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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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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 모음 2
2022년 10월 10일 11시 23분  조회:506  추천:0  작성자: 강려
김지향 시 모음  2

아침 뜰
아침상
술렁임
잔디밭의 아이들
아이들과 장미
푸른 땅을 걷는다
인형의 방
빨 래
사는 재미
머리를 감는다
아침 햇빛
호숫가에서
바람아
바람이 돌아온다
눈사람
그 물
빗속의 바람
흙바람
추억 한 잔
겨울나무
안개 속에서
눈 뜨는 잎사귀
햇빛 속에서
단풍나무 아래서
움직임
일점무구一點無垢
비 는
승 화
추 수
안강安康
물이 되는 꿈
외롭지 않게
내일에게 주는 안부
계석리癸石里에게

가을잎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발이 달린 사랑
사랑 만들기 (3)
사랑 만들기 (4)
사랑 만들기 (5)
사랑 만들기 (6)
사랑 만들기 (18)
사랑 만들기 (19)
사랑 만들기 (49)
사랑 만들기 (50)
사랑 연주 演奏
풀물의 그녀
연가풍戀歌風으로
봄 편지
봄비 속에서
초록빛 아이들

~~~~~~~~~~~~~~~~~~~~~~~~~~~~~~~~~~~~~~~

1부 아침뜰

~~~~~~~~~~~~~~~~~~~~~~~~~~~~~~~~~~~~~~~~

아침 뜰


뜰이 일어앉는다
바람이 눈 뜨는
탱자나무 가지가 가볍게 홰를 친다
어제 가을이 퇴원한 아침 뜰에는
다시 먼지들이 부시시 걸어나오고
떨어져 누운 마지막 나뭇잎이
서리를 털고 있다
바람을 깔고 앉아
두 아이는 황금빛 동화를 풀어논
황금빛 그림책에 황금햇살 몇 개를
마저 잡아 넣고 있다
우유컵을 들고 망설이는 내 등 뒤로
교과서 같은 아버지의 옆얼굴이 드러난다
아침 신문이 펄럭이는 뜰 밖에는
다시 쓰러질 거짓말들이 꼬리를 치고
어제 저녁 퇴원한 가을의 잔해들을
방금 첫차로 내린 겨울 손이
쓸고 있다

~~~~~~~~~~~~~~~~~~~~~~~~~~~~~~~~~~~~

아침상


된장 찌개 사이 사이
신선한 바람의 김을 뿜는 쑥국 사이
초롱한 말들이 뛰어 다니는 동화 속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어디서나 덜미잡는 시간의 손아귀와
생활의 올가미에 갇힌 마음을
이 아침
꿰뚫는 한 줄기 빛보라
바깥 세상의 오뇌를
바깥 생활의 인종을
놓치게 하는
참 맛의 한 때를
김을 뿜는 쑥국 사이 사이
아침 상에 얹어놓은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참!

~~~~~~~~~~~~~~~~~~~~~~~~~~~~~

술렁임


뜰 밖에 잠 깬 한 그루 실버들
군살을 깨물고 새 손이
새 눈을 열어
소금에 절여진 세상 바다를
살펴보고 있다
기척을 기다리는 외딴 폐강에서도
그 겨울 횡포에 풀 죽은 팔을
맥 짚어보면서
송어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서두르는 중이다
하늘엔 한 줄 눈붉은 실구름이
앞산 이마를 가르고
들새 몇 쌍이 새 씨를 물고
물 뿌린 햇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단가출한 복술강아지
등에 실려 두 돌 지난 개구장이
소금끼 먹어 술렁이는
세상 소식을 듣고 있다
톱질소리가 일어서는 아침뜰 밖엔
조용한 침잠은 없다

~~~~~~~~~~~~~~~~~~~~~~~~~~~~~~~~~~~~~~~~

잔디밭의 아이들


풀 기둥을 열고 보는 눈이 큰 잔디밭에
구슬로 뛰어가는 맨발의 아이들이
초록실을 뱉아놓은 풀바람을 몰아타고
파릇파릇 파도가 되어 빈 땅을 채운다
구름의 문을 열고
한 줄기 비가 된 내가
깡마른 육교 위를 지나갈 때
그 때
빗속을 뛰어드는 저 아이들을 곁눈질하며
어른들은 화려한 거짓말을 받쳐 쓰고
비를 피해 달아났지
달아나다 다시 어둠을 앞세우고
수천 마리 메뚜기떼를 몰아오는
캄캄한 거짓말이 되었지
어른들의 캄캄한 거짓말 속에서
수천 번
헝클어지던 내가 오늘은
저 파도가 일어나는
초록눈의 잔디밭에 파릇파릇
맨발의 아이들이 되고 있다

