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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룡 선생을 그리면서
2011년 11월 12일 00시 50분  조회:2833  추천:0  작성자: 망향

정판룡 선생을 그리면서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일본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

번역:김정웅


     정판룡 선생이 돌아가신지 벌써 10년이 된다고 생각하니 세월의 무정함을 알겠다. 정판룡 선생도 가시고 권철 선생도 가셨다.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
       정판룡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1985년의 일이다. 당시 연변에 있은 외국인은 가가노와 미란이라고 하는 두 외국인 전문가와 우리들 부부 밖에 없었다. 와세다대학의 해외연구원이라는 신분으로 연변에 갔으니 전문가도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변에 1년 간 체류하는 동안 정판룡 선생은 우리 부부를 뜨겁게 맞아주고 대해주었다.
  당시 연변은 아직 건설 중에 있었으므로 대학의 교직원들은 촘촘히 처마를 잇댄 단층집에서 살았고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비만 오면 장화가 없이는 그야말로 촌보난행이었다. 우리는 남몰래 “흙탕길(おしるこ道路)”했다.
  1985년 우리가 연변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수천발전소의 땜이 무너져 한 달 동안이나 상수도(上水道)가 끊어져 물을 공급하지 못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4시 경에 트랙터로 싣고 오는 물탱크로부터 물 한 통씩 받아가지고 하루를 지내야 하였다. 물 긷는 행렬 중에 정판룡 선생의 큰 음성도 섞여 있었다. 대학의 교장이 일반 서민들과 함께 줄을 서서 물을 공급 받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중국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큰 감동을 받았다.
  1985년 5월 연변대학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40년간 방치되어 있던 윤동주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4,5년 후 정판룡 선생과 함께 윤동주의 묘소를 다시 찾았을 때, 정판룡 선생은 무덤 위에 자란 풀을 베고 삽으로 무덤에 흙을 올렸다. 그 때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삽질을 하던 정판룡 선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프 두 대를 나누어 타고 갔었는데 제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한 대가 덜컥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지프 한 대에 아홉이 합승(合乘)하여 연길시내까지 돌아왔던 일도 지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선생은 짬만 나면 우리의 거처를 찾아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면 느닷없이 선생의 손이 떨렸다. 문지방에 써서 붙인 “금연(禁煙)”이란 표식을 의식하고 담배를 참았을 것이다. 실은 연변 사람들이 지독하게 담배를 피우는 솜씨에 우리는 질려있었던 것이다. 술도, 담배도 모르는 내가 정판룡 선생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1985년 일 년간 연변대학의 신세를 진 후 우리는 해마다 연변대학을 찾았다. 1986년도 8~9월, 1987년도 8~9월, 1988년도 8~9월, 1989년도 9~10월, 1991년도 7~8월, 거의 해마다 연변대학을 찾았다. 1989년은 “천안문사건”직후였다. 연변대학 숙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연속 이틀 밤이나 공안경찰들이 들이닥쳐 “검사”를 했다. 우리가 수상한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훗날 정판룡 선생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선생은 호방하게 웃으면서 천안문사건 당시 북경에 가서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희들은 조선족이다. 한 사람도 죽어서는 안 된다.  조선족은 전국에 고작 200만, 연변에 70만 밖에 없다. 한 사람이라도 죽어봐라, 조선족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가? 연변에 돌아가자.”라고 말해서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연변에 데리고 돌아왔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사변에 대처하고 있는데 외국에서 와가지고 이틀 밤 정도 자지 못한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말하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웠다.
  정판룡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1년의 여름이다. 연변대학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단 둘이만 있을 때 선생은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눈물을 본 것은 그 때 처음이었다. 늘 호방하게 웃던 분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연변이 잘 되고 제자들이 무럭무럭 자라 큰 그릇이 되는 것을 보고 정판룡 선생은 지금 하늘나라에서도 껄껄껄 호방하게 웃고 계실 것이다.

- 2011년 9월 27일

(일본말 원문)
 

判龍先生をしのんで 

大村益夫

 
鄭判龍先生がなくなられてもう10年になると思うと感無量です。鄭判龍先生が逝き、権哲先生が逝き、わたしひとり取り残されてしまいました。わたしが初めて鄭判龍先生にお会いしたのは1985年でした。当時、延辺大にいた外国人は、ガガーノ、ミランのふたりの専家と、わたしたち夫婦しかいませんでした。早稲田大学在外研究員の身分で、専家でもないのに、一年間滞在したわたしたちを、鄭判龍先生は暖かく迎えてくれました。
当時は延辺もまだ建設中で大学の教職員住宅区は平屋がならび、道は未舗装で、雨が降ったら長靴をはかないと歩けないほどでした。わたし達はひそかに「おしるこ道路」と呼んでいました。
1985年、わたしたちが延辺に着いてまもなく楡樹川発電所のダムが崩れ一ヶ月に渡って断水したことがありました。わたしたちは朝4時にやってくる耕運機にのせられたタンクからバケツ一杯の水をもらって一日をすごす日々を送っていました。行列の中に鄭判龍校長の大きな声もまじっていました。一般庶民も大学の総長もいっしょにならんで水をもらう姿に、中国の未来像を見てわたしは感動しました。
1985年5月、延辺大の人たちの助けを借りて、40年間放置されていた尹東柱の墓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それから4,5日後、鄭判龍先生を交えて墓参りに行ったとき、墓の草むしりをしたり、スコップで墓の土を盛り上げていた鄭校長の姿を忘れることはできません。ジープ2台に分乗していき、墓前で法事を済ませての帰り道、一台が故障して、ジープ一台に9人が乗って延吉市内に帰ってきたのも、いま思えば楽しい思い出です。
仕事に暇ができると、先生はわたし達の部屋をちょくちょく訪れてくれました。一時間ほどすると先生の手が震えてきます。ドアに張られた『禁煙』の張り紙を気にされたのでしょう。実は、わたし達は延辺の人たちのヘビースモーカーぶりにまいっていたのです。酒もタバコもやらないわたしは、鄭判龍先生の目にどう映ったのでしょうか。
1985年から一年間、延辺大でお世話になって、それからは毎年のように延辺大を訪れました。86年8・9月、87年8・9月、88年8・9月、89年9~10月、91年7・8月と毎年のように延辺大を訪れています。
89年のときは天安門事件のすぐ後でした。延辺大の宿舎に泊まっていて,2晩続けて真夜中に公安の『臨検』にあったことがあります。怪しげな人間と見られたのでしょう。その話をすると、鄭判龍先生は豪快に笑い、天安門事件の際、北京に行って学生を連れ戻した話をしてくれました。
「おまえたちは朝鮮族だ。ひとりたりとも死んではならない。朝鮮族は全国で200万、延辺に70万しかいない。それがひとりでも死んでみろ。朝鮮族の将来はどうなるんだ。延辺に帰ろう」
と、ひとりの犠牲者も出さずに延辺に連れ帰ってきたといいます。中国では命をかけて事件に対処してるのに、外国から来て一晩二晩寝られないからといって、何を騒いでいるのかという事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最後に会ったのは2001年の夏、延辺大学病院に入院されて、もはや重態の病状でした。ふたりきりになったとき、先生は声を出さずに泣きました。黙って涙を流されました。後にも先にも、先生の涙はそのとき見ただけでした。いつも豪快に笑っている人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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