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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 장면
2015년 02월 14일 18시 10분  조회:10040  추천:0  작성자: 죽림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글머리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서기 2000년을 앞두고 그야말로 변신의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소련이 갈가리 흩어졌는가 하면, 동독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기말은 언제나 격변의 시대였다. 그래서 세기말에 사는 사람들은 급변하는 세상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세기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전혀 다른 질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어제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재기엔 황당함을 느낄 정도이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은 '역사'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래서 '역사'는 사용하는 사람과 경우에 따라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쓰면서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부침 명멸하는 인간들의 생애를 보면서,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케 되었던 것이다. 
분명 역사는 진보한다. 그 동력은 '진실'이다. 거짓이 우세한 듯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항상 승리하는 쪽은 진실이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삶, 보다 행복한 삶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내용은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인간의 역사는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공정한 평등을 향해 달려왔다. 
이 책은 인류의 등장부터 1992년 까지의 역사사건 중, 전기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100가지 사건을 골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각 장면은 따로따로 떨어진 항목이지만, 처음부터 읽어나가면 세계사의 흐름을 절로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학술적 용어나 설명은 일절 피하고 이야기식으로 재미있게 쓰고자 노력했다. 
제한된 지면으로 다루다보니 설명이 불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함이 아니라 그 시대에 그 사건이 지녔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좀더 깊은 내용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참고문헌을 자세히 소개한다. 각 장면마다 동시대의 한국역사를 간략히 표로 정리, 참고가 되게 했다. 어느 정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사 편중을 극복하지 못한 점을 퍽 아쉽게 생각한다. 
이 책은 전문가를 위한 역사책이 아니다.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아보려는, 그러다 보니 세상과 그 역사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되는 평범한 생활인들을 위한 책이다. 암기위주의 재미없는 역사 공부에 정 떨어진 중고등학생들을 위해서도 일조하리라고 믿는다. 
필자의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참조, 필요한 부분을 요약 발췌한 기사가 많다. 일일이 출전을 밝히지 않았음을 미리 고백한다. 
  
1991년은 무척 힘겨운 한해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따뜻이 감싸주신 부모님, 격려해준 벗들, 특히 딸 세운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1992년 3월 12일  박 은 봉
  
  

차례
글머리에
1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 최초의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2 불의 발견 - 자바 인, 네안데르탈 인 등장
3 현생인류 나타나다. -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4 농업혁명 일어나다.- 농경, 목축의 시작
5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 - 세계 4대문명 성립
6 아테네와 스파르타 - 그리스, 폴리스의 성립
7 만인에게 자비와 구원을 - 인도에서 불교 탄생
8 공자의 '인', 노자의 '도' - 중국, 제자백가의 출현
9 오리엔트와 그리스 세계의 투쟁 - 페르시아 전쟁 발발
10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11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 포에니 전쟁 발발
12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 진시황제의 중국통일
13 유라시아를 이은 비단길 - 한나라의 장건, 비단길 개척
14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 -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15 브루투스, 너마저도! - 케사르, 공화파에게 암살
16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다. - 기독교의 성립
17 모든 길은 로마로 - 로마제국의 영토, 최대가 되다. 
18 조조, 적벽에서 무너지다. - 중국 , 삼국시대의 시작
19 게르만 인의 대이동 - 서로마제국의 멸망 
20 수 양제, 대운하를 건설 - 양제의 중원 통치
21 알라 앞에선 만인이 평등 - 마호메트, 이슬람교 창시
22 현무문의 변 - 당의 건국
23 궁녀에서 여황제로 -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 
24 게르만족, 유럽을 석권하다. - 서로마 제국의 부활
25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 - 봉건제도의 완성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 카노사의 굴욕
28 하나님이 원하신다! - 십자군 전쟁
29 중세문화의 꽃, 대학 - 대학의 성립과 발달
30 칭기즈칸, 세계제국을 세우다. - 몽고통일, 중앙아시아 원정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 흑사병 창궐
32 잔 다르크, 오를레앙을 구하다. -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33 로빈 훗과 농민반란 -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 
34 대부호의 후원받은 르네상스 -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작
35 백성을 위한 글, 한글 - 조선, 한글해설서 '훈민정음' 반포
36 활판인쇄술과 비행기 - 구텐베르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37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38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 독일, 종교개혁과 농민전쟁
39 생존자는 단 18명 - 마젤란 일행, 세계일주 성공
40 잉카 제국의 멸망 - 에스파냐의 피사로, 잉카 정복
41 근대과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
42 '그래도 지구는 돈다.' - 갈릴레이, 진자 등시성을 발견
43 영국과 에스파냐의 해상결전 - 영국,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
44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 영국, 인클로저 운동
45 자유의 땅을 찾아서 - 메이플라워호, 북아메리카에 도착
46 처형당한 왕 - 영국, 청교도 혁명 발발
47 '짐이 곧 국가이다. ' - 프랑스, 루이 14세 즉위
48 조선소 노동자로 일한 황제 - 러시아, 표트르 1세 즉위
49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 뉴턴, 만유인력을 발견
50 유혈 없이 성공한 혁명 - 영국, 명예혁명 발발
51 노예무역은 국력의 보고 - 흑인노예무역의 절정기
52 보스턴 차 사건 - 아메리카, 독립을 선언
53 파리 시민, 바스티유 감옥 습격 - 프랑스 혁명 발발
54 도구에서 기계로 - 영국, 산업혁명 시작
55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가 되다. - 프랑스, 제1제정 시작
56 불태워진 아편 2만상자 - 중국, 아편전쟁 발발
57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한 홍수전 - 중국, 태평천국의 난 발발
58 소기름과 돼지기름 - 인도, 세포이 항쟁 발발
59 세계관을 뒤바꾼 이론, 진화론 - 다윈, '종의 기원' 간행
60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 남북전쟁 - 미국, 남북전쟁 발발
61 다이너마이트와 노벨 상 -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
62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위하여 -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출간
63 바다를 이은 최초의 운하 - 수에즈 운하 개통
64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완성
65 어둠을 몰아낸 제2의 빛 -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
66 녹두장군 전봉준 - 조선, 동학농민혁명 발발
67 인류평화를 위한 축제 - 제1회 국제올림픽 개최
68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부인 - 퀴리부부, 라듐 발견
69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 - 러.일 전쟁 발발
70 피로 물든 페테르스부르크 -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 신해혁명 발발
72 지구 최후의 자연보고, 남극 - 아문센, 남극점 도착
73 세계를 불사른 두 발의 총탄 -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7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러시아 혁명 발발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
76 '파쇼', 로마로 진군 -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취임
77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 세계 대공황 발생
78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 -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79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 히틀러, 독일총통 취임
80 대도하의 영웅들 -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
81 노구교 사건 - 중.일전쟁 발발
82 5천만 명이 희생된 사상최대의 비극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3 '엄마 따라 갈 거야' -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84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 국제연합 성립
85 불씨 하나가 중원을 불사르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86 한민족을 둘로 가른 비극의 전쟁 - 6.25전쟁 발발
87 떠오르는 제3세계 - 제1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개최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 제3차 중동전쟁 발발
89 우주시대의 개막 - 아폴로 11호, 달 착륙
90 상처입은 거인 - 베트남 전쟁 종결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 - 중화인민공화국, 유엔가입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민족주의 - 제1차 석유파동 발생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친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 -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
95 '루마니아 영웅'에서 '독재자'로 -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 독일 통일
97 아랍 민족주의의 화신 후세인 - 걸프 전쟁 발발
98 핵과 인류의 미래 - 미국, 단거리 핵 폐기 선언
99 현대의 흑사병, 에이즈 - 제4차 세계 에이즈 날
100 사그라드는 현존 사회주의 - 소연방해체, 독립국가공동체 출범

  
  

1.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최초의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약 200만년 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250만년 전/한반도의 윤곽 형성
  

1859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한권의 책이 발표되었다. 영국 사람 찰스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 그것이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종전의 생각을 뿌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진화론은 곧 학자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에 대한 모독이요,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범죄행위라는 비난이 물끓듯했다. 따라서 진화론은 금기시 되었으며,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는 재판정에 서야 했다. 
최근의 분자생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6백만 년 전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존재, 즉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의 조상은 누구일까? 바로 원숭이다. 그럼 원숭이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는지 보기로 하자. 
제1보는 직립보행이었다. 본디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후조건이 급변하였다. 빙하기가 닥쳤던 것이다. 빙하기를 맞은 지구는 열대지방에서는 약 5도, 온대지방에서는 약 10도 정도 기온이 내려갔다. 이 5도에서 10도 정도의 기온변화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자연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원시림이 사라지고 초원이 생겨났다.
삶의 터전이던 삼림이 없어지자, 원숭이들 중 일부는 원시림을 찾아 더 남쪽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땅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땅은 나무 위와는 아주 다른 곳이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고, 사나운 맹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던 중,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면 과실을 따고 물고기를 잡거나 혹은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터득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데는 앞발이 주로 쓰였다. 
이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점차 앞발은 도구를 사용하는 역할을, 뒷발은 몸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분화발달하게 되었다. 나아가 뒷발만으로 서서 직립하게끔 되었다. 이때부터 상체는 자유로워지고 시야가 넓어졌다. 이로써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하는 결정적인 일보가 내디뎌진 것이다. 
혼자서 대자연에 대응하기엔 너무 약했던 이들은 집단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필요했다. 처음엔 간단한 손짓 몸짓으로 시작하여, 점차 복잡하고 풍부한 음성언어가 발달했다. 
손과 언어의 사용은 두뇌발달을 촉진시켰다. 척추가 무거운 두 개골을 지탱해줄 수 있었던 것도 두뇌발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런 변화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다. 인간은 단번에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꾸준한 변화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1925년, 아프리카 남부에서 한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약 200만 년 전 도구를 사용했던 최초의 인간이 남긴 자취였다. 학자들은 그 화석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뇌용적이 현생인류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고 겉모습도 원숭이와 거의 같지만, 직립보행을 하고 조약돌을 깨뜨려 간단한 연모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다. 이들은 홍적세 초에 나타나 오랫동안 살다가 환경 조건이 급변함에 따라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 불의 발견 - 자바 인, 네안데르탈 인 등장(50만년전 - 10만년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70만년 전/구석기 문화 시작(웅기 굴포리,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제원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유적)
  
인간이 또 한 차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불'을 쓸 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는 인간들의 타락과 비행을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았다. 인간은 먹을 것이 없게 되었으며 그나마 구한 것은 날로 먹어야 했다. 
인간을 동정한 거인 신 
프로메테우스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천상의 불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회향나뭇가지를 들고 하늘로 올라가 몰래 불을 붙여 가지고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비로소 음식을 익혀 먹고 밤에는 따뜻이 잘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야만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를 안 제우스는 몹시 화가 나서 프로메테우스를 인적 없는 광야의 끝 코카서스 산으로 끌고 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억센 쇠사슬로 큰 바위에 붙들어매게 했다. 그리고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쪼아먹게 했다. 쪼아 먹힌 간은 다시 생겨났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인간에게 불을 선물하고 대신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그리스 인들은 아테네 시 교외의 벌판에서 제사를 드렸다. 제사 때에는 불을 기념하여 제단에서 성문까지 횃불경주를 했다. 
불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 지은  획기적 사건이다.
처음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불을 몹시 무서워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번개로 인해 삼림에 불이 붙는 자연현상을 보고 인간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타죽은 짐승 고기가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불붙은 나뭇가지를 동굴로 가져와 불씨로 사용하는 지혜를 보였던 것이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주어서 좋았다. 사나운 맹수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인간은 천연의 불을 이용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인공적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아마 석기가 마주칠 때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끔 되었다.
익힌 음식은 소화가 잘되었으므로 전보다 풍부한 영양섭취를 가능하게 했다. 때문에 근력뿐 아니라 두뇌발달이 촉진되어 두뇌용적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50-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월등히 진화된 인간이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중국 북경 부근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하면, 이들의 두뇌용적은 약 1천cc 정도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2배이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은 피테칸트로푸스에렉투스, 북경에서 발견된 것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고 불리며, 직립해서 살았다 하여 호모에렉투스라고 통칭한다. 
그후, 자바인이나 북경인보다 더 진화된 인간이 유럽 일대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독일의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통칭되는 이 인간은 약 20만 년 전 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두뇌용적은 약 1,200cc 정도이다. 
이들은 불을 쓸 줄 알았던 인간들이었다. 불의 사용, 그것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기관처럼 인류사를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내딛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3. 현생인류 나타나다-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약 4만년 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만년 전/오늘날의 한반도 지형 형성

 

1879년 에스파냐 북부해안의 알타미라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망친 여우를 쫓아 어떤 동굴로 들어간 사냥꾼이 거기서 선사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을 발견했다.