~~~~~~~~~~~~~~~~~~~~~~~~~~~~~~~~~~~

아이들과 장미


아이들이 나를 잡고 이따금
장미밭을 간다
장미는 불을 켠 얼굴을 일으키고
멈추어 선 내 눈 속을
아이들은 소리를 날리며
꽃의 미끄름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소리는 내 살의 바람을 빨아내며
불바다를 가로질러 내 귀를 때리고
그리고 이미 귀의 절반이 떨어진
풍경을 깨고
달아나 하늘이 되어버린다
하늘에서 물음표가 되어
다시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머리 위의 물음표
장미는 몸의 불을 풀어
아이들 눈을 뚫고 들어가
아이들 키만한 선생님이 된다
나는 장미밭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불꽃 속에서
타는 하늘이 되어버린다

~~~~~~~~~~~~~~~~~~~~~~~~~~~~~~~~~~~~~~

푸른 땅을 걷는다


푸른 물이 든 푸른 땅을 걷는다
나의 실눈으로 들어오는
숲들의 잎과 잎이
안개도 구름도 걷힌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안개도 구름도 없는 얼굴 아래로
우리집 아이들이
솔방울처럼 굴러간다
고궁의 5월은
땅도 아이들도 7할이 들빛이다
세상의 시끄러움이 들여다 보지 못하고
매연도 먼지도 따라와 갇히지 못하는
아이들의 눈 속에
커다란 바다를 물고 애기 바람이 달려온다
바람이 조그맣게 담겨있는 바다 속엔
내 유년의 얼굴이 돋아나
자꾸자꾸 아이들 얼굴에 가 겹쳐 눕는다
아이들 입 속에서 새소리가 뛰어나와
내 해묵은 머리 속 체증을 씻어 내린다
아, 하고 오랜만에 질러보는 함성
어느새 나도 푸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인형의 방


작은 꽃들이 놀고 있는
작은 방
탁자 위에는
두 세치 키의 유리곽들이 뱅글뱅글
제 그늘 밑으로 돌고 있었다
키다리 난장이 인형 남매가
살아있는 머리채로
유리곽에 엉겨붙은 어둠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머리칼 속에서
생귤내가 나는 생빛 몇 줌을 집어낸 나는
눈 코 입 귀가 한판에 뚫려
열린 내 정신의 문으로
참 삶의 맛을
불어넣고 있었다

방의 꺼풀을 벗기고
팔팔 뛰는 금붕어들이
물의 오색 무늬를 건져들고 와서
어둠 밖으로 튕겨져 나온
내 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너머 공터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의 팔팔한 재잘거림
저 살아있는 바람소리 속에서
피가 뛰는 생명을 뽑아든 나는
뭇 신경의 문을 열고
참 사는 맛을
잡아넣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내다보는
작은 방
한 구석에 크레용을 들고 쪼그리고 있는
얼굴 맑은 나비들이
머뭇거리던 어둠이 물러간 헌 벽을
연초록으로 깁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새 시대를 이고 나와
숨어버린 헌 시대의 방석에 앉아있는
내 풍금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방 청소를 끝낸 인형 남매가
열어놓은 낯익은 구멍으로
유년의 문을 열고
참 삶의 맛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

빨 래


방바닥에 눌어 붙어
집안의 열기를 삭히고 있는
저 장님의 홍역은
담 너머 주인을 찾아 달래어 보낸다
벽장 속 장롱 벽에 발려서
집안의 웃음을 훔쳐가는
귀머거리 백일해는
산 너머 온 샛바람의 푸른 칼로
한 귀 한 귀 뜯어내 보낸다
아이들 겉옷 속에 들어와
집안의 생기를 뭉개고 있는
벙어리 감기는
저 햇빛의 눈살로 찔러
물살 빠른 강물에 풀어 보낸다
이 집나간 삼대 맹아가
또 다시 돌아올까 겁이 난
나는 밤낮이 다른 물가에 앉아
한눈도 팔지않고
빨래를 한다

~~~~~~~~~~~~~~~~~~~~~~~~~~~~~~~~~~~~~

사는 재미


내가 사는 단층집
안마당 한 귀퉁이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반들반들
해꼬리와 어울려 앉아 있었다
그 장독 속에
손을 넣어 공통성을 뽑아내는
나는
간장.고추장.열무김치.파김치 쪽으로
후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세상 번뇌를 젖히고
하얀 속살 일부를 드러낸 접시들이
잇달아 손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끓고 있는
남비 속의 도.레.미
아이들의 장난감 피아노 음계와
마주치는 쪽으로
청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단층집
대청 위에 앉아 오색 물감을 짓이기고 있는
작고 큰 키의 꽃분들이
짝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그 속에 눈을 넣어
나는
집의 평화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빛 속에 나와 인사하는
벽걸이의 순수와 만나는 쪽으로
시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

머리를 감는다


모가 닳은 마당 가운데
땅 뿌리를 모아 잡고 있는
풀의자 그 위에
지난 겨울 죽은 향나무 그늘과
새로 이사 온 유자나무 그늘이
의좋게 앉아 하늘의 깊이를 재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두 번이나
다녀간 들비둘기 두 마리도
종종걸음으로 찾아들어
새로 난 새풀을 쪼으고 있다
촛불을 켜 든 일곱빛 햇살과
일곱빛 무지개가 내려와
마당 빈 칸을 채우고 있다
이 충만한 마당의 생기가
일제히 푸른 하늘 깊은 데로 투신하는 날
아이들은 새옷을 입혀
짙푸른 풀잎상에 마주 앉히고
나는 풀내나는 얼음물로
머리를 감는다

~~~~~~~~~~~~~~~~~~~~~~~~~~~~~~~~~~~~~~~~~~~~

아침 햇빛


비늘을 털고 살아나는 말들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와 앉는다
창 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간밤에 싸움을 걸던 검은 오뇌의 줄기,
쇠방울로 등솔기를 때리며 재빨리
머리 속에 뿌리 내린 그 어둔 줄기를
뽑아내 버리고 나는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에는 선잠 깨어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 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있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세상 깊이를 재고 있는 그대들의
처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져 아침 햇빛 속에
나부끼고 있다

