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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어
1947년.
새봄이 찾아온 대지는 생기로 넘친다. 겨우내 설한풍속에서 떨던 온갖의 풀들이 대지의 따스한 기온에 함성을 지르면서 소생하고 얼음풀린 송화강의 도도한 물결은 격파드높다.
렬차는 투지로 들끓는 전사들을 싣고 경쾌하게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김려홍은 차체의 가벼운 률동속에서 기분좋게 사색에 잠겼다. 부대는 토비숙청을 끝마치고나서 20여일간의 정비훈련을 하고는 그것이 끝나자 다시 새 전투임무를 맡고 싸우려 남부전선으로 나가고있는 것이다. 비록1년반남짓한 사이였으나 지나온 로정은 실로 범상치 않은 나날들이였던 것이다.
새해의 벽두에 북만백성들에게 피빚을 많이 져 혈채가득한 사문동을 끄끝내 붙잡아서 처단함으로써 토비숙청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동북민주련군의 조선부대는 공산당의 령도밑에 다른 형제부대와 함께 피어린 싸움을 억세게 하여 북만에서 한때 그처럼 득세하여 굶주린 이리떼마냥 살판잡이로 날뛰던 10여만의 간악한 중앙선견군 토비를 깨끗이 숙청하고야말았다. 하여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설함에 유리한 기초를 닦아놓은것이다.
려홍이는 고개를 돌리여 무한한 신뢰와 경모에 찬 눈으로 박퇀장을 비롯한 왕정위, 마참모장, 김영장 등 부대의 지휘원들을 다시금 보았다. 오늘따라 더 근엄해진 이들이였다. 박금록, 김청송, 리춘성 그리고 녀위생원들인 혜옥이, 옥금이, 춘자... 이네들도 다가 오늘따라 더 억세보였다. 아, 이들 모두가 그 고난의 세월에 함께 몸과 마음을 다바쳐 싸워온 정든 전우들이고 친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섭섭하게도 장패장과 리홍석이를 비롯한 여러 전우들은 오늘 함께 가지를 못한다. 승리는 이같이 가슴속에 두고 두고 영원히 잊지 못할 전우들의 생명으로 바꾸어 온 것이기에 더욱더 보귀한게 아날가!...
마주앉아서 차창밖을 내다보던 혜옥이가 머리를 돌려 정겹게 보면서 생글거린다.
<<김동무, 저걸봐요. 차가 철교를 건너네요!>>
<<오, 그렇구만! 여기가 바로 재작년 8월에 내가 복룡이와 함께 걸어 건넜던 그 다리요.>>
려홍이는 부대가 아르금시를 떠날 때 부상당한 몸이 채 완쾌되지 않아서 아직 출원을 할수없는 왕복룡이가 남부전선으로 떠나는 전우들을 전송하면서 승리의 그날에 다시만나자던 부탁을 상기하면서 말했다.
<<그때 난 아름다운 환상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더랬지. 그런데 엄혹한 세월은 나의 그 환상이 너무나도 어리석었음을 알려주었소.>>
<<이제 다시 돌아갈 때면 환상이 아니라 진실로 아름다운것을 안겠죠.>>
<<언제말이요?>>
<<언제겠어요, 우리가 잘 싸워서 반동파를 말끔히 소멸고 이 땅에다 인민의 새 국가를 세우는 그때죠.>>
<<그땐 누구하고 동무할가?>>
<<아니 참, 누구겠어요?... 난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막 기쁘기만 해요.>>
<<옳아, 나도 그래. 하하하!..... >>
두사람은 마주보며 즐겁게 웃었다.
렬차는 투지로 들끓는 전사들이 힘차게 부르는 노래소리를 싣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나가자
생사적 운명은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러 나가자 !
1974년 5월 초고. 1981년 10월 제5차 수개. 가목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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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한 여러인물들 중 진짜이름으로 씌여진것은 부정인물인 사문동 하나뿐이다.
