담임이며 이 학교의 유일한 여선생인 강미화 선생 담당이다. 달걀형의 얼굴로 머리를 한데 묶어 치켜올리고 있다. 강미화 선생은 교과서를 집어 들자, 물방울 같이 시원한 눈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57페이지의 응용 문제는 숙제였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흑판에 쓰도록, 누가 좋을까 응, 철민군."
철민의 등줄기에 뜨거운 소름이 끼쳐 내렸다.
'큰일났구나! 숙제를 깜빡 잊었구나.'
온몸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곧 그 고물상에 달려가고 그 후, 주문국과 솔본국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고, 또…….
"왜 그러니? 철민이 너 숙제 안 해 왔구나."
철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잊고 왔습니다."
강미화 선생은 천만 뜻밖이라는 듯이 눈쌀을 찌푸리고, 철민을 흘겨보았다. 철민이 수학 숙제를 잊고 오다니, 여태까지 없는 일이었다.
"잊고 왔다니 왜, 무슨 일이 있었니?"
담임 선생이 아니라면 그저 주의만 듣고 말 것을 담임 선생인 경우에는 클래스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지도에까지 주의가 미치므로 생도로서도 우물쭈물 넘길 수가 없다.
철민은 궁지에 몰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을 의식했다.
"깜박 잊어 먹었습니다."
"어제는 집에 가서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구나. 가방을 열고, 수학 교과서나 노트를 보면 자연히 숙제가 있는 걸 알 텐데……."
"죄송합니다."
사실 선생님 말씀대로였다.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논리 정연한 말씀만 하시니까 여선생은 질색이란 말이야.
철민은 어물어물 자리에 앉았다. 강미화 선생은 철민이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한 모양, 다른 학생들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는 모두 방정식을 이용해서 식을 만드는 거예요."
철민은 어느 사이엔가 문제를 푸는 데에 열중했다.
그 때, 문득 철민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멀리서 차츰 힘을 잃어 가며 철민의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일까, 저건."
철민은 연필을 든 손을 멈추고, 그 소리 없는 소리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차츰 분명한 의미를 이루며 철민의 귀에 들려왔다.
'……두령!…… 두령!……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구원해 주십시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 소리는 땅벌의 소리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철민의 그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일제히 철민을 쳐다보았다.
"뭐예요, 철민군!"
강미화 선생이 창가에서 그렇게 주의했다.
'…… 두령, 솔본국 놈들의 새벽 공격에 아군은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화술(火術)에 걸려 마을은 불타고…… 이제는 우리도 마지막입니다…… 두령……'
땅벌의 음성은 처절하게 들려온다.
그것은 필사적인 힘으로 두령으로 모시는 철민을 찾아 외치고 있었다.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땅벌랑, 이제 곧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라.'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치자 철민은 일어났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에 던져 넣자, 그것을 끼고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 집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집으로 가다니? 왜?"
"저어,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럽니다. 부탁입니다."
철민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벌써 교실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어이가 없어 가만히 보고 있던 강미화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만 기다려, 철민아 너 그 태도가 뭐냐?"
그 소리를 뒤로 흘려버리며 철민은 가방 속에서 그 둥근 통을 꺼냈다.
"참 그렇지!"
복도 구석에 있는 붉은 소화기(消火器)를 옆에 끼고 둥근 통의 손잡이를 힘을 주어 돌렸다.
철민의 뒤를 쫓아온 강미화 선생이 철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철민군, 이리 와요, 교실로."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민은 일순 망설였다.
'…… 두령, 두령께서 계시면 이렇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억울하오, 억울하오…….'
"조금만 더 참아 다오, 땅벌! 위험해요, 선생님. 오시면 안 돼요. 이제 곧 간다."
세 가지의 소리를 한꺼번에 하면서 그 소리가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주위는 갑자기 불바다로 변했다. 검은 연기가 낮게 땅을 기고, 열풍 속에 칼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미화 선생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철민은 소리쳤다.
"나다! 내가 돌아왔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에 있소?"
그 소리를 향해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면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다시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을 부축이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타오르는 불꽃은 잉잉거리며 무서운 소리를 내고 소용돌이쳤다. 어디를 보아도 둘레는 온통 불바다였다.
커다란 불똥이 눈보라처럼 온 몸에 떨어져 왔다. 머리며 옷, 눈썹까지도 따끔따끔 불똥에 타들었다.
뜨거움도 아픔도 문제가 아니었다. 철민은 윗도리를 벗어 김 미화 선생의 머리를 덮어 주었다. 정신이 나간 듯,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강미화 선생을 얼싸안듯이 지키며 철민은 달렸다.
겨우 불바다를 벗어나, 불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그늘로 철민은 굴러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오시면 안 된다는데도……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꼭 선생님은 무사히 모셔다 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선생님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민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아이 무서워. 이 불길은?…… 여기는 어디냐?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일까?"
강미화 선생은 얼굴을 들고 공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학교의 복도에서 별안간 이 무서운 불바다와 칼싸움의 복판으로 끌려와, 아마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이다. 눈은 초점을 잃고 시선이 허공을 헤매었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의 어깨를 힘껏 뒤흔들었다.
"정신차려요, 선생님. 난 솔본국 놈들을 무찌르러 저리로 가야 해요. 곧 돌아올 테니까, 선생님은 여기서 움직이면 안돼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강미화 선생은 흐릿한 눈으로 철민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철민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이제 곧 간다. 땅벌!"
철민은 소화기(消火器)를 꽉 끌어안았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자, 몸을 굽히고 총알처럼 다시 불바다로 달려갔다.
"땅벌,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그러는 철민의 등에 번쩍 번갯불 같이 창이 날아 왔다. 순간, 철민은 그것을 피부 어느 곳에 느끼며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굽혔다. 그리고는 어깨 끝을 스치며 날아가는 창을 왼손을 뻗쳐 꽉 움켜쥐었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그 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철민 앞을 막아섰다.
"좋아! 목숨이 필요 없는 모양이군."
철민은 창 끝을 곧장 뻗고 한쪽 발을 축(軸)으로 해서 빙그르르 돌았다. 긴 창칼 끝에 철컥철컥하는 충격이 왔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우르르 물러나는 발자국 소리가 겹쳤다.
철민은 짐승처럼 등을 굽히고 소리도 없이 달렸다.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솔본국의 정예 무사들이 대세를 회복하고 철민의 뒤를 쫓으려 했을 때는, 그 소리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는 불똥은 마치 급류(急流) 같았다. 철민은 주의 깊게 불길이 흐르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음, 마을 북쪽이로군."
철민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달렸다. 불길로 이루어진 듯한 숲 사이를 왼쪽으로 돌자, 거기 철민이 구하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을, 저따위 것!"
철민은 끼고 있던 소화기의 마개를 뺐다. 콕을 비틀자 소화제(消火劑)의 분말이 안개처럼 뿜어 나갔다. 그 안개가 뿌려지자, 그토록 맹렬한 불길도 갑자기 가라앉으며 흰 연기로 변해 낮게 땅을 기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던 불똥도 대번에 검은 그을음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소화기를 몸 앞에 내밀고 철민은 돌격 태세로 들어갔다. 불바다는 순식간에 타다 남은 기둥이며 판자 벽으로 변하고, 검은 연기는 흰 연기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철민의 몸에 무엇인가 따끔따끔한 것이 부딪쳐 왔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에 철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소화제는 짙은 안개가 되어 둘레의 모든 것을 에워쌌다.
"으음, 이거 안 되겠다. 모두들 후퇴하라!"
그 소리를 향해 철민은 창을 던졌다. 철민은 창던지기에도 자신이 있었다. 도시 대항 시합에도 선수로 뽑혀 출장한 적이 있었다. 역시 명중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둘레가 조용해졌다. 철민의 눈앞에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바람개비가 장치되어 있었다. 나무 뼈대에 두껍게 종이를 바른 날개가 여섯 장, 그것을 회전시키는 긴 나무와 몇 개의 핸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날개차(車)의 둘레에는 쌀겨가 드높이 쌓여 있었다. 그 쌀겨에서는 기름 냄새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기름을 뿌린 쌀겨에 불을 붙여,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켜 날린 거로군. 솔본국 놈들, 제법인데 ……."
솔본국 무사들의 화공술(火攻術)은 정말 놀랄만 했다. 솔본국 무사들이 후퇴한 것을 알고 달아났던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어 슬슬 돌아왔다.
"아! 땅벌랑, 이게 어찌된 일이오?"
광장 구석에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땅벌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도 겨우 쉬고 있었다. 그래도 달려온 철민의 모습을 보더니, 핏기 없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아, 두령, 무사하셨군요. 두령이 안 계시는 동안에 이 꼴이 되었소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요 땅벌랑, 내가 잘못했소. 내가 없는 바람에 여러분에게 이런 폐를 입혔구려."
땅벌은 철민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두령, 고맙소. 그저 이 땅벌은 기쁠 뿐이외다."
이 우직한 중년의 무사는 자기들이 두령으로 모시는 인물에게서 친밀한 위로의 말을 듣고 그저 감격하고 있었다. 그 소박한 표현에 철민도 감격했다.
"이봐요, 땅벌랑! 기운을 차려서 빨리 나아야 돼요. 내가 나중에 약과 몸보신(補身)이 될 음식을 갖다 드리겠소."
땅벌은 깊은 존경과 감사의 눈으로 철민을 바라보았다.
 
"각 분대 집합! 부상자는 그대로."
철민의 구령에 모여든 주문국의 무사들은 모두 형편없는 몰골들이었다. 옷은 불에 타고, 피가 얼굴이며 팔뚝에 말라붙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톱니처럼 날이 빠진 긴칼을 지팡이 삼아 짚고 허덕이고 있었다.
이편의 손해는 뜻밖에 컸다.
살아 남은 사람은, 돌쇠랑, 매미랑, 그리고 험악한 눈초리의 고참 무사가 한 사람, 게다가 견습 정도의 젊은 사나이, 그 네 사람만이 겨우 부상을 입지 않아, 다음 싸움에 힘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땅벌랑과 철새랑은 중상(重傷)을 입고 있었다.
결국 17명의 주문국 무사들 중, 단 하룻밤의 싸움으로 반 이상이 전사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반 이상의 집이 불타고, 사또의 집도 불이 붙어 모조리 재로 변했다.
이것은 명확히 솔본국의 승리였다. 철민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물었다. 그때, 철민은 중대한 일을 잊고 있음을 알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차, 강미화 선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철민은 헐레벌떡 강미화 선생을 숨겨 둔 나무 그늘로 달려갔다.
그 곳에 강미화 선생은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어서 나오세요."
철민의 부름 소리는 덧없이 산울림을 부를 뿐이었다
"저건 뭘까? 종이 조각 같은데……."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나무 등걸에 못 박혀 있었다. 철민의 눈길은 그 종이 조각으로 흡수되었다.
 
「여기 있던 여인을 빌려 가오 - 인질금(人質金) 1천냥은 비싸지 않을 것이오. 내일 달이 뜨는 시간에 받도록 해 주시오. 깊이 생각하시길 바라오. 청솔」
 
먹빛도 선명한 그 글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싸늘한 느낌으로 철민의 눈길에 뛰어들고 있었다. 내일 밤, 달이 뜨는 시간에 1천냥과 강미화 선생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 당했다, 당했어…… 빌어먹을…… 내가 졌구나, 졌어!"
철민은 머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나무 그늘에 숨겨 두었던 강미화 선생이 발견되어 인질(人質)로 납치 당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아, 그때 역시 다시 한 번 돌아가 강미화 선생님을 학교로 돌려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1천냥의 인질금을 어디서 구한담. 여기 사또나 주문국 무사들은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존경하는 강미화 선생이, 증오할 솔본국 놈들의 손에 납치된 이상 철민도 이제는 필사적이었다. 여태까지의 전쟁놀이 같은 기분으로는 여간해서 솔본국 놈들의 손에서 강미화 선생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 기운을 잃지 마세요. 꼭 내가 구원해 드릴게요."
철민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은 한 마리의 이리가 강적을 만나, 전투 개시를 선고하는 울부짖음 같았다.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철민은 네 사람의 주문국 무사에게 마을의 사수(死守)를 명령했다.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사또를 비롯하여 모두들 묵묵히 철민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사또였다. 철민의 불쾌한 표정이 모조리 자기의 탓인 양, 조그만 몸집을 더욱 쭈그리고 철민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 편의 인원은 갑자기 줄어버렸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기 위해 솔본국 무사들의 본거지로 침입해간다 해도 나 혼자서는 좀 기가 죽는다. 땅벌랑이라도 몸이 성하면 좋겠는데, 현재로서는 무리이고, 이걸 어쩔까?'
철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학교 친구들의 응원을 바라면 되겠다. 용재 -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남웅 - 힘이 세고 유도부의 선수다. 말이 없는 텁텁한 성격인데 신뢰할 수 있다. 종운 - 몸집은 클래스에서 제일 작지만 민첩하고 내 충실한 부하니까 함께 데리고 오자.'
철민의 가슴속에서 계획이 정리되었다. 철민은 자기가 없는 동안의 자세한 지시를 하기 위해 매미랑을 불렀다. 매미랑은 당장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매미랑! 내가 없는 동안은 매미랑이 책임자가 되어 주시오.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잘 해 주시오. 알았죠. 우리는 꼭 이길 것이오. 솔본국 놈들을 혼을 내 주는 거요."
"알았습니다!"
"좋소, 가시오!"
매미랑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철민은 목에 걸고 있는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렸다.
철민은 노는 시간을 이용하여 세 친구를 교정으로 불러 냈다.
"왜 그러니, 철민아. 강미화 선생님하고 같이 없어져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어."
"강미화 선생님은 그때부터 교원실에도 안 오셨대. 국어 선생님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시더군,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철민은 음성을 낮추어
"그 강미화 선생님 때문에 그러는데 말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줘. 사실은……."
놀라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다. 철민의 이야기에 세 사람은 완전히 놀라버렸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그들도 강미화 선생이 솔본국 무사들에게 납치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다시 철민이 세 사람에게 응원을 청하자 당장 흥분해서 철민을 둘러쌌다.
"야, 굉장하구나 철민아! 네가 그러니까 주문국 무사들의 두령이 됐단 말이지?…… 좋아, 난 꼭 데리고 가 줘."
"철민아, 그래, 언제 가는 거니? 지금 당장 가도 좋아."
"아냐, 잠깐만 기다려. 지금 곧 세 사람이 갑자기 조퇴하면 학교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학교가 파한 다음에 우리 집으로 와 줘. 오늘밤엔 우리 집에 모여서 공부하는 걸로 하면 될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이제 나도 무사가 되는 셈이지. 에헴! 팔이 운다 울어…… 자 들어봐."
"바보 같은 소리 마, 종운아, 너 그건 윗도리의 소매가 흔들리는 소리야."
"그림 부탁한다. 준비는 내가 해 둘게."
세 사람은 교실로, 철민은 울타리 사이를 빠져 밖으로 나갔다. 철민은 몰래 자기 방문을 열고 뒤꼍으로 해서 제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철민은 벽장에서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테이프 레코더, 자명종 시계, 확대경, 물통, 야구용의 스파이크, 알코올 램프, 펜치, 드라이버, 그밖에 손에 닿는 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은 송아지만큼이나 부풀어올랐다. 거기에다 로프를 걸어 등에 지고 일어서니까, 그 무게로 다리가 비틀거렸다. 겨우 문을 빠져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바깥 길로 나왔다.
약방에서 상처에 바르는 약과 붕대 뭉치를 사고, 계란과 우유를 사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웃 잡화상에서 작은 병에 든 위스키를 하나 샀다. 큰 것을 사고 싶었으나 이미 돈이 모자랐다. 위스키 병을 들고 가게를 나섰을 때, 철민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봐, 학생! 어딜 가는 거지? 오늘은 학교 쉬는 날인가가."
무거운 몸을 겨우 돌이켜 뒤돌아다보니 순찰 중인 경찰관 한 사람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철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학생은 위스키를 산 것 같은데. 그건 설마 학생이 마시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거요. 이건 땅벌랑에게 줄 거예요."
"땅벌랑? 그건 누구지?"
"주문국의 무사예요. 내 부하죠."
"주문국의 무사? 네 부하?"
"아, 그래요. 땅벌은 지금 중상을 입고 있어요. 솔본국 놈들한테 당했거든요. 좀 멍청한 데가 있지만, 좋은 사람이죠."
경찰관의 표정은 차츰 더 험악해졌다. 그 눈에 노여운 빛이 떠오르며 철민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잠깐 저기 파출소까지 좀 가서 그 가방 속을 보여 다오."
"싫어요."
"뭐! 싫다고."
경찰관의 굵은 팔이 쑥 뻗쳐 왔다. 순간, 철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에 남은 경찰관은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부끄러운 듯한 얼굴이 되어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후, 위스키를 마시게 했더니 땅벌랑은 훨씬 기운이 났다. 특히 위스키가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땅벌랑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위스키에 입맛을 다시며 좋아하던 땅벌도 우유와 계란을 먹을 때는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였다. 그러나 철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싫다고도 할 수 없다. 눈을 감고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철민이 잇달아 가방에서 꺼내는 여러 가지 기구는, 땅벌랑을 비롯한 주문국 무사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철민은 자명종 시계의 태엽을 감고 바늘을 맞췄다.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벨 소리에 돌쇠랑은 반사적으로 품안에 품고 있는 단검을 빼어 들어, 여러 사람의 웃음을 샀다.
오후 세시. 철민은 다시 자기 집 문 앞에 나타났다. 10분쯤 기다리니까 용재를 비롯한 세 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나타났다. 철민은 그 세 사람에게 자기 소매를 잡게 하고, 그대로 땅벌랑들이 있는 마을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주문국 무사들은 우측, 용재들은 좌측, 중앙에 철민과 땅벌랑, 그 아래쪽에 사또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또, 솔본국 놈들의 본거지는 어디입니까?"
사또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한내 마을의 청명사(淸明寺)라는 절이 솔본국 청솔의 본거지라고 합니다."
"음, 한내 마을이란…… 야 용재야, 지금의 한강 건너에 있는 어떤 마을인 모양이지."
"아마 그럴 거야. 허지만 지금은 청명사라는 절이 없어."
"그러면 사또, 그 솔본국 놈들 본거지의 수비 현황은?"
사또를 대신해서 돌쇠랑이 앞으로 나왔다.
"아뢰옵니다. 그 본거지를 지키는 솔본국 놈들의 수는 18명, 철통진이라는 비법을 가지고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기껏해야 함정이나 파놓고, 화약이나 뭘 묻어 두었겠지."
"예,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그 진을 깨뜨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알았오. 오늘밤 그것을 깨뜨리겠소. 용재하고 남웅이, 종운이, 그리고 돌쇠랑은 나를 따라 오도록. 매미랑은 땅벌랑을 도와 이 곳을 지키시오, 알았죠?"
"예!"
이 때, 철민의 등뒤에서 땅벌랑이 희미하게 몸을 움직였다. 돌아다본 철민의 눈에 무서운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진 땅벌랑의 눈이 천장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요, 땅벌랑?"
철민의 음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악 하고 여러 개의 표창이 날아왔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벽 쪽으로 몸을 피하는 것과, 천장의 복판이 뚫리며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이 뛰어내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을 향해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벌써 두 줄의 로프가 뱀처럼 뻗어 공간을 날았다.
 
