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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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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선 6
2015년 02월 13일 17시 46분  조회:4174  추천:0  작성자: 죽림

구경서. 1921년 출생. 호는 남촌 또는 가남. 1945년 동인지 <백맥>을
주간했으며 시집으로 <폭음> <회귀선> <염전지대> <전원교향곡> 등이 있다.

     정물

  은쟁반 속에
  그 과수원은
  싱그러운 가을 바람
  사과 배 청포도...

  그것들은
  포개 쌓인 피라미트 형의 지세로
  피곤한 한숨을 잔다
  위대한 음악의 반주로
  입체의 핵과 핵은
  심연의 사상.

  하나의 계시
  원의 울타리 속
  원숙한
  발효
  그리고
  생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사자의 치아 앞에서
  돌과 같이 굳어져 있는
  과일들의 인력.

  그 하이얀 에프론
  위의 과수원
  아침
  햇살에
  난무하는
  미각의 나이프

  하나.

 

  구상. 191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상준.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원산 문학가 동맹에서 낸 동인시집 <응향>에 작품을 발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구상시집> <초토의 시> <구상문학선> 등이 있다.

     초토의 시

  1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하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수난의 장

  1
  우 몰려 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소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고꽹이를 휘저며 마구 쫓아 오는데
  돌아 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가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2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도갓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애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아싸고 빙빙 돌아 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죽엮다.

  3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토까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 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고나.

  4
  상여 속에서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어야 핳 풍경
  나의 달가운 꿈 속의 꿈이여.

  5
  추억의 연못 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 홍신은 벗어 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6
  꽃다발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구석봉. 1936년 충북 영동 출생. 호는 곡천, 양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수료.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제1회 역사 소설
모집, 동아일보사 방송국 개국 기념 단막극 현상모집에서 입상했다.
시집으로 <피의 역사>가 있다.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그것은 몽롱한 구름을 타고, 장승마냥 서 있는 나를 향하여 무쇠의
형벌을 가하면서, 겹겹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시야속은 온통 그들로해서 가득하고, 어떤 날 그들은 밀물과 썰물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해만의 특권처럼 음탕한 6월이 숨어버리고, 뒤미쳐 달려온 7월도 흠뻑
자란 어느날, 난 마을 사람들의 박꽃 얼굴 빛을 본뜨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거기 지나쳐 간 갖가지 슬픈 실화가 있었다.

  위도와 경도가 선뜻 취해 잠꼬대를 했기, 지구 위의 조그만 귀퉁이에
불은 노도처럼 날뛰고 있었다.

  낯이 검어 가는 태양 아래 가을이 익고 있을 무렵, 엎드려 피를 토한
나의 시집이 있었고, 배만 움켜쥔 채 신음했을 그 일그러진 퇴색한
초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멘트 벗은 부엌이 설워 돌아가는 아줌마, 펌풋대 우뚝 우뚝 묵묵한
공허가 있었다고, 젖내 풍기는 고사리 손을 놀려 어영차 밥도 짓고 국수도
썰고, 내 아우랑 여설 살 짜리 계집애랑 각시 신랑 혼례식장 꾸미던 그
회상의 담장 아래로, 아 탄피가 있었고, 해골이 희쭉 웃고 있었다.

  거기 슬프게 억센 아이들의 입다문 눈 빛에서 무한히 겹쳐간 밤의 살생과
야만을 읽을 수 있었다. 뼈가 녹아날 태양의 투시처럼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위도와 경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은 다시
바위의 굳굳한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으로 미망인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지엔, 죄인 같은
고아와 불구자의 행렬이 밀려 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 속은 어느 지점 눈 덮이는 이국벌판 위에, 새로 생긴
공동묘지가 폭풍우를 삼켜가면서 울고 있었다.

 

  권국명. 194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북대를 졸업하고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1946)했다. 연작시 '무명효'
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나는 사랑이었네라

  나는 피였네라,
  처음은 다만 붉음만이었다가
  다음은 조금씩 풀리는
  아픔이었다가,
  석남꽃 허리에 아픔이었다가,
  이 어지러운 햇살 속에
  핏줄 터져 황홀히 흘리는
  피였네라,
  내 피는 남산을 적시고
  남산과 대천세계를 적시고
  그래도 죽지 않는 더운 사랑이었네라.

 

  권달웅. 1944년 경북 봉화 출생. 한양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해바라기 환상> <사슴뿔>이 있으며 현재 <신감각>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감처럼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 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 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 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권일송. 1933년 전북 순창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훈장'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강변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 언어의 사회성을 추구 표현의 세련도를 이루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
시집으로 <이 땅은 나를 술마시게 한다> <도시의 화전민> <바다의 여자>와
수필집 <한해지에서 온 편지> <이 성숙한 밤을 위하여> <사랑은 허무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풀잎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그 눈 속의 우뚝한 무덤이 되고 싶다.

  무덤에 돋아나는 엉겅퀴와
  가느다란 몸살의 햇빛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늘 깨어 있는 한 방울의
  술이 되고 싶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줄 다리기
  실상 사람의 말씀은
  죽음 속에서 돌아 눕는
  조용한 풀잎의 새벽

  언제까지나 외로운 이승의 뱃길
  글썽한 눈물로 풀이하는
  내 마음 깊은 곳
  서걱이는 갈대의 숲.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설

  아르노 강변의 꽃도 지고
  백합 문장의 도시와 창들이
  이파리를 접으며 가을에 사위는

  눈을 들면 낙엽으로 저무는 모든 것
  글썽한 눈물이게 내 맘도 지고
  4년을 하루같이 순금으로 일렁였던
  마지막 한 점 붓을 놓았을 때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울지 않겠읍니다.

  당신의 신비로운 눈동자와 함께
  그 온갖 것
  내게서 소리없이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영원을 때리는 오묘로운 빛보라
  그 앞에서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러워 않겠읍니다.

  육신에 닿는 아픈 여백의 사랑을 말고
  찰나에 숨지는 이슬의 영광을 말고
  이승에서 만나는 그 최후의
  값진 두려움에 떠는 담홍빛의 영혼들

  이윽고 첫날같이 칠칠한 밤이 내리고
  서늘한 내 손이
  깊디깊은 산회의 덧문에 걸리어
  서성이고 있었던 경이의 순간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그때 당신의 수정 입술은
  내 머리털에 부딪고
  처음으로 내미는
  당신의 부신 손목에 입맞추었을 때
  오호 전혀 부끄러운 쉰 넷의 생애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차마 울 수조차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길
  죽음과 만날 그 최후의 약속 위하여
  나는 눈 덮힌 알프스를 넘고
  당신은 카라브리아 연안
  지아비 프란체스코의 곁으로
  달려갔읍니다.

  사랑이란 기다리는 플로렌스의 꽃밭
  예술이란 호올로 남는
  나의 키 큰 그림자에 불외했던 것

  나의 손은 이미 조용한 천상의 것
  당신의 눈동자는 이승을 출렁이는
  고요한 상징과 강물의 회귀로 시방은
  문예부흥의 심장
  플로렌스에 떨구는
  나의 한 방울 눈물의 의미처럼

  아르노 강변의 꽃은 지고
  내 맘의 설운 문장도 어둠에 묻히는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고원. 1925년 출생. 삼인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이율의 항변> <태양의 연가> 등 시집이 있고, 미국 아이오아대학 출판부를
통해 <한국 현대시집>을 영역 간행하여 해외에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모나리자의 손

  저녁 냄새가 번지는 미소,
  그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유난히 크다란
  모나리자의 손을 느낀다.
  두껍고 따뜻하다.

  이 손은 나의 어느 부분이든지
  스쳐가거나 휘감을 수 있고, 나를
  저 아래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뒤의 세계는
  그 손, 큰 손 때문에
  어둡고 차지 않는가?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구나.

 

  고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본명은 은태이며 법명은 일초이다. 11년간
불교 승려 생활을 했으며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의 특색은 자연이 갖고 있는 무의지의 율동에서 삶의 빛을 찾아 내려는 노력과 의식의

객관화를 표현하는 데 있다. 시집으로 <피안감성> <해변의 운문집> <신, 언어, 최후의 마을>
<새벽길> <조국의 별>과 장편소설 <피안행> 등이 있다.

     문의 *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문의: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신해가사

  청수장에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청수장 수년의 빈 마음으로
  때로는 모르는 것을 너라고 불러
  물소리를 이루어 앉아 있어도,
  살아온 것 만큼 헛되이 오래인 것이
  다만 물소리로 물을 흐르게 한다.
  네 앞에서 낯익을수록 추운 너보다도
  어둑어둑한 나무 잎새 저마다 잠들어서
  네 몸안에 둔 마음도 잠이 든다.
  이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깊은 밤이 돌아다보면 더욱 깊어서
  물소리는 저 혼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가는가.

  죽사 * 에서

  강물은 저 스스로 돌면서 흐른다.
  때때로 빠른 강물도 늦어서
  아직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고
  빛이 푸룬 빛을 만들어
  강 기슭의 풀과 나무 사이로 흐른다.
  그러나 강물을 따라가며
  아무리 오래된 소리로 불러도
  죽음이란 더 깊어서
  깨이는 것은
  저문 강물 위의 작은 물소리 일 뿐.
  이 세상은 서로 서로 혼자 남아서
  강물이 남겨 준 것이 된다.
  아아 놀라워라 바람 한 자락,
  새삼스러운 산 너머에도
  이 세상에도 따로 남겨 둔 것이 된다.

  * 죽사: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근처의 산사. 옛 시대에 있었던 암자
죽사에서 연유된다.

  제4 한강교에서

  없어진 것은 고인만이 아니다.
  이 세상도 강을 건너서
  비오는 날만큼 멀고
  항상 울던 밤섬이 없어져서
  이 세상에 흩어졌다.
  저녁 무렵 불이 켜질 때
  흐르는 물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랴.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고 돌아가랴.

  우리가 이름을 부르며 떠도는 것은
  떠도는 곳에만 우리가 있을지라도
  또한 금빛 저녁바다 위에도 있다.
  그렇다. 우연은 어느 날보다 잉잉 거린다.
  우리가 우연으로 모여서
  몸 속의 어둠으로 떠도는
  저녁바다에 이르러
  다음날 모든 금빛을 거둬버리려 함!
  우연이란 몇 만개의 우연인 하나와
  또 하나의 그리운 벗들아
  우리가 우뢰 소리를 먹어도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저녁 바다의 번개를 불러서 운다.
  우리가 떠돌지 않을 때
  누가 구층 십층 밑에서 우리로서 떠돌겠는가.


     투망

  최근 나에게 비극이 없었다.
  어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마다
  동해 전체에 그물을 던졌다.
  처음 몇 번은 소위 허무를 낚아올렸을 뿐,
  내 그물에서 새벽 물방울들이 발전했다.
  캄캄한 휘파람소리,
  내 손이 타고 온 몸이 탔다.
  그러나 새벽마다 그물을 던졌다.
  이윽꼬 동해 전체를 낚아 올려서
  동해안의 긴 줄에 오징어로 널어 두었다.

  한반도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 말라.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화살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년 동안 가진 것
  몇 십년 동안 누린 것
  몇 십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도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조국의 별

  별 하나 우러러보며 젊자
  어둠 속에서
  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가슴이자
  내 가슴으로
  한밤중 몇백 광년의 조국이자
  아무리 멍든 몸으로 쓰러질지라도
  지금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젊음이다
  땅 위의 모든 이들아 젊자
  긴 밤 두 눈 두 눈물로
  내 조국은
  저 별과 나 사이의 가득 찬 기쁨 아니냐
  별 우러러보며 젊자
  결코 욕될 수 없는
  내 조국의 뜨거운 별 하나로
  네 자식 내 자식의 그날을 삼자
  그렇다 이 아름다움의 끝
  항상 끝에서 태어난다 아침이자
  내 아침 햇빛 떨리는 조국
  오늘 여기 부여안을 일체 결합의 젊음이자

 

  김경린. 1918년 함북 경성 출생. 해방직전에 모더니즘 에 참가.
8.15후엔 <신시론> 및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이후
침묵하다가 최근 다시 시와 시론을 쓰기 시작(1981)했다. 엔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현대의 온도> 등에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디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증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오리.

