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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상징과 은유 - 남홍숙
2021년 05월 19일 20시 37분  조회:1437  추천:0  작성자: 강려

수필의 상징과 은유 - 남홍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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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은유로 쓰여 진 문학은 읽는 맛과 느껴지는 멋이 있다. 요리에도 독특한 향과 세련된 장식은 맛과 품위를 더해준다. 하여, 문학에서 상징과 은유는 요리에서 향신료와 데코레이션의 역할을 한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질서 속에서도 상징이 사라진다면 사회는 더 복잡하며 더 허술해지고 우리 가슴은 사막처럼 서걱거릴 것이다. 신호등 앞에서 멈춤을 상징하는 ‘빨간 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미소의 상징 ‘모나리자’가 자취를 감춘다고 생각해보라. 이렇듯 상징은 일시적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 졌더라도 우리에게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머니’라는 단 세 음절의 상징으로서 어머니의 품과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훈훈해진다.

세계 각국의 언어도 상징에 속한다. ‘개’라는 동물의 범주,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개별체도 모두 상징이다. 카프카의 잠자와 신화 속 이카루스는 허무의 바다로 추락한 낙오자의 상징이며 지킬과 하이드는 선과 악의 상징이다.

문학작품 속에서는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를 상징이라 한다. 역으로 은유는 상징에 원관념을 더한 작품이 된다. 은유에 의해서 “우리의 눈은 호수”가 된다. “모습은 천사”가 된다. “마음은 갈대”가 된다. 세상의 문법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논리의 축약을 은유를 통해서 당당히 드러낸다. 겨울의 바싹 마른 잎에서 여름 동안 담고 있던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 은유가 들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필이 문학으로서 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진부한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식상한 이미지, 구태한 습관적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원적이고 다각적이며 다층적인 생각으로 빈곤하지 않은 수필언어의 옷을 입혀야 한다. 수필작가는 현실에 놓여 진 리얼리티의 틈새를 포착하여 인간 삶의 본질을 찾아내고 우주와의 소통구조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한다. 보이는 것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어야 한다. 작가의 내면세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미감을 살려내야 한다. 작가의 경험, 독서를 토대로 한 상상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상징과 은유를 수필문학의 배필로 삼아야 한다.

 

 

2. 수필의 상징(symbol)

 

상징법의 종류로는 기호적, 제도적, 원형적, 문학적 상징이 있다.

기호적 상징은 부호와 도형, 기호로써 현상을 나타낸다. 십자가 - 기독교, 국기 - 나라, 빨간색 신호 - 멈춤, 초록색 십자가 - 병원 등은 기호적 상징이다.

제도적 상징은 반복되는 사회적 관심에 의해 생겨나서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상징이다. 고착화된 상징으로서 독창성이나 참신성이 없어 인습적 상징으로도 불린다. 비둘기 - 평화, 독수리 - 강경파, 소나무 - 절개, 매화 - 선각자로 표현된다.

원형적 상징은 문화, 지역의 한계를 넘어 전 인류의 보편성을 띤다. 수학의 기호, 과학의 기호가 이에 속한다. 또 상(上)의 개념으로서 날아오르는 새, 별, 산, 나무 등으로 표상하며 이들은 희망이나 선(善)을 상징한다. 하(下)의 개념으로는 지옥, 죽음으로서 무질서와 허무를 상징한다.

문학적 상징은 개인적 상징이라고도 하며 독창적이며 참신한 이미지로써 행간의 공명을 높여준다. 구체적 사물로 다른 범주의 의미를 암시, 환기하는 상징법이다. 이상, 위의 모든 상징법은 원관념이 생략되고 보조관념만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은유법과 다른 점이다.

본고에서는 수필 작품 속에 나타난 상징의 효용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하나의 상징으로 주제의 함축을 강하게 부각시킨 작품, 둘째, 한 작품 안에 다른 몇 개의 상징들을 배열하고 각각의 차이성을 이용하여 작품을 이어간 경우, 셋째, 작품 속 상징물이 다른 의미체로 변용된 경우, 넷째, 상징, 그 하나에서 다의성을 띠는 작품을 선해서 살펴본다.