황솔을 사로잡다
 
"조심해라! 솔본국 놈들의 습격이다!"
종운이는 흘깃 철민을 돌아다보며 싱긋 웃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바람처럼 마룻바닥 위에 내려선 채, 어떤 사람은 한쪽 발로 서고, 어떤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어떤 사람은 한쪽 무릎을 꿇어, 마치 기묘한 무용이 중단된 듯한 자세로 기분 나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 순간의 동(動)에서 정(靜)으로, 얼음장같은 싸늘한 긴장 속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렀다.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뻗어 나간 로프는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늘어나 솔본국 무사 두 사람의 팔과 다리를 얽어매고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도 긴칼을 반쯤 뺀 채 아직 공격 자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눈에 들어가도 눈 한번 깜짝일 수가 없다. 한 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그것이 최후였다.
'음, 이놈들은 굉장한데 여태까지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구나, 그들도 드디어 주력(主力) 부대를 내보낸 모양이다.'
철민의 온몸의 근육은 처절한 싸움의 예감에 떨렸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현기증이 날 듯한 긴장감 속에서 철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얼음장같은 고요는 한 모퉁이에서 무너졌다.
"제기랄…… 이게 뭐야. 무사들이란 좀더 근사한 줄 알았더니 천장에서 내려와 한쪽 발로 서 있기나 하구. 이건 꼭 사기 아냐?"
"정말이야! 저것 좀 봐. 종운아, 저 친구는 꼭 WC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이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여러 사람의 바늘 끝 같은 마음의 날카로운 밸런스를 깨뜨렸다.
"후후후, 아하하하……."
남웅과 종운의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뜻하지 않은 이 웃음소리에 솔본국 무사들은 몹시 동요했다.
"왜, 왜 웃느냐!"
선두에 섰던 무사가 부르짖듯이 외쳤다.
"어럽쇼, 이봐 남웅아, 이 사람 괜히 화를 내는데…… 우리들이 웃는 게 들린 모양이지."
이런 종운의 빈정거림에 마침내 분노가 터진 그 무사는 견디다 못해 별안간 몸을 날려 종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쌩! 하고 칼이 울렸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알은 칼날의 움직임보다도 빨리 종운은 옆으로 날았다. 그 손에 잡혀 있는 로프에 팔이 잡힌 무사는, 이런 종운의 재빠른 동작 때문에 빈틈을 찔려 크게 비틀거렸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동작보다 먼저 종운의 작은 몸집이 총알처럼 그의 등에 부딪쳤다.
뒤이어 남웅이 차례였다. 그리고 돌쇠랑과 매미랑이 거의 동시에 마룻바닥을 박찼다. 마지막으로 정현룡 사또가 칼을 빼들고 이 난투(亂鬪)에 끼어 들었다.
불의에 습격해 온 솔본국 무사들의 처음에 우월했던 상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덤벼드는 종운이들을 막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로프를 끊으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종운과 남웅이 재빠르게 움직이므로 거기에 따라 마룻바닥 위를 질질 끌려 다닐 뿐이었다.
"에잇!"
남웅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복장의 무사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벽의 흙이 우르르 떨어졌다.
유도부 주장 남웅의 특기인 업어치기가 들어맞은 것이다. 뒤이어 2, 3인의 무사가 그 남웅을 둘러싸고 필살의 기세로 틈을 노린다.
철민은 눈을 화경 같이 흡뜨고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철민의 오른쪽에 용재, 왼쪽에 땅벌랑이 빈틈없이 몸을 가누고 있었다.
"야앗!"
깨지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조그만 표창이 공기를 가르며 철민의 얼굴로 날아왔다. 철민의 움직이는 것보다도 먼저 용재의 오른손이 재빨리 번득였다.
쨍! 맑은 쇳소리가 세 사람의 귓전을 울렸다. 표창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비켜 나갔다. 용재의 손에서 던져진 드라이버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뚜르르 굴렀다
"용재야, 굉장하구나, 드라이버를 표창 대신 쓰다니……"
"뭘 이쯤 가지고. 난 드라이버를 늘 갖고 다니거든."
용재는 약간 면구스러운 듯이 학생복 저고리 밑을 들춰 보였다. 그 허리에 드라이버며 스패너 등을 꽂은 폭넓은 벨트가 감겨 있었다. 역시 밥 먹기보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용재다웠다.
순간적인 위기에 임해서도 늘 쓰던 드라이버에 자동적으로 손길이 갔던 모양이었다.
"으음, 듣기보다 더욱 굉장한 놈들이구나……"
검은 옷을 입은 솔본국 무사 중의 한 명이 두 손을 벌리고 접근해 왔다. 두려움도 없이 세 사람의 상대와 싸우려는 자신만만한 투지(鬪志)가 온몸에 넘쳐 있었다.
땅벌랑이 부상한 몸의 아픔을 견디면서 칼을 들었다.
"후후후, 그 상처로는 좀 무리일 걸"
그렇게 비웃는 그 솔본국 부사의 양쪽 손에는 날카로운 표창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벌랑, 당신은 비켜서 보고 계시오. 이봐, 솔본국 친구, 뭐라는 누군지 이름이나 대 보시지."
"음, 저 세상으로 가는 선물로 듣고 싶다면 들려 주지, 나는 솔본국 청솔의 동생 황솔이다. 보지 못하던 무사가 주문국 사또 집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보려고 왔다."
"강미화 선생을 납치해 간 것도 네 놈이냐?"
"강미화 선생? 아, 그 여자 말이로군. 그건 내가 아니다. 나의 형 청솔의 부하가 한 짓이다. 여자 따위를 유괴하는 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아."
"음, 그렇군. 그럼 황솔, 너는 돌아가서 네 형에게 전해라. 내일 달이 뜨는 시간까지 강미화 선생과 보상금 1천냥을 함께 가지고 오라고 말이다. 만약 가지고 오지 않을 때는 너희들은 한 놈도 남김 없이 여기서 죽을 줄 알아라."
철민이 침착하고 묘하게 가라앉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 말 뒤에 숨은 철민의 굳은 결의와 기백에 황솔은 묵묵히 불꽃같은 눈동자를 태우며 철민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 황솔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두 개의 표창은 번개처럼 철민의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두 개의 날카로운 표창은 철민의 바로 눈 앞 공중에 멎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솔의 눈에 그것이 보였는지 어떤지 황솔은 바람을 가르며 철민 위로 덮쳐 내려왔다.
예기치 않았던 공격 차례의 차질이 황솔의 얼굴에서 핏기를 앗아갔다. 두 개의 표창은 정확히 적을 쓰러뜨렸어야 했으며, 쓰러진 그 위에 덮쳐내려 마지막 한 수를 찌르는 이 방법에 황솔은 여태까지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므로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황솔의 눈에 철민의 싱긋 웃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허공에 멎어 있는 표창에 손을 뻗치려다 그대로 털썩 마루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나려다 몸이 통 말을 듣지 않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무엇인가 무척 협소한 곳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두 명의 적이 로프로 자기를 묶으려는 것을 알고 황솔은 필사적으로 날뛰었으나, 팔굽이 말을 안 들어 칼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처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무서운 공포심이 일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우욱! 악마냐, 귀신이냐! 이 괴이한 기술은……."
황솔은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위로부터 로프로 빙글빙글 묶여서 붙들린 물고기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어떠냐, 황솔, 이것이 유명한 무술 극치(極致) 투명옥(透明獄)의 비법이다."
철민과 용재는 얼굴을 마주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투명한 비닐의 테이프 크로스를 쳐놓은 줄은 아무리 솔본국 무사라도 알 수가 없었겠지."
손으로 던진 표창으로 탄력성이 강한 비닐을 꿰뚫기는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힘든 일이다. 그래도 황솔이 던진 표창은 그것을 반쯤 꿰뚫고 떨어지지도 않은 채, 꽂혀 있었으니 오히려 그 무서운 위력에 탄복할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공을 날아 덮쳐오는 황솔의 밑에다 철민과 용재는 활짝 펴서 달아 매놓은 비닐의 테이블 크로스 밑자락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 황솔이라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솔의 체중으로 쳐 놓은 끈은 끊어지고, 동시에 두 사람은 날 뛰는 황솔의 몸에 비닐을 뒤집어 씌워 로프로 빙글빙글 묶어 버렸다.
종운과 남웅도 그들의 상대를 완전히 사로잡아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 그리고 사또는 황솔을 사로잡은 두 사람의 솜씨에 경탄함과 동시에 약간 두려워진 모양이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철민 선생 및 용재 선생, 도대체 이건 무슨 마술인지요? 황솔이라면, 그의 형 청솔에 못잖은 뛰어난 무사요. 여태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우리 주문국 무사가 숱했는데, 그것을 이렇게 쉽사리 사로잡다니…… 나는 어쩐지 여러분이 두려워집니다 그려."
"하하하…… 사또, 요 정도를 가지고 놀라실 건 없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선 비닐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따위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가 있거든요."
"그렇소이까.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군요."
"그래요…… 그럼 여러분 잠깐만……"
여덟 사람은 일제히 철민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림자 없는 적(敵)
 
잡목이 우거진 숲이 완전한 구릉 지대(丘陵地帶)를 이룬 사이를 뚫고, 몇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종일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시냇물은 모두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서면, 바로 눈 밑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하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그 흐름의 아득한 저쪽에는 굽이진 산들의 모습이 보이고, 들판의 복판을 곧장 더듬어 온 큰길에서 왼쪽으로 갈린 사잇길이 한강의 갯벌을 따라 이윽고 한내 마을로 다가온다. 잡목 숲으로 에워싸인 성황당(城隍堂) 앞에서 그 길은 좌우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면 태자당(太子堂)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원불사(圓佛寺)로 가는 길이다. 그 오른쪽 길을 약 백여 미터쯤 간 왼쪽의 언덕 꼭대기에 청명사(淸明寺)가 있었다.
대낮에도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 아래서 보면, 이 절이 예전에는 상당히 격이 높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문(山門)의 구조, 대웅전의 지붕, 이끼 낀 앞뜰 등 그 어느 하나만 보아도 모두 유서 깊은 고찰(古刹)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짙은 어둠 속에서 보면, 특히 그것이 주위의 소나무 숲이 윙윙거리며 바람이 부는 밤 같은 때는 버림받은 지 오래고 사는 것이라고는 마물이나 귀신 밖에 없는 폐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청명사의 무너진 흰 벽을 푸른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소나무 숲의 높은 가지는 희미하게 바람 소리를 내고,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밤의 어두운 장막을 헤치고 전해 왔다.
그 대웅전 안에서 깜박깜박 조그만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촛대의 흔들리는 불빛을 옆얼굴에 받으면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 청솔이었다. 나이는 30여 세 가량, 잘잘 윤이 흐르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깎아낸 듯한 얼굴의 선(線)이 뛰어난 의지와 단련의 비범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온 몸을 먹장 같은 검은 옷으로 두르고 짧은 표창 띠를 허리에 차고 있다.
청솔 앞에 꿇어 엎드려 있는 몇 사람은 이들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이 바보 같은 놈들아, 내 아우이자 너희들에게는 부대장(部隊長)인 황솔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도망쳐 왔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대장. 우리가 그대로 도망쳐 온 것은 아닙니다. 일전부터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불가사의한 무사, 그는 풍문에 듣는 바대로 무서운 무술의 소유자여서 황솔 님까지도 쉽사리 사로잡는 형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올시다. 그것을 대장에게 전해드리려고 우리는 혈로(血路)를 뚫고 겨우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음, 그래 그 무사의 무술이란 어떤 것이냐?"
"혼전(混戰) 중이라 확실히 볼 수는 없었으나, 무엇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같은 것으로 황솔님을 사로잡은 것 같았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청솔은 굵은 눈을 모아 눈살을 찌푸리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다. 이번만은 용서한다. 모두들 물러가 쉬거라."
"예…… 예……"
무사들은 마룻바닥에 허리가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범선만은 남아라."
한 사람의 늙은 무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범선, 다음에 우리가 취할 길은 무엇인가?"
늙은 무사는 잠시동안 생각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모든 기억을 이 늙은 무사는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상대로 싸움을 오래 끌어서는 이쪽이 불리합니다. 우리 솔본의 비법, 아지랑이 진법(陣法)을 사용하여 일거에 섬멸해 버림이 어떠하올지?"
"음, 그도 그렇군. 허지만 아지랑이 진법은 한 번 쓰면 두 번 다시는 쓸 수 없는 비법 중의 비법. 범선, 충분히 생각하여 보오. 명령을 기다리시오."
"알았소이다."
늙은 무사 범선은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얌전하게 인질금 1천냥을 낼지 어떨지.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때에야말로 비법 아지랑이 진법을 써서 모조리 섬멸해 버릴 테다. 후후……"
청솔은 일그러진 얼굴로 혼자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때였다. 청솔의 귀에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끊임없는 고역에 시달리는 죽은 사람의 신음 소리가 전파되어 오는 듯, 조용한 대웅전의 심야의 공기를 희미하게 뒤흔들었다.
"누구냐!"
신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범선, 악귀!"
청솔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부하를 불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무사가 청솔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음, 저 소리가 들리느냐?"
범선과 악귀는 그러는 청솔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그들은 동시에 재빨리 몸을 날려 청솔의 좌우에 웅크리고 앉았다. 역시 대장의 측근에 있는 이 솔본국 무사의 정예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이상한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 형님, 형님…… 아, 괴로워…… 숨이 막혀요…… 살려 주시오. 살려…… 으음, 지옥의 고역이라도 이토록……."
신음 소리가 무시무시한 비명으로 변하여 청솔의 귀를 때렸다.
"대장, 저것은 황솔님의 목소리……."
"황솔님, 지금 어느 곳에 계시오……?"
"으음, 저건 분명히 황솔의 음성. 둘이서 가 보시오."
범선의 몸은 새처럼 친정을 향해 높이 뛰었다.
악귀는 단숨에 마룻바닥을 제치고 사라져 갔다. 청솔은 긴칼의 손잡이를 잡고 주의 깊게 둘레의 어둠을 지켜보았다.
"…… 형님…… 살려 주시오. 빨리 와서 내 생명을 끊어주시오…… 그것이 차라리 내게 내리는 자비요…… 아, 죽여라! 죽여다오!"
그 소리는 높게 낮게 청솔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대장! 천장에도 지붕에도 아무도 없소이다."
범선이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마루에 내려섰다.
"대장! 마루 밑에는 경천환 이하 세 사람의 우리 동료가 숨어 있을 뿐이외다."
악귀가 마룻바닥으로 난 구멍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쳤다.
"범선과 악귀는 다시 구석구석까지 찾아보아라. 황솔 기다려 다오. 이제 곧 가서 살려 줄 테다."
청솔은 입술을 깨물며 웅얼거렸다.
중상(重傷)을 입고 신음하는 황솔의 몸을 이것 보라는 듯이 부근에 내버리고 간 적의 행동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철통진에 의해 엄중히 수비되고 있는 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어떻게 접근해 왔을까.
청솔은 이를 갈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 속에서 피리를 꺼내들고 날카롭게 불었다.
"…… 으윽…… 아, 괴롭다. 아앗!…… 숨이 막힌다……."
황솔의 비통한 신음 소리는 대웅전에 모인 솔본국 무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너희들에게도 저 황솔의 신음 소리가 들리겠지! 가라! 가서 황솔을 구해라!"
30명의 무사들은 소리도 없이 흩어졌다.
솔본국의 패배
 
"이상한데요, 대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보면 소리는 어느 틈엔지 뒤로 돌아가 있어요. 왼쪽에서 들린다고 생각하면 실은 오른쪽에서 들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신음 소리의 소재를 알 수가 없소이다."
악귀는 자못 분한 듯이 그 음성이 떨렸다.
"대장! 이 절 안에는 수상한 자의 그림자 하나 없소이다. 그런데도 황솔님의 신음 소리는 그치질 않는군요. 이게 대체 어찌된 사연인지……."
범선은 깊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내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떤 지방 성 밑에서 환술(幻術)이라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소. 안남이라든가 어디서 왔다는 이국(異國)의 마술사였는데, 그가 이와 같이 여기 저기에서 소리가 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었소이다. 대장! 제가 생각건대 이것은 그 환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사나이들은 이국의 마술쟁이가 아닐는지 모르겠소. 옷차림이라든가 또 그 말씨라든가, 아무래도 이국적인 냄새가 짙소이다."
"으음, 환술이라……."
"…… 형덜, 솔본국의 동지들이여…… 그들은 정녕…… 천마(天魔)요, 이건 분명히 천마의 짓이요…… 아앗!"
청솔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불쑥 일어났다. 그 얼굴은 비장한 결의에 넘쳐 있었다.
"듣거라! 이제부터……."
늘어선 부하들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려던 청솔의 분노한 소리를 지우듯, 그 보다 높이 대웅전을 뒤흔든 함성이 있었다.
"핫하하하하! 청솔, 어떠냐? 이제 무서워졌겠지.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맛을 보여 줄 테다. 자, 뒤를 보아라!"
일순, 물 속처럼 두려운 침묵이 생겼다. 그토록 담대한 청솔도, 정예임을 자랑하는 솔본국의 무사들도 자기들의 뒤를 돌아다볼 용기를 잃었다.
 
"윽!"
"으, 으음!"
뱃속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부르짖음이 무사들의 입에서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오, 황솔님!"
"아, 저건!"
보라! 대웅전의 판자 벽에 환영처럼 몽롱하게 떠오른 것은 사로잡힌 짐승처럼 꿈틀거리는 한 사람의 그림자였다. 무슨 빛인지, 엷은 노랑 빛이 희미하게 벽이며 마루를 비치고 그 빛 속에서 꽁꽁 묶인 그 사람의 그림자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 아, 괴롭다. 눈이 안 보인다…… 음, 비, 빌어먹을……."
그 사람의 그림자는 황솔이었다. 그의 온몸을 둘러싸고 흰 연기가 안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사들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 절의 안팎을 빈틈없이 수색하여 수상한 자가 없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황솔의 모습이 이와 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사의한 것을 믿지 않는 그들의 이성(理性)이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대장!"
"아, 이것은 황솔님의 원한 어린 망령의 소치인가!"
"무서운 일이다!"
역전의 용사인 악귀며 범선마저도 입술이 파래져 떨고있었다.
"…… 나무아미타불…… 황솔님, 부디 성불(成佛)해 주시오."
경천환이 신음하듯 말하며 한 손을 쳐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청솔이 마룻장을 울리며 불쑥 일어섰다.
"여러분, 모두 정신을 똑똑히 차리시오."
그 소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오른손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재빨리 움직이자, 표창이 유성처럼 황솔의 모습을 향해 날았다.
철썩, 철썩, 철썩!
판자 벽을 꿰뚫는 표창 소리가 갑자기 그 때까지 넋을 잃고 있던 솔본국 무사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에잇!"
"야앗!"
그들은 괴상한 기합 소리를 지르며, 새까만 회오리바람이 되어 황솔의 모습이 보이는 판자 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두둥실 하고 황솔의 모습이 무게가 없는 것인 양 휘날렸다. 노랑 색의 조용한 빛이 별안간 눈부신 빛으로 변하더니 일순 어둠이 닥쳐왔다. 허공에 뿌옇게 불이 타오르며 순식간에 불길이 판자 문에서 천장으로 치솟았다. 그 불꽃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달리는 2, 3명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에잇!"
악귀는 품속의 단도를 잡아 낮게 던진다. 달리는 사람 중의 하나가 뒤돌아다보며 무엇인가 소리친 것 같았다. 흰 이빨이 악귀를 비웃는 듯 반짝 빛났다.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악귀는 몸을 날려 위태롭게 피했다. 앞으로 뛰어나온 솔본국 무사의 한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웅크리고 앉았다.
부웅!
불길은 순식간에 대웅전을 에워싸고 번져 갔다. 어디에 적이 있는지, 누가 자기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채, 그저 발소리와 외침 소리만이 둘레에 가득 차 있었다. 범선은 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이 되었으나, 어둠과 불길 속에서 싸움 중에서 대장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셈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굉장히 몸이 가벼운 인물이 범선에게로 달려왔다.
"누, 누구냐?"
피할 사이도 없이 범선은 더럭 박치기를 당하고 비틀거렸다. 이 늙은 무사는 여태까지 겪은 몇십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적의 손을 제 몸에 닿게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자랑인 범선은,
"아뿔싸!"
하고 외쳤다.
몸을 바로잡을 사이도 없이 그 인물은 범선의 허리에 발을 걸고 어깨를 발판으로 하여 날쌔게 천장으로 뛰어 올랐다.
"앗! 이놈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범선이 칼을 치켜올리는 것보다 일순 먼저, 불타는 재목이 천장에서 떨어져 왔다.
범선은 옆으로 몸을 날려 겨우 피했다.
 
어느 사이엔지 싸움은 대웅전 앞의 경내로 옮겨져 있었다. 대웅전의 타오르는 불길은 높이 높이 하늘을 그을렸다. 이 청명사를 에워싼 깊은 소나무 숲은 불길에 휩싸이고 때마침 불기 시작한 열풍에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솔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바늘로 찌르는 듯이 눈이 아프고 끊이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가슴 속까지 바싹 말라붙어 청솔은 쉴 새 없이 목을 움켜쥐었다.
"분하구나!"
"대장, 당장은 적에게 승리를 양보하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천환도 한 손으로 눈을 연신 문지르며 청솔을 재촉했다.
"청솔, 어디로 달아나느냐?"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그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경천환은 긴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불길에 맨 눈은 적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으나 칼 솜씨로는 솔본국 무사 중에 당하는 자가 없다는 경천환의 필살의 일격은 정확히 소리친 적의 허리를 옆으로 치고 있었다.
짜악!
"으윽!"
경천환은 팔의 근육이 마비되어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뜨렸다. 두 동강이가 난 대나무 통이 허공을 날았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건 마디를 뚫은 대나무 통이란 말이야. 그걸 입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거든. 대나무 통 끝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내가 거기 있을 까닭이 없지."
"비, 비겁하다!"
"뭐가 비겁하단 말이냐. 자, 이거나 받아라."
"앗, 뜨거!"
경천환은 정신 없이 몸에 얽혀 온 불꽃의 끈을 떼어버렸다. 끈은 흰 연기와 오렌지 빛 불길을 뿜으면서 찌그르르 오므라들었다. 경천환은 눈과 코를 감싸 쥐고 뒹굴었다.
"우웃, 괴롭다. 숨이 막힌다."
그러는 경천환을 등뒤에 내버려두고 청솔은 연기 속을 뚫고 달렸다. 어깨 너머로 돌아다본 그의 눈에 입과 코를 하얀 천으로 가린 몸집이 작은 적이 경천환의 몸을 뛰어넘고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맛이 어때, 괴롭지. 필름이 타는 연기를 마셨으니 어련하실라구."
…… 필름. 필름이란 무엇일까. 이 냄새면 그 황솔의 괴로움도 당연하다. 목숨을 끊는 것이 자비라고 외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달리면서 청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토록 심한 패전(敗戰)은 난생 처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청명사의 언덕은 이제 모조리 불길에 싸여 있었다. 깊은 소나무 숲 잡목 숲도 윙윙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불길을 몰아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먼 부락에서 종소리 가 울렸다.
청솔은 소나무 숲에 에워싸인 웅덩이의 풀숲 속에 몸을 눕혔다. 북쪽 하늘이 새빨갛게 불타고 있다. 눈이 타는 듯 아팠다. 시냇물을 떠서 눈을 식혔다. 목구멍의 아픔은 그럭저럭 가라앉았으나 그래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목구멍 속이 쥐어뜯듯이 아팠다.
"아, 대장. 이곳에 계셨군요. 범선이올시다."
바삭바삭 풀잎을 헤치며 범선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 어서 악귀가,
"면목이 없소이다, 대장. 모두 우리가 모자라는 탓입니다."
"알았다. 승부는 이제부터야. 우선 푹 쉬도록 해."
청솔도 이름 있는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이니 만큼 이제 부하를 문책하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쪽 하늘은 점점 더 붉게 빛났다.
아마 청명사의 언덕 전체가 심한 산불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둘씩 셋씩 모여드는 부하에게 악귀가 점호를 하기 시작했다.
"뱀 밭의 진평."
"예!"
"높마을의 외눈."
"예!"
"유천사의 선랑."
"예, 여기 있습니다."
"천왕봉의 길선."
대답이 없었다.
"길선! 길선은 없나?"
악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름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자가 속출했다.
"34명 중, 여기에 모인 자는 겨우 13명이란 말이지, 이게 어찌된 셈인가."
"하지만 악귀, 이 곳을 피하여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자도 있겠지."
청솔은 가라앉아 있는 여러 사람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평소부터 만일 청명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에는 이 소나무 숲 속에 있는 웅덩이를 집합 장소로 하기로 정해 놓았으나, 적에게 미행 당해 이 곳을 발견당할 위험이 있을 때는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달아날 경우도 있다. 청솔은 여전히 아픈 눈을 크게 뜨고 주위의 어둠을 살폈다.
"조용해라,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다!"
높마을의 외눈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낮게 소리쳤다. 희미하게 풀잎 스치는 소리가 밤 공기를 가르며 전해져 온다.
"음,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청솔의 온몸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소름이 끼쳤다. 상처를 입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지금 적의 습격을 받는다면 아무리 용감한 솔본국 무사라도 전멸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모두 몸을 일으켜 최후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다가오는 자의 호흡 소리까지 들릴까 생각할 정도로 풀잎 스치는 소리는 다가왔다.
"이미 이렇게 된 바에야 함께 죽을 각오로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려라. 과연 솔본국 무사들의 최후다웠다는 말을 듣도록. 알았나!"
여러 사람은 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오, 대장, 여기 계셨군요. 여러분, 나요. 경천환이요. 잘못 표창 따위를 던지진 마시오."
수풀 저쪽에서 목쉰 소리가 날아왔다.
"오, 경천환. 적인 줄만 알았네."
여러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신들 좀 차리시오.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호미족(虎尾足)을 썼지 않소. 그걸 모를 정도로 여러분은 정신이 나갔단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솔본국 무사들은 모두 각자 독특한 걸음을 고안하고 있다. 그에 의해 어둠 속에서의 싸움이나 정찰 같은 때, 잘못해서 있을 동지들끼리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지금 경천환이 사용한 보행법은 속보(速報)로 세 걸음 전진하다가 거기서 4분의 1호흡 정도로 정지하고 다시 속보로 세 걸음 전진하는 식의 걸음이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이 발끝으로 가볍게 걷기 때문에 경천환은 스스로 그것을 호미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대장, 무사하셨군요, 여러분도……."
경천환은 떠메고 온 커다란 부대 자루를 털썩 땅 위에 던졌다.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경천환, 그것은 무엇이냐?"
"대장. 이것이 우리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항상 99%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셈이요."
경천환은 큰 소리를 치며 부대 자루를 풀러 거꾸로 들었다. 털썩 굴러 떨어진 것은 새끼줄로 꽁꽁 묶인 강미화 선생이었다. 흩어진 머리가 땅 위에 길게 늘어졌다.
"오, 이건, 경천환 잘했다. 잘했어. 이 인질(人質)은 적의 방화로 타죽은 줄만 알았는데……."
"예, 저도 일단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이대로 적에게 빼앗겨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격하는 적을 피해 대웅전으로 숨어 들어가 떠메고 왔소이다."
"잘했다! 우선 누워서 쉬도록."
청솔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 경천환의 공을 치하했다. 높마을의 외눈이 긴 칼을 옆에 끼고 청솔에게로 다가왔다.
"대장, 증오의 대상인 적군의 여자, 이 여자를 토막내어 적에게 보내 줍시다."
채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긴칼을 번쩍 빼어 들었다. 으음! 하고 강미화 선생은 괴로운 듯이 낮게 신음했다. 청솔이 말했다.
"바보 같은 놈. 닥쳐라! 인질에다 상처를 입혀서는 흥정이 안 된다. 사지가 멀쩡해야만 천금의 가치가 있는 법이지. 숨통을 끊는 것은 흥정이 안 됐을 때 해도 늦지 않다"
악귀가 험악한 눈으로 높마을의 외눈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외눈. 이 인질을 떠메어 온 것은 경천환이란 말이야. 네가 뭔데 칼을 빼들고 야단이냐."
외눈은 분한 듯이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그만 둬라. 집안 싸움은 안 해야지, 그보다 먼저 다음 계략을 짜기로 하자."
여러 사람은 어둠 속에서 청솔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경천환은 뱀 밭의 진평 외에 한 사람을 데리고 인질을 원불사 옮겨라."
"뭐라고요? 대장, 원불사라면 적의 본거지 바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좋은 것이다. 적은 이 한내 마을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배후에다 인질을 숨기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곳은 적중에 있어서 진퇴가 극히 편리하다. 경천환, 빨리 가라!"
"예! 그럼 대장님께서는?"
"음, 이제부터 세발못(洗髮池) 근처의 송천사(松天寺)로 자리를 옮긴다."
"알았습니다. 그럼 먼저 갑니다."
경천환은 급히 강미화 선생을 짐처럼 푸댓자루에 집어넣었다.
"진평, 이것을 메어라, 그리고 도리환, 네가 따라 와라."
새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둑맞은 타임머신
 
