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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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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2022년 10월 14일 20시 11분  조회:564  추천:0  작성자: 강려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11월의 비/위상진-
 
 
지금, 어딘가를 쓰고 있을
H에게
 
너는 여섯 번째 나의 구두창을 갈고 있다
 
음이 소거된 티브이 뉴스가
거짓 수사가 많아지는 저녁을 꿰맬 때
구두는 너보다 먼저 늙어갔다
 
벽화처럼 정지된 얼굴로
부르는 노래는 믿을게 못 되었죠
말言이 안 되는 말들을 수집하는 나는, 특히 잘 있죠
'거기 윗동네 공기는 어떤가요?’
 
시간의 창살 뒤에 어디에도 없는 너의 말은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거울 같아
구둣방 거울은, 안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든 채
사라지는 너를 뱉어 낸다
 
나는 주크박스를 빼앗긴 음악처럼 창백해지고
공중에서 노란 비가 묻어있는 신문지가 떨어진다
 
거미는 담벼락에 못처럼 박혀버리고
안짱다리를 한 유령이 걷어찬
우유는 하수구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너의 젖은 말言 하나가 나를 지켜본다
 
잠시 자리 비우신
-문덕수 선생님께
 
                                    위상진
 
 
프로이드의 중절모가 걸려 있고
흰 셔츠 접으신 채 돋보기로 책을 보시던
지성의 푸른 핏줄
펜 혹엔 늘 잉크가 묻어있었지요
시문학 4월호 ‘편집인 겸 주간 문덕수’
직함이 지워져 있더군요
찬란한 꽃 망사 위에*
철커덩 셔터 내려오는 소리
나침반 같은 말씀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김시철 선생의 인사 말씀
흰 꽃잎은 뿌연 안경 너머 애도의 눈雪으로 날리고
죽음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 구형求刑된
가장 긴 형기刑期임을 알고 계시지요
 
조셉 룰랭의 우편배달부 복장으로 갈아입으셨는지요
금장 단추 하나씩 채우고 모자는 살짝 삐딱하게
은빛 머리칼 반짝이는 거울을 보고 계시는지요
 
대학 1학년 ‘교양 국어’ 시간 짙은 눈썹을 응시하던
저는, 시 공간 저 너머 ‘시문학‘에 편입생이 되었지요
시인의 복무를 짚어보는 지금
 
그런데 선생님
보낸 이 받는 이 없는 편지 말고 누에처럼 쓰신 손글씨
싸인해 주신 첫 장에 발딱발딱 살아 숨 쉬는 손글씨
받고 싶습니다, 문덕수체 손편지를요
 
사무실 책더미 속에 꽃을 물고 있을 만년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는*
꽃보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제 뵈온 듯
아무 일 없는 듯
잠시, 아주 잠깐
자리 비우신 의자 있다. 있다
 
 
 
*선에 관한 소묘.1. 차용
*인연설에서 차용
*추모 시 ’영원한 우체부‘ 와 ‘잠시 자리 비우신’ 2편을 1편으로 재구성했다 
 
 
************* 
 
 
벽은 속삭인다
 
 
 
천국의 해시계는 사라지고 화면은 눈을 닫았다
백야의 객석은 음이 내려앉은 피아노 같았지
그토록 쉬운 말을 왜 할 줄 몰랐을까
 
새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귀
유예된 약속을 건져 올릴 때
속삭이는 벽과
열리지 않는 문에 관해 얘기했던가
말이 쪼개지는 저 너머
늘 기다리는 사람
더 기다리는 사람
생각보다 빨리 오고 시간보다 늦게 갔지
시차를 가로지른 밤은 불면으로 잃어버린 밤이다
 
환영과 환각 사이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익숙한 장소에 도착한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붉은 물이 든 해변
글씨 자국이 난 꽃잎을 한 장씩 떼어 날렸지
익숙했던 패턴은 지워지고
 
무심한 듯 나타났다 없어지는 조각난 환영
눈물의 성분처럼 중얼거렸지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고 
 
무대 위 페이지터너는 오늘을 넘기고 퇴장했다
 
쉼표 박물관
 
 
    위상진
 
 
중국 현대문학관 테이블,
올챙이 무늬로 마구 찍혀 있는 쉼표들
멈출 수 없는 쉼표들은, 쉼표를 낳는 중일까?
 
