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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인 재조명
2015년 02월 12일 21시 22분  조회:2231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최후 사진

1943년 초여름, 교토(京都) 우지(宇治)강 구름다리에 늘어선 9명의 청춘남녀. 이들 중 단정한 교복 차림에 눈매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는 범상치 않은 단호함이 엿보이는 청년 윤동주(1917∼1945)가 유난히 돋보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남긴 유일한 사진이자 최후의 사진이기도 하다.

1995년 TV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발견된 이 사진을 찍은 후 윤동주는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조국 해방을 한달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야나기하라 야스코씨가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여학생 두명으로부터 윤동주가 체포되기 전 구체적인 삶을 취재, '현대문학' 9월호에 공개했다.



  태평양전쟁이 다급해지면서 일본 각료회의는 조선인 징병을 의결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윤동주는 귀국 결심을 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윤동주를 환송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윤동주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급우들이 노래를 청하자 "거절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곧바로, 앉은 채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여학생들은 회고했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최후의 구름다리 위 사진은 송별회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윤동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표를 구입하고 짐을 소포로 부친 후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송몽규 등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하는 데 전념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징병제도를 비판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나기하라씨는 "6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이 청년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라"며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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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보기
                         

                                           리울
I. 서 론

1. 연구사 검토 및 문제제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나온 이래 윤동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다각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연구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단선적인 구분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도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고찰해 보면 1) 시의 성격 연구, 2) 내면적 갈등(시정신) 연구, 3) 전기적 연구, 4) 기독교적 연구, 5) 기타 연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시의 성격 연구>로 저항성 여부이다. 초기에는 역사적 암흑기를 반짝이는 별처럼 살다간 그의 생애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저항시인, 민족시인으로 자리잡았다가 吳世榮이 '윤동주 시는 과연 저항시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한때 뜨거운 쟁점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진 학자로는 白鐵, 金允植, 鄭漢模, 金宇鐘, 李尙斐, 洪起三, 任軒永, 金容稷, 全圭泰, 吳世榮, 金烈圭, 박삼균 등을 들 수 있다. 
두번째로 <내면적 갈등(또는 시정신) 연구>로, 高錫珪는 "거의 표백적인 인간상태와 蕪雜한 상실을 비쳐내던 말세적 공백에 있어서 불후한 명맥을 감당하는 유일한 정신群"이라고 그 역사적 의의를 말한 후,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나름대로 윤동주 시의 정신 구도를 파악하여 보여준다. 崔洪奎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情景的 양상, 어둠의 양상, 죽음의 양상, 긍정의 양상'으로 나누어 이 네가지 양상의 전개 논리를 추구하고 있고, 김흥규는 '화해의 세계 - 갈등의 세계 - 미완의 緊張'이라는 보다 정밀한 변증법적인 논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申東旭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1940년을 전후하여 양분하고 전반부를 '외로움을 통한 자아 발견'이라 하고 후반부를 '부끄러움의 시학'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정적 자아와 세계의 불협화'현상을 윤동주 시의 특질로 보았다. 金禹昌은 윤동주의 양심이 외부적 도덕률에 유도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내적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라 하고 이러한 명징한 자아의식은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적 자기 확인행위인데 이러한 바탕에서의 양심이란 가혹한 시대적 상황에서 비극적 행동으로 귀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윤동주가 추구한 심미적, 윤리적 완성은 궁극적으로 실천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당대의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자기 완성의 추구를 허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현상타파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직접적인 의미의 애국심과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사이에 갈등을 느낀 경우가 종종 있고 이것이 그의 시의 주요 모티프라고 하였다. 崔東鎬는 윤동주의 시적 의식을 내향적 의식과 외향적 의식으로 나누고 전자는 본절적이며 자아내적 탐구의 성향을 갖는 것이며 후자는 내향적 의식을 극화시켜 시대적 의미의 추구와 새로운 세계에로의 동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의식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통합되는 변모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지향성의 통합을 보여주는 작품이 '서시'라 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이러한 통합적 지향성은 다시 내향적 의식으로 귀결되는데, 이러한 결론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 '참회록'이라고 하였다. 李南昊는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화해와 사랑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질적 자아와 시대적 양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현실적 자아가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그 두 자아가 통합되어 더 큰 하나의 자아로 탄생하는 과정의 기록이라고 보고 있다. 