다음날,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영주 돈 마르셀리노가 동굴탐사를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다섯 살 난 딸 마리아도 따라나섰다. 발굴에 열중한 아버지 곁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마리아는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른거리는 촛불 너머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소였다. 
"아빠, 소예요, 소가 있어요!"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주인공은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인 현생인류, 곧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 나타났는데, 네안데르탈 인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진보된 인간이었다. 유럽의 크로마뇽인, 아프리카의 그리말디인, 중국의 주구점 상동인이 대표적인 현생인류이다. 
크로마뇽 인은 프랑스 도르도뉴 부근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몸집이 가늘고 길며, 두뇌용적이나 모습이 오늘날의 유럽 인과 거의 비슷하다. 
이들은 석기뿐 아니라 활과 화살을 만들어 수렵,채집생활을 영위했다. 또 동굴벽에 동물의 모습을 그리거나 여인상을 조각하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도 했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크로마뇽인이 남긴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특히 라스코 동굴벽화는 소, 사슴, 말, 돼지, 맘모스 등을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을 써서 묘사해놓았다. 
그리말디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 근처 그리말디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프리카 흑인의 조상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지방에 널리 퍼져 살았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이동해 가다가 크로마뇽인에게 격퇴 당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 이후 기원전 3천년경까지를 이른바 석기시대라 부른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가 무엇이었는가, 무엇으로 생활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얻었는가에 따라 시대구분을 한 것이다. 
석기시대는 도구 제작방법과 모양에 따라 다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뉜다. 구석기시대는 대체로 1만년 전까지로, 자연 그대로의 돌멩이나 그것을 깨뜨려 만든 타제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일컫는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 보다 정교하게 만든 마제석기를 사용했다.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중국의 상동인은 모두 구석기시대 문화의 주인공들이다. 
    

4. 농업혁명 일어나다-농경, 목축의 시작(기원전 7천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8천년 전/신석기 문화 시작(웅기, 만포진, 무산 동삼동 유적, 원시 무늬없는 토기 사용)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간생활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았다.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달된 물질문명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기원전 7천년, 산업혁명과 맞먹는 중요한 변화가 인류사에 일어났다. 이를 농업혁명이라고 한다. 
당시는 신석기 시대, 즉 돌을 갈아 만든 연모로 사냥을 하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살았던 때이다. 이 무렵, 빙히가기 끝나고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자, 지금까지 사냥감이었던 동물들이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먹을 것이 없어진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농경과 목축이다. 
먹고 버린 식물의 씨에서 싹이 터서 자라 열매맺는 것을 본 인간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씨를 심으면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냈다. 이들은 돌도끼, 돌삽으로  땅을 파고 야생밀, 보리 들을 심었다.
최초의 농경활동이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목축도 시작했다. 울타리를 치고 잡아온 들소며 야생말, 멧돼지, 사슴들을 기르다가 식량이 모자랄 때 잡아먹었다. 어떤 동물은 농사를 짓거나 짐을 운반할 때 쓰기도 했다. 
농업혁명이 가져다준 첫 번째 변화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돌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간사회에 불평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원시사회는 평등사회였다. 그러나 평등은 빈곤의 평등, 즉 먹을 것이 적기 때문에 이루어진 평등이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에는 각자가 구해온 먹을 것을 모아 똑같이 나누어 먹지 않으면 누군가 굶어죽게 되고, 그것은 곧 집단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업혁명 덕택에 식량이 훨씬 풍부해지고 이젠 충분히 먹고도 남아 저축할 수 있게끔 되었다. 문제는 이 먹고 남은 것, 즉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였다. 
불행히도 잉여생산물은 더 이상 집단 공동의 것이 되지 못했다. 한 개인 혹은 한 가족이 그것을 '사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유재산제의 시초이다. 이로써 평등은 깨어졌다. 빈부격차가 생기고 신분 지위의 고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류사에 처음으로 계급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시사회는 남녀 사이도 평등한 사회였다. 당시는 자식의 혈통이 어머니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모계사회였고, 인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으므로, 임신, 출산, 육아라는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거룩한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임신, 출산은 공동체 전체의 경사였고, 여성의 일은 지금처럼 한 집안에 국한된 가사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을 유지하는 사회적 노동이었다. 또한 남성이 해오는 사냥보다는 여성이 맡아 하는 채집활동이 보다 더 안정된 식량확보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농경과 목축이 남성의 일이 되고, 거기서 생겨난 잉여생산물을 주로 남성이 '사유'하게 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유재산의 주인인 된 남성은 그것을 남 아닌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려면 자신의 아들이란 확인이 필요했으므로, 여성에게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금지시키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여성은 정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새로운 도덕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은 집안에서 한 남성만을 위해 일하고 그의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을 최고의 임무로 여기며 사는 열등한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다. 
인류의 역사를 200만 년이라고 하면, 그중 199만 3천 년 동안 인간은 평등한 원시사회에 살고 있었다. 비록 배고픈 평등이었을지언정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회의 불평등은 그리 역사가 오래지 않은 셈이다. 
    

5.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세계 4대 문명의 성립(기원전 3천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4천년 전/신석기 문화 발전(서울 암사동 유적, 빗살무늬 토기 사용)
  
세계 최초로 농경생활이 시작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 어로 '두 강의 사이'라는 뜻인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지금의 이라크 지방을 말한다. 
이 지역에는 원시 작물이 풍부히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농경이 일찍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농경생활은 점차 퍼져나가 인류의 4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고대문명은 기후가 따뜻하고 큰 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일어났다. 큰 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은 비가 오면 홍수를 일으키는 한편,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실어다 주변에 퍼뜨려줌으로써 토질이 비옥해져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가 잘되면 식량이 풍부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겨 자연 다양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인도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하유역의 황하문명을 세계 4대 문명이라 한다. 
이 지역에서는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저수지와 운하를 만드는 치수사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공사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집단과 집단간의 협동과 통일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 통일된 정치조직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세워졌다. 
왕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절대군주인 동시에 신의 아들로서 백성위에 군림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이다. 
국왕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그의 권한은 실로 절대적이었다. 파라오는 죽으면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와 한몸이 되어 나일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신이 된다고 믿어졌다.
피라미드는 이렇게 위대한 파라오를위한 무덤이요, 사후 거처였던 것이다.

미라 역시 육신이 죽은 뒤에도 살아 남을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 이집트 인들의 미라 만드는 기술은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고 특수한 방부제와 향료를 채워넣어 붕대로 싸맨 미라, 그중에는 얼굴까지 그대로 보존된 것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일은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중국의 전설적 통치자로 입에 오르내리는 삼황오제 시대의 요, 순, 우 임금이야말로 치수관개 사업에 성공을 거둔 인물들이다. 우는 황하의 범람을 다스린 공로로 순 임금에게 발탁되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시대의 인간은 청동기를 만들어 쓰고 문자도 갖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원주민인 수메르인은 그림문자를 만들어 썼는데, 이 문자는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표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쐐기 모양의 표식으로 글자를 나타내는 설형문자를 고안해냈다.
이들은 갈대로 만든 펜으로 점토판에 수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모험담을 적어 불에 구워서 보존했다. 나중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개량해서 좀더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알파벳의 시조이다. 
수메르인은 퍽 발달된 문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문자뿐 아니라 농업에 필요한 점성술, 태음력, 60진법 등 산수와 기하학도 발전시켰다. 
이집트 인들이 만들어 쓴 상형문자는 설형문자보다 한결 유여하다. 그 까닭은 이집트에는 파피루스라는 갈대가 풍부하여 거기다 기록을 했는데, 이 파피루스는 질이 좋아 글씨 쓰기가 훨씬 부드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자가 발명되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선사시대, 이후를 역사시대라고 부른다. 
  

6. 아테네와 스파르타-그리스, 폴리스 성립(기원전 8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2333년/단군, 아사달에 도읍하고 고조선 건국
  
기원전 2천년 경, 지중해 동쪽 에게해 일대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태어났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 특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칭 에게문명이라고  불린다. 크레타, 미케네, 티린스, 트로이 등이 이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이 문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독일의 
슐리만이다. 그는 어린 시절 트로이 멸망을 노래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유적발굴을 결심, 어른이 되자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트로이 발굴에 쏟아넣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트로이가 망한 지 수백 년이 흐른 뒤인 기원전 8세기 무렵, 흩어져 살던 여러 촌락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것이 폴리스의 시작이다. 폴리스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로서, 인구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정도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독립국가였다. 
폴리스의 중심부에는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자리잡았다. 언덕 아래에는 아고라, 즉 광장이 있어서 시장이 열리곤 했다. 도시 외곽은 넓은 전원지대이고, 여기서 농사를 지어 폴리스의 생활을 유지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2백 개에 달하는 폴리스들이 있었으며, 식민지까지 합하면 약 1천 개 이상을 헤아렸다.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제우스 신의 제전 때면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체육경기 대회를 열기도 했지만, 폴리스들은 끊임없이 서로 대립, 항쟁했다. 그중 가장 세력이 컸던 폴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치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민회에서 입법, 사법, 행정, 군사에 관한 제반사항을 결정하며, 관직은 시민 중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는 1년, 재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이면 모두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아주 다르다.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 '시민'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민이란, '양친이 모두 아테네 태생인 성년 남자'를 뜻했다. 이런 자격조건을 갖춘 아테네 시민의 수는 전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인구의 43%를 차지하는 노예를 비롯한 여자, 외국인은 시민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민주정치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엄격한 군대식 교육의 대명사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서쪽 라코니아 지방에 세워진 폴리스로서,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끊임없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스파르타 역시 소수의 시민과 다수의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민은 무장할 수 있는 남자 약 1만 명 정도로, 이들은 생산활동을 전혀 하지않고 어려서부터 국가의 관리 아래 훌륭한 무사가 되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식 훈련이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어린이들은 7살이 부모 곁을 떠나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기관에서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딜 수 있고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참을 수 있는 체력단련, 조국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애국심, 불굴의 투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훌륭한 투사를 기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훈련은 30살까지 계속되었고, 그후엔 장교가 되어 조국에 봉사했다. 
여성들도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강철 같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로 튼튼한 아이를 낳아 조국에 바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8명들의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외쳤다 한다. 
'스파르타여, 나는 너를 위해 죽으라고 8명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만의 특권이자 명예였다. 
노예인 헬로트는 모두 18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국유농장에서 농사를 지어 생산물을 시민에게 바쳤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테네가 제한적이지만 민주정치를 한 데 대해 스파르타는 보다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였고, 아테네는 상공업 중심인 데 반해 스파르타는 농업중심이었다. 아테네는 개인소유의 노예제가  발달했지만 스파르타는
국유노예가 대부분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아테네 형과 스파르타 형으로 대별된다. 화려한 그리스 문화를 꽃피운 것은 그중 아테네 형의 폴리스들이었다. 
   