"아, 누가 또 온 모양이야. 음, 석청사의 희죽이로군."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악귀가 일동을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뭐, 희죽이라고……."
이윽고, 한 사람의 복면을 한 무사가 웅덩이로 뛰어 들어왔다.
"여러분, 오래간만이오. 오, 대장께서도……."
"웬일인가, 희죽이?"
뛰어 들어온 무사는 땀에 범벅이 된 복면을 재빨리 벗었다.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도 주문국 무사의 한 사람이었다.
철민이 처음 마을의 뜨락에서 땅벌랑이며 철새랑, 매미랑 등의 주문국 무사의 간부들과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있던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섞여 날카로운 눈초리로 철민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그 사나이였다.
"이거 정말 주문국 놈 행세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대장, 그놈들은 정말 기묘한 놈들이오. 도대체 어느 곳의 어떤 놈들인지 통 짐작도 할 수가 없소이다."
"혹시 이국(異國)의 요술쟁이가 아니냐?"
"글쎄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죽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황솔의 모습이 나타났었는데, 그건 무슨 요술이냐?"
"애, 저도 잘은 모르겠소이다만, 뭔가 얇은 비단에다……음, 뭐라던가…… 매, 매직 잉, 잉크라든가…… 어떻든 그런 것으로 황솔님의 모습을 그려 가지고 그것을 뒤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막대기로 비치더군요."
"으음, 그러면 그 소리는?"
"예, 그것도 뭐라던가요. 테프, 테프레코다라든가, 아니 테이프 레코, 레코더라든가 하는 것인데, 엘레키라는 것을 쓰는 것 같더군요. 그 조그만 상자는 사람의 음성을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을 꺼내 쓸 수 있는 도구였소이다."
"그 도구에다 황솔의 신음 소리를 담았다가 대웅전 어느 곳에 장치를 한 것이로군."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사방이 열리는 상자를 만들어 거기다 그 상자를 넣고 교대로 상자의 옆을 열면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느 때는 좌측에서, 어느 때는 우측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이 달라진다구요."
"으음 그랬었군! 어쩐지 황솔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 통 그 장소를 알 수가 없었거든."
그 때, 악귀가 나섰다.
"그 필름이란 뭐지?"
"글쎄 모르겠소. 그런데 그 물건에 불을 붙이면 냄새가 어떻게나 고약한지 아무리 단련된 무사라도 정신을 잃을 정도요."
"그것으로 황솔님을 괴롭힌 모양이군."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운 상대였다.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마술을 쓰는 놈들임이 분명했다.
"아, 그리고 대장 그들의 두령인 듯한 사나이가 늘 옆에 끼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무척 귀한 것인 모양이오. 자, 이것이요."
희죽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철민의 둥근 통, 즉 타임머신이었다.
"뭐냐? 이게……."
"뭔지 모르지만, 무척 소중한 것인 모양입니다. 이것을 오늘밤은 사또 녀석한테 맡기고 갔더군요. 사또 녀석이 안방 벽장에 몰래 넣어 둔 것을 슬쩍 훔쳐왔소이다."
범선이 그것을 받아들고 이리 저리 뒤적거렸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악귀에게 넘겼다.
"희죽이 수고했다. 조금 더 주문국 놈들 사이에 끼어 첩자(스파이) 노릇을 해 다오. 악귀, 그 뭔지 모르는 것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려라. 폭발이라도 하면 큰 일이다."
청솔은 그 기묘한 둥근 통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악귀는 당장 단도를 빼어 들고 발 밑에다 30센티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타임머신을 묻었다.
그리고는 발을 굴러 굳히고 위에다 풀을 덮었다.
"이것을 묻은 장소는 잊어라. 이것이 적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우리의 승리다."
청솔이 어금니를 악문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러면 세발못 북쪽에 있는 송천사로 가자."
청솔은 얼음장같은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이것으로 싸움은 피장파장이다. 두고 봐라."
어두운 벌판의 밤에 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리며 나뭇가지를 울리고 있었다.
 
중대한 회의
 
새벽녘의 상쾌한 바람이 잡목 숲이며 불타 버린 사또의 집터 위를 불며 지나갔다. 그 저쪽의 동녘 하늘은 벌써 새벽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한내 마을 청명사의 습격을 마친 철민의 일행은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왔다. 본거지를 지키고 있던 땅벌랑과 매미랑이 그림자처럼 나와 일동을 맞이했다. 그들은 뛰어난 무사답게 마중 인사 따위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어디서 적군이 엿듣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일 뿐이다. 도리어 거창하게 등불을 들고 달려온 것은 이 곳 사또인 정현룡의 부하들이었다.
"아, 정말 훌륭한 활약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청명사의 불길이 잘 보이더군요."
"자, 피곤하실 텐데 우선 차라도 한잔 드시죠."
"이젠 솔본국 놈들도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정말 경하할 일입니다."
시끄럽도록 저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다.
"어, 사또께서……."
부하들이 앞에서 다가오는 인물에게 재빨리 길을 비킨다. 등불에 비친 얼굴은 이 곳의 사또인 정현룡이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허리를 굽히는 부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철민 앞에 우뚝 서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엇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깊이 사죄하는 듯 무릎까지 손을 늘어뜨렸다. 철민의 얼굴에 심한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용재와 남웅이 철민의 돌연한 변화에 근심스레 물었다. 철민은 그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몸이 굳어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철민아, 철민아!"
그러자 비로소 그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철민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철민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맥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재도, 남웅도, 종운도, 또 땅벌랑도 의아스러운 눈길을 그러는 철민에게 쏟고 있었다. 단지 사또 한 사람만이 풀이 죽어 힘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또의 집터 한 모퉁이에 급히 지은 판잣집이 임시로 사또의 집무소가 되어 있었다.
철민은 쉴 사이도 없이 당장 용재, 남웅, 종운, 그리고 땅벌랑을 데리고 그 판잣집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중대한 회의인 듯 돌쇠랑과 매미랑이 직접 경비를 맡았다. 게다가 또 그 바깥쪽을 젊은 무사와 또 한 사람, 그 문제의 희죽이가 사또의 부하들과 함께 멀찌감치 에워싸며 배치돼 있었다.
정현룡 사또는 저쪽의 커다란 나무 밑에 기운 없이 서 있었다.
회의는 길었다. 벌써 밤이 새어 농가의 추녀에서는 아침을 짓는 연기가 어렴풋이 흐르기 시작했다.
회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판잣집 속에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토론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낮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음, 야단났군."
"이대로 있다간 큰일이야, 철민아!"
낮으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돌쇠랑과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엇인가 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철민들이 인질로 잡힌 강미화 선생을 되찾지 못한 점과 돌아와서 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전황(戰況)은 매우 불리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돌쇠랑이며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의 표정은 차츰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까닭은 오적 정현룡 사또만이 알고 있다. 사또는 몇 번이나 자결(自決)하여 철민에게 사죄하려 했으나, 그것도 너무나 무책임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회의가 끝나기를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희죽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경비에 임하면서 속으로는 그 둥근 통을 빼앗은 것이 적에게 예상 이상의 타격을 준 듯한 결과에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이처럼 반 이상 전의(戰意)를 상실한 적이 다음엔 어떤 작전으로 나올지, 이번엔 그것을 청솔 대장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였다.
그 후에도 한참이나 되어서야 철민 일행은 판자 집에서 나왔다.
"모두들 수고했소. 그럼 감시하는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은 쉬도록 하시오."
철민의 음성은 공허하게 울렸다.
 
솔본국의 솔솔이
 
나무숲의 큰 가지가 겹겹이 우거진 골짜기 밑에 송천사가 있었다. 북쪽으로부터는 비석향(碑石鄕), 남쪽으로부터는 천석향에 이어진 구릉(丘陵)이 세발못 끝에서 하나로 이어져 높은 벼랑을 이루고 있다. 그 벼랑에서 스며 나온 물이 몇 줄기의 조그만 폭포가 되어 벼랑의 골짜기로 떨어져간다. 그 골짜기에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물보라를 맞는 듯, 송천사의 나지막한 초가 지붕이 있었다.
둘레에는 심한 빗소리 같은 물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가만히 마루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솔본국의 청솔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듯, 나뭇가지가 버석버석 울렸다. 문득 범선이 목을 길게 늘여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장, 발자국 소리가……. 암만 해도 우리편 사람 같은데……."
범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악귀도 칼을 들고 눈쌀을 모았다.
바람 속에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명 있는 모양이다. 비로소 청솔의 눈이 떠졌다.
"대장, 어디 계십니까. 5인의 철갑대(鐵甲隊)가 왔소이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로 잘못 들을 정도의 낮은 소리가 청솔의 귀에 들려왔다.
"뭐라구! 5인의 철갑대라고?"
"오, 이건 정말 믿음직한 분들이 나타나셨군."
범선과 악귀도 진심으로 기쁜 듯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대장, 오래간만입니다. 흐름별입니다. 범선, 악귀, 두 분께서도 안녕하시니 반갑습니다."
쳐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큰 사나이가 청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악귀, 등불이라도 켜라. 절간에 등불이 켜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
청솔의 말을 좇아 조그만 등불이 켜졌다. 침침한 오렌지색 불빛이 절간 앞의 풀잎에 움직였다.
"흐름별, 이 곳의 상황은 대충 알겠지만, 자세한 것은 범 선에게 들어라."
키가 큰 사나이는 고개를 숙였다. 청솔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인물들에게 차례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음, 평길, 육장, 원태, 그리고 청목이로군. 잘 왔다."
청솔도 이 뜻밖의 구원대를 얻어 역시 기쁜 모양이었다.
"부하를 10여 명 데리고 왔으니, 수하에 넣어 주십시오."
다섯 사람의 뒤에 검은 옷의 이름 없는 무사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대장, 실은……."
흐름별이 약간 곤란한 일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뭔가?"
그 때, 갑자기 엎드려 있는 무사들 뒤에서 맑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비켜라!"
철썩! 가느다란 대나무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리며 엎드려 있던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윽! 하고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나이들이 재빨리 양쪽으로 길을 비켰다. 그 움직임에 동조하듯 철갑대의 다섯 사람도 순식간에 좌우로 비켜섰다.
등불의 불빛 속에 나타난 것은 아직 나이 어린 한 사람의 무사였다. 흔들리는 불빛을 받고 커다란 눈동자가 물에 젖은 듯 빛났다.
"오라버니, 제가 왔어요."
소년 같은 얼굴이 웃으면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머리 뒤에서 묶어 등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윤기 있게 빛났다.
"솔솔이!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청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라버니, 집의 아버지께서도 걱정하시길래 내가 가서 도와 드리겠다고 했더니 몹시 화를 내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철갑대 다섯 분의 뒤를 쫓아 뛰쳐나왔죠."
청솔은 씁쓰름한 얼굴이었다.
"솔솔아, 너는 앞으로 온(溫)씨 댁을 이을 귀한 몸이다. 이 오라비를 생각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너는 이미 우리의 한 패가 아니다. 자중(自重)해야지."
솔본국 온(溫)씨 집안의 솔솔이. 실은 솔본국 무사들 가운데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별세한 그녀의 아버지, 검은솔이 그녀를 거친 자기들의 생활 속에 묻히게 하는 것을 아낀 나머지, 솔본국의 명문(名門) 온씨 집안의 양녀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까 솔솔이가 청솔에게 말한 아버지란 이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솔솔이는 무술에 있어서는 오라비인 청솔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가끔 이웃집의 애지중지하는 화초를 남몰래 꺾어버리고, 혹은 근처의 염색 집에서 잘 염색해 놓은 천에다 딴 무늬를 그려 넣어 솔솔이에 대한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원래가 명분가의 딸이고, 또 그 예쁘장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녀의 그런 장난을 용서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었다.
"솔솔아, 너 이제 몇 살이지?"
"열세 살이에요, 왜요?"
"열세 살쯤 되면……."
"오라버니! 꾸중 소리는 이제 듣기 싫어요. 그보다 이렇게 비좁은 골짜기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솔솔이는 초승달 같은 눈썹을 치뜨고 악귀며 범선을 노려보았다. 검은 옷이 도리어 솔솔이를 가련하게 보이고 있었다. 소녀의 취미에 맞게 화려하게 장식한 가늘고 긴칼이 아름답게 빛났다.
"높은 곳,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진퇴에 유리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전법인 줄 아는데, 이와 같이 손바닥 같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은 이미 겁에 질린 증거예요. 범선, 악귀, 너희들 같은 인물이 그래 오라버니 곁에 있으면서 이 꼴이 뭐냐!"
두 사람의 무사는 찍 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솔솔아, 말이 좀 지나친 것 같다. 이번의 적은 도저히 솔본, 주문의 무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놈들이다. 나 청솔도 이제는 시종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을 솔솔이는 귀가 없는 듯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오라버니, 백가구(白可口)의 강호에게 대포를 8문 만들게 했어요. 초약(硝藥)도 많이 있죠, 이 밤이 새기 전에 적의 본거지를 격파해 버립시다."
"뭐? 대포라고. 그건 또 굉장한 것을 가지고 왔구나. 헌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어떠냐, 너희들 의견은?"
범선과 악귀, 그리고 철갑대의 다섯 명까지도 놀라는 눈으로 솔솔이를 보았다. 솔솔이라면 그 정도의 것은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 대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미륵불이 있는 경내(境內)에 이미 도착해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 누구든 심부름을 보내 주세요."
"좋다. 그럼 일을 시작하는 셈치고, 철갑대 다섯 사람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 대포를 운반해 오도록."
"예!"
흐름별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른다.
"오라버니, 대포만 가지고는 재미가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청솔은 누이동생이 다가오자, 눈매에 웃음 빛이 떠올랐다. 역시 이 누이동생이 귀여운 모양이다.
솔솔이는 청솔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음, 과연 좋은 생각이군. 그럼 어디 한 번 해 볼까…… 범선, 악귀, 이리로……."
범선과 악귀에게 손짓했다.
범선은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 네 사람 앞에 펴놓았다.
"이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 곳에서 밭으로 빠지는 사잇길에 폭약을 묻어 적의 퇴로(退路)를 막고, 사또 집 뒤를 흐르는 시냇물에 기름을 흘리는 거요. 그리고 철갑대의 부하들에게 조총을 주어 이 곳에 숨어 있게 하고, 우리는……"
솔솔이의 작전은, 청솔이와 범선, 악귀까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것이었다.
'음, 과연 돌아가신 검은솔님이 아들이었다면…… 하고 한탄하신 심정도 알만 하군.'
범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대포가 도착했다. 대포라고는 해도 요즘의 야포(野砲)나 중포(重砲)와는 종류가 다르다.
포신의 내부만 1센티미터 정도의 두툼한 청동(靑銅)의 통. 그 외부를 석면(石綿) 같은 것으로 싸고, 주위를 구리철사로 꽉 조인 후, 또 외부를 두꺼운 참나무 판으로 싼 위를 다시 철사로 빽빽이 동여매고 있다. 구경(口徑) 15센티 정도의 요즘으로 치명적 박격포 같은 것이다.
그것을 2문씩 말에 싣고, 따로 탄약을 실은 마차가 한 대, 흐름별이 지휘하여 벼랑 위에 늘어놓았다.
"집합!"
청솔이 긴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드디어 총공격의 때는 왔다.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희죽이, 희죽이는 없나. 두령께서 부르시네."
땅벌랑이 판잣집 앞에서 소리쳤다.
"예, 여기 있습니다."
희죽이는 속으로 아찔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판잣집 앞에선 철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희죽이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철민의 음성은 침통했다.
"잘 들어, 이제부터 곧 솔본국의 청솔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이렇게 전해라. 이쪽에서 사로잡고 있는 황솔을 곧 돌려 보낸다. 돈 천냥도 보내겠다. 이쪽엔 그저 강미화 선생을 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또 희죽이,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만약 허락해 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솔본국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해라."
"두령, 그럼 우리는 솔본국에 항복한단 말인가요?"
"음, 이렇게 된 바에야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사실은 말이야, 희죽이 아주 소중한 것이 없어져 버렸단 말이야. 아마 틀림없이 솔본국 무사들이 훔쳐 갔을 거야. 우리로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니까, 이쯤 된 바에야 차라리 싸움을 그만 두고 그 소중한 것을 돌려 달랄 수밖에 없어. 그래서 청솔에게 상의를 해 보자는 거지."
희죽이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 그거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럼 곧 다녀오겠습니다."
희죽이는 꾸벅 절을 하자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철민은 재빨리 종운에게 눈짓을 했다. 종운은 자기도 그것을 눈짓으로 받고 남몰래 그 자리를 떴다.
"땅벌랑, 부탁하겠소."
땅벌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돌쇠랑을 데리고 잡목 숲 사이로 사라졌다.
판잣집 안에서는 탕탕, 덜컹덜컹 하고 무엇인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마을에 있던 주문국 무사 드디어 항복하다!」
이 통보는 솔본국 무사들을 진심으로 기뻐 날뛰게 했다. 악귀며 범선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직접적인 원인이 희죽이의 활약에 있다는 데에 불만이 있었으나, 그래도 솔본국이 이겼다는 사실은 기쁘다.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무술을 가진 놈들이 이렇게 쉽사리 손을 들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희죽이의 설명을 들어 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청솔은 일시 작전을 중지하고 곧 회의를 열었다. 청솔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항복해 오는 그 놈들을 이쪽 편에 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청솔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일동을 둘러보았다. 그 때 솔솔이가 앞으로 나왔다. 솔솔이의 눈은 곧장 희죽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죽이, 너 이 앞으로 나와라!"
희죽이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모두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라는데…… 빨리 나와!"
솔솔이는 긴칼을 쑥 뽑았다.
새벽녘이 가까운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등불이 당장 꺼질 것처럼 깜박였다. 그 빛 속에서 솔솔이가 빼어 든 칼이 무지개를 그었다.
그 칼끝이 불쑥 희죽이의 두 눈 사이를 겨누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이건, 이, 이건……."
희죽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적미적 물러났다. 악귀도 범선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기에게 칼이 겨누어진 듯한 심한 공포를 느꼈다.
솔솔이의 온몸에는 섣불리 말을 걸 수 없는 싸늘한 살기 (殺氣)가 넘쳐 있었다.
"희죽이! 네 임무는 적의 한 사람이 되어 오랫동안 적중에 숨어 그 비밀을 캐어내는 첩자가 아니냐! 그 첩자인 네가 그렇게 쉽사리 속아넘어가다니! 이 바보 같은 놈!"
솔솔이의 음성은 늘어선 무사들의 가슴을 예리하게 꿰뚫었다.
희죽이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내저었다.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솔솔이님, 제가 속아넘어가다니요. 이 희죽이 그렇게 천치 바보는 아닙니다."
"그래."
솔솔이는 엷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흔들리는 불빛을 받아 깜짝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럼 묻겠는데 희죽이, 싸움의 승패에 관련이 있을 정도로 소중한 물건을 가령 한 때나마 남의 손에 넘겨 주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 그것은……."
"더구나 솔본국의 뛰어난 무사조차도 당하기 힘든 무술의 소유자가 무엇 때문에 사또 따위에게 그 물건을 맡겼겠는가, 희죽이!"
"그, 그것은 설마 제가 저희들 편에 잠입해 들어가 있는 줄은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사또가 그 물건을 벽장에 숨겨 두는 것을 봤다고 했겠다. 그것이 바로 제 편에 잠입한 적을 찾아 내기 위해 꾸민 함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지."
희죽이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솔솔이님, 사또가 남몰래 벽장 속에 숨기는 사실이야말로 그것이 진짜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함정도 꾸미는 것이다. 진실로 소중한 물건을 맡은 것이라면 왜 너 같은 자의 눈에 띄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잠자코 품 속에 넣어 두면 아무도 모를 텐데…… 그것도 일부러 알도록 한 사실이 애당초 이상하지 않는가."
솔솔이의 말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청솔이 썩 앞으로 나섰다.
"아, 알았다. 솔솔아, 양(陽)의 뒤에는 음(陰), 음의 뒤에는 양이 있다. 적의 뒤의 또 뒤를 친다. 이것이 무술의 극치다. 희죽이! 솔솔이의 말을 잘 알아들었겠지?"
"오라버니, 그것만이 아니에요. 아마 틀림없이 희죽이는 뒤를 밟혔을 거예요……."
"뭐라고! 뒤를 밟혔다고."
"항복하겠다는 적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마음의 여유는 반드시 틈을 보였을 터, 이러한 자를 미행하기란 용이한 일, 미행하는 자가 있음도 희죽이는 몰랐겠지."
"으음, 과연 적이지만 훌륭한 술책이로군."
"오라버니, 항복한 척하고 기뻐하는 적의 허를 치는 것은 이 또한 전법의 묘(妙). 잘 알아 두세요."
"에잇, 쌍!"
청솔은 긴칼을 뽑아 들고 희죽이에게 덤벼들려 했다. 솔솔이의 왼손이 재빨리 움직여 청솔의 팔굽을 잡았다.
"오라버니, 지금 희죽이를 베면 일이 더욱 어긋납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적에게 속은 척하는 거예요."
솔솔이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시원했다.
"뭐라구, 속은 척하라고?"
"적이 꾸민 함정에 쉽게 빠진 척하고 그 적의 방심한 틈을 거꾸로 치는 거예요. 적은 항복한 척하고 우리는 적이 항복한 것을 기뻐하는 척하고. 오라버니, 허실음양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음, 알았다. 솔솔아, 그럼 이 희죽이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희죽이는 다시 적진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기뻐한 나머지 모두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보고를 시키면 어떨까요?"
청솔은 몇 번이나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솔은 희죽이 쪽으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앉아라! 희죽이, 솔솔이가 지금 말한 대로다. 급히 돌아가 사또에게 적당히 보고해라. 앞으로는 세심한 주의를 해서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여느 때 같으면 당장 목을 쳐죽이겠지만, 이번만은 용서한다. 알았지!"
"예, 예이"
희죽이는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빨리 가라!"
엎드려 있던 희죽이는 일어나 몸을 굽히자 총알처럼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때, 희죽이가 달려간 방향과는 반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귀에는 도저히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였으나, 여기 있는 무사들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범선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그 밑을 기어들듯 악귀의 몸이 뛰어 날았다. 범선의 손을 떠난 표창은 쌔앵! 소리를 내며, 방금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난 무성한 숲을 해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악귀는 손에 든 칼로 등촛대를 가르고 있었다.
순간, 암흑 속에서 솔본국의 무사들은 숨을 죽였다.
새벽녘에 가까운 바람만이 우수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어디에선가 부엉이가 울었다. 그대로 약 30분쯤 흘렀을까. 첫 동작을 보인 것은 흐름별이었다.
"에잇! 달아난 것 같군. 분명히 적의 정찰병이었는데……."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소생했다.
"오라버니, 그 정찰병은 희죽이의 뒤를 쫓아 왔을 거예요. 정말 실수했어요.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우리측 계획도 새었단 말이로군."
청솔이 신음했다.
솔솔이가 그 청솔의 신음을 막았다.
"오라버니, 계획이 새었다고 해도,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지금부터 당장 공격해 들어갑시다."
"하지만, 솔솔아, 우리측 계획이 새었다면 적의 방비도 그만큼 단단할 게 아니냐."
이쯤 되니까 청솔은 무척 신중했다.
"오라버니, 왜 그리 겁이 많아졌어요? 화공술(火攻術)에는 밤낮이 없는 법, 가령 계획이 새었다고 하더라도 대포를 막을 방비는 그렇게 쉽지 않은 거예요. 적이나 우리나 계획이 새어버린 지금엔 그저 강공(强攻)할 도리 밖에 없어요.'
확실히 전력을 다해 부딪친다면, 대포며 총을 가지고 있는 솔본국 측이 유리하다. 게다가 지뢰화(地雷火)며 불을 놓기 위한 기름도 풍부하다.
청솔은 재빨리 머리 속에서 그렇게 판단했다,.
"듣거라! 이제부터 아까 세운 전법에 따라 사또의 집을 공격한다. 대포를 쏘고, 달아나는 적은 총으로 쏘아라. 항복한 적은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려라. 집, 나무, 밭 따위에 오로지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라. 한 명이라도 놓치지 말아. 대포는 흐름별이 지휘한다. 총은 악귀와 대원 3명. 범선은 정면으로 돌격하라. 평길, 육장, 청목은 지뢰화를 매설하라. 원태는 후진(後陣)이 된다. 그럼, 출발!"
여러 사람은 한 무리가 되어, 사당 앞의 어둠 속에서 달려나갔다.
무사들은 모두 밤눈이 밝다. 이 빈틈 없이 무성한 숲 속의 나뭇가지며 작지만 흐름이 급한 골짜기의 냇물, 그리고 험한 벼랑을 기어오르고 뛰어넘으며 순식간에 웅덩이를 에워 싼 언덕 위로 뛰어나왔다.
나무 그늘 밑에 조용히 몇 마리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 등에는 이미 분해된 대포며 총, 탄약, 지뢰화 등
 
