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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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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97
2015년 02월 11일 17시 14분  조회:1878  추천:0  작성자: 죽림

 

 

961□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현대시시인선 16, 현대시, 2004

  시의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이다. 거의 본보기에 가깝다. 대상의 인식을 완전히 소화하여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 깃든 어떤 정신을 드러내는 시의 지평이 이 시집 안에서 완전히 살아나고 있다. 이렇게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이 죽지 않고 생각의 연결이 살아나는 일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시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잘 알고 이해한 시인이다. 한 가지 사물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생각의 올을 잡아내어 그것으로 전혀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것은 재주만으로도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만나야만 이루어지는 자리에 이 시집이 있다. 그러니 칭찬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의 표현과 기교가 절정에 이르면 반드시 시가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 시집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은 우리에게 이미 아주 낯익은 것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이것 때문에 애써 이룬 재주가 더 이상의 어떤 세계를 향하여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계속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마음의 문제에 집중하되, 거기서 어떤 사물을 통해서만 말하는 방법과 주제로부터 조금 더 벗어나서 개인의 삶 속에 투영된 인류 보편의 어떤 감정을 좀 더 자극해줄 수 있는 그런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점만 보완된다면 우리는 정말 큰 시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물의 한 가지 속성에만 구속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큰 것을 노래하는 큰 호흡이 그런 가능성을 예고한다. 기대해볼 일이다.★★★★☆[4337. 12. 10.]

 

962□나는 둘이다□양전형, 현대시시인선 18, 현대시, 2004

  시에는 시가 가는 길이 있고, 이미지에는 이미지가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잘 따르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길이고, 나중에는 그 길을 벗어나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길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자리를 잡았으면 내가 그와 다른 말을 하고 싶더라도 그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이미지의 흐름을 타고서 흘러가면서 시라는 큰 그림을 만든다. 이 시집에서는 많은 부분 이 점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서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잘 안 되었다. 결국 너무 서둘러 시집을 냈다는 얘기가 된다.★☆☆☆☆[4337. 12. 10.]

 

963□오래 말하는 사이□신달자, 민음의 시 122, 민음사, 2004

  전에 읽은 시집에서는 여류시라는 느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을 보는 독특한 눈이며 삶의 달관에서 오는 적절한 깨달음에 그것을 실어내는 발상의 적절함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시들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경륜에는 오랜 세월 그 분야에서 익은 자의 완숙한 기교까지 느껴진다. 문정희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여린 느낌이 온다. 맛있는 시집이다. 아마도 삶을 보는 솔직한 태도가 그 맛의 진원일 것이다.★★★☆☆[4337. 12. 10.]

 

964□밤에도 강물은 흐른다□최정아, 시선시인선 12, 시선사, 2004

  주제와 표현의 일치감과 괴리감이 때로 시에서 크게 보이는 수가 있다. 이 시집이 그렇다. 대체로 하고자 하는 말들을 위해서 동원된 말들이 정도 이상으로 장황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시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표현된 것들이 담아내는 그 내용물이 안정되지 못하고 표현을 향해 억지로 옷을 입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표현을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실리는 내용들의 초점을 좀 더 선명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많은 표현들이 한 가지 초점을 향해 집중되어야만 시가 빛을 낸다. 한자는 초점을 흐릴 뿐이다.★★☆☆☆[4337. 12. 11.]

 

965□그대 밤하늘에 불을 밝히고 싶다□곽문환, 시선시인선 9, 시선사, 2004

  이미지에 집착을 하다 보면 생각이 그냥 이미지에 머물러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실험이라고 해야 할지 의도라고 해야 할지 분명하진 않지만, 시에 실험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칭찬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의 형식들이 어쩐지 낡아 보이는 것을 그런 탓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무언가를 전달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를 않고 혼자 서있는 경우이다. 주제가 충실한 시들은 표현에서 좀 착오가 일어나도 미숙해 보일지언정 낡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 시의 신선함을 살리려면 결국 내용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12. 11.]

 

966□겨울 운동장□김동수, 시선시인선 8, 시선사, 2004

  이미지를 처리하는 수법이 에누리없이 아주 깔끔하다. 그런데 이미지에 시선이 고정되면 정작 이미지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 결과는 비유를 통한 이미지 대체로 나타나는데, 이런 방법에 너무 치중하면 시가 단조로워진다. 그리고 정의의 방식을 택하기 쉽다. 역시 단조로워진다. 이미지가 이미지의 한계 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극복하려면 이미지를 정의하는 방향을 버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 주변의 것까지 아울러 보여줄 수 있는 열린 방법이 필요하다. 제시된 것을 규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제시된 그것을 통해 그것 너머의 것까지 보여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자는 불필요한 태도이다.★★☆☆☆[4337. 12. 11.]

 

967□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강영은, 시선시인선 6, 시선사, 2004

  시들이 좀 거칠다. 이 거칢은 한두 가지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어떤 흐름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뚜렷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냥 두었다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대체로 좋은 표현을 찾으려는 정신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그것이 거기에 적절한 마음의 상태를 담아내는 일과 조금 어긋나서 생기는 일이다. 따라서 세계를 보는 일정한 시각이 전제되어서 그 시각으로 표현을 잡아내야 하는데, 애써 잡아낸 표현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이다 보니 때로 내용을 거칠게 담아낸다. 표현과 내용의 조화가 거칠지 않도록 하는 처방이 필요한 시집이다. 한자는 처방이 되지 않는다.★★☆☆☆[4337. 12. 12.]

 

968□다시 부르는 제망매가□김인육, 시선시인선 5, 시선사, 2004

  목소리가 우렁차고 호흡이 길어서 무슨 내용이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시인이다. ‘꽃신’은 장시인데, 이야기를 가지면서도 그것이 충분히 서정성까지 아우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집의 절반이 여인들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차있는데, 여느 사랑시를 닮지 않고 시인만의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 점이 좋다. 다만 이 우렁찬 목소리가 거칠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시에 비쳐진 상상력의 구도를 좀 더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한자는 장애이다.★★☆☆☆[4337. 12. 12.]

 

969□여우비□지인, 현대시시인선 1, 현대시, 2004

  유미주의인지 탐미주의인지 분명치 않을 상상력의 체계와 태도를 갖고 있는 시집이다. 이것은 세계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에서 촉발된 것인데, 그것이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드러날 때 보이는 난삽함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림과 음악 쪽으로 넘나들며 상상력의 실험을 하는 것이 그런 태도의 결과이다. 그러다 보면 이미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면서도 때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구르마의 노릇도 함께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인데, 궁금증이 심한 시인한테는 그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독특함을 추구한다면 이대로도 괜찮겠지만, 결국 도달할 곳이 있지도 않은 진리가 아니라 시라면 시의 특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될 것이다.★★☆☆☆[4337. 12. 12.]

 

970□익숙한 소리□문선영, 현대시시인선 4, 현대시, 2004

  시가 어려운데, 그것이 상징이나 상상력의 복잡한 체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에서 초래된 것이라면 여러 가지 문제를 갖게 된다. 특수한 면을 깊이 파고들어서 거기서 보편의 거울을 발견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거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수렁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발견을 하지 못한다면 차선책은 거기까지 도달하는 방법의 흔적을 보여주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어려워졌고, 이 어려움은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너무 깊고 좁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앞부분에서는 한 시 안에서 너무 많은 말들을 하려고 하고 있고, 뒤에서는 하고자 하는 얘기들을 너무 돌리거나 아끼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여러 모로 방법을 깊이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433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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