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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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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62
2015년 02월 11일 15시 59분  조회:1863  추천:0  작성자: 죽림

611□구멍의 크기□정익진, 시작시인선 19, 천년의시작, 2003

  이 정도의 이미지 운용이면 가히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지들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드러내주는 단순한 이미지하고는 다르다.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변용되는 진폭의 크기가 뒤쫓아가기 버거울 만큼 간격이 크기 때문에 이것은 실험의식의 소산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옷만 바꿔 입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의식은 실험을 향해 치닫는데, 이미지는 무엇을 나타내주기 위해 교체 당하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상상력이 시라는 고정된 틀 속에 갇혀있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경우는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 시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분명치 않은 태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세계를 낳는다. 실험을 더 강하게 추진할 것이냐 이미지를 살릴 것이냐 하는 선택의 갈랫길에 놓인 시집이다. 한자나 낯선 이름을 너무 자주 기용하는 것은 독특한 세계를 조성하는 데 일조할지 몰라도 실험의식을 오히려 깎는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4337. 6. 9.]

 

612□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조하혜, 시작시인선 23, 천년의시작, 2003

  시에서 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런 만큼 관심이 큰 것에 가 있어 자칫 시가 설명으로 늘어지기 쉽다. 이럴 때 사고가 이미지를 압도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소품으로 전락하기 쉽고, 이런 관행이 시 안에서 굳으면 이미지는 도구화된다. 도구화된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시어가 설명으로 흘러가면 길어지기 쉽고, 시가 길어지면 독자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가 만든 논리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건조해지기 쉽다. 따라서 시를 짧게 쓰는 훈련이 필요한 시집이다. 한자는 짧든 길든 불필요한 장비이다.★★☆☆☆[4337. 6. 9.]

 

613□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소품의 진가를 드러낸 작품이다. 작고 섬세한 관찰이 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리고 자연이 여태까지 존재해온 방식과는 다르게 시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면 독특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시집이다. 다들 문명 속으로 들어가서 각개전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렇게 자연의 속살을 살살 덜어내는 시인도 있다. 자연은 시가 버릴 수 없는 영역인데 돌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로운 길을 뚫었다는 느낌이다. 다만 시가 너무 소품이라는 것과, 내용이 차라리 동시로 다루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동시로 쓰면 더욱 빛날 부분들이 많아서 아쉬운 시집이다. 한자는 단 한 자라도 순수한 세계에 누가 되는 법이다.★★★☆☆[4337. 6. 9.]

 

614□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박완호, 시작시인선 26, 천년의시작, 2003

  시를 많이 다듬어서 만드는 성실한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운 흔적도 많이 보인다. 시들이 대체로 무난하다. 무리를 하지 않고 떠오른 착상을 끝까지 풀어가려는 의지가 아주 좋다. 그런데 조금 더 풀려야 할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뭉쳐있어서 읽는 흐름을 방해한다. 급작스런 제시가 필요한 곳에서는 그렇게 해야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미숙이라고 봐야 한다. 더 풀어야 할 곳과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어서 완급 조절이 다소 필요한 시집이다.★★☆☆☆[4337. 6. 9.]

 

615□샤롯데 모텔에서 달과 자고 싶다□김재석, 시작시인선 25, 천년의시작, 2003

  재주가 화를 부른 경우이다. 현란한 기법이 쓰여졌으면서도 시가 코미디가 되었다. 특히나 불교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부분인 1부에서는 그 코미디가 더 심해서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태도는 시가 어느 한 곳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안주의 터가 굳이 말투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말투를 우스개의 말투로 하고 나면 그 우스개가 담을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많은 부분 길들지 않는 어떤 발랄함이 담고자 하는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세계조차도 그렇게 담기고 말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비유가 비유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유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좋은 비유도 태도 때문에 그냥 비유로 끝난 경우가 많다. 한자는 역시 코미디의 일종이다.★☆☆☆☆[4337. 6. 9.]