솔본의 화공(火攻)
 
철민의 부대가 본거지를 삼고 있는 곳은, 주문국의 XX마을의 북서쪽 호두리에 가까운 세발못 근처, 원불사를 우측에 바라보며, 이윽고 미륵불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지는 부근이었다. 이 곳은 어쩐지 대나무 숲이 무성해 있었다.
이 대나무 숲을 빠져 나오면, 길은 아래로 내려와 웅덩이가 되고, 세발못으로 흐르는 폭 2미터 정도의 시냇물이 있어서, 그 양쪽은 널찍한 습지(濕地)인데, 억새풀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은 그 대나무 숲을 등에 지고, 잡목 숲에 에워싸여 있었다. 조용히 취락을 이루고 있었다. 거듭되는 솔본국의 습격으로 마을의 집은 반 이상이나 불타 버리고, 잡목 숲도 거의 해골 같은 모습으로 검게 그을린 가지를 뻗치고 있을 뿐이었다.
청솔이 앞을 보자 그 곳에 보따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말고삐를 잡고, 백가구의 강호에 가서 따라온 잡졸(雜卒)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탄약을 나르거나 화승(火繩)의 불을 지키는 졸개로 끌려 나온 것이었다.
"자, 출발이다."
청솔은 그들을 재촉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수송대를 가운데에 넣고 원진(圓陣)을 만들고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흐름별이 이끄는 대포 부대는 몰래 대나무 숲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당장 화약을 장전하고 탄알을 밀어 넣은 다음, 화승을 짧게 잘라 포격 준비를 완료했다.
그리고 평길, 육장, 청목의 세 사람은 무거운 지뢰화를 짊어지고 소리도 없이 마을 서쪽으로 달려갔다. 총을 든 악귀는 부하들을 데리고 마을의 왼편쪽으로 이동했다.
또 철갑대의 부하 두 사람은 기름이 든 커다란 통을 지렛대로 짊어지고 마을 뒤로 숨어 들어갔다.
동쪽 하늘은 점차 밝아져 갔다.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었다. 쏟아지는 벌레 소리가 시끄러웠다.
얼마 후, 지뢰화를 매설한 평길 일행이 돌아왔다. 청솔은 솔솔이를 거느리고 마을이 잘 보이는 곳으로 나섰다. 원태가 뒤를 따랐다.
"대장, 지뢰화 8개, 분명히 묻고 왔습니다."
평길이 땅에 엎드려 조용히 보고했다.
"알았다. 그럼, 세 사람은 범선을 따르라."
"옛!"
청솔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날카롭게 불었다. 공격의 신호였다. 그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쾅?"
천지가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울렸다.
"피잉!"
여러 발의 포탄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마을을 향해 날았다. 환하게 보라 빛 불기둥이 일었다. 그 빛 속에 박살이 난 지붕이며 기둥이 높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콰, 콰앙!"
두 번째의 일제 사격이었다. 강호의 부하들은 과연 훌륭한 솜씨였다. 이 선제(先制) 포격을 거의 속사(速射)에 가까운 속도로 발사시키는 것이었다.
집의 파편이 불꽃을 끌며 다른 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맹렬한 불길이 일었다. 붉은 불길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뛰쳐나왔다.
"탕! 탕! 탕!"
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붉은 불빛 속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세 번째의 포격은 마을 중앙에 불기둥과 먼지를 일으켰다. 집이 천천히 기울면서 지붕이 무너지듯 불길 속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청솔의 일행은 보이지 않는 어떤 목표물을 겨누어 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활을 겨누고 뛰쳐나온 사나이가 화살을 쥔 채 허무하게 총알 밥이 되었다.
뒤를 이어 한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달렸으나, 그도 채 5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어떤 집에서 한 농부가 길다란 막대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벌떡, 그는 당장 정신이 나간 듯, 엉금엉금 기어서 나온 집으로 다시 달아나 버렸다.
다음 순간, 그 집에 포탄이 떨어졌다. 집은 산산이 흩어져 휘날렸다. 마을 뒤켠에서 새빨간 불길이 높이높이 치솟았다. 뿌린 기름에다 불을 지른 모양이다. 불길은 검은 연기를 동반하고 윙윙 대나무 숲을 훑어 나갔다.
"앗핫하하……. 어떠냐? 솔본의 솜씨가……."
청솔이 붉은 빛으로 검붉게 물든 얼굴을 쳐들고 귀신처럼 웃었다.
그 순간,
우르르, 쾅!
대지를 흔들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었다.
"오, 지뢰화가 터졌다. 주문국 놈들 이제는 마지막이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 봐라. 샛길에는 지뢰화가 기다리고 있을 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방, 지뢰화가 폭발했다. 청솔은 두 번째 휘파람을 날카롭게 불었다.
"야아!"
범선은 뛰어 일어나 긴 칼을 번쩍 뽑아 들었다.
"나를 따르라!"
아까부터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네 사람은 회오리바람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불타는 마을로 쇄도해 들어갔다.
청솔의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대포는 일제히 포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흐름별도 대포 곁을 떠나, 그의 장기인 긴 창을 겨누고 마을로 쳐들어갔다. 악귀도 역시 총알을 잰 총을 옆에 끼고, 세 사람의 부하를 이끌어 마을로 달려갔다.
마을은 불바다였다. 불타 떨어지는 집들의 불똥이 소나기처럼 솔본국 무사들 위로 떨어져 왔다.
"음, 비,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새파란 얼굴로 울부짖으며 덤벼드는 사또의 부하를 범선은 단칼에 베어버렸다.
악귀는 필사적으로 덤비는 주문국 무사의 칼을 피하며 얼른 총을 겨누어 쏘았다.
정면에서 악귀의 머리 위를 치려던 적은 칼을 치켜든 채, 피할 사이도 없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흐름별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한 집의 판자 문을 냅다 걷어찼다. 그 판자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그는 번개처럼 창 끝을 내밀었다. 죽창을 든 농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흐름별은 품에서 폭약을 꺼내 집 안으로 던졌다. 순간, 환하게 불길이 소용돌이쳤다.
 
"솔솔아, 이만 하면 싸움의 결말도 다 난 것 같구나. 적군의 반은 대포 밥이 되고, 그밖에는 총알과 범선 일행의 칼에 쓰러진 모양이다. 마을 뒤의 대나무 숲이 저처럼 불바다가 되어서는 달아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솔솔이는 아까부터 무엇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의 불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 가만히 청솔의 음성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이상해 죽겠어요. 적의 응수가 너무 빈약하군요."
솔솔이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응수라구? 내가 지금 말하지 않았니. 대포알을 먹고 대 부분 나가떨어졌다고."
"아니에요, 오라버니! 이 정도의 공격을 받고 패배한 푼수치고는 너무 혼란이 없어요. 게다가 지뢰화가 폭발한 것도 겨우 둘 뿐. 나머지 사람이 모두 저 불 속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으음!"
"오라버니, 이것은 역시 희죽이를 뒤쫓아온 적의 정찰병이 우리의 화공 계획을 엿들었다고 봐야겠어요. 적의 수비 는 대단하다고 봐야 돼요."
그 때, 문득 솔솔이가 배후의 어둠을 돌아다보았다.
"오라버니! 저게 뭘까요?"
그 소리는 긴장에 얼마간 떨리고 있었다.
"대장, 뭔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부하 중의 하나가 억누른 음성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오라버니, 저건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에요."
우지직하고 작은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다가오고, 붉은 빛 속에 불쑥 무섭게 큰 물건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르릉, 탕탕탕…….
여태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무서운 폭음이 공기를 뒤흔들며 다가왔다. 그것은 풀과 나무를 밀어내며 서 있는 청솔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 서 있던 원태가 칼을 빼들고 덤벼들었으나, 금방 공처럼 튕겨 땅 위로 나뒹굴었다.
"오라버니, 빨리 피해요!"
솔솔이는 청솔을 밀어내고 몸을 굽혀 필사적으로 달렸다. 청솔은 정신을 차리자 솔솔이의 뒤를 좇아 달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셈인가. 저것은 마물(魔物)인가 아니면 짐승인가?'
 
"어딜 달아나느냐, 청솔!"
철민은 핸들을 굳게 쥐고 소리쳤다. 어제 하루 종일 여럿이서 판잣집에 틀어박혀 회의를 계속하는 척하고 사실은 몰래 현대에서 가져온 2대의 모터사이클, 그것을 하루종일 걸려 두터운 판자와 이것도 함께 가져온 플라스틱 판으로 엄중히 장갑(裝甲)을 한 장갑차였다.
"청솔, 이젠 달아나도 소용없다!"
철민은 강렬한 라이트를 달아나는 청솔의 등에 비쳤다. 그 순간, 철민은 라이트의 불빛을 막아 선 솔솔이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음, 뭐야, 계집애 아냐!"
철민은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땅벌랑, 뒤를 부탁하오!"
뒷좌석의 땅벌랑의 소리를 등에 흘리며 철민은 측면의 도어를 밀며 몸을 날렸다.
"덤벼라! 솔본국의 비겁한 놈들!"
철민은 박쥐처럼 손발을 펴고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덤비는 철민을 향해 솔솔이는 크게 칼을 휘둘렀다. 긴칼이 무지개를 그으며 철민의 정면을 향해 날았다.
"얏!"
철민은 몸을 웅크려 솔솔이의 칼날을 허공에 흘렸다. 소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검술이었다.
'아차!'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까짓 소녀 하나쯤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뜻밖의 강적이었다.
무엇이든 무기가 있어야겠는데…… 철민은 조금씩 다가오는 솔솔이의 살기를 온 몸에 받으면서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치의 어둠은 나무토막 하나 찾아 내기 힘들었다.
"자, 솔본국 온(溫) 솔솔이의 칼을 받아 봐라!"
쨍쨍한 소리가 철민의 귓전을 때렸다.
"뭐, 온 솔솔이라고! 건방지다! 난 서울 △△중학교의 철민이야. 자, 덤벼라!"
이제는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철민은 주먹을 낮게 겨누고 솔솔이의 공격을 기다렸다.
'아, 짧은 막대기라도 하나 있으면…….'
솔솔이가 문득 웃은 것 같았다.
철민은 반사적으로 2미터쯤 뒤로 뛰어 물러났다. 그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솔솔이는 벌써 총알처럼 달려 들어왔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만큼 솔솔이의 공격은 빨랐다. 철민의 몸을 피하는 것도 또 바람처럼 기민했다.
쫓겨가는 솔본국 무사들의 절망적인 외침이며 칼 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솔솔이도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의 칼을 피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가령 첫번째는 어떻게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계속하여 그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이 눈앞의 이 작은 소년은 몇 번이나 공격을 가해도 그 때마다 날쌔게 좌로 우로 피하며 칼끝을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솔솔이는 풀썩 뒤로 몸을 날리자, 칼 끝을 곧장 하늘로 향해 겨누었다. 필살의 기합이 온몸에 넘쳐 있었다.
철민은 순간, 아, 예쁜 소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뜻밖의 여유를 철민에게 주었다. 철민의 오른발은 이 때 떨어져 있던 한 자루의 막대기를 가볍게 밟았다.
'됐다!'
일순 솔솔이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철민은 순간적으로 몸을 굽혀 막대기를 오른손에 갑자기 그대로의 자세로 중천을 향해 치올렸다. 백은(白銀)의 칼날과 석자(약 1미터) 길이의 막대기가 열 십자로 교차했다. 얼굴을 맞대고 선다고 보였던 두 사람은 동시에 좌우로 뛰어 몸을 피했다.
솔솔이는 차츰 승세(勝勢)가 사라져 감을 느꼈다.
맨손일 때도 칠 수 없던 적은, 이제는 충분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이렇게 민첩한 인간이 있다는 것이 솔솔이에게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민은 겨우 손에 넣은 막대기를 중단(中段)으로 겨누었다. 길이도 무게도 딱 알맞았다.
"자, 덤벼 봐! 왜 무서워졌나?"
솔솔이는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큰 소리 말아. 네가 덤벼 봐라!"
"솔솔이라고 했겠다. 우리 집 솔솔이하고 마찬가지로 어차피 너도 건방지고 울보겠지. 자! 솔솔아, 때려 줄까?"
철민은 문득, 이 솔본국의 소녀 무사가 제 여동생 솔솔이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소리쳤다. 솔솔이는 평소 집에서는 건방진 소리를 곧잘 하여 철민이 하는 짓을 곧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는 미운 계집애다. 음, 오늘이야말로 혼을 내줘야지! 철민은 별안간 엉뚱한 곳에서 투지를 불태웠다.
그 소리를 들은 온(溫) 솔솔이는 놀랐다, 결사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서 건방지다느니, 울보라느니 때려 주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솔솔이는 문득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순간 맹렬히 돌입해 온 철민의 타격을 채 피하지 못해 솔솔이는 크게 비틀거렸다. 그 왼쪽의 어깨에 딱! 하는 무거운 타격이 왔다. 솔솔이는 벌렁 땅 위에 쓰러져 굴렀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솔솔이는 머리 속에서 언뜻 생각했다.
바람을 가르며 막대기가 떨어져 왔다. 이번에는 팔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팔은 마비되고 솔솔이는 다시 땅 위에 굴렀다. 솔솔이는 분노로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이런 치욕적인 처사를 여태까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그래 막대기로 얻어맞고 땅 위에 구르다니!
솔솔이는 뛰어 일어나자마자 단도를 재빨리 빼어 들었다. 그것을 양손에 들자, 몸을 굽혀 적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앗, 위험하다!'
철민은 몸을 비켜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단도의 공격을 피했다. 철민은 손에 든 막대기를 내어 던지자. 흐르는 솔솔이의 오른쪽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목덜미를 잡는다. 순간, 솔솔이 수도(手刀)가 철민이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그 왼손을 다시 쳐 올렸다. 솔솔이의 달콤한 냄새가 스르르 철민의 얼굴을 에워쌌다.
'우엑, 냄새야!'
철민은 저도 모르게 힘을 늦췄다. 순간, 솔솔이의 몸은 매끄럽게 철민의 손을 빠져 등뒤로 돌았다. 단도의 날카로운 칼끝이 철민의 등뒤에서 엄습해 왔다.
'앗, 위험!'
철민은 그 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꽉 꼈다. 위기였다. 솔솔이가 단도를 또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철민은 등 뒤를 찔리고 말았을 것이다.
잡고 있는 오른손을 놓고 달아날까? 철민은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겼다!'
솔솔이는 적의 난조(亂調)를 느끼고 필살의 순간을 엿보았다. 적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자기의 오른손을 놓은 순간 단도를 날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 날 것이다.
철민을 솔솔이의 그런 심중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잡고 있는 오른손에 그 마음의 움직임이 분명히 전달되어 온다. 오른손을 놓고 뛰어 물러나는 몇십 분의 1초가 진짜 죽는 순간이었다. 적은 당연히 자유로워진 오른손의 단도를 날려 오겠지.
'이래선 안 되겠다!'
철민의 왼손은 재빨리 움직여 주머니 속의 타임머신을 잡았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솔솔이의 오른팔을 겨드랑이에 낀 채 부자유한 오른손의 손 끝으로 둥근 통의 손잡이를 찾는다. 그것을 본 솔솔이의 낯빛이 달라졌다.
"앗, 그것은 희죽이가 훔쳐 온……."
"바보 같은 소리 마! 그건 가짜야."
"역시……."
솔솔이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 순간, 철민의 움직임을 솔솔이는 적의 허점으로 보았다. 솔솔이는 힘껏 몸을 비틀자 재빨리 허리에서 칼집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이런 경우 강력한 무기다. 솔솔이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자 철민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철민은 뒤로부터의 공격에 숨을 죽이고 손끝에 있는 힘을 다했다.
째앵-.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겹쳐 쓰러졌다.
 
