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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35
2015년 02월 11일 11시 55분  조회:2220  추천:0  작성자: 죽림

 

 

341□떠나가는 배□박용철,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2, 미래사, 1991

  읽기가 정말 어렵고 지루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는 풍경밖에 없다. 사람과 삶은 없고 풍경만 있으니,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글을 매끄럽게 다듬으려고 한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그 방향이 현실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아름다움으로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기에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 똥을 밟아보지 않은 듯한 태도로 시를 바라보고 있어서 몽롱하다.★★☆☆☆[4336. 12. 18.]

 

342□외롭고 높고 쓸쓸한□안도현, 문학동네시집 1, 문학동네, 1994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구조가 탄탄하고 어법이 안정된 것이 이 시인의 특징이다. 여기서도 그런 특색이 아주 잘 드러났다. 그러나 중압감 때문인지 상상력이 부드럽지 못하고 경직된 느낌이다. 역사에 대한 전망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눈물겹지만, 그것이 좌절로 이어질 듯한 불안함도 아울러 갖고 있다. 첫 시집에서는 세부의 표현을 넘어서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드러내 보이는 역량이 드러났는데, 이번에는 할 말이 많은 탓일까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전체가 잘 안 들어오는 단점이 보인다. 상상력이 굳었다는 증거이다.★★★☆☆[4336. 12. 20.]

 

343□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9

  노동자가 기계를 조립해놓은 것 같다. 빈틈없다. 단단하다. 군더더기가 하나 없고 빼빼 마른 상상력만 작동하여 할 말만을 골라놓았다. 대단한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전망이 후퇴하고 내면을 성찰하는 시각이 시집의 2/3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세계를 다룬 것은 뒷부분에 꼬리뼈처럼 붙어있다. 이것은 노동계가 전망을 잃은 영향이다.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생긴 공허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이제 외부의 자본이 아니라 내부의 허무와 싸워야 하는 험난한 이정표가 이 시인 앞에 남아있다.★★★☆☆[4336. 12. 20.]

 

344□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강연호, 문학동네 시집 58, 문학동네, 2001

  시의 주제가 뚜렷하다. 할 이야기가 분명하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와 언어들이 그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적절한 긴장으로 동원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들이 지니는 고유한 이미지가 많이 희생당한다. 그리고 시에서 이미 할 말이 정해졌다. 모든 말들이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예비군복 차림으로 동원되는 모양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울림이 거의 없고 결론이 뻔히 예상된다. 관념을 먼저 설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시를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는 두 가지 특징을 갖게 된다. 엄살과 과장이 그것이다. 절망은 치솟는 의지가 바닥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시집 곳곳에는 감정의 밑에서 불끈불끈 치솟는 오기나 욕심이 숨어 있다가 가끔씩 드러난다.

  그런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부분은 절망과 그 절망의 양상으로 본 세상 풍경이다. 시는 한 편 한 편에서도 모순율을 지켜야 하지만 시집 전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모순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는 감정의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것은 거의 치명상에 가깝다. 절망의 포즈가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미숙이 기형도의 아류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다. 좀 더 신중하게 삶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자신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너무 혹사시키면 시의 울림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내가 일그러뜨리기 전에 나름대로 고유한 이미지와 뜻을 갖고 있다. 시인이 언어를 동원할 때 그 이미지를 변형시키지만 너무 그것이 심하면 시 전체가 건조해진다. 이 시집은 지금 그 건조병을 앓고 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시 쓰는데 아주 불리한 일이다.★★☆☆☆[4336. 12. 23.]

 

345□아내에게 미안하다□서정홍, 실천문학의 시집 121, 실천문학사, 2003

  허황하지 않고 진실한 것이 큰 장점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보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기교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 태도를 시인은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시가 갖는 고유한 기교와 기법이 소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시들이 줄거리를 갖고 서사성을 띠고 있어서 긴장이 풀어졌다. 서사성도 그 배치의 방법에 따라서 시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데, 대부분 그냥 나열만 되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을 정직하게 보려는 것과 허황한 말장난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빛나는 시집이다.★☆☆☆☆[4336. 12. 23.]

