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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새로운것인가
- 김파의 《립체시론》 독후감
김관웅
우리 문단의 일부 문우들이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근간된 김파씨의 《립체시론》를 한번 읽어보라고 자꾸 권하기에 바쁜 와중에도 한번 대충 읽어보았다.
김파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김파씨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로부터 립체시 창작을 시도했고 그 기초우에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립체시론》을 태동하기 시작하여 금년에 《립체시론》이라는 이 소책자를 출판하였는데 태동으로부터 출판되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20년동안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김피씨가 많은 정력을 기울였음은 가상하게 생각하며 그 로고는 필자도 충분히 긍정하고싶다.
그런데 그 시학주장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미 90여년전에 미래주의의 중요한 멤버였고 후에는 초현실주의 중요한 멤버로 되였던 이폴리네르가 이른바 《립체시》를 창작하고 립체파시론을 주장한적 있으니 김피씨의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은 결코 낯설기만 한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은 이폴리네르의 《립체시》와 김피씨의 《립체시》, 그리고 김파씨의 《립체시론》을 비교하려는 목적에서 쓰는것이 아니다. 다만 김피씨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의 창의성 여부만 론하려고 한다.
김파씨는 《립체시론》에서 이른바 립체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있다.
《…즉 시주제의 다면성, 시결구의 다각성, 시형상의 양성, 시어의 다의성과 수사법의 복합성과 변이와 전환 등이 망라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구조가 외적 및 내적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립체구조, 립체형상구조, 립체수사구조, 립체어의 구조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호상 련관, 호상침투, 호상 배척되는 대립물의 통일체로 구성되여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수 있을것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있는 외적 및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있는 시라고 정의할수 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5〜16쪽.
김파씨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립체시는 모더니즘시들과는 대동소이하나 《모더니즘시에서는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복수성, 다시 말하면 주제의 복수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속에 또는 시창작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되는가 하는 그 규률성이 결여되여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65쪽.
면서 자기의 립체시나 자기가 인정하는 립체시들이 모더니즘시들보다는 한수 우라고 주장하고있다.
이른바 립체시에 대해 김파씨가 숱한 말을 했으나 그 요점은《다주제》라는데 귀결된다. 그런데 묻노니, 여운이 있는 좋은 시들치고, 특히 고대 동서고금의 영물시(詠物詩)들이나 현대의 상징주의나 이미지즘이나 초현실주의 등 여러 모더니즘 시문학류파들의 시들치고 어느것이 다주제가 아닌것이 있는가?
그럼 먼저 조선조시대의 명기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례로 들어 보자.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明月)이 만공산하니 쉬여 간들 어떠하리
이 시조는 적어도 두가지 뜻(혹은 주제라고도 할수 있음), 즉 자면의(字面義)와 암시의(暗示義)를 가지고있다. 자면의(字面義)를 분석해볼것 같으면 서정적자아는 의인화된 푸른 산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물과 대화하면서 한번 바다에 흘러들어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올수 없으니 밝은 달이 있는데서 한번 놀다가 가라고 권하는것이다. 암시의(暗示義)을 분석해볼것 같으면 벽계수(碧溪水)는 사실 벽계수(碧溪守)라는 호를 가진 멋쟁이 선비를 암시하는것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 자신을 암시하는것으로서 풍류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라는 멋쟁이선비더러 자기와 더불어 놀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 쓴 시이다. 이밖에도 이 시조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는 식의 급시향락(及時享樂) ― 제 때에 향락을 누려야 한다는 주제가 내포되여있다고 해도 별로 대과(大過)는 없을것이다.
녀석의 눈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쇠창살에 칭칭 감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오로지 천갈래의 쇠창살만 보였고
그 천갈래의 쇠창살 뒤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강인한 네 발로 유연한 걸음새를 보인다만
그 걸음새는 자그마한 쇠살창 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마치도 힘의 춤사위가 하나의 중심을 에돌기만 하는듯
바로 중심에서 위대한 의지는 현기증에 걸렸도다.
다만 이따금 눈까풀을 소리 없이 걷어 올리니
한폭의 그림이 침입해 들어오지만
사지가 긴장한 적막을 통과하고나니
마음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구나.