세번째 <전기적 연구>를 들 수 있다. 1949년 8월 30일 자유신문에 실린 유영의 '내가 잃은 삼재'를 필두로 윤영춘, 정병욱, 윤일주 등 실로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에 얽힌 인상기 내지 회고담을 쏟아 놓았다. 1968년 정음사 간행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증보판)에서도 그런 자리를 마련했고, 1973년에는 {크리스챤 문학}에서 윤동주 특집을 꾸미면서, 그리고 1976년 {나라사랑} 여름호에서도 전권을 윤동주 연구와 일화로 채웠다. 뒤이어 평전도 잇달아 나왔는데, 이건청 편저 {윤동주 평전}(문학세계사, 1981)을 비롯하여, 권일송의 윤동주 평전(민예사, 1984),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열음사, 1988), 김수복의 {윤동주-별의 노래} (한림원, 1995) 등이 그것이다. 
네번째로 <기독교적 연구>이다. 물론 초기부터 기독교적인 접근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단편적 언급이나 피상적 연구에 그치고 있어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접어들면서 본적격인 기독교적 연구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데, 곽동훈, 박이도, 정호승, 허규, 채현주, 박춘덕, 이영섭 등의 연구가 그것이다.
다섯번째 <기타 연구>로 김열규와 마광수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김열규는 윤동주의 시가 자아를 회복하지 못한 '오티즘'속에서 자아분열과 作爲體驗, 그리고 離人症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윤동주의 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마광수는 윤동주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 즉 자연표상으로서의 상징, 시대 및 역사적 상황의 상징, 내적 갈등과 소외의식의 상징, 사랑과 연민의 상징, 종교적 표상으로의 상징 등 다섯 가지의 상징 세계를 중심으로 문학적 의의를 구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그 동안 쏟아져 나온 수십, 수백 편의 연구 논문과 회고담을 통해, 윤동주라는 한낱 이름없는 문학청년이 한국 문학사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위치에까지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그 시세계도 비교적 속속들이 밝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 일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윤동주-인용자 주)에 나타난 신앙적인 깊이가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곤 했었다"는 문익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윤동주 시 연구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있는 사상적 배경은 거의 기독교 신앙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어떤 의미에서 윤동주 시는 信仰的 告白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윤동주 시를 신앙적 고백의 기록이라고 보는 관점은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업적의 미비한 요소를 보충하고 윤동주 詩世界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영섭의 이같은 지적처럼, 윤동주의 詩와 삶에 있어 그 핵심은 信仰이다. 적어도 윤동주의 詩는 그의 삶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고, 그의 삶은 다시 그의 신앙을 제쳐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와 삶의 정체를 낱낱이 밝힐 수 있는 열쇠도 신앙이라고 여겨진다. 신앙이란 '개인이나 단체가 확고하게 믿고 움직이는 삶의 방향이며 그것에 우리의 삶을 위탁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삶에 목표를 형성해 주며, 또 모든 사람이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삶을 하나로 일치시켜 우주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신앙으로 접근하면 마치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피해가거나, 더러 기독교적인 잣대를 들었다 하더라도 윤동주 詩의 흐름을 꿰뚫지 못하고 그저 기독교적 요소 특성 몇 개를 줍고 마는데 그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을 작품 해석의 보조적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단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작품을 분석하다 보니 신앙적 변모 양상이나 美意識이 看過되는 愚를 범하고 말았다.
윤동주는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신앙적 성장기, 그리고 회의 방황기를 거쳐 신앙적 성숙기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시는 신앙적 고백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정신세계에는 기독교적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의식의 흐름에 입각하여 윤동주 시의 변모과정을 고찰할 때만이 윤동주의 시세계가 제대로 규명되리라고 믿는다. 
T.S. Eliot는 '여러 작품들이 이루는 전체 시를 하나의 단일한 장시로 볼 필요가 있는 시인이 있다'고 했는데, 윤동주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보여진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에는 물론 예술성을 목표로 씌어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그것 못지않게 자신의 내적인 심리 상태를 진실하게 토로하고 있다. 다시말해 형식(언어적 기교)보다는 내용(사상)에 충실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그의 시는 개인적 고뇌의 기록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詩作날짜를 적어놓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의 시는 "日記詩"로도 불린다. 