 

  김광규.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과와 서독 뮌헨대에서 수학.
현재는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과 지성>지에 작품을
발표(1975)하기 시작하여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반달곰에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등을 출간했다. 제1회 <녹원문학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제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세계는 평이한 언어로
씌어진 일상시이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독자와의 통교 회복에 좋은
역할을 하였다.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갔고
  몇이서 춤을 추러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균. 1914년 경기 개성 출생. <동아일보>에 시 '야차'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자오선> 및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기림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고 '시는 회화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 회화성과 이미지 공간적 조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으며,
1950년 이후 실업계에 투신하고 있다.

     추일 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ㅎ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설야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서리다.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날개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림. 192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충남이다. <전시문학선집>에 시
'장마'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동인지 <모음>과 시집지
<현대시학>을 발행했으며 제5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상심하는 접목> <심상의 밝은 그림자> <오전의 투망> <학의
추락> <갈등> <한겨울 산책>과 시론집 <오늘의 시학> 등이 있다.

     파리의 개

  애를 낳기보다
  차라리 개와 함께 산다는
  빠리의 여인들
  빠리의 개는
  낯선 사람을 짖지 않는다
  동족끼리 싸울 줄도 모른다
  유순하고 점잖키가
  퇴화한 어느 인종만 같다
  빠리의 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둔갑한 천사의 모습이던가
  불신시대를 사는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간다.
  문명의 한복판에다
  질끔 오줌을 갈긴다
  이권 앞에서
  쿠리게 똥을 싼다
  파괴를 모르는
  불독의 험상궂은 얼굴이
  진짜 형화인지도 모른다
  저주를 잊은
  세퍼트의 사나운 입술이
  정말 자유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말귀를 알아 듣는
  빠리의 개야
  네가 버린 짐승티를
  누가 가져갔는지
  지금 빠리에는 코제트나 말세리노만한 귀엽게 생긴 애들이
  떼지어 다니며 들개처럼 길손을 습격하고 있다
  다가오면
  밀어부치거나
  발길로 걷어차도 무방한
  누가 버린지도 모르는 악의 종자들이 있다


     석쇠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소연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떼는
  쾌청이고
  비린내는
  담천과 같아.

  3
  나란히 선
  계집아이들의 종횡,
  질서의 꽃밭,
  머리를 갸우뚱,

  천상
  무봉의 하늘
  드리운 그물 속엔
  비늘 찬 인어가 한 마리
  헤엄쳐 오르다가
  그만 걸림직도 하다만.

 

  김광협.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사대 졸업. <신세계>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그의
작품 세계는 삶의 세계를 건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되어 있다.

     말씀

  칼 가세요
  칼을 가세요
  대낮에 거리를 가며
  칼을 가세요
  목소리도 시언 시언
  날이 선 목소리
  모든 집이 칼을 가세요
  녹이 슬고 무딘 칼을
  시퍼렇게 가세요
  모든 것이 원한이기보다는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가세요
  한 근 고깃덩일 탐낼 것이 아니요
  양심의 한 쪼가리
  그것이 귀하나 그것을 우러러
  칼을 가세요
  영원히 휘두를 칼을 가세요


  김광회. 1929년 충남 예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섬세한 감성으로 절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시원에의 연가>가 있다.

     피리를 불자

  아직도 남은 한 밤 낮이
  목이 마르다 피리를 불자.

  이삭들은 아직 덜 여물고
  열매도 풋내만 난다.

  우리들의 소망은 별밭의 꽃
  사랑도 저 문 밖에 지나간다.

  그리고 모두 멀리만 있지
  아직 반가운 대답은 없지

  우리는 어디에선가 따로따로
  높은 하늘밑 빈 땅위다.

  오늘도 한줄기 강물이 간다
  강물을 보며 피리를 불자.

 

  김규동. 1923년 함북 경성 출생. 연변의대 수업. <예술조선>에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1948). 시집으로 <나비와 광장>
<현대의 신화> <죽음 속의 영웅> 등이 있으며, 수상집 <지폐와 피아노>,
평론집 <새로운 시론> <문학 강좌>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 <한국의
명시해설> 등 다수의 작품이 있는 그는 사회성이 짙은 리얼리즘 경향으로
역사의식과 민중적 언어로써 새로운 시를 많이 발표했다.

     오는구나 봄이

  다행한 일이다
  봄이 오는 소릴 듣는 것은
  지난 겨울은
  너무 춥고 스산하여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았거니
  이제 강이 풀리고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니
  희망, 기쁨
  그런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라
  희망이 없다면 무엇이 될건가
  여전히 캄캄한 세상 살아가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봄바람 살랑대는 거리에 서면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잔인하게 등골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통일하자
  통일하자
  외쳐댄 소리도
  다시금 산울림 되어 들려온다
  이 혼란 속에도
  구정이라
  더러는 명절 기분을 내는데
  북으로 달리는 기차소리
  영 들리지 않고
  빈소리 외쳐댄 몸이 차라리
  형제와 조상님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하루 하루 연명이나 하는 건
  삶이 아니다
  절대로 삶이 아니구나
  삼천리 강산 소리치고 일어설
  그날 없이는
  영광도 아니구나
  사십년 묵은
  분단의 가시 철망
  그대로 놓아둔 채
  떨리는 봄소식 듣는 건
  산뜻한 봄바람 속에
  소스라쳐 놀라는 건
  무엇 때문이냐
  오 가고 싶고나 고향 가고 싶고나
  북쪽 형제 있는 곳
  가보고 싶어라
  얼싸안고 울어보고 싶어라.


     곡예사

  가벼우나 슬픈 음악.
  관객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곡예사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아슬 아슬한 새 기술을 부리기 위하여
  파리한 얼굴의 여자와
  표정없는 구리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과자를 먹으며
  얼마나 신기한 기대를 보내는 관중들이었던가.

  이런 상업일수록 인기가 있어야 하고
  또 새로운 멋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곡예사는
  오늘도 위험한 공간 속에 살아야 한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에로
  서로 옮겨 탈 순간과 순간.

  담배 연기 자욱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여
  곡예사여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의 포말들을 삼키며
  아 인간은
  왜 이처럼 잔인해야만 하는가.

  원폭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오리의 질서가
  오늘은 무한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김규태. 1938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문학예술>과
<사상계>로 등단하여 시집 <철제 장난감> <현대시 11인선>(공저)이 있다.
현재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중이다.

     갇힌 뻐꾸기

  이따금
  내 책상서랍에선
  뻐꾸기 소리가 난다.

  낡은 목재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새의 혼령이 남아 있었을까.

  경상북도 죽령부근의
  숲 속에서나 들릴
  뻐꾸기 소리.

  헐은 사무용
  책상 위엔
  핏발 잘 서던 날의
  내 벌건 손자국도 묻어 있다.

  내 절망을 소리내어 울던
  눈물 자국도 얼룩져 있다.

  속 쓰린
  내 추억의 반점들을 쪼아먹고
  대신 울어 주는 새

  무성했던 그 원형의 나무들에
  옮겨 다니며 살던
  옛날의 뻐꾸기 한 마리.


     졸고 있는 신

  하느님은
  요즘 계속 졸고 계신다.
  눈을 뜨고
  맑고 깊게 사물을 가늠해 볼 여유가 없다.

  옛날엔
  단지 밤에만 주무셨다.
  주무실 동안에는
  풀벌레까지도 함께 잠들어 꿈꾸었고
  자신도 흥건히 꿈 속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어쩌다 마른 기침소리만 내어도
  아주 잠에 골아 떨어진
  땅 속의 두더지와
  아슬한 가지 끝에서 숙면하던 날짐승까지도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나도 그때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 들어야 했다.

  그때는 생물들이
  한결같이 하느님편이어서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요즘은
  너무 변괴스러운 일이 많아
  한 밤에도 잠자리를 펴지 못하고
  천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노인.

  하느님이 한낮에도 졸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불면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김규화. 1919년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이상한 기도>가 있다. 현재 <시문학> 발행인.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페르귄트의 말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빙산
  깊으디 깊은 살얼음 속
  영원한 청춘으로 갇히어 있으니.
  세월은 그대 베틀에서 날올을 짜며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 놓으며
  돌아온 영웅, 백발의 나에게
  한조각 꿈과 방랑의 지팡이
  회한의 가지 위에 걸어두게 한다.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들판
  한점 소리 없는 바람으로
  잠자다 깨어 있는 푸른 이마.
  영원 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허깨비의 우리들.
  훠어이훠어이 춤이나 추어 보세.

 

  김남석. 1920년 함남 북청 출생. 동인지 <시와 시론> 편집부장을
역임했으며 시집으로 <이 산하를>이 있고 시론집 다수를 발표했다.

     길은 하난데

  길은 하난데

  산산하는 발길들아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일지라도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듯
  너와 나의 심장은 걷고 있노라.

  몹시
  출출하고 허술함이
  낙화일지라도
  낙화일 수 없는
  너와 나의 성전보다 굳은 가슴
  어버이의 종을 울리며
  하늘이 흐리어 어두울지라도
  노을빛보다 귀중한
  저 능선의 아침으로

  아아,
  3월에 꽃핀
  길은 하난데
  옆집 외등 밑을 허우적대지 말고

  빈 주머니에 손을 박고
  흩어져 까는 밤아!
  고달픈 청춘아!

  꽃피는 소녀의 남루한 지도가
  하이힐에 찢기는 고층 골목은
  이렇게 춥고 시장한 시간일지라도
  빙하는 흐른다.

  얼어붙은 가슴 그대로라도
  흐른다.

  <빠고다 함성>처럼이나
  찢긴 심장에 검을 울리며
  북을 울리며 산산치 말고

  소녀의 울음 귀담아 안고
  구름에 가린 햇살 안고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도록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가
  3월의 제비되어지도록

  흐르지 않으려나
  해빙이 오는 피안으로
  아아,
  너와 나

  길은 하난데.

 

  김년균.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1년 박목월,
이동주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장마> <갈매기>
<바다와 아이들> <사람>이 있다. 그의 시는 짙은 서정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에 깔린 슬픔과 비애를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문의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모두 오는데,

  창가에 서면 꿈들이 오듯
  버려진 생각들도 따라서 오듯

  강가에 서면 강물이 오듯
  강물의 줄기따라 세월이 오듯

  삼라만상을 이끄는 평범한 바람
  거리에 오듯

  모두 오는데,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가랑잎 떨어져서 길목에 지듯
  패어진 웅덩이로 빗물 스미듯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어디론지 어디론지 가고만 있는가.

 

  김남조.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시집
<목숨>(1951)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자유문학협회문학상>, <한국
시인협회상>(1975)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 <김남조 시집> <겨울바다> <사랑초서>
<동행> 등이 있으며, 현재는 숙명여대 교수로 있다.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 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읍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 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가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읍니다.


     범부의 노래

  1
  바다는 큰 눈물
  웅얼 웅얼  울며 달을 따라가지
  그 눈물 다 가면
  광막한 벌이라네

  바다는 그저 눈물
  눈물이 더 불어 누워 돌아오지
  그리곤 또 가네
  몇 번이라도 달 때문이네

  2
  이 바람을 어이랴
  실바람 한 오락지 살갗에만 닿아도 사람 내음에 절은 머리털 한 움큼에
열 손가락 찔러 넣듯,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며 내 미치네
  이적진 몷랐던
  이리도 피가 달아진 일
  아아 바람에, 바람에, 이 살을 다 풀어 주어야 내가 살겠네

  3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 줄
  지금 세상의 사나이들,
  신이 한 가지만을 주신다 하면
  나는 역시 한 남자를 갖겠다.

  패전한 국민이 소리를 모아 부르는
  국가의 절망과 그 소망을 품겠지.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벌어지고 피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 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께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정념의 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이제금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것이란다.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기도 드린다.