사진은 심문과 심판이 끝났기에 곧 형장으로 가게 된 사문동이다. 주위의 군인복입은 이들이 그때의 민주련군인데 장소는 벌리(현정부앞마당)다. 때는 1946년 12월 3일.
뒷배경으로 되는 두 인물은 주덕과 모택동의 화상이다. 바로 그날 안충모 군인아저씨가 붙잡은 원쑤를 심판하니 네가 꼭 가봐야 한다면서 손을 끌었다. 하여 나는 그를 따라갔는데 무대왼쪽 바로 아래의 땅바닥에 앉아 그 장면을 올려다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정부서쪽으로 얼마가지 않아서 흐르는 물은 많지 않아도 꽤나 널다란 강이 있는데 그 강 이름이 “연자하”다. 그 강을 건너 다리가까이 길북에는 갖생긴ㅡ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17렬사모가 있었는데 사문동이 거기에다 하나하나 무릎꿇고 절을해야했다. 사문동은 처음에는 불복했다가 총박죽에 궁둥이를 둬매 얻어맞고서야 곰상해졌다.
그는 강뚝에 올라서자 총을 맞고 넘어갔다. 그때 그는 나이 60세였다.
이튿날이다. 나는 아침도 먹을 념을 하지 않고 달려가봤는데 밤새 머리가 없어지고 거지들이 달려들어 옷까지 벗겨내 알몸뚱이만 그대로 버려져 있던것이 그 다음날에 이르러서는 중간에 달렸던 생식기마저 잘려 없어졌다가 하루 더 지나서는 시체가 없어지고말았다. 시체는 사문동의 친척이 가져가고 생식기는 어느 한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거지노친이 잘라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비록 원쑤기는 해도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참혹하다는 감이였다. 사문동의 머리는 한동안 기차에 달고다녔다. 이제는 토비를 다 숙청했으니 안심들하라는 공시였다.
내가 알기는 사문동이 워낙은 좋은사람이였다. 그는 북만의 의란현과 화남현 접경지에 있는 토룡산(지금의 태평진)의 보동이였는데 일제개척단이 그곳의 땅을 수탈하니 이에 불만품고 각성하여 지방의 <<민중군>>을 조직하여 <<토룡산폭동>>을 일으켜 의란에서 파견된 이즈카라에테 일본군을 격파하고 항일에 나섰던 것이다. 그의 그런 영웅적인 반항은 세계를 놀래웠다. 그는 동북항일련군제8군 군장이 되어 항일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간고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본 관동군에 귀순하고 만 것이다. 그는 일본천황을 배알하여 그한테서 금두꺼비상을 받았다. 일본에 가서 충혼비에 맹세하고 돌아와서는 광복이 날때까지 벌리에서 협화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나의 부친은 성명이 김병념인데 위만때 징병에 뽑히여 석두하자에 가 훈련받고 돌아와 가목사역전 철도호로병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은건데 광복직후 합강성(가목사)에 민주련군독립퇀이 생기니 거기에 가입해 교련이 되여 의란에서 부대의 정편훈련을 맡아 지도하고는 그길로 인차 토비숙청에 나섰던 것이다. 그때 그의 직무는 정찰반장이였다. 이듬해의 11월중순에 그의 정찰반은 다른 한 정찰반과 함께 참모장 김해정을 따라 영평강에 적정을 정찰하러갔다가 그 마을 고지주의 밀고를 받은 사문동의 동당 마희산비도 100여명의 포위에 들어 3시간남짓한 싸움끝에 탄알이 떨어지고 후원이 없는 극악한 상황하에서 모두가 불붙는 집안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다.