쉼표는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당기고 있어
오늘 아침 느닷없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떠올랐어
나는 좀 더 볼온해져야 할까 봐
 
구름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중이야
그리다 만 액자 밖에는
아스라한 건물이 비탈에 서 있어
손으로 밀면 뒤로 넘어갈 듯해
 
소파 위에 놓인 사무엘 베케트
그의 눈 속엔 보라색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고요히 다문 입술, 고독이 밴 듯한 이마
낡은 셔츠의 보푸라기처럼 묻어 있는 말들
 
베케트의 문장은 쉬지 않는 쉼표로 가득해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깨어나지 못하는 쉼표들
 
북극에서 날아온 우울이 맺혀 있는 걸까?
신갈나무 한 그루, 빗속에서 한 호흡 쉬고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는 연둣빛 물방울들
비 내리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 같아
 
 
- <시문학> 2009.6월호
 
 
 
* 문학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문자로 표현한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 속의 쉼표는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달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자가 중국 현대문학관에서 문장과 쉼표를 보고 불온해지고 싶은 것은 쉼 없이 문학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구름, "그리다 만 액자"는 그러한 화자의 내면을 암시한다.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란 부조리 문학을 남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독한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근원적 결핍과 욕망을 안고 사는 인간은 늘 구름 같은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불온하고 부조리한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물방을 쉼표가 달려 있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이다.
 
 - 2010.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중얼거리는 꽃 외 1편/위상진
 
면도칼이 녹아내리는 문장 뒤에 서 본 적이 있나?
언젠부턴가, 그방은 파지가 쌓이기 시작했어
알 껍질을 깨고 프린터에서 빠져 나오는
꽃이 중얼거린다
 
너의 이마에 찍힌 번호
도마뱀의 잘린 꼬리 같았지
 
나는 몽유병에 걸린 듯 단어를 찾아다녔지
사라진 천재들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길때
처음 듣는 낱말의 침전물이 부유한다
 
뼈대가 부서진 소조 같은 문장
발가벗은 사람들은 연필로 그려진
도시를 지나며 아무 말도 흘리지 않았어
 
우린 범종에 낀 불협화음처럼
같은 책을 들고 다른 페이지를 뒤적였지
의심의 맨 끝에 도착하지는 못했어
충혈된 시계위로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파지
 
누가 녹아내리는 면도칼의 문장을 알아챌 수 있을까?
1초도 자기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 시간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 소리
 
도무지 닫히지 않는 귀 하나, 여기 있다 
 
 
불속의 비둘기
 
검은 봉지속, 귤이 해가
지는 쪽으로 쏟아질 때
그 불은 경찰서 뒷마당에서 시작되었죠
 
새들이 날개를 접는 시간
버섯구름에 싸인 비둘기 집
 
머리 위의 불꽃이 타다만 비둘기가
각목처럼 툭 떨어지며 비명도
없이 날아갔죠
 
호루라기 소리 어른거리는
불꽃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죠
 
나는 당신과의 거리를 사랑한 것이라고
잔느* 처럼 사라진 눈동자가
꾸는 꿈이라고
밤기차 유리창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사랑
어디까지 따라 왔을까요?
 
이제 당신의 눈동자에 불사조를
그려 넣고 싶어
불에 타다 만 비둘기는
니그로 조각 같아요
 
* 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모딜리아니가 죽자 임신한 몸으로 투신했다 
 
-시집 그믐달 마돈나<지혜>에서
 
아주 심한 자물쇠
 

   위상진


내 이름은 스파이, 내 이름은 바람
여러 개 이름으로
온몸에 자물쇠를 채워두었지
 
나를 통과한 검은 역광들,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인 갑옷 속 눈물이었지. 얼룩말처럼 달리고
달리던 청동색 먼지를 뒤집어쓴
원판들
            
380달러에 경매되었다지. 15만 통의 필름 그 얼룩말의 발굽에 붙어있는 겹눈들, 부재중인 내가 현존하는 전시회, 예지몽도 없이 빛의 제국으로 입국한 건가?
 
