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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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람과 한강기적
2010년 07월 03일 16시 27분  조회:5298  추천:23  작성자: 김정룡



신바람과 한강기적



우리민족어에 신바람이란 낱말이 있다. 신바람을 중국어로 옮기면 신풍(神風)이고, 일본에서는 카미가제라하고 역시 한문으로 ‘神風’이라 적는다.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는 신이 일으킨 바람이란 뜻인데 비해 한국어 신바람은 그 유래가 어떠하든 신의 바람이 아니라 개개인의 몸에 배인 활기찬 에너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는 인간의 주체가 배제된 객화(客化)의 존재인데 비해 한국인의 신바람은 인간이 주체가 된 주화(主化)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말하는 신바람은 중국의 신풍과 일본의 카미가제와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민족은 신나게 일 한다, 신나게 논다, 신나게 돌아다닌다는 등 신나다는 말을 흔히 잘 쓴다. 여기서 ‘신’은 중국이나 일본 혹은 중동과 유럽 및 기타 지역의 종교적인 ‘神’이 아니라 마음껏, 실컷, 하고 싶은 대로 활기찬 에너지로 즐긴다는 뜻이다.

바람은 원시 인류에게 있어서 우주의 제현상 중 가장 신비로운 존재였고 으뜸가는 신앙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에서는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풍류도를 발전시켰고 한조(漢朝)에 이르러 도교로 승화시켰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모하고 발전했다. 한반도는 삼천리금수강산이란 아름답고 멋진 자연과 맞물려 바람문화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욱 발전했다. 특히 신라는 공자교인 유교를 ‘예의풍교(禮儀風敎)’, 불교를 ‘석씨풍교(釋氏風敎)’라 부를 만큼 세상의 모든 문명 혹은 종교를 풍교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바람에 대한 숭배의식이 강했다. 신라 제24대왕인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특히 신라는 풍류도와 풍월도를 ‘멋’으로 승화시켰다. ‘멋’은 곧 신바람이고 신바람이 곧 ‘멋’이다. 신라는 이 ‘멋’과 신바람을 이용해 화랑도를 발전시켜 삼한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통일신라에 들어서 신라는 계속 ‘멋’과 신바람의 힘을 빌어 나라를 흥기시켰다. 일연의《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에 17만 6천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대가족문화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 호에 적어도 여섯 식구라 쳐도 경주는 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경주에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 상인 뿐 아니라 저 멀고도 먼 서아시아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넘나들었다는 기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주는 상업이 굉장히 발달한 도시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바닷길을 넓혀 신라의 상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듯 멋지고 흥성흥성하게 활기에 넘치던 신라가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내적 요인으로는 제51대왕인 진성여왕이 자기 삼촌과 불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천년 가까이 김 씨가 나라를 통치해오던 것을 제53대부터 박 씨로 왕이 바뀌었고 제56대 왕이 다시 김 씨로 되돌아가는 내분을 심하게 겪었다. 외적 요인으로는 당제국의 동아시아 질서유지의 패턴 속에 약 200여 년 간 평화시대를 누리다가 10세기 초 당제국의 멸망이 동아시아국제형세를 혼란에 빠뜨렸고 한반도도 후삼국 혼전시대를 맞이하면서 천년 사직을 자랑하던 신라가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천년 사직의 역사를 지닌 신라의 패망은 곧 ‘멋’과 신바람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고 한민족이 한민족다운 풍격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계기를 불러오게 되었다.

서기 918년 왕건이 송악(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고려의 개국을 선포한 이후 한반도는 본래 신라문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것이 송나라문화에 도취되어 토착적인 풍격이 강했던 신라문화는 점차 찬밥신세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는 신라문화의 정수인 화랑이 한반도역사에 끼친 영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왔고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든 판에 이를 반항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 송도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사건이 아주 연멸하여(사대주의파인 김부식집단이 국풍파인 묘청집단을 소탕한 이후 국풍이 소실되어가는 계기를 맞았음) 비록 직접적으로 그 감화를 받은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 화랑의 유풍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마찬가지인 우책이다.

고려 중기 ‘묘청의 란’이 진압된 이후 확실히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특징과 풍격을 잃고 송나라에 보조를 맞추려 애써왔고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6차례나 되는 침략을 받아 한반도는 완전히 초토화로 쑥대밭이 되었으며 몽골의 부마국으로 왕실에서 점차 몽골식 풍습을 따르는 등 자체문명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고려는 한편으로 불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무기로 삼고 한반도는 불교천하로 되었다.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이 말하던 ‘석씨풍교’가 아니라 완전히 중국식 대승불교였다. 불교는 인간의 개개인의 수도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고려사회는 횡적 패턴이었다. 비록 자체민족의 고유정체성문화를 잃어가기 시작했으나 송도는 주변국과 멀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상인들까지 찾아오는 국제항으로 되었으며 무역과 상업이 흥성했다.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도입해 중국의 도자기를 능가하는 청자와 백제를 만들어 이름을 날렸다.

