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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55
2015년 02월 11일 15시 45분  조회:1753  추천:0  작성자: 죽림

 

541□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박주택, 문학동네 시집 12, 문학동네, 1996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묘사는 실로 감탄할 만한 경지이다. 그런데 방법상의 문제가 하나 발견된다. 시집 전체를 읽고 났을 때도 묘사의 그 엄정성 때문에 낱낱의 묘사가 만든 구도의 전체 배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처럼 들이대기만 했지 카메라에 담겨 움직이는 화면이 전체의 어떤 구도에서 배치되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이미지로만 쓰는 시들이 갖는 한계일 수 있다. 주제가 이미지 뒤로 숨는 순간에도 이미지는 주제를 보여주도록 배치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이미지는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 시인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무언가 말을 통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묘사로만 쓰는 시에는 있다. 그리고 시가 꼭 이미지에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도 해보아야 한다. 이미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답으로 생각하는 순간 시라고 하는 갈래가 갖는 많은 장점을 놓치기 쉽다. 이런 점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그런데 한자는 좋은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정말 불편한 물건이다.★★☆☆☆[4337. 5. 22.]

 

542□꿈에 오신 그대□이동순, 문학동네 시집 10, 문학동네, 1995

  답이 많다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 거의 보는 자의 손에 맡겨져 있고, 그에 따라서 방향과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에 딱히 어떻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집 한 권에서 어조가 같고, 내용이 비슷하며, 세계까지 같다면 그것은 시인의 의식이 많이 정화되고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많은 시인들이 몇 가지 뒤섞인 세계와 방법으로 시집 한 권을 엮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것이 안정되게 한 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주제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그것을 순식간에 한 호흡으로 정리한 경우이다. 이런 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여기서는 사랑이 주제가 되었다. 인간 보편의 감정이기에 삶의 모든 행위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한 것은 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시가 너무 차분하여 사랑의 격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순수한 사랑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시인의 영혼은 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왕에 사랑에 관한 시집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시집들과 어떤 점에서 변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 사랑시의 숙제이다.★★☆☆☆[4337. 5. 24.]

 

543□아름다운 지옥□안찬수, 문학동네 시집 11, 문학동네, 1996

  의식이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격렬하게 그것과 싸움을 할 때 상상력은 기괴한 모습으로 작동하고 그것은 나름대로 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의식의 변화 내지는 작동들이 어떤 세계로 연결되어 그것을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직전의 상태라면 다소 혼란스럽고 특수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실험하는 데 필요한 어떤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의 실험에만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치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런 위험이 이 시집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과 다리에서는 무언가 동작을 하고 있지만, 몸 전체에서 그 동작이 어떤 의미를 향하여 움직이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물음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작은 부분에 집착하면 큰 부분의 모습이 어지러워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가시 같은 존재이다.★☆☆☆☆[4337. 5. 24.]

 

544□저물 무렵□신동호, 문학동네 시집 13, 문학동네, 1996

  어디까지 말해야 시가 되고 어디까지 말하면 시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 하는 고민에 비해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미지 훈련을 많이 했으되 깎아서 다듬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앞부분의 절반은 자신의 체험에 너무 빠져있어서 그것을 시로 쓸 때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일까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뒤의 절반은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강렬해서 이미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시가 너무 길게 풀어진 경우이다. 어느 경우이든 자기 절제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부터는 꾸미거나 붙이는 훈련이 아니라 깎아내야 하는 훈련을 할 때이다. 한자는 붙이는 데도 깎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4337. 5. 24.]

 

545□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손진은, 문학동네 시집 14, 문학동네, 1996

  새로운 사물에서 새로운 관념을 읽어내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이 시집 전체에서 돋보인다. 그런데 너무 자세하게 보려고 하면 그 자세한 인식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잘 안 보이는 수가 있다. 부분 묘사가 장황해져 전체의 주제 전달을 방해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꼭 그렇지 않은 데도 묘사의 관성 때문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시가 빡빡해진다. 자칫하면 그냥 묘사로 그치는 수도 생긴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일이 생긴다. 그런 위험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읽으려는 노력은 큰 시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한자는 애써 가꾼 세계를 깎아먹는 노릇을 한다.★★☆☆☆[4337. 5. 24.]