 

 

1) 상징의 함축성

두 여학생과 남학생이 있다고 하자. 남학생 이름은 동이이며 여학생 이름은 청이이다. 그들의 본래 이름은 길동과 심청이다. 길동은 ‘길을 가는 아이’라는 의미이고 심청은 ‘마음이 맑다’는 의미로 함축된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흥하는 남자’이고 놀부는 ‘놀고먹는 남자’로, 이름 속에 함축적인 상징이 들어있다. 「흥부전」이라는 서사 속에 그들의 이미지를 유사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길을 건너려면 신호등에 달려있는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길을 건너겠다는 상징을 버튼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동안 그것을 몰라 한참을 신호등 앞에 서 있었던 아이러니를 범한 적이 있다. 이처럼 주관적 경향이 강한 상징성은 “어떤 때는 함축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해 손해나 봉변을 당하기도하고 어떤 때는 함축의미를 환히 알고서도 모르는 척 눈 감기도 한다. 인간의 멋과 맛이 함축의미 속에 있다.”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곳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을 찾아갔다.

C는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 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 피천득 「장미」 일부

 

 

위의 수필에서 보조관념 ‘장미’는 원관념 ‘소시민적 행복’을 상징한다. 작가는 행복이라는 원관념을 작품 뒤로 숨기고도 행복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환기하고 있다. 장미와 행복은 유사성이 없음에도, 콜라주기법으로 엮은 몇 개의 서사가 지닌 상징적 함축에 의하여 작품의 주제가 선명하게 요약된다.

작가가 “잠이 깨면 바라보려고 산 장미 일곱 송이”를 거리에서 사람들이 보고 여학생이 보고 지나간다. 그러다 길에서 만난 Y가 “언제나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작가는 그에게 행복의 상징인 장미 두 송이를 건넨다. 장미를 받은 Y도 행복해지고 그것을 건넨 작가도 행복해졌을 것이다.

이어서 장미 두 송이를 C라는 친구의 빈 하숙방에다 꽂아두고 나온다. 또, 애인을 만나러 가는 K에게 남은 장미 세 송이를 다 준다. 빈손이 된 작가 자신은 “장미 한 송이도 가져서도 안 되는 것 같아 서운하다”는 반어적 결론으로써 잔잔한 행복의 공명을 전해준다. 작가는 장미를 보조관념으로 하여, 행복의 이미지를 스스로 피어나게 한다.

 

 

2) 상징의 차이성

 

어느 날 청이는 동이를 찾아가 모호한 문제를 낸다. “너, 차이가 뭔지 알기나 해?” 그러자 동이는 5분 정도 심사숙고 한 후, 긴 설명을 시작했다. “소쉬르라는 기호학자가 있었어. 그는 ‘서로 다른 것’을 부정형(negation)에 의해서 정의한 사람이야. 누군가 소쉬르에게 ‘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개는 돼지가 아니다, 닭이 아니다, 소가 아니다, 말이 아니다 등의 부정의 연쇄로써 말이야. 다른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개가 되는 ‘개’의 값은 다른 어느 것과도 치환되거나 혼동 될 수 없는 ‘개’ 고유의 가치임을 그는 주장했어. 네가 묻는 차이란 나는 너가 아니기 때문에 나일 수 있다는 거, 소쉬르에 의하면 그것이 차이이지.”

그러자 청이는 “그럼 난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구나. 그래, 바로 그거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너는 너고 나는 나야” 하며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엄마는 나를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존재로 생각하셔” 한다. 사실 청이 어머니에게 청이는 공주보다 더 귀하고 오드리 헵번보다 아름다운 존재가 아닌가.

상품의 광고도 차이성을 이용한다. 같은 재료를 쓴 향수이지만 이름만을 달리 붙여서 서로 다른 상품인 것처럼 만든다. 수십 종류의 커피에 대한 광고도 바깥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소비자는 바로 이 피상적 차이를 산다. 그렇다면 동이는 청이에게 어떤 차이성을 주문할까.