7. 만민에게 자비와 구원을-인도에서 불교 탄생(기원전 6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000년 경/청동기 문화 시작(무늬없는 토기 사용)
  
기원전 6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 세계 각지에서 여러 사상가와 종교의 창시자들이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석가와 마히비라가,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그리고 제자백가라 불리는 여러 사상가들이, 페르시아에선 자라투스트라가, 그리스에선 소크라테스가 각각 태어나 활동했다. 기원전 6세기는 종교와 사상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면서 대중을 각성시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현실의 죄악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혁신주의자들이었다. 
석가야말로 이 시대에 활약한 가장 뛰어난 사상가요  종교가로 손꼽힐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네팔 남쪽 국경 근처의 히말라야 산록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작은 왕국의 황태자였다. 그의 어머니 마야는 '보름달처럼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대지와 같이 의지가 굳으며, 냉철하고 연꽃처럼 마음이 순결한 부인'이었다. 
싯다르타는 부귀와 영화가 약속된 왕궁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어느 날 왕궁 바깥의 사람들이 가난과 병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이 몸담고 있는 궁전의 호화스러움이나 안락함에 안주하고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아이까지 두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를 모른 체 떨구어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어느 날 밤 몰래 왕궁을 빠져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삶의 의미와 구원의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비하르 지방에 있는 어느 보리수 나무 밑에서 진리를 깨우쳤다. 그동안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고, 온갖 불의와 악이 판치는 것을 보았으며 그 때문에 죄 없고 선량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목격했다. 
그는 단식과 고행도 서슴지 않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언지, 인간의 희로애락에 시달리지 않고 생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그는 오랫동안 방황하고 괴로워했다. 
진리를 깨우친 그는 불타가 되었다. 불타란 
'도를 깨친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전도를 시작했다. 
당시 인도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사람들은 네 가지 계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제일 높은 계급은 
브라만, 곧 승려이고, 두 번째는크샤트리아, 왕족이나 귀족, 관리들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평민인 바이샤, 맨 밑바닥은 원주민인 노예로서 수드라라고 했다. 이  신분제도를 카스트제라고 부른다. 카스트란 포르투갈 어로 혈통, 종을 의미한다. 사실 이 제도는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을 몰아내고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 족이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브라만교 역시 이들 아리아족이 만든 종교이다. 
이 무렵, 브르만 승려들은 형식과 공물에만 사로잡혀 더없이 타락해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은 가득 차 올랐다.
석가는 타락한 승려들과 낡은 사상을 공격했다. 
그가 가르친 '자비'란 곧 만민평등의 사상이었다. 신분 계급이나 재물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억눌려 살아온 수드라, 바이샤 계급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실제로 그의 수제자들 가운데는 수드라 출신이 많다. 
그후 불교는 실론,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 동남아 일대로 전파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갖고 있는 세계적 종교의 하나가 되었다. 
   

8. 공자의 '인', 노자의 '도'-중국, 제자백가의 출현(기원전 770-22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5세기경/고조선, 요서 지방까지 진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비롯하여 묵자, 순자, 한비자, 손자 등 여러 탁월한 사상가들이 각기 학파를 이루어 활약했다. 이들을 통틀어 제자백가라 부른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 자는 중니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관직에 투신, 50살까지 관리로 일했다. 
그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13년간 각국을 돌아다녔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노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온지 3년만인 기원전 47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상은 주의 문물제도, 특히 '예'를 복원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를 위한 방도가 곧 '인'의 실현이었다. '인'이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효', 동생의 형에 대한 '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효제를 가족, 사회, 국가로 넓혀나가면 '예'를 회복하고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인'은 인간간의 차별을 인정하는 차별적인 '인', 이른바 '별애'였다. 
노자는 주나라 사람 혹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혹은 공자 이전이라고 하고, 혹은 공자보다 훨씬 뒤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의 사상은 '
노자'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일명 '도덕경'이라고 한다. 
노자의 사상은 '도'로 대표된다. 도란 우주만물의 본체로서, 이 도를 얻는 길은 인이나 예 같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
무위작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무위'란 인위적 또는 인공적이 아닌 자연스런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성군은 바로 이 '무위'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이 장자이다. 그는 기원전 396년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무척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저서 '장자'는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애독서이다. 
공자가 주의 문물제도를 이상으로 삼았던 복고주의자라면, 노자와 장자는 그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혁신주의자들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이후 종교화되어 유교가  되었으며, 노장 사상은 민간신앙과 결합, 도교를 낳았다. 유가와 도가는 중국 사상의 양대 흐름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전자는 지배자의 사상을, 후자는 피지배자의 사상을 각각 대변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자백가가 활약한 춘추전국시대는 평화시대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혼란한 중국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770년 중국 천하를 지배하던 주나라가 계속된 왕실의 내분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면서 지도력을 잃고 이름뿐인 존재가 되자, 각처에서 내노라 하는 제후들이 나타나 천하를 제패하고자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말한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이는 각각 당시의 역사책인 '춘추' '전국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춘추오패니 전국칠웅이니 하는 말은 이 혼란기를 주름잡던 영웅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9. 오리엔트와 그리스 세계의 투쟁-페르시아 전쟁 발발(기원전 492-47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400년경/철기문화 시작
  
기원전 550년, 지금의 이란 고원에서 페르시아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는 세 번째 통치자 
다리우스 1세 때이다. 
다리우스 1세는 사분오열되었던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고 인더스강에서 이집트,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를 눈앞에 둔 페르시아가 해상권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일대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사실상 오리엔트 세계와 그리스 세계 중 어느 쪽이 향후 지중해 일대의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중대한 결전이었다. 
싸움의 빌미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페르시아의 압제에 반발하고 나선 이들 도시를 아테네가 원조하자, 다리우스 1세가 이를 구실삼아 그리스 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부터 해륙양면으로 그리스 본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폭풍으로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2년 뒤, 이번에는 에게 해를 건너 직접 아테네로 쳐들어갔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북동쪽 26마일 지점인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겁에 질린 아테네인들은 항복하자는 쪽과 싸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라진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유명한 정치가이자 웅변가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섰다. 
'우리의 아테네를 자유의 도시로 지키든지, 항복해서 시민들 모두 노예가 되든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노예가 되길 원하는가?'
그의 웅변에 용기백배한 시민들은 총동원하여 중장보병으로 전선에 나섰다. 그렇지만 중과부적 이윽고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적을 골짜기로 유인,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술을 썼다. 결국,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다. 아테네 군의 피해는 전사 192명뿐이었다.

그날, 전투 결과를 걱정하며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기진맥진한 모습의 전령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겼다!'
그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테네 인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고자 26마일을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었다. 이 전령을 기리는 뜻에서 생긴 것이 바로 마라톤 경주이다. 42.195km라는 마라톤 경주 거리는 이 병사가 달려온 거리를 기념한 것이다.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는 이미 사망했고, 그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그리스 군은 육지에서 테르모필레, 해상에서는 살라미스 섬을 결전지로 정하고 적을 맞이했다. 
테르모필레 방어의 총지휘관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였다. 그가 이끄는 7천 병사들은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끝까지 싸우다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스파르타 군의 분투로 시간을 벌어 전열을 가다듬은 아테네 군은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 대패시켰다. 게다가 때마침 불어온 폭풍우로 페르시아 함대는 4분의 3이 가라앉고 말았다.
살라미스 해전은 전국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전쟁은 이듬해 폴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 후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 델로스 동맹을 조직했다. 이 동맹에는 무려 200개에 달하는 폴리스들이 참가했는데, 아테네는 이들이 내는 연금으로 대함대를 만들고 맹주가 되어 절대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동맹의 성격은 점차 변질되어갔다. 연금은 아테네에 바치는 공물처럼 되었고, 각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지배 아래 들면서 아테네 제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렵 아테네를 통치한 사람이 
페리클레스이다. 페리클레스는 동맹시들이 내는 공물을 기반으로 해서 아테네를 번영시켰다. 그리스 고전문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이때의 것이다. 
한편, 아테네의 독주에 반발한 스파르타는 따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조직했다. 사실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왕 이하 전원이 목숨을 바친 스파르타로서는 아테네의 독주가 괘씸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기 시작했다. 폴리스들은 제각기 아테네 혹은 스파르타 편이 되어 전쟁에 휘말렸다.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해군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아테네를 함락시켰다.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격동의 현장을 생생히 그리고 있는 두 개의 유명한 역사책이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쓴 '페르시아 전쟁사'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그것이다. 
    

10.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원전 334-32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300년경/연이 요동에 장성 쌓음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세력을 키워 남하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그리스를 통일하고 페르시아를 정벌할 뜻을 세웠지만, 얼마 후 암살당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아들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였다. 
알렉산더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334년 보병 3만, 기병 5천을 이끌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페르시아로 향한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 지방의 고르디온이란 곳에 이르렀다. 그 지방에는 신전 기두에 매어져 있는 복잡한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란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칼을 빼어 단숨에 매듭을 내리쳤다. 결국 그는 그 칼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소아시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멸한 뒤, 페니키아 연안, 아프리카 북쪽 해안을 평정하여 후방을 다진 다음 페르시아 본토로 쳐들어갔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대패하고 도주하다가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를 불사른 뒤, 멈추지 않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 인더스 강 부근까지 나아갔다. 그는 갠지스 강까지 계속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오랜 전쟁에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마침내 알렉산더는 원정을 중단, 기원정 324년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더가 10년 동안 정복한 곳은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은 인더스 강, 남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죽음은 몹시도 급작스러웠다.
바빌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병을 앓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알렉산더의 꿈은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2만km에 달하는 원정길에 여러 학자들을 동행시켰다. 그리고 정복지마다 새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사드리아라 이름붙인 다음 그리스의 학자, 예술가, 상인 들을 이주케 했다. 
또 그리스 인과 페르시아 인 사이의 결혼을 적극 장려, 대규모의 합동 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 자신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제2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페르시아 청년들을 그리스식으로 교육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12살 때부터 3년 동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외국인은 노예가 되기 위해 생긴 것이다.
'그리스 인은 부모형제처럼 대하고, 외국인은 짐승처럼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한다.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우리가 아주 위대하다고 알고 있는 당시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노예와  외국인, 여자는 인간, 즉 시민의 대열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철학이란 것이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전유물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는 '모든 사람은 세게를 자기 모국처럼 생각하라. 선한 사람은 부모와 같이 대하고 악한 사람은 짐승처럼 취급하라'고 말했다 한다. 
알렉산더의 동서융합 정책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세계동포주의와 개인주의이다.
얼핏 상반된 두 성격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실인즉 폴리스 문화의 극복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립된 폴리스를 뛰어넘어 좀더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고, 폴리스라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로부터 개인 중심의 사고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헬레니즘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한편으론 로마를 통해 서유럽으로 전해져서 유럽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흐름이다. 
한편으로는 인도에 영향을 미쳐 간다라 양식이란 예술 조류를 형성했다.
이 간다라 예술은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이룬 대제국은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의 아내와 자식은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수십 년간 후계자 전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대제국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 나라로 갈라지고 말았다. 
    