두 사람의 솔솔이
 
밤은 완전히 새었으나, 거리에는 아직 인적이 없었고, 철길의 건널목 차단기(遮斷機)는 열린 채로 있었다. 그 저쪽에 있는 △△역의 텅 빈 개찰구가 을씨년스럽게 넓어 보였다.
그 인적 없는 도로에 철민과 솔솔이는 양쪽으로 동시에 훌쩍 뛰며 갈라섰다. 솔솔이는 현기증이라도 일어났는지 두어 번 고개를 흔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지? 이제 못 당하겠다는 걸 알았겠지."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 소리에 솔솔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기 둘레에 일어난 이변(異變)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칼집을 떨어뜨린 듯, 오른손의 짧은 단도만이 아침 햇빛 속에 싸늘하게 빛났다.
"에잇!"
솔솔이는 낮게 소리치자 핏발이 선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며 그림자처럼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
"농담 말아!"
철민은 날쌔게 몸을 피했다. 여기까지 와서 같이 죽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솔솔이는 약이 올라 입술을 악물고 뒤로 물러서는 철민을 뒤쫓았다.
가로수를 몇 번이나 누비며 철민은 자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로 달렸다. 큰 길에서 싸우다가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뒤가 귀찮기 때문이다.
철민의 집에서는 슬슬 여동생 솔솔이가 잠에서 깨어 일어날 시간이다.
철민은 이웃집 앞에 멎어 있는 자동차의 지붕을 딛고 훌쩍 자기 집 뜰로 뛰어내렸다.
"멈춰라!"
솔솔이는 곧장 달려가자마자 철문을 뛰어 넘었다.
철민은 현관 옆을 돌아 자기 방 창 밑으로 갔다. 방에는 야구 배트며 기타 적당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창문으로 들어가려다 철민은 아차 하고 실망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아마 안으로부터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일어났을까?'
철민은 뜰의 나무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멈춰라! 어딜 달아나려고!"
솔솔이의 음성이 아침의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레이스의 커튼 저쪽에 솔솔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한 달음에 솔솔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나, 오빠! 어디 갔다 왔지? 학교도 빼먹고!"
솔솔이는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소리쳤다.
"여기 있었구나!"
창 밖에서 들여다보며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방안으로 일진 바람처럼 뛰어들어 왔다.
"어머나, 이 여잔 누구지?"
"에잇!"
"얏!"
세 가지 각기 다른 외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철민, 온 솔솔이, 그리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삼각형의 정점이 되어 마주 섰다.
"뭐야, 이 여잔 남의 집에 신을 신은 채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니……. 너 불량 소녀구나?"
여동생 솔솔이는 금방 눈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하얀 얼굴은 화가 나서 붉게 물들었다.
온 솔솔이는 이 때 처음으로 시선을 철민에게서 솔솔이에게로 옮겼다. 그 얼굴에 격심한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을 쫓고 있을 때의 결사적인 투지(鬪志)는 급속히 사라지며 심한 혼란이 마음 속에 동요를 일으켰다.
"아, 이, 이건……."
"온 솔솔이, 잘 봐라. 이건 꿈도 아니고 환영(幻影)도 아니란 말이야."
철민의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솔솔이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손에서 단도가 떨어져 둔탁한 금속성을 냈다.
"오빠, 이 여잔 대체 누구지? 오빠 친구야?"
"친구? 말도 말아, 솔본국 제일의 검객(劍客) 온 솔솔이야."
"온 솔솔이?"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길을 모았다.
"내가 졌다! 어떤 요술인지는 몰라도 진정 이것은 기상천외의 수다. 자, 내 목을 쳐라!"
온 솔솔이는 무너지듯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길고 검은 머리가 방바닥에 늘어졌다.
"이봐, 얼굴을 들고 사방을 잘 살펴봐."
그 말에 온(溫) 솔솔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길을 들었다. 그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 이상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 빨리 내 목을 쳐서 승리를 거둬라."
"이봐, 여기는 말이야, 여태까지 네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 300년이나 지난 시대란 말이야. 알겠어? 여긴 현대의 서울이란 말이야."
온 솔솔이는 차근차근 철민을 훑어보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를 살펴보고 방 안에 놓인 피아노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차츰 그녀의 머리 속에 못 박히고 있었다.
"저 분은 역시 그대와 같은 무사인가요?…… 정말 아름다운 옷을 입고 계시군요."
아직 네글리제(잠옷) 바람인 솔솔이는 입을 딱 벌렸다.
"오빠, 이 여자, 돈 것 아냐?"
솔솔이는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렸다.
"아냐, 그렇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 실은 300년 전인 옛날의 세계에서 갑자기 이리로 왔기 때문에 놀라고 있는 거야."
"300년 전?…… 또 오빠의 허풍이 시작됐구나."
온 솔솔이는 힘없는 모습으로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에게로 다가갔다.
"이봐요. 난 이미 패배한 몸.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하는 수 없지만, 그대의 오라버니는 너무도 엄격하신 분. 이렇게 된 바에야 그대의 손으로 내 목을 쳐주시오."
솔솔이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온 솔솔이의 너무나 진지한 표정에 겨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언뜻 철민의 얼굴을 보더니 단호히 말했다.
"좋아,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가르쳐 주지. 오빠! 이 방에서 나가 줘."
"야, 너 괜찮겠니? 그 여자는 굉장한 여자란 말이야. 솔본국 제일의 검객이란 말이야."
"솔본국의 검객인지 뭔지 모르지만, 어떻든 우선 옷을 갈아입어야 될 게 아냐. 이것 봐, 온통 먼지투성이잖아. 오빠, 레이디가 옷을 갈아입는데 거기 그렇게 서 있을 작정이야. 빨리 나가 줘."
철민은 하는 수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솔솔이의 방에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자기 방 도어를 열고 들어가 미리부터 생각해 놓은 물건을 몇 개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소란통에 아버지며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솔솔아,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철민의 소리에 도어 저쪽에서 솔솔이의 음성이 돌아왔다.
"오빠가 작은 집에 갔는지도 모른다고 엊저녁에 거기 가셨어. 늦게 될 테니까 거기서 주무시겠다고……."
철민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정말 재수가 좋은 날이다. 그러면 온(溫) 솔솔이에 대해 귀찮게 추궁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철민은 부엌으로 가서 수돗물을 틀어 입에 대고 실컷 마셨다.
엊저녁부터의 싸움으로 몸은 무척 피곤하지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철민은 세숫대야 앞에 서서 슬쩍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원불사로 가는 길을 두 대의 모터사이클이 아침 바람을 가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땅벌랑!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일거에 강미화 선생을 탈환해야 돼요."
"용재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우리에게 이로울 때는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은 탄환처럼 원불사의 산문(山門)으로 이어진 잡목 숲 속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장갑(裝甲)을 풀어버린 모터사이클은 엔진 소리도 경쾌하게 냇물의 다리를 뛰어넘어 원불사의 나무 울타리를 돌파하고 경내로 달려들어갔다.
푸른 이끼로 깊이 덮인 넓은 경내에는 인적이 없었다. 정면의 석가당을 향해 질풍처럼 달린다.
빵빵!
용재가 힘껏 경적을 울렸다.
석가당의 문이 열리며 새 사나이가 달려나왔다. 세 사람 모두 이 처음 보는 괴상한 탈 것에 깜짝 놀랐다.
"어엇! 이게 뭐냐? 말이냐, 소냐?"
"이 무서운 소리는?"
그러나 역시 경천환은 놀라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 땅벌, 기묘한 짐승을 타고 왔구나!"
경천환은 긴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 경천환을 향해 두 대와 모터사이클이 빙그르 바퀴를 돌렸다.
뱀 밭의 진평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공포에서 폭약(爆藥)을 높이 들었다.
용재의 손에서 한 줄의 로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뻗어 나갔다.
높은 나무 가지를 뒤흔들며 아침 바람이 불며 지나갔다. 이슬이 우르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모터사이클의 시트를 적시고 빼어든 칼날 위로 흩어져 내렸다.
진평의 손에서 날아간 폭약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폭발하는 것과 용재의 손에서 번갯불처럼 뻗친 로프가 경천환의 오른쪽 팔에 얽히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됐다! 달려라."
배기관(排氣管)의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용재가 외쳤다. 경천환은 모터사이클에 끌려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갔다.
"음, 아앗!"
어떻게 해서든지 오른쪽 팔에 얽힌 로프를 끊어 버리려 했으나, 용재는 점점 더 스피드를 올렸다. 원불사의 넓은 경내를 크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땅벌랑은 폭약의 연기를 일순간에 돌파하자, 멈칫하니 서 있는 진평을 향해 돌진했다.
"아앗!"
허둥지둥 몸을 피하는 진평에게 유성처럼 표창이 날았다.
"맛이 어떠냐!"
용재는 모터사이클을 세웠다. 경천환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었다.
"됐다. 강미화 선생을 찾아라!"
두 사람은 날쌔게 모터사이클에서 뛰어내렸다. 단숨에 층계를 뛰어 올라가자 안의 판자 문을 밀어 열었다.
"앗, 강미화 선생님!"
안쪽 구석진 기둥 밑에 강미화 선생이 나 뒹굴어 있었다.
땅벌랑이 강미화 선생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이젠 살았어요."
"어머나, 넌 용재가 아니냐! 너까지 여기에……? 얘, 제발 좀 가르쳐 다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강미화 선생의 음성은 불안과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건 선생님, 저, 철민이가 가지고 있는 타, 타임머신 때문이에요."
"타임머신?"
"네, 그래요. 지금 우리는 솔본국의 무사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을 사로잡아 갔던 놈들이 바로 그놈들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쪼그려 앉았다. 정말 무리도 아니다. 타임머신이니 솔본국의 무사들과의 싸움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강미화 선생에게 믿어질 것인가.
"용재님, 어떻든 여기서는 우선 물러갔다가 나중에 천천히 설명을 드리시죠."
땅벌랑이 뒤에서 가만히 속삭였다.
"하긴 그렇군. 선생님, 자, 우리 본거지로 돌아가요."
"난 이제 싫다. 이렇게 무서운 곳, 돌아가고 싶어."
강미화 선생은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는 선생님을 두 사람은 양쪽에서 부축하여 데리고 나왔다.
"용재하고 철민이는 무서운 사람들이로구나. 난 돌아가겠어."
용재는 매우 난처해져서 땅벌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땅벌랑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끄떡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이 용재님이나 우리들의 두령 철민님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이 수라장(修羅場)도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오니 굽어 살피십시오."
땅벌랑의 성실성 있는 설명에 강미화 선생도 문득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똑똑한 걸음걸이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가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경내를 훑어 본 땅벌랑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아차! 용재님, 경천환 녀석이 달아났습니다그려."
"음, 아침 이슬을 맞고 숨을 돌이킨 모양이군…… 아, 그러고 보니 진평도 사라졌구나."
아까 땅벌랑과의 결전 끝에 표창 세 개를 맞고 땅에 쓰러져 있던 진평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경천환이 진평을 구원해 가지고 달아났는지 혹은 상처를 입은 진평이 경천환을 끌어 일으켜 자취를 감추었는지. 어떻든 이것은 가공할만한 체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야 했을 텐데……."
땅벌랑이 중얼거렸다.
"닥쳐요. 목숨을 끊어 놓다니 야만인이나 할 소리예요."
강미화 선생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것도 우리들의 규율이니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라니, 나 말인가요?"
강미화 선생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이 사람은 주문국 제일의 무사로서 땅벌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을 아마 대갓집의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용재야, 너희들은 도대체……."
용재는 머리를 에워싸고 옆으로 달아났다.
"잠깐만 참으십시오, 아가씨. 꾸지람은 나중에 이 땅벌이 받을 터이오니, 우선 이 모, 터모터가 아니고…… 저어……."
"모터사이클이오."
"아, 참, 그 사이클 말입니다. 이걸 타십시오. 이 수레는 말이 끄는 것이 아니라, 엘레키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정말 귀중한 것이외다. 그렇죠, 아가씨."
"땅벌랑, 선생님은 모터사이클 같은 것 다 알고 계셔요."
땅벌랑은 금방 면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렇겠습지요. 워낙 고귀한 신분이시니……."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빙긋 웃었다.
"용재야, 이 분을 놀리면 안 돼. 그럼 가요, 땅벌랑!"
강미화 선생에게 이 중년의 소박한 무사가 지니는 인정이 따뜻이 전달되어 왔다. 사정은 아직 잘 알 수 없으나, 자기를 위로하고 기운을 내게 해 주려는 진심이 고마웠던 것이다.
강미화 선생을 뒷자리에 태운 땅벌랑의 모터사이클을 선두로 두 대의 차는 폭음도 드높게 원불사의 경내를 빠져 나왔다.
강미화 선생을 맞이하여 철민네의 진지는 오랜만에 승리의 웃음을 되찾았다. 돌쇠랑, 매미랑이 마을의 부녀자를 지휘하여 잔치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옷매무새를 고치자 그럭저럭 평소의 명랑하고 아름답고 약간은 엄격한 강미화 선생의 본 모습이 되돌아 왔다.
그 무렵이 되자, 돌쇠랑을 선두로 마을의 여자들이 숱한 음식을 올려놓은 상을 들고 들어왔다.
철민을 비롯하여 용재, 남웅, 땅벌랑, 사또 등, 중요 인물들이 강미화 선생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여러 사람의 입으로부터 여태까지의 경과가 보고되었다. 강미화 선생은 수저를 드는 것도 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으나 차츰 그 표정이 달라졌다.
"철민아, 그 타임머신은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생님, 저는 이 땅벌랑이며 사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솔본국 무사들을 무찌르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아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어른들이 걱정하실 텐데……."
"예,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이 상태를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다 끝난 다음, 현대로 돌아가서 설명할 작정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아, 온(溫) 솔솔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용재가 말했다. 철민은 온 솔솔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앗, 그러면 좋겠군. 선생님, 저희 집에 가서 제 동생과 온 솔솔이가 둘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아주시지 않겠어요? 동생이 잘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은 되지만요."
"그것도 좋겠구나. 그럼 누가 나하고 같이 가 주겠니?"
"그럼, 남웅아, 네가 갔다 오려무나."
그리고 계속 작전 회의가 열렸다.
이래서 싸움은 이제 엇비슷하게 되었다. 아니, 온 솔솔이가 적의 전력(戰力)에서 빠졌으니까, 5.5 대 4.5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앞으로의 적의 동정을 살펴 거기 따라서 이 편의 작전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매미랑의 제안으로 다시 주문국 무사 10여 명을 보충하여 전력을 높이기로 했다. 그 심부름을 위해 젊은 무사가 즉석에서 출발했다. 응원 부대가 오면 그가 그 중의 몇 사람을 지휘하도록 맡기겠다는 언약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떠난 것이다.
철민은 필요한 물품을 자세히 메모하여 남웅에게 맡겼다. 사또는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여, 이 마을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럼 남웅아, 넌 먼저 출발해라. 선생님, 학교 일은 잘 부탁합니다."
철민은 주머니에서 타임머신을 꺼내어 그 끈을 남웅의 목에 걸어 주었다.
 
주스와 스테레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溫) 솔솔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시키고 머리에 묻은 먼지며 흙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허리에까지 닿는 긴 머리를 둘둘 말아 올려 핀으로 집었다. 그리고 제 옷장에서 그녀에게 맞을 만한 옷을 찾아 바꿔 입혔다. 온 솔솔이는 완전히 인형처럼 솔솔이의 말을 쫓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음을 턱 내맡기고 있었다.
"자, 이 겨울 좀 봐요."
솔솔이는 커다란 삼면경(三面鏡)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엷은 갈색 스커트에 라이트 블루의 심플한 디자인의 블라우스가 볕에 그을려 거무칙칙해진 온 솔솔이를 소년처럼 경쾌하게 보이고 있었다. 말아 올린 머리칼 몇 올이 갸름한 목덜미에 늘어져 있었다. 솔솔이는 제 마음에 드는 밝은 초록 색 손수건으로 말아 올린 머리를 매어 주었다.
"어머나, 넌 정말 예쁘구나."
솔솔이는 감탄했다.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온 솔솔이는, 그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긴칼을 휘두르며 투지 만만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다. 그 날씬한 모습은 마치 암사슴처럼 민첩하고 들에 핀 꽃처럼 우아했다.
"아뇨, 저 같은 거야 뭐…… 아가씨야말로……."
온 솔솔이는 수줍은 듯이 눈을 숙였다.
"레코드 안 들을래요? 나, 레코드 많이 가지고 있어요."
솔솔이는 올 여름에 졸라서 산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넣었다.
"난 리키 넬슨을 좋아해요. 약간 어른스런 기분도 있거든요, 난……."
온(溫) 솔솔이는 스테레오와 솔솔이가 손에 든 레코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온 솔솔이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심한 놀라움 뒤에는 불가사의한 즐거움이 솟았다.
"우리 춤 춰요."
솔솔이는 손가락을 울리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어렴풋이 배운 남국의 리듬이 하얀 솔솔이의 얼굴을 빛나게 했다. 온 솔솔이도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솔솔이의 스텝을 흉내내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생긋 웃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친구인 듯,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미소지으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주스 마시겠어요?"
솔솔이는 부엌의 전기 냉장고에서 주스 병을 들고 왔다. 어머니에게 발각되면 야단을 맞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창문에 달린 쇠붙이에 마개를 끼고 오른손 팔굽으로 탁 친다. 마개가 빠지고 주스가 넘쳐흐르는 것을 재빨리 왼손으로 병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계집애가 건방지게…….'
철민의 그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솔솔이는 목을 움츠리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온 솔솔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병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열어 줄께."
솔솔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병마개를 땄다.
"솔솔아, 솔솔아!"
현관 쪽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네!"
솔솔이는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온 솔솔이가 따랐다.
"아, 강 선생님."
거기 서 있는 사람은 강미화 선생이었다.
그 뒤에 남웅이 서 있었다.
"솔솔아, 괜찮니?"
"네? 뭐 가요?"
"아, 친구가 와 있구나!"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선생님, 소개합니다. 이 친구는 온(溫) 솔솔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분은 강미화 선생님이에요."
"온 솔솔이?"
"뭐라고! 온 솔솔이!"
제일 뒤의 말은 남웅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날쌔게 몸을 날려 2미터나 뒤로 물러서 유도의 자세를 취했다.
"나하고 제일 친한 친구에요. 선생님하고 남웅 오빠도 올라오세요."
온 솔솔이와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서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온 솔솔이는 얼른 복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속임수도 전법(戰法)인 이상, 용서는 빌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이봐요, 여기서는 그런 것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인사는 하지 말아요."
강미화 선생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한참 있다가 이 아름다운 소녀가 그 무시무시했던 솔본국의 온 솔솔이라는 것을 알자, 그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아갔다.
"괜찮아요……. 여기서는 적도 없고 우리편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복,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아주 멋있어요."
두 사람은 온 솔솔이를 부축하듯 양쪽에서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허어, 저 소녀가 온 솔솔이란 말이지. 정말 예뻐졌는 데…… 그리고 솔솔이하고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놀랍단 말이야."
남웅은 중얼중얼 혼자 중얼거렸다. 남웅의 눈에는 마치 번데기에서 마름다운 나비로 변한 듯한, 멋진 온 솔솔이의 변신(變身)이 아로새겨졌다.
"흠, 알 수 없는 일이야."
방에서는 강미화 선생과 온 솔솔이가 몸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강미화 선생은 상냥한 언니처럼 온 솔솔이에게 지금이 그 때로부터 300년이나 지난 후의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이상한 기계에 의해 청솔이며 솔솔이네의 시대와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현대에는 칼이며 창을 휘둘러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없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온 솔솔이는 멍하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강미화 선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강미화 선생의 몸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그녀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이 솔본국의 소녀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러 가지 일을 상기시켰다.
"선생님은 꼭 제 어머니나 언니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어머님은 안 계시나요?"
"제 어머니는 아직 제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대요."
온 솔솔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는 의지할 데 없는 소녀의 고독과 슬픔을 담고 깊은 호수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랬군요.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님이나 언니가 돼 줄께요. 그리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죠. 수예며 춤, 노래, 또 그림도……."
강미화 선생은 빗을 손에 들고 온 솔솔이의 머리를 잘 빗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스커트에 조그만 얼룩을 지으며 번졌다.
"선생님, 저 식사 준비를 하고 오겠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팔 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섰다.
"남웅 오빠, 뭘 멍청하니 보고 있는 거예요, 빨리 도와 줘요."
남웅은 얼떨떨해서 뛰어 일어났다.
"나, 난 철민이하고……"
"남웅 오빠는 오빠 말이면 뭐든지 다 들으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단 말이죠."
솔솔이의 눈썹이 곤두섰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진 것 같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남웅은 솔솔이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웅 오빠는 그 쌀을 씻어요."
그러더니 곧, 솔솔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강적(强敵), 왕호룡
 
