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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지하에 매장된 독립군 13원혼
2012년 04월 17일 21시 11분  조회:2279  추천:0  작성자: 김일
     이 이야기는 내가 젊었을적에 어머님께서 들은것이다. 나의 외가집은 청조말년에 러시아에서 호두로 이주하였다. 정착해서 10여년후 어머님이 9세 나던 해 한 사변을 겪게 되였으니 그가 바로90년전 홍범도부대 등 독립군 부대가 지금의 호두진을 거쳐 이만으로 건너갈때 발생한 사건이였다.

 그때 그들은 열번에 나뉘여 러시아국경을 넘어 갔는데 마지막 번째로 호두 부근에 도착한 독립군 모연대가 한인 마을(그때 관청에서 이주민들에대한호칭) 월아포에서 먼저 동북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고 이어서 그중 13명 관병이 화적패인 진동산비적부대에 피살 되였다.
    그때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모연대는 도합 40명이였는데 모두가 “끌날같은” 젊은이들이라고 하였다. 모연대가 월아포 아홉호 한인 동네에 들어설 때 마을의 주민들은 이 열번째 부대도 앞서 지나간 아홉 부대처럼 며칠 묵어가면서 통관절차를 밟아 가지고 떠나려니 하였다.모연대의 뒤엔 이젠 부대가 없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독립군 대접에 지칠대로 지쳤던것이다.
   
허나 일은 예상 밖으로 번져져 갔다. 모연대 관병들이 마을사람들이 지어준 뜬내나는 좁쌀밥을 먹고 미처 식후일미 담배 한대도 채 못 피웠는데 저 멀리서 중국인 부대가 수없이 이쪽으로 쓸어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던것이다.

    이 심상찮은 소식에 마을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이전에도 중국인 군대가긴하나 그건 세 받으러 오거나 소금단지 검사 오는 라졸로서 많아서 다섯을 넘기지않았다. 대부대가 쳐들어 오는건 아무래도 독립군을 겨누고 오는것 같아서 마을에서 인차 독립군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독립군들은 아마 집히는데가 있는 모양으로 잠시 침묵하고 있더니 한사람이 “에익 자식들과 한번 해보자.” 하니 모두들 호응하였다.

   독립군들은 마을앞에 나가더니 옥고프(전호)를 파기 시작하였다. 당장 큰 싸움이벌어질 태세였다.

   이윽하여 중국군들이 들이닥쳤다.그러나 그들은 독립군 진지로 돌격한것이 아니라 에돌아 마을로 들어 왔다. 마을사람들을 붙잡아 가지고 독립군을 협박 하려 하였는지 알수는 없으나 어쨋든 마을에 들어섬으로서 뜻밖의 수확을 한 셈이였다. 마을엔 독립군 장교 여라문명이 구들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꼼짝 못하고 포로되고 말았다.

   동북군들은 독립군 장교들을 마을앞의 그네나무에 달아매였다. 그러자 장교 한 사람이 “ 야들아, 너희 들어 오너라. 너희 안 들어오면 우린 죽는다. 빨리 들어 오너라”거듭 웨쳤다. 그소리가 어떻게 처절하였던지 마을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독립군들이 하나 둘 일어서더니 모두 총박죽을 질질 끌면서 마을로 들어 오기 시작 하였다. 중국군들은 독립군이 다가오는 족족 총을 빼앗아 내였다. 독립군들은 여태껏 가지고 다니던 무장을 빼았겼다고 대성통곡 하였다.그것이 우습다고 중국군들은배를 끌어안고 웃어대였다. 중국군들은 총을 수레에 걷어싣고 가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독립군들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장해제까지 한 중국 관청에서 통관수속을 밟아 줄리가 없었던것이다.
    중국군들이 무엇때문에 독립군 무장해제 하였는지 마을사람들은 후에야 알게되였다. 일은 독립군과 당지 토호인 김일령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던것이다.


