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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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2015년 05월 03일 11시 36분  조회:2127  추천:0  작성자: 김송죽
 

 

                     스탈린그라드 전투

                                                  온라인 뉴스 번역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제2차세계대전기간 나치스 독일이 쏘련의 남쪽에 있는 스탈린그라드를 빼앗기 위해 발동한 전투로서 1942년6월28일에 시작되여 이듬해인 1943년2월2일에 끝났는바 쏘련이나 독일이나 결국은 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다.

   내내 승리했다는 첩보를 듣는데만 습관되였던 독일사람들을 놓고 보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지 못하고 패함으로 하여서 여직까지의 그 습관은 타격을 받았거니와 그럼으로 하여 심리상 전변을 가져오게 되였던 것이다.

   “....전패 소식이 들려오자 독일사람은 모두다가 몹시 놀랬다.”

   1943년2월4일 히틀러의 선전부장이였던 괴벨스는 이같이 승인했다.

   이미 작고한 영국의 좌파역사학가 에릭 홉스봄은 생전에 쓴 평론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상황을 요약해 추려봐도 빤한일이였다. 독일이 전패하리라는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승리자였던 쏘련은 대체 어떠했는가? 전투에 대한 감상은 어떻고 운명에 대한 생각은 또 어떠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당시 이사크 이즈레위치 밍터스와 그가 책임지고 조직되였던 “애국전쟁역사위원회”가 해놓은 문자기록들을 보면 알수있는 것이다.

   그들은 1941년부터 관방의 허락을 받고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면서 싸운 쏘련군인들을 채방했던 것이다. 그들의 채방에 응한 사람을 보면 병사로부터 군관에 이르기까지 전면이였는데 그 가운데는 비행사, 탕크병, 포병을 비롯하여 각 병종의 군인들이 다 있었다. 그들은 다가 자신이 전쟁에 대한 생각과 견해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특히는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에 대해서 말한것이 더 많았다. .

   스탈린그라드전투가 끝난지 오라지 않아서 “애국전쟁위원회”특파원들은  비밀을 엄격히 지켜줄것을 담보하고 스탈린그라드보위전에 참가했던 군인과 장병 215명을 채방했다. 한데 생각과는 다르게 채방에 응한 그들거의가 전쟁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상급의 결책을 비판하고 증오까지 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너무나 기탄없이 솔직히 말했다. 하여 그것이 외려 모쓰크바에서 요구하는 선전기조에 맞지 않았기에 쏘공중앙은 반복적인 연구끝에 그중의 일부만을 공개하고는 그 자료들을 깔아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1945년후부터는 되도록 영웅적인 사적들을 많이 발굴하고 쓰딸린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구가하게끔 방향을 돌려잡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놓은 자료가 무려 5000여 건이 되였는데 그들은 그 자료들을 당안관에 처넣은채  무심해졌다. 그후 오래도록 누구도 그것을 보자고 찾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1년에 이르어서야 미국의 뉴저지 럿거스대학에 있는 헐 베이커가 흥취를 가지고 10여년간이나 모스크바를 드나들면서 그당시 쏘련군인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얼마간 골라서 두루 공개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인즉은 “강압적인 정치고동이 그 무엇보다도 무섭거니와 따라서 효과도 컷다”는 것이였다.

 

   헐 베이커의 노력에 의해서 “스탈린그라드협약”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보면 전쟁에 참가했던 전사들의 사진은 물론 그들을 방문했던 기간에 상관되는 배경과 기록들도 두루 나오는데 한마디로 종합하면 스탈린그라드전역은 “명령과 죽음”이였다는 것이다.