고려는 신라의 ‘멋’과 신바람의 유풍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문명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허나 한민족의 ‘멋’과 신바람의 힘은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의 건립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정도전을 위수로 하는 조선의 국가건설방향과 방침내용을 설계한 <경국대전>의 집필자들은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횡적 사회패턴을 유교적인 수직패턴으로 바꾸려고 유교경전을 바탕으로 <경국대전>을 지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명나라에 잘 보이려고 국호를 ‘조선’과 자신의 고향인 ‘회녕(會寧)’ 둘 중 하나를 골라 줄 것을 명에 요청했고 그 후부터 태자책봉마저 명나라의 윤허를 받는 등 사사건건 중원조정의 허락을 받고나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자주권을 상실했다.

조선은 정치면에서 소중화로 자처하고 자금성의 정치 패턴을 한성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임금을 황제라 부르고, 조선에서는 임금을 왕이라 부를 뿐이었다.

문화면에서 천년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를 송두리 채 배척했다. 이것이 이른바 ‘존유배불(存儒排佛)’이다. 조선초기인 1446년 세종대왕이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 현상이 문화보급에 지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고 보고 한글을 지어냈으나 유생들은 한글을 ‘개글(犬字)’이요, 아녀자들이나 배울 글이라 하면서 목숨 걸고 보급을 반대하고 저애했다. 당시 유생들의 반대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어려운 한문을 유지함으로서 학문을 독점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일 한글을 보급하면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우려 때문이었다. 또 천성이 풍류적이었던 세종대왕은 음률가로 소문난 박연(朴堧)에게 수천 년 동안 흘러내려온 민속과 풍속을 채집하라고 명했다. 허나 유생들이 민속과 풍속은 ‘사풍(邪風)’이라 공격하면서 박연이 고생스레 채집해놓은 민속자료를 화롯불에 던져 없애버렸다. 이는 정말 통탄할 일이다. 중국의《시경》이 당시 주나라 민속과 풍속을 잘 반영했기에 오늘날까지도 중화민족의 민속과 풍속을 연구하는 역사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거꾸로 한국에는《시경》과 비슷한 역사자료가 전무해 민속과 풍속을 연구하는데 굉장한 애로가 존재하다. 또한 당시 유생들은 가령 누가 도서(道書)를 번역하려고 해도 이단이라 몰아붙였고 유교경전(주자학)외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고 기타 모든 문화를 말살시켰다.

경제면에서는 중국의 유교사상과 정신에 의해 생겨난 사농공상의 계층분화를 받들어 선비는 지고무상의 존재이고 농업을 중시하고 공(工)과 상(商)을 매우 냉대하고 천시했다. 그래서 도공기술이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업화되지 못했고 장사하는 사람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회 가장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사회풍토로 하여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해상 무역이 한파를 맞았다. 조선 후기에 보부상이 조금 설친 외에 한반도의 무역과 상업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사회면에서 전부 유교식 패턴으로 도배시켰다. 이를테면 인간과 인간 간의 대인관계는 전부 유교식 패턴에 따라야 했고, 가정문화는 전부 유교식을 따랐다. 고려 말기까지 여성들이 혼인자유, 이혼 자유 등 권리를 갖고 있어 남녀차별이 크지 않았다. 허나 조선조에 이르러 칠거지악, 삼종사덕 및 이혼불가, 재혼불가와 같은 계율을 받들어 부녀들을 가혹하게 압박했다. 필자는 정조 면에서 세상에서 이슬람지역을 빼고는 아마 조선이 가장 강구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유생들은 서낭당을 매음굴이라 공격했고 활동을 제한했다. 서낭당은 질병과 악귀를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이지만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염원으로 남녀가 성교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서낭당에서의 남녀성교활동은 결코 매음행위가 아니라 그들은 신성한 의무를 행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유생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매음이라 공격했다.

이렇듯 조선은 500여 년의 단일유교 때문에 모든 면에서 위축되었고 한민족의 고유한 ‘멋’과 신바람은 전부 말살되었다. 결과는 나라가 힘을 잃었고 부실해져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떤 한 착실한 역사학자는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렇듯 빈번한 외침으로 나라는 늘 쑥대밭이었고 백성들은 언제 ‘멋’을 부리고 신바람을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1945년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냈고 해방을 맞았다. 이제부터 쨍하게 해 뜰 날만 있으리라는 기대에 마음이 부풀고 벅차 있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간이고 본의 아니게 3년간의 외세군정통치로 민심이 뒤죽박죽이었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3일까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나서 그야말로 아름답던 삼천리금수강산이 폐허로 되어버렸고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삼팔선을 그어 남북으로 분단된 후 1950년대 중반부터 남과 북이 복구건설에 돌입했다.