-릴케 《표범―빠리 동물원에서》
이 시에서의 자면의(字面義)는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것과 같이 빠리동물원의 살창속에 갇혀 탈출을 시도하느라고 쉴새 없이 맴을 돌다가 맥없이 주저 앉아버린 한마리의 표범을 그린것이다. 그러나 이 표범은 단순한 표범의 이미지만 전시한것이 아이라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릴케 자신과 릴케 같은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표범은 《천갈래의 쇠창살》속에 갇혀 쉴새 없이 맴을 도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방향상실과 곤혹 그리고 방황을 상징한다. 《위대한 의지가 현기증에 걸렸다》거나 전반 《우주》의 상실은 마치도 표범의 감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상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표범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은 바로 인간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 그것이다. 시인은 로댕한테서 객관적이고 랭정하고 정확한 조각수법을 배워 추상적인 관념(힘, 의지 등)을 표범의 각종 이미지(《강인한 네발》, 《피곤한 눈길》, 《맴을 돈다》, 《현기증》, 《춤사위》 등)속에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징을 통하여 발레리가 언급했던 이른바 《추상적인 육감》과 엘리어트가 제창했던 《사상의 지각화》의 효과를 획득했던것이다. 이 시는 시종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곤혹, 방황과 고민의 주관적정서를 상징하고있다.
모택동의 시(詩)나 사(詞)들에도 다주제를 가지고있는 상징성이 짙은 시들이 많고도 많으니 김파의 말을 빈다면 립체파 시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비바람은 봄을 보내고
흩날리는 눈꽃 봄을 맞네.
아직 벼랑에 고드름이 백장인데
꽃가지는 예쁘네.
예뻐도 봄빛을 다투지 않고
다만 봄소식 전할뿐.
산에 뭇 꽃들이 만발할 때에
그 속에 웃으리.
- 모택동《복산자 · 매화를 읊노라》
중국시론의 말을 빌린다면 모택동의 이 사는 그야말로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盡而意無窮)》, 즉 그 주제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 역시 김파씨의 주장대로 라면 다주제의 립체시다.
시의 상징성과 그에 따르는 암시성, 다의성의 특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론가들이 이미 수많은 견해를 발표하여 우리 문단에서도 그것이 지난 몇년동안 시인묵객들의 입에서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러니 상식으로 된지 이미 오래다. 특히 중국고대 시론에서의 《신운(神韻)설》은 전문 이 점을 연구대상으로 한 시론범주로서 중국전통시론범주에서의 핵심적인 범주로 된다. 그리고 중국시론중의 《의경(意境)설》이나 《언의상(言意象)론》이나 서양시론중의 《층차론(層次論)》 등은 모두 정도부동하게 시가 갖고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에 대해 탐구를 진행하였다. 다만 편폭상의 제한으로 이 점에 대해 충분히 부연하고 전개를 할수 없는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김파씨는 인류가 창조한 시론들에는 김파씨 자신이 주장하고있는 이른바 《립체시》 혹은 《립체시론》의 골자들이 적어도 천년 이전에 제기되였고 수없이 론의되여왔던 시학명제나 시론범주였음을 잘 알아야 하며 결코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나 창조가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해가 중천에 높이 솟아올라 다들 일밭으로 나갔는데, 늦잠꾸레기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날이 밝아왔다고, 자기가 세상에서 첫 사람으로 일출(日出)을 보았다고 소리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서양의 상징시와 상징주의시론을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꿨다고 새로운것이 되고 창의성이 부여되는것이 아니다. 또 중국의 신운설이나 의경설을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꾸었다고 새로운 발견이 되는것이 아니다. 모태주를 다른 술병에 쏟아넣고 다른 브랜드로 바꾸었다고 해도 모태주의 술맛이 변하는것은 아니다. 한 사기꾼이 자기가 모태주를 초월하는 명주를 만들어냈다고 떠들어댄다면 얼마동안은 풋내기 술꾼들을 얼려 넘길수도 있겠지만 고참 주류(酒類) 품상가(品嘗家)의 혀와 코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누구의 말처럼《우리 시단에서 김파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에 대한 반향은 랭담하지만 오히려 한국의 시단에서 반향은 뜨거웠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05쪽.
고 하여 김파씨의 립체시론이 대단해지거나 원래 없던 창의성이 부여되거나 원래 없던 과학성이 생겨나는것이 결코 아니다.
2005년 11월 14일 연길에서
<<문학과 예술>> 2006년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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