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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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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52
2015년 02월 11일 15시 37분  조회:1747  추천:0  작성자: 죽림

 

511□나비를 보는 고통□박찬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22, 문학과지성사, 1999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정신이 돋보인다. 그런데 깨달음을 통해서 시를 쓸 때는 그 깨달음이 일정한 층을 뚫지 않으면 시로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면 대개 야유나 말장난에 머무르기 쉽다. 이 시집이 그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더 깊이 판 다음에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세계가 충격을 받고, 그것이 시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단 한 글자라도 한자가 섞이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4337. 2. 25.]

 

512□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오규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223, 문학과지성사, 1999

  인간은 타고나면서 교육받은 인식체계로 세계를 읽고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바로 이 인식을 문제로 삼은 시집이다. 말하자면 철학의 언저리에 가있는 시집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는 그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이루면서 세계를 해석하고 그것을 행동의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이 세계는 덧씌워진 채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기는 어렵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습관을 자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 그것을 밝힐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을 뒤집어서, 그렇게 덧씌워진 꺼풀을 벗기면 인식의 그물코가 드러난다. 따라서 사물을 인간의 의식이 덧씌운 관념에서 벗겨서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대한 선입견을 벗기고 사물의 본래 모습에 가까이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이 시집에서는 사물에 덧씌운 인간의 관념을 걷어내는 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에서 이미 상세하게 밝힌 대목이다. 그리고 칸트는 그 뒤로 훗설의 현상학과 베르그송, 사르트르, 하이덱거 같은 인물들로 이어지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낳는다. 그런데 이 시집은 칸트에 머물러 있다. 철학의 뒷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 이미 하이덱거는 해석학의 단계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 체계 안에서 사물과 세계는 세계내존재라는 형태의, 진부한 결론으로 닿아있고, 훗설의 생활세계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시집의 수준은 사물로부터 인간의 인식을 최대한 걷어내는, 철학으로서는 가장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앞으로 볼거리는 이 시집의 다음이다. 거기서는 걷어낸 인식의 뒤편에 서려있는 또 다른 창조된 인식이 기다릴 것인데, 제발 거기까지 가기 바란다. 한국 시는 철학에서도 너무 뒤쳐져있다.★★☆☆☆[4337. 2. 25.]

 

513□황금빛 모서리□김중식, 문학과지성 시인선 130, 문학과지성사, 1993

  주제가 분명하고 또 굵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론도 확립돼있다. 아픈 상처를 도외시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이 좋다. 그런데 시가 자기 성찰의 양식이기는 하지만, 남들을 너무 의식해서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고 시를 쓰면 시가 이상해진다. 일종의 피해망상 같은 것이 생긴다. 그래 가지고는 스스로 지칠 뿐이다. 세계는 무덤덤하고 굳건하다. 도시 전체가 무너져도 꿈쩍 않는다. 원래 그랬다. 그러니 그거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나일 뿐이고 그것은 내가 순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에 너무 집착하면 싸움의 결과는 자명해진다. 분노를 분노로 노래할 필요가 있다. 자의식은 싸움에 그리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건 그저 거울로 작용하면 된다. 한자는 필요 없는 거울이다.★★☆☆☆[4337. 2. 25.]

 

514□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김명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265, 문학과지성사, 2002

  아마도 동양의 이미지가 동양의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처음으로 시에 들어온 것 같다. 이미지들이 주로 전통의 정서에 맥을 대고 있고, 그것이 그런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쓰고 있다. 이것이 자각에 의한 것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운용이면 자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초점이 여럿으로 흩어져있어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그리고 정서를 전달하는 데 불필요한 이미지들이 많고 설명이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식물이름이나 나무 이름을 너무 자세하게 밝힐 경우, 대부분 그것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그 자세함이 독자가 읽는 속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도 그런 우려가 다분하다. 동양의 정서를 전달하는데 한자야말로 방해가 되는 요소이다.★★☆☆☆[4337. 3. 6.]