"남웅이 자식 뭘 여태까지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철민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웅에게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을의 삼면에는 이미 견고한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흙 가마를 겹쳐 쌓고,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 창을 주욱 꽂아 놓아, 이제는 어지간한 무사라도 이것을 타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개방해 놓은 한쪽에는 몇 겹으로 조그만 호(壕)를 파서 산병선(散兵線)으로 삼았다.
그 무렵, 이 마을로 이어진 숲 속의 길을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달려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흰옷에 흰 장갑, 흰 쇠붙이를 머리에 끼고, 직경 20센티미터나 되는 쇳덩어리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윽고 마을 서쪽에 나타났다. 잠시 동안 사방을 살피고 있더니, 두 발을 웅크리고 박쥐처럼 하늘을 날았다. 대번에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는다. 높이 5미터나 되는 이 견고한 바리케이드도 이 괴상한 사나이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와라, 철민!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왕호룡(王虎龍)이다. 나와라, 철민! 내 그 모가지를 잘라 주마."
위잉 하고 공기를 뒤흔들며 쇳덩어리가 돌기 시작했다.
무서운 힘이었다.
이것을 보고 철민도 낯빛이 변했다.
"어엇, 이건 굉장한 녀석이 나타났는데……."
종운이 머리 꼭대기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철민아, 조심해! 이놈은 좀 무시무시하다."
"으음, 왕호룡 녀석, 기어이 나타났구나."
땅벌랑이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그림자처럼 철민이 곁으로 다가섰다. 위잉, 위잉 하고 공기를 가르며 돌아가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지켜보며, 빠른 말씨로,
"두령, 저 놈은 솔본국에서도 일급의 무사입니다. 여태까지 저 놈의 손에 쓰러진 주문국 무사가 20여 명이나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 눈앞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두령,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땅벌랑은 결사적인 표정으로 긴칼을 잡았다.
"자, 어떻게 된 거야. 뭘 꾸물거리고 있어. 하나 둘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보지."
왕호룡은 강철같은 빛깔의 얼굴을 씰룩거리며 크게 입을 벌렸다.
위잉!
쉬익!
쇳덩어리와 청동의 쇠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소용돌이치는 웅성거림 속에서 누구나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자기를 향해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철민도 용재도 종운도 모두 일제히 저도 모르게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핫핫하하! 어때. 자, 간다!"
왕호룡은 바른손에 쥔 쇠사슬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철민은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뭐래도 이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다. 모조리 흰 것으로 차린 모습이라든지 쳐다볼 정도로 큰 키라든지, 보통 어른의 두 배는 됨직한 넓은 어깨 폭, 게다가 사나운 짐승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두 눈 등, 모두가 무시무시한 박력에 차 있었다.
"자, 간다! 받아라!"
왕호룡은 마치 아이들을 놀리듯 외치며 무엇인지 경을 가는 것처럼 광장 중앙으로 나왔다.
누가 던졌는지 표창이 쇳덩어리에 맞아 흰 섬광을 그리며 빗나갔다.
"하하하,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아. 표창 따위를 던지다니……."
철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음, 이놈이 사람을 뭘로 알고……."
그러나 화가 치민 다고 섣불리 뛰어나갔다가는 그야말로 적의 책략에 말려들게 된다.
"철민이란 어떤 녀석이냐? 제일 먼저 처치해 주지, 나와라, 나와!"
"쏴라!"
사또가 외쳤다. 2~3명의 부하가 우르르 활을 들고 달려 나왔다. 화살을 활줄에 대고 겨누는 동안,
"이얏!"
하는 왕호룡의 부르짖음과 함께 쇠사슬이 쉬익 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뻗었다.
쇳덩어리는 활을 겨눈 사또의 부하들을 돌덩이처럼 날려버렸다. 부러진 활과 화살이 높게 날아 올랐다.
"이건 보통 놈이 아닌데……. 솔본국 놈들 반격의 시간을 얻으려고 굉장한 녀석을 파견했군."
용재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좋아, 해치우자. 내 말을 잘 들어. 저 놈은 분명히 굉장한 장사지만,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저렇게 언제까지나 저런 것을 휘둘러 댈 수는 없을 거야. 손발의 움직임이 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우리 넷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거야. 그래서 상대편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해."
"알았어, 철민아. 저 쇳덩어리를 피하는 것은 배구에서 하는 회전 리시브의 요령으로 하자."
"오케이! 자, 그럼……."
철민과 용재, 종운, 그리고 땅벌랑의 네 사람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흠, 이놈들 봐라!"
왕호룡은 쇠사슬을 짧게 끌어당기자, 다시 유유히 휘둘러 대기 시작한다.
철민들의 공격 태세를 보고, 사또의 부하들은 뒤로 일제히 물러나 멀찌감치에서 요소 요소를 굳게 지켰다.
"자, 간다."
정면으로 돌아간 철민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쇳덩어리가 번개처럼 날았다. 일순,
"영차!"
철민은 날래게 몸을 날려 쇳덩어리 밑을 빠져 나왔다. 공처럼 굴러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탕!
땅을 울리며 쇳덩어리가 땅바닥을 때렸다. 그 순간, 그것은 벌써 쉬익 소리를 내며 왕호룡의 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숨 쉴 사이도 없이 쇳덩어리는 그대로 왕호룡의 뒤에 낮게 도사린 용재를 향해 날았다.
"영차!"
용재도 빙그르르 몸을 굴렸다.
탕!
용재의 뒤, 정확히 2미터쯤 되는 곳에 쇳덩어리가 낙하했다.
"잘한다, 용재야!"
"음. 요 자식들아!"
왕호룡은 온통 분노가 치받쳤다.
날아오는 쇳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거나 옆으로 피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짓이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쇳덩어리는 뒤로 물러서면 그 다리에 부딪힌다. 왕호룡의 그 낙하 각도를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잇! 얏! 위잉!"
유성처럼 쇳덩어리가 엄습해왔다. 이마 바로 앞, 1미터까지 다가왔을 때, 철민은 순간적으로 용수철처럼 앞으로 몸을 굴렸다.
타앙!
쉬익!
땅이 울리고 당겨지는 쇠사슬의 울림소리. 몸을 굴린 철민의 머리 위를 쇳덩어리가 돌아간다. 벌떡 일어나는 철민. 그것이 거의 동시였다.
왕호룡은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쇳덩어리 쪽으로 몸을 던져 피하는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번 회전 리시브를 할 적마다 네 사람은 조금씩 왕호룡 쪽으로 다가갔다.
'음, 뒤로 물러서면 좋을 텐데, 이놈들, 앞으로 몸을 던지다니!'
왕호룡은 속으로 으스스 두려움이 생겼다. 적(敵)들의 가벼운 몸놀림도 칭찬할만 하거니와, 바람보다도 빠르다고 자랑하던 자기 쇳덩어리의 움직임을 이토록 정확하게 간파하는 능력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어떠냐, 왕호룡! 힘만 가지고는 안 된단 말이야. 빠른 동작을 간파할 수 있는 육감이 필요한 거야."
철민이 외쳤다.
"암, 그렇고 말고. 넌 아무래도 트레이닝이 부족한 것 같아. 좀더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하란 말이야."
종운이 약을 올렸다.
"에잇!"
쇠사슬의 길이는 이미 10미터도 채 못되도록 줄어들고 있었다. 무거운 쇳덩어리를 자유롭게 돌리기 위해서는 이미 쇠사슬의 길이가 너무 짧아지고 있었다
왕호룡은 민첩한 네 마리의 늑대에게 에워싸인 거대한 곰처럼 바야흐로 완전히 움직임을 봉쇄 당하고 있었다. 다음 번의 쇳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을 피하는 순간이 네 사람이 일제히 돌격 태세로 들어가는 때였다.
회전 리시브의 자세 그대로 단번에 굴러 왕호룡의 다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광장은 일순, 죽음처럼 조용해지고 쇳덩어리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드높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왕호룡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이얏!"
왕호룡은 그 큰 키를 둘로 꺾어 날쌔게 몸을 굽히고 두 손이 쇠사슬을 쥐자 지상 1미터 쇳덩어리는 낮게 도사린 이 사람의 하반신을 쓸듯 먼지를 일구며 원을 그렸다.
재빨리 철민이 뛰었다. 멋진 공중 회전이다. 무릎을 안아 쥐고 몸을 웅크리자 그 모습은 이미 훌쩍 훌쩍 몸을 날려 공중에서 돌았다.
필사적인 공격을 교묘하게 피신 당한 왕호룡은 네 사람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갑자기 쇠사슬을 집어던지고 바람처럼 달렸다.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땅을 울리며 네 사람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앗, 저 놈이 달아난다."
그런데 달아났다고 생각한 왕호룡은 단숨에 20미터쯤 달리더니 그 기운으로 풀쩍 몸을 날려 전방의 민가(民家)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럽쇼, 저놈은 틀림없이 높이뛰기의 올림픽 대표 선수나 되겠는데……"
"종운아! 지금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용재가 종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때, 여기까진 못 오겠지?"
"뭐라고? 좋아, 이번에야말로 화살 맛을 보여 주지."
"잠깐만, 철민아 이놈, 이걸 좀 봐라!"
왕호룡은 품속에서 네모진 종이 뭉치를 꺼냈다.
"봐라, 이건 지뢰탄(地雷彈)이다. 이제 한 놈도 남김 없이 죽여 주마."
왕호룡은 증오에 찬 표정으로 흰 이를 드러내자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자, 먹어라! 한 놈도 남지 말고 저승으로 가라!"
지붕 위에 있는 왕호룡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조리 풀잎처럼 파랗게 질렸다.
"으음!"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철민도 속수무책이었다. 머리 위로부터 지뢰탄 세례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왕호룡은 결정적인 승리의 쾌감에 취해 빙그레 웃었다.
그 때, 종운이 흘낏 태양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번쩍!
지붕 위에서 강렬한 광선의 작렬이 눈에 띄었다.
"으앗!"
왕호룡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그 큰 몸집이 비틀거리며 훌쩍 몸이 공중에 떴다. 그리고 급경사의 지붕 위를 뚜르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엎드려라!"
철민의 외침 소리에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종운의 손에서 떨어진 손거울이 저만치 떨어졌다.
탕탕!
처절한 폭음 소리가 나며 초가 지붕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핫핫하, 왕호룡 녀석 드디어 자폭(自爆)했구나."
무럭무럭 이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모두들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심야(深夜)의 활극
 
강미화 선생은 학교에 다녀온다면서 솔솔이의 집을 나섰다. 남웅도 철민에게 부탁 받은 물건을 갖춰야겠다면서 바쁘게 뛰어 나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집 안에서 온 솔솔이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다시 마주 대하고 앉았다.
"이봐요, 미스 온(溫), 이젠 다시 돌아갈 생각 말고 그냥 우리 집에서 살아요.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내 부탁해 볼께요."
온 솔솔이는 문득 슬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솔솔 아가씨, 그렇지만 난 솔본국의 여인, 댁의 부모님은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미스 온. 혹시 오빠가 시끄럽게 굴지는 모르지만……"
"오라버니라면, 그 철민 도령을 말씀하시는지요?"
솔솔이는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철-민-도-령! 철민 도령이라고요! 아, 그래요. 개구쟁이 오빠 말이에요."
"그런 말하시면 안 돼요. 철민 도령은 훌륭한 분, 좋은 오라버니를 두어서 아가씨는 행복하시겠어요."
"하긴 그래요. 가끔 짓궂은 데도 있지만, 사실은 좋은 오빠예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미소지었다. 온 솔솔이의 가슴에 이때 그 철민의 생기 발랄한 얼굴이 뜨거운 숨결이 되어 스며 들어왔다. 온 솔솔이는 가능하면 정말 이 집의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의상, 여태까지 본적도 없는 숱한 진귀하고 예쁘장한 소녀의 소지품, 삼면경(三面鏡)이며 텔레비전, 스테레오 등에 솔솔이의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또 철민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온 솔솔이는 어쩐지 찌잉! 하고 마음 속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현관 쪽에서 갑자기 신발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미스 온, 잠깐만 여기 들어가 있어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여기에요?"
"그래요, 그래요. 빨리 이 벽장 속에 들어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급히 온 솔솔이를 벽장 속에 감췄다. 그리고 허둥지둥 여기 저기를 깨끗이 치웠다. 온 솔솔이에게 보이고 있던 앨범이며 학교의 사진, 제 취미로 모으고 있던 우표철, 평소 아끼고 있는 아름다운 자수의 손수건 등을 정리해서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솔솔아, 아무 일 없었니? 그리고 철민이는 돌아왔니? 암만해도 이상하다. 대체 어딜 갔을까? 작은댁에도 가 있질 않더라."
어머니의 음성이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수고들 하셨어요."
솔솔이는 안정되지 않은 가슴을 달래며 현관으로 나갔다.
"솔솔아, 철민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철민은 여태까지 곧잘 시내의 친척집에 가서 묵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아뇨, 아무 연락도 없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보, 이건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경찰에 수색원을 내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 허지만 철민이하고 한 반인 용재며 남웅, 종운이 세 아이도 함께 자취를 감춘 걸 보니 이건 아마 네 아이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다면 철민이가 무슨 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 있을 리도 없고……."
솔솔이는 멈칫멈칫 입을 열었다.
"저어, 아버지, 오빠는 절대 안심이에요, 절대……"
"절대 안심이라니, 네가 어떻게 아니?"
"글쎄 안심해도 좋다니까요."
어머니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아버지의 찻잔에 차를 따르다 말고,
"솔솔이, 너 철민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구나? 너 철민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아니, 아니에요. 난 몰라요."
"솔솔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오빠가 있는 곳을 알면 말해라!"
아버지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솔솔이는 벌떡 일어나서 제 방으로 달아났다.
온(溫) 솔솔이는 벽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하고 엄마는 지금 기분이 대단히 나빠요. 그래서 얼른 도망쳐 왔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벽장문을 빠끔히 열고 온 솔솔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되시는 철민 도령하며 아가씨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군요. 정말 부러워요."
벽장 속에서 옹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온 솔솔이는 즐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신 것을 보고, 솔솔이는 제 방문을 잠갔다. 그러고 나서야 살며시 벽장문을 열고 온 솔솔이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미안해요, 좁은 곳에 가둬 놓아서.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잠드셨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인제 침대에 누워서 얘기해요."
철민이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를 위해 장롱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네글리제를 꺼냈다.
"미스 온은 이걸 입어요. 베개는 뭘로 할까……"
그러다가 여행용 공기 베개를 꺼내 바람을 넣었다. 온 솔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전에 얼굴을 씻는 것은 미용상 꼭 필요하지만, 지금 세수를 하러 갔다간 엄마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이 콜드크림을 써요."
이런 일은 말괄량이 솔솔이의 특기 중의 하나다. 아름다운 병에 든 크림에 온 솔솔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그것을 거즈로 닦아 주었다. 온 솔솔이는 언니의 시중을 받는 여동생처럼 얌전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벽시계가 두 번 울렸다. 방안에는 두 사람의 솔솔이의 숨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부엌 유리창에 검게 비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장갑을 낀 손에 쥔 잭나이프로 교묘히 유리창을 따 열었다. 어둠 속에서 사나이는 무서운 눈초리로 둘레를 살폈다. 바닥이 두터운 농구화는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를 죽였다. 부엌에서 복도로 그림자처럼 몸을 옮겨갔다. 장갑을 낀 손이 조용히 조용히 미닫이를 밀어 연다. 딸깍! 하고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렸다.
"누구냐!"
솔솔이 아버지의 음성이 어둠을 뚫고 들렸다. 사나이는 혀를 찼다.
"조용해라! 목숨이 아깝거든……."
사나이는 낮게 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팍 손전등을 켰다.
그 빛 속에서 잭나이프가 번쩍 빛났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닥쳐!"
세 사람의 몸뚱이가 한데 뭉쳐 뒹굴었다. 손전등의 빛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졌다.
"솔솔아, 솔솔아! 빨리 112로 전화를 걸어라! 도둑이다."
"시끄럽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잭나이프보다도 빠르게 질풍처럼 뛰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윽! 으윽!"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함부로 잭나이프를 휘둘렀다. 뛰어든 사람은 그 칼날 밑을 빠져 사나이의 가슴팍을 쳤다.
"윽, 아얏!"
"에잇!"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딱하고 울리더니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빨리 전기를 켜요!"
아버지는 겨우 전등을 찾아 켰다. 눈부신 전깃불 밑에 서 있는 것은,
"어머나, 너, 넌 누구냐?"
"소, 솔솔이는?"
온 솔솔이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었다.
"솔솔이라고 부르시기에……"
그 발치에 도둑놈은 맥없이 뻗어 있었다.
방문 앞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역시 풀이 죽어 서 있었다.
"솔솔이 친구냐?"
"네, 네가 이 도둑놈을……."
철민의 부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온 솔솔이는 방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얌전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솔본국 청솔의 여동생 온(溫) 솔솔이입니다……."
"어머나!"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한 달음에 온 솔솔이에게 달려와 허둥지둥 그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 얘는 나하고 한 반에 있는 온 솔솔이에요. 나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오라고 했어요. 얘 우린 저리로 가자."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몸을 껴안듯 하고 방밖으로 밀어내었다.
"얘는 호신술(護身術)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도둑 따위는 간단히……"
어쩌고 떠들어대면서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등을 밀고 복도로 나왔다.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문득 제 정신이 든 듯,,
"다시 한 번 인사를 해야겠구나……. 솔솔아, 솔솔아!"
"네, 지금 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에게 제 방엔 들어가 있으라고 눈짓을 한 다음, 곧 부모님의 방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온 솔솔이가 어느 틈엔지 문지방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 아냐, 아니에요. 솔솔이라고 불렀지만 미스 온이 아니라 나를 부른 거예요. 자, 저리로 가 있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온 솔솔이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 내었다.
"얘, 얘, 솔솔아!"
"네, 네, 곧 가겠습니다."
또 온 솔솔이가 대답했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 입을 가로막았다.
"네 알았어요. 화장실에 다녀와서 곧 갈게요. 아버지, 인 사는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자, 빨리 가요. 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도 머리의 회전이 빠르고 말솜씨가 좋아, 오빠인 철민을 능가할 정도의 솔솔이지만 오늘밤엔 더욱 말솜씨가 좋다. 게다가 어쩐지 어물어물하는 행동이 수상하다. 아버지가 솔솔이의 뒤를 쫓아 복도로 나가려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백차(白車)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의 부모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진홍빛 섬광등(閃光燈)이 밤의 어둠을 뚫고 백차가 멎었다. 긴장한 얼굴의 경찰관이 민첩하게 달려 들어왔다.
 
온(溫) 솔솔이의 소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지만 정말 놀랐는데요. 이 집에는 여자 호걸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주일이나 걸려서 이 집의 동정을 살펴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경찰관에 의해 숨을 돌이킨 도둑놈은 수갑을 차고 맥없이 일어섰다.
"이 도둑놈을 잡은 분을 좀 만나 뵈어야겠는데요……."
경찰관이 말했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솔솔이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 친구예요. 온 솔솔이라고 해요. 호신술을 하거든요. 지금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그냥 좀 놓아 두셨으면 좋겠어요."
솔솔이의 순진한 하얀 얼굴에 진홍빛 섬광등이 비쳤다.
"그래요. 그럼 이름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경찰관은 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름? 온 솔솔이에요. 학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학교는 저어……"
"너하고 한 반이라면서……"
곁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괜한 소릴 하신단 말이야!"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속으로 눈을 흘겼다.
"네, ○○○여중이요."
"혹시 경찰에서 학교 문의를 하면 어떡할까."
「여학생 도둑을 잡다!」 어쩌고 신문에라도 나면 어떡할까? 온 솔솔이가 ○○○여자 중학교에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목을 가만히 움츠렸다.
"저어 경관 아저씨, 학교엔 제발 알리지 말아 주세요. 신문사 사람에게도요. 온 솔솔이는 무척 수줍음을 타는 아이니까. 그렇게 되면 혹시 자살이라도 할지 몰라요."
"하하하, 아, 그래요. 그건 정말 곤란하군요. 그렇지만 이건 시경 국장님의 상을 받을지도 모르는데요."
"안 돼요. 안 돼요!"
경찰관은 민첩하게 경례를 하자, 백차에 올라탔다. 이웃집에서 나온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솔솔아, 그 애한테 뭔가 인사를 하자. 뭐가 좋겠니?"
"아, 졸려! 내일, 내일 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듯 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문을 열었다.
"어머나, 오빠!"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은 철민이었다.
"언제 돌아왔어?"
"백차가 서 있길래 얼마 동안 동정을 살피고 있었지. 도둑놈이 들어 왔었다면서?"
"온 솔솔이가 붙잡았어요. 깨끗이……."
그 온 솔솔이는 전기 스탠드의 엷은 핑크빛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미스 온?"
"……."
온 솔솔이는 말이 없고 철민이 입을 열었다
"솔본국 놈들이 마침내 결전(決戰)의 태세를 갖춘 모양이야. 강변에 부지런히 진지를 만들고 자재(資材)를 모아 두고 있거든. 매미랑하고 돌쇠랑이 정보 수집을 해 왔어."
온 솔솔이는 얼굴이 상기되며 얼굴을 들었다
"솔솔 아가씨, 전 지금 오라버니에게 저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제 소원을 안 들어 주시는군요."
"돌아가요? 왜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뜻밖이라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려 반문했다.
"솔솔 아가씨를 비롯하여 철민 도령하며 모두 친절하신 분들. 우리 솔본국에도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분들을 상대로 피 흘리는 싸움은 이제 그만 둬야겠어요. 돌아가서 제 오라버니 청솔에게도 그렇게 권할 작정이에요."
"아. 그게 좋겠군요."
"안 돼. 솔솔아, 너 생각해 봐. 이 온 솔솔이가 그런다고 청솔이 금방 말을 들을 것 같니?"
"아니에요. 꼭 제 말을 듣도록 해 보겠어요."
온 솔솔이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미스 온의 말이 맞아요. 오빠도 그만 해요."
"철민 도령님, 우리 솔본국에도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을 몇 10분의 1, 아니 몇 백분의 1이라도 시켜 주고 싶어요. 원래 밭을 갈고 꽃을 가꾸며, 때로는 노래를 부르는 생활이 우리 솔본국에도 있었습니다…."
온 솔솔이의 눈에는 어느 사이인지 눈물이 고여 반짝이 고 있었다.
그 눈에는 저 보랏빛 안개 속에 나부끼는 들판의 잡목 숲이며 맑은 시냇물 소리, 청아한 닭 울음소리며 아이들의 노래 소리 등, 평화롭고 태평스러운 하루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그런 평온한 생활에서 벗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속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무척이나 역겨워졌다.
엄격한 무사로서의 훈련을 견디어온 온 솔솔이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소녀다운 부드러운 감정에 처음으로 불을 붙인 것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었다. 그 발랄한 행동이며 아름다운 의상, 보기만 해도 즐거운 여러 가지 소지품, 그것들은 온 솔솔이에게 마치 꿈속의 사건만 같이 생각되었다.
"제발 부탁이어요, 철민 도련님, 제 오라버니 청솔에게 제 마음을 전해 싸움을 그만 두게 하겠어요."
온(溫) 솔솔이와 얼굴은 굳은 결의와 맑은 눈물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미스 온,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미스 온의 오빠 청솔이라는 분에게 잘 얘기해 줘요."
"정말 곤란한데……."
철민은 심각한 얼굴로 발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민은 온 솔솔이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만일 그 솔본국의 청솔이 제 여동생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이 온 솔솔이는 대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차피 이들은 남매 지간이 아닌가. 내키지 않더라도 제 오빠를 도울 게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온 솔솔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공연히 적의 힘을 증강시켜 주는 결과가 될 게 아닌가.
철민은 온 솔솔이의 말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 반면 속으로 냉정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온 솔솔이가 적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본전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싸울 의욕을 잃고 있다. 그리고 혹시 청솔이 제 여동생의 말을 받아드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이 편의 큰 이익이다.
"좋다! 데리고 간다."
온 솔솔이는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녕 고맙습니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그 어깨를 껴안았다.
"미스 온, 갔다가 꼭 다시 와야 되요. 응, 응……."
온 솔솔이는 철민의 여동생 손을 잡고 쓸쓸히 미소지었다.
"아가씨, 난 목숨을 걸고 오라버니를 타이르겠습니다."
"싫어요! 목숨을 걸고 라니……. 틀림없이 이리로 돌아와야 되요, 꼭……."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책상 서랍에서 자기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진주 목걸이를 꺼내, 그것을 온 솔솔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철민아, 철민아! 물건은 전부 준비됐어, 이제 떠나자!"
용재의 가만가만한 소리가 들렸다.
"음, 가자!"
철민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일어났다.
 