 

616□잡히지 않는 나비□김상미, 시작시인선 27, 천년의시작, 2003

  어떤 전제된 관념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설명하려 든다. 그 설명에는 독자가 내 생각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하는 기우도 들어있다. 그래서 시가 길어지고, 길어진 시에는 저절로 줄거리도 생기며, 시답지 못한 수사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무엇을 만들려고 하기 전에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이 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리지 못해서 장광설이 된다. 주제가 뚜렷한 것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그것을 시의 조리개로 맞추지 못하는 것은 큰 단점이다. 최소한 ‘사랑’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 한자부터 버려야 할 일이다.★☆☆☆☆[4337. 6. 9.]

 

617□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우대식, 시작시인선 31, 천년의시작, 2003

  한시에서 느껴지는 묘사의 절제미가 보인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묘사로 할말을 대신하는 능력이 갖추어졌다. 시집에 죽음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어서 분위기가 아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곳에 불교의 이미지를 많이 깔았는데, 그것들이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든다. 가족사와 주변에 관심이 머물러있고, 거기서 생의 근본에 대한 질문이 더 치열해져야 할 단계에 와있다. 이런 시는 정신을 얼마나 단련하느냐 하는 것에 성패가 달려있다. 가혹한 일이지만, 이미 선택한 일이니, 돌이킬 수 없다.★★☆☆☆[4337. 6. 9.]

 

618□치자꽃 심장을 그대에게 주었네□유수연, 시작시인선 32, 천년의시작, 2003

  정교한 이미지 배치와 치밀한 짜임새로 시가 아주 단단한데, 이미지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미지의 본래 기능은 보여주어서 그것이 독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울림을 만들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끊임없이 설명하려고 든다. 설명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짜임새나 연결에 허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설득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욕구이고, 그 욕구는 시에 놀랄 만큼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에 특별한 지식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그것이 감정의 접근을 가로막는 자세를 취한다면 그건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논리상 앞 뒤 연결이 문제가 없더라도 어렵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모든 설득의 태도는 강요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시가 지향하는 동감의 감동과 약간 어긋나는 바가 있다. 이 시에 울림이 깊이 오지 않는다면 그런 까닭이다. 할 말을 이미지로 대신할 것이라면 울림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자는 굳이 해줄 필요가 없는 배려이다.★★☆☆☆[4337. 6. 10.]

 

619□벌어진 입에 대한 명상□김경삼, 시작시인선 30, 천년의시작, 2003

  7, 80년대에 유행하던 이른바 신춘문예 응모용 시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묘사를 위한 묘사가 많다는 뜻이다. 묘사를 위한 묘사라는 것은 말이 갖는 배치에 따라 나름대로 질서도 있고, 그럴 듯한 표현도 있지만, 그것이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 내지는 실물의 실체가 너무 빈약하거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말한다. 많은 시들이 표현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 시나 독자를 위해서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1부와 2부의 시들이 그렇다. 재빨리 그런 단계를 지나야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시를 쓸 수 있다.★☆☆☆☆[4337. 6. 10.]

 

620□저리도 붉은 기억□이태관, 시작시인선 34, 천년의시작, 2003

  내가 가진 체험이 절실하고 절망의 깊이가 깊을수록 상상은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올라야 한다. 날아올라야 할 상상력이 내용의 절실함 때문에 딱딱해지면 시가 되지를 않는다. 내용이 주는 중량의 압박감 때문에 상상력이 짓눌려서 짜부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들이 정지해 보일지언정 활달하지 않고, 진지해 보일지언정 답답하다.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사와 수몰된 고향의 아픔을 노래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수준에 그치면 안 된다. 그런 아픔이 독자의 어디를 건드릴 것인가를 먼저 파악한 다음에 시를 써야 한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독자들까지 따라 아프지는 않는 것이 시의 세계이다. 한자는 무거운 추로 작용할 따름이다.★☆☆☆☆[4337.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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