 

346□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송수권, 시와시학 시인선 3, 시와시학사

  부분에 집착하면 전체를 잃는다. 시어와 이미지를 선택할 때 꼭 생각해야 할 말이다. 이 시집은 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할 말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이미지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것은 꽃 이름이나 사투리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말들을 시에서 쓸 때 그것이 사람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 말들이 전체 이미지의 흐름이나 독자의 읽는 속도를 방해하면 그것은 잘못 쓰인 것이다. 낯선 말을 끌어들일 때도 읽는 사람이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굳이 그 말을 써주기 위해서 쓴 부분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희생당하거나 쭉정이처럼 내용이 부실하게 된다. 외화내빈이다. 사투리나 우리의 전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굳이 그랬다면 시로서는 소탐대실이다. 게다가 한자까지 섞여있고, 그 한자를 배경으로 한 선의 분위기까지 끼어 있어서 산만하기까지 하다. 요컨대 시집의 초점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4336. 12. 23.]

 

347□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 때□권대웅, 문학동네 시집 67, 문학동네, 2003

  두 가지 단점이 눈에 띈다. 언어를 필요이상으로 아름답게 다듬으려 드는 쓸데없는 버릇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이 두 버릇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이미지를 아름답게 다듬으려고 하다 보면 많은 이미지와 기발한 발상을 될수록 많이 끌어들이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주제에 비해 너무 많은 군살이 붙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을 너무 고상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시에서 얘기하고 하는 대로 삶이 그렇게 허무하고 쓸쓸한 것이라면 시가 그렇게 아름다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다듬는 데 들인 공은 시의 주제와 서로 등을 대고 있다. 여기에다가 주제까지도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두 가지로 갈라져서 산만하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든 시에 대해서든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포장에서 시체의 썩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면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것을 의도했노라고 합리화하는 것은 더더욱 좋은 모습이 아니다. 시체를 비단으로 싸지 않고 베로 싸는 것은 값 때문만이 아니다.★★☆☆☆[4336. 12. 23.]

 

348□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정일근, 시와시학 시인선 15, 시와시학사, 2001

  시와 이야기의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시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긴장이 일단은 성공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발상과 서술 방법의 절묘함이 성공 쪽으로 가닥을 잡게 한다. 1부에 실린 시들이 특히 빼어나다. 살집도 적절하고 긴장도 줄거리도 서로 맞물리면서 뛰어난 감성까지 갖추었으니, 시로서는 그만인 셈이다.

  그러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군더더기가 많아지는데, 특히 불교의 이미지를 차용한 부분은 침묵하지 못하는 자의 수다 같다. 선어(禪語)는 목숨을 건 정신의 대결에서 튀는 불꽃이어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인연설화는 본질을 전하기 어렵다. 그 경지에서는 차라리 침묵이 아름답다. 그 침묵을 불교 이미지 몇으로 장식한다고 시가 되지는 않는다. 정신의 타성만이 느껴질 따름이다. 그 타성은 자연을 묘사하는 곳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나타난다.★★★☆☆[4336. 12. 24.]

 

349□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창비시선 229, 창비, 2003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그리고 시를 대충 내놓지 않고 끝까지 다듬으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적이도 프로라는 이름을 들으려면 이 정도의 성실성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미 결정된 어떤 결론을 향해서 이미지들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이미지들이 모여서 만드는 어떤 세계가 스스로 결론을 맺도록 언어를 유도하는 힘이 좋다. 이것은 배운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억지로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욕심을 버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언어에 대한 욕심, 시에 대한 욕심, 시인이라는 욕심.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심이 일어나는 순간 시는 쉽게 타락한다. 앞으로는 그 유혹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성패의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우려는, 시가 너무 자신의 과거와 내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 세계의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단조로움과 동어반복의 원인이 된다. 이 세계로는 앞으로 지금과 같은 다채로운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시집이 창비에서 나왔는가 하는 의구심이 절로 뒤따른다.★★★★☆[4336. 12. 25.]

 

350□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정세기, 실천문학의 시집 136, 실천문학사, 2002

  사상 부재의 늪으로 유조선이 침몰한다. 그 잔해로 남은 거대한 기름때 위로 연꽃이 하나 솟았다. 불혹에서 너무 많은 나이가 느껴진다. 세상을 이미 달관한 자세는 시인에게는 치명상이다. 그런 달관이 동양의 세계관으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기법과 발상이 주로 그러한데, 이 세계는 숨가쁜 세상을 파헤치는 데는 아주 불편한 도구이다. 그 도구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분명치가 않다. 자신을 돌아보는 데 시집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것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온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자이다. 한 물 갈대로 간 문자를 꺼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사상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문학관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한 껍데기 더 벗겨야만 시가 나올 것이다.★★☆☆☆[433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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