 

  김달진. 1907년 경남 창원 출생. 호는 월하. 일제시 지방에 묻혀
시작생활을 해오다 해방후 <시인구락부>에 가입. 동양적인 인생관을
노래하는 것이 이 시인의 특징. 시집으로는 <청시>와 수필집 <월하수상>
외에 번역 시집이 있다.

     단장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이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 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까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체념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김대규. 1942년 경기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및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는 <이 어둠 속에서의
지향> <흙의 사상>과 산문집으로는 <시인의 편지>가 있다. 주지적인 작품을
썼던 초기를 거쳐 ^6 236^흙의 사상^356 3^이라는 연작시를 통하여
물질문명에 얽매인 삶의 현실적 고뇌와 문명비판적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시세계를 전환하고 있다.

     사랑 잠언

  누구나
  몸에 걱정 하나
  마음에 병 하나를
  깊이 깊이 묻고 사나니.

  그 몸 아픔,
  그 마음 켕김.

  걱정도 그윽해지면
  영혼의 노래 되고,
  병도 잘 다스리면
  육신의 복음 되나니.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뿐.
  그 밖의 다른 구원을
  얻으려 하지 말라.

 

  김동현. 1944년 충남 서산 출생. 구명은 기종. 공주 사범대학과 영남대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에로 문단에 데뷔(1977)한 그는 진솔한 자기 고백,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한편, 정신의 심층에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는 시적 예지를 보여 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 <새>가 있으며,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바람이

  날마다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노라면
  바람은 매일 와서 무얼 빚고 있을까.

  부드럽게 쓸리는 나무들 위로
  맑디 맑은 무언가가
  열기를 여윈 서늘한 불꽃으로 피어 오르고
  가끔 새가
  불꽃 속을 날카롭게 날아간다.

  이 세상 아닌 어느 하늘에서도
  내가 보는 나무의 흔들림을 받아서
  나무는 저렇게 흔들리고
  거기 사는 이들은 눈이 맑아서
  나 대신 바람이 빚는 것을 보고 있을까.

  몇 굽이 몸살을 앓고 나면
  바람이 무얼 빚는지
  나도 알 수 있을까.

  이제 저녁을 먹었으니
  다만 고향바다를 내 안에 불러들여
  바닷가에 꽃게나 한 마리 놀게 해야지.

 

  김명수.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서독 푸랑크프르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 제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월식>과 <하급반 교과서>가 있다.

     월식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우리나라 꽃들에겐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사림. 1939년 일본 대판 출생. 본명은 광수.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자유문학>을 통해 데뷔(1960)하여 자신을 찾는 진솔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으로 <잎을 모아서> <바람의 비밀> <송짓골 우화> 등
시집이 있다.

     가을

  -송짓골 우화 6

  해마다 여름 내내
  박꽃이 지붕을 타고 놀다가
  이맘 때쯤이면 주렁주렁 열리던
  보름달만한 박들.

  꽹과리 징을 두들대며
  풍년이 왔다고 흥청거리던 동네,
  그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이맘 때면 가슴을 앓는다.

  할머니는 가마타고
  할아버지는 나귀타고
  시집 장가 들던 시절.
  소나무 그늘로 쉬엄쉬엄 갔다는
  소나무가 많아서
  청솔 그늘이 푸르러서 송짓골이라는
  그런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는 많다.

  푸른 물줄기 낙동강이
  송짓골을 지키고
  동구밖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듯
  내 아버지의 내 아버지의 아버지쩍부터
  뿌리내려 사는
  경주 김씨 우리집.

  푸른 잎이 노랗게 되는 은행처럼
  노랗게 찌들은 얼굴을 하고
  도심지에서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
  푸른 소나무와 청솔 푸른 바람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송짓골 같은 고향을 품고 있는 나처럼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풍년가 울리는 이 무렵이면
  함께 가슴을 앓는다.

 

  김상억. 1923년 함남 문천 출생. 동국대학 전문부 문학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데뷔하여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인간 내면의 서정성,
자연의 속삭임 등을 상징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특징. 제6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현재 청주대 조교수로 재직.

     성터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의지의 고독한 여백이었읍니다. 속으로 운 바위의
노여움이며, 그렇게 참은 이끼의 고요한 노래 더불어, 나는 성터에서
숨가쁘지 아니하였읍니다. 진작 그가 깃발을 묻고 황폐함으로 하여 그의
정력이 이념보다 더 아롱져 있는 곳. 허허히 산 이마에 휘불리면서 지평을
가꾸신 그의 시도가 있고자 한 높은 의미이며 일체였음과 같이, 나는 그의
태초의 자리에 나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김상옥. 1920년 경남 충무 출생. 호는 초정. <문장>에 추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초적> <고원의
곡> <의상> <목석의 노래> <삼행시> 등이 있다.

     백자부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김석규. 1941년 경남 함양 출생. 부산대 사대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서민적 삶을 토속적으로
노래하며 현실적 상황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으로 비판을
던지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파수병> <늪에다 던지는 토속>
<닭은 언제 우는가> <남강하류에서> <대문을 열어 놓고>가 있다.
<경남문화상>을 수상, 현재 경남교육위원회 장학사로 재직.

     풀밭

  해 설핏하면 풀밭에 나가 뒹굴었다.
  힘 없고 가난해서 정다운 풀잎의 마을
  청솔가지 타는 연기 냄새
  뿌리쪽에서 숟가락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양잿물 먹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어두워오는 속에 하얀 이빨 드러나는
  아직 한 번도 이름 부르지 않은 풀꽃
  머리 위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털어주며
  이 세상 가장 귀중한 목숨
  착하게 살아라. 오래 오래 살아라.
  여윈 볼이라도 마구 비벼대고 싶은 저녁 때
  자전거 뒤에다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중학생도 보인다.


     사랑에게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루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양식. 1931년 서울 출생. 호는 작이.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국대학원을
졸업. 제1회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정읍후사>
<작이시집> <숫 고양이 한 마리>와 수필집 <세계 시인과의 만남>이 있다.
현재 한국 타고르 문학회 회장.

     눈바람

  내가 펄펄 쏟아지는 흰 눈발에
  서투른 눈바람 나서
  너를 찾아 나섰더니

  먼 발치에 네 집 바라뵈는 고갯길을
  단숨에 뛰어오른 사슴의 숨결만큼
  내 가쁜 발길이 채 넘어서기도 전에

  너는 벌써 날 앞질러 눈바람 나서
  그 싱그런 하늘 바람 왼통 품에 끼고

  천년 푸르른 솔나무 위를
  학이 되어 휠휠 날고 있었다.


     조춘

  눈 내리는 아침
  솔잎의 시샘이
  연두빛 불꽃을
  훌훌 피울 적
  너는 살짝 제비목욕을 하고
  머리 뒤꼭지도 마르기 전에
  맑은 눈빛으로 내게로 온다.

 

  김여정.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본명은 정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청미> 동인이다. 그의 시는 사물의 내면을 궁극에까지
추구하려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시집으로 <화음> <바다에 내린
햇살> 등이 있다.

     돌

  부산 태종대에서
  청옥빛 파도를 타고
  파도가 되던
  둘째놈 세째놈이
  해변에 밀려 와선
  청옥의 돌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돌밭에 솟아난
  사슴의 뿔을 만나고
  나는 십년 수절을 헐어버렸다.

  엄마의 황홀한 정사에
  둘째놈 세째놈이 곁에서
  들러리 서서
  바다 한 자락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덮어주고 있었다.

  파도도
  우리의 만남을 손뼉치며
  흰 이빨 내어 웃어주고 있었다.

 

  김영태. 1938년 서울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세계는 현실과
이상 그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각기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집으로 <유태인이 사는 마을> <초개수첩> <객초> <북호텔> 등이 있다.

     호수근처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한 잔 혹은 두 잔

  시고 텁텁하고 쓴 잔 받으세요
  같이 사는 세월 받으세요
  한 잔 두 잔 석탄 백탄 받으세요
  말탄 고추 가루 가랭이 좆대
  이쁘다 이뻐 너는 이뻐 인마 너는 이쁘다 이쁘지 이뻐 받으세요
  양복쟁이도 한 잔
  한산모시 두루마기에게도 한 잔
  수염단 풍각쟁이 한 잔
  덕대같은 건너편 왈패에게 거푸 한 잔
  총독의 소리 오동추야 우리 구보에게도 한 잔
  이 거리 저 읍내에서 또 한 잔
  웃으세요 웃으세요 오래 웃으며 많이 많이 속으로 우세요
  개울가에서 멱 감다 한 잔 숲에서 한 잔
  연탄광에서 한 잔 뜻 있는 곳에 뜻끼리 두 잔
  이마를 맞대고 코가 비뜰어지게
  겹잔 처마밑에 날나리들이
  깜부기들 바지저고리 머리 위에
  근사한 달이 조명이네요
  조명 안주삼아 이판사판
  뜻 있는 곳에 열 잔


     비빔밥

  입맛이 달아날 때
  혀의 기능은 마비된다
  비빔밥이라는 밥은
  나물과 고추장에 발가락에
  기름을 발라 비벼먹은 밥
  찝찔한 눈물도 이 한숨
  비빌 게 남아 있다면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1970)와 <한국일보> 신춘문예(1974)에 시가,
<월간문학>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인간의 고뇌 속에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도덕적 의지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노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 배제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감옥 3

  우리들의 감옥은 너무나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적막한 모래의 시간
  전화도 없고
  별빛처럼
  감옥의 불빛만 아슬히 멀다
  별 하나 감옥 하나
  별 둘 감옥 둘
  별 셋 감옥 셋
  ...

 

  김요섭. 1927년 함북 나남 출생. 동화작가로 출발하여 6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동양적인 토속성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는 <죽순>과 <현대시> 동인이기도 하다. 시집으로
<체중> <국어의 주인> <빛과의 관계> <얼굴이 없는 얼굴> <달을 몰고
다니는 진흙의 거인> <은빛의 신> 등이 있다.

     음악

  태초의 말씀과 함께
  하늘에는 불과 음악이 있었다
  하늘 기득히 울며 퍼졌던 음악
  사람들을 찾아 마을 위로 거리 위로
  휘날리며 오는 동안
  소리는 스러지고 눈송이가 되었다

  나뭇 가지 위
  음악의 흰 그림자로 앉은 눈송이
  눈송이로만 있기에는 심심했다
  나무 속 심줄을 타고 녹아드는
  뿌리 끝에서 소리가 나고
  흙들이 귀를 기울였다

  어느 태초의 아침 같은
  아침
  대지는 풀포기를 토하면서
  허공에다 새를 날렸다
  음악처럼


     꽃

  손을 대도 데지 않는다
  그 불은
  이슬이 떨어지면 더욱 놀라는
  그 불은
  태고적 이야기에 향기 입힌다
  그 불은
  태양도 꺼트리지 못한
  이슬의
  그 불은
  별빛의 씨 땅위에서 눈을 떴다
  그 불은
  꽃

 

  김용진. 1939년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형상파시학>이 있으며, 시어의 공깐성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네트

  천 년 버리기 싫은
  쪽삧 내 마음이라 하여도
  어찌하면 유월
  모래밭에 묻을까 내 사랑.
  바람 설찬 그리움.
  항아리처럼 갓도는 공허.
  진종일
  이마 앞을 보채다가
  돌아 가는 아지랭이.
  꽃이란 꺾이면 
  해바라기라 하지만 
  봄처럼 
  사슴처럼
  눈짓 아름찬 별이고저.

 

  김용팔. 1914년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1953년에 데뷔한 그는 감성의
조화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시풍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기원

  바람이 울 때마다 가랑잎이 전율하면
  나의 가난한 마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립니다.

  언젠가는 메아리도 없이 기화해 버린
  내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보면서

  머언 뒷날 어느 하늘 가에서
  아내와 만날 것을 믿어보는 건
  이 허전한 마음이 마지막 남는
  어쩔 수 없는 목숨의 소리입니다.

  투명한 달빛인데
  마음마저 얼어 붙은 밤이 옵니다.
  스스로를 달래보는 저 이승은
  목탁소리 코 골리며 조나 봅니다.