 

546□불태운 시집□유강희, 문학동네 시집 15, 문학동네, 1996

  세월이 쌓이고 삶의 경륜이 익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것은 현재의 모습이 상징이나 의미전달보다는 묘사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이 묘사력이 뜻을 싣고 가는 경지에 이르면 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빛깔의 상상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삶의 통찰을 담지 않을 경우 자칫하면 말장난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그것은 현재의 깨달음이 삶의 절정이라고 믿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그것이 주제 밖으로 벗어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들이 한 초점을 이루면서 전체의 주제를 전달하는 능력이 좋은 시인이다. 한자는 그러한 능력을 깎는 오점이다.★★☆☆☆[4337. 6. 24.]

 

547□야성은 빛나다□최영철, 문학동네 시집 16, 문학동네, 1997

  시를 단단하고 야물게 잘 쓰는 시인이다. 한 번 잡힌 상에 자신의 생각을 실어서 전달하는 재주가 능수능란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더더기가 거의 없게 시를 완성한다는 것은 보통 시인들이 갖기 힘든 장점이다. 다만 그런 만큼 그런 능력으로 빚은 시들이 모여서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집이다. 자잘한 일상의 그 뒤쪽을 한 발 더 들어가야 시가 힘을 얻는데, 그 한 꺼풀이 뚫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기교가 승한 작품에서는 그 기교 때문에 이미지가 스스로를 불려나가는 상황도 나온다. 그런 것들은 대개 내용이 빈약하게 마련이다. 특히 뒤쪽으로 갈수록 이런 조짐이 뚜렷하다. 한두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점만 보완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상상력이다.★★☆☆☆[4337. 5. 24.]

 

548□우주로의 초대□문복주, 문학동네 시집 17, 문학동네, 1997

  시가 특별한 소재를 취급하는 것은 독자에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수한 소재는 특수한 그 만큼 그 특수성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시는 불가피하게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면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특수한 지식을 소재로 한 시가 성공을 이루기는 극히 어렵다. 그리고 시는 특수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 감성에 호소하는 갈래라는 점에서 특수함 그 자체가 시의 활동성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시집 전체가 우주에 관한 지식을 가득 차있고 그러한 지식을 전제로 해서 일상의 감정을 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지식이 그렇고 그런 흔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비유체계는 신선할지언정 그 비유체계가 갖는 신선함의 의도는 그 신선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에서 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비유가 화려한데도 대부분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따라주지 못하는 셈이다.★☆☆☆☆[4337. 5. 25.]

 

549□여수일지□권오표, 문학동네 시집 18, 문학동네, 1997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옛 시대의 정서에 맥을 대고 있다. 이 점이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된다. 잊혀진 정서를 오롯이 살려놓는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래서 이미 낡아버린 비유체계와 정서에 파묻혀 시인의 새로운 시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단점이다. 특히 198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누이’라든가 ‘그녀’ 같은 모호한 대상을 향해서 영탄을 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개인의 특수함으로 끝날 수 있는 체험과 개인의 특수함이 남들과 공유될 수 있는 체험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감정의 모호성을 제거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4337. 5. 25.]

 

550□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세기말에 제자백가를 다시 읽다’ 같은 작품은 다시없는 절창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절창이 시집 곳곳에 숨어있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같은 작품을 썼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말하자면 인식의 갈피가 자연과 만나서 이전까지는 보여준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이루었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드러남의 양상이 문제이다. 이것이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인식으로 그려내고 있어서 사물에 촉발되는 언어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시들이 관찰에 머물러 있어서 한 세계를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시라는 갈래가 갖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역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어법의 혼란스런 착종이 있고, 낱말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듯한 곳도 꽤 눈에 띄어서 아쉬움을 준다. 기초가 부실할 때는 대작에서조차 흠집을 남길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는 시집이다.★★★☆☆[4337.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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