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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24
2015년 02월 09일 14시 25분  조회:2206  추천:0  작성자: 죽림

 

232□제주바다□문충성, 문학과지성시인선 12, 문학과지성사, 1978

  상상의 가벼움과 상상력의 진지함에 대해서 생각할 시집이다. 진지함은 무겁다. 그러나 그 무게에 매달리면 상상은 풀리지 않는다. 나비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상상이다. 제주도가 지닌 상징성은 시에서 무한정으로 클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의도한 듯 시집 곳곳에서는 제주의 정서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성이 시로 승화되려면 그 특수성을 감쌀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 상상의 가벼움이 사물과 접촉하여 나비를 날릴 수 있는 순발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한 번 더 허물을 벗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는다. 소재를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시발점으로 시상을 풀어 가는 노력과 집착은 대단한데 상상력의 무게를 상상의 가벼운 몸짓이 끌고 올라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제주에 대한 집착을 끊던가 역사의 고리를 잡던가. 그래야만 상상력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제주의 특수성에 대한 천착은 그 다음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한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돌덩어리이다.★★☆☆☆[4336. 12. 1.]

 

233□메이비□장영수, 문학과지성시인선 11, 문학과지성사, 1977

  과장되지 않게 사물을 보고 한 사물에 집착하여 그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그런데 방법상에서는 아직도 혼돈을 겪고 있다. 주로 보여주기 수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줄거리를 가진 것들이 특별한 장치의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지거나 설명으로 대신하려는 듯한 구절들이 많다. 대개 이것은 주제가 빈약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메이비’ 같은 작품이 그런 애매함을 말끔히 걷어내고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과 비교하면 다른 작품들의 한계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작들이 일부만 제시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시는 원래 한 몸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존재하지만 생각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해하는 전제가 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자는 도움이 안 된다. 한자는 내용이 애매한 것을 더욱 애매하게 만드는 수가 많다.★★☆☆☆[4336. 12. 1.]

 

234□무지리 사람들□정대구, 문학과지성시인선 49, 문학과지성사, 1986

  무엇보다도 시를 아는 시인이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결코 과장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의 한계까지도 잘 아는 시인이다. 한계를 알 때 경건해지고 겸손해진다. 지금까지 읽은 시들 가운데에는 이것을 아는 시인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안다고 해서 그 한계에 주눅이 든 것은 그 한계를 아는 것보다 더 큰 병폐이다.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뚫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진짜 시인 것인데, 몸부림까지 가지를 못하고 그냥 그 한계 안에 머물러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나이 탓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시 전체의 내용에는 나이 문제가 들어있지만, 시에서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계에 구애되지 않고 시의 형식조차도 버릴 줄 아는 과감성과 신념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지금 서있는 그 자리이다.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문이 열린다. 끈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계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끈기. 드문드문 섞인 한자는 제일 먼저 넘어야 할 한계이다.★★☆☆☆[4336. 12. 1.]

 

235□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시대가 복잡할수록 시인은 말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시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이 세월의 침식을 견디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산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말을 하려 하면 반드시 그 말이 거느린 배경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그 배경 때문에 반드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며 이야기는 산문의 것이기에 시로서는 보통 부담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는 산문으로 떨어지지 않고 시의 긴장 속으로 아슬아슬하게 솟아올랐다. 아마도 그 커다란 구조가 시집 전체를 건지고 있다. ‘풍장’ 연작은 압권이다. 어쩌면 이 풍장이 후배 시인들에게 한 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 전체의 정신에 투철함은 있을지언정 처절함이 없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늘 개인의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굳이 남의 이야기를 죽음에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죽음이 갖는 어떤 그늘에서 사회의 영향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폭이 좁은 시인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좁은 폭이 깊이를 만들지만, 정말 깊은 깊이는 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좁게 쌓기 시작하면 높이 쌓을 수 없듯이 좁게 파기 시작하면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공법의 문제이지만, 공법도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는 돈오로 온다. 돈오는 걸림이 없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걸려있으면 활연(豁然)하지 못하다. 한자는 깨달음의 한 장벽이다.★★★★☆[4336. 12. 1.]

