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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죽
내가 모이자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아직도 독립군장령이였던 김좌진을 놓고 찧고 까블으는데 좋은 현상이 아니다. 독립혁명은 제대로 하지 않고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서 파쟁을 일삼았던 화요파잔얼 량환준의 외곡 된 력사증언을 아직까지도 그냥 믿고 곱씹어서는 아무런 좋은 점도 없다. 그런다면 후대교육까지 해치는 것으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첫째, 그가 살아 생전에 시종 고집해온 김좌진장군살해 리유를 보자.
“북만의 민족주의단체인 신민부의 반동두목 김좌진은 1929년에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는 松島)와 결탁하여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적이 되었다. 그는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하였고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여주었다. 김좌진은 이 돈으로 산시(山市ㅡ해림서쪽)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첩을 얻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편 <<동성철도사령부와>>와 결탁하여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 신민부무장부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치떨리는 살인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조공만주총국(화요파)에서는 더 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서 김좌진을 없애치우려고 결정지었다.”고 했다.
김좌진이 과연 그러했단말인가? 여기서 한가지, 신민부의 독립군이 무장을 갖고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서 수상해보이는 사람은 수색, 체포한 것은 사실이다. 신민부는 그때 부(府 )를 보위하는 무장대원이 500여명가량되었는데 그들은 신민부의 동정을 탐지하려는 밀정을 방지하기 위해 그같은 보위조취를 엄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게 뭐가 잘못된건가? 그래 내부로 기여드는 적의 밀정도 방지하지 말아야한단말인가?
화요파는 그때 무슨 “정부”를 갖고있었는가? 없었다. 분렬을 일삼으면서 독립혁명보다 파쟁에 눈에 피가 져 돌아치다보니 종당에는 조선공산당을 파멸에로 몰아갔기에 공산국제로부터 해산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윗과 같이 김좌진장군을 살해한 리류를 댔는데 김좌진이 과연 그렇게 했단말인가? 그것은 일제가 자기들의 손으로는 김좌진을 없애지 못하겠으니 반간책(反間策)을 쓰느라고 일부러 조작해 퍼뜨른 소문이였는데 하요파는 그 소문을 딱 믿어주고 독립혁명진영의 난국을 한창 힘겹게 헤쳐나가고있던 제 사람을 적으로 몰고 살해하였으니 미런한 짓을 해도 대단히 미런하게 한 것이다. 세상에 그래 이보다 더 머저리짓이 어데있는가?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1920년 10월, 조선독립전쟁사상에서 금자탑이 되는 청산리리대첩에 관한 것이다.
1921년 1월 21일자, 상해림시정부의 <<독립신문>> 제91호는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부하 300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중 적이 자상사살한 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독립신문>>은 이어 1921년 2월 25일자에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상해림시정부에 보낸 일본침략군의 참패와 독립군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싫었다.
적의 실패리유
(1) 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은 적을 경시하는 것인데 심산 협곡을 별로 수색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陷沒)을 당함이며
(2) 국지전(局地戰)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중에서 종종 자상(自傷)충돌을 당함이며
(3) 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비겁심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不精)하여 1발의 효과가 없는 란사(亂射)를 행할 뿐이였다.
아군의 전승(全勝)리유
(1)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奮勇)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량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발휘함이요.
(3) 응기수변(應機隨變)의 전술과 예민(銳敏),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에 출함이다.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3,300여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측은 전사자 60명과 부상자 90여명에 달하였다. 청산리회전소식은 재빨리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에까지 퍼졌다. 지어는 일본에서까지 커다란 편폭으로 청산리회전에 대한 보도를 실었다. 이로하여 김좌진장군은 명장으로 세상에 이름날리게 되였고 원쑤들은 참패를 승인하여 훗날 청산리골에다 <<초혼비>>까지 세우고는 이를 브득브득 갈면서 갖은 방법을 다하여 김좌진장군은 없애치우려고 별렸던 것이다.
청산리전투 후 해림의 산시마을에다 신민부를 세울 때였다. 당시 상해의 임시전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은 보도를 실어 독립진영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金佐鎭씨의 活動
『敵紙 大板朝日新聞 級 長春實業新聞에 大韓獨立軍團總司令 金佐鎭씨가 哈爾濱 敵領事館에 歸順하였다는 設을 記載하였으나 此는 全然無根함이요. 敵은 우리 사업을 妨害키 위하여 反間策을 弄함인것인즉 此에 속을 리가 없으러니와 氏는 오직 實力을 養成키 위하여 今年度부터 吉林省 某地方에 屯田制를 大規模로 實行하기로 하고 一方으로는 士官養成所를 設立하야 現今 百餘名의 士官을 敎授하는 中이라더라. 』
상해의 림시정부에서 이같이 똑똑히 알려줫건만 화요파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는 가를 보라.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서 당파싸움을 “혁명”으로 여기면서 해산을 선고했건만 흩어지지 않고 종파활동을 계속했던 이 비법의 사이비한 혁명자 화요파의 잔얼들은 결국 일제의 반간책에 보기좋게 넘어가 원쑤를 대신해서 그자들의 속을 후련히 풀어 준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미런한 머저리 짓이 어디에 있는가? 가뜩이나 단합되지 않아 위기로 몰리고있던 독립혁명진영은 그 사건으로 하여 혼란에 빠져 거의 붕괴의 지경에 이르고말았던 것이다! 적의 간계에 속아넘어가지 말라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편 사람을 원쑤로 보고 살해한 화요파, 그자들은 대체 적을 몇이나 잡고 그따위 엄청난 꼴불견의 짓을 했는가? 그래놓고서도 되려 제쪽에서 그것을 정당화하느라 무던히도 오래동안 비방과 모욕을 날조해왔으니 력사와 민족의 앞에 죄를 져도 단단히 진 것이다. 인간이라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줄을 알 것이다. 한데 지금세월에 이르리기까지도 그런 자가 생전에 제공한 외곡된 증언을 그냥 믿어주면서 제 민족영웅에 대한 비방과 모욕을 끊지 않고 계속하니 과연 분노 할 가슴아픈 일이다.
량환준이 <<청산리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가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머리가 잘못 된 자나 지어낼 수 있은 악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왜서? 력사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밀산의 당벽진사건은 김좌진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나는 이미 5년전에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문제 를 놓고 몇사람과 론전을 한바탕 벌린적이 있었다. 다시 반복하려하지 않는다. 흑룡하는 이미 조글로에 올려져있는 나의 아래 두 문장을 읽어보기바란다.
(1) 25. "독립군은 누구며 화요파는 무엇인가?"
(2) 166. 사론 "당벽진참안과 서일의 조천"
이상 두문장을 읽어보고도 달통되지 않고 자신이 있다면 내놓고 론전을 해보자. 감히 그러지 못하겠거든 김좌진장군을 비방한 글들을 당장 내리워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모이자”에 올릴 방법이 없어서 조글로 나의 미니홈에 그냥 올린다. 흑룡하가 한번 꼭 봐얄텐데. 그를 아는 이가 있어서 본인한테 알려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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