  어김없는 윤회 속에 내일은 올 것인데
  아 당신의 소리를 기다립니다.

 

  김원호. 194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흐트러지지 않는 언어의 소박성과 단아함으로
시작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시간의 바다> <불의 이야기>
<행복한 잠>이 있다.

     과수원

  1
  빈센트.반.고호의 ^6 236^과수원^356 3^을 아시는지요.
  도깨비도 무서워 할 고목뿐인 올리브 숲이었지요.
  불타다 남은 자리보다 더 쓸쓸한 곳이었지요.
  어쩌면 내가 이런 숲을 생각하는지
  나 자신 올리브숲의 도깨비가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2
  벌레 먹은 가지를 하나씩 따 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을 잊어버리고
  물 익은 과일이 달린 과수원의 나무가 되고
  나도 가지에 벌레 먹은 과수원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고독뿐인 이 숲이 도깨비보다 덜 무서워지는군요.

  3
  똑,똑, 가지꺾는 소리뿐
  이 과수원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혹시 이런 곳에서 몸에 배인 병이나 씻어 버리며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산골보다 더 조용한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4
  잔잔하고 푸른 먼 이오니아 바다처럼
  쓸쓸한 여름날 같은 하늘도 보입니다.
  조용한 원색 속에서 생활을 하며
  향기 푸른 과일밭에서 일을 하시면
  어느 새 병도 깨끗이 나으실 것입니다.

  5
  푸른 달밤에 과일이 익을 때
  과수원 옆에 초막을 짓고 지내시면
  단물 고인 과일나무가 되시겠읍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싶으실 땐 언제라도 돌아가시지요.
  그래도 우리 이 과수원에서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조카딸에게

  너를 아이로만 생각하던 건
  바로 내 잘못
  어느새 어른의 눈짓을 배워
  섬세한 어깨를 슬쩍 내뵈는구나
  춘정기의 도드라진 가슴
  젖은 눈
  누가 너에게 작은 허리띠를 거넬까
  머리의 장식을 좀 숫되게
  미로의 껄음걸이를 하지 말고
  팔짱 낀 의젓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숨가쁘게 뛰는 심장
  한 마리 파닥이는 새
  공중에 도는 피리소리를 좇아
  너는 날아가려 하는구나
  좀 이상해
  옮기는 정은
  벌써 계절이 바뀌는데
  혓바닥에 느끼는 산초 열매처럼
  언제나 너는 애띤 미련이구나.

 

  김유신. 1944년 경기 안성 출생. 안성농고 졸업.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한 그는 농촌의 순수함과 자연에로 동화되어 나오는
시심의 세계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시인. 현재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시집으로 <바람에 기대어>가 있다.

     천리향

  차가운 땅에 피어
  눈속에 뜨거운 잎을 펴는
  그 속을 나는 안다.

  향의 바다
  출렁이며
  끓어 오르는
  혈기,

  한쪽 가지로만 뉘워 놓는 바람.
  겨울 한나절
  순한 짐승들의 핏발선 눈동자로
  솟아나는
  너의 열망,

  멀리서
  너의 향그러움 듣는다.
  바람에 흐르는
  너의 영혼
  뜨거운 몸짓을 본다.


     바람에 기대어

  서운산을 넘어
  가슴에 젖어오는
  빗방울.

  푸른 잎 속
  화안한 꽃송이 터지는
  흙의 꿈.

  속살까지 저려오는
  빛의 향기

  풋과일 성그는
  바람에 기대어

  한종일 한종일 빗소리 재운다.
  밤 깊도록 빗소리 재운다.

 

  김윤성. 1925년 서울 출생. 호는 조운. 동인지 <백맥>을 운영하면서 시,
소설을 발표했다. <사상계> <시문학> <현대문학>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산길> <예감> <애가> 등이 있다.
<현대문학> 주간을 지냈으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다.

     나무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홤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졸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따.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혼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애가

  담장을 끼고 기어오르던
  덩굴이
  담장 위에 와서
  헛되이 허공만이 휘젓고 있다.

  이 소리 없는 고요의 절규

  썩은 장미가지 끝에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잠자리가
  저 혼자 후르르 날아 오른다.

  영원한 한숨의 포근한 햇살.

 

  김윤희.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
출신으로 전통적 서정성에 바탕을 두기 보다는 존재에의 탐구나 생명의
내면적인 고통을 담고 있는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겨울방직> <소금>
<오직 눈부심>이 있다. 현재 <여류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첫눈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 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김재원. 1939년 서울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이외에 다수의 서사적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다. 현재 <여원>의 발행인이다.

     몸 부딪치는 비둘기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 앞에선 유일의 왕자
  우주의 제1조인 내가
  출근시간 5분전
  회사 근처의 횡단로
  황새처럼 꺼부정한 신체로
  시계 보며 뛰어서 건너가는 것을.
  인생은 뛰어가도
  그렇게 가끔 지각하는 것을.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에겐 두 번째 아빠.
  제 그림자 말고는 둘째인 내가
  내 키보다 5분 낮은
  어느 장관의 비서실,
  빼랑빼랑한 말투 대신 서류를 읍하고
  눈치 보며 힐끔힐끔 숙이는 것을.
  인생은 그렇게 절을 해도
  가끔씩 나보다는 상전인 것을.

  그러나 아내는 알 것이다.
  그대하고, 또 하나 득남의 셋이서
  세 간짜리 전세방
  착실한 오욕으로
  시어머니가 사시는 구에
  문패라도 걸려면 야근을 하고
  인기보다 싼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인생은 받은 명을
  득남의 몸에 묻어 놓고 가는 것을.

  구공탄으로 꽃을 피우고
  눈물로 협박하는
  아내는 아는 것, 모르는 것 합쳐서
  내 인생을 빼고 더해 제자리에다
  묶어놓고 정착시켜 가장이게 하고
  양복 저고리에 단추되고 포케트 되어
  심심한 낮, 대견스런 밤을
  단둘이서 우리는 몸 부딪는 비둘기.


     입만 다물면야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세상은 산뜻합니다.
  갈빗대 들춰낸 내 허파를
  돌덩이로 내리찍는 아픔은
  함구 무언의 휴유증이지만
  어머님.
  이발사가 된다면야
  소리칠 갈대밭이 있는 게 야단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남의 세상은
  산뜻하고 고귀한 꽃밭입니다.
  아, 그래도 입만 다물면
  쑥밭인 내 세상이 안스러운 어머님.

 

  김정웅. 1944년 경기 김포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동시대 시인들이 해결해야 할 생활의 일면들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더욱 더 선명한 목소리로 시세계를 형성해 가는 시인이다. 현재
농장을 경영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배우일지 5

  멀리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고딕체로 누워있는 긴 봇둑, 붉게 타는 나문재
질펀히 깔린 간척지의 갯바닥, 조수가 밀지 않는 갯고랑, 폐선 한 척-
공중에 뻔쩍 들린 고물이 아직도 녹슨 닻줄에 매어 있다.

  연일 힘 없이 부는 바람이
  낡은 밧줄이
  부러진 마스트에 칭칭 감겨 있다.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는 몇 개의 황혼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조심스런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무언극의 저쪽에서 가늘게 떨린다.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돌아온 편지

  산 하나를 헐어낸다.
  한 삽을 들어낼 때마다
  들어내는 힘의 깊이로
  발밑에 소인 찍히는 발자국

  다른 한 삽을 뜨기 위하여
  비켜서면
  그 자리에 남은 어설픈 그림자가
  삽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

  내 발자국 파내기 위하여
  산을 헐어 내린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대지의 본향은 얼마나 되나,
  발자국이 또 남는다.

  진종일 산을 헐어 내린다.
  진종일 발자국이 쌓인다.
  날이 저물면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헐려 있는 산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쌓여 있는 산
  아아, 되돌아 온 편지처럼 부끄러운 산.

 

  김종길.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영국 세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
시집 <성탄제>로 문단에 데뷔하여 주지적 경향의 선명한 이미지에 주력한
시인. 시집으로 <하회에서>와 시론집 <진실과 언어>가 있다.

     고고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밤 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도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미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하회에서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대감 구택 충효당 뒷뜰,
  몇그루 모과 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김종원. 1937년 제주 출생. 서라벌예대 및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문학예술>과 <사상계>를 통하여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강냉이 사설>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환상과 현실의 조화, 주지적 서정과 토속어의
형상화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조선일보 주간부에 근무.

     달팽이

  처음
  그의 궁전에는
  우수에 잠긴 달이
  가난히 떠올라 갔다.

  이윽고
  차다찬 숨그늘을 이루며
  아득한 지층을 향하여
  한 매듭 기어오른 그는

  온 무게를 등에 지고
  오직 금진 제 사랑을
  소리 없이 갈아 가고 있었다.

  이슬째 미끄러진 울타리에
  사과나무
  한
  그
  루.

  오늘 타고난 이 터전으로
  한 마디 우화를 모종해 나온
  그는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탑 안에
  어느 새
  이파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김종해. 1941년 부산 출생. <자유몬학> <경향심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장편 서사시
'판우, 일어서다'로 제2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문학세계사> 주간이다. 시집으로 <인깐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향해일지> 등이 있다.

     향해일지.18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아구란놈이해진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
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칼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
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
버린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낡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불
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바닥에더욱머릴쳐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
몇천마리가눈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
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
  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적개심.
  종삼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분이다.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 <시인>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 어두운 시대를 가로질러 인간과 세계의 한
가운데서 온몸으로 몸부림쳐 온 시인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1975)과 국제시인협회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1981)했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대설 남>과 이야기 모음집 <밥>
이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한 민중시인이다.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란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네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향. 1938년 경남 양산 출생. 서울여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했으며
한양여전에 교수로 재직중. <여류시> 동인으로 쩨1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병실> <사육제> <검은 야회복> <속의 밀알> <빛과
어둠 사이>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 평범한 풍경이여

  겨울 둥지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눈이 생각하는 만큼의
  풍경들이 긴장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풍경은 제 편에서 미리 미안해 한다
  점점 크게 뜨고 따라가는
  나의 눈에
  머뭇 머뭇 안개를 따라 보내며
  풍경이 하나 둘 미안해 하며
  안개 뒤로 몸을 빼돌린따

  우우우 저희끼리 모이는 잎진 나뭇가지가
  가령 저 안개를 벗고 나와
  사과나무는 사과 아닌 앵두 열매를
  매화 나무엔 매화 아닌 진달래꽃을
  피우는 일이라도 해 낸다면
  나는 하루 열 번쯤
  창문에 붚어 서서 신명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정상인
  구부린 허리 얄팍한 안개뿐
  갈곳도 없는지
  자꾸 내 눈에만 들어오는
  안개 뒤에서 미안해 하는 나무들의
  이 평범한 풍꼉이여.

 

  김창영. 1922년 경기 강화 출생. <신시대>에 시 ^6 236^조광^356 3^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후반기> <다이알> 동인으로 엔솔로지
<현대의 온도>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상아환상>이 있으며 시각적 입체적인
추상의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조형하여 현대화하는 시의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는 시인.

     부릅뜬 태풍의 눈

  기억은 애매하다. 그리고
  또 좀 모자랐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든
  여자는 레이즈비언을 자처했단다.

  여자와 나는 팝콘 한 봉지를 사들고
  어느 한계, 그 꼭대기를 향하여
  에스파니아식 나선형 층계를
  자꾸 올랐다.

  그 곳, 하지선이 가까운 한낮의 절정
  그 절정 허리춤으로 깔아 뭉개진
  우리의 표고, 그 하늘의 한껏을
  구름은 로코코풍 과거를 뭉뚱거려
  지구 바깥
  먼 대류권을 흘렀다.

  그래 지금 어디 쯤에서
  부릅뜬 태풍의 눈,
  비바람 전부를 장전한 채
  밝음, 너를 거역하는
  어느 아열대의 해일이더냐?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라와...

  너와 나 2인층의
  저기, 하얀 공백의 모서리
  낮달 반 쪼가리 해골바가지
  부릅뜬 여자의 눈. 눈.
  태풍의 그 눈.

