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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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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17
2015년 02월 09일 14시 03분  조회:2062  추천:0  작성자: 죽림

 

161□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무거운 주제를 아주 가볍게 말하는 방법을 안다. 발상도 발랄하고 이미지를 밀고 가는 발걸음도 가볍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표현과 말투가 뛰어나다. 이것은 시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무언가 이야기를 꾸밀 줄 아는 그런 갈래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심리를 빨아들이도록 사건을 배치하고 말을 사용하는 그런 갈래이다. 그런 만큼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덩어리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수기를 즐기다 보면 방법만이 남는다. 방법만이 남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치열한 정신은 자살을 택한다.★★★★☆[4336. 11. 21.]

 

162□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불에 데인 듯 뜨거운 감정에 휩싸여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터져나오는 노래가 서정시라면 이 시집은 그러한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다. 가슴속에 고인 감정이 주변의 사물을 빨아들여 정서를 나타내는 도구로 변환한다. 게다가 부부관계는 인간의 삶 중에서 자연 현상에 가장 가까운 것인데, 그런 것이 자연물을 매개로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더더욱 순수한 맛을 내며 읽는 사람의 심장을 두드린다. 이런 종류의 순수 서정시를 쓸 기회는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데, 그런 기회를 알지도 못 한 채 흘려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순간을 잡아서 시로 엮은 것이 시인의 영혼 속에 내장된, 시를 보는 안목이기도 하다. 감정을 쏟아내는 방법이 시였던, 진짜 시인인 것이다.★★★☆☆[4336. 11. 21.]

 

163□검은 소에 관한 기억□채성병, 민음의 시 32, 민음사, 1990

  검은 소에 대한 연작 같은 빼어난 작품이 있고,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긴장도 방법도 확립돼있지만, 대체로 작품의 높낮이가 심하다. 중간에 섞여있는 말장난 같은 생각들은 발상의 유연함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다른 치열한 정신과는 어긋난다. 치열한 정신이 뚫어야 할 화두를 정한 듯한데, 그 치열함이 마지막에서 조금 무뎌지면서 벽이 뚫리지 않는다. 치열함을 높이던가 방법을 높이던가 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듯하다. 그러기 전에 한자부터 버려야 한다.★★☆☆☆[4336. 11. 21.]

 

164□고통의 축제□정현종, 오늘의 시인총서 3, 민음사, 1974

  사색이 그대로 시가 될 수 있을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철학과 시는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철학의 사고나 행위가 그대로 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철학이 시가 되려면 시에서 요구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물론 그 옷의 디자인이 어떠냐 하는 것이 시를 잘 쓴다 못 쓴다 하는 기준이 된다. 그것은 시 쪽에서 마련하는 것이지 철학 쪽에서 마련해서 시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들은 철학 쪽에서 디자인해서 시에게 넘겨준 꼴이다.

  우선 문법이 제대로 안 지켜진다. 그것은 영어식 사고를 해서 그렇다. 제일 먼저 ‘의’의 쓰임이 잘못 되었다. ‘의’가 두세 차례를 넘어 서너 차례까지 반복되어 쓰이는 것은 우리말의 문법에는 없다. 일본어 문법이나 영어 문법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법 위에 영어 번역체의 문장이 시집 전체에 넘쳐흐른다.

  여기에다가 사고 방식의 혼란까지 겹치면 지금 보는 시집의 문장이 된다.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가 안 가면 모르나 이 경우에는 문장의 구조가 이상해서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시의 어려움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시작을 위한 메모 수준의 시들이다. 한자와 일본어 문법과 영어 번역투 문장이 짬뽕 되어 시 이전의 사고 미숙과 언어 착란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것을 시의 특징으로 여기고 자족하고 있다면 그건 신념이 아니라 뻔뻔스러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의 시집이 증명할 것이다. 과연 그 이후의 시집들이 이 시집의 수준보다 더 높아졌는가? 어눌함은 단점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이지…….★☆☆☆☆[4336. 11. 21.]

 

165□색동 단풍숲을 노래하라□김영무, 민음의 시 51, 민음사,  1993

  시를 전문으로 하는 시인들이 낸 시집을 많이 읽다 보면 과장된 감정과 불필요한 말장난에 질리게 된다. 그런 때에 아무런 수식도 없이 일생생활의 느낌을 그대로 적은 글들을 보면 오히려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조미료에 지친 혀가 아무런 맛을 첨가하지 않은 물 한 잔에 감동하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점 시인들이 불필요한 말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동이 곧 좋은 시라는 등식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수필로 쓰면 더 좋았을 그런 내용들이 많다. 시의 문법을 좀 더 익혀야 하며 어느 것을 건드릴 때 생각이 시로 풀리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4336. 11. 22.]