~~~~~~~~~~~~~~~~~~~~~~~~~~~~~~~~~~~~~~

호숫가에서


집 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알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 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앞의 거울알은
나의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마음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늘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

바람아


저무는 세종로 바닥에서
꽃들은 가루로 뭉게져버린다
사람의 가슴에 일어선 비둘기도
죽어 먼지가 되어버린다
구름 밖으로 달아나는 풍선 꼬리를 따라
천 개의 눈이 달리는
아이들의 다리 사이로 어지럽게 내왕하는
매연, 소음, 의사당의 아우성,
높이뛰기 경주에 열을 낸 물가고
그 저울대의 발치에서
이제 실티만한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아
그대 희고 날카로운 손바닥으로
우리 꽃을 가루내고 우리 정신을 축내는
저 삼불공해三不公害
그 악의 혹을 처내어 보라
그대 전신의 능력으로
뿌리까지 내려가서
일일이 간추려 쓸어내고
한 번만 다시 살아날
참 사랑의 참 꽃을 피게 해 보라
바람아

~~~~~~~~~~~~~~~~~~~~~~~~~~~~~~~~~~~~~~~~~~~~~~~~~

바람이 돌아온다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 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눈사람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

그 물


내 손톱 속에서 빛나는 수만 개의
그물이 나와
수만 개의 금빛 손가락을 펴고
얼굴이 터져 떨어지는 해를 받친다
만리 밖을 달려나가 땅 끝을 다 휘젓고
발병이 나서 고개를 떨구며 돌아와
쏟아지는 바람
바람의 조각 수염이 내 그물에 와서 걸린다
흐름이 끝난 시간을 붙들어매고
사방에 펴 걸었던 치마폭을 걷어
끝난 난간에 뛰어내리는 하늘을
땅의 끝난 데에 나와 기다리던
그물이 받는다
모든 깨진 얼굴은 그물로 꿰매고
끝난 모든 것은 서로 붙잡아 그물로 잇는다
세상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술렁임을 누르고 천천히 가라앉아 간다

~~~~~~~~~~~~~~~~~~~~~~~~~~~~~~~~~~~~~~~~~~~~~~~~~~

빗속의 바람


그 여자의
가슴의 빈터에서 비가 내리고
그 여자의
속눈썹이 잰걸음질 친다
비가 일으켜 세운 그 여자의
머리칼이 어둠 속으로 넘어지고
어둠 속을 걷는 침묵의 발소리 곁으로
그 여자의
사랑이 사라지는 뒷모습이 깔린다
사랑의 뒷모습에 묻어있는
하늘을 비우는 비소리
비가 익는 냄새
비의 냄새를 보내주는
짧은 바람의 발이 섞여 있다
빈 가슴을 비로 채우는 바람은 살이 쪄 가고
바람살을 안고 돌아오는 그 여자
굵은 총알이 꽂히는 검은 강을 본다
비의 총알에 심장이 뚫리는
자기 혼을 본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비로 메워져 있다

~~~~~~~~~~~~~~~~~~~~~~~~~~~~~~~

흙바람


눈을 찌르는 바람 속을
눈을 뜨고 간다
좁다란 시골길엔 바람뿐이다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의 손에
흙이 묻었다
흙이 묻은 어깨로
청솔가지 연기에 묻히는 일은
신명나는 일이다
거짓과 다툼과 비밀과 눈물
그런 것이 없는 곳엔
어둠도 없다
어둠이 없는 흙바람을
서말이나 퍼 마시고
아삼한 초갓집을 더듬으며
나는 정신을 잃는다
방앗고에 넣고 찧던 그 바람,
맨발의 아이들이 신고 다니던
그 바람을
지금 내가 밟고 서서 정신을 잃는다
거짓과 비밀로 몸이 무거워진 이에겐
밟히지 않는 그 바람
밟혀서 사는 사람만의 발이 되는
그 바람
도시의 큰 기침소리에 풀이 죽은
사람만이 반가운 그 바람
그 바람 속으로 내 정신은
풀어져 들어간다
나는 없어져 버린다

~~~~~~~~~~~~~~~~~~~~~~~~~~~~~~~~~~~~~~~~~~

추억 한 잔


꿈통에 대못을 박고
다시는 열지 않기로 했다

나의 이 굳은 결의 앞에
기억의 스크린이
책장처럼 넘어간다

스크린 한 토막 뚝, 잘라내어
가슴의 가마솥에 넣고 천천히 끓인다
허름한 삶 한 자락이
조청 처럼 졸아들어
추억 한 잔으로 남았다

한 잔 속에 가라앉아 타고 있는
비릿한 추억의 눈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꿈통에 박힌 대못이 크게 확대되어 왔다