토룡산이 내가 태여나 자란 복가툰에서 동북쪽으로 몇리안되거니와 나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모부도(장금산) 다가 사문동을 잘았다. 어머니는 사문동이 동북항일련군제8군의 군장이 되였을 때 그가 철띠를 만들어달라기에 하루 낮과 밤을 패가면서 악전고투해 손마선으로 70개를 만들어 준 일이 있었다면서 생전에 나와 그 일을 뇌였던 것이다. 내가 사문동을 본것이 세번. 두번은 광복이 나서 운두높운 장교모를 쓴 그가 제 무리를 끌고 우리 마을에 들렸을 때고 마지막 한번은 대머리인 그가 모자도 쓰지 않고 사형당할 때였다.
나는 아버지가 사망되여 부대에서 자라는기간 군인들이 늘 하는 토비숙청얘기를 즐겨들은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나는 장차 글을 배워서 알게되면 그것들을 아무때건 꼭 재미나는 이야기로 엮으리라 맘먹었던 것이다.
나의 눈에 제일익은 몰골이 아버지와 어머니였거니와 김동철을 비롯한 김명세, 김해정, 류쿤(연안에서 파견된 한족 정위)같은 민주련군의 지도급인물들과 사문동을 비롯한 손팡유(우리마을 복지주)와 그의 아들딸이였다. 나는 내 머리속에 인상이 깊은 그들을 늘 상기하다보니 그들을 모델로 하여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구상하고 쓰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형상은 김려홍이고 어머님의 형상은 남혜옥이다. 아버지는 그냥 민주련군 정찰병의 위치에다 놓고 부대재봉소의 일을 했던 어머님은 위생병으로 신분을 바꾸어서, 나이도 퍽 적고 미혼의 관계로 만들어 소설의 이야기를 꾸민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다가 모델로 응용이 된 것이다. 그저 그랬 뿐 그것이 진짜로는 될 수는 없었다. 황차 성명이 다가 다르지 않은가.
모델은 소설창작에서는 홀시할수도 빼놓을수도 없는 하나의 기법인 것이다. 한데도 <<문화혁명>>이 오니 다른 심보를 품은 자들이 그것을 트집잡고 너는 제부모를 모델로 했으니 그것은 그들을 미화한 것이고 기념비를 세우는것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왜서 공산당은 노래하지 앓고 그런짓을 하느냐면서 <<반당분자>>라 쓴 커다란 패쪽을 만들어 목에다 걸어놓고서는 나를 등척의 졸개라느니 오함의 졸개라느니 료말사의 졸개라느니 하면서 옹근 4년간 이마을 저마을 끌고 다니며 투쟁했거니와 지어는 아예 죽여버리자고까지 맘먹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를 작가로 되지 못화게 콱 밟아 납작하게 만들자고 구호까지 부른것을 보면 그놈의 혁명열의가 그야말로 구중천에 치달아올랐던 것이다. 아무 원쑤진일도 없었건만 사람이 어쩌면 그정도까지 지악해진단 말인가?... 까놓고말해 저들 중 어느 누구의 부모가 토비들 손에 재난에 빠진 제동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인민의 새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피한방울이라도 흘렸던가? 내가 알기에는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런 주제에 투기분자라느니 계급이색분자라느니 하면서 이를 앙가물고 남의 렬사증과 추도식사진마저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으니 뭐라해야하는가?
시기와 질투는 악이고 미친개가 사람을 문다.
공산당은 똑똑해져야한다.
이제 또 그따위 빨갱이들을 혁명자라고 길러내여 생사람잡이를 하게한다면 이 나라는 망할것이다, 정말 다 망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들다가 이른바 립장이 가장 견정하다고 떠벌린 당원들이기에 내가 하는 소리다.
칼탕을 쳐버려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들!
지난날 그들이 저지른 행실을 보면 그것이 그저 무지막지한 자들의 극단적인 시기와 질투에 바탕을 둔 미런한 보복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내가 감지하고 너희들도 인간이면 장차 아무때건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뉘우칠 날이 있겠지 하고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 그저 참으니 다행인줄로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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