  -우리는 어쩌자는 거죠.

 

  김창완. 1942년 전남목포 출생.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반시> 동인으로 활동중인 그의 시세계는 강직한 남성적
시정신을 시 속에 용해하고, 서민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인동일기>가 있다.

     수유리의 침묵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 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 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돌멩이

  척박한 땅일수록 여럿이 묻혀
  개간의 괭잇날을 완강히 거부하던
  너는 한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네가 어디를 떠돌이로 다니다가
  고향 버린 막벌잇군들만 모여 사는
  이 변두릿길에까지 굴러와서
  취한 사내들의 발부리에 채거나
  리어카아 바퀴에 밀리거나 하면서도
  너는 그들과 같이 살고자 원한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개굴창에 처박힌 채
  추워도 절대로 떨지 않고
  더워도 땀 흘리지 않는다.
  할머니 좌판 위에 내리쬐는 햇살
  순대집 나무 의자에 내려앉는 그늘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하고
  순종조차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 버려
  아무 가진 것 없는 맨손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너를 움켜쥐리라 믿는다.
  너는 날개 없이도 날 수 있고
  거만하게 번쩍이는 유리창을 깨트렸고
  눈부셔 바로 보지 못하던
  넓고 환한 이마도 깨트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네가 묻혀 있던 이 땅의 어느 어덩 하나
  어깨 움츠린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김춘수. 1922년 경남 충무 출생. 사화집 <날개>에 '애가'를
밢표, 이어 <죽순>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릴케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시에서 점차 산문적인 시의
형식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데, 시집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꽃의 소묘> <구름과 장미> <늪> <타령조 기타> 등이 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따.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 앞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따.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한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엏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늪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같은 것, 물장군같은 것,
  거머리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뽄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김해강. 1903년 전북 전주 출생. 본명은 대준. <조선문단>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시건설> 동인이며 <전북문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청색마>(공저)와
<동방서곡>이 있다.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학도 아니면서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을 모르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날만 새면 뭇 참새
  떼지어 지절대도
  조으는 채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비바람
  번개가 날리고 우뢰가 흘러도
  천 년인 양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오욕과 허화의 도가니 속
  어지럽고 시끄러운 실의의 나날에도
  한가한 손님같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나
  시장마다 악화가 판을 치고
  흙탕물 도도히 거리를 휩쓸어도
  오연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해는 빛을 잃고
  꽃밭은 향기를 잃고

  눈이랑 무너지듯
  하늘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으젓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금촉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도
  끝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징그러운 비늘에 온 몸이 휘감겨도
  그저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흙 썩는 냄새만
  코를 찌를 뿐
  바위틈 콸콸 샘 솟고,

  하늘 한 자락 파랗게 깔린
  아름다운 해뜨는 동산
  삼삼한 솔밭도 아닌데

  춤 너울너울
  빛 풍요로운
  눈부신 아침도 아닌데

  언제나 고고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도 못추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김형영. 1944년 전북 부안 출생. <문학춘추>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
<칠십년대> 동인으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단형시의 구조
속에 용해하는 독특한 동물시편들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라를 친다>가 있고, 현재 샘터
기획실장으로 있다.

     여우

  흰 두루마기도
  장죽도 없이
  도사가 된 백여우야
  어둠 속에 길로 서서 네가 기다리는 것,
  이젠 다 둔갑해서 너를 노린다.

  대지의 이름으로 킹킹거리며
  킹킹거리며 너를 노리는
  그들은 가졌다
  이빨과 꼬리를,
  백개의 얼굴을,
  그들은 가졌다
  죽일 수 있는 권리
  더 만족할 만한 법을.


     모기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김혜숙. 1937년 강원 강릉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 '문'
'여담' '광화문 네거리' 등이 있고 현재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딸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광화문이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젯밤
  밤새도록 네 잠자리를 어지럽히던
  이제는
  꿈을 깨어라
  소경의 눈
  그 눈을 또 감고 히히거리는
  원수의 늪을 피하여

  아! 네가 흘리는 눈물은
  순백의 꽃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종로가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김후란. 1934년 서울 출생. 본명은 형덕. 서울대 사대 재학시 전국학생
작품모집에 소설로 입상한 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청미> 동인이며 <월탄문학상>을 수상(1977)했고, 시집으로는
<장도와 장미> <음게> <어떤 파도>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와 수필집
<너로 하여 우는 가슴이 있다> 등이 있다.

     설야

  흰 눈이 지상을
  깨끗이
  덮는 날은

  대지의 침묵이
  흰 눈에
  겁탈당하는 날은

  절반쯤 감은
  신부의 눈으로
  이 허구를 감내하는 날은

  강물도 목이 잠긴
  유연한 수묵화 한폭.


     포도밭에서

  내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면
  입 안에 가득 고이는
  감미로운 후회같은 것.
  흑진주, 네 곤혹의 눈빛을 피해서,
  넝쿨 사이로 빠져나오면
  짙은 방향
  어깨 너머로
  앵도라진 눈을 모으네.

 

  나태주. 1945년 서천 출생. 공주사범대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제3회 <흙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전원적 서정이
생명 감각과 결합되어 자연애와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 <누님의 가을> 등이 있다.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낭승만. 1933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문학예술>과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북녘 바람의 귀순>
<양수리> <한비가>가 있다. 현재 한국불교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있는 그는 뇌졸증으로 쓰러져 반산불구의 몸으로 시작 생활을 하고 있다.

     가을의 기도

  뜨거운 여름날의 강물소리를 보내며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게 하십시오.

  아무 수확이이라곤 없는, 떨리는
  손바닥뿐입니다.

  그 주위로는 노을이 나리게 하여
  가늘은 벌레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지나간
  찬란한 가을비 소리를 잊게 하여 주십시오.

  이 조그만 영토에 그대로 애잔할
  한 가을 풀꽃의 뿌리밑을 흐를
  맑은 물소리로 죽어지고
  짙푸른 하늘 아래 나무가지마다 눈부신 과실의 빛으로 죽어져서
  당신에게 드리는 제단 앞에 목메어 쓰러지겠읍니다.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으로 부서져
  땅 속에 깊이 묻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흐느껴우는 겨울엔 두터운 지층 위를 강설하면
  죽어진 버레의 노래를 되살리며, 가슴 속으로
  마구 뜨거운, 파도치는 목숨의 피를 조양하는 것입니다.

  온화한 빛깔들로 취하게 하여...
  가을엔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으며
  미소짓게 하십시오.

  눈물나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 다시 살아날
  그들이 잠들어 누워있는 무덤 위에, 더 슬픈
  사랑을 주십시오.
  아침에는 눈뜨게 할 종소리를
  뜨거운 드거운 빛을 던지십시오.

 

  노영란. 1924년 경남 함양 출생. 일본제국여자전문학교 졸업. <등불>
동인이며 모더니즘의 수법으로 현대인의 의식풍경을 펼져 보인 작품을
써왔다. 시집으로 <화려한 좌표> <흑보석>과 창작찝 <마지막 향연>이
있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에 재직중이다.

     초야

  정열의 채단으로 커어튼을 내리어라
  헤리오드로오프의 향내 같은 수줍음

  비단 숨결은 보랏빛 연륜을 수놓는다

  엷은 밤빛에 빛나는 너의 얼굴은
  오오 이밤의 주피터어

 

  노향림. 1942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데뷔한 그는 <한국시> 동인으로 참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년' '여름밤' '바람부는 날'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가을 편지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같은 한 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워놓았읍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날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은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라도 적시고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누워
있는지.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줄 우리 고통, 안녕!

 

  마종기. 1939년 일본 동경 출생. 연세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도미,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있다. 1959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그는 의사의 체험, 외국생활의 체험들을 아름답고
산뜻하며 착한 서정으로 수용, 맑은 지성과 세련된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두번째 겨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등이 있고
<한국문학작가상>(1976)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가 9

  1
  전송하면서
  살고 싶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 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내부는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웃음을
  물어 보았네.


     연가 12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월트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나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온돌을 때는
이 극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 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친구야,
총천연색의 메뚜기가 되어 살자.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책 한 권을 뽑았더니, 겉장에는
알 케이 알렉싼드리아의 싸인이 있고 철필로 쓴... 보스든
메서츄세츠스에 1879년 8월 2일.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려진
철필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싼드리아의 손작국을 유심히
본다. 냄새라도 맡아서 코에 기억해 두자.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엽서로는 연상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육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육 깨월의 사랑, 육 개월의 세상, 육 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육 개월을, 육 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마종하. 1943년 강원도 원주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삶의 탄력과 미래의 꿈,
즐거운 예감을 노래한 시인으로 시집 <노래하는 바다>를 갖고 있다.

     비가

  푸른 물에 떠 있는 구름이 울리네.
  나를 흔들어 울리네.
  물의 기류가 켜켜이 쌓이는
  이 길게 뻗친 공간, 냇가에서
  나는 잠긴 채 하늘을 보네.
  저 포플러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바람,
  나의 눈은 어리둥절 떠 있네.
  왜 모든 것이 그리 막막하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며
  흐리멍덩한 웃음 속에
  눈알을 묻고 사는 일이며
  이 정신 나간 시대에
  나는 물 머금은 개천의
  자갈 바닥이나 들여다 보며
  온 몸에 햇빛이나 칠해 보네.
  칠하면 칠할수록 살갗은 벗겨지고
  벗겨지면 없어지는 몸.
  바람은 물 위를 흐른다.
  하늘 한가운데 걸리어 퍼지고
  간간이 빛나는 눈물이나 떨구며
  구름처럼 풀려 가는 몸.
  울음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배꽃이 피면

  배꽃이 피면 내님은 돌아올까
  은의 월쓰 반짝이는 달빛 속에
  그대의 웃는 이빨 차고 시려서
  배꽃이 피면 강물도 푸르러
  불밝힌 열차가 서럽게 떠나는 밤
  저녁 잠결에서 깨어나 앉으면
  창 밖엔 어느새 희게 웃는 바람소리
  빗발은 밝게 꽃잎에 부서지고
  멀리서는 떠난 밤차의 긴긴 울음소리
  배꽃이 피면 끊어질 듯 서러워
  달빛은 흘러내린 산모래를 적시고
  그대의 물빛 크림 상기도 싱그러워
  그대의 밝은 손은 내 가슴에 어른거려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

 

  모윤숙. 1910년 평북 안주 출생. 호는 영운. 개성 호수돈 여학교와
이화여자 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시원>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해방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를 설립했다. 유엔총회 한국대표 외에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역임. 시집으로는 <빛나는 지역> <렌의 애가>
<옥비녀> <풍랑> <정경>과 수필집 <포도원> 및 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숲속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이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내 나라 땅에 한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울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문덕수. 1928년 경남 함안 출생이며 호는 청태이다. <흑상아> 동인으로
시 '성묘' 등을 발표했으며, <현대문학>에 시 '바람속에서' '화석'이 추천되어 문단에 대뷔했다.
<현대문학신인상>, 제1회 <현대시인협회상>을 수상. 시집으로는 <황홀>
<선, 공간> <새벽 바다> <영원한 꽃밭>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본적지>와 이론집 다수가 있다. 현재 <시문학> 주간이며,
현대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홍익대 사범대 학장으로 있다.

     꽃꽈 언어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손수건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문병란.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지에 추천받아 시단에 나옴. 현실을 소재로 하여 풍자와 비판적
정서로서 민족의식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는
현재 학원강사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문병란 시집>(1970) <죽순 밭에서>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 <현장 문학론>(1983)이 있다.

     코카콜라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키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키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폐 염전

  평생을 뻘밭에 바치고
  대대로 소금 구워 먹던 김생원,
  정든 고향의 뻘밭
  폐염전만 길게 남겨 놓고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뜨거운 유월의 햇빛 아래
  미닥질로 익어가던 영롱한 보석,
  산더미 같은 소금산 아래서
  땀방울도 알알이 여물던
  소금풍년 조개풍년 꼬막풍년
  그날의 어부가는 들리지 않는다.