성급한 나의 결의를
저항이나 하듯이

~~~~~~~~~~~~~~~~~~~~~~~~~~~~~~~~~~~~~~~~~

겨울나무


나무가 언덕을 데리고 내 귀에 와서
두근두근 귀를 두드린다
언덕에 내가 나와 심어지고
달빛 한 꼬챙이가
내 발부리에 꽂힌다
내 발이 새파랗다
나무는 겨울 나무는 천 개의 손으로도
내 발의 푸르름을 닦지 못하고
만 개의 눈으로도
내 푸름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 나무는 밤마다 나의
깊이를 재려
나의 귀에 와서
그 짧고 마른 손으로
두근두근
내 귀의 높은 층계를
깨뜨리려 한다

~~~~~~~~~~~~~~~~~~~~~~~~~~~~~~~~~~~~~~~~~~~~~

안개 속에서


그녀는 밤마다
귀 떨어진 달빛 속을 달리고 있었어
잘려 나간 들 끝에
한 발이 매달려 있었어
넘어지는 산의 뼈에
가슴 한 쪽이 깔리고 있었어
살을 깎는 바다 물너울에
한 발목이 잡히고 있었어
풀잎을 뒤집는 한 무더기 소낙비를
두 눈에 주워담고 있었어
하늘을 흔드는 밤 우레를
두 손바닥으로 잡고 있었어
소름을 일으켜 세우는 까마귀 울음에
등골이 붙들리고 있었어
나무들을 눕히는 회오리에
머리칼이 휘말리고 있었어
살을 태우는 장작불 속을
그녀는 밤마다 온몸으로 달리고 있었어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고
죽음을 품은 안개를 건너갔어
드디어 그녀는 이겨버렸어

~~~~~~~~~~~~~~~~~~~~~~~~~~~~~~~~~~~~~~~~~

눈 뜨는 잎사귀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 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두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식도 몰고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 뜨는 잎사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

햇빛 속에서


햇빛이 내려 앉는다

내가 버린 하늘에
마른 안개가 넘어지고
구름도 몽그라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러나
바람은 숨어서 올라가고
(땅 위엔 햇빛이 차고
햇빛을 키우는 심장이 차고
심장을 깨우는 사랑도 차고)

땅의 이 싱글한 충만함 속을
누군가 내려와서
내 손등을 덮는다
그림자도
한 점의 목소리도
눈도 코도
손톱에 패일 살도
다 털어버린 내 눈 속
깊이 일어서는 한 사랑을
내가 떨림 속에서 붙들게 하고
그리고 내 머리 끝에서 터져
햇빛이 되어버리는 그대
그대는 열 두번 죽어도
내 땅의 햇빛이다

~~~~~~~~~~~~~~~~~~~~~~~~~~~~~~~~~~

단풍나무 아래서


머리칼 끝마다 호롱불을 켠
단풍나무 사이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걸어간다
불에 데인 부리를 털며
산새 두 세 마리
녹슨 손풍금 건반 위로 내려간다
도.레.미.파.솔
손풍금이 떨구는 통통한 유리구슬을
주워 먹는다
내가 붉힌 얼굴 사이 사이로
속살이 다 찬 호수가 움직임을 그치고 있다
숨도 안 쉬는 호수 속에
내 얼굴이 하나 커다랗게 떠 있다
아직도 한 구석이 빈 어둔 동굴
어디서 뛰어든 당돌한
사슴 한 마리는
재가 되고 있는 단풍잎을 비켜 서서
유난히 높은 코를 반짝이며
내 얼굴에 와 포개진다

~~~~~~~~~~~~~~~~~~~~~~~~~~~~~~~~~~~

움직임


가을 마당에 떨어져 퍼지는
아침 바람 한 움큼이
하늘 복판에 팽개쳐져 죽은
세상의 피를 건져낸다
건져내어 뛰어가다 주저앉은
시간의 추에 얹는다
시계 바늘이 살아난다
돌이 되다만 생물의 눈썹이
다시 풀려나와
드러낸 뾰족뼈를
몸 속으로 접어넣고 태연하게
도망 가고 도망 오는 움직임을 만든다
다시 세상은 움직인다
마당 옆구리에 코스모스가 일어나고
살아난 들판엔 들국화도 깨어난다

~~~~~~~~~~~~~~~~~~~~~~~~~~~~~~~~~~~~~~~~

일점무구一點無垢


내 안에서 바람이 부숴지고 있다
열 겹의 부끄러움이
열 겹의 옷을 챙겨 쫓겨나가고 있다
방금 나의 안으로 들어오던 먼지도
입구에서 발이 굳어 시들고
며칠째 살 구석을 뒤적이던
습한 한 목소리도 문 쪽으로 가고 있다
나를 붙들고 있던
이 몇개의 움직임을 비우면
나는 아직 조금 남은 동정童貞으로
저 햇빛 속에 나와 있는
일점무구,
일점무구 속에 어울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그 오욕五慾을 털고
훌쩍 일어난다
아, 가볍다

~~~~~~~~~~~~~~~~~~~~~~~~~~~~~~~~~

비 는


비는 하나씩 불안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인습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속력을 벗어 던졌어
비는.
그날
떨어지던 모체 이후
마음을 비비는 순간
보다 생활을 엮는 시간으로
꿈을 꿰는 감동
보다 시계를 보는 형안으로
헤엄치는 머리 속 둔주
보다 만지는 손가락의 감각으로
놓여나는 신경의
분자.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풀리는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끝내는
잠이 들었어 여기
비의
평강.