11.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포에니 전쟁 발발(기원전 26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209년/연, 제로부터 수 만호 이주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고 있는 티베르 강 언덕에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세워졌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를 세운 것은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 형제로 이들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한다. 어쨌든 로마는 날로 발전하여 전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까지 세력을 뻗 치게 되었다. 
로마를 부흥케 한 것은 상업이었다. 이때 지중해 해상권을 쥐고 있던 나라는 
카르타고였다. 자연 로마와 카르타고는 해상권을 둘러싸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세워진 도시로, 페니키아 인이 지중해 연안에 세운 여러 식민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로마 인들은 페니키아인을 포에니 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카르타고 역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도시였다. 
포에니 전쟁은 근 120년간 세 차례에 걸쳐 발발했다.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무렵 로마는 아직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경제력이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강하게 결속된 시민군 덕택에 용병과 피 정복민으로 편성된 카르타고 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과 시칠리아 섬을 수중에 넣었다. 
제2차 전쟁은 기원전 218년에 일어났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군선 3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에스파냐를 걸쳐 피레네 산맥과 험준하기로 이름난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피레네 산맥 기슭에 도달하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 험준한 산을 보고 기가 질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도망쳐버리고 남은 것은 보병 5만, 기병 9천뿐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산맥을 넘은 한니발 군은 론강을 단숨에 넘어 알프스로 향했다. 하얗게 눈 덮
인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과감하고 또 용의주도했다. 
추위에 떨면서, 코끼리와 기병을 위한 길을 만들어 가며 20여 일을 강행군한 한니발 군은 마침내 롬바르디아 평야에 내려섰다. 그의 군대는 출발 당시의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니발도 눈병 때문에 한쪽 눈이 멀고 말았다. 
그렇지만 로마와의 첫 싸움에서 한니발은 특유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용기백배했다. 알프스를 천연의 요새로 여기고 방심했던 로마는 한니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갔다. 로마군은 연전연패 당했다. 
이듬해 벌어진 칸네 전투에서 한니발 군은 또 한 번 대승을 거두었다.
한니발은 이때 전군을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서게 하고 양쪽 끝에 최 정예부대를 배치, 이들로 하여금 적을 포위공격케 하는 전법을 썼다. 이 싸움에서 7만의 로마 군은 전멸하다시피했다.
하지만 한니발 쪽의 피해는 보병 5천, 기병 2백에 불과했다. 
위기에 처한 로마는 장군 스키피오로 하여금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본국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들은 한니발은 군사를 되돌려 급히 귀국, 자마에서 스키피오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니발의 작전이 먹혀들지 않았다. 게다가 숫적으로도 열세였다.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에스파냐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를 떼어주고 군함도 20척만 남기고 빼앗겼으며, 50년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한니발은 로마 군에 쫓기다가 기원전 183년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켜 지중해 무역을 손안에 넣는 것이 로마의 목적이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가 다시 공격하자, 카르타고 시민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다. 이들의 농성전은 무려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총공세 앞에서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로마 군은 시가지에 불을 질렀다. 이 불은 카르타고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17일간이나 타올랐다. 
살아남아 항복한 카르타고 인은 5만, 이는 전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숫자였다. 로마는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카르타고를 속주로 편입시켰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12.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진시황제의 중국통일(기원전 22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95년/요동의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 기원전 193년/위만,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됨
  
중국 섬서성 임동 지방에는 진시황제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묘가 있다. 높이 47m, 둘레가 무려 1,410m에 달하는 대규모의 능으로 주위에는 이중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 
1974년, 묘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서 또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동서 210m, 남북 60m에 달하는 이 무덤 속에는 등신대의 병사와 병마상이 가득차 있었다. 약 7천 개 정도 되는 이 상들은 아마도 시황제의 묘를 지키기 위해 매장된 것으로 보여진다. 

진시황제-그는 500여 년 동안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다. 이름은 정,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비화가 전해진다.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를 대상인 여불위가 도와주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초가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까지 자초에게 주었다. 그녀는 뱃속에 여불위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태어난 아이가 자초가 죽은 뒤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시황제이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그는 종래의 왕이란 호칭을 고쳐 황제라 하고 스스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시황제가 꿈꾼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그는 주나라 이래로 시행되어 온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이른바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화폐와 문자, 나아가 도량형과 수레바퀴 폭까지 통일시켰다. 
그의 여러 치적 가운데 후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만리장성축조와 분서갱유가 있다. 
시황제는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법가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상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법가는 군주가 정하는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사상으로, 신상필벌 원칙에 의해 엄격히 법을 적용, 신분의 고하나 귀천을 구별치 않는다는 상당히 혁신적 면모를 지닌 정치철학이었다. 

법가 사상의 창시자는 상앙이며, 한비자, 이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저술들을 불살라 버리고 많은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제자백가의 저술을 숨긴 자는 노역형, 그에 대해 논하는 자는 참수형, 옛일을 돌이켜 지금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했다.
'음풍농월하는 쓸모 없는 사상은 단호히 배격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 독재정권의 사상 및 언론탄압의 예로 인용되고 있다. 
한편 진시황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켰다. 그중 유명한 것이 만리장성이다. 만주에서 시작하여 서쪽 감숙 지방까지 장장 2천 4백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은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본래 전국시대 때 연, 조, 진나라가 흉노를 막기 위해 각각 쌓았던 것을 시황제가 통일 후 연결, 보수해서 완성한 것이다. 
진의 세력은 날로 뻗어 멀리 서양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오늘날 중국을 차이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시황제의 혁신정책은 백성들에겐 몹시 가혹한 것이었다. 그가 죽자 각처에서 농민반란이 폭발했다. 불만을 품고 있던 구귀족들과 신흥세력이 이에 가세했다.
결국 진은 기원전 206년, 초나라 귀족의 후예 
항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통일국가를 세운지 불과 15년 만이었다. 
그후 5년간 구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항우와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유방이 중국천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승리는 유방에게 돌아가, 기원전 202년 유방은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했다. 이가 곧 한 고조이다. 
   

13. 유라시아를 이은 비단길-한나라 장건, 비단길 개척(기원전 139-12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10년 경/고조선, 한강 이남의 진과 한의 교역 방해
  
기원전 4세기 말 이래 중국은 흉노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몽고 고원에 살고 있던 흉노는 진시황의 토벌로 잠시 주춤했다가 진이 멸망한 틈을 타서 다시 세력을  얻어 인근지역을 정복하고 중국을 위협했다. 
한 고조 유방은 항우를 물리친 후 대대적인 흉노토벌에 나섰으나 도리어 대패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러자 수많은 금은보화와 공주를 보내 회유책을 썼다. 
기원전 2세기, 흉노는 감숙성 일대와 중앙 아시아를 손에 넣고 서방과 비단을 교역,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기원전 159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역대의 굴욕을 씻기 위해 흉노를 칠 것을 계획했다. 그는 흉노에게 쫓겨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 월지국과 손을 잡고자 했지만,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장건이다. 기원전 139년 그는 백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월지국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중국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그는 흉노인으로 정착, 흉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장건은 탈출하여 드디어 목적지인 월지국에 도착했다. 월지국은 아무르 강 북안, 지금의 소련 우즈베크 공화국 부근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나라와 손을 잡고  흉노를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고있지 않았다. 한나라가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오던 장건은 또 흉노의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감시병이 술에 취
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도망친 장건은 기원전 126년, 떠난 지 실로 13년 만에 돌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장건이 10여 년간 보고 들은 서역지방에 대한 이야기는 무제를 한껏 들뜨게 했다. 
'월지를 찾아 헤매던 중, 대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 포도주 맛도 기가 막히지만 말 또한 뛰어납니다. 피땀을 흘린다는 이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립니다. 말이 좋은 까닭에 병사들도 말 탄 채로 활을 쏘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
이것이 천마로 유명한 한혈마이다. 
기원전 123년 무제는 이 말을 얻을 욕심으로 장건을 다시 파견, 흉노를 쳐서 대완에 이르는길을 뚫게 했다. 대완은 현재의 소련 키르기즈 공화국 페르가나 분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이다. 
또한 장건으로 하여금 일리 강 유역의 오손과 동맹을 맺게 하였다.
장건은 기원전 112년 좋은 말 수십 필을 이끌고 돌아오는 한편 부하들을 파키스탄 북부, 이란, 인도 등지로 보내 사정을 살피게 했다. 
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고 이광리를 보내 대완을 정복했다. 결국 흉노는 동서로 갈라진 끝에 동흉노는 한에 항복하고, 서흉노는 외몽고로 물러갔다. 
장건의 여행경로는 천산산맥 북쪽 기슭의 천산북로를 거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아 아시아로 드어갔다가, 천산남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천산산맥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한여름에도 흰눈에 덮여 있다. 
장건은 이 길을 무려 네 번이나 여행했다. 그가 개척한 길은 중요한 동서교역로가 되었다. 비
단, 거울, 칠기, 약재, 향신료, 복숭아, 살구, 닭, 제지법 등이 서역으로 전달되고, 거기서 다시 유럽과 지중해 세계로 전해졌다. 한편 석류, 오이, 호박, 호두, 수박, 마늘, 참깨,  견직물과 모직물 등 서역의 문물이 중국으로 건너왔으며 불고,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와 역법, 점성술도 이 길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서역에서 들어온 문물에 '호'자를 붙여 불렀다. 호떡, 호적, 호복, 호반볶음밥, 호무는 다 이렇게 생긴 이름이다.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서역문물은 그대로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졌다. 격구, 축구, 그네, 윷놀이가 건너왔고, 줄타기, 땅재주, 탈춤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봉산탈춤의 주인공들이 서역 사람을 닮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가 비단길의 서쪽 종착역이었다면, 우리 나라는 그 동방 종착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스파르타쿠스의 봉기(기원전 73-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08년/한 무제에게 고조선 멸망, 한4군 설치
  기원전 69년/박혁거세 탄생, 기원전 59년/북부여 건국
  
  기원전 73년, 강대한 로마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노예들의 대규모 무장봉기가 그것이다. 봉기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의 검투사였다. 검투란, 노예 가운데 체격이 좋고 건강한 자들을 골라 무예훈련을 시킨 다음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여 그를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검투사는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일회적인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원형극장에서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보면서, 로마 시민은 흥겨워하며 박수를 치곤 했다. 이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검투는 닭싸움 정도의 오락이나 스포츠로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트라키아 사람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왔다. 그는 처음엔 광산에서 일하다가, 카푸아의 바티아에 있는 격투경기 훈련소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곳의 잔혹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기원전 73년,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훈련소를 탈출, 베스비오스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곳을 기지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주인의 가혹한 채찍도, 비인간적 대우도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새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미래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나갔다. 때마침 기근이 들어 노예와 파산한 농민들이 속속 대열에 가담해 왔다. 이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봉기군은 단순한 도망 노예들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 소유주들이 판치는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세워보려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72년 봉기군은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지중해 최강을 자랑하는 로마의 2개 군단을 격파,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전열을 정비하여 각자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로마로 진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71년, 같이 싸우기로 했던 그리스 인들의 배반으로 봉기군은 로마 군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아드리아 해안 부룬티움으로 퇴각했으나, 크라수스가 이끄는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아폴리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노예군의 주력부대가 전멸당했으며, 패주한 5천여명도 귀국하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포로로 잡힌 자만 해도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하여 6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그 십자가 행렬은 무려 수십 리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는 원로원에 의해 움직여지는 공화제였지만, 실제 생산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수십만의 노예였다.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대농장에서 노예들은 감독관의 채찍 아래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고 밤이면 도망칠세라 창고에 갇혀 지냈다. 
  농장, 광산뿐 아니라 가내노예도 수없이 많았다. 수위, 요리사, 이발사, 심지어는 의사까지도 노예의 역할이었다. 여자 노예들은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쉴새없이 일을 하고 밤에는 주인의 성적 희롱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로마 인들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수레나 삽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구, 소나 말처럼 소리를 내는 도구, 그리고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 노예가 수레나 가축과 다른 점은 '말할 줄 안다'는 것뿐이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주로 전쟁이었다. 
케사르는 갈리아 정복 때 무려 100만의 노예를 얻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노예시장이 있던 델로스 섬에서는  하루에 1만 명 정도의 노예가  매매되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탈리아에는 총인구 450만 중에 150만이 노예였다고 한다. 
  로마의 노예봉기는 스파르타쿠스가 처음이 아니다. 기원전 138년과 기원전 104년 두 차례에 걸쳐 시칠리아 섬에서 노예봉기가 일어났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로마 본토에서 일어나 3년동안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서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로마 군과 팽팽히 맞서 싸운 일대 무장투쟁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투쟁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름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며 역사에 기록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15. 브루투스, 너마저도!-케사르, 공화파에게 암살(기원전 4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58년/동부여에서 주몽 탄생, 
  기원전 37년/주몽 고구려 건국, 기원전 18년/온조 백제 건국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걸출한 영웅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알렉산더가 그렇고 칭기즈칸이 그렇다. 그 영웅 중에 영웅으로 
율리우스 케사르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 그의 정복사업과 명성에 곁들여 극적인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 지배층은 족벌당과 빈민당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전자는 귀족 중심의 지배를, 후자는 군사독재를 목표로 했다. 
족벌당 영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원로원은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빈민당 영수 
케사르, 부호 출신인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원로원에 맞섰다. 
제1회 삼두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60년의 일이다. 
케사르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훌륭한 웅변술과 정치력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고 있었다. 그는 갈리아 총독이 되겠다고 자청, 4개 군단을 이끌고 정복의 길을 떠났다. 갈리아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일대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원주민인 갈리아 인은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케사르는 이 지방을 평정하기만 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훨씬 탄탄해지리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싸움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산망을 얻은 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 땅까지 공격, 승리를 거두었고,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 즉 지금의 영국에 까지 쳐들어갔다.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요 야만인들이  사는 미개지인 이곳에서 거둔 케사르의 전과는 그 명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그러던 중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던 크라수스가 그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케사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데 불안을 느끼고 원로원과 다시 결탁, 케사르를 타도하고자 했다. 
  음모를 알아차린 케사르는 분노하여 로마로 진격할 결심을 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단숨에 루비콘 강에 이르렀다. 이 강은 이탈리아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이 강을 건너는 것은 곧 반역행위에 해당되었다. 케사르는 망설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말을 몰아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로마에 입성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케사르의 쿠데타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쉽게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케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까지 진격해갔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자객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케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여왕으로 봉했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젊은 여왕과 영웅 사이에 사랑이 무르익었고, 케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로마로 돌아온 케사르는 권력을 한손에 쥐었다. 원로원은 그를 종신 총통으로 임명했다. 로마는 이제 이름만 공화정일 뿐, 사실상 케사르 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케사르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그 역시 나약한 공화정보다는 강력한 제정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건국  이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 나가던 케사르는 광장 입구에서 40여명의 공화파에 둘러싸였다. 그들은 일제히 단검을 휘둘렀다. 케사르는 칼에 맞아 비틀거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일격을 가했다. 바로 그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비통한 외침을 남기고 케사르는 쓰러졌다. 
  케사르의 죽음은 공화파와 제정파간의 권력투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도 공화정은 지킬 수 없었다. 이미 로마의 공화정은 건국 초의 건강함을 다 잃고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케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친구 안토니우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주었다. 불행한 연인들이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그 막을 내리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16.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다-기독교의 성립(33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42년/김수로 6가야 왕으로 추대, 53년/고구려 태조왕 즉위
  