아주 심한 자물쇠를 채워둔 단단한 성채(城砦)였는데, 흔들리며 덜컹거리며 수 만 번 열었다 닫았지. 반도 네온의 노란 슬픔을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묶여있는
개의 눈빛, 죽은 줄 모르고 귀부인 목에
감겨있는 여우의 말간 눈
 
오려낸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버린
 
다친 인형을 뒤지던 내가 피사체가 된 건가.
휘발한 자국을 가만 내버려 두기를
 
파. 벽. 돌.처럼 떠 있는 구름
불타는 이마 위에 쏟아진다.
수상한 스파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
 
벤치에 앉아있다. 까마득히 날아가는 새떼
허공은 다시 아물고.
혼자 듣던 아침의 새소리는 이제 그만
 
수요일에 도착한다던 장미는 몇 번의 수요일이 지나가고
 
카메라에 칼처럼 꽂혀있다.
섬광처럼 보이는
나만 나에게 호명하는, 비비안 마이어라고 해
 
 
 
*비비안 마이어(1926~2009): 뉴욕 출생. 유모라는 직업을 가졌던 여자. 존 멀루프가 15만 통의 사진을 경매소에서 사들여 전시회를 열었다. 생전에 한 점도 공개한 적이 없는 비비안은 전시회를 통해 천재 사진작가로 호평받았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월호 발표
조명등 밖으로
 
 
위상진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출입구 천장에 붙어 있는 죽은 시계
나는 그에게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거지처럼
드라이아이스는 낮게 깔리며 내 발끝으로 들어온다
누군가 흘리고 간 이력서 같은 진주목걸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나는 어두운 대기실에 앉아 커튼 사이로
무대를 엿 본다
 
언 생수통이 깨지듯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진다
꽃가루를 수정하는 벌새들의 날개 짓 같은 빛
나는 커튼의 한쪽 끝으로 몸을 말고 싶다
유랑서커스단이 천막을 걷어내듯
 
교회 담벼락 옆엔
흐르다 만 전선줄이 깨진 조명등 밖으로 나와 있다
어디서 급하게 창문 닫는 소리
 
내 발밑에 내리는 질산 같은 눈
길 끝에는 보이지 않는 커튼이 내려져 있다
눈은 흰색을 지우고 어둠을 부식 시킨다
그것은 말랑한 벽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무대 밖이다
 
 
 
8
 
 
갑자기 화면이 뚝 끊어졌다
나는 소리만 들리는 영화관에 앉아
비어있는 화면을 마주 한다
눈을 뜨고 있는 눈 먼 자의 시간
 
이미 읽어버린 영화전단지를 접었다펼쳤다 했지
어둔 화면은 소리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줬다
 
잃어버린 내 망사장갑 한 짝을 내밀며
눈을 맞추지 않던 눈
나를 위해 연주하던 기타 위의 긴 손톱
소리만 들리는 70년대식 사랑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화면 저 너머 내가 들여다보기를 거부한
훔친 물감 같은 내안의 소리
지하 기도소의 돌이끼같이 번식되는 시간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영사기는 계속 돌아간다
 
양철 지붕 위의 빗소리로 가득한 극장
박쥐처럼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파지를 태운 재 같은
어둠의 주름을 밀치고 불이 들어왔다
 
복원되지 못한 화면은
필름 세척자의 이름과 함께 흘러내렸다
잃어버린 8분을 집행유예로 남겨둔 채
 
 
 
가방 속의 탁상시계
 
 
저녁은 고해신부의 귀처럼
비밀을 향해 자라기 시작했다
 
너는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 나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울다 들어갔다
나는 오늘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연극을 보고
나는 맛없는 국수를 먹는다
국수집 창으로 시침처럼 달라붙는 빗물
나는 검은 유리창에서 이름을 지운다
 
어떻게 나를 전환할 수 있을까?
수십 개의 소리를 가지고
팩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목록 중에
내가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무엇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듯 건너뛰고 싶은 생일날
너무 늦게 도착한 축하 메시지
 
만화경의 색종이 무늬가 사라진 후에도
새로운 무늬를 기다리던 시간은
탁상시계처럼 가방 속으로 기어들어갔지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끊기지 않는 탯줄
위상진 
 
발등 뼈가 아프다. 네 생일이 오나 보다.
산후조리할 때 바람 쐬지 말랬는데
그만 찬물을 발등에 부어버렸다.
너는 이 세상에 이 견딜만한 아픔으로 발등에 왔다.
시(詩)도 아이가 내게 오듯 그렇게 왔다.
끊기지 않는 탯줄 해마다 길어진다.
 