    김일령은 중국인 토호로서 집 지키는 포수 여라문명까지 둔 큰 부자였다. 당지의 한인들은 거개가 그의 지팡살이(소작농)하는 사람들이였다. 모연대가 무엇때문에 그집에 갔었는지 알수 없으나 여하간 수 틀리는 일이 있은것 같았다. 김일령의 집엔 앞치마 두른 남자 다스포 (료리사)가다섯명이나 되였다. 그런데 독립군들은 기어이 김일령의 안해더러 밥을 지으라고 하였다. 당지 습관에 중국인 녀인들은 밥을 짓지 않는다. 올방자를 틀고 앉아 장죽에 담배나 담아 피우다가 남편이 밥을 지어 바치면 먹는 것이 당지의 민속이였다. 게다가 그 때 나이 좀 든 녀성들은 쪽발 (전족) 이여서 행동도 불편 하였던것이다. 가뜩이나 부자집 마누라인 김일령의 처가 되똑 거리며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밥을 혼자서 지으려니 그야말로 땀으로 미역 감을 지경이였다.이를 본 김일령이 가만이 있을리 없었다. 이름있는 토호인 그는 관청,비적 불문하고 모두사귀는 사람이였다. 독립군들이 밥먹는 사이 그는 말탄 포수를 현에 보냈던것이다. 현정부가 있는 호두는 월아포와 불과 15리 상거였으므로 중국군들은 독립군에게 숨 돌릴틈도 주지않을 수 있었던겄이다.

    일은 이쯤에서 끝난듯하였다. 관청에선 총을 빼앗아 가곤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비법 무장단체라고 축출하지도 않고 여기서 농사 지으란 말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독립군들이 어쩔바를 모르는것이였다. 기실 러시아로 건너 가러면 망서릴것 없었다.당시 중러 지간엔 국경 경비가 없었다. 당지 한인들은 러시아로 가는것을 마실다니는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내키기만 하면 하루 두번이라도 다녀오고 이만에 건너가서 기차를 잡아타고 허바르쓰깨 (하바롭쓰크) 해삼으로 바람 쏘이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립군들은 무장해제 당했으니 건너 가서 군법 처벌이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건너가서 일이 막막 해서인지 주저앉아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기실 마을 사람들은 위험을 느끼지 못한건 아니였다. 중국인들의 뒤를 끌어 가는 심리를 알고있는 그들은 독립군이 집단적으로 이렇게 눌러 앉아 있는것이 위험하단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홍범도 부대 600명이 열흘 묵어 가고 그 후에도 아홉번 부대가 “쏟아내려” 이젠 먹을것과 털 가진 짐승은 싹쓸이 하여서 삼태(한말 꾸면 세말 갚는것) 장리 좁쌀밥 밖에 대접할것밖에 없는 그들이라 이까짓것도 주기 아까와 하나 여길가봐 저어 했던것이다.

    화는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며칠후의 밤, 진동산 비적패거리가 마을에 덮쳐들었다손에 홰불과 날창을 든 놈들은 지옥의 무리귀신처럼 험악한 몰골을 해 가지고 고래고래 독립군을 잡으라고 소리 지르며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였다. 사람들을 우물가에 모여 놓더니 놈들은 남자들의 손바닥을 훑고 어깨자국을 검사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면서 독립군을 숨겼다간 몰살할줄 알라고 마을 사람들과 을러메였다. 기실 힘들게 고를 필요도 없었다. 손이 북두갈고리 되게 비바람 맞아 가던 구부정한 농군들과 교련장에서 발 맞추던 군인들은 기질과 피부에서 벌써 구분 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독립군열셋이 련이어 잡혀 나왔다. 모두 15명의 독립군 관병이 피신못하고 마을에 있었던것이다. 그중 두명은 17세 좌우의 애어린 전사였는데 비적들에게 걸려들자 하나는 마을의 툰장으로있던 나의 외조부 김창락을 붙잡고 형님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임씨성을 가진 장정을 붙잡고 형님이라 하였다.

일이 이쯤되니 나의 외조부도 임씨도 목이 날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옳다고 하였다. 비적놈은 이제 아니면 너희 몽땅죽는다고 하면서 그들 둘을 놓아 주었다.

    놈들은 붙잡은 독립군들을 마을앞에 끌어내다가 당장에서 총살하였다. 그중 금별이란 이름을 가진 독립군 장교는 총을 맞고 껑충 뛴것이 밭고랑 열두 고랑을 뛰였다고 하였다. 금별이 몸에서 단포끈이 나왔기에 놈들은 유난히 그를 치고박고 하였던것이다. 그는 피살된 독립군들 중 유일하게 당지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비적들이 무엇대문에 독립군을 살해 하였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김일령이 시켰다는 사람도 있고 일본놈들이 시켰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전에 비적들이 서일의 독립군부대를 밀산에서 습격한것을 보아 놈들이 독립군 뒤를 따랐을 수도 있는것이다. 무장단체인 독립군이 중국에 있는것을 중국 사람들은 달갑게 접수하지 않았다. 이들이 자국의 위협인 일본 사람들을 치는 부대라고 여기는 사람은 적고 우리 땅을 엿보지 않나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어찌보면 독립군 배척은 중국인의 민심이기도 하였다.