~~~~~~~~~~~~~~~~~~~~~~~~~~~~~~~

승화 / 김지향


당신이 벗기는 면사포 창문
밖에선 처녀가 들고있는 물주전자
뿌려지는 물방울
아래 싱싱한 꽃송이의
머금은 총명을
두 눈이 따고 있는
아침
한 때.
요람을 타고
나의 아침은
창 밖의 왕국 당신의
청결한 꽃 속을
가면서 승화할 수 있었지
화창한 꽃밭의
건강한
세계.
창가에서
당신이 던져버린
오물의 고양이를
담고 저만치 가고 있는
노파의 노폐물
바구니 투신하던
나의 신경쇠약을
생각했지
그리고
이야기 했지
생각하지
않을 광채를 가리던
지난 번의
비.

~~~~~~~~~~~~~~~~~~~~~~~~~~~~~~~

추 수


그 열병을 끝내는
허약이 오기 전의
생기로
머리 위를 감도는
돌풍이 말아가기 전의
긴장으로
떨어져 잊혀지는
열등생이 되기 전의
충만으로
열대성 기후를 떠나는
외로운 운행이 시작되기 전의
성숙으로.

마침내
도강하는 사랑의 손이
잡은 열매

~~~~~~~~~~~~~~~~~~~~~~~~~~~~~~~~~~

안강安康


소리를 풀어놓은
저 들녘
정을 빻아 뿌리는
눈보라를
잠 재우고
하늘 끝 치닫는
광란의 떼바람을
잠 재우고
적요로운 산기슭
몸을 뜯는 낙엽의
애소곡哀訴曲을
잠 재우고
깊푸른 강심의
풀어헤친 머리채를
잠 재우고
달빛을 안은 외틀어진
갈잎을
잠 재우고
가을밤 적막을 울고 가는
외기러기를
잠 재우고
머리만 돌아온
귀환병의 무덤을
잠그고
유령들로 포식한 도시의
골동품상을
잠그고
목숨을 으깨는 뭇 공장의
연통구를
잠그고
협심증을 돋키우는
저 기계 소리를
잠그고
붕붕대는 마음들을
흔드는 요정의 분무기를
잠그고

높고 깊은 고비의
등반을 끝낸
지금은
커다란 사랑으로
찰랑한 가슴

~~~~~~~~~~~~~~~~~~~~~~~~~~~

물이 되는 꿈


눈을 뜨면 가슴은 없어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없어지고
찢어대는 세상을 향해
펑펑 가슴이 피를 게우지만
사정없이 세상의 바람칼이 찍어내려
없어지는 건 가슴 뿐이고

세상에서 가슴으로 건너뛰는
도도한 바람의 회초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가슴은
숯빛이 되지만
우리는 회초리의 끝에 붙은
숯빛이라도 좀 벗겨졌으면 하지만
벗겨졌으면 하는 희망도
함께 숯빛이 되었다

숯덩이에 파묻힌
가슴 가슴도 숯덩이를 나눠 먹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늘 속으로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

하늘 속에 떠오른 가슴이
세상 숯덩이를 닦아낼 비가 되어
세상을 빛낼 은빛의 물이 되어
좍--좍 내린다면
세상의 귀가 하얗게 씻겨
스치는 만상의 눈썹이 빛나겠지만

꿈은 꿈일 뿐
깨고 나면
가슴은 펑펑 피를 게우며
날마다 찢어져 없어지고

~~~~~~~~~~~~~~~~~~~~~~~~~~~~~~~~~~

외롭지 않게


강설의 추적을 끝내고
탄우 속 야영을 끝내고
선고 받은 혹한기를 끝내고
소음을
버리고 패기를
버리고 회한을
버리고 버리고
잔촉이 마저 붙기 전에
초록이 마저 떨리기 전에
감성이 마저 쓸리기 전에

순정의 여인으로
사랑에 첫 눈 뜬
싱그러움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움으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게