 
바다로 내리는 잠
위상진
 
그는 밤마다 부적을 따라 나선다
스틸녹스 두 알을 입에 물고
가수면의 바다로 잠겨든다
더 이상 지느러미를 흔들 수 없을 때까지
잉크처럼 풀어지며 해저로 가라앉는다
 
암청색 바닷물이 이마 위로 흘러가고
형광빛을 내는 몸은 물고기 알을 낳는다
내리지 않는 잠은 심해어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 앞집 여자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
열쇠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넣는지 덜그럭거린다
어딘가로 핸드폰을 눌러대는 소리
 
밤의 소리들이 달팽이관에서 비틀거린다
어디서 잠의 노래가 들려오나
남아있는 비상약 한 알을 삼키고
잠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러드는데
 
앞집 여자는 밤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
*스틸녹스 : 수면제
 
 
길 혹은 고양이
위상진
 
1.
종로 3가 지하도 낯선 음악이 울리고 있다 안데스를 넘어 온 차고 맑은 선율, 까무잡잡한 얼굴에 치렁하게 묶은 머리, 키 작은 악사들이 물안개처럼 피워내는 미소, 지하로 날아든 십일월의 철새 같은 엘 콘드르 파사
 
쓸쓸하고 달콤한 팬플룻 소리, 하늘로 울리던 의식 같은 음악은 오후 세 시의 지하 사막을 건너간다 안데스 계곡을 감아 돌던 바람은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덮어주고 철새는 날아가고
 
2.
북경 천지극장, 사내아이가 반 쯤 늘어진 줄 위를 간다 아이가 밟고 가는 줄이 흔들리며 절벽으로 떨어진다 몸을 돌려 그네를 탄다 숨죽여 증발하고 싶었던 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줄 위에 얹혔네 적막한 그림자가 뛰어내리며 밀려난다
 
3.
눈 내린 길 위에 발자국이 젖어들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 납작한 배에 그림자를 달고 검은 비닐봉지를 따라간다 고양이 발에 찍힌 길이 파랗게 돋아난다
 
--------------------
*엘 콘도르 파사 : 페루의 민속음악 ‘철새는 날아가고’로 우리나라에 아려졌고, 사이먼 가펑컬이 불러 유명해진 곡.
*산뽀냐 : 팬플룻 같이 대나무관을 나란히 묶어 앞과 뒤의 단이 지그재그 모양을 한 안데스 전통악기.
 
 
 
 
수족관
위상진
 
불꺼진 수족관의 물고기는 거기가 바다인 줄 알까 저녁 어스름 사이에서 별이 가물거릴 때 비늘이 해진 입을 벙긋거리며 빛을 따라 옮겨 다니네
 
시간은 글씨가 사라진 양피지 같아 어둠은 지워진 문장을 다시 쓰게 하네 물고기의 흐린 눈은 물소리를 찾아가고 나는 더듬거리며 문을 그리네
 
창가에 걸린 마그리트 그림 속의 여신은 하얀 대리석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기억을 쏟아낸다 바다는 수평선을 끌어내려 구름을 가둬놓고
 
그 안에 흐르던 물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밤의 유리창은 꺼진 티브이처럼 캄캄해 검은 거울 속에 나는 담겨 있네 밤이 기억을 찍어 전송하는 동안 블라인드를 내리네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 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도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 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굴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방향감각이 없으니
위상진
 