 

 

수용하는 삶도 삶이기에 현실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흐르는 대로 떠밀려가는 대로 놓여진 상황에 순종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동안 바람막이로 존재해 준 남편, 어설픈 나를 어머니로 거듭나게 해준 1남 3녀의 자녀들, 미흡한 나를 문단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 주변에서 조언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

그러나 모든 것은 나를 나답게 주어진 길에 고개 숙이게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서의 나는 아니다.

나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익사직전의 생명에서 탈피하고 싶어 황금빛 생명선, 붉은 빛 구명조끼를 입고 있을 뿐이다. (중략) 나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전혜린이나 루 살로메 같은 여자가 되거나, 이름 없는 수녀나 비구니가 되는 것….

- 오차숙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 일부

 

 

오차숙의 이 작품에는 5갈래로 나누어진(상징의 차이성을 지닌) 인생행로가 등장한다. 익사직전의 생명으로서 붉은 색 구명조끼를 입고 자신만의 존재 찾기를 희구하는 작가 자신의 인생을 비롯하여 전혜린, 루 살로메, 비구니, 수녀의 인생행로이다. “인생행로”라는 원관념으로 상징된 이들 네 종류의 보조관념 군(群)은 작가가 희구하고 있는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조관념으로 채택한 전혜린, 루 살로메, 수녀, 비구니의 인생행로 또한 각각 이질성을 지닌다. 이들은 오차숙의 수필작품에 들어와 각각의 차이를 발생시키며 그들의 삶을 의미화 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아닌 네 갈래의 다른 삶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며 존재의 비상구인 구명조끼를 입고서 전혜린, 루 살로메, 비구니, 수녀적 삶의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간다. 그들의 삶을 거울로 삼아 오차숙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가는 것이다.

위에서 동이는 청이가 아닌 것처럼, 오차숙이 전혜린도, 루 살로메도, 수녀도, 비구니도 아니다. 서로의 인생행로가 전혀 다르다. 하여, 오차숙이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전혜린의 낯선 곳에서의 모험적인 생과 루 살로메의 지적인 사람들과의 교분을 희구하고 있음이 암시된다. 또, 수녀, 비구니가 상징하는 삶은 속물적 일상에서 탈출하여 혼자일 수 있는 곳에서 영성을 가꾸어 가길 원한다는 암시이다. 독자는 오차숙이 설정해놓은 이 5개의 다름 속에서 무한한 인생행로를 상상을 할 수 있다.

 

 

3) 상징의 변용성

 

어느 날 동이는 공원에서 청이를 만난다. 청이는 동이의 모자 쓴 모습을 보고 “멋있구나” 한다. 모자챙을 거꾸로 쓴 동이의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자를 자세히 보기위해서 동이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청이는 “이거 너희 학교 교모 아니야?” 한다. 사실 동이는 자기 학교를 상징하는 교모에 온갖 배지를 주렁주렁 매달아서 나들이 모자로 변용시켜 돌려쓰고 나온 것이다. 동이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청이는 그런 동이에게서 참신한 멋을 느꼈다. 그러나 청이는 동이의 변용한 모자가 상징하는, 깊은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았다.

다음 날 동이는 자신의 교모를 원 상태로 되돌려놓기에 바빴을 것이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에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은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 이양하 「나무」 일부

 

 

동이의 학교를 상징하는 교모가 나들이용으로 변용되듯이 이양하의 수필에서 ‘인생’을 상징하는 나무는 덕 있는 나무에서 고독한 나무로 변용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등가물로서 나무를 끌어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객관화하고 있다. 나무를 그저 바라보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자기화하고 있다. 나무가 지닌 독특한 이미지를 세밀히 묘사하여 한 인간과 긴밀하게 관련지음으로써 문학적 형상화를 하고 있다. 노드럽 프라이(N. Frye)는 “모든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상상력을 남달리 갖고 있는 사람이며 작가는 서사를 직접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들여 상상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바꾸어야한다”고 했다.