2. 연구 목적 및 연구 방법

본 論文의 目的은 윤동주 시의 흐름을 신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의 의식세계가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를 지배하는 갈등의 논리와 시적 변모 과정,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자아상도 드러날 것이다.
이를 위해 本考에서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그의 삶과 동일선상에 놓고 기독교적 의식을 주된 열쇠로 하여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가급적 창작일자 순으로 배열하여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고,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면서 탐색하고자 한다. 또한 최대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童詩부터 마지막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까지 거의 모든 중요 작품들을 전부 다루고, 역시 論者의 편의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주관성을 막기 위해 시의 部分이 아닌 全文을 실을 것이다.
윤동주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詩作날짜를 기록해 두고 있다. 그럼 윤동주는 왜 시작날짜를 밝혀 놓았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詩가 내면세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윤동주는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따라서 그의 시는 자기성찰적 경향이 강하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시의 성향이나 수준이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나중에 쉽게 조감하기 위해서이다. 윤동주는 童詩에서 시작, 습작기를 거쳐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시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그리고 아주 열심히 문학수업을 했음을 그의 생애가 웅변해주고 있다. 한용운이 '以道得詩'한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以詩得道'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끊임없이 그의 의식세계가 변화되어감에 따라 그의 시세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영철의 지적처럼 윤동주의 시는 내면적 자아에서 사회적, 역사적 자아로 변전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어 부분부분 보면 각각 다른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면 일관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즉 그의 시는 목표와 지향점이 있다. 앞에서 윤동주의 시는 그의 삶의 기록이고 그의 삶의 핵심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목표로 삼은 삶의 모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크리스챤이 그렇겠지만 특히 신앙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보고 부단히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윤동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무던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하나의 聖化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윤동주는 신앙적 성장기를 거쳐 회의 방황기를 맞이했고, 그러나 마침내 그 위기를 딛고 신앙적 성숙기로 접어든다. 그러한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그의 시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을 파악하는데 그의 시작날짜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는 이것을 의식하고 시작날짜를 적어 두었는지 모른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있어 시는 일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 그때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도정에서 그의 시는 나온 것이다. '윤동주에게 있어 시와 삶은 언제나 동질적 선상에서 수용되고 추구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옥사는 시와 삶이라는 희귀한 국면을 하나의 역사적 완성물로 결정지어 놓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시대나 삶의 측면을 도외시하는 형식주의적 방법이나 속류 구조주의적 방법은 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의 시는 숙명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평에서 의도의 오류라고 부르는 어리석은 실수를 회피해야 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무엇을 말했는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불합리한 것이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다. 둘째, 작가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 질문은 상상적 저서와 논증적 저서를 혼동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노드럽 프라이의 지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윤동주 시 연구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견해로 보인다. 오히려 허쉬의 다음의 견해가 윤동주 시에 접근하는데 훨씬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무관련설을 주장하는 학문적 회의주의는 허다한 혼란을 가져 왔을 뿐이다. 일단 자신의 텍스트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저자가 사정없이 추방당하자, 한 해석의 타당성을 판단할 적합한 원칙이 없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략)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원래 작가를 추방하는 것은 한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강력한 규범적 원칙을 거부한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가 작가의 의미가 아니라면 어떠한 해석도 그 텍스트의 의미에 부합할 수 없을 것인데, 그 텍스트는 어떤 결정된 또는 결정 가능한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절대주의 분석 비평의 영향으로 역사라든가 시인의 생애, 의도를 비평에 개입시키면 잘못된 것으로 알아 왔다. 그러나 적어도 윤동주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절대주의 분석 비평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단순하게 역사와 인간을 배제하는 문학론이 知的 靜寂主義에 떨어질 공산을 가진다는 경계심만으로가 아니다. 솔직히 윤동주의 경우 그의 시는 생활이며 현실 자체요, 그 역 또한 참이다. 
시인은 개성을 지닌 개인이다. 따라서 세계를 보는 관점과 해석이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대체로 문학작품에는 시인의 개성적인 체험의 세계가 반영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개성, 곧 창의성은 오히려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다. 윤동주는 그 어느 시인보다도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형상화했다. 따라서 그의 시 연구에는 그가 살았던 사회와 시대상황 등 전기적 사실 파악이 필수적이다. '윤동주의 경우처럼 그 작품과 삶과 지조가 완전히 구합일체화(具合一體化)된 예는 극히 드물다. 시와 사상, 사유와 지조, 그리고 시와 생애가 촌분의 괴리도 있을 수 없이, 그의 서정 정신과 저항 정신의 한 줄기 殉節에의 희생으로 일철화(一轍化)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본 연구에서도 윤동주의 성장 배경, 家系, 생활환경, 학교생활, 교우관계, 취미 등이 작품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전제 아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특히 종교와 사상에 관해 면밀히 조사, 분석하여 그 토대 위에서 윤동주의 심리상태를 추리하면서 그가 창작한 작품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면 그의 세계관이 어떠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밝혀질 것이다.