참 딱한 일인 게,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길 떠날 일 생기면 일단 걱정이다.
아드은 출발해서, 도착 때까지 전화로 길 안내를 해.
거기다 남편까지, 나 같은 사람 어디 인신매매단에라도
끌려가면 길 몰라 도망치는 일도 쉽진 않을 거란다.
아들은 이미 서너 살 때부터 눈치 챈 일이다.
“엄마 이리 가는 것 맞아?” 다짐에 다짐,
어쩌다 남의 차라도 타면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요?”
등줄기 땀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살아가는 일도 그랬다.
어리둥절, 허둥대고만 있다.
늘 나는…
 
두 개의 시선

위상진




르네 마그리트,
그는 그림에 문을 달아 주고 나가고 싶었을까
그의 언어가 그림으로 들어갔네
유리창을 열고 나간 바다가
새의 날개를 달고 있어요
그곳으로 날아든 새는 시간을 놓아 버렸네
창 안의 바다는 우울하게 저물어가고
숨겨진 그림은 보이지 않는 섬이 되는 걸까

밤의 공중전화 부스를 열었어요
그곳에 갇혀있는 어둠은 또 하나의 그늘이 되기도 하나요
부스에 담겨있던 말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네요
누군가 누르다 간 번호판
움푹한 곳에 지문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어요
자정에 멈춘 시계에선 여전히 시간이 새어나오고
머뭇거리던 안개가 부스를 섬처럼 둘러싸요


-<시와 상상> 2007. 겨울호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 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 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골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게재지: 2008년 11월 시문학 발표
이름: 위상진
등단:1993년 시문학
 
 
 
출처: 계간 시향 원문보기 글쓴이: 글나무
 
무성의 입술
 
위상진
 
석고상은 붉은 입술로
일렁거리는 말을 한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진다
회색 피가 흘러나오는 제라늄 화분
그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
 
낮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왔고
휘어지는 길을 따라 아침은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오늘 죽은 사람의
생일 케잌을 우물거린다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올라가는 간판
창밖의 검은 태양은
바닷물 색을 울컥 울컥 쏟아내고
간판이 있던 자리 공중에 걸린 둥지 하나
어린 새의 솜털이 묻어 있다
 
구름그림자를 덮어쓴 간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그는 유리창 위에 입술을 벙긋거린다
한 단어 한 단어 말의 입김이 번진다
 
 
<이선의 읽기>
 
필자가「무성의 입술」을 논평하는 이유는, 필자가 주장한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시론은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한 행에서 단어와 단어의 낯설게하기, 어절과 어절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를 완벽하게 실현하여, 자기 이름의 상표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필자의 시론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시를 쓸 때 ‘제목, 단어, 표현, 비유’에서 닮은 표현을 피하기 위한 고민을 필자도 한다. 누군가의 시에서 읽은 것을 ‘무의식적 표절’을 할까 두려워 새로운 ‘표현’을 버리기도 한다.
위상진 시인은 그럴 때 ‘인터넷 검색’을 하여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위상진 시인의 시 특징은 사동보다는 피동적 표현기법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6개의 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 행 안에서의 단어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그믐달 마돈나』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한 연 내에 여러 개의 파생된 보조관념’이 등장한다. 부채살처럼 여러 개의 보조관념이 마디마디 퍼져 있다.
<낯설게하기 기법>은 1980년대부터 양준호가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을 도용한 ‘단어 흩뿌리기’ 표현기법을 구사하여 ‘행과 행’,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를 이미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상진은 ‘객관화’와 ‘재해석’ 특징을 추가하였다.
또한 표현주의를 추구하지만, 감각적 미의식과 진정성이 엿보인다. 아래의 대사는 거짓이 아닌 참이다. 작가의 목소리든, 화자의 생각이든, 3인칭 타자의 무의식을 차용하였든, 진정성이 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1연)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2연)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3연)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5연)
 
자동기술기법으로 연과 연을 단절하고, 흐름을 끊어주지만, 객관화에 집중하였다. 또한 ‘제목’과 ‘마지막 끝연’의 ‘끝행’에서는 반드시 객관화를 실현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지나치게 집중한 ‘낯설게하기’가 산만하거나 복잡하거나, 통일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의적, 다의적 ‘표현주의’ 기법은 새로운 ‘심미적 미의식’을 만들고 있음에 주목한다.
 