솔솔아, 용서해라!
 
새벽이다.
상쾌한 바람이 아득히 한강의 흐름을 내려다보는 완만한 구릉(丘陵)지대를 불며 지나간다. 그 잡목 숲으로 이어진 낮은 언덕 그늘에 철민, 용재, 종운, 땅벌랑의 네 사람은 웅크리고 있었다.
"철민아, 연료도 배터리도 문제없어."
"OK!"
"그럼 시작하자!"
용재가 스위치를 넣고 레버를 당겼다.
붕, 붕, 부르릉……
배기관(排氣管)에서 보랏빛 연기가 뿜어 나왔다.
"OK, OK!"
붕붕!
부르릉, 부르릉!
날개폭 2미터, 몸체 길이 1.5미터, 수냉식(水冷式) 1마력 짜리의 커다란 라디콘 모형 비행기다. 진홍빛으로 칠한 날개에 새하얀 동체가 멋지다. 멍키 스피릿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거야. 조종 전파는 40MHz, 20채널이나 쓸 수 있거든."
기계 만지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용재가 만든 꼭 진짜 같은 모형 비행기였다.
"카메라의 컨디션도 최고야."
"자, 봐!"
용재가 컨트롤 박스의 스위치를 찰칵 넣었다.
땅벌랑이 풀을 베어 널빤지를 깐 급조(急造) 활주로 위를 멍키 스피릿 호(號)는 날쌔게 달려나갔다. 그 동체 밑에 검은 카메라가 뚜렷이 눈에 띈다.
"솔본국 놈들, 설마 공중에서 사진 정찰을 할 줄은 까맣게 모르겠지."
이것이야말로 철민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무인 정찰기였다. 동체 밑에 부착한 35밀리 카메라의 셔터에서 필름의 되감기까지 모두 전파로 컨트롤할 수가 있다.
망원 렌즈에 적외선 필름까지 갖춰 놓았다.
멍키는 저공(低空)을 화살처럼 선회했다.
철민과 종운이 망원경을 눈에 댔다.
"우선 강 건너의 오른쪽 숲 속을 찍자. 거기가 수상해."
용재가 다이얼을 돌린다.
"좀더 오른쪽으로. 고도(고도)를 올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부웅!
모형 비행기는 마치 진짜 정찰기처럼 곧장 한강을 날아 넘어갔다.
우거진 잡목 숲을 스쳐 선회한다. 그러더니 확! 하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한층 더 속도를 내고 아침 바람을 갈랐다.
찰칵, 지익, 찰칵. 지익!
셔터가 눌리며 필름이 감겨진다.
 
바로 그 무렵.
한강의 흐름을 따라 있는 작은 절간 앞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라버니! 이제 이 이상의 싸움은 그만 두세요. 도저히 우리가 이겨 낼 수 없는 상대예요."
"무슨 소리냐, 닥쳐라! 솔솔아, 적의 수중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사로서의 수치인데, 이제 와서 다시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다니!"
온 솔솔이는 필사적이었다.
"오라버니! 철민 도령과 한 번만 만나 보세요. 만나서 여러 가지 상의를 해 보시면, 철민 도령은 워낙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나쁘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철민 도령이라고? 에잇, 이 바보 같은……."
"그야말로 즐거운 하루였어요. 철민 도령의 여동생도 저와 같은 솔솔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오라버니!"
"에이, 시끄럽다! 닥쳐라!"
"오라버니,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그건 정말 말할 수 없이 밝은 세상이었어요. 극락(極樂)이란 아마 그런 곳을 말하는 것일 거예요. 전 거기가 좋아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요."
"솔솔아!"
청솔은 갑자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사실 이 오라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네겐 즐거운 일,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다. 아버님 어머님이 모두 네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넌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 그러니 이 오라비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네 행복을 찾아 주어야겠지. 하지만 솔솔아, 난 솔본국 무사의 대장이다. 이 내 말에 목숨을 버리고 규율을 지켜온 부하들의 심정도 생각해 줘야 한다. 가령 우리들의 전통도 스러져 가는 불빛처럼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남아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 지켜 나아가야겠지. 솔솔아, 좋다, 너만이라도 그 곳으로 가거라. 오라비는 너를 비웃거나 나무라지 않겠다."
용맹무쌍한 솔본국의 무사 청솔도 한 껍질 벗겨 보면 제 여동생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온화한 오라버니였다.
"자, 부하들이 보면 난처하다. 그 철민에게로 가거라."
"오라버니!"
온 솔솔이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눈물은 솔솔이의 발치 땅 위를 적시며 떨어졌다.
그 때,
"대장! 기, 기괴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저, 저걸 보십시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청솔이 돌아다 본 눈앞에 우르르 달려온 것은 다섯 명의 철갑대와 그 두령 흐름별이었다.
"저게 뭐냐?"
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쪽 숲 위를 독수리처럼 날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저렇게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부웅!
희미한 폭음이 전해져 왔다.
"범선과 악귀가 화살을 쏘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새 같기도 한데……."
"설마! 으음! 저 부르짖음은 어쩐지 소름이 끼친다."
온 솔솔이는 청솔을 향해 소리쳤다.
"오라버니, 저것도 아마 철민 도령이 띄운 것일 거예요…… 이 이상 싸워보았자 소용없어요, 오라버니."
흐름별의 눈이 번쩍 빛났다.
"솔솔 아가씨, 내 부하가 말하더군요. 아가씨가 적의 두령 철민과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솔솔이는 흑! 숨을 들이켰다.
"정찰 나갔던 몇 사람이 보았다고 하니 아마 틀림이 없을 것 같소이다. 아가씨, 저 기괴한 새 같은 것은 뭐죠? 아가씨는 알고 계시겠지?"
"난 모르오!"
"아가씨, 여러 사람이 말하더군요. 아마 아가씨는 적과 내통하고 있는 듯하다고……."
"닥쳐라, 흐름별!"
"그렇다면 어떻게 아가씨는 적진에서 나오셨소? 그리고 또 조금 전 대장에게 이 이상 싸워도 소용없다는 말을 한 것은 무슨 뜻이오?"
흐름별은 독사 같은 눈초리로 청솔을 노려보았다.
"대장, 아군 내부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이 싸움도 끝장이오. 이제 우리 솔본국 무사도 다 썩어 빠진 것 같소이 다."
청솔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잘 것 없는 병졸의 말이라고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은 끝까지 캐내지 않으면 안되겠소, 대장!"
흐름별은 얼음장같이 싸늘한 의혹과 살기를 품고, 도리어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청솔에게 따졌다. 모여든 솔본국의 무사들도 꼼짝도 않고 청솔의 얼굴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청솔은 무엇엔가 잘못을 빌 듯이 눈을 감았다.
"용서해라, 솔솔아!"
일순, 청솔의 칼이 번개처럼 빛났다.
"앗!"
피할 틈도 없이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칼을 받고 솔솔이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라버니!"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더럭 땅에 엎어졌다.
"자, 보았겠지! 이것이 나 청솔의 진심이다!"
청솔은 일그러진 얼굴로 모여든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정면으로 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 눈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흐름별을 비롯하여 범선도 악귀도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발을 끌며 뒷걸음질을 쳤다.
"대장, 잘 알았습니다."
부하 중의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솔솔이가 적의 두령과 내통했다고 한 것은 누구냐! 앞으로 나와라!"
일동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앞으로 나오란 말이야!"
이대로는 수습되지 않을 듯한 무서운 예감이 여러 사람의 가슴에 부풀어올랐다.
"눈골(雪洞)의 문길이가……."
여러 사람은 웅성웅성 한 사람의 이름을 대었다.
그들의 시선은 뒷전에서 목을 움츠리고 있는 문길에게로 집중되었다.
"대장! 전 거짓말을 안 합니다. 분명히 이 눈으로…… 아앗!"
청솔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방금 솔솔이의 피를 묻힌 칼날이 일순 무지개를 그리며 문길의 몸을 꿰뚫었다.
"자, 이제 모두들 제 자리로 돌아가라!"
겁에 질려 새파래진 부하들은 재빨리 강변을 달려 흩어졌다.
"하하하, 대장,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흐름별은 짐짓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쑥 옆으로 외면하며 땅에다 침을 뱉었다.
"아, 실례했소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자, 제 부하들을 이끌고 절간 앞에서 사라졌다.
"음, 흐름별 놈, 이놈아!"
악귀가 칼을 뽑아 들고 흐름별의 뒤를 쫓으려 했다. 범선이 그것을 말렸다. 범선의 음성은 떨리고 쇳소리가 났다.
"그만 둬, 악귀! 모든 것은 이 싸움이 끝나고 나서 해결하자. 참아야 해."
청솔은 거칠게 칼을 꽂고 숲 밖으로 걸어나갔다.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솔솔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는 악귀와 범선이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 위를 철민들의 정찰기가 날개를 기울이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봐, 사진 아직 안 됐어?"
"잠깐만 기다려."
암실 속에서 종운의 소리가 들렸다. 마을 한 복판에 마련된, 철민들이 작전실(作戰室)이라고 부르는 오두막 집 속 한 모퉁이에 사진용 암실이 있었다. 지금 종운은 적진을 촬영해 온 사진 정찰기와 필름을 현상하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빨리 해!"
"실패하면 용서 없다!"
그 때, 암실 속에서 종운이 외쳤다.
"앗! 이거 야단났다."
철민과 용재는 가슴이 선뜻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종운아, 너 필름 현상을 잘못한 건 아니겠지?"
그 순간, 암실 문이 무서운 기세로 열렸다.
"이것 좀 봐, 철민아!"
아직도 물에 젖어 있는 필름을 치켜들고 여러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앗!"
한 장의 필름에는 손발을 내던지고 땅에 엎어져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두 사람의 무사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 쪽이 범선, 이쪽이 악귀구나. 그런데, 이 가운데 쓰러져 있는 건 누굴까?"
철민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래져 소리쳤다.
"이, 이건 온 솔솔이다 ! 그렇다면 청솔 놈, 제 여동생을 죽인 모양이야!"
철민은 비통한 표정으로 외쳤다.
"으음, 청솔 놈, 제 여동생을 죽이다니……."
철민의 눈에 그 크고 둥근 눈의 온 솔솔이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철민의 가슴은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아, 역시 그 놈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철민의 눈은 분노에 불탔다.
"음, 좋다! 전부 이리로 모여라!"
철민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는 이 고을 사또를 돕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싸움은 다르다. 목적은 뚜렷해졌다. 저 냉혹 무쌍한 청솔과 그 부하들을 한 놈 남김 없이 없애버리는 것이다.
'온(溫) 솔솔아! 잠시만 기다려 다오. 꼭 네 원수는 갚아 주마.'
철민은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을 삼키며 가슴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연(鳶)과 로켓
 
부웅, 부르르……
활짝 개인 하늘의 한 모퉁이에서 태평스러운 연 나는 소리가 들린다. 근처 마을 아이들이 띄우고 있는 것이겠지.
"…셋, 넷, 아니 또 올라오는데……."
땅벌랑이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굉장히 큰 연이군. 긴 꼬리를 달았어."
돌쇠랑이 미소지었다.
"앗!"
별안간 땅벌랑이 몸이 굳어져 푸른 하늘에 떠오른 연을 지켜보았다. 여섯 개의 커다란 연은 화살처럼 철민들이 진치고 있는 언덕 위를 향해 급강하해 왔다.
"두령? 저건 솔본국 무사들의 비술(秘術), 연공법(鳶攻法)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뭐라고? 솔본국 무사라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부웅, 부르르르……
연줄 울리는 소리가 괴조(怪鳥)의 울음소리처럼 울리며 머리 위로 엄습해 왔다.
피융! 파, 파!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왔다. 예리한 화살촉은 풀잎을 깎아내고 나뭇가지를 날리며 대지에 깊숙이 박혔다. 사또의 부하 몇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부웅……
급강하해 온 커다란 연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뒤이어 다음의 연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덮쳐 온다. 그 커다란 연에 솔본국 무사가 몸을 밧줄로 묶고 활을 당기고 있다.
피융! 팍, 팍!
철민과 용재, 땅벌랑은 모두 필사적으로 그 지상 공격의 화살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
쉬익!
불꽃을 끌며 불화살이 떨어져 왔다.
윙윙!
냇가의 풀밭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푸른 하늘에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치솟는다. 불을 당긴 화살은 계속 새로운 화염을 불러 일으켰다.
"두령, 이대로 있다가는 불길에 싸여 타 죽겠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몸을 피해도 상공의 연에서 내려다보면 금방 발견되어 버린다.
부웅!
승리를 자랑하듯 솔본국의 커다란 연은 토끼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웅대한 원을 그리며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철민 두령, 어떡하시겠소?"
사또가 뿌려 내리는 불똥을 나뭇가지로 떨어내며 달려왔다.
"음,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지. 이봐, 종운아! 그걸 준비해라."
철민은 소리쳤다.
"그걸? 철민아, 그건 마지막 결전을 위해 남겨 둔 비밀 무기가 아냐."
종운이 의아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그건 나도 알아. 허지만 이쯤 됐으니 어떡하니. 저 연을 공격하지 않으면 이 불바다에서 탈출할 수가 없으니……."
"좋아, 알았어!"
종운은 사또의 부하가 짊어지고 온 짐을 풀게 했다.
"빨리 조립해라."
연기와 불길 속에서 금방 기묘한 판대가 장치되었다.
그것은 원형의 기반 위에 자유롭게 상하로 각도를 바꿀 수가 있는 굵은 홈통 같은 발사기였다.
"됐다. 준비 완료!"
종운이 빛나는 눈으로 외쳤다.
"그럼, 종운아! 저 연을 모조리 쏘아 떨어뜨려라!"
종운은 길이 1미터 반 가량의 가느다란 수제(手製) 로켓을 발사기에 놓았다. 로켓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늘게 쪼갠 대나무와 양철을 교대로 겹쳐 놓고, 철사로 꽉 조여 맨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강력한 무연 화약(無煙火藥)이다. 이것이야말로 종운이 고심해서 고안한 대지(對地) 미사일이었다.
"그 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잘 될까?"
종운은 잠깐 불안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였다.
"문제없을 거야. 여기서라면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 마음놓고 해 봐."
용재와 남웅이 종운의 등을 탁 쳐주었다.
종운이가 그 후라고 한 것은, 한 1년쯤 전에 그가 학교 운동장에서 자기가 만든 로켓의 발사 실험을 하려다가 실패하여, 불을 뿜는 로켓이 운동장을 날아다녀 일대 소동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는 눈에 불이 나도록 야단을 맞고, 집에 가서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입에 신물이 나도록 혼이 나서, 그 후, 로켓의 실험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 민첩한 꼬마 종운이의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특기가, 실은 이 로켓 제작이었다.
종운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발사기를 회전시키며 허공의 한 모퉁이를 노려보았다.
 
"왔다!"
커다란 연 하나가 다시 바람을 가르며 엄습해 왔다.
"좋아, 발사!"
쉬익!
로켓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발사기를 뛰쳐 날았다. 굉장한 스피드로 허공으로 치솟는다.
타앙!
번쩍 섬광이 일었다. 커다란 연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대나무의 연살이며 두툼한 한지(韓紙), 실 따위가 후르륵 타면서 흩어져 날렸다. 연에 타고 있던 솔본국의 무사는 손발을 벌리고 인형처럼 풀밭으로 떨어져 갔다.
"야, 명중이다!"
"자, 다시 한 방 발사!"
쉬익!
쉬, 쉬익!
로켓 꼬리에서 뿜는 흰 연기가 잇따라 푸른 하늘을 수놓았다.
타앙, 타, 타앙!
커다란 연은 차례로 부서졌다. 순식간에 4개나 떨어져 버리고, 남은 2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듯, 멀리 날아갔다.
"자! 이 때다!"
사또의 부하들은 각기 작은 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타오르는 불길을 두드려 껐다. 철민네 일행은 연기를 뚫고 달렸다.
"저쪽에 보이는 솔밭에 진을 치자."
용재와 남웅, 종운, 땅벌랑을 비롯한 주문국 무사들의 일당도 등을 굽히고 달렸다.
탈출은 성공했다.
높직한 솔밭으로 진지를 옳기고 여러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두령, 이것으로 서전(緖戰)은 우선 피장파장입니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 외다."
땅벌랑이 이마의 땀을 씻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땅벌랑, 이 편의 실력을 보여 준 셈이 되어서 이 승부, 현재로선 6대 4로 우리가 불리하오. 로켓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은 정말 억울했소."
그 말을 듣자, 땅벌랑은 분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 두령! 우리 편 증원 부대가 왔습니다."
매미랑이 기쁜 듯이 외치며 달려왔다.
"오, 이제야 왔구나."
증원 부대를 부르러 갔던 땅벌랑의 젊은 부하 한 사람이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뒤에는 무장을 한 20명 가량의 무사들이 줄을 지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좋아, 그럼, 구리용, 네가 두령에게 보고를 드려라."
땅벌랑이 젊은 무사에게 말했다. 이 무사는 아직도 사관생도 정도의 신분이어서, 여태까지는 두령인 철민에게 직접 말을 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옛!"
젊은 구리용의 얼굴은 비로소 내린 직접 보고의 영광에 감격하여 벌겋게 상기되었다.
"땅벌님의 수하 구리용입니다. 증원 부대 20명을 데리고 방금 돌아왔습니다."
"음, 수고했다, 구리용! 피곤하겠지,"
"예, 고마우신 말씀……."
"땅벌랑, 어떻소, 구리용도 이제는 떳떳한 간부로 기용하시는 게……."
"예, 잘 알겠습니다. 구리용, 너도 들었지. 고마우신 두령의 말씀 명심해서 받아 들여라."
구리용은 땅 속으로 기어들 듯이 납짝 엎드렸다.
"그럼, 그 20명의 증원 부대는 우선 구리용에게 일임한다. 네가 그들의 대장이다. 알았지."
구리용은 그저 말없이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철민, 용재, 남웅, 종운, 그리고 땅벌랑, 수풀랑, 매미랑……, 이들이 전력(戰力)의 중심이었다. 게다가 사또 이하 14명의 무사들. 그리고 젊은 구리용과 그가 이끄는 20명의 증원 부대. 바야흐로 결전을 앞두고 당당한 세력이었다.
드디어 결전(決戰)
 
철민은 전 병력을 솔밭 언덕 뒤에 숨겼다. 원래 이 언덕을 견고한 진지로 하여 솔본국의 공격을 맞을 생각은 없었다.
"먼저 강을 건너 공격하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수비를 해서 이긴 예는 없단 말이야."
철민은 강 건너 맞은 편의 적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때,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보고 무엇인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던 용재가 얼굴을 들었다.
"철민아, 이것 좀 봐. 아까 사진 정찰기로 쩍은 사진 속에 이런 게 들어 있단 말이야."
"어디 좀 보자."
철민이 들여다보았다.
"강 이쪽이 약간 찍혀져 있는데, 이것 봐, 이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솔밭이야. 이 솔밭 둘레에 몇 군데 새 흙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곳이 있잖아. 이게 뭘까?"
과연 새 흙이 거기만 하얗게 찍혀 있었다.
"새 흙이라고요?"
땅벌랑이 문득 눈쌀을 찌푸렸다.
"자, 봐요, 땅벌랑!"
사진을 받아든 땅벌랑의 얼굴이 금방 긴장했다.
"이봐, 수풀, 매미, 나를 따라와!"
수풀랑과 매미랑도 땅벌랑의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두 사람이 다 낯빛이 달라졌다.
"구리용! 너는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를 지켜라. 진형은 물고기 비늘진(魚鱗陣), 안개법이 좋다."
"예!"
땅벌랑은 두 사람을 데리고 화살처럼 어디론가 달려갔다.
철민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지? 대체."
구리용은 재빨리 자기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여기 저기의 소나무 위로 올려 보냈다.
"구리용! 부하를 두 사람만 이리로 보내라!"
"예! 문창의 육손, 군들의 스라소니는 두령 앞으로 나서라."
그러자 당장 두 사람의 무사가 철민 앞에 나와 머리를 숙였다.
"잘 들어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당장 적진으로 숨어 들어가, 온(溫) 솔솔이의 시체를 빼앗아 와라. 놈들이 어디다 묻거나 내버리기 전에 찾아 내야 한다. 온 솔솔이는 우리 손으로 따뜻이 장사를 치러 주겠다."
철민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자, 가거라!"
문창의 육손, 군들의 스라소니의 두 사람은 소리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철민은 꼼짝도 하지 알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두령, 큰일났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땅벌랑이, 평소의 그의 태도와는 달리 황급하게 말했다. 뒤따라온 수풀랑과 매미랑의 얼굴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불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오, 도대체."
"두령, 이, 이 언덕은 적의 지하 진지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지하 진지라니?"
"그렇습니다. 그 사진에 찍혀 있던 새 흙이 있는 장소는 그 출입구 같습니다."
매미랑도 나서서 말했다.
"아마 솔본국 놈들은, 이 언덕의 땅 밑에다 지하 진지를 구축하고, 통로를 종횡으로 마련하여, 기회를 엿보아 일거에 쳐 나올 심산인가 봅니다."
"으음, 적이지만 훌륭한 작전이구나. 그러면, 아까의 화공(火攻)도 결국은 우리를 이리로 몰아 올리려는 목적이었군! 어쩐지 불이 붙지 않은 곳을 찾아와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어."
철민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태까지의 그들의 공격 방법과는 전혀 다른, 굉장히 치밀한 작전이었다.
아마 결전을 앞두고 적군도 필사적으로 저력(底力)을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두령, 지금 우리는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어떡하죠?"
"음, 큰일났군. 언덕의 둘레는 적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앞엔 한강이 흐르고 있으니, 꼼짝도 못하게 됐어."
용재의 눈도 핏발이 섰다.
"앗!"
별안간 땅벌랑이 땅에 엎드려 지면에 귀를 대었다. 그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마침내 지하 진지의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두령!"
수풀랑과 매미랑도 지면에 귀를 갔다 대었다.
"어, 들린다, 들려."
그 때, 소나무 위에서 구리용이 외쳤다.
"두령, 강 건너의 적군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고개를 길게 뽑고 살펴보니, 수많은 솔본국의 무사들이 검은 콩알처럼 강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왔구나, 솔본국 놈들! 좋다! 해가 질 때까지는 앞으로 4시간, 그 때까지 승부를 내 주마. 황혼의 한강수를 놈들의 피로 물들여 줄 테니, 두고 봐라."
철민의 음성이 드높이 울렸다.
그 소리를 받아, 땅벌랑도 어깨에 멘 칼을 쑥 뽑아 들었다.
"갑시다, 두령!"
 