   독일군과 쏘련군은 다가 대방을 죽이였는데 혈안이 되어 날치였는데 쏘련군에서는 지어 제 동료를 처결한건만도 적지 않았다. 당시 쏘련주둔군부대의 최고지휘관이였던 바실리추이코프 중장은 “애국전쟁역사위원회”에 향해 자기는 겁쟁이 몇을 직접 없애버렸다고 승인하면서 “나는 9월14일 그 하루만도 한 부대의 지휘관과 인민위원을 총살했고 그 다음날에는 두 개 려의 지휘관과 인민위원을 총살해서 모두 내앞에서 벌벌떨게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지금의 자료에 보면 쏘련홍군내에서 그같이 “전쟁겁쟁이”이라 몰려서 상관의 총끝에 목숨잃은 장교만도 300명이나 된다. 

 

   “스탈린 그라드협약”에 제시된 것을 보면 쏘련군병사들은 희생을 감수했는데 “독일보다 더 끔찍했다.”고 했다. 전투를 독려하는 조치같은건 부차적이였고 부대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정치선전이 제일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고 밝히였다. 모든 중대의 정치위원들은 불철주야 공산당원은 남먼저 희생해야한다고 선전을 해서 전체를 동원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했길래 부상과 사망이 제일많았던 1942년8월부터 10월사이 쏘련군을 보면 당원이 원래는 2.85만명이던것이 5.35만명으로 급증한 것이다. 무엇을 표명하는가? 그것은 그들 다가 화선입당을 하고는 그 자리로 용감히 죽음을 맞으러 빗발치는 탄우속으로 뛰여들어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정위들은 틈만있으면 “당일영웅사적” 전단을 맏들어 큰 사진과 함께 알리였는데 부대내부에다 발표한건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장려받은 사람의 고향과 친구에게까지 알려주느라고 부쳐보냈던 것이다. 

   헬 베이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세상사람은 누구나 다 알아야하거니와 따라서 인정해야 한다, 당시 쏘련군은 최고도로 정치화 된 강대한 대오였던 것이다.”  

   쏘련홍군 제64집단군 보병38사 정치위원 제르· 야버그가 토로한 것을 보면 자기는 “선동가방”을 늘 몸에 지니고 참호사이를 들락날락했는데 그 가방에는 선전용 소책자와 서적외에 체커(跳棋)나 도미노골패같은 오락기구도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그렇게 한 목적은 “전쟁판에 나선 병사들이 되도록 두려움을 잊게하고 정치선전으로 인하여 받게되는 괴로움을 좀이라도 덜게하자는 것이였노라했다.

   규납하면 그같은 정치고동이야말로 쏘련군전사들을 내심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의지를 굳힐 수 있었고 싸움판에서 독일병사들보다 더 용감해지게 만든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이 나를 야만인으로 만들었다”

   한 쏘련홍군전사가 토로한 말이다. 

   정치 선전의 역할이 사람을 그지경에 이르게했으니 그러한 선전을 어찌 홀시하고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정치선전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헐 베이커가 연구해서 도출해 낸 결론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른 한편, 베이커가 연구하여 찾아낸 결론이라면,보통병사일수록 “애국주의”요 “숭고한 리상”이요를 적게 웨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전쟁터에서 살아 남기 위한 원시적인 욕망은 그 누구나 다 갖고있길래 적을 극도로 증오하면서 사악해졌다는 것이다.

   쏘련땅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살인하고 략탈하는 것을 보고 그 누군들 분노하지 않겠는가.

   “공원에 있는 나무들에다 젊은녀자와 아이들을 목을 달아매여 죽인것을 보니 나는 치가 벌벌 떨렸다.”

   대령 피터샤란스키의 말이였다.

   독일군은 너무도 잔인했다.

   눈을 찔러 고통스레 만들어 죽이고 손톱을 뽑아 떨게 만들어 죽이고 태양혈에 못을 박아 죽이고.... 별라별 악한짓들을 다했다.

   쏘독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쏘련사람들은 그래도 독일사람은 문명한줄로 알았는데 그런게 라니였다. 그같이 야만스레 악하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즉 그들의 잔폭성에 세상이 왜 놀라지 않으랴?