<1>-묻어버린 시계/위상진-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2>-빈 잉크통을 들고/위상진-
 
 
잉크 충전 가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프린터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고양이는 내 방문을 열심히 긁다가
문 앞에 오줌을 싸버렸다
닫힌 문들에 대한 기억은
본능에 각인 된 두려움일까?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미래에 경매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또 변덕 같은 비밀이 만들어지리라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셔터가 내려진 문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고 싶다
물감은 주목 받지 못한 표현주의자의
얼룩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문을 닫은 그들은 문을 빠져나간 걸까?
바깥에 의해 갇혀버린 걸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고
빈 잉크통만 어둠과 상관없이 남아 있다
 
<3>-초승달/위상진-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 너를 깨운다
끈적한 침을 발가락에 묻히고
지독한 근시로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검자주색 핏물이 든 발톱
고양이는 발톱 안에 혈관이 있어
무라노 섬에서
그가 보낸 초승달 모양
목걸이가 도착했다
밤하늘을 오려낸
오색
금빛
별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고양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발톱 모양의
목걸이를 건드려본다
무라노 섬에 유배된
유리공의 손길은
너의 목에서 흔들리고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 있다
 
<4>-초현실주의/위상진-
 
 
아무래도 코가 비뚤게 됐나봐
이 돌파리 의사!
다시 수술을 해 달라 해야지
거울 속의 여자는
분필 같은 코뼈를 바로 잡고 있다
한 밤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이들은
눈 코 입을 바꿔버렸다
창백한 얼굴은
어긋나지 않으려고
어긋나고 있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랑하고 헤어진 연인은
욕설을 퍼붓는다
참 멋진 놈이었는데, 나쁜 놈!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펴지지 않았다
 
<4>-무릎 위의 고양이처럼/위상진-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 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까?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누군가가 두드린다
위상진
 
바람은 여러 개로 늘어났다
무의도 바닷가의 돌탑
기원은 땅 속으로 묻히지 못하고
나는 돌의 심장 위에 작은 돌을 얹었다
 
어제 벽시계가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 폭발물처럼
산산조각 나는 유리컵
놀란 고양이는 총알처럼 튀어 올랐다
 
시계가 숨을 쉬지 않았다
내 손이 닿으면 바늘이 가고
손을 놓으면
꼼짝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안았을 때
심장은 고장 난 시계 침처럼
쿵쾅거렸다
고양이의 심장이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수리점에 맡긴 벽시계는
부속을 전부 갈아야 했다
나는 시간 밖으로 추방당한
국외자
 
나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고
시계가 없는 벽 위에
덩그러니 박혀있는 대못
 
푸르스름한 불안은
시계가 차지했던
벽으로 번져갔다
 
작은 돌은
그날 나의 별자리에 닿지 못했다

위상진
 
경북 대구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및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 
1993년 11월 월간 ≪시문학≫지에 
시 <길인당(吉印堂)>, <어촌(漁村)에서>, <장미수첩>, <꽃잎으로> 등이 당선되어 등단. 
광명문학 신인상 수상 
前. 미술교사로 재직, 구름동인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광명시지부 사무국장, 시문학회 간사 
現. 한국문인협회 광명시 지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햇살로 실뜨기>    시문학사  2001


고체의 회화
손미
 

사람은 액체다. 70%의 물로 구성되어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그렇거니와 작은 새 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몸속의 물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분 좋은 칭찬 한마디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기도 하고 사나운 말 한마디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감정은 물을 틀에 붓는 것처럼 변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불안과 공포까지 틀에 따라 우리는 다른 감정을 안고 산다. 이렇게 요동치는 액체가 되어 날마다 다른 결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특히 시인은 더욱 다양한 감정의 지배 아래 그 어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가장 맑은 액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 물컹한 액체가 부르는 고체의 노래 다섯 편이 있다. 위상진 시인의 「묻어버린 시계」외 4편을 보면 화자의 “복수심처럼 굳은” 테두리를 목격할 수 있다. 화자는 자꾸만 부서지는 손톱으로 굳게 닫혀 있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딱딱한 마음이 들어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 시인은 고체의 회화 展을 열고 독자를 초대한다.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 위상진 「묻어버린 시계」 전문
 