황혼까진
아직

발자국

~~~~~~~~~~~~~~~~~~~~~~~~~~~~~~~~~~`

내일에게 주는 안부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

계석리癸石里에게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네에게 가고 싶다
거기 사람이 찾아내지 않은
주인없는 별이 소나기처럼 무너져내려
사락사락 밟히는
빛살 홀로 사는 그 곳

사람에게 찢겨
마음 고픈 사람아
그대도 가면 빛을 밟을 수 있어!
있어, 있어, 희망을 싸들고 가 보라
세상을 쓰러뜨린 바람이
살찐 회오리로 뭉칠 때 회오리 사이로
번쩍, 칼날처럼 치솟는 빛
돌담에 기대어 눈 감고 있으면
둘 셋씩 팔장 끼고 달려오는 빛들과
환하게 벗어진 이마의 땅,

이마 위로 높게 열린 하늘 속
파란 사파이어 건널목
건너가면 시간도 뒹굴어 뒷통수만 보이는
견고한 절망 생산자도 덩달아
절망을 단산하는 그 곳,
밤도 새벽도 없는 빛투성이 낮천지가
희망, 희망, 희망,
귓속말로 입을 오물거리며 나온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없이도
생애가 빛나는 그 곳
내딛는 발가락 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빛에
씻기는 그 곳

세상에게 살 베어
마음 아픈 사람아
잠자지 않아도 눈이 아프지 않은 그 곳
새파란 나뭇가지에 앉아 보라
저절로 푸른 물 오른 온몸에서
술렁술렁 파도소리 일어나리라
오염된 지느러미 씻기는 소리, 소리,
쉬지 않으리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빛 뿐인 그 곳으로 가고 싶다)

~~~~~~~~~~~~~~~~~~~~~~~~~~~~~~~~~~

2부 꿈 혹은 풀밭

~~~~~~~~~~~~~~~~~~~~~~~~~~~~~~~~~~`

가을잎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 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그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빛나는 이름
사람의 무리가
그대 살을
할키고 꼬집고 짓누르고
팔매질을 해도
사람의 손만 낡아질 뿐
그대 이름자 하나 낡지 않음
하고 우리들은 감탄한다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대가 멈추었던 자리엔
반드시 바람이 불어
기쁘다가 슬프게 패이고
슬프다가 아픔이 여울지는
이름
그 이름이
가슴에서 살 땐
솜사탕으로 녹아내리지만
가슴을 떠날 땐
예리한 칼날이 된다
그렇지, 그대는
자유주의자 아니 자존주의자이므로
틀 속에 묶이면 자존심이 상하는 자
틀 밖에 놓아두면
보다 더 묶임을 원하는 자,
그대를 집어들면
혀가 마르거나
기가 질려 마음이 타버리거나
한다고 우리는 때때로 탄복한다
그렇지, 사랑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
실은 사랑이 슬픔 속에 자라지만
기쁨 속에 자란다고 진술한다
실은 사랑이 아픔 속에 끝나지만
새 기쁨을 싹 틔운다고 자술한다
사랑의 끝남은 미움이지만
실은 끝남이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사랑은 사랑은 끝없이 자백한다

~~~~~~~~~~~~~~~~~~~~~~~~~~~~~~~~~~~~~~

발이 달린 사랑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 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베어낸다
그렇지 그 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 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 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 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주며...
아, 일곱 번째 용서함
바로 그때였다
나의 사랑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 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발을 집어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질렀다
돌아다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베어져 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내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이여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이여
하고 나는 골목 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씻는다

~~~~~~~~~~~~~~~~~~~~~~~~~~~~~~~~~~~~~~~

사랑 만들기 (3)


나무가 날마다
칼을 갑니다
칼은 끝이 날카로와야 칼이지만
나무가 가는 칼은 끝이 뭉툭합니다
뭉툭한 칼을 만들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배로 숨을 쉬었습니다
배에 모인 숨은 가장 견고한
연장을 만들므로
가장 견고한 연장은
뭉툭한 칼끝이므로
뭉툭한 칼끝은 바람을 베므로
뭉툭한 칼에 베인
두 쪽난 바람은
또 다시 하나가 되므로
다시 또 하나가 되는 건
사랑이므로
그대여
사랑 만들기에 참여한 그대
날카로운 칼끝을 감추고
뭉툭한 날을 빚어보아라
비로소 사랑의 참맛을 알리라
사랑이 사랑이
가슴에서 은방울을 굴리리라

나머지는 후렴으로
되풀이하면 될 일

~~~~~~~~~~~~~~~~~~~~~~~~~~~~~~~~~~~~~~

사랑 만들기 (4)


타버린 잿더미도 버리지 않음
잿더미에서 타는 불은
마지막 움직임의 뒷꼭지가
드러나 보임
타버린 잿더미의 불은
가장 절절한 울음을 건너서
다음 삶의 예고편을 보여줌
나는 잿더미를 버리지 않음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삶의 찌꺼기를 거르는 불꽃을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집약된 생애의 이력서를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서로 찾는 목소리의 떨림을 듣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가장 순결한 피를 구르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가
그대
잿더미의 아우성은 가슴 전체를 연다
허기 속을 헤매며
자기의 허기도 못보는 눈
그대
날로 날카로워만 가는 눈
잿더미의 진실을 빠뜨리고
시간의 끝짬만 보는 눈
뜨고 있어도 잠든 눈이여
내다버린 잿더미 밑에
숨어있는 사랑을 찾아봐라
그대 눈 그대 손이
우리와 영원히 아름답게
포개짐을 알리라

~~~~~~~~~~~~~~~~~~~~~~~~~~

사랑 만들기 (5)


마침표를 찍고
돌아설 때에야
흔들리는 마음
마음의 지시로
입을 잠근 열쇠를
강물에 던져넣은 뒤에야
떠오르는 말
말의 지시로
기억의 문을 닫아 건 뒤에야
'나 여기 있어!'
손을 쳐들고
생략된 부호처럼
나서는 눈
참 부신 빛살로 떠오르는 눈
마음의 밑바닥에서
강물의 밑바닥에서
기억의 밑바닥에서
흙 위에 담장 위에
거리에 빌딩 꼭지에
허공 속에 시간 속에
돋아있다 원망처럼
내 혼이 닿는 곳마다
잘못 찍은 마침표를
허무는 몸짓으로
빗물로 떠서 출렁이는 눈
그림으로 박혀서 초롱이는 눈
불길로 치솟아 타오르는 눈
눈을 덮어버릴 강철 보자기가 없는
나는 불혹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만날 수 밖에
너 불치의 병
사랑아