문학 장르에서 나무는 다양한 의미체가 되고 있다. 인격을 지닌 한 인간이 되거나 우주 자체로서 그 안의 물질을 생성, 소멸시키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양하의 「나무」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인생관을 나무의 덕성과 견인성에 비유하면서 자아성찰에 이르는 상징체로 표상된다. 나무를 다원적인 입장에서 관조하며 바라보던 작가는 자신의 삶의 좌표를 나무의 덕성과 견인주의에다 안치 시키고 있다. 인간보다 우위에 놓여 진 나무는 물, 흙,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불만족을 말하지 않는 덕스러운 인간으로 상징되다가, 안개, 구름,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에 잠기면서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며 고독을 즐기는” 인간으로 변용된다.

 

 

4) 상징의 다의성

 

동이라는 남학생이 청이라는 여학생에게 아르바이트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장미 한 다발을 선물한다. 그러자 청이는 “난 장미는 정말 싫어. 매번 볼 때마다 붉은 색 피가 떠오르거든” 했을 때 청이에게 장미는 ‘피’로 상징된다. 그러나 동이는 그것이 ‘온 리(only) 사랑’의 상징이었으리라. 동이는 마음속으로 ‘뉘앙스 제로인 바보맹추!’ 라며 청이를 차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뉘앙스와 멋을 가지고 출발하는 상징은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상호 해석이 달라진다. 이것이 상징의 다의성이다. 실제로 “시인 릴케가 장미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서 생손을 앓다가 (사실은 파상풍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장미에서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다의적인 상징성은 독자의 심층에 들어가 심원한 반응을 일으킨다.

 

 

사랑이 떠나는 소리는, 20층 건물이 파괴공법으로 순간에 무너지는 소리다. 그 굉음이 귀에 남아 밤이면 이명으로 찾아온다. 끝없는 울림 울림. (중략)

길 잃은 혼은 ‘빨간구두’를 신고 숲속을 헤매다 어두운 숲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같은 길에서만 맴돌다 지쳐 가시덤불 위에 넘어졌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두 손을 모으고 그곳에 있던 맑은 샘물로 타는 목을 축인다. 그때 멀리서 한줄기 빛이 보인다. 빛은 안개를 거두어 간다. 두려움에 떨던 나무의 일그러진 검은 그림자가, 지금은 반짝이는 초록색 잎들이다. 빛 안에서 모두가 하나다. 사랑도, 그리움도, 아픔까지도.

- 조재은 「언제나 새롭고 가장 오래된 주제」 일부

 

 

윤오영은『수필문학 입문』에서 “내가 원하는 수필은 시로 쓴 철학이 아니면 소설로 쓴 시다”라고 했다. 이는 함축적 언어로서의 긴 여운을 주는 수필을 의미한다. 상징의 묘는 윤오영이 희구하는 언어의 경제성 원리에도 부합되며 수준 높은 문학수필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위 인용한 조재은의「언제나 새롭고 가장 오래된 주제」는 윤오영이 지향하는 위 수필론에 부합되며 작품 전체가 은유로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적 수필로서, 행간에 현의 떨림 같은 울림판을 형성하고 있다.

위의 작품에서 “한줄기 빛”이라는 보조관념은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 ‘희망’, ‘아가페적 사랑’이기도 하며 그가 도달하고자하는 ‘절대이상’을 원관념으로 한다. 조재은이 언명한 “빛 안에서 모두가 하나다. 사랑도, 그리움도, 아픔까지도”에서 빛 대신 믿음, 희망, 아가페적 사랑, 절대이상을 대입시켜 볼 때, 상징의 다의성이 독자에게 얼마나 상상의 지평을 열어주고 창의적 세계로 안내하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다의성을 지닌 상징은 작가 자신이 직접 조립해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숨결에 따라 독자가 자의적으로 해독하여 의미를 재생산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행간에 침묵의 공간과 정서의 긴장감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긴 설명은 행간의 긴장을 빼앗아 갈 우려를 지니고 있는데 비해 위 조재은의 작품처럼 상징의 묘로 부려쓰는 문학작품은 보다 고도의 장력을 지닌 감동을 유발할 수 있게 된다. 독자들은 상징의 다의적 그물 안에서, 읽으면서 구성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어령은 어느 강단에서 “작가는 빵 속에 초원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호밀이 있음을 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는 작가의 심오한 영성을 중요시 함이다. 한 그루의 나무로써 생을 요약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밀한 영안으로 포착해내는 상징적 언어의 조합을, 수필 작가들은 끓임 없이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3. 수필의 은유(metaphor)

