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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27
2015년 02월 11일 11시 37분  조회:1807  추천:0  작성자: 죽림

 

261□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유하, 문학과지성시인선 104, 문학과지성사, 1991

  종횡무진하는 말빨이 적당한 상상력과 맞물려서 읽는 자의 눈을 솔깃하게 한다. 시에 적당히 살을 입힐 줄도 알고 건너뛸 줄도 안다. 요컨대 시라는 갈래가 지닌 속성을 잘 활용할 줄 안다. 그런데 장광설이 문제이다. 복어처럼 몸을 부풀려야 하는 세상에 대한 역설이겠지만 장광설은 때로 허황함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허황함이 시의 도처에 서려있다. 압구정동의 거품에 대한 비판은 거품 방울 위에 뜬 거품일 뿐이다. 거품에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가 어린다고 해도 거품은 거품이다. 중요한 것은 시의 경제와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헛것을 쫓다가 좋은 재주만 날리고 만다. 글러브를 끼고서 땀을 흘렸으면, 이제는 그 맨주먹으로 적의 급소를 노려볼 일이다. 허무한 일에 매달려 탕진하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너무 짧다. 한자는 발랄한 행보에 무거운 짐일 뿐이다. 벗을 때가 한참 지났다.★★☆☆☆[4336. 12. 3.]

 

262□꿈속의 사닥다리□이태수, 문학과지성시인선 127, 문학과지성사, 1993

  시가 지닌 장점 중의 하나는 어려운 내용을 극히 짧은 내용으로 쉽게 전달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잘 살리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득 써도 이 점을 살리지 못하면 결코 잘 쓰는 시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시인이 깨달은 일상의 자잘한 생각이 수북히 쌓여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깨달음은 분명하되 그것에 걸맞는 좋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를 쓴다는 얘기이다. 할말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말하는 통로를 찾지 못하면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둘레를 맴돌기 마련이다. 동어반복이 무상하고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따라서 이런 모습을 극복하려면 먼저 깨달음의 성격부터 분명히 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해서 어디에 담아서 빚을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찾을 필요가 있다. 일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바깥으로 한 번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4336. 12. 4.]

 

263□세월의 거지□김갑수, 문학과지성시인선 84, 문학과지성사, 1989

  사람이 한 시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 시집 속의 세계는 희한하게도 과거가 마구 헝클어지고 구겨진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희망 없음을 노래한 시집들은 많지만 이렇듯이 과거나 추억이 불행의 그 어떤 지표로만 인식되는 시집은 거의 없었다. 무언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나 절망이 훑고 지나간 것 같다. 아마도 그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상상력이 자유롭지 못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일부러 그렇게 해버린 상상력의 흔적들. 시가 딱딱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상상력이 부드럽게 작용하도록 방임해주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열쇠일 것인데, 그것은 세계를 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변화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그 몫은 물론 시인 자신의 몫이다. 제목에 남아있는 한자는 딱딱한 지문 같다.★★☆☆☆[4336. 12. 4.]

 

264□가을 악견산□박태일, 문학과지성시인선 83, 문학과지성사, 1989

  시가 지향하는 바는 여러 곳이지만, 그 지향이 빛나게 하는 것은 시인의 태도이다.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태도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미지가 시를 이끌어 갈 때 그 이미지들이 마침내 전하고자 하는 그 세계가 그 이미지의 뒤쪽에 서려있지 않으면 그 이미지들은 아름다울지라도 내용 없는 허망함을 면치 못한다. 특히 자연물 같은 풍경을 묘사할 때 이러한 배경은 더욱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 시집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이 같은 문제점들을 많이 안고 있다. 듣는 사람이 없는 독백에 가까운 주절거림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시는 대화의 일종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듣거나 말거나 나 혼자 얘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소통할 의지를 갖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가는가 하는 방법을 상실할 염려가 많다. 그런 우려가 곳곳에 서려있다. 시는 매끈하지만 읽을 사람이 없다. 이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라 시인의 잘못이다.★★☆☆☆[4336. 12. 4.]