  만선 소식 감감한 남해바다
  시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뻘밭 위에
  햇살만 너훌너훌 춤을 추는데
  어깨 실한 돌쇠도
  궁둥이 실한 갑순이도
  가난만 남은 뻘밭을 버리고
  오늘은 어느 공단으로 떠나갔는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검은 폐수 뿐
  멈춰 버린 수차는 말이 없고
  허옇게 죽어간 폐각 위에
  기운 없는 갈매기만 
  폐촌의 적막을 쪼으고 있다.

  공장 지어 번성한 땅 위에
  소금까지 외국에서 사다 먹으니
  실직한 김생원
  뻘밭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느 공단 품팔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맥주를 마실까?

  여기는,
  여천 공단의 검은 연기가
  간간 불을 뿜는
  삼일만 가까운 어촌,
  조개도 죽어가고
  꼬막도 죽어가고
  정든 갈매기도 죽어가고
  마지막 김생원도 떠나간 마을.
  주인 잃은 수차 위에
  6월의 햇살만 눈부시게 곱고
  근대화를 모르는
  빈 뻘밭만 맨살로 타고 있다.

  5남매 7남매 쑥쑥 뽑아내
  아기 잘 낳아 자랑스럽던 아내
  이제는 하나만 낳는 시대
  그 누가 소금쟁이 어부를 낳을꼬?

  먹는 입만 생각하고
  일하는 손은 계산 안하니
  새끼 낳는 것도 부끄러운 인생
  바다는 옛정을 못잊어
  뻘밭을 적시며 정답게 출렁거린다.

  어매야 아배야
  어디로 갔느냐
  떠나간 사공의 배따라기도 없이
  포구의 새악씨 이별의 손수건도 없이
  멈춰 버린 수차 위에
  병든 갈매기 시름없이 날 때
  용왕님도 떠나 버린
  텅 빈 사당 앞에
  미쳐 버린 똥개만 컹컹 짖고 있다.

 

  문충성. 1938년 제주 출생. 한국 외국어 대학 불어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제주도의 한과 더불어 토속적인 정서
속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제주바다> <섬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 등이 있고 현재 제주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어도

  이어 이어 이어도 사나
  이어도가 어디에 시니 수평선 넘어
  꿈길을 가자 이승길과 저승길 사이
  아침 햇덩이 이마에 떠올리고
  저녁 햇덩이 품안에 품어
  노을길에 돛단배 한 척
  이어 이어 이어도 가자

  한라산을 등에 지고 제주
  바다와 마주 서 보라
  수평선은 하늘하늘
  눈썹 밑으로 잠기어 들고

  새 하늘 동터 올 내일을 열라, 이글대는
  수평선이어, 이글대는 가슴을 열라
  수평선 넘어 꿈길을 열라, 썰물나건 돛단배 한 척
  이어 사나 이어도 사나
  별빛 밝혀 노저어 가자
  별빛 속으로 배저어 가자


     제주바다 1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 와
어둠을 몰아내는
  괴로와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 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땅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 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누이야, 바람 부는 날 바다로 나가서 5월 보리 이랑
  일렁이는 바다를 보라. 텅벙텅벙
  너와 나의 알몸뚱이 유년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라, 겨울 날
  초가 지붕을 넘어 하늬바람 속 까옥까옥
  까마귀 등을 타고 제주의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를 보라.
  파도 소리가 열어 놓은 하늘 밖의 하늘을 보라, 누이야.

 

  민영. 1943년 강원 철원 출생.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
인쇄소 조판공을 하다가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곧 삶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고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단장> <용인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등의 시집이 있다.

     냉이를 캐며

  -귀염이 엄마에게

  오늘은 언 땅의
  냉이를 캐며
  내 손톱이 여린 것을
  서러워하네.

  바람은 등에 업은
  어린 것을 후리고
  몸 묶인 그이로부터는
  소식이 없네.

  바람아 불어라
  쌩쌩 불어라
  들판에 햇살 비쳐
  새 울 때까지.

 

  민재식. 1932년 출생.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을 억제하고 정형 설정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속죄의 양>이 있다.

     밤에 산엘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딛고 설 수 있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이고 설 수 있다.
  어둠은 까만 스폰지
  딛어도 소리 없는, 치켜도 소리없는
  그러나 온몸에 밀착해 오는
  죽은 탄력성

  밤에 산엘 올라가면
  하늘에도 바다에도 별이 뜬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눈에도 가슴에도 별이 어린다.
  별은 빛으로 통하는 스폰지의 구멍
  후벼도, 헤쳐도, 꺼지지 않는
  빛의 부스러기

 

  박경석. 1937년 전남 나주 출생. <현대문학>지에 추천으로 등단. 시집 <황제와
시>가 있다. 판소리 패로디를 통해 응어리진 삶을 노래하면서 신화와 고전의 현대적
수용을 꿈꾸는 작품세계를 다져가고 있다.

     졸본 꾀꼬리

  보리밭 고랑에서 풀냄새 어머니는
  꾀꼬리 사설을 풀이해 주셨다.
  머리 빗고 물 건너 임 만나 볼까.
  비 갠 뒤에 우는 뜻을 새겨 들었다.
  삼대같이 키가 크면서
  버들 그늘 머리 빗는 강의실이었다.
  태자 유리왕의 참된 사랑은
  고구려에 옮겨 심은 중원의 꽃,
  치희의 슬픔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이 노래를 강의할 때마다
  졸본 꾀꼬리가 와서 운다며
  주임교수는 눈매가 엄숙했다.
  사랑의 실습보다
  눈물의 효시부터 먼저 배웠다.
  성빈여숙 기숙사로 그대 떠나고
  내 앞에는 텅 빈 보리밭만 남더니.
  되돌아갈 궁전도, 버드나무도,
  버드나무 선 토담집도 없더니.
  꾀꼬리 사설 들을 적마다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도
  상처 아문 자국에
  따끔따끔 그 아픔 살아나느니.


  박근영. 1931년 출생. 호는 수매.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순수 형상미를 추구하면서, 서민적 생활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가난한 축가> <빛의 층계>가 있다.

     동정의 시

  밤을 새우면서 목숨을 앓다가도
  고운 해 동산에 떠오르면
  나는야 이름 없이도 창 앞에 고운 해

  아침 두레박을 드리우듯
  깊은 속 어둠에 잠겨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만히 길어
  갈한 목 축이고 나면
  안으로 맑아오는 나의 목소리

  옥통소처럼 곱게 울려
  차가운 하늘 열어 주면

  빨간 댕기 드리운 듯
  적연한 햇빛의 가지 끝에
  가을 과일처럼 익어 오는 건
  어느 날엔가
  꽃다이 주어질
  당신의 은혜로운 언약이십니다.

 

  박남수. 1918년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인상업 및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 월남후 <문학예술> <사상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문장>을 통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 선명하고 안정된 이미지와 미적 표현의 작품을
보여주는 한편 이미지와 형상화에서 존재론적으로 다가서는 작품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는 <초롱불> <새의 암장> 등이 있다. 한양대 강사 등을 
지내다 현재 도미중.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6 236^역사^356 3^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두진. 1916년 경기 안성 출생. 호는 혜산. <문장>에 시
'묘지송'^외 4편을 정지용에게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조지훈, 박목월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각 잡지와 신문에
많은 시를 발표했다. 특히 내면 생활의 정관에로 향하는 시적 의지가
강하게 담긴 <수석열전> 외에도 10여권의 시집과 수필집 <시인의 고향>
등이 있다.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과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도봉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묘지송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대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죽음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산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가고 밤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당신의 사랑 앞에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박봉우. 1934년 전남 광주 출생이며 호는 추풍령.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전남도 문화상>(1957), <현대 문학상>(1962)을 수상했다. 초기의
시는 분단의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차차 센티멘탈한 시적
정서로 승화되고 있다. 시집으로 <휴전선>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4월의
화요일> <황지의 풀잎> 등이 있다.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 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눈길속의 카츄샤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박성룡.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호는 남우. <문학예술>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자연의 사물을 철저히 추구하여 이것을 서정성과 서경성이
융합되도록 표현한 시인이다. <60년대 시화집> 동인으로 활동. <현대문학
신인상>(1961)을 수상.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춘하추동>이 있다.

     교외

  1
  무모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우기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과도 같은 붉은 낙일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틈에 비벼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 오름이 없다.

  2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가는
  피비린 종언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3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이라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 ^6 236^풀잎^356 3^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의상. 1943년생.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삶의 뿌리를 조명하면서도 넓은 시야로 세게를
수용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성년> <봄을 위하여> <오늘은
미래> 등이 있고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풍뎅이

  풍뎅이가 벽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다.
  바로 앉지 못하고 누워서 파닥이는 것이
  등이 둥근 때문보다는
  등이 무거운 때문이리라
  열 두 회사의 사장 회장을 하는
  모씨의 종합병원
  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진
  풍뎅이 한 마리가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니련만,
  그것을 상징하는 듯한 것은 웬일인지?

  풍뎅이의 작은 날개보다
  더 작은 나의 날개
  나의 이상.


     아내와 함께

  한 쪽 것이 큰 아내여, 새끼가 윗니 하나로 쪼아댄 그 검은 젖꼭지로라도
나를 짓눌러 주게. 뒷방에 쌓인 드라이 밀크 깡통을 누르는 먼지 같이
흐릿하게 말고, 맨 위의 깡통이 밑의 빈 깡통을 짓누르는 것같이.

  새끼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라고 다짐하였지만, 그때의 내 말은
아직 내 자신에게도 달콤하지만, 아내여 푸른 비눗물에 손목이 부어서,
빨래를 내걸려고 내미는 손목이 햇볕에 너무 따가와서.
  울고 섰는 아내여, 내가 짓는 죄는 그래도 새끼가 없을 때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리. 도둑질도 간음도 죄가 아닐 때, 멸시만은 정말 죄가 된다고
하지. 내가 그대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부터가 아니라, 그대가 아내가
되었다고 믿은 때부터지만.
  신뢰하는 것, 긍정하는 것을 지나서 아내를 알고 나서부터는 무심하였네.
지난 시절이 그리웁기보다 짜증스러워서도 우리는 빨리 자고 더 많이
잤던가.
  잠든 아내여, 두 젖이 보름밤 언덕처럼 떠 있네. 나는 또 불통을
휘두르며 달려갈꺼나. 작은 숲 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따라나오고, 나는
달을 향해서처럼 이 불의 씨들을 우리 새끼 눈에 대어보여 줄꺼나.

 

  박이도. 1938년 평뿍 함천 출생. <자유신문> 신춘문예와(1959)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1962). 시집으로 <회상의
숲> <북향> <폭설>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의 형상

  밤사이
  하나님은 쉬지 않고
  나의 형상을 새로이 지으신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풀섶에 숨은 이슬
  햇살에 꿰어 매듯
  사랑을 엮어 주네
  밤사이 진 감꽃들이
  하얗게 웃음짓는따
  못다한 결백의 생명으로
  내 형상을 짓는다

  아, 밤사이
  내가 무엇을 꿈꾸었나
  어둠에 빠져 허위적이며
  먼 데만을 향해
  손짓을 하였구나

  이 아침의 밝음을 두고
  이슬의 총명과
  감꽃의 결백을 두고
  나의 참 형상을 두고


     바람의 손 끝이 되어

  욕실에 든 여인을 위해
  나는 창문을 연다

  싱그러운 바람-

  검은 빛깔 갈매기처럼
  바다로 날아 가네

  여인의 머리카락에선
  바다 바람이 인다

  젖은 입술 사이
  흰 잇발이 파도 끝처럼 다가온다

  아, 보이지 않는 것
  바람의 손 끝이 그대를 어루만질 때

  이미 나는 바람 속의
  한 마리 갈매기

 

  박이문. 1931년 서울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 졸업. <사상계>(1955)와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작보다 주로 철학적 저술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미국 시몬즈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내 꿈속의 나비는

  내 꿈속의 나비는
  꿈
  나비 속의 꿈에서
  나를 보고
  나는 나비 속의 그림자
  나비의
  꿈속의 나의
  그림자
  껍데기
  나는
  그늘
  속의
  그늘
  껍데기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현실의 껍데기
  속의
  꿈의
  꿈

 

  박재륜. 1910년 충북 충주 출생. 호는 국초.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수학한 뒤 귀국, 모더니즘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궤짝 속의 남자> <메마른 언어> 와 시문집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와
시선집 <흰 수염 갈대풀> 등이 있다.