  기원전 4년경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 땅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예수,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란 곳에 살았고, 아버지처럼 목수일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0살이 되어서였다. 
  유대인에겐 옛날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야훼가 보낸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란 예언이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예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종류의 당파로 갈라져 있었다. 왕헤롯을 지지하는 파와 사두개 인은 친로마 파였다. 사두개 인이란 대제사장을 비롯, 상류층을 차지하는 종교귀족들이다. 이들은 로마에 빌붙어 일신의 영화를 보위하기에 급급했다. 
  바리새 인은 중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반 로마적이었으나 무력사용은 반대했다. 
  한편 무장봉기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심당이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했다. 반면, 에세네 파는 속세를 떠나 황야로 가서 금욕적 생활을 했다. 세례 요한은 이 에세네파 출신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 어느 당파와도 달랐다. 예수가 한 첫 번째 설교는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제나 율법학자들처럼 민중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아무와도 가림 없이 어울려 먹고 마셨다. 그런가 하면, 부와 권력을 믿고 위세 부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예수는 사두개 인이나 바리새 인들에게 위험인물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롯 유다를 꾀어 예수를 체포한 다음, 민중을 선동하여 왕이 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정작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이렇다 할 죄목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들의 강력한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을 달고서 말이다.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었다. 
  그가 외친 하나님 나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누르는 자도 눌린 자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열심당의 무장봉기나 에세네 파의 금욕생활을 뛰어넘어 인간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 후, 그 제자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울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사실,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문화는 기독교를 모르고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천만 명 정도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가 2천 년 전 예수가 행했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17.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제국의 영토 최대가 되다(100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6년/고구려 요동군 서안평과 낙랑 공격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평온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음욕으로 이름 높았던 칼리굴라,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모두 암살당했고, 네로는 자기 어머니를 죽였으며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후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 출신인
네르바를 즉위케 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세습제를 바꾸어 게르마니아 총독 트리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가장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케 하는 관례가 이어져 연달아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등장, 로마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경계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남부와 나바타에아를 아라비아 속주로 만들었으며, 도나우 강 건너 다키아 지방을  정복, 주민을 이주케 했다. 이곳은 로마의 이름을 따서 현재도 루마니아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치세의 절반을 속주 시찰여행으로 보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이룬 판도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 브리타니아 지방에 장성을 쌓는 한편 파르티아와 화친을 맺었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공정한 재판을 행해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 즉 '경건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두 명의 양자를 지명하여 로마 제정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황제가 공동 통치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재위 8년 만에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집권했는데, 그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로마제국의 판도를 유지하는 한편 '명상록'을 집필한 스토아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친자식인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고 타락한 정치를 펴다가 근위사령관과 애첩의 공모로 욕실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5현제 시대는 끝나고 로마는 군대가 마음대로 황제를 갈아치우는 군인황제 시대를 맞았다. 그후 50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난립, 로마 제국은 위로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5현제 시대에 로마 제국의 판도는 최대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로마를 중시으로 포장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만들어져 식민지의 물자들이 활발히 이동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동방무역도 활발했다. 이집트로부터 홍해로 나가서 인도양을 건너 인도의 향료와 보석을 사들였으며, 비단길을 통해서 중국의 비단을 수입했다. 
  '누가 만일 세계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을 누리고 영화를 구가한 시대를 지적하라고 한다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으로부터 코모두스의 즉위에 이르는 시기를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기번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찬란한 '로마의 평화'의 그늘에는 수많은 노예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빵과 서커스,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검투경기가 무료로 베풀어지는 동안 밀가루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선 노예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로마의 평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군대였다. 로마 군의 주축은 평민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터지면 병사가 되어 전선에 나갔다. 이들은 무장을 모두 자비로 충당했는데, 긴 창과 양날 단검, 갑옷에 방패를 들고 무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중에는 공병도 있었다. 공병의 임무는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만든 도로는 실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로마 인들은 '도로는 일직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높은 산에 굴을 뚫고,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난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의 총길이는 
8만 5천km, 그 숫자는 372개에 달했다. '팍스 로마나'는 점령지와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8. 조조, 적벽에서 무너지다 -중국, 삼국시대의 시작(20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년/을파소 고구려 재상이 됨,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후한 말, 중국천하는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으로 정치가 혼란에 빠지고,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들의 반란이 쉴새없이 일어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했다. 황건적이란 가담자들이 누런 헝겊으로 머리를 싸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각지에서 일어난 군신들은 저마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들 중 조조, 손권, 유비 세 사람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두고 경쟁하게 되니, 이때를 삼국시대라 부른다. 
  흔히 조조는 꾀 많고 간사한 인물로, 유비는 덕망 높고 온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조조는 당대의 전략가로서 전투시에는 항상 진두지휘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환관의 양자였다고 하니, 몰락했을지언정 황족의 후예인 유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문인 셈이다.
  조조를 두고 일찍이 
허소라는 사람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 될 상이라고 평하였다. 
평화시대엔 유능한 관리가 되겠지만,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되리란 뜻이다.조조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의 보호자가 되어 최고의 명문 출신인 원소의 대군을 격파, 중원을 수중에 넣었다. 중원 땅은 중국 대륙의 중심부로, 천하를 얻으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곳이었다.
  한편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짚신이나 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유비는 팔이 유난히 길고 귀가 컸으며, 말수 적고 희로애락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의형제 관우, 장비와 토벌전에 종군, 그 공으로 말단 관리직을 얻었다.
  손권은 손견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19세 때 대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주유, 노숙, 장소 등의 보좌를 받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강동지방에 세력을 굳혔다. 그의 세력권은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에 이르렀으며, 기름진 곡창지대가  대부분 그에 속해 있었다.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제갈공명이다. 제갈공명의 이름은 량, 공명은 자이다. 낭야군 양도현, 지금의 산동성 기수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와서 살았다. 17세 때 숙부마저 죽자 융중으로 옮겨와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며 경전과 사서를 공부했다.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는 용이라하여 '와룡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이일어났을 때 조조는 30세, 유비는 24세, 손견 29세, 손권 3세, 제갈공명 4세였다. 유비와 제갈공명이 만난 것은 그로부터 23년 후, 유비의 나이 47세, 제갈공명의 나이 27세 때이다.
  유명한 적벽대전은 서기 208년에 벌어졌다. 당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형주와 강동을 향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중이었다. 당황한 손권에게 제갈공명은 연합을 제의, 손권의 군사 3과 유비의 수상부대가 공동작전을 펴게 되었다.
  조조의 군사는 적벽(호북성 가어현 양자강 연안)의 강언덕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모두들 북방 출신인지라 풍토병에 시달리는데다 수전에 익숙치 못해 뱃멀미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자 뱃멀미를 덜기 위해 배들을 전부 쇠고리로 연결,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연환선을 만들었다.
  이를 알아차린 주유의 부장 황개가 계책을 냈다.
  '조조군은 배의 꼬리와 머리가 맞닿아 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니, 화공으로 일거에 격파할 수 있습니다. '
  주유는 몽충(;폭이 좁고 길며 적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기 쉽게 만든 배), 투합(;지금의 전함)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다음 포장을 덮고 깃발을 꽂게 했다. 그 뒤에는 쾌속선이 따랐다. 준비를 마친 후 부장 황개로 하여금 항복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황개가 거느린 전선이 나타나자 조조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저기 봐라,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
  1km 지점까지 다가갔을 무렵, 황개의 신호에 따라 가득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이 댕겨졌다. 때마침 불어온 동남풍을 타고 황개의 선단은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면서 조조의 함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쇠고리에 묶인 조조의 배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일대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주유의 정예부대가 종횡무진, 조조 군사들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적벽 일대는 문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조조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허창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만약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했더라면 중국천하는 이때 조조의 손에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명전략가였던 그도 남쪽 지방의 변화무쌍한 기후, 특히 계절풍에 대해선 무지했던 모양이다. 바람 방향이 동남풍으로 바뀌는 것을 알았다면 지략가인 조조가 연환선을 허락했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여하튼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얻어 발판을 굳혔으며, 손군은 강동을 지켜 동남쪽으로 그 세력을 뻗게 되었다. 바야흐로 위, 오, 촉 삼국이 정립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서기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하고 진을 세웠다.
  

19. 게르만 인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의 멸망(4세기 말-5세기 초)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313년/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불교 전래
  
  375년 중국의 한나라에게 쫓긴 훈(흉노) 족이 드네프르 강을 넘어 흑해 연안에 살고 있던 게르만 족의 일파인 동고트 족을 공격해 왔다. 그 여파로 동고트 족의 서쪽에 있던 서고트 족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갈 곳은 로마 제국의 영토뿐이었다.
  410년 서고트 왕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침입, 무자비한 약탈을 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훈 족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신의 채찍'이란 별명을 가진 훈 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용맹은 로마 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로마는 게르만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아틸라를 막아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달 족이 쳐들어왔다.
  잇단 외적의 침입 앞에 흔들리던 로마를 일격에 무너뜨린 것은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였다. 그는 476년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지중해의 패자였던 로마제국의 절반이 야만인이라 업신여기던 게르만 인의 손에  떨어지고 만 순간이었다.
  당시 로마는 안으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5현제 이후 황제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그치지 않았고, 그나마 삼위일체가 정통이냐 이단이냐 하는 기독교 교리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황제 이하 정치가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처를 못하고 있었다.
  사회의 골간을 이루던 노예와 자영농이 급속히 감소하는 바람에 경제활동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노예는 주된 공급원이던 정복전쟁이 한계에 다다른 탓에, 로마 군대의 주죽을 이루는 자영농들은 그간의 잦은 전쟁에 나가느라 농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 해결책으로 게르만 인의  이주를 허용, 4세기 말경에는 이미 상당수의 게르만 인이 국경지대에 섞여 살고 있었다.
  이주해온 게르만 인은 노예대신 농사를 짓고, 용병이 되어 전쟁터에 나갔다. 그 가운데는 로마 군대의 지휘자가 된 자도 상당수 있었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동서로 갈라져 예전의 강대함을 상실한 상태였다. 395년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죽으면서 제국을 동서로 양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분할통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넓은 지역을 혼자 통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를 두어 각각 나누어 다스렸던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뒤였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대이동은 초기의 산발적이고 평화적인 이주와는 전혀 달랐다. 집단적으로 그리고 무기를 들고서 로마로 진격해 들어온 것이다.
  게르만 족은 본래 발트 해 연안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비옥한 땅과 목초지를 찾아 잦은 이동을 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왕 또는 추장의 지도를 받았으며, 대이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선교사의 포교로 아리우스 파의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되어 있었다.
아리우스 파는 아타나시우스 파를 정통으로 여기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힌 교파이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그 자리에는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졌다. 북갈리아의 프랑크, 라인강과  다뉴브 강 상류의 알라만, 론 강 유역의 부르군도,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반달 왕국 등이 서로 세력을 다투며 부침을 거듭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그후로도 천 년이나 명맥을 유지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 당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이름은 중세 봉건사회, 그 주인공은 게르만 인이다.
  

