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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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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84
2015년 02월 11일 16시 47분  조회:1832  추천:0  작성자: 죽림
 

831□몸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35, 세계사, 1994

  감성을 전달하는 법은 두 가지다. 감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법과 생각의 허를 찔러서 잃은 감성을 일깨우는 법이 그것이다. 이 시는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고된 사고 훈련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여 그 깨달음으로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자칫하면 그냥 지식의 전달로 그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과장하는 것으로 그칠 염려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커지는 위험은 산문성이다. 깨달음의 내용을 전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시가 산문으로 전락하는지도 모르는 수가 생기곤 한다. 산문의 무거운 행보가 곳곳에서 걱정스러운 시집이다. 한자 역시 걱정스럽다.★★★☆☆[4337. 9. 13.]

 

832□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시가 현실을 다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실상부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집이 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탄광촌 아이들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과장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아이들의 눈을 빌면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불거지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아주 잘 드러났다. 아이들과 숨을 함께 쉬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것이 어른들의 시집에 섞였지만, 동시집이라는 것이다. 동시집은 드러냄의 방식에서 어떤 식으로든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못내 아쉽지만, 동시집으로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좋은 시집이다. 이런 시집들이 있어야만 정말로 아이들 사이에서 시가 살아날 것이다.★★☆☆☆[4337. 10. 3.]

 

833□뫼비우스의 띠를 드립니다□안희두, 온누리, 1987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수학의 공식과 원리를 소재로 삼아서 시집 한 권을 채웠다. 그렇기에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시가 특정 소재에 집착하면 갑갑하다. 시의 영혼은 한없이 밖으로 뻗어나가는 성질이 있는데 특정 소재를 떠나지 않으면 소재가 주는 영역의 밖으로 시가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 소재는 그 소재의 지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준비가 안 된 독자에게 지식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이해는 될지언정 그것에서 감동까지 받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게다가 수학이라니! 노력은 돋보이는 시집이나,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시집이기도 하다.★☆☆☆☆[4337. 10. 3.]

 

834□좋은 세상□이은봉, 실천문학의 시집 27, 실천문학사, 1986

  시를 쓰는 자기 나름의 방법이 확고히 잡힌 시집이다. 그런데 시의 방법은 냉정한 보여주기 수법인데, 다루는 감정은 그렇지를 못해서 방법과 내용의 부조화가 이 시인이 극복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것 같다. 내용의 격렬함은 결국은 방법을 과격하게 하여 형식을 무시하게 될 것인데, 그런 조짐이 시집 곳곳에서 불거졌다. 한자 역시 그런 불거짐 가운데 하나이다.★★☆☆☆[4337. 10. 4.]

 

835□부활□고은, 오늘의 시인총서 6, 민음사, 1974

  감수성이 아주 풍부해서 시집 전편에 철철 흘러 넘친다. 그런데 그것을 잡아낼 틀이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다. 막연한 감정이 막연한 이미지 묘사로 대체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섬진강에서>나 <문의 마을에 가서>의 경우에는 9분도 쌀처럼 아주 잘 정제된 시이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7분도나 5분도의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현학 취미가 있는 것은 탓할 것은 없지만, 그것이 독자의 접근을 저지하는 수준이면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자는 어려운 문제이다.★★☆☆☆[4337. 10. 5.]

 

836□인부수첩□김해화, 실천문학의 시집 35, 실천문학사, 1986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시를 쓰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생각을 해야 나오는 것이 시인데, 육체가 고달픈 가운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고달픈 육체로 생각을 하려면 특별한 감정이 아니면 안 된다. 특별한 감정이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육체가 견디지를 못한다. 그런 점을 이 시집은 아주 잘 보여준다. 인부수첩 연작은 노동의 한 가운데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런데도 흥분하지 않고 이 정도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걸러지지 않은 육성이 흥건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4337. 10. 5.]

 

837□붉은 산 검은 피 첫째 권□오봉옥, 실천문학의 시집 63, 실천문학사, 1989

838□붉은 산 검은 피 둘째 권□오봉옥, 실천문학의 시집 64, 실천문학사, 1989

  조기천의 <백두산> 이후 처음 보는 서사시이다. 서사시의 약점은 서술과 진술을 균형 잡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독자가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서 갈래를 정리해버렸기 때문이다. 서술이나 묘사는 소설로 넘어갔고, 진술은 희곡이나 수필로 넘어가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는 또 다른 방법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나갔는데, 그것은 서사성을 벗어나서 비유나 다른 동일시의 체계의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유체계는 길어지면 긴장이 늘어진다. 이 시집은 진술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럴 경우 시는 지루해진다. 화자의 내면 속으로 사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건을 겉으로 드러내면 화자의 내면 심리가 위축된다. 결국 서사시에서는 이 둘의 균형을 꾀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백두산>이 상당 부분 성공한 부분도 묘사와 구조에서 성공한 탓이다. 특히 구성이 간결하고도 여러 층을 갖고 있어서 울림이 좋았다. 그런데 이 시집은 구성은 단순한데 등장인물의 할말이 너무 드러났다. 그래서 지루한 느낌을 벗어나기 힘들다. 특정 사건을 서사시로 다루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고서 시작하는 것이 화자의 진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와 닿게 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서사시인데,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4337. 10. 5.]

 

839□사라진 손바닥□나희덕, 문학과지성시인선 291, 문학과지성사, 2004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럴 필요가 없는 감정에 주저앉아서 꾸물거리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삶의 외로움이라든지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슬픔 따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한 번쯤 정직하게 거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는데도 자꾸 보여주려고 하면 폼만 남는다. 그럴 때는 빨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여태까지 바라 봐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떫은감만 남는다. 떫은 감 몇 개로 손님을 치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네댓 편을 빼고는 별로 볼 것이 없는 시집이다. 한자는 더욱 볼 것이 없게 만든다.★★☆☆☆[4337. 10. 6.]

 

840□붉은 담장의 커브□이수명, 민음의 시 103, 민음사, 2001

841□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이수명, 문학과지성시인선 289, 문학과지성사, 2004

  존재 자체가 실험의 대상이 되는 순간 여태까지는 볼 수 없는 긴장이 거기 나타난다. 그리고 방법을 바꾸거나 정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 않으면 긴장은 점점 풀어진다. 처음 두 시집에서 나타난 긴장이 아주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가 아주 세련된 논리화를 지향하고 있다. 시에서 논리화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보지 않은 상태의 자신감은 대개 덫으로 작용하기 쉽다. 그럴 듯해 보이는 순간 시의 긴장은 점점 풀어지는 것이다. 그 긴장의 강도는 시의 길이에서도 나타난다. 시가 짧아지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거나 해이해지는 것이다. 이 시집의 징후는 뒤쪽의 것에 가깝다. 긴장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방법이든 세계관이든 바꾸어야 할 지점에 이른 것이다.★★☆☆☆[433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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