~~~~~~~~~~~~~~~~~~~~~~~~~~~~~~~~~~~~~~~

사랑 만들기 (6)


잃어버린 푸른 빛 한 오라기
건져 내려고
이미 빛을 삼켜버린
가슴을 두들기며
찾아도 찾아도 모자라는
땅의 넓이만큼
넓은 가슴 어디서
솟구쳐 올 약속도 없는
사랑 하나 기다려
24시간 전체를
기다림이 되어
흔들리는 첨단적 세상
모퉁이에 나뒹구는 뜨거운 햇빛을
지워버린 차거운 눈이 되어
사랑을 그 신선한 빛을
찾아서
두근거리며 나는
오늘도 가슴을 밀고 나올 감동의
그 트럼펫을 지켜본다

~~~~~~~~~~~~~~~~~~~~~~~~~~~~~~~~~~~~~~~~~~~~

사랑 만들기 (18)


아직은 꽃빛의 목소리로 부른다
사랑
부르고 불러도 바래지 않은 이름
사랑
부르고 부르면 피가 되는 이름
사랑

어느 해
흰 벌판 한 모퉁이
혼자 푸른 포플러 가지 끝
높이 높이 걸어놓고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이름

시간이 벌판 모서리를 베어 먹은
오늘에야
잊어버린 발자국을 짚으며
찾으러 가는 목소리

포플러는 오늘 외롭지 않아
사랑 몸 전체를
두부모 자르듯 잘라 팔았어
주소도 받지 않고 팔아 버렸어

아, 피 흘리는 내 목소리여
속임수 쓰는 저 포플러
성큼성큼 가지에서 내려와
마주 오는 건 메아리
맨발로 쪼르르
내 목에 감기는 메아리!

아직은 꽃빛 목소리로
다시 시작할 밖에

~~~~~~~~~~~~~~~~~~~~~~~~~~~~~~~~~~~~~~

사랑 만들기 (19)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집 등넝쿨엔
얼굴도 안 보이는 가을이 걸린다

낮보다 긴 밤이 지는 새벽
너는 벌써 발소리도 없이
내 창문을 밀지만
새벽은 참 짧아
다시 또 날은 새고 날은 저물고
기계보다 빨리 달려가는
이 시대

너와 어울려
이력서를 써 내려갈 시간은 없어
밤에만 살을 벗어 놓고
영혼 홀로 빠져나가
밤새 헤맸지
사랑아
너는 그때 어디 있었니

사랑도 어둠에 갇혀 안 보이는
이 시대
저문 날 눈이 혼자
세상 문을 열고 나와
무한공간 네 뒤를 따라가
참말 참말
사랑을 청소할
바로 그때를 기다려
너는 나와
숨바꼭질을 하니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집 창문엔
어둠에 젖어 안 보이는
사랑 그림자만 걸리고

~~~~~~~~~~~~~~~~~~~~~~~~~~~~~~~~~~~~~~~~~~~~

사랑 만들기 (49)


방은 메말라 있었다
핏대를 올리는 시간의 하복부에서
눈에 화살을 꽂은 우리는
컴퓨터에 그날의 일기를 맡기고
세상 삶이 얹힌
책상을 맞대고 앉아
서로 다른 생각에 금을 그으며
가갸거겨 떠들어대던 입씨름도
이제 지쳐 하나씩 떠나고
가슴을 빳빳이 다림질하던
성급한 분노만 남아
방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

사랑 만들기 (50)


나가 보면 바람 속에
꽃잎의 울음이 깔린다
울음은 발자국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남은 잎사귀의 구멍 뚫린 가슴들이
바람이 된 울음을 쓸어 담는다

피지 못한 그대들은
우리 머리 위 세상에서 피니
우리가 고개를 들면
피어있는 그대 몸을 볼 수 있니

낫을 댈수록 칡넝쿨처럼 강해지던
그대 쪽빛 의지
없는 듯 살아서 견디던
그 의지의 순수는
어디에 벗어두고

이제 바람이 되어
울음이 되어 떠나가니
사랑아

나가 보면 바람 속에
더욱 크게 울리는 그대 울음소리뿐
세상은 죽었다