이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영도 하에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슬로건에 흥겨워 인민들이 신바람을 일으켜 구소련이 건국 초기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듯이 농촌과 도시를 전부 집단화(협동농장)한 사회주의체제가 빛을 발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먹고사는 보릿고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까지 이북이 중국보다 더 잘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남보다 훨씬 잘살았다. 그러다가 집단화한 사회주의체제의 한계로 하여 1980년대 초반부터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초반부터 식량난에 허덕이고 지금은 아프리카 빈곤 국가들과 비견될 정도로 기근이 심각하다. 애들이 먹지 못해 10살 아이가 대여섯 살 되어 보이고 학교 갈 어린이가 서너 살 되어 보인다. 기근이 심각하면 사회 전반 생활필수품도 말이 아니게 바닥이 나 있는 것이 인류사회 보편현상이다.

남한에서는 1950년대 중후반에 경제에 눈이 어두웠던 이승만 대통령이 복구건설보다 정치적인 것에 열을 올리다보니 이북에 비해 많이 처져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이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박정희 장군이 한 번 경제를 일떠세워볼 욕망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경제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허나 욕망은 욕망일 뿐 경제를 일으킬 구체적인 방책이 서지 않았다. 국민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젊은이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공장도 세우고 나라기초시설도 다져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나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부자나라들에 동냥을 다녔으나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비관실망에 빠져 있던 와중에 서독이 광산개발에 인력을 보내줄 것을 남한에 요청했고 간호사 모집도 곁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무일군들의 노임을 담보로 서독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차관 맡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비료공장도 세우고 시멘트공장도 세우는 등 나라건설의 밑거름으로 활용했다. 경제가 춰서기 시작했다. 남한 경제는 아기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인다. 무역액이 1억불에 달하자 박대통령은 감격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새마을운동을 일으켜보자.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行政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 박정희의 철저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이며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한국의 한강기적창조의 초석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리지날 신라후예이다. 그는 신라의 ‘멋’과 신바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풍류인물이다. 자신이 직접 새마을노래를 작사·작곡해 국민들에게 신바람을 불어넣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한마음 새 정신을 일깨워

화합 번영 통일의 새 나라를 만드세.

자랑스러운 내 나라

우리 힘으로 빛내리.

당시 새마을운동의 주역들은 오늘날 그때 그 시절의 감동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고 신바람을 일으켜 주었어요. 그래서 밤잠을 자지 않고 일했지만 힘든 줄 몰랐어요. 희망이 보이니깐요. 정말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지요. 새마을운동은 한 마디로 신바람입니다. 신바람!”

한국인의 신바람으로 일궈낸 새마을운동은 단군 이래 가장 큰 천지개벽으로서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을 의미하는 ‘한강기적’을 불러왔다.

한강기적은 곧 신바람이다. 신바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남이 2·3백년을 거쳐 완성한 산업혁명을 불과 20년 사이에 일궈낼 수 있단 말인가!

한강기적은 곧 <88서울올림픽>개최를 가져올 수 있었고 <88서울올림픽>은 지구촌에 이름 없던 코리아를 세상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남한이 자본주의 길을 잘못 선택해 법이 없이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먹을 수 있고 가난에 허덕이다 못해 도시 한 복판에도 굶어 죽은 시체가 버젓이 나뒹굴고 있다고 세뇌교육을 받은 필자를 포함해 공산권국가 국민들이 남한의 국제적 큰잔치인 올림픽개최소식을 접하고 믿지 못했다. TV생중계를 통해 개막식을 보고 나서 정말 ‘하기는 하네.’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또 하나의 국제적인 큰 행사인 1993년 대전국제엑스포를 열 수 있었고, <2002한일월드컵>이란 지구촌의 대축제를 열 수 있게 했고, 그때 있었던 붉은 악마의 사건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신바람이 아낌없이 발휘된 결과물이었다. 대한민국이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선수들이 붉은 악마의 신바람의 힘을 빌어 더욱 신바람이 나 뛴 결과였다.

여기서 강조해 말할 것은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월드컵>이 비록 한국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는 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대변할 수 있는 자체브랜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구경 무엇이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대변할 수 있는 브랜드인가? 필자는 그것이 곧바로 새마을운동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새마을운동은 국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되어 지금까지 92개 나라 4천 명에 가까운 방문자가 한국에 와서 배워갔다고 한다.

단군 이래 한반도가 국제적인 큰 모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 신바람으로 일궈낸 새마을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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