 

236□그림자 없는 시대□이영유, 문학과지성시인선 47, 문학과지성사, 1987

  풍자가 사회의 내면을 울리지 않고 겉면만을 흔들면 초라하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더라도 그것이 사회의 어떤 의식을 향한 집중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집중 속에는 무엇이 나와 내가 담긴 사회를 이끌고 가는가 하는 근본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유에 그치고 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편에 그칠 뿐이다. 아버지에 관한 문제라든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방향도 잘 잡았고, 깊이도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본을 이루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성찰이 아직 잡히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직 덜 들어간 것이다. 덜 들어간 상태에서 야유를 하면 쾌감은 있을지언정 적들은 꿈쩍도 않는다. 적들은 의외로 강하다. 그들의 생리를 간파하는 것이 공격의 첫 조건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집의 큰 맹점이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것은 풍자가 아니라 회피이다. 회피도 풍자의 일종이지만, 약간 다르다. 그 색깔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김수영이 생각났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4336. 12. 1.]

 

237□전쟁과 평화□이기철, 문학과지성시인선 43, 문학과지성사, 1985

  시인은 수리나 매와는 달라서 너무 높이 떠있으면 지상의 작은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조리개는 매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면 뜬구름 잡기가 된다. 바로 이 시집이 그렇다. 큰 구도와 아름다운 말들을 잘 꾸몄지만, 그러한 뜬구름들이 발원하는 작고 미세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구름은 지상을 덮고 있지만, 그것을 걷는 방법은 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해를 노래하기보다는 구름의 분자를 분석하여 강제강우를 실시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아니면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가. 구름은 우리 집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생긴 안개가 다른 곳의 안개와 뭉치면서 생기는 것이고, 그 가벼움이 폭풍우를 만나서 빗방울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순환의 원리를 깊이 살펴보아야만 구름에 대한 해결책이 보인다. 드물게 섞인 한자는 구름인가 평화인가?★★☆☆☆[4336. 12. 1.]

 

238□대꽃□최두석, 문학과지성시인선 42, 문학과지성사, 1984

  상징을 잘 이해하지만 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시의 법도를 무시할 권리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시에도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시는 지켜야 할 매무새가 있다. 그 매무새는 딱히 이렇다고 정할 수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대한 요약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상징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미지의 리듬을 타야 한다는 것이 요결이다.

  이미지의 리듬이란 주제의 주변으로 초점을 몰고 가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어렴풋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흩어져있던 이미지들이 어느 순간 그 주변에 한꺼번에 서려서 어느 순간 주제가 한 덩어리로 달려들듯이 머릿속에서 지펴지도록 하는 방법을 말한다. 골짜기로 파고 들어간 비행기가 어느 순간 하늘로 치솟으면서 그 밑으로 그때까지 보아온 모든 골짜기 풍경들이 내면까지 펼쳐 보이면서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사물을 1:1로 지시하는 경직성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시들은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몇 편을 빼놓고는 그 수위에 이르지 못하였다. 대부분 잘 정돈한 쪽지소설(掌篇小說)이나 수필 수준이다. 그리고 시가 지향하는 방향과 한자는 서로 다를 듯한데, 봉건유산인 한자가 이따금 돋아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4336. 12. 1.]

 

239□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김명인 시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복잡한 구조이다. 그 복잡하고 단단한 얼개 속에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걸어놓으면 시인의 내면 풍경이 그대로 살아나면서 그 이상의 것이 전해온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 단단한 구조에 비해 들어있는 내용이 알차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동두천”에서 느껴지는 구조에 담긴 정서가 동두천의 그것만큼 치열하지 못하기에 무언가 얼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새로운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옛날의 관성으로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새로운 털갈이를 할 철이 온 것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갈아내야 할 털이다.★★★☆☆[4336. 12. 1.]

 

240□그리운 주막□박태일, 문학과지성시인선 41, 문학과지성사, 1984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가 맹목에 점점 가까워질 때 그 증상이 시에 드러나는 양상은 내용의 빈곤이다. 아름다움에 기운 마음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때도 있고, 한 가닥 실낱같은 내용이라도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버텨준다면 그 때는 용기 있게 밀고 나간다. 이 시집이 그런 지경에 와있다.

  그러나 시의 아름다움은 낱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낱말이 이미지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들이 만나서 이루는 조합이 아름다우려면 그것을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야 하며, 그 아름다움은 혼돈 속의 질서정연함과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뒤의 심리변화를 언어에 실어내는 능력에 딸린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부분 내용의 빈사상태에 있다. 풍경을 묘사할 때도 그것이 대상을 담거나 정서를 환기시켜주어야 하는데, 곳곳에서 난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원인은 대부분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서 캐낸 조개가 아니라 부둣가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손에 들어있는 조개를 보는 태도에 있다. 그 거리가 내용의 빈곤을 낳고 이미지의 몽롱함을 낳는다. 높이 살 만한 것은 각주처리를 해서라도 한자를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낱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시는 낱말과 낱말 사이에 있다.★★☆☆☆[4336.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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