20. 수 양제, 대운하를 건설 -양제의 중원 통치(58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503년/신라 국호와 왕호를 정함, 527년/신라 불교 공인,

  612년/고구려의 을지문덕 살수대첩에서 수군을 섬멸
  
  400여 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천하를 재 통일한 사람은 수의 
문제 양견이다. 그는 589년 수나라를 세우고 유능한 정치를 폈다.
  604년 그 아들 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양제이다. 일설에 의하면, 양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아버지가 총애하던 선화부인을 범했다고 한다.
  양제의 통치중 가장 두드러진 일은 대운하 건설이다. 그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부유한 상인들을 대거 이주케 하여,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역대 왕조들이 파놓았던 운하들을 정리, 통일하기 시작했다. 
  중국대륙에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당강의 5대 강이 흐르고 있다. 운하 건설은 이들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내는 것이다. 먼저 황하와 회수를 이어 황하와 백하, 끝으로 양자강과 전당강을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데, 운하의 폭은 60m, 길이는 2천km에 달했다.
  운하 곁에는 길을 닦고 가로수로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뿐 아니라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사이에 40여 개의 궁전을 짓고, 황제가 탈 용선과 유람선 수만 척을 만들어 띄웠다.
  대운하가 완성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611년이다. 양제는 낙양을 떠나 강도까지 순행길에 올랐다.
  용선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니 배 젓는 사람만 8만 명이요, 꼬리를 문 배의 행렬이 무려 2백 리에 달했다. 말탄 기병이 운하 양옆의 길을 따라 호위행진하고, 형형색색의 깃발과 병사들의 갑주가 눈부신 태양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지나는 5백 리 이내의 고을에 음식을 헌상토록 하여,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 종자와 후궁들이 실컷 먹고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갔다고 한다.
  운하가 중국사회의 교통,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남쪽의 풍부한 물자가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북쪽으로 대량 운반되기 시작, 남북간의 경제교류가 원활해졌고, 바다로부터 대륙 중심부로 들어가는 수로가 트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운하의 물은 관개용수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운하건설은 몹시 어려운 공사였다. 그에 바쳐진 백성들의 피땀과 생명은 수도 없었다. 황하와 회하를 잇는 통제거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백여만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공사에 동원된 총인원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km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교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 양 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농가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남편 잃은 여인들과 고아들의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남정네들은 무서운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만리 타향에서 버려진 시체로 뒹구느니 평생 불구로 살지라도 노역을 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복수복족'이란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양제는 운하건설을 마치자 마자 이번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친히 용선을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 탁군, 즉 지금의 북경에 도착,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1월, 황제의 사위 우문사급 아버지 우문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113만 8천 명의 대군이 탁군을 출발했다. 원정군은 매일 1개 군단씩 순서에 따라 떠났는데, 전군이 출발하기까지 40여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진격하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황하를 건너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육군과 합류, 일거에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작전이었지만, 게릴라식 전법으로 싸우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에게 골탕을 먹어 수나라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의 뜻을 보이자, 우문술은 철수를 결심, 군대를 돌렸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도처에 군사를 매복시켜 돌아가는 이들을 공격했다. 그중 유명한 싸움이 살수대첩이다. 여기서 수나라 군사 30만 5천 명 중 2천 7백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참패한 양제는 
613년, 614년 연거푸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 번 다 중단되었다. 
  가혹한 토목공사와 연이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양제의 최후는 비참했다. 반란군에 쫓겨 강도로 도망친 그는 체념한 채 술과 여인들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목이 참 보기좋게 생겼다만 누가 이 목을 차지하게 될지 모르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618년 3월, 양제는 그를 호위하던 친위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주모자가 어느 놈이냐?'
  '온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으니,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소?'
  '천자에겐 죽는 방법이 따로 있는 법이다. 독약을 마시고 죽게 해달라'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소원도 거절당하고, 양제는 친위대 장교의 손에 목을 졸려 죽어갔다. 이로써 진시황 이래 중국 대륙을 재통일, 강력한 전제국가로 군림한 수나라는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21. 알라 앞에선 만인이 평등 -마호메트, 이슬람 교 창시(61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24년/고구려 당에서 도교 전래
  
  세계 4대 종교로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스람 교를 꼽는다. 그중 가장 늦게 창시된 것이 이슬람 교이다. 현재 전세계에 5억 5천만 정도의 신자가 있으며 서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 북아프리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이슬람 교의 창시자는 마호메트이다. 그는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6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후 작은아버지 
아부탈리브의 집에서 자랐다.
  아랍인들은 유목생활을 하며 일찍이 대상무역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마호메트도 12살 때부터 대상에 합류, 시리아 국경 지방을 비롯, 지중해 연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가 25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메카에는 
하디자라는 부유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하던 장사를 맡아 해줄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조카가 친구인 마호메트를 추천, 마호메트는 하디자의 재산관리인이 되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생활의 안정과 막대한 부를 갖게 되었지만 마호메트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메카 교외의 
헤라 산속에 들어가 동굴생활을 하며 단식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했다. 
  그가 구한 것은 일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인생의 참뜻이었다. 부족끼리 끊임없이 싸우며 온갖 미신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하는 의문이 어려서부터 줄곧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명상에 잠겨 있는 마호메트의 귀에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대 신의 예언자여!'
  그러더니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뭐라 형용키 어려운 기쁨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알라의 예언자다!'
  그의 나이 40살, 610년의 일이다. 
  그는 곧 포교를 시작했다.
  '알라 신은 유일하며, 전지전능하다.'
  알라를 믿으면 낙원이, 믿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가르침에 환호를 보낸 것은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계급타파와 우상숭배 반대, 만민평등을 외쳤기 때문이다. 반면 귀족들은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622년 마호메트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귀족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가 간 곳은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야스리브라는 도시였다. 
  이슬람 교에서는 이 도피를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 해를 이슬람 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편 야스리브는 후에 마디나트운나비, 즉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 불리게 되었다. 메디나는 메카와 함께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 마음에 속속 파고들었다.
  '알라 앞에선 왕이건 노예건 모두 평등하다. 알라를 믿고 올바로 행동하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 알라는 인간 전체의 구세주시다.'
  마호메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은 신의 예언자일 뿐이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후일 이를 모은 책이 
'코란'이다. '코란'이란 아랍어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 한다. 현재도 '코란'은  이슬람 교도의 경전인 동시에 역사서이자 법전이요, 생활지침서이다.
  630년 마호메트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 마침내 무혈입성했다. 알라를 유일신으로 인정하고 마호메트를 메카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화평을 맺은 것이다.
  두 도시를 얻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아라비아 반도를 알라 신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일했다. 그가 예수나 석가와 다른 점은 직접 칼을 들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정치적 지배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흔히 이슬람 교의 선교방식을 '코란이냐, 칼이냐'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개종을 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복지 주민이나 포로들에게 일단 개종을 권하지만, 일정한 공물을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얼마든지 허락했다. 
  마호메트는 아라비아를 통일하고 시리아 원정 길에 올랐다가 632년 도중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시리아, 사산조 페르시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 마침내 지중해 남쪽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럽의 게르만 사회를 위협하게끔 되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 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찍이 근동지방을 두루 다니며 각지의 종교, 풍습, 문화를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사막지대에 흩어져 살던 아랍 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것은 바로 마호메트의 가르침, 즉 알라 앞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포애와 민주주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현무문의 변 -당의 건국(6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32년/신라 첨성대 건립, 645년/고구려 안시성 싸움서 당군에 승리
  
  수 양제가 친위대의 손에 죽음을 당한  뒤,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당을 건국했다. 이때가 618년이다. 
  고조 이연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왕세충, 두건덕을 제거하고 명실공히  천하를 평정, 진나라, 수나라에 이어 세 번째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건성, 세민, 원길 세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다. 세 아들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그중에도 둘째 세민이 가장 출중했다. 당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다름아닌 세민이었다.

  건성과 원길이 손을 잡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세민은 선수를 칠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 고조를 알현하였다.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후궁들과 결탁해서 저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신이 죽어 지하로 돌아가 왕세충과 두건덕을 만나면 그들은 꼴 좋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라고.

  이연은 아연실색했다.
  '물러가라, 내일 아침 두 사람을 불러 이 문제를 밝히겠다.'
  그러나 이는 건성과 원길을 궁궐로 불러들이려는 세민의 계략이었다.
  무덕 9년(626) 6월 4일 새벽, 세민은 현무문에 복병을 배치했다. 현무문은 궁궐의 북문으로 황제를 배알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었다. 일반인은 물론 관리들도 출입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므로 무장한 군사는 절대 출입할 수 없지만, 세민은 현무문 수비대장을 매수, 자기 편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성과 원길은 거느리고 온 군사를 밖에 남겨둔 채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 태자 건성은 일격에 쓰러지고 원길 역시 세차게 저항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사건을 후세 사가들은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세민은 냉혹한 인물이었다. 건성의 아들 5명과 원길의  아들 5명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3일 후 고조 이연은 세민을 태자로 봉했으며, 2개월 뒤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민이 2대 황제 태종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 형제를 죽인 태종이었지만, 정치가로서는 매우 탁월했다. 그는 신하의 직간을 귀담아들었으며, 인재등용과 백성들의 부역을 경감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용조 제도를 시행, 성년 남자에게 균등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으며, 토지제도로는 균전제, 병제로는 특정지역에서 병사를 선발하는 부병제를 실시했다. 이런 법들은 수 양제 시절의 가혹한 착취에 비하면 백성들의 부담을 훨씬 더는 내용이었으므로 널리 환영을 받았다. 또 정부기관으로 3성과 6부를 두어 통치의 효율을 기하고 법률을 정비, 율, 영, 격, 식을 마련했다.
  대외적으로도 세력을 뻗쳐 돌궐, 위구르, 거란을 복속, 당의 영토는 서로 아랄 해, 북으로 바이칼 호 부근 남으로는 베트남까지 확장되었다.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상공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 와국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당나라 수도 
장안은 문화의 중심지요 교역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신라, 일본, 인도, 아라비아, 서역 등지에서 수많은 상인들과 사절단, 유학생들이 몰려들어 장안은 인구 백만을 넘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태종의 탁월한 정치는 '정관의 치'라 하여 후세 황제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업적을 남긴 태종이었지만, 그 역시 고구려 원정에는 실패했다. 수 왕조 이래 중국은 한반도를 손에 넣고자 수차례 정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원정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던 신라로부터 원병요청이 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저희 신라에서 당에 공물 바치는 길을 차단하고 입조마저 방해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는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연개소문이었다.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역죄를 응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출병을 결심했다.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삼는다면, 멀리 바다 건너 고구려를 치는 일은 중지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관 19년(645) 태종은 진군명령을 내렸다.

  요하를 단숨에 건너 요동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안시성의 수비는 매우 견고했다. 성주 양만춘의 지휘하에 군민이 하나가 되어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시성의 농성전은 근 1년 여 지속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혹한이 몰아닥쳤다. 추위와 피로에 지쳐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철군명령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철수 도중 악천후를 만나 엄청난 사상자를 내야 했다. 고구려 원정은 대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3년 후인 649년 태종은 사망했다. 불로장생 약을 잘못 먹은 탓이었다. 그의 나이 51살 때였다.
  