 

윤재천은「접목(接木)을 통한 발전의 모색」에서 “수필은 처음부터 잘못된 관념의 늪에 빠져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수필관은 창작성 - 예술성보다는 경험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라는 점에 더 관심을 보여왔다”고 했으며 또 「좋은 수필」에서 “수필은 함축의 묘가 있어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여야 한다”고 했다. 윤재천은 평소 그의 수필론에서 시적수필, 소설적 수필을 강조해 온 터라 이는 그가 수필의 문학성을 염원하고 있음이 감지되며 그 담론의 기저에는 은유적 표현의 중요성도 담겨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의 “지나치게 과감한 은유를 조심하라”고 한 경구도 염두에 두고서, 수필작가는 언어의 조탁에 쉼 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은유는 “익히 아는 어떤 체험에 의해서 잘 모르는 다른 체험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호체이다.” 이러한 은유는 연상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가령, “보도 기자는 상어다”라고 했을 때 상어의 냄새 맡고 물어뜯고 씹어대는 특성이 연상적 치환에 의해서 기자의 낌새채고 들춰내고 비판하는 은유적 변신을 하는 것이다. 기자와 상어의 비슷한 행동양태에 의하여 은유가 탄생된 경우이다. 이 두 기호는 연상법칙에 의해 연결된다.

“판이하게 서로 다른 것이 어떤 비슷한 특성에 근거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은유는 공상적이고 초현실적 효과를 사람의 마음에 일으킨다. 이 효과가 은유의 힘이다. 하지만 은유는 두 기호의 어떤 공통적 특성만을 돋보이게 할 뿐, 그 외의 다른 특성들은 밑보이게 하거나 숨긴다.” 예를 들면 기자가 매일 물어뜯고 씹어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감시의 기능도 하는 것이다.

은유에는 반드시 원관념(기자)과 보조관념(상어)이 함께 등장한다.

또, 은유에는 관습적 은유, 비관습적 은유가 있으며 관습적 은유에는 구조적, 지향적, 실체적 은유가 있다.

 

 

1) 관습적 은유

관습적 은유는 인간의 실제체험에서 연유된 것들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은유라는 특성으로 분류하기가 새삼스러울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에, 작가들은 창의적으로 형상화된 은유의 조립에 고심할 필요가 있다.

 

 

a. 실체적 은유

 

실체적 은유는 사건, 관념, 감정 등을 실체화 한다. 사랑, 인내, 정서, 안정, 평화, 행복 등을 실체적인 것들로 환치한다. “사랑을 찾는다” 할 때, 사랑을 마치 연장통에 든 도구이듯 찾는 방식으로 구체화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는 은유로 사랑을 정량화 한다. “사랑은 잔인하다”, “사랑을 찾아 나섰다”라는 표현은 모두 실체적 은유에 속한다.

찬송가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은유에서 날마다 나아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발은 항상 땅위에 붙어 있다.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한다. “은유는 분명히 우리의 관념을 날마다 더 고결하게 한다. 생각이 고결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땅은 점점 더 높은 곳만큼 소망스러운 곳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넷째사람이 셋째 사람 옆의 빈자리에 빛을 완전히 차단하며 매달려 올랐습니다.

서로서로 통성명을 합니다. 첫째 승객의 이름은 감사이고 둘째 승객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벽을 보고 앉은 승객의 명함은 이해이고 빛의 길을 완전히 차단한 넷째승객은 탐욕이라고 합니다. 요지가지 이름의 인간이 만나서 천태만사 인생사를 연출하는 게 인생행로지요.

철마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가속도는 날개가 되어 철마를 질주시킵니다. 시작은 미약하게 출발하지만 이내 칙칙칙 보이지 않는 미래로, 가야만 할 세상 속으로, 갈 수밖에 없는 내일로 질주합니다. 달리는 철마에 실린 몸이 흔들흔들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빛이 들어오는 쪽엔 의지할 벽이 없습니다. 탐욕이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가 싶더니 끝내 옆 사람인 이해조차 끌어 잡고 나락으로 튕겨지고 말았습니다.