"저것 좀 봐, 철민아!"
종운이 절규했다.
철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언덕 기슭은, 무성한 억새풀이 뒤덮고 있었다. 그 억새풀을 올려놓은 채, 갑자기 지표(地表)가 직경 2미터 가량 둥근 뚜껑처럼 불쑥 열렸다. 그 밑에 어두운 터널 입구가 보였다.
"앗!"
터널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뛰어 나왔다. 손에 든 긴칼이 번쩍 빛났다. 하나, 둘, 셋, ……, 여덟, 아홉, 열, ……. 마치 기계에서 튀어나오듯 터널에서 뛰쳐나오자, 칼을 휘두르며 언덕을 단숨에 달려 올라온다.
"앗, 저기도, 여기도……."
언덕을 에워싸듯 여섯 군데나 터널이 뚫렸다. 그 터널에서도 십여 명의 무사가 나오고 있다.
"음, 이것이야말로 유명한 솔본국의 지갑육방진(地甲六方陣)이구나."
매미랑이 중얼거렸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짐승을 산꼭대기로 몰아 올리는 사냥꾼들처럼, 재빨리 흩어지자 언덕의 중복을 빙 둘러쌌다. 강을 건너오는 청솔의 본대(本隊) 선봉은, 벌써 강가를 달려 화살처럼 이 언덕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 마주 싸우는 수밖에…… 이봐요, 사또! 당신네는 전력을 기울여 언덕의 중복을 포위한 적군과 싸우시오. 한쪽을 무너뜨려 강가로 나가야 하오. 알겠소?"
"예잇!"
사또도 이제는 필사적이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리용! 너는 부하들을 지휘하여 강을 건너오는 적을 맞아 싸워라. 저놈들은 적군의 주력이니까 힘이 들겠지만 잘 부탁한다."
"알았습니다."
그러자 용재가 걱정스러운 듯이 철민의 낯빛을 살폈다.
"우리는 어떡하지?"
"응, 청솔의 친위대(親衛隊)하고 한 판 하는 거야. 여러 사람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뭉쳐 있어야 돼. 땅벌랑도 알았겠죠?"
"잘 알았소이다."
"좋아!"
철민은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두어 번 흔들며 소리쳤다.
"사또! 구리용! 출발하시오."
"오!"
두 개의 집단은 짐승들처럼 함성을 지르며 구르듯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와아아!
우우우!
금방 치열한 전투가 벌러졌다. 언덕을 포위한 솔본국의 무사들은 수효가 많았으나, 언덕을 달려 내려오는 기세로 덤벼드는 것은 쉽사리 막아 낼 수가 없다. 그 태세로는 쌍방의 전력은 호각이었다. 칼싸움이 벌어지고, 순식간에 피바다가 이루어졌다. 사또의 부하들은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런 집단 전투에는 익숙지 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검술은 당장에라도 덤벼드는 적병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한 듯했지만, 교묘한 솔본국 특공대들의 전술 앞에는 당연히 쓰러뜨릴 수 있는 적까지도 놓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앗, 또 당했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라!"
종운이 땅을 구르며 소리쳤다.
피융! 팍, 팍!
언덕 위에 서 있는 일곱 사람 위에 화살이 우박처럼 날아왔다.
"아, 이거 야단났군. 돌파 당했는데……."
사또의 부하들이 막고 있던 방위진이 마침내 무너졌다.
10여 명의 솔본국 무사들이 곧장 달려 올라온다.
"종운아, 로켓탄으로 무찔러라!"
"오케이!"
종운은 재빨리 로켓탄을 발사기에 끼웠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벌써 20미터 부근까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불꽃같은 살기를 띄고 있다.
"발사!"
쉬익!
로켓탄은 번개처럼 솔본국 특공대를 향해 날아갔다.
콰, 콰앙!
눈부신 섬광이 일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특공대를 쓸어버렸다.
떨어져 나간 팔이 칼을 쥔 채 빙글빙글 돌며 기슭으로 날아갔다.
"종운아, 사또의 부대를 엄호 사격해 줘라."
사또의 부대는 차츰 밀리어 언덕 중복을 위로 위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을 추격하는 솔본국의 무사들은 언덕을 올라오는 검은 파도처럼 보였다.
쉬익! 콰앙!
로켓탄은 검은 연기를 끌며 계속 날아갔다. 검은 연기가 일고, 진홍빛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언덕 중복의 풀밭에 불이 붙어, 갈색의 연기가 무럭무럭 싸움터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방위선이 돌파 당해, 검은 옷의 솔본국 무사들이 메뚜기처럼 언덕의 사면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철민아, 로켓탄이 떨어졌어!"
종운이 분한 듯이 외쳤다.
"용재야, 멍키 스피릿 호로 특공(特攻)을 하자."
"알았어 시작이다."
용재는 가솔린이 든 연료통을, 카메라를 뗀 라디콘 정찰기 동체 밑에 붙들어 매었다. 그 연료통의 입을 늦추어 가솔린으로 적신 헝겊을 끼워 넣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부르릉……
멍키 동체 밑에서 길다란 한 줄기 불길을 끌며 날아갔다.
긴칼을 번득이며 달려 올라오는 솔본국 무사들을 향해 멍키 맹렬히 급강하했다.
콰앙!
순간, 환하게 불길이 일었다. 산산이 부서진 멍키의 기체는 불똥을 튕기며 솔본국의 특공대를 엄습했다.
아앗!
뜨, 뜨거!
귓전을 울리는 비명이 올랐다. 불기둥이 된 솔본국 무사들은 불을 끄려고 열중하여 지면을 굴렀다. 불길과 연기를 끌며 그들은 경주처럼 언덕의 사면을 기슭까지 굴러 내려갔다.
일순, 패색(敗色)이 짙어진 적군을 향해 구리용의 부대가 돌격한다. 사또의 일행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언덕의 한 걸음, 한 발자국을 에워싸고 몰아 떨어뜨리려는 자와 몰아 올리려는 자들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뒤엉켰다.
 
최후의 비책(秘策)
 
"땅벌랑, 지금 청솔은 어디에 있소?"
철민은 이제야말로 청솔을 찾아 승패를 결정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솔본국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때문에 아군은 차츰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얼마 후면 적군은 이 언덕으로 쳐 올라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청솔과 맞싸울 기회는 영영 없어질지도 모른다.
"두령, 청솔은 저기에……."
땅벌랑이 강 건너의 한 곳을 가리켰다. 은빛으로 빛나는 강 건너 대안(對岸)의 흰 모래밭 위에 작은 인형들처럼 10여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으음, 청솔 녀석, 저런 곳에서 전투 지휘를 하고 있었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과 아군의 격전을 냉정히 관찰하며 지휘를 하고 있는 청솔은 과연 전투에 익숙한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저대로 놓아 두어서는 청솔을 무찌를 수가 없겠는데."
철민은 입술을 악물었다. 솔본국 군대의 포위를 돌파하고, 또 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청솔이 있는 솔본국의 본진(本陣)까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가령, 이 포위망을 뚫는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는 도중에 양쪽 강기슭으로부터 화살의 세례를 받게 된다.
"아앗!"
"영차, 영차!"
갑자기 언덕 밑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정말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 흙먼지, 비명, 칼과 칼이 부딪치는 난투 소리를 뚫고, 커다란 문짝을 세운 듯한 것이 연이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밑에 조그만 수레바퀴를 달고 그 뒤에서 여러 명의 무사가 밀고 있다. 수백 장의 그것은 순식간에 담장 처럼 언덕의 중복을 빙 둘러쌌다.
"영차, 영차!"
그 담장 같은 것들은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싸움을 하고 있던 솔본국의 무사들은 재빨리 그 뒤에 가 숨고, 싸움터에는 구리용과 사또의 부하들만이 남아 있었다. 두께 10센티미터쯤 되는 견고한 나무로 만들어진 그 담장은, 구리용들의 필사적인 돌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영차, 영차! 영차!"
그것은 마치 롤러처럼 치올라온다.
철민의 일행은 완전히 그물 속에 갇힌 물고기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그물은 점점 좁혀 들어온다.
그 순간,
탕, 타다탕!
담장 뒤에서 일제히 조총 소리가 났다.
"앗, 위험하다. 엎드려라!"
납짝 땅 위에 엎드린 일곱 사람의 머리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피융, 피융!
파, 파팍! 팍!
뒤이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철민아, 이대로 있다가는 전멸하겠다. 빨리 무슨 수를 써야지……."
종운이 이빨을 딱딱 마주치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제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날개라도 있지 않는 한 이 포위망을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 2, 3분 후면, 이들에게는 틀림없이 죽음이 닥쳐 올 것이다.
"하다 못해 청솔 놈에게 생채기라도 내주고 싶었는데, 정 말 억울하외다."
땅벌랑의 눈에는 분한 나머지 눈물이 고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때, 철민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철민의 눈이 갑자기 번쩍 빛났다.
"그렇다! 이봐, 모두들 모여서 스크럼을 짜라!"
"스크럼을?"
"그래. 빨리 하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아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철민의 말대로 서로 팔짱을 끼어 굳게 스크럼을 짰다.,
"두령, 이러고 마지막 염불이라도 외는 겁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자, 내 말을 들어요. 땅벌랑과 무사들은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돼요. 알겠죠!"
철민은 용재와 두 사람의 친구들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주머니에서 타임머신을 꺼냈다. 용재들의 눈이 그것을 보았다.
"야, 있다, 있어. 저기……."
"한 놈 남김 없이 죽여 버려라!"
솔본국 돌격대들의 외침이 일곱 사람을 폭풍처럼 에워쌌다.
타, 타앙!
필살의 일제 사격 소리가 언덕 꼭대기를 뒤흔들었다. 그 총알이 일곱 사람의 몸을 벌집처럼 꿰뚫기 직전,
위잉!
철민의 손에서 타임머신이 희미한 소리를 내고 울렸다.
"자, 달려라!'
철민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는 현대의 한강변이었다. 스크럼을 짠 팔에 철민은 있는 힘을 다해 여러 사람을 끌며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한강에 가로놓인 비교적 한적한 제 3 한강교 위를 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철민은 다리를 다 건너자, 뚝 밑으로 달려 내려가, 강변의 모래를 파낸 뒤에 고인 커다란 물웅덩이를 소리를 내며 달렸다.
놀란 것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검은 옷의 옛 무사와 소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바람처럼 도로에서 내려와 강변으로 달려나왔기 때문이다.
'저게 뭘까?'
'뭘 하고 있는 거지?'
'영화 촬영이라도 하나?'
뚝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창에서도 이상하다는 듯이 몇 사람의 얼굴이 내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다. 주의해!"
"문제없어."
이제는 철민의 계획을 알게 된 용재며 남웅도 땅벌랑들의 팔을 꽉 끼고 달렸다. 무슨 영문인 줄 모르는 땅벌랑들도 이것이 두령의 극비의 병법이라고 생각하여, 철민의 말대로 더욱 눈을 꽉 감고 끌려갔다.
그 때, 마침 강변 모래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래 파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복판으로 일곱 사람이 물방울을 튕기며 달려 들어왔다.
"이봐, 이봐! 뭐야, 너희는? 남이 일하고 있는 데 들어오면 어떡해!"
"이 자식들이!"
작업은 당장 중단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런 욕설 속을 일곱 사람은 아무 소리도 없이 달려간다.
"음, 저 놈들을 잡아라!"
서너 명의 일꾼들이 우르르 쫓아왔다.
그러는데,
"아마, 이 근처였지, 청솔이 서 있던 곳이……."
철민은 발을 멈추고 여러 사람을 정지시켰다.
타임머신이 희미한 금속성을 내며 울렸다.
일곱 사람의 모습은 뒤쫓던 사람들의 눈앞에서 일순 연기처럼 사라졌다.
 
슬픈 승리!
 
강 건너의 언덕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칼싸움 소리가, 하얗게 빛나는 강물을 건너 들려오고 있었다. 그 쪽을 향해 냉정한 자세로 늘어서 있는 청솔과 그의 친위대를 향해, 철민의 일행은 바람처럼 돌격해 들어갔다.
"자, 돌격이다!"
"야앗!"
별안간 등뒤에서 나타난 철민들에게, 그토록 뛰어난 무사인 청솔도 심한 놀라움과 공포를 느끼고, 낯빛이 종잇장처럼 하얘졌다.
"아앗, 어느 틈에……."
"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여러분, 정신 차리시오!"
철민은 총알처럼 달려들어 솔본국 무사 한 사람으로부터 긴칼을 빼앗았다.
"앗!"
솔본국의 무사는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그 순간 철민의 몸은 껑충 뛰어 2미터나 도약했다.
"으윽!"
그 무사는 어깨를 잡고 모래밭 위에 쓰러졌다.
"여기, 땅벌이 왔다! 범선은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난투 속에서 땅벌랑의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한쪽에서는 악귀와 수풀랑이, 경천환과 매미랑이 불꽃을 튀기며 격돌했다.
"자, 모조리 해치워라!"
종운과 남웅, 용재가 한데 뭉쳐 흐름별이 이끄는 일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에잇!"
"야앗!"
"으음!"
피비린내 나는 절규가 교차되고 먼지가 일었다. 남웅이 휘두르는 자전거의 체인이 번쩍번쩍 먼지 속에서 빛났다.
"으음, 적이지만 정말 놀라운 술책이다. 저 언덕 위에서 벌벌 떨고 있더니, 어느 틈에 강을 건너왔는가."
청솔은 전혀 뜻밖인 이 철민의 급습에 무척 놀라고 분한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핫하하하, 어때, 놀랐지. 청솔! 이것이야말로 마술 같은 타임 슬립이다. ……네 놈은 인간도 아니다. 누이동생을 죽이다니. 동생의 진심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 자, 온 솔솔이의 원한을 내가 풀어 주겠다."
"음, 시끄럽다. 덤벼라!"
철컥! 두 사람의 칼이 쨍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쳤다.
"야앗!"
청솔은 철민의 공격을 피하자, 철민의 허리를 향해 무서운 일격을 가했다.
"앗!"
청솔의 맹렬한 일격을 가로막은 철민의 칼은 그 순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차!"
철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청솔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느긋이 웃었다.
"자, 간다! 받아라!"
청솔이 드높이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 때, 철민의 손이 슬그머니 주머니로 들어갔다.
'야앗!'
청솔의 칼은 번개처럼 철민의 정면에서 날아왔다. 그 밑으로 몸을 피하며 철민은 제비처럼 날쌔게 청솔의 품안으로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뒤엉키듯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일순,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돌부처처럼 굳어져 있었다. 20초, 30초, …….
"어떠냐, 청솔! 이것이 비술(秘術) 엘레키 묶음법이다."
철민이 외쳤다.
장검을 내려뜨린 청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으음?"
청솔은 신음하며 강변 모래밭에 털썩 쓰러졌다.
그 품에서 철민은 검은 상자를 꺼내었다.
"이 배터리는 500볼트나 된단 말이야."
그것은 발로 걷어차자, 퍽! 하고 새파란 섬광을 뿜었다. 타버린 껍질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로 교차된 순간, 철민은 고무 주머니에 넣은 배터리를 꺼내 스위치를 누른 다음, 청솔의 품속에 그것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철민은 주머니에서 고무 주머니를 꺼내 배터리를 집어넣었다.
"오, 두령 ? 여기에 계셨군요."
어디선가 문창의 육손과 군들의 스라소니, 두 사람이 달려왔다. 그 육손의 등에 온(溫) 솔솔이가 축 늘어져 업혀 있었다.
"아! 온 솔솔이?"
철민은 솔솔이를 모래밭 위에 안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제 싸움은 끝났어요."
철민의 팔에 안겨 온 솔솔이는 가늘게 눈을 떴다. 힘없는 눈동자가 철민의 얼굴을 잡았다.
"처, 철민 도령? 소, 솔솔 아가씨에게 아, 안부를…."
온 솔솔이의 손에는 철민의 집에서 나올 때, 철민의 여동생인 솔솔이에게서 받은 진주 목걸이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정신 차려요, 정신……."
"이, 이번에…… 다시 태어날 적에는…… 처, 철민 도령과 사이 좋게 지…… 지내겠어요."
온 솔솔이는 사라져 가는 환영(幻影)처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전투를 마친 용재며 땅벌랑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넓은 강변에 소용돌이 쳤다.
때마침, 서쪽 하늘에는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환하게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철민의 이마도, 철민의 품에 안긴 온 솔솔이의 얼굴도, 그 저녁 노을은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끝>
■ 작품 해설
 
만일 시간 여행(時間旅行) 있다면
 
강 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우연히 손에 넣은 타임머신을 써서 생각지도 못하던 옛날 세계로 날아가 당시의 무사들 싸움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 기술의 힘을 빌어 무사들을 상대로 대 활약을 펴는데…… 물론 우리는 이런 통쾌한 사건과 부닥칠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시간」이라는 것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언제나 일정한 스피드로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흐름에서 빠져 나와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껑충 뛰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인간은 예부터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던 꿈을 잇따라 가능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은 비행기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꿈은 잠수함으로 실현하였으며 달에 가고 싶다는 꿈도 바야흐로 실현 단계에 이르러서 단순한 공상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시간 속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일만은 할 수가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시간의 정체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좋은 것이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여행은 전혀 불가능한 공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 기록을 조사해 보면, 시간 여행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8세기말께, 프랑스에 상․레르망 백작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하여 루이 16세에게,
"지금 정치를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 당신이나 왕비, 그리고 왕족도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충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전해들은 당시의 프랑스 수상은 이것을 반역이라고 잘못 생각한 끝에, 경찰에 상․레르망 백작의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경찰은 밤늦게 백작의 집을 습격하여 개미 한 마리 빠져 나올 수 없게 철저히 포위한 다음 집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방에 있었을 백작과 집사(執事) 로제르의 모습이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이 두 사람은 네덜란드의 어떤 귀족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그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나왔는지는 끝내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레르망 백작은 네덜란드에 망명한 1784년에 죽고, 그 후 9년이 지난 1793년에는 백작이 예언한 대로 혁명이 일어나서, 왕과 왕비. 그리고 루이 왕조의 귀족들 거의 전부가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전에 이미 죽었을 백작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백작을 만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시녀였던 아데마르 부인이었습니다.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부인은 전에 백작이 죽었을 때 분명히 그 장례식에도 참석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는 부인에게 백작은,
"나는 유령이 아니오. 실은 시간 여행자인 것이오. 어떤 방법을 써서 고대 그리스며 중세(中世)에도 간 적이 있소. 일전에는 동양에까지 다녀왔소."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기록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901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두 분의 영국 여자 대학 선생님이 갑자기 19세기 식의 복장을 한 아름다운 귀부인과 신사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묘한 일도 다 있구나 하며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아무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래된 기록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두 선생님이 본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시종인 신하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즉 그 때, 두 선생님은 일종의 시간 여행을 하여 18세기의 과거 세계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그밖에도 시간 여행자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사람들의 이야기며, 시간 여행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시간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쩌면 타임머신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자연 현상으로서 일어나는 시간 여행 현상의 비밀도 해명될 지 모릅니다.
SF 속에 등장하는 타임 트래블(시간 여행)은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또 SF에서 타임머신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SF의 시조라고 하는 H. G. 웰즈입니다.
그는 그의「타임머신」이라는 소설에서, 처음으로 시간 여행 과학기술의 힘으로 한다는 생각을 SF 속에 도입 시 킨 것입니다.
그의 타임머신은 언뜻 보면 스쿠터 비슷한 것인데 맹렬한 회전운동으로 광속(光速)을 넘었을 때, 미래와 과거를 향해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래, SF에는 온갖 타임 트래블을 취급한 것이 등장하고, 또 여러 가지 타입의 타임머신이며 타임 트래블의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과거로 가는 것, 미래로 가는 것, 현재로 미래인이 찾아오는 것, 시간 여행함으로써 미래로부터 미래의 발명품을 훔쳐 밀수입하려는 것이며, 과거를 자기 멋대로 변경시키려고 하는 시간 범죄자를 취조하는 타임 패트롤을 다룬 것 등…… 시간 속을 자유자재로 이동함에 따라 일어나는 온갖 사건을 취급한 작품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 그 타임머신도 거대한 공 같은 구형(球型)애서 치과의사의 의자 같은 의자형, 앉은뱅이 저울처럼 위에 타고 가는 저울형, 자동차처럼 타는 자동차형 등 천차만별입니다.
좀더 대규모적인 것은 멀리 떨어진 타임머신 발전소로부터의 특수 전파로 어느 지구(地區) 전부를 미래나 과거로 보내버린다는 것도 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타임 트래블에서는 재미있는 작품이 마크 트웨인의 것이 있습니다.
「아더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19세기말의 미국의 어떤 젊은 공장장이 부하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순간에, 6세기의 영국에 군림하고 있던 아더왕의 궁전으로 날아가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타임 트래블인데, 과학자였던 그 청년은 19세기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그 무렵 대 마왕(大魔王)이라고 자칭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던 마술사 멀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멀린의 마술이 엉터리인데 비하여 그는 과학적입니다. 화약을 만들고 전화를 만들고 권총이며 기관총, 자전거를 만들어서 멀린을 무찌르고 아더왕의 주변에서 국민을 괴롭히고 있던 나쁜 정치가와 기사들을 무찌르며 대 활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SF는 사실 그 후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이 황혼의 타임머신도 그런 종류의 SF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애독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SF는 항상 과학보다 앞장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 문명의 앞날을 위해서도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니 만큼 여러분께서도 SF를 읽음으로써 과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그것을 실현시켜 훌륭한 우리 나라의 과학도가 되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구성상 어쩔 수 없이 옛날의 국가는 가상국(假想國)으로 했습니다. 「솔본국」과 「주문국」은 사실 작자의 머리 속에서 그려진 환상의 나라입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이 이것을 우리 나라의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어느 나라에 비교해 읽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자유에 속할 것입니다.
 
황혼의 타임머신
강 민 작
아이디어 회관 과학 문고
224p. 19cm (SF 세계 명작(한국편) 53>
 
인 쇄      1978년 4월 25일
발 행      1978년 6월 5일
작 자      강 민
오프셋 인쇄 삼정 인쇄소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서문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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