23. 궁녀에서 여황제로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6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통일신라 시작
  699년/발해 건국
  
  역사를 더듬어보면 여성으로서 최고 통치자가 된 예가 적지 않다.
신라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성보다 훌륭히 한 나라를 다스린 여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왕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치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이에 비해, 중국의 측천무후는 상인의 딸로서 일개 궁녀가 되었다가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본명은 조, 성은 무, 산서성 문수현에서 목재상의 딸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라는 이름을 내리고 궁녀로 삼았다. 그녀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곤 했다.
  정관 말년(649), 태자 치는 병석에 누운 태종을 병문안 갔다가 곁에서 시중들고 있는 아리따운 미랑의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종이 병사하자 태자 치가 제3대 고종황제가 되었다. 미랑도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소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소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야심은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 우선 라이벌인 소 숙비를 제거하고, 다음엔 황후 왕씨를 모함하여 황후 자리에서 내쫓았다. 두 사람은 곤장 백대에 수족이 잘리고 술항아리 속에 넣어져 죽음을 당했다.고종은 무소의를 황후에 책봉하는 문제를 중신회의에 부쳤다. 본래 황후는 명문귀족 가문에서 뽑는 것이 상례인데다 무소의는 선왕의 궁녀였던지라 신하들의 반대는 매우 드셌다.
  그러나 고종은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655년, 그녀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이후 그녀는 측천무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원로대신 저수량과 장손무기는 좌천 또는 유배되었다가 죽고 말았다. 
  꿈을 이룬 그녀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 때문에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녀가 대신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훌륭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고종은 현경 5년(660) 정무를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종과 무후를 가리켜 '2인 천자'라고 했다. 
  측천무후는 현경 5년 소정방을 파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무너뜨려 수 양제나 당 태종도 이루지 못한 숙원사업인 한반도 정복을 달성했다. 이로써 당의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다. 674년 그녀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황제, 황후라는 칭호를 천황, 천후로 바꾸고 연호도 상원이라 고쳤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신당서' 본기를 보면, '기해에 천후,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태자 홍은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엔 별반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675년 황태자 홍은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 신성공주 두 사람을 결혼시킬 것을 고종에게 상주, 윤허를 얻었다.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당한 소 숙비의 딸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직후 별안간 황태자 홍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한 무후가 홍을 독살했다고 믿었다.
  뒤를 이어 무후의 둘째 아들 현이 황태자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의 소생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모반 혐의를 쓰고 자리에서 쫓겨나 자결하고 말았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이 황제가 되니 이가 제4대 중종이다. 한데 중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황후 위씨의 전횡에 분노한 측천무후가 중종을 황제자리에서 내쫓은 것이다.
  그리하여 690년 측천무후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나이 67살, 중국에 최초의 여황제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라 이름을 주라 고치고, 낙양을 신도라 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스스로를 신성화제라 칭하고 넷째 아들 단을 황태자로 정하여 성을 무씨로 고쳤다. 또 측천문자라는 새문자 20자를 제정했다. 
  그러나 15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들어 눕자,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쫓겨난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무후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이번엔 중종 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남편 중종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위씨의 야심은 불과 며칠 가지 못하고 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에 의해 무산되었다.
  712년 이융기가 예종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워 '개원의 치'란 칭송을 들었으나,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하다가 안녹산의 반란으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24. 게르만 족, 유럽을 석권하다.-서로마 제국의 부활(80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751년/불국사 석굴암 건립, 828년/장보고 청해진 설치
  
  중세 기사들의 용맹을 노래한 서사시로 
'롤랑의 노래'가 있다. 롤랑은 실제 인물로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휘하의 기사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에스파냐를 정벌할 때의 일이다. 당시 에스파냐는 이슬람 교도인 사라센 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도시를 다 잃고 사라고사라는 도시 하나를 지키고 있던 사라센은 강화를 맺자는 제의를 해왔다. 카롤루스 부하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카롤루스의 조카로 용맹이 뛰어난 롤랑은 극력 반대했고, 롤랑을 미워하는 
가느롱은 강화를 주장했다.
  오랜 원정에 지친 카롤루스는 사라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느롱을 휴전회담 대표로 내보냈다. 가느롱은 이번 기회에 롤랑을 제거하려는 생각에 사라센 왕에게 귀띔을 했다.
  '롤랑이 자꾸 싸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를 없애야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때 롤랑의 부대를 맨뒤로 돌려놓을테니 그때 롤랑을 공격하십시오'
  사라센 왕은 가느롱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이윽고 카롤루스 군은 철군을 시작, 피레네 산맥의 롱스포 고개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주 가파른 비탈 사이로 좁은 길이 하나 있을 뿐이어서 일렬종대로 한 사람씩 지나가야 했다.
  '만일 여기서 적이 기습해온다면 우린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후위대를 두어 뒤를 지켜야겠다.'
  카롤루스의 말에 가느롱이 얼른 대답을 했다.
  '그 임무에는 롤랑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롤루스가 망설이자 이번엔 롤랑이 나섰다.
  '폐하, 그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카롤루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허락했다.
  '절대 성급히 행동하지 말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뿔나팔을 불어라,. 그러면 즉시 달려오겠다.'하며 자신의 활을 건네주었다. 
  '잠깐, 우리도 가겠네'
  롤랑과 함께 용맹을 날리던 11명의 기사들이 따라 나섰다.
  한편 사라센 왕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롱스포 고개에 이르렀다. 롤랑의 후위대만 남은 것을 확인한 사라센 군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롤랑의 2만 군사는 용감히 싸웠지만 중과부적, 하나 둘 쓰러져갔다. 롤랑도 혼신의 힘을 다해 뿔나팔을 불고는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카롤루스가 달려왔을 때는 롤랑을 비롯하여 전군이 전사한 후였다. 노한 카롤루스는 배반자 가느롱을 처형하고 다시 에스파냐로 쳐들어가 대승을 거두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의 새 실력자로 떠오른 것은 프랑크 왕국이다. 라인 강 하류에 정착한 프랑크 족은 갈리아 지방 일대로 세력을 넓혀 5세기 말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초대 왕 
클로비스는 매우 영민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인 여타의 게르만 국가들과는 달리 아타나시우스 파로 개종,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어 영토확장에 무난히 성공했다.
  그가 죽은 뒤 내분을 수습하고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 
카롤루스 마르텔이고, 그 아들 피핀은 751년 국왕을 수도원 승려고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바로 이 피핀의 아들이다.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성장했다. 여기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하에 있었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로마 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교황은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다. 이대 가장 적절한 인물로 생각된 것이 프랑크 왕 카롤루스였던 것이다. 카롤루스 역시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선 교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지지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일개 국왕이 아닌 황제와의 제휴라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의 서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로써 침입자였던 게르만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새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 서율버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수호자요,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유럽 일대를 석권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부활되었으나, 그 주인은 바로 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 게르만 족이었던 것이다.
  

25.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 -봉건제도의 완성(10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00년/견휜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 족의 관습에 따라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루트비히 1세가 영토와 함께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영토분할 문제를 놓고 골육상쟁을 하다 죽고 말자, 왕국은 다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일대, 그리고 서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3남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를, 막내 은 서프랑크를 각각 물려받았다.
이같은 영토분할은 843년 베르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로타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남은 두 형제에게 또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북동부는 동프랑크로, 서북부는 서프랑크로, 남부는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 메르센 조약으로 그어진 경계선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영토분할을 둘러싼 혈육간의 싸움으로 약화된 프랑크 왕국에 이번엔 이민족의 침입이 뒤따랐다. 북쪽으로는 노르만 족, 즉 바이킹이 침입해 들어왔고, 동쪽으로는 마자르 족이, 남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이 물밀 듯 밀어닥쳤다. 이들이 지나간 곳은 무차별한 약탈과 살상행위로 농작물, 가축은 물론 사람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혼란의 시대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중세사회의 독특한 질서인 봉건제도는 바로 이 혼란의 시대에 완성되었다.
  봉건제도란 주종제도와 장원제도가 결합된 중세 특유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지배질서를 말한다. 
  주종제도란 주군이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신하는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여, 주군은 신하를 보호, 부양할 책임을, 신하는 주군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할 의무를 짐으로써 상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상호 계약관계로부터 출발했다. 
  토지를 매개로 한 이 주종관계는 연쇄적으로 이어져 거대한 피라미드 꼴을 이루었다. 국왕 혹은 황제가 꼭대기에 있고, 그 밑에 봉신으로 공작이, 또 그 밑에 후작과 백작이...하는 식이었다. 
평기사는 지배계급의 최말단이었으며,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절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토지는 중세사회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봉신들은 자신의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하나의 경작단위로 만들었는데 이를 장원이라 한다. 농민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로부터 경작권을 위임받는 대신 영주에게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졌다. 
  영주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평기사 중엔 장원을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어쨌든 영주는 자기 영지 내에선 왕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였다. 
  반면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과 노역은 매우 과중한 것이었다. 노르망디 지방의 한 기록을 보자.
  '5월에는 영주의 풀밭을 깎고 건초를 나른다. 그 다음에는 도랑을 치운다. 8월에는 곡물을 거둬 들이는 부역을 해야 하고, 9월에는 돼지세를 바쳐야 한다. 돼지 중 가장 좋은 두 마리는 영주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한 마리당 각각 세금을 내야 한다. 10월에는 고정적인 지대를 지불해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농사에 대비한 대대적인 부역이 행해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케이크와 암탉을 바쳐야 한다....' 게다가 방앗간을 비롯해 농기계 사용료를 어김없이 내야 하고, 통행세, 사망세, 영주의 여행비 부담, 교회에 바치는 10분의 1세, 결혼하면 결혼세를 바쳐야 했다. 심지어는 초야권이란 것까지도 있었다. 즉 신부가 결혼 첫날 밤의 잠자리를 신랑이 아니라 영주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농민의 삶은 매우 비참하고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는 철저한 위계질서의 사회였으므로 농민들은 평등이란 개념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자신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영주에 매여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사회구조가 낳은 무거운 짐은 모두 위계질서 맨 밑바닥에 있는 농민들의 몫이었고, 교회 역시 또 하나의 영주로서 농민들 위에 군림했다. 때문에 중세 농민들을 일컫기를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이라는 뜻으로 '농노'라고 한다.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10세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935년/경순왕 고려에 귀의, 통일신라 멸망,
  936년/후백제 멸망하고 고려, 후삼국 통일
  
  함부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유서깊은 도시에는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많다. 이는 독일어로'성곽'이라는 뜻이다.
  중세 도시는 이름 그대로 두터운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문을 들어서면 교회와 광장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좁은 길가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가게와 살림집을 겸한 집들이 들어차 있다. 비나 눈이 오면 포장 안된 길들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고 소나 말, 돼지들이 아무 때나 길가로 튀어나온다. 쓰레기와 상하수도도 심각한 문제. 몇 개 안되는 공동우물로 상수도를 해결하고 하수도는 얕고 좁은 도랑뿐이다.'
  이것이 중세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세 도시는 10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유럽 각지에서 생겨났다.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든지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처음엔 상인들이 모여 임시로 거주하며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대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외곽지역이었다.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장사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상인들은 임시 거주지 주변에 새로운 성곽을 쌓고 영구히 거주하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어졌다. 오늘날 자본가를 뜻하는 말인 부르주아는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가 제일 먼저, 그리고 활발히 발달한 지역은 발트 해 주변의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북유럽이다.
  처음엔 도시 역시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주는 시장세, 거래세,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또 도시가 생기면 땅값도 올랐기 때문에 도시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상인들은 영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지만, 주변 농촌에서 이주해온 수공업자나 날품팔이 노동자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다. 이들은 상업활동에 필요한 온갖 일들, 예를 들면 수레나 상자의 제조, 상품 선적과 수송 등에 종사했으며, 도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제빵업자, 양조업자, 대장간, 푸줏간 경영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상인과 함께 이들 수공업자들은 도시주민의 핵심을 이루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날로 번창하자 도시민들은 영주의 불필요한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영업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영주로부터의 독립, 즉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민들은 혹은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자치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신분의 자유, 영주가 만든 법이 아니라 도시법과 상법에 의해 운용되는 자신들의 재판소, 각종 세금과 봉건적 강제의 면제, 자치권을 따낸 도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인'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정기관과 재판소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했으며 군대를 길렀다. 수입에 따라 공평하게 비용을 부담, 도시를 운영해나갔다. 
  13세기경에는 거의 모든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 영주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했다. 이젠 비록 농노 출신이라 하더라도 영주에게 붙잡히지 않고 '1년과 하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누구나 자유인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부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갖는 애착심은 대단했다. 도시는 시민의 고향이자 국가이고 삶의 공동체였다. 민족이라든가 국민이라는 관념보다는 자기 도시의 시민이란 관념이 훨씬 강했다. 
  이런 생각은 한편으론 퍽 배타적이어서 타도시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도시 당국은 무엇보다 자기 시민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른 도시민이 자기 도시에 와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대내적으로는 시민 공동의 복지를 위해 경제통제를 가했다. 이 같은 경제통제의 한 형태가 바로 
길드이다. 
  철저한 주종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도시는 분명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경제 외적 강제를 모두 벗어버리고 경제 원리에 입각해 생활하는 시민들은 농노나 영주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서 근대사회로 가는 맹아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93년/거란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 물리침,
  1019년/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군사 격파
  