   비적들은 시신을 그대로 팽개치고 가 버렸다. 마을사람들이 총망히 시신을 묻었다.

   더욱 바빠난것은 나의 외조부와 임씨였다. 이제 비적들이 다시 오는날에 들통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의 외조부와 임씨에겐 정말 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로 놀러 갔었는데비적들이 오는날 마주치면 큰일이였다. 두사람은 밤도와 독립군 병사를 데리고 러시아로 넘어 갔다. 이만에 도착하자 아는 사람에게 두 젊은이를 맡겨놓고 춤판에서 동생들을 찾아내였다. 둘은 무작정 동생들의 뒤덜미를 잡아끌고 리발소의 문을 두드렸다.웬 영문인지 모르는 총각놈들은 머리태가 떨어지고 치머리를 깍게되자 입이 헤 벌어졌다. 그때까지 호두 부근의 한인 총각들은 머리태를 땋고 있었던것이다. 고태인 령감로친들이 너놈새끼들 뒤통수 세뼘되게 머릴 깍았다간 없다는 으름장에 마지못해 달고다니던 머리태를 오늘에야 요정 내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낮, 비적들은 또 덥쳐들었다. 놈들은 봉분을 보더니 당장 시신을 파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총 앞에서 별 수 없는지라 마을 사람들은 시신을 파내는 수 밖에 없었다. 놈들이 간다음 또묻을 생각이였다.
  
   그날 밤 피신한 독립군들은 기실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료들의 시신이 놈들이 말하는 폭시(暴尸) 당하는것을 보는 그들은 마을사람들을 나무람하였다. 마을사람들은대답이 구구 하였다. 말끝마다 “ 우리는 나라 위해 나선 사람들이요 ” 하는 독립군은 백성들이 접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또다시 시신을 묻었다.

    비적들은 늑대처럼 이악스러운 놈들이였다. 며칠 후 놈들은 또 와서 파 내놓으라고 하였다. 이렇게 파내고 묻고 묻고 파내고 하길 열세번 하였다. 놈들이 무슨 심산인지 희생된 수자가 13명이여서 열세번 파내게 하였는지 여하간 열세번 후에는 다시오지 않았다. 주민들이 비적들과 싱갱이질 하고있는 기간 독립군들은 뿔뿔이 헤여졌다.

그들중 일부는 러시아로 건너가고 일부는 간도쪽으로 나갔다. 제일 마지막 호두를 떠난 독립군인들은 봉분앞에 와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두만강을 넘어 같이 온 동무들을 이 거치른 만주 벌판에 묻어두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되지않고 동무들이 그 우악스러운 그것도 가장 너절한 호재(비적) 들에게 죽은것이 너무나 원통하다고 죽은이들도 눈을 감지못한 원혼이 되였을것이라고 이 원쑤를 언제 갚으랴고 가슴을 쳤다.

    이로서 호두 월아포에 독립군 13묘지가 쓸쓸히 세워져 있었다. 30년대 초기까지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묘지에가서 가토,벌초하고 제를 지내였다. 그후 그곳의 한인들이벼농사하러 요하쪽으로 떠나니 독립군묘지의 정형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젠오랜 세월이 지나고 목격자들이 모두 별세하고 지형지모도 많이 변했는지라 그때의 지점도 찾기 어려울것이다. 언젠가 어머님께선 나를 보고 여유가있으면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 특히 독립군 묘지를 찾아가 보라는것은 아니고 그때부터 출입이 불편하셨던 어머님이라 자신의 출생지이고 나의 증외조부의 산을 쓴 곳에 다시 찾아가시지 못하는 유감에 후손이라도 찾아갔으면하는 소원에서였던것이였
다. 그러나 그때는 무슨 큰일이나 하는것처럼 이런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곳에 가볼 생각을 하지않는다. 아직은 황막한 그곳이라 불편한 점이 많을것을 저어하여. 또한 내가 그곳에 간다고하여 무슨 의의가 있을일도 아니고.. 호두가 지척인 밀산에서 살고 있지만.그저 혹시 내가 그 사건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일것이란 생각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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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박첨치
날자:2012-04-20 17:11:07
이런 역사적 사실은 한국신문과 서로 소통해
발굴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조선 중앙 동아 문화일보 등기자가 취재하도록 협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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