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조 오백년 력사에서 누구에게나 강직하고 청백한 관리이자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1418년에 태종이 세자를 폐위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황희가 나서서 폐장립유(廢長立幼:세자를 폐위하고 다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는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다가 강직되여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하였다.
황희는 정치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인간관계에서는 처처에서 관용의 미덕으로 처처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였다.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세상사 시시비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이 없기 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 )’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보아야 하지 않을가?
우리는 황희의 몸에서 중용사상을 엿볼수 잇다. 황희가 두 녀종의 말과 조카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한것이 바로 중용사상의 체현이다. 그는 세 사람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함으로써 세 사람의 인격을 모두 존중하였다.
중용지도(中庸之道) 혹은 중용사상은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각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있다. 중용지도는 지난날 인격을 완성하는 립신철학(立身哲學)의 핵심으로서 많은 지성인들의 중용지도를 자아수양의 최고목표로 삼았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 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국의 현대사에서는 주은래 총리가 중용지도의 전범이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력사의 긴요한 시기마다 정치적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관용의 자세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혁명시기의 주은래 총리의 태도이다. 그는 문화혁명으로 많은 고급간부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모주석의 뜻을 크게 거슬리지 않는 전제하에서 일을 령활하고 타당하게 처리하여 억울하게 페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해에서 건져냈다
중용지도는 한 개인의 인격수양에서도 적용되지만 나라의 정책이나 국제적인 외교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있은 1차국공합작과 2차국공합작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중용지도의 발현이다. 그것은 중국이 중용지도의 출산국였기에 가능할수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으로 사분오렬이 되고 경제적으로 엉망진창이 된 낡은 중국을 건지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리념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방책으로 제1차 국공합작을 합작을 선택하게 되었고 항일전쟁때는 외세를 몰아내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였으므로 국공합작이 가능했다.
중용지도는 한 나라의 국내정치에서도 실행될수 있고 국제사무에서도 실행될수 있다. 일례로 중국이 56개민족에게 베푸는 관용의 정책은 모종의미에서의 중용이며 여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기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중립국들의 태도도 역시 중용지도로 풀이할수도 있다. 그 외 나라와 나라지간에도 중용지도가 통할수 있다.
혹여 이떤이들은 중용지도와 명철보신을 혼동할수도 있는데 량자는 차원이 다르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중용지도에는 자기의 인격을 고상히 하면서도 남을 배려한다는 관용의 미덕이 있지만 명철보신하는 사람들은 정의와 진리를 모두 본체만체하고 오로지 지신의 안위만을 위한다.
중용지도가 개인과 개인 사이, 가정과 가장 사이, 이웃과 이웃사이,나라와 나라사이에 타당하게 적용하면 평화와 화목이 도모될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가끔씩 중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것이다.
중국민족 2013년 제5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