     편지

  내 마음 적막한 때는
  바다 저편 나라 벗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전신
  오늘 내 쓰는 말도 이같이 애절하다
  벗이여
  어디에 나의 연인은 있느냐
  어디에 나의 행복은 있느냐
  아아
  인생의 거치른 바다 위에
  그 아름다운 섬은 헛되이 사라져 없어지고
  오늘의 나는
  기이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름 모를 항구와의 무역엔 실패하다
  다시 어느 지각을 저어
  거치른 물결 이는 마음을 잠 재우리.
  다만 여기에 남긴 인생은
  사랑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조차 아니어도
  젊음은 헛되이 늙으려 하고
  남은 가재는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 동산의
  또 하나의 꽃의 향기를 뺏으려 한다.
  얼마나 나는 불효자냐.
  어느 지점에 이르르면
  나에게도 말하고 남는 자랑을 얻으리.
  벗이여
  편지는 오늘 내 마음 싣고
  너를 찾아 표박의 길에
  아름답게 꾸며진 한 척의 범선.
  벗이여
  사람에게 말하고 남는
  나의 큰 자랑이여
  멀지않은 시일이 지나면
  너에게서
  감격에 넘친 글발이 올 줄로 믿는
  오늘날 나의 적막한 마음의
  바램을 끊지 마라.

 

  박재릉. 1937년 출생.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한국시>
동인으로 샤마니즘적인 낭만주의가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시집으로 <작은 영지> <꺼지지 않는 잔존> <밤과 연화와 상원사> 등이
있다.

     서울

  저렇게 하늘이 얕아서 쓰겠는가?
  광화문부터 종로를 사뭇 걸어가노라면
  지붕이며, 유리창이며, 간판이며, 모두들
  저렇게 얕게 하늘 가까이 들러붙어...

  연변의 경복궁은 저만큼 먼발치서 차라리
  안 보이는 뒷뜰의 그 응향의 먼지 낀 냄새들을 쭈그리고 앉아
  낡은 섬돌의 이끼 낀 침묵들을 묵묵히 맡고 섰다.

  아, 그 누가 알 것인가?
  머언 그 옛적 머언 그 조선 시절에
  구중에서 안락하게 살다 간 이들이
  지금은 무릎까지 시려 오는 그 제단에서 드디어는 떠나
  저기, 저 눈부신 빛들을 화사히 줏어 입고들 나와 선 것을...
  층층벽으로, 모퉁이로, 길가로
  바람에 채일 듯이 싸늘히 선
  낯선 저 얼굴들 위에, 눈빛 위에, 몸짓 위에.

  그리고 그 예리한 빛들이, 지금은
  지붕 위에서 다락키 만큼 높은 그 끝까지 다가붙어
  위태로이 그 위를 닿으려고 저마다 날카롭게 빛이 선 것을...

  그래도 그래도 꺼질 듯이 흩날려 버릴 듯한
  이 서울이 끄덕도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저 삼각이나 북악 만큼 든든한 마음끼리
  이 바닥을 깊이 움켜잡고 있는
  힘 있는 어느 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렸다.

  돌이... 걸이... 돌이... 걸이 엇갈린 아우성들...

  고층을 오르내리는 그믈을 뜨는 손짓과 손짓들...
  앞뒤 물의 낯들... 엇갈린 선과 선들...
  수연이 그리워, 눈물이 그리워, 슬픔이 그리워, 그늘이 그리워...
  제 콧날 위의 하얀 제 별도 못 떠받아
  서울은 나부껴, 하얗게 가루처럼 나부껴
  ...

 

  박재삼. 1933년 일본 도오꼬오에서 출생하여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문예>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여성적인 톤으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문학 신인상> <문교부
문예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비듣는
가을나무> <천년의 바람> <아득하면 되리라> 등이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어떤 귀로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자연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바람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가난의 골목에서는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건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박정온. 1926년 전남 장흥 출생. 연세대에서 수학했으며 시집으로
<최후의 서정> <이 산하를> <밤은 아침을 위하여> 등이 있다. 그의 시의
특징은 내부의 생명을 외부와 결부시키는 데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차에서

  눈이 날린다
  차가운 것이 유리에 와 닿는다.

  제각기 가야 할 종점-
  마음은 어느 하늘을 달리는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가는
  지친 몸짓도

  어둡게 살아온 흐린 눈망울도
  손을 잡으면 정다운 이웃들!

  십 이월 하늘은 북구라파의 표정을 하고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 오는데

  아무도 말이 없는
  이 차가움 속에
  누구의 기침소리인가
  비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박정희. 1936년 함북 길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및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하여 시집으로 <내실> <주둔지> <문풍지>와
논문집 <김기림의 연구> 등이 있다. 현재 상명여사대에 출강하고 있다.

     술래의 편지

  겨울이 다 간 뒤에
  나에겐 추위가 다가왔오.

  하루에 한 번
  봄에 앓던 학질은

  하루에 두 세 번
  여름 독감으로 이어졌오

  쇳물 녹이는 불가마에
  앉아서도

  나는 춥고
  또 추웠오.

  주사 바늘에 꽂혀
  파닥이는 검은 사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거듭하던 죽음.

  창 밖으로 떼지어 날으는 잠자리
  눈부신 아이들의 술래잡기

  발돋움해도 당치않는
  높은 창 너머도

  달려가 잡히는
  술래가 되고 싶소.

  영영 달아나지 않는
  당신의 술래가 되고 싶소.

 

  박제천. 1945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중퇴. <현대문학>지에 시
추천으로 등단(1966)하여 <시정신> <손과 손가락> 동인. 한국 시인협회
상임위원이며 미 아이오아대 국제 창작 프로그램 객원 시인(1984)으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제24회
<현대문학상> 제14회 <한국 시협상> 제4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장자시> <심법>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영혼의 날개>와
영역시집이 있다.

     장자시

  2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형상의아름다운음정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에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리거니
  바다아래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10
  정액처럼끈끈한손길의말을버리면
  꿈의껍질이벗겨지고하이얀뇌골만햇빛에쪼그라드네
  상상의날랜눈이슬그머니소매에가둔
  천체의여러벌들그것들이이마를맞대어날으던죽음의
  반짝인빛이었네

  24
  신경질의여윈그림자로고사리과식물의줄기끝에
  신경질의줄은풀려엉기고삶을재는그림자마저도르르말리네
  여러개의손가락이엮어세운십자가에지등의흐린불빛이걸려
  내삶의편린을가벼이흔들어주네
  천상의궤도마다장미밭을일퀐네
  내생애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
  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바람속으로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
  흩날리는장미꽃이여


     사기등잔과 함께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를 가리
  닳아 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찌꺼기, 군데 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있는 뼈와 살이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보여라.

 

  박태진. 1921년 평남 평양 출생. 시 ^6 236^신개지^356 3^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변모> <너의 정담> <나날의 의미>와 합동시집
<현대의 온도>, 산문집 <현대시와 그 주변> 등이 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우리 시를 낮은 목소리의 생생한 언어로 누비면서
개성적인 서정과 리듬으로 점철한 특유의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교동

  정말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심각했던 말끝을 흐리어
  약주잔이 뒤받은 뒤를 이어
  비 오듯이 해 저물듯이
  그것은 무교동 언저리

  하루는 달력에 미끄러진 숫자
  사람들이 변했다고 그는
  가래 낀 목청, 술을 엎질렀다
  달력의 숫자는 왜 속지 않느냐고

  인생이 짧다뿐 잘못은
  짧아서 초라하다 뿐
  속는 것도 즐거움인 줄을
  그는 미처 몰랐다고

  이 지붕 밑은 그렇다 치고
  웃음이 감도는 눈자위
  주름이 거북한 눈자위
  그는 나더러 나는 그더러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한국인의 애송시 I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발행인:장석주
  발행처:청하
  주소: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80-1
  초판발행일:1985년 7월 25일
  입력일: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원로, 중견 125인 선 II


  박화목
  호접

  박현령
  지하여장군

  박홍원
  선인장의 역설

  박훈산
  보리고개

  박희선
  모악산 기슭 나그네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골과 향수
  회복기

  변학규
  목숨

  서정주
  동천
  화사
  국화 옆에서
  푸르른 날
  무등을 보며
  문둥이
  꽃밭의 독백
  귀촉도
  봄
  대낮

  석용원
  겨울 명동

  설의웅
  외갓집 있는 마을 풍경

  설창수
  동백칠칠조

  성찬경
  나사, I

  성춘복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굳은 손으로

  송선영
  강강수월래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지리산 뻐꾹새

  송영택
  소녀상

  신경림
  농무
  겨울밤
  목계장터
  갈대

  신기선
  역설의 꽃

  신달자
  뒷산

  신대철
  눈
  사람이 그리운 날, 3

  신동문
  내 노동으로

  신동집
  목숨
  눈

  신동춘
  꽃은 제 내음에

  신세훈
  잠실 개구리

  신중신
  회색 그림자

  안장현
  어느 정신병원에서

  안혜초
  달속의 뼈

  양명문
  명태
  은행나무 산조

  양성우
  기다림의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왕용
  남강

  양치상
  목화바구니

  오규원
  한 잎의 여자
  봄
  겨울 숲을 바라보며

  오세영
  봄
  너 없음으로

  오순택
  그 겨울 이후

  유경환
  나비
  초설

  유안진
  청년 그리스도께

  유영
  수박을 먹으며

  유자효
  가을의 노래

  유재영
  유랑의 섬

  유정
  램프의 시, 1
  램프의 시, 5
  조그마한 무덤 앞에
  진눈깨비

  윤삼하
  겨울의 첨단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반도의 눈물

  이건청
  망초꽃의 하나
  추운 벌레

  이경남
  강 건너 얼굴

  이경순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이광웅
  달

  이근배
  냉이꽃
  부침

  이기반
  산 너머 저 노을이

  이기철
  이향
  너의 시를 읽는 밤엔

  이봉래
  단애

  이생진
  그리운 성산포

  이성교
  해바라기 피는 마을

  이성부
  벼
  전라도, 2
  누룩
  어머니

  이성선
  나무 안의 절

  이성환
  그믐달

  이수복
  봄비

  이수익
  우울한 샹송
  말
  봄에 앓는 병
  가을 서시
  안개꽃
  호롱

  이승훈
  지난날
  당신
  암호

  이영걸
  한가위, 1

  이영순
  크리스마스 이브

  이우석
  휘파람

  이운영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원섭
  향미사
  죽림도

  이유경
  형제의 울음
  배반

  이석
  개나리
  서시

  이인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제하
  단풍
  노을

  이종욱
  꽃샘추위
  돌

  이중
  타락사초

  이창대
  애가

  이추림
  바다처럼

  이탄
  구름

  이태극
  삼월은
  낙조

  이태수
  낮달로 슬리며
  옛꿈을 다시 꾸며

  이하윤
  들국화

  이향아
  음미

  이형기
  낙화
  비오는 날
  노년 환각
  종전차
  나의 시
  호수
  들길

  이활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이희승
  추삼제

  이희철
  낙엽에게

  인태성
  투우

  임강빈
  코스모스

  장서언
  이발사의 봄
  밤

  장순화
  유방의 장

  장윤우
  나부

  장호
  파충류의 사상

  전봉건
  돌, 2
  돌, 31
  물

  정공채
  시는 술이다
  망향

  정대구
  겨울나무의 진실
  박문답, 5

  정렬
  꽃밭

  정양
  수수깡을 씹으며
  날참새를 씹으며

  정완영
  조국

  정의홍
  자유, 2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바보의 살

  정한모
  어머니
  나비의 여행

  정현종
  고통의 축제
  사랑의 꿈
  꿈속의 아모라

  정훈
  파적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조남익
  죄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안개로 가는 길
  하루만의 위안
  결혼식장
  분수