~~~~~~~~~~~~~~~~~~~~~~~~~~~~~~~~~~~~~~

사랑 연주 演奏


잠 속에서도
나는 피아노가 키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내 머리 절반을 뜯고
방울방울 떨어져 굴러간
그대를
머리 아닌 손이 잡으려다
놓쳐버린 채
십 년이 지나고 또 십 년이 지나갔다

어제 문득 강변로의 잠을 깨우다가
내 한쪽 눈이
잃어버린 그대를 잡았다
그는 내 머리 아닌 가슴으로
방울방울 살아나
피아노 건반을 타고
내려와
내 몸 전체를 연주했다

~~~~~~~~~~~~~~~~~~~~~~~~~~~~~~~~

풀물의 그녀


바다 밑 수렁 뚜껑을 열고
길고 긴 해꼬리가 내려갑니다
풀물 투성이가 된 그녀는
풀물을 섞으면서
세상 쪽으로 나아갑니다
세상과 입씨름도 끝내고
침방울을 닦으면서
아직은 새파란 눈에
빛도 물소리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
공중을 짖밟은 우레소리를 타고 나와
세상의 심장에 방아쇠를 겨누는
저녁 가마귀떼를 보아도
깜빡 잃어버린 정신을
못 찾는
그 사람을 만나러
그 사람의 눈에
풀물을 먹이러
슬픔이 조금 빗겨선 밤엔
풀물의 그녀 홀로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

연가풍戀歌風으로


한 목소리가 달려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보았다 조금 늦게
목소리는 토막 토막 달아나고 있었다
다시 목소리는 한 몸으로 돌아와
한 음계 높이 올라갔다
나는 다시 돌아보았다
조금 더 늦게
노란 안개가 내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엄치며
보일 듯 말 듯
더 높은 음계로 올라가며 나를 부르는 그를
나는 붙잡으려 피를 쏟았다
그는 이미 공중에 떠올라
금빛 연가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 연가는 왜 잡히지 않나
2분의 1
내 목숨이 지날 동안
언제나 노란 안개 속에서
허우적이고 있었던
나에게

~~~~~~~~~~~~~~~~~~~~~~~~~~~~~~~~~~~~~~

봄 편지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4*6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

봄비 속에서


돌담 위에서
나무등걸에서
방울방울 푸른 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방울엔 갈고리가 있어
풀들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길게 목이 뽑혀져 나온 풀꽃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얼굴을 파묻는다
풀꽃들의 얼굴은 숨을수록 더욱 불거져 나오고
벌써 이마가 반짝이는 쑥잎이
나무 등걸에 쑥물을 들이고 있다
회양나무 쭈그렸던 허리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씻고 종아리를 씻고
부리가 새파란 새끼 제비를 태우고 있다
빗물 쫑, 쫑, 떨어진 자리마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세상
꽃분홍 꽃밭에선
꽃분홍 꽃망울들 불꽃놀이 하고
불티 송이송이
산과 들에
멀리멀리 뛰어간다
아, 불꽃 뛰어가는 송이 속에
나는 또 왜 섞여 있나
화끈 화끈 가슴이 달아
나이도 줄줄 흘려 버리면서
새로 피는 꽃이
처음 있는 꽃이 되려고
뛰어가니
어쩌나

~~~~~~~~~~~~~~~~~~~~~~~~~~~~~~~~~~~~~~~~

초록빛 아이들


제쳐진 오월 하늘은
아이들 얼굴로 꽉 차 있다
새파란 마술지팡이 바람이
내 발 앞에 와서
눈이 큰 풀밭을 부려 놓는다
풀밭 속에 솜구름 같은 함성이
동 동 떠 다닌다
함성을 앞지르는 아이들의 맨발도
풀물이 올라 초록빛이 된다
초록빛 아이들 속에 들어간
나는 아이들 키만한 물음표에 빠진다
아이들의 샛별 같은 물음표를
내 귀에 주워 담으면서
나는 문득 경이의 눈을 뜬다
아이들의 입에서
줄지어 나오는 종달새의 지저귐
하늘까지 퉁기는 그 의문부에 깔려
나는 아찔,
말을 잃는다
보랏빛 내 정신의 나이를 키질해 보이면서
부끄러움을 타는 나
아, 나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새삼 얼굴을 씻고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무겁게 껴 입은 나이를
한 겹 한 겹
벗어던진다

아이들은 선생님이므로

~~~~~~~~~~~~~~~~~~~~~~~~~~~~~~~~

김지향 시인 소개


경남 양산에서 성장함.
홍익대 및 단국대 대학원을 거쳐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시집 병실(1956) 발간 후,
시 '별'을 세계일보에 발표(1957), 활동을 시작함.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 한국 여성 문인회 회장

'막간 풍경' '빛과 어둠 사이' '사랑 만들기'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세상을 쏘다'
'위험한 꿈놀이'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한줄기 빛처럼'
'리모콘과 풍경' 등 23권의 시집과 '김지향 시선집'
'A HUT IN GROVE'(대역시집), 에세이집, 시론집 등 다수.

시문학상(제1회 76)
대한민국문학상(86)
박인환문학상(제1회.2000)
한국크리스챤문학상(2000)
윤동주문학상(200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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