그림 속에서 발견한 “굳어버린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한다. 감정을 잃은 미라의 상태. 살과 피를 잃은 대상은 어쩌면 죽은 것일지 모르지만 시인은 대상을 장례(葬禮)하지 않고 몸을 뒤져 심장을 찾는다.
그러나 굳은 대상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것은 “세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딱딱할 뿐이다. 결국 깨지는 건 벽이 아니라 새의 살점이겠지만 대상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붉고 뜨겁게 열릴 테지만 화자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한때 생생하고 말캉하게 살아있었던 그것. 박제된 동물처럼 형체는 그대로지만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대상을 화자는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럼에도 화자는 대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시간의 잘못이라 정의한다. 물감이 굳는 것도 마음이 굳는 것도 시간 탓이다. 화자는 태엽을 풀어 시계를 묻어보지만 이런 눈가림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마음을 만류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땅 밑에 두고 화자는 다시 뚜껑을 열고 굳은 물감을 발견하고 그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굳은 마음이 용해되길 기다리며.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중략…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 「빈 잉크통을 들고」 부분
화가 두 사람이 실종됐거나 죽었지만 신문에서조차 그들은 “검은 네모 칸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화자는 입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네모 안에 갇혀야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체 되기를 거부한다. 어떻게 지켜온 마음인데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다” 화자는 그런 세상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며 왜 벌써 포기하느냐. 왜 머무르지 않느냐며 소리치고 싶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화자는 빈 잉크통 같은 빈 우물 속으로 두레를 집어넣는 것이다. 공허와 어둠만 길어 올리겠지만 아직 화자는 굳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중략…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다
- 「초승달」부분
그는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부동이 없다. 벽, 굳은 물감, 굳은 식빵처럼 요동도 없이 딱딱하기만 하다. 그의 마음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은 손톱이거나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들어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고체이다.
어쩌면 화자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무뎌지고 무거워진 대상을 굳은 대상으로 선정해 놓고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도망갈 자세로 “창가에서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으리라.
한 밤 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중략…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 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퍼지지 않았다
- 「초현실주의」부분
「초현실주의」에서 화자는 다른 시선을 부여한다. 화자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딱딱한 대상은 어쩌면 “딱딱한 식빵”이 아닌 “마네킹” 같은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 화자의 속에서 굳어버린 아이 같은 내 자신, 그래서 모두가 문을 닫고 폐업을 하고 굳어버리는 이 상황에서도 나는 굳지 않고 끝없이 온기를 유지하려 애쓴 것이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인 채 의식은 굳어가고 생각도 굳어가고 진실이 어느 것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화자는 왜곡되지 않은 진짜를 바라보고자 눈을 부릅뜬다. 인터넷 속 공간과 CCTV의 공간, 한번 걸리진 이곳에서 가짜들은 더욱 강하게 방류된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가식들 속에, 나의 가짜 말들도 떠다니고 있다.
이쯤에서 화자에겐 뾰족하고 독한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이 고체들을, 이 가식들을 부숴버릴 단단한 이빨 말이다.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사치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가?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전문
 
그래, 이제 단칼이 필요하다. 화자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 고체들을 부숴버릴 것인가. 형틀에 부어도 모양을 바꾸지 않는 이 고집들이 그녀 안에서 어느덧 단단해지고 있다. 껍질을 딱딱하게 하는 것은 방어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칼”로 화자는 이 방어자들을 깨부술지 더 단단한 모양으로 깎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모양이 궁금하다. 화자는 이 고체들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며 계속해서 흥미로운 노래를 불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계속해서 고체의 회화를 그려나갈 것이고 회화는 굳고 녹으며 독자를 대면할 것이다. 그녀의 전시회엔 테레핀 냄새가 진동하고 한쪽 벽에선 그 고집스런 회화를 뚫고 나가려는 머리 터진 새들도 보이겠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녀에겐 굳어버린 유리에 진심을 부으며 고체의 회화가 뚝뚝, 떨어지길 기다릴 고집이 있으니 말이다.
손미
2009년 『문학사상』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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