 

515□황홀한 숲□조인선, 문학과지성 시인선 261, 문학과지성사, 2002

  상상력의 방법이 아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시인이다. 그런데 <의미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예술의 극치>라고 규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 결과론에 익숙하면 세상은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예술일 수 있지만, 그런 예술로 밝혀봤자 드러날 것은 더 없다.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난폭한 전제는 세계의 폭을 협소하게 한다. 열린 눈으로 보아도 드러날까 말까 한 것이 세상이다. 전제된 관념가지고 보는 것은 탓할 것이 없지만, 그런 관념 가지고 예술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 위험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미지를 동원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이미지 스스로 움직이도록 방치하고 있으니, 방법상의 혼돈이 세계관의 부재와 맞물려있다. 어느 쪽으로든 정리가 되어야만 좋은 시가 나올 것 같다. 이 단계에서 칭찬은 독이라는 것만 말해둔다. 한자부터 청산할 일이다.★★☆☆☆[4337. 3. 6.]

 

516□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차창룡, 문학과지성 시인선 143, 문학과지성사, 1994

  시마다 주제가 분명한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어떤 곳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활달한 움직임이 좋다. 원기가 충실한 시이다. 그러니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분명하다 보니 이미지들이 스스로 잘 살아서 반짝이지 못하고 마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시가 딱딱해진다. 시는 결국 언어를 매개로 해서 정서를 전달하는 도구인데, 언어의 자생력을 잘 북돋아주면서 자신의 뜻을 실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지를 잘 건사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한자는 한국에 태어난 시인이 버려야 할 의무이다.★★☆☆☆[4337. 3. 6.]

 

517□공중 속의 내 정원□박라연, 문학과지성 시인선 247, 문학과지성사, 2000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는 묘한 버릇이 있다. 그렇게 어려운 생각의 길을 만드는 것도 자유이고 장기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복잡한 길을 따라갔을 때 받는 어떤 교훈 내지는 느낌이 그 복잡성이 만든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가장 간편한 길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 즐길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리고 생각의 자취나 구도는 잘 나타나지 않는 법인 만큼 시를 생각의 질서를 드러내도록 쓰려면 그렇게 흘러간 분명한 자취가 남아야 한다. 갯지렁이가 지나간 자국처럼. 한자는 돌이킬 수 없는 병이다.★★☆☆☆[4337. 3. 6.]

 

518□오늘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김점용, 문학과지성 시인선 253, 문학과지성사, 2001

  꿈만을 소재로 하여 쓴 독특한 시이다. 꿈은 현실과 비현실을 매개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라는 점에서 현실을 조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는 자칫하면 황당무계한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리고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을 시로 감당하려면 정직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가 건조해지고 지루해진다.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정직과 뻥의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시인의 영원한 고민거리이다.★★☆☆☆[4337. 3. 6.]

 

519□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이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255, 문학과지성사, 2001

  주제가 아주 뚜렷하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상상력도 활달하고 거침이 없다. 문명과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시인들이 흔히 갖는 불성실과 무책임이 거의 가시고 분명한 논리로 세상을 보고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다만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 긴장이 풀어지는 것이 단점인데, 이는 시집을 너무 서두른 탓이다.

  문명을 그대로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 안에서 일정한 변형을 거치면서 울림통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앞부분의 사막 이미지는 이 문명의 황폐함을 들려주는 울림통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떤 부분이 그런 작용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시는 건조해진다. 문명비판이라는 주제는 건조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4337. 3. 7.]

 

520□천일마화□류하, 문학과지성 시인선 250, 문학과지성사, 2000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은 여전하지만, 긴장이 많이 풀어졌다.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곳의 상징성을 띤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어떤 집중을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고, 이 시집에서는 말과 경마장의 주변에서 그것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야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그곳에 빠진 자의 생각만을 드러내 가지고는 잘 안 된다. 그만큼 상황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객관화가 덜 된 셈이다. 그리고 유럽 여행 중에 쓴 시들은 그런 맥빠진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다. 유하라는 상표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4337.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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