 

265□다시 시작하는 나비□김정란, 문학과지성시인선 82, 문학과지성사, 1989

  열정이 대단한 시인이라는 느낌이 먼저 온다. 그 열정은 존재를 감싸고 있는 모든 굴레에 대한 것이기에 예수가 갖는 열정과도 닮은 점이 있다. 다르다면 그 종착점이 구원에 있지 않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고, 지켜야 할 것도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시에 너무 성실해서 탈인 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인에게도 어떤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집착이 이따금 설명으로 나타난다. 설명은 불안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끝없는 전쟁이기에 그 불안은 씻을 수 없다. 처음부터 선택한 것이기에 끝까지 나아가는 수밖에 없으나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방향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방향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리라. 이 파괴의 시 속에 한자가 성실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믿기 싫은 상처이다.★★☆☆☆[4336. 12. 4.]

 

267□성에꽃□최두석, 문학과지성시인선 87, 문학과지성사, 1990

  할 말 많은 시대에 시에 이야기가 끼어 드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야기로 시를 만들어갈 수도 있음을 우리는 많은 이야기 시에서 보아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산문과 시를 구별해주는 요인이 있다. 요인 역시 여러 가지이지만, 중요한 것은 전체의 틀이다. 틀이 산문의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시집에서는 벗어날 듯 날 듯하면서도 마지막 처리를 못해서 산문의 굴레에 묶인 것이 많다. 시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는 Ⅰ부의 작품들도 그 흔적을 벗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몇 글자만 바꾸고, 시 행만 뒤집어도 될 일들인데, 그게 안 된다. 그런데도 건강한 의식이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이런 아쉬움을 많이 달래준다. 대개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꼭 정말로 남의 이야기를 하고 마는 수가 많은데, 여기서는 남의 이야기를 제 이야기처럼 하는 능력도 있다. 아마도 이런 것을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리라.★★☆☆☆[4336. 12. 4.]

 

268□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이동순, 문학과지성시인선 116, 문학과지성사, 1992

  역사의 죄의식이 강하면 시를 이렇게 쓸 수밖에 없으리라. 억눌린 죄의식 때문에 시들이 기를 못 피고 억눌려있다. 그리고 시인이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발치에 나가있어서 언어 역시 멀리 떠돌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모르는 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얽매어 있으면 노래할 그것을 노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자유를 잃고 관념의 추를 드리우고 있으면 결코 날아오르지 못한다. 무거운 주제일수록 가볍게 접근해야 한다. 역사라는 무게 때문에 현실이 짓눌려버린 상황이면 거기서 나올 이미지는 거의 없다. 게다가 관찰의 시각으로 실천을 말하려 하기 때문에 그 불협화음이 끝내 시를 어색하게 만든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자이다. 그 투철한 역사의식조차도 한자를 청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아리송한 일이다.★★☆☆☆[4336. 12. 4.]

 

269□해청□고형렬, 창비시선 61, 창작과비평사, 1987

  기교를 부리면 큰 벌을 받기라도 한다는 듯이 지루한 넋두리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발언된 내용을 보면 정말 좋은 시가 될 것도 같은 것들인데, 그것이 그냥 평면으로 나열만 되어서 아무런 설득력도 갖추지 못하였다. 시는 3차원으로 넘어서 4차원 5차원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서술은 1차원이라고 해도 그것은 울림을 갖기 때문에 이렇게 고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서술하고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야 이러한 울림이 오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집에서는 그러한 구조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써온 반동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지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오히려 질리게 한다. 말하는 방법을 다시 공부할 일이다. 내용으로 보면 틀림없이 역사에 대한 어떤 투철한 인식이 있을 법도 한다. 그런 인식이 한자를 그대로 용납하는 것을 보면 그 인식조차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한자가 봉건의 상징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 아닌가!★☆☆☆☆[4336. 12. 4.]

 

270□맑은 날□김용택, 창비시선 56, 창작과비평사, 1986

  시집 “섬진강”이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건전한 정서와 그것을 뒷받침한 일정한 형식 때문이다. 그 형식 안에는 비록 늘어지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상황 배치와 이미지 천착도 있고 또 남도의 유장한 가락도 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모든 허울 다 벗어버리고 막 나갔다. 긴장과 절제는 찾아볼 수 없고, 가락 역시 전체 내용을 담기에는 너무 단조롭다. 사상이야 탓할 것이 없지만 그 때문에 시가 그렇게 늘어진다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서 뱉는 모든 것이 시가 되는 그런 곳에 시인은 도달해 있으니, 앞으로 시를 쓰기 어려우리라.★☆☆☆☆[4336.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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