- 김용옥 「빛」 일부

 

 

위 작품은 말미에서 “이 수필은 꿈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라 했다. 이로써 꿈을 수필작품으로 형상화한 그 자체로서도 실체적 은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수필에서는 “꿈이 현실”인 것이다. 또, 무의식을 그대로 수필로 전이시킨 작품으로서 현실의 욕망이 덧입혀진 가식의 덩어리가 제거되고 난 순수의 응결체로도 효력을 지닌다.

작가는 꿈의 모티브를 통해서 발현된 이미지를 “그대로” 은유의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인생행로’를 은유한 ‘철마’ 위에 감사, 사랑, 이해, 탐욕을 승객으로 태운다. 이는 추상어를 구체어로 환치하는 수법이다. 그리고 그 관념어들(추상어)은 생명체로서 통성명까지 하는 장면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첫째 승객의 이름은 감사이고 둘째 승객의 이름은 사랑이다. 독자는 김용옥이 설정해놓은 실체적 은유라는 이 창을 통해 사랑, 감사, 이해, 탐욕의 현상을 실제로 볼 수 있다.

그들이 탄 철마는 아슬아슬하다. 왜냐하면 그 철마는 벽이 없이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달리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탐욕이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가 싶더니” 끝내 이해까지 끌어안고 추락하게 만든 장면으로 탐욕의 본질적인 속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 작품에서 철마는 공간을 달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달린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이르러 “사랑이 곧 빛”이 됨을 언술하는 장치는 구성의 묘를 높여준다. 의식의 근원적 지향점을 실체적 은유를 통하여 표상하고 있다.

 

 

 

b. 지향적 은유

 

지향적 은유는 공간적 지향성을 유발하는데 이것은 실제적, 문화적 체험에서 기인한다. 한 가지 예로써 레이코프와 존슨은 “상-하 지향성 체험으로부터, ‘의식은 위쪽에 있다’라든가 ‘무의식은 아래쪽에 있다’ 같은 은유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밝은 빛은 위쪽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아래쪽(지하)에 있다는 체험으로부터 위쪽은 좋고 아래쪽은 나쁘다, 라는 은유가 생겨난다. 영은 상방성, 육은 하방성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지향적 은유는 물리적 체험의 세계와 관념적 체험의 세계를 연결해주지만, 이 두 다른 세계의 독립성을 전제하고 있다. 저 위쪽의 관념적 천국을 물리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은유는 무의미해진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늙은 가로등’이란 작품이 있다. 밤이면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마가 넓은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된 작품이다. 가로등은 그 고독한 청년의 허연 이마에 불빛의 쓸쓸한 키스와 쓸쓸한 축복을 부어주었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젊은 청년의 이마에 비쳐주는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의 키스를 내 이마 위에도 느꼈다. 다만 내게는 그것이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이기보다 오히려 신神의 너그러운 축복이요, 내 삶이 내게 비쳐주는 빛과 같았다.

나는 길고 아득한 인생 여로의 대목마다 가로등이 켜 있기를 빌었다. 참으로 가로등을 멀리서 바라볼 때, 그것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은은히 비치는 별빛이다. 나는 그것을 목표로 어둔 길을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가게 된다.

- 박목월의 「가로등」 일부

 

 

가로등을 원관념으로 한 위 작품은 상방향적인 보조관념을 교체하면서 작가의 소망을 표상하고 있다. 가로등은 신의 축복 → 별빛 → 희망이라는 관념적 세계와 등가성을 가지고 상향적인 공간성을 획득하고 있다. 가로등과 신의 축복, 가로등과 별빛, 가로등과 희망, 그 구심점에는 작가의 소망이 있기에 이와 같은 보조관념이 탄생한다. 인간의 소망은 상방향(위)쪽에 있음을 인식하는 지향적 은유로써 작가의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로등은 신의 축복이며, 가로등은 별빛이고, 가로등은 희망으로 은유되고 있다.