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2 
- 기독교 의식을 중심으로 

리울 김형태


II. 本 論

1. 基督敎 文學(詩)의 意義

한국 시문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우리의 近代詩, 現代詩가 傳統 詩歌의 계승에만 머물지 않고 서구의 신문예 사조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되었음과, 그리고 이때 기독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창가 가사 신시 등 개화기 시가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은 비록 미의식의 기반에서 자리잡지는 못했을지라도 사회적 문화적 기틀 위에 사상적인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한 작품이 시대의 사회 환경 시민의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산물이라면 기독교가 우리의 근대화 시기에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데는 종교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듯이 한 시대의 민족적 정신적 의식상태를 살피는 데는 예술 속에 투영된 종교를 살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저가 된다고 지적한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분석을 빌릴 것도 없이 종교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해 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종교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하며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깊이 믿고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종교는 물론 다른 것이다. 그러나 文學이 人間의 省察에 중대한 使命이 있다고 한다면 宗敎와 共通基盤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문학과 종교가 만날 때 종교문학이 탄생한다.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문학이 종교를 담는 그릇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개화기 문학이나 공산주의 문학에서 보듯 계몽주의 문학이나 목적주의 문학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문학이 종교를 도구화할 수도 없다. 문학과 종교가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신문명을 선도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과 종교는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지적처럼 기독교인이 쓰는 문학은 신앙의 肉化이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벗어 버려도 좋은 헌 옷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림이요, 예술은 그 그림을 넣은 액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韓國基督敎文學'이라고 할 때에는 개념상 基督敎라고 하는 종교적 일반성과 韓國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들 상호관계를 통하여 '한국기독교문학'의 개념설정 및 영역을 한계짓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김현승, 박두진, 구상 등의 시인을 기독교 시인이라고 아무 망설임없이 부르면서도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 그러면 아직도 생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문학 속에 엄연히 기독교 시인, 기독교 작가가 존재함에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적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구유럽에서 기독교 문학이 활발히 발전된 이유가 '성서와 문학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의 개념 및 정의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많은 견해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확실한 개념 정립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정의 만큼이나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에 대한 개념 정립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박두진의 다음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基督敎文學 基督敎詩의 정의와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성이 있다. '基督敎精神'이나 '基督敎思想'이나 '基督敎神學'이란 용어의 내용 그 자체의 차이도 분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또 사상이나 신학이란 면에서 다루지 않고 순전히 신앙정서, 기독교 생활적인 정서와 그러한 인생관 혹은 정신이 주가 되었을 경우, 마찬가지로 基督敎詩 혹은 基督敎 信仰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基督敎文學 基督敎詩는 기독교 자체, 기독교사상 자체, 그 신앙의 본질, 그 생활 정서의 본질의 문제이다.
한국의 基督敎詩는 전혀 이념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실제 경험을 갖지 못한 채, 그 존립 존재의 여부조차 詩壇的으로 인정되거나 거론된 바 없다. 기독교 신자가 있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있어야 하며, 그 기독교 문화의 토양 위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基督敎文學이며 基督敎詩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있으면 기독교의 생활이 있고 그 생활이 종교적 정서로 醇化되고, 기독교정신으로 昇華되고, 기독교 사상으로 토착 체계화될 때 그러한 정신적 이념적 골격과 정서적 정감적 혈육이 유기화 생명화되어 기독교 종교시로서, 기독교 신앙시로서, 기독교 생활정서의 형상화로서 발화 결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고도 남을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시의 개념에 대한 그동안의 개별적 견해를 보면, 먼저 명계웅은 '기독교 문학은 구제의 문학, 화해의 문학으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주제를 개성화하고 인간의 원죄의식과 화해의 가능성을 상황적 입장에서 추구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金榮秀는 '基督敎詩의 본성은 종교적 신앙의 직접적인 표백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세계관 속에서 신앙적인 기갈증과 희구를 노래하는 데 있다'라고 보고 있으며, 金禧寶는 '크리스찬이라는 작가의 신분, 기독교적 시점(헤브라이즘의 영성, 덕성, 신에의 귀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일반적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李商燮은 '기독교의 근본적 테마인 죄 구원 사랑 희생 화합의 공동사회 등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당장의 현실에서 깊은 의미를 띠울 수 있어야 기독교 문학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심벌과 드라마(예컨대 선악과, 아담과 이브,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만찬 등)가 한국적 현실의 의미를 구현하도록 적절히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李永傑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감수성을 보이며, 기독교적 사상과 상징이나 우의를 사용하는 시를 뜻한다'고 보고 있으며, 申奎浩는 '기독교 문학은 성서적 복음을 토대로 보편적 예술성을 달성할 때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단편적 또는 부분적인 언급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기독교문학이란 개념이 손에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노력이 丘昌煥에게서 보인다. 