   포로를 심문했던 한 쏘련군관은 “그자들은 도둑질과 략탈을 일상적인 생활로 여겼다”고 기록하고는 이어서 “그러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죄책감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라고 적어놓았다.  침략자로서 그같은 악행만을 저지르니 쏘련군인들은 치를 떨면서 독일군을 하나라도 더 죽여버리자고 결심을 내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즉 반성을 모르는 침략자의 그같은 역행이 결국 쏘련사람들의 격분만 더 자아내서 포로된 독일군은 고스란히 그 보복을 받게되였던 것이다. 

   “쏘련병사들은 다가 독일군을 하나라도 더 죽여버리자고 맹세했다”

   쏘련군의 선전공작대가 제공한 자료였다.

   저격수 아나톨리 체홉이 “애국전쟁력사위원회”에다 제공한 자료에서 객관인 우리는 그의 적개심으로 인한 그 한 사람의 심리변화가 어떠했는가를 알수있다.  

 

   “처음 나는 내가 하는 짓은 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독일군이 우리 동포들을 학살한 것을 상기하고는 증오가 끓어올라서 한놈이라도 더 잡아치워야지 하고 가차없이 총을 쐇던 것이다. 저런 놈들은 싹 없애치워야 한다. 이 세상에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게해야 한다.”

   이리하여 쏘련군저격수 체홉이 적의 대갈통을 텃쳐놓은것만도 40여명에 이르었다.
   광신적인 복수는 그같이 무서운것이였다.

   러시아영화《에너미 앳 더 게이트》(兵临城下)에 나오는 주인공의 원형은 독일군을 242명이나 그렇게 쏴눕힌 “쏘련영웅” 바실리인데 전투 끝에 한 그의 말을 들어봐도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동요는 크다는 것을 알수있다.

   “지금 내 신경은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뒤흔들린다. 넌 기억해두거라, 회억은 평생 강한충격을 갖고있음을.”

   그의 이 말에 전우가 한마디 보탰다.

   “그때 스탈린그라드에서 보낸 다섯달은 다른곳의 오년맞잡이였다.”

 

   70년전의 그 엄동설한에 본래는 진공위치에 놓였던 독일군이 되려 쏘련군의 포위에 들어 량식을 단지 공중으로 간신히 공급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량도 적었으니 포위된 독일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6군단 사령관 파울루스가 부하들을 희망이 있다고 계속 꾸준히 격려했지만 그의 그러한 격려와 선전이 엄습하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위를 뚫고 나오려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마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독일군인들은 과연 운이 없었다. 죽음앞에서 독일군인들은 하나 둘 죽어갔고 죽기싫은 자들은 손을 들었다. 그래서 포로로 취급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가는 신세로 되고 만 것이다.    

 

  1943년1월의 마지막날, 폴 러스와 그의 동료들마저 쏘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먼저 포로된 것은 레오니드 비노쿠어였는데 그는 백화점 지하에서 발견 되었다. 공공 화장실이 그 독일 최고사령관의 은신처였던 것이다.

   “내가 갔을 때 그는 누워있었는데 수염은 두 주일이나 깍지 않았는지 더부룩했고 용기란 전혀찾아 볼 수 없었다.”

   “오물, 노폐물, 또 한 무더기의 무슨 물건인지 허리까지 올라오게 쌓아놓았는데 상상하기조차 어려울지경으로 더러웠다.”고 다른 한 쏘련 장교 아나톨리가 말한것이 “애국전쟁협의회”의 수집노트에 기록되여있었다.

  히틀러는 저의 장교들을 잘못믿었다.
   쏘련병사들은 다가 경멸하는 눈길로 독일포로들 대했던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지부를 찍은 쏘련홍군소장 이반부울 마코프의 눈에도 쏘련홍군에 비하면 “그자들은 용기란건 전혀 없고 그저 죽을까봐 벌벌 떠는 겁쟁이”로만  돼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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