위쪽에서 빛을 비쳐주는 가로등의 현상, 우리가 올려다보는 상방향으로서의 수직적 공간, 그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종국에는 ‘희망’으로 은유된 것이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수직의 다리로서의 가로등이 작가의 연상적 치환에 의해 신의 축복, 별빛, 희망이라는 지향적 은유를 탄생시키고 있다.

 

 

c. 구조적 은유

구조적 은유는 부분, 단계, 목적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쓰인다. “인생은 전쟁이다”라고 했을 때 그에게 인생은 치열하고 야비한 싸움터가 된다. 그러다 그가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인생은 연극”이거나 “인생은 천국”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은유는 자기 달성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은유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 판도가 달라진다.”

 

 

원이 순환을 반복한다. 직선이던 팔과 줄이 둥근 원으로 창조되는 줄넘기에 나도 마음의 발을 들여놓고 푹 빠져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순수의 미학이다. 아이들과 줄이 서로에게 몰입하여 지구를 돌리는 동심의 BE - 존재로써 아름다움.

원은 원으로 있어라.

무엇이 환이 될까. 원이 평면이라면 환은 부피의 이미지다. 손가락 두 개로 그려지는 고리環는 단순한 원이 아니라 돈을 지칭한다. 톱니바퀴처럼 세상과 맞물려 세상을 돌리고 자신도 세상 따라 도는 돈.

- 남홍숙 「원 VS 환」 일부

 

 

위의 글은 ‘원’이라는 원관념과 ‘환’이라는 원관념이 서로 대척관계에 놓여있다. 원의 보조관념은 동심의 "BE - 존재로써 아름다움"으로, 환의 보조관념은 돈의 세계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족쇄의 HAVE - 소유욕에 눈 먼 만국 공용어”로서, 세계를 원 vs 환의 이중 구조로 분류해놓고 있다. 원은 줄넘기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며, 환은 돈 넘기에 빠져있는 어른들의 세상이다. 원은 “동심의 BE- 존재로써 아름다움”으로 은유되고, 환은 “족쇄의 HAVE - 소유욕에 눈 먼 만국 공용어”로 은유된다.

이로써 이 수필이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한 부분을 표상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원 vs 환」이라는 게임과도 같은 제목은 공평한 출발을 위함이고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드러냄이다. 결국 이 작품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인생은 놀이”이고, 어른들에게 “인생은 돈”으로 은유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물신화 된 사회 구조의 단면을 구조적 은유로 나타내고 있다.

 

 

2) 비관습적 은유

비관습적 은유는 공상과 창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유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일상이라는 갇혀있는 틀거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법이다. 그러나 관습적 은유와 비관습적 은유를 구분하는 확실한 선은 없다. 왜냐하면 은유는 문화적 체험에 의해서 생성되기 때문에 한 문화의 관습적 은유가 다른 문화 입장에서는 비관습적 은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모든 이론은 은유이다. 은유가 지니는 표상성의 약점이나 허점에도 불구하고 은유에 의하지 않고는 문학작품이나 문학이론을 만들 다른 방도가 없다. 은유의 허점을 어느 정도 메우고 그것의 약점을 보강하는 수단은 담론이다. 은유로 축조된 세계를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한번 더 살아야한다면 거품으로 태어나고 싶다. 왜 하필 거품이야 하고 묻는다면, 거품이 어때서? 라고 말하겠다.

일생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듯, 내가 거품이라면 유년기는 ‘치약거품’으로 자라겠다.

누군가 튜브에서 치약을 짜 입에 문다. 아래위로 칫솔질을 한다, 거품이 하얗게 일기 시작한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부푸는 거품은 입 속의 치아를 훑어보지만 정말 닿고 싶은 곳이 있다. 사람들의 하얀 미소와 깨끗한 마음에 닿고 싶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중략)

청년기는 ‘맥주거품’으로 지내겠다.