 

166□산화가□노혜봉, 민음의 시 57, 민음사, 1993

  예술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면서 문화의 발전을 도모한 것은 갈래진 그것에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그 어떤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즐거움을 크게 하기 위해서 그런 갈래로 뻗어나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갈래들이 서로 넘나들며 인식의 즐거움을 즐기려고 하는 시도가 예술사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주로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들이 그런 시도를 주도해왔다. 시가 다른 예술과 만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가 다른 예술과 섞이지 못하고 그 스스로의 갈래를 수 천 년째 고집하는 것 역시 이유가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 다른 예술을 만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음악과 만나고 있다. 음악은 시보다 훨씬 더 직접 본능과 감정을 자극한다. 그에 비하면 시는 언어의 환기작용에 의하기 때문에 한 단계 늦다. 이때 음악에서 자극 받은 것을 시라는 갈래로 담으면 그것이 음악에 대한 설명인지 감정에 대한 설명인지 분명치 않게 되고 이것은 읽는 자의 혼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접근법에서 혼돈을 주면 시는 실패하기 쉽다. 그리고 그 실패는 어렵다는 느낌으로 압축된다. 이 시집이 바로 그런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앞부분의 시들은 아주 독특한 발상법을 갖고 있고, 그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부분으로 살려야 할 일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음악 감상에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시 역시 음악을 위한 해설 도구가 아니다. 한자는 호사 취미의 상징 같다.★☆☆☆☆[4336. 11. 22.]

 

167□아침 책상□최동호, 민음의 시 19, 민음사, 1989

  시는 속세의 물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애환을 담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선승들이 제자들의 깨우침을 돕기 위해 그것을 원용한 것은 그래도 세속의 물건 중에서 가장 긴하게 사용할 만한 물건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선계(禪界)의 분위기가 그대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시집 앞부분의 분위기는 해서는 안 될 그 분위기에 닿아있다. 어설픈 땡중이라는 지탄을 받기 쉽다. 뒤로 가면서 그 분위기가 다시 저잣거리로 돌아오지만 버리지 못한 습관 때문에 역시 매끄럽지 못하다. 요새 세속의 이야기란 것이 원래 그런 솔바람 소리 들리는 양식 가지고 다루기에는 벅찬 것이기 때문이다.

  선시나 한시의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함인데, 그 간결함은 자연물에 대한 취사선택의 시각과 절약 효과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절약된 그 대상들 뒤에 서려있는 주제들은 무지개처럼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무지개는 개인의 단순한 체험이기보다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가깝기에 우리 시대에는 어려운 수법인 것이다. 무언가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것인데, 우선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6. 11. 22.]

 

168□매장시편□임동확, 민음의 시 13, 민음사, 1987

  꼭 나와야 할 시집이지만, 너무 일찍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광주항쟁은 한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것이 지닌 상징성은 문학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그리고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문학 정신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상상력은 격앙된 감정 속에서는 오히려 얼어붙는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될 때 적당한 긴장이 생기고, 그러한 적당함이 상상력을 무한한 높이까지 뛰게 만든다.

  이 시집에서는 아직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시인의 감정이 처했기에 시가 버리고 취해야 할 내용들에 대해서 분별하는 여유를 얻지 못했다. 장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정과 시각의 문제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고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만 내가 구상한 것 이상으로 독자들이 읽어주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광주를 살리려면 한자부터 버려야 한다.★★☆☆☆[4336. 11. 22.]

 

169□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문학작품을 이루는 요소가 형상과 인식이라면 이 시집은 형상은 없고 인식만 있다. 욕망과 의지를 모두 버리고 조리개만 남은 눈으로 세상을 비추다보면, 의지를 가진 자들의 눈이 놓친 부분이 포착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고, 오로지 선입견 없는 조리개의 인식이 찾아낸 어떤 낯선 알몸만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식의 끝에서 나오는 발설은 그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 이 시집은 그런 새로운 형식 실험이다.

  그런데 그 형식은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식이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시집이다. 놀라운 일이다. 보통 시는 어떤 형상을 전제로 하고서 그 안에서 옷을 입고 탄생하는데, 이 시집 속의 시들은 탄생 자체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꾸며진 옷을 입혀서 이루어졌다. 그 옷에 대한 평가는 제 각각이겠지만, 인식의 방법과 깊이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형식으로 존중받을 것이다.★★★★☆[4336. 11. 22.]

 

170□귀골□마광수, 평민의 시 16, 평민사, 1985

  인간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다. 그것을 극단화하여 추적한 것이 실존주의인데, 이 시집은 실존이랄 것도 없는 곳에서 인간과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고발은 르뽀의 형식이 알맞다.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르뽀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으로 포장되지만 그 포장 속에 얼렁뚱땅 파묻히는 시각의 편협성이 문제이다. 이 시집 역시 그러한 문제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객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노래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4336.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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