  조상기
  눈오는 날

  조종현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의상대 해돋이

  조태일
  짝지어주기
  수수께끼

  주문돈
  귀뚜라미

  천상병
  주막에서
  새

  천양희
  꿈에 대하여
  신이 내게 묻는다면

  최원규
  달

  최재형
  양지

  최하림
  시
  산

  한광구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한기팔
  가을비

  한무학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함윤수
  수선화

  허만하
  꽃의 구도
  데드마스크

  허소라
  10월의 노래

  허영자
  백자
  감
  봄
  임

  허형만
  1월의 아침

  홍신선
  겨울섬
  산을 오르며

  홍윤숙
  장식론
  풍차

  황금찬
  보리고개
  촛불

  황동규
  10월
  즐거운 편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조그만 사랑의 노래

  황명
  분수

  황명걸
  나의 손
  한국의 아이

  황선하
  아버지의 연가

  황운헌
  난파선


  신예신인 48인 선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사모곡

  강경화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풍경

  강은교
  풀잎
  우리가 물이 되어

  강창민
  비가 내리는 마을
  시인에게

  강현국
  일장일막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사랑법 첫째

  김명인
  베트남, 1
  동두천, 1

  김승희
  흰 여름의 포장마차
  햇님의 사냥꾼

  김옥영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말, 1

  김원길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김은자
  초설

  김정환
  마포 강변동네에서
  유채꽃밭

  김정
  역사

  김종철
  서울의 유서
  재봉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천지현황을 뒤집어 쓴 그대들에게

  김창범
  봄의 소리

  김혜순
  납작 납작
  마라톤
  연기의 알리바이

  노창선
  섬
  등 둘

  마광수
  우리는 포플라
  망나니의 노래

  문정희
  편지

  민용태
  고려장

  박남철
  연날리기
  첫사랑

  박정남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박정만
  잠자는 돌
  아편꽃

  박주관
  벗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살던 광주, 5

  서원동
  달맞이꽃

  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안경원
  통화

  오승강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윤석산
  편지
  원색의 잠

  윤재걸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윤후명
  곰취의 사랑
  명궁

  이동순
  개밥풀
  연탄갈기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
  그날

  이세룡
  빵

  이시영
  너
  만월

  이윤택
  늑대

  이하석
  철모와 수통
  핀, 2

  이해인
  민들레의 영토
  가을 노래
  석류꽃

  장석주
  등에 부침
  숨은 꽃

  장영수
  메이비
  그 여자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슬픔은 누구인가

  조정권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79년 가을

  최승자
  삼십세
  즐거운 일기

  최승호
  대설주의보

  하종오
  풍매화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홍영철
  바다 일부
  작아지는 너에게

  홍희표
  섬에 누워

   원로, 중견125인선. II


  박화목.1923년 출생. 일명 은종. '죽순'과 '등불'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한 그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일종의 허무함을 풍기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민과 산양" "그대 내 마음 창가에" "주의 곁에서"
등이 있고, 수필집 "보리밭 그 추억의 길목에서"가 있다.

     호접

  가을 바람이 부니까
  호접이 날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호접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적막만이 가을 해 엷은 볕 아래 졸고
  그 날이 저물면 벌레 우는 긴긴 밤을
  등피 끄스리는 등잔을 지키고 새우는 것이다.

  달이 유난하게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또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

  담 너머로 박 너머로
  지는 잎이 구울러 오면
  호접같이 단장한 어느 여인이 찾아올 듯 싶은데...

  싸늘한 가을 바람만이 불어와서
  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고
  입김도 서리같이 식어간다.

 

  박현령.1938년 경남 마산 출생. 경희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신방과 수료.
"여원"지의 '여류 신인상' 수상(1958)으로 데뷔했다. '여류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시 세계는, 새로운 서정을 위한 모색과 탈바꿈을
시도, 현대시가 담아야 할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집으로 "상사초" "오소서 이 햇볕 속으로"가 있다.

     지하여장군

  장군님, 여장군님.
  어디쯤 입니까
  그곳은
  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없이
  끝없이 황량해가기만 하는
  교외의 어느 간이역, 거기
  넘쳐 흐르는 쉬르리얼리즘의 배반
  밤차를 기다리며, 오직
  사랑만이 남아있어
  불타야하는
  그런 충절의 밤의 간이역
  꺼져들어가는 가등을
  켜고 또 켜며
  기다릴 쑤도, 아니할 수도 없는
  끝없이 황량해 가기만 하는 
  거긴 어디쯤입니까.
  지하여장군님!

 

  박홍원.1933년 전남 무안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옥돌호랑이" 등이 있고 현재 조선대학교 사대
학장으로 있다. 시경향은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예술파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인장의 역설

  스스로의 뼈를 부수어 만든 마름쇠
  살갗에 박고,
  결식으로 발돋움하는 내핍의 사구
  선인장은 혼신으로 부르짖고 있다.

  발부리는 땅 속을 헤매지만
  연륜을 몰라
  가도가도 심해 빛 심해같은 마음으로
  맹물을 마시며 푸르른 목숨.

  능선인가, 골짜긴가,
  아슬한 정점 어디인가,

  몇 십 구비 그 끝에 피어나는
  태초의 정적 속에 빛살 터지는
  그러한 아침이 오기는 올까?

  온 몸이 눈이요, 이파리요, 꿈
  온 몸이 팔다리인
  두리뭉수리,

  포화 지나간 거리의
  벽돌 조각 사이나
  바람마저 메마른 어느 벌판에 던지워도
  스스로의 샘물에 목 추기며
  잃지 않는 균형으로 너는 있고,

  한 발짝만 들어서면
  너의 마음 언저리
  피안에 잇닿아 출렁이는 강물은

  태양을 부르는 풋풋한 육성인 양...

 

  박훈산.1919년 경북 청도 출생. 본명은 유상.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1946년 문단에 데뷔하여 시작활동을 하다가 공군 종군 문인이
됨. '경북 문화상'을 수상(1958). 시집으로 "날이 갈수록" "박훈산 시집"이
있다. 자학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육성으로 정신의 투영도를 그려 온
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보리고개

  아지랭이는 손에 감돌 듯
  저 언덕을
  타 넘어 왔는데
  볼수록
  나의 얼굴은
  추하여라.

  버들피리 불면서
  새싹을 주워 보려던
  나의 어린 날은
  이미
  떨어진 꿈

  봄은
  보리 고개
  숨가쁜
  계절
  꽃은
  제 멋대로
  피어라.

  가난한 마음 골짝에
  스며든
  앓는 가슴아
  나는 지금
  어머니를 기다린다.

 

  박희선.1923년 충남 강경 출생. '죽순' '별'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하였으며, 1950 - 1963 전남대, 우석대 등에서 시학 강의를 했다. 장시집
"생쥐와 우표"외 불서 "선의 탐구"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모악산 기슭 나그네

  --충만에의 거액, 마침내 침묵을 깨고 가지끝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순수의 배반자여!

  어쩌다가 눈을 뜨고 물소리를 생각하면서 다시 소년이고저 기리던
  생각 순간으로 돌아와서 머웃 나를 잊는 때가 있다.
  눈을 뜨고서, 물소리를 그려보는 것은
  지리산 볍솔염,
  내려오다가 만난 사람, 숫돌에 날을 세우던 그 중년 늙은이
  수리개 빙빙 삿갓을 씌워놓고서 오르는
  하늘 아래의 첫 마을, 날을 고눠
  세워든 새을자로 휘어진
  황새목 낟자루,
  어쩌다가 헐어진 터 묵은 초가집 삼간에 세를 들고
  살면서,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갑을병정 누구라고 이름하여도 좋은 것이지만,
  수리개 빙빙 돌던 하늘, 성 돌을 주워서 뫃아두고
  시인이여, 시인이여, 누구도 없이 불러보던 이름들
  백불목은 고스라니 죄다가 스러지고
  개가죽나무 열매보다도 그늘이 없어서 슬프더라고(말하던)
  젊음, 오늘은 귀신사에서 목욕탕 주머니
  왼 손아귀에 꾸겨서 쥐고 드나드리로 나와서
  뒤돌아보는 모악산, 너는 이제 한 사람의 시인
  그 이름을 알리라. 개구리 모냥 빠그락 빠그락
  늦 피기 비롯하는 자목련,
  그 가지 끝에서 쉬어가던 목소리를 가다듬다가
  떠난 사람들, 저승 소식과 같은
  갈구리, 어쩌다가 눈을 뜨고
  어쩌다가 다시 소년이 되고져
  물소리 생각하는, 오늘은 한 모서리
  그리하여 신문사의 데스크
  경금속성 소리나는 유리판과 함께 생각하느니
  오늘 새벽 바라보던 달 모악산 기슭의 새벽달
  실눈, 벗이여 평상할지라 오늘은 4월
  1984년, 즈문 날
  문턱에서 피어난 태음력
  푸른 산의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고서 생각하는
  초가삼간, 가맛틀과 같이 기리운 초하룻날이다.

 

  박희진.1931년 경기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생에의 외경을
바탕으로 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
'월탄문학상'을 수상(1976)했으며 시집으로는 "실내악" "청동시대"
"미소하는 침묵" "빛과 어둠의 사이" "서울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

     지상의 소나무는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인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골과 향수

  골

  어머니 자궁속에 태아와 같이
  밀폐된 관 속에 그녀는 황골로 불만이 없었다.
  그 볼을 곱게 물들이던 피 한 방울, 머리칼 하나,
  살 한 점 안 남기고. 남 몰래 사랑으로
  빛났을 눈동자, 아 한 번도 사나이 가슴을
  대 본 일이 없었기에 수밀도처럼 익었을
  젖가슴의 심장이나마 남은들 어떠리오. 허나
  조찰히 골만 누웠네요. 땅 속에 자라난
  무슨 기묘한 식물과도 같이. 아름다운 변신일까.
  그녀가 묻힌지 십 오년 만에 발굴된 무덤,
  이 제껴진 관 속에 쏟아지는 햇빛의 조롱이여.
  무덤 파는 일군의 굵직한 손가락이 골에 닿자 마자
  마디 마디 으러지는 그것은 가루, 보니 두골이
  치워진 자리엔 반쯤 담겨진 향수병 하나.


  향수

  고승의 골회에선 영롱한 사리가 나온다지만
  그녀의 고운 마음, 향수로 화함인가... 피도 힘줄도
  내장도 살도 그 몸을 감았던 베옷과 함께
  삭아서 검은 티끌 위에 호올로 숨 쉬는 향수병
  투명한 그 속에 반쯤 담기어, 상기 은밀히 떨고 있는
  향수의 내력을 어느 시인이 풀이할 수 있으리오.
  별에 흘렸던 그녀의 눈물, 잠결에 새어난
  한숨이 모여 향기로운 이슬다이 어리운 것일까.
  이젠 영원히 새어날 수도 없이,유리의 그릇 속에
  죽음을 뚫고 고여진 사랑. 허나 이 그지없이
  고귀한 향수에게 햇빛은 잔인해라, 차라리 흙을
  그 팍팍한 흙을 덮어라요. 다시 십 오 년이 지나간 뒤
  이곳에 길이 나고 집들이 선들, 그녀의 고혼이야
  깊고 어둔 흙 속에 보석으로 오롯이 맺히리니.


     회복기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
  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5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쌍인 독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이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혀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 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 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은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변학규.1914년 경남 진양 출생. 호는 만춘. 진주 농고 졸업. "농은"지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시조를 다수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사계사" "불과 재의 대화" "몸살난 진주" "변학규 시집" 등이 있다.

     목숨

  엄마 눈 눈맞추는
  젖꽃 문 아이같이

  방울 물 움켜 받는
  떨리는 손목같이

  내 목숨 푸름에 젖어
  날개 치는 저 높이.

  흰 눈을 털고 있는
  새움 튼 가지같이

  별빛을 쓰다듬는
  가슴 젖은 강물같이

  내 목숨 머릿물 터져
  출렁거리는 저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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