그는 基督敎文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基督敎文學은 言語藝術로서의 文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基督敎文學이란 바로 基督敎思想의 예술적인 형상화인만큼, 想像力과 言語美學을 동원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基督敎文學이라 하여 문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基督敎文學은 基督敎精神의 구현이요 基督敎思想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선악의 대결, 양심과 고뇌, 신앙과 구원에 대한 추구, 신에 대한 찬양과 삶의 환희, 사랑과 정서의 실현, 소망과 용기, 자기희생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인간성을 옹호하고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등이 작품에 나타나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는 인간화의 과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基督敎文學의 방법은 직접적인 경우와 간접적인 경우와 비판적인 경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前者는 旣成敎理의 擁護와 信仰의 干證이요, 다음은 함축적 방법으로서 기독교사상을 溶解, 表現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의 것은 기독교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 비판하는 경우로서, 모든 제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할 것은 예술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정신을 구현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로, 基督敎文學은 종교의식의 생활화와 체험적인 토착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다듬어지고 사상이 익어가고 신념이 의지화되어갈 때 비로소 기독교문학은 형성되어 간다. 기독교정신을 생활화하지도 않고 관념적, 추상적 지식으로만 이해한다면 문학의 육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은 작가의 기독교적 생활체험과 크리스찬의 문학적 훈련이 행해져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문학은 存在의 문학이 아니라 當爲의 문학, 快樂의 문학이 아니라 敎訓의 문학, 慰安의 문학이 아니라 救濟의 문학, 消費의 문학이 아니라 創造의 문학, 遊閑의 문학이 아니라 苦惱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시는 일반적인 시와 똑같은 예술성에다 신앙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기독교 의식이 담겨져야 한다. 기독교 의식에서 시적 출발을 하여 궁극적 목적인 구원 부활 사랑의 사상을 나타내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며 구현했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좋은 기독교 시란 삶의 축복 모순 불합리성 아름다움 권태 죄악 회의까지도 나타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능과 무의식과 온 삶이 창조의 과정에 작용해야 한다. 문학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책임 의식을 거부할 수 있지만 종교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에도 문학은 암시이지만 종교는 교훈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종교성을 작품에 노출시키지 않고 심미적으로 승화시킬 때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작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기독교 의식을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관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무 추상적이거나 노골적이 될 경우는 문학적 효과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이 기독교 의식에 투철할 때 우리는 그를 기독교 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 문학성이 고양되어 우리 시문학사에 비중을 둘 수 있는 상태로 발전될 때 기독교시로서의 의의가 있다. 성서적 사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체험의 종교로서 체질화된 시인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基督敎文學 또는 基督敎詩의 개념에 입각해 볼 때, 김현승, 박두진, 구상 시인 등의 반열에 윤동주를 올려 놓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으로,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독교 시로 보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 보다도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모습과 가장 훌륭한 기독교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고, 삶의 고백인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의식으로 충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윤동주의 시 작품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원죄의식(부끄러움), 본향에 대한 동경, 속죄양(희생양) 의식, 부활사상, 소명의식, 박애정신 등 기독교 의식의 정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연인지 신의 놀라운 섭리인지는 몰라도 윤동주와 그리스도의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갈릴리라는 지방에서 맏이로 성장하여, 비폭력, 무저항 정신, 곧 박애주의로 일관하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면, 윤동주는 일제치하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북간도에서 태어나 역시 장남으로 성장하여 누구보다도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했으나 민족시인으로 부활하여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둘다 조국을 사랑하는 식민 치하의 젊은이로서 수도가 아닌 비교적 소외된 지방에서 맏이로 태어나 자랐다는 점, 겸손하고 온유한 성격으로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 주변에 막달라 마리아와 순이로 이름 불리워지는 여인이 있었다는 점 등이 닮은꼴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유사점으로 인해 윤동주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게서 심리적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아 할 수 있다면 그분처럼 살고자 애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윤동주의 삶과 詩를 조명해 볼 때 사실로 드러난다. 즉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윤동주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는 측면에서,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리울 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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