학구열로 불타는 나이에 알코올로 세월을 보낼 거냐고 놀라겠지만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상처받기 쉽고, 흔들리는 자아로 방황 속에서 길을 헤맬 때, 내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절실하다면 맥주거품으로 나설 일이다. 둘 셋이나 여럿이 모여 축배의 잔을 들며 생의 절정을 향해 결속하는 그들 자리에 끼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중략) 장년기는 ‘비누거품’으로 보내겠다.

- 김희수 「거품이 되고 싶다」 일부

 

 

다시 태어난다면 이양하는 나무로 환생하고 싶다고 했으며 김희수는 거품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거품은 사치이거나 진실의 부풀림으로 은유된다. 그러나 누군가 문학작품에서 “거품은 사치다”라는 은유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식상한 은유,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은유다.

위의 작품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의 이상향을 얼핏 생각하면 누구나 꺼릴 수 있는 허상적인 거품으로 은유하고 있다. 비관습적 은유로서 진부한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하고 틀에 박혀있던 시각의 한계를 파격적으로 끌고 간다.

김희수가 열거한 거품은 세대에 따라 종류를 달리한다. 유년기 - 치약거품, 청년기 - 맥주거품, 장년기 - 비누거품이다. 기발한 이 은유의 소재가, 단순한 거품이라고 해서 외출복에 브로치를 바꿔 단 것처럼 가벼운 소품으로만 간주하면 그것은 독서의 결함이다. 거품이라는 다소 가벼운듯한 제재이지만 그 속에는 그의 자아를 동화시키고 자아를 투사하기 위한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 거품은 존재의 본질을 천착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참신한 소재로써 생성되는 창의적 기법의 은유는 문학적 미감을 살려준다.

유년기에는 사람들의 하얀 미소와 깨끗한 마음에 닿고 싶어 치약거품으로, 청년기에는 축배의 잔을 들고 싶어 맥주거품으로, 장년기에는 젖꼭지처럼 또렷한 기억한 토막 건져 올리고 싶어 비누거품으로 환생하길 희구하는 그 발상이 얼마나 참신한가. 이는 비관습적 은유의 동력에서 기인한다.

 

 

4. 로그아웃

 

“피카소에게 있어 예술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라 했을 때 피카소의 예술은 슬픔과 고통의 은유이자 상징이 된다. 그러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보고 평론가 판 라레아는 “이 화폭 속에서 말(馬)은 스페인 국가주의를 대표하고, 수소는 인민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해석을 했을 때, 화가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해석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 평론가에게 ‘이 수소는 수소이고, 이 말은 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신분석가 라캉은 “의미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라고 했다.

본고에서 몇 작가의 작품을 추출하여 은유를 말하고 상징을 내세워 보았지만 이 원고 역시 인용의 표본이 된 원작자나 몇 독자 앞에서 실소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의미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소를 하는 그 작가의 인상조차도 수필문학의 비관습적 은유이거나 다의적인 상징으로 차용한다면 어쩌겠는가. 필자의 논을 거부하는 그 작가가 이번에는 조소를 머금을 것인가.

하지만 수필문학의 상징과 은유는 일상의 빵과 물이기도 한 것을,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문학적 형상화로써, 상징과 은유로써 부정해 보겠는가.

 

 

참고서적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4. 3.

박양근, 『좋은 수필 창작론』, 수필과비평사, 2004. 4.

윤오영, 『수필문학 입문』, 태학사, 2001. 5.

윤재천, 『윤재천 문학 전집 1』, 문학관, 2007. 4.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주)월간미술, 2000. 7.

한상렬, 『디지털시대, 수필문학의 패러다임』, 신아출판사, 2003. 5.

이양하, 『나무』, 인터넷 검색창

피천득, 『인연』, 샘터, 2001. 10.

김용옥, 『생각 한 잔 드시지요』, 수필과비평사, 2007. 9.

김희수, 『한순간 그리고 오랫동안』, 문학관, 2006. 6.

남홍숙, 『물빛』, 문학관, 2006. 12.

오차숙, 『장르를 뛰어넘어』, 문학관, 2007. 12.

조재은, 『새롭고 오래된 주제』, 문학관, 2007. 12.

계간수필 29호, 박목월, 「가로등」

수필시대 13호, 이정심, 「수필에서 상징성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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