  중세 사회의 신분서열을 묘사한 책을 보면, 사회신분은 총 24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두 번째는 교황그 다음은 수도원장  이하 사제와 카톨릭 관계자들이 차지하고, 황제는 일곱 번째,국왕은 여덟 번째 영주는 열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제일 끝에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중세 유럽에서 카톨릭의 권위와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국왕 및 황제와 연합 또는 상호견제하면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런데 교회가 황제보다도 우월한 위치에서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된 계기를 이룬 사건이 
1077년에 일어났다. 
  당시 카톨릭은 성직자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교황 및 성직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새로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했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성직임명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카톨릭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일대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국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말았다. 
  파문이란 카톨릭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카톨릭 교도는 더 이상 황제를 만나선 안되었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 역시 황제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1088년 2월 교황이 주최하는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인리히 4세는 당황했다. 더 이상 교황에 맞서 싸울 지지기반을 잃은 그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했기 때문에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몰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교황은 이때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카노사 성에서 휴양중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하인리히 4세였지만 교황은 만나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그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속에서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일단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새 황제를 승인했지만 이번엔 하인리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독일 성직자들과 제후들을 소집, 도리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두고 봐라. 지난번 당한 모욕을 몇십 배로 갚아주마.'
  1082년 
하인리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하인리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모두 죽고 난 다음이었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날로 막강해져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 다음의 지위에 있게 되었다. 교황권이 절정에 달한 것은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때이다. 이때,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란 말 그대로 황제의 권위는 막강한 교황권 앞에서 빛을 잃게 되었다. 
  

28. 하나님이 원하신다! -십자군 전쟁(10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097년/주전도감 설치,  1107년/윤관, 여진 정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 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사라센 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1212년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눈에 띄게 세력이 커진 것은 국왕과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기도 했다.
  

29. 중세문화 꽃, 대학 -대학의 성립과 발달(12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135년/묘청, 북벌 주장하고 대위국 세움, 
  1145년/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년/정중부의 쿠데타, 무신정권 시작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대학들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대학의 기원은 중세 유럽에서 시작된다.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은 일반 교양과목과 의학, 철학, 신학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에서도 법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볼로냐 대학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법학자 이르네리우스의 로마법 강의와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강의로 유명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법률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대학 주변의 시민들은 방세를 대폭 올렸으며, 학생들은 조합을 만들어 이에 대처했다.
  학생조합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방세 인하였다. 이들은 볼로냐 시당국에 방세 인상 금지를 요청했다.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모두 볼로냐 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대학은 강의실이나 기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공공건물을 빌려 강의를 진행했기 때문에 학생조합이 갖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방세 인하 싸움에서 승리한 볼로냐 대학생들은 교수를 다음의 목표로 삼았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이러했다.
  '학생들의 허락 없이 교수 마음대로 휴강하지 말라.' '수업시간을 정확히 지켜달라.' '교수는 강의를 대충하지 말라.'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가지 말라.' '폭넓은 강의 내용을 원한다.' 등등.
  학생들이 이런 요구사항을 내걸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교재를 제대로 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는 아직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모든 책을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들어야 했는데, 이런 필사본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다. 교수의 연봉이 50
후로린인데 교재값은 한 권에 25후로린이었으니, 학생 신분으로서 교재를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좋은 교수의 훌륭한 강의를 들으며 스스로 필기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한데 교수들이 강의를 소홀히 하는 데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교수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업거부 혹은 등교거부 등 단체행동을 불사했다. 대학 재단이란 것이 전혀 없고 오로지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해 대학이 운영되던 당시인지라 학생들의 단체행동은 곧바로 교수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그러자 교수들도 조합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이 만든 조합은 콜레지아라고 했다. 오늘날 단과대학을 뜻하는 칼리지는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종합대학을 일컫는 유니버시티는 학생조합 우니베르시타스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학생들도 장래 교수가 되려면 칼리지에 가입해야 했으므로 칼리지를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칼리지에 가입하려면 엄격한 자격심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볼로냐 대학의 중심은 역시 학생이었다. 
  신학으로 명성을 떨친 파리 대학은 이와는 달리 교수가 중심이었다. 노트르담 성당 학교로부터 출발한 파리 대학은 정치 중심지인 파리에 있다는 유리한 입지조건에 아울러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아벨라르두스의 명성에 힘입어 신학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벨라르두스는 여수도원장 엘로이즈와의 정신적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신학 강의는 한 번에 5천 명의 학생들이 몰려드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대학은 도시당국과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랜 투쟁을 했다. 1200년경 파리 대학의 한 독일 유학생이 시민에게 모욕을 당한 문제로 학생들과 파리 시민간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경찰을 불렀고, 결국 학생 5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수들과 학생들은 즉시 국왕에게 항의, 학생을 살해한 경찰을 처벌하지 않으면 즉시 파리를 떠나겠다고 경고했다.
  파리 대학의 권위는 막강했다. 교황을 비롯해 고위성직자 대부분이 파리대학 출신인지라 국왕 필립 2세는 할 수 없이 문제의 경찰을 체포, 처벌하고 파리 시의 경찰책임자도 문책해야 했다. 그리고 현행범이 아니면 파리 대학 학생에겐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아가 재판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대학에 맡겨 자치를 허락했다.
  중세 대학생들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3과목을 수료하면 대학 졸업장을, 산수, 기하, 천문, 음악 4과목을 수료하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법률, 의학, 신학 중 하나를 택해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중 신학이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꼽혔다. 
  대학을 졸업하면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었다. 문학 전공자는 행정가나 교수로, 법학 전공자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전공자는 신학교수나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 
  학생들은 성직자처럼 머리를 박박 깎고 공부에 열중했지만 점잖고 경건한 행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술과 춤, 여자를 즐기기도 하였고 패싸움도 곧잘 했다.
  13세기 이후의 유럽 중세문화는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15세기 무렵엔 유럽 각지에 80여 개의 대학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은 자유와 진리의 상징이었으며, 중세문화의 꽃이었다.
  
  

30. 칭기즈칸, 세계제국을 세우다 -몽고 통일, 중앙아시아 원정(1206-1227)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198년/노비 만적의 봉기,  1231년/몽고 1차 침입,
  1236년/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1270년/삼별초의 대몽항전, 1285년/일연, '삼국유사' 저술
  
  서양에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동양의  한모퉁이에서는 세계제패를 꿈꾸는 거대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 물결의 주인공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칭기즈란 몽고어로 '절대적인 힘'이란 뜻이고 은 '군주'를 의미한다.
  몽고 고원의 오논 강변에 살고 있는 유목민 몽고족의 한 부락에서 테무진이란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눈에서 광채가 나고 얼굴에 광명이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부족장이며, 어머니 호에룬은 에스게이가 다른 부족에게서 약탈해온 여자였다. 
  테무진이 9살 나던 해, 아버지 에스게이가 타타르 인에게 독살당하자, 테무진은 네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몽고족은 보잘것없는 작은 부족이었고, 특히 테무진의 가족은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란 테무진은 17살이 되어 
불테란 여성과 결혼을 했다. 어느 날 몽고족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메르키트 부족이 공격을 해왔다. 테무진은 재빨리 어머니를 피신시키고 자신도 아우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적들이 사라진 후 돌아와보니 모두들 무사했으나 아내 불테만이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가고 만 것이다 이는 20여 년 전 에스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장의 친척으로부터 신혼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데 대한 복수였다. 그 여인이 바로 테무진의 어머니 호에룬이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친구인 케레이트 부족장 완칸과 동맹을 맺고 메르키트를 기습했다. 이 싸움으로 테무진의 용맹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후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만 부족과 일대 결전을 벌여 부족장 다얀칸을 사로잡고, 고비 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수중에 넣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족의 이름은 이제 이 일대를 통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고를 통일하고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제3대 칭기즈칸이 된 것이다. 흩어져 서로 싸우던 부족들은 칭기즈칸 밑에 모여 하나가 되었다. 
  몽고를 통일한 칭기즈칸은 날랜 기마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재정비한 다음 원정의 길을 떠났다. 그의 목표는 금나라였다. 금은 번번이 몽고로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두 명의 칸을 무참히 죽였다. 제2대 안바가이칸은 금나라 황제 앞에 끌려나가 커다란 목마에 못박힌 다음 토막 토막 잘리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1211년 봄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는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출정했다. 초원과 사막을 건너고 만리장성을 넘어 황하 이북을 수중에 넣고 1213년에는 금의 수도 북경에 이르렀다. 북경이 함락된 것은 1215년 5월의 일이다.
  금을 정벌한 칭기즈칸은 멈추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갔다. 총 60만의 대군을 동원한 중앙 아시아 원정은 1219년 시작되었는데, 그 첫 번째 목표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즘이란 나라였다. 
  '큰일났다. 몽고군이 쳐들어온다!'
  호라즘의 군대는 여러 인종을 모은 용병이었으므로 칭기즈칸의 군대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몽고군은 호라즘의 요새 오토랄을 5개월만에 함락시킨데 이어 사마르칸트를 불과 닷새 만에 부너뜨렸다. 성벽은 무너지고 집들이 죄다 불탔으며 수십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호라즘의 영토는 몽고 기마대의 말발굽 아래 남김없이 짓밟혔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폐허로 변하였다. 남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호라즘 왕 무하마드는 카스피 해의 어느 섬에 피신해 있다가 그만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토록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내가 무덤 정할 땅도 없이 죽는구나!'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시체는 수의도 없이 부하의 속옷 한 장으로 감싸졌다. 
  그후 칭기즈칸은 페르시아, 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남러시아, 크림반도와 볼가 강 유역까지 진출, 몽고를 통일한지 20년 만에 유럽의 동부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제국은 알렉산더를 비롯, 세계 그  어느 영웅도 이룩하지 못한 최대판도의 세계제국이었다. 
  몽고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날랜 기병의 활약 덕분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능란하게 말을 모는 몽고 기병 앞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적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금나라 포로로부터 화약 제조술을 배워 화약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투석기와 특수한 수레를 이용한 성벽 공격에도 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점령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 몽고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였다는 데 있다. 동원된 주민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군대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했다. 
  칭기즈칸은 7년에 걸친 대원정을 마치고 개선했다. 원정의 피로를 풀기위해 휴양하다가 1227년 사망하니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그가 점령한 대제국은 
주치, 차가타이, 오고탕. 툴루이 네 명의 아들들에게 상속되었다. 주치가 일찍 죽자 그 땅은 아들 바투가 물려받았다. 
  칸 자리를 두고 한동안 친족간의 암투가 벌어졌으나 막내 툴루이의 셋째 아들인 쿠빌라이가 칸이 되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수도를 카라코럼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이라 고쳤다. 이로써 몽고는 이민족으로 중국대륙에 통일왕조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흑사병 창궐(14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02년/충렬왕, 원을 방문하고 통혼관계 성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데카메론'이란 소설이  있다. 이탈리아인 보카치오가 쓴 이 책은 무서운 흑사병을 피해 외딴 시골로 도망친 열 명의 남녀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 내용은 하나같이 성직자와 봉건귀족들의 도덕적 타락에 관한 것들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중세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커다란 사건이다. 흑사병이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생겨 유럽으로 전엽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1346년경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서 생겨나서 무역항로를 따라 흑해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한다. 
  흑사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1347년 이탈리아를 강타하고 같은 해 말 마르세유, 아비뇽에 이르러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에는 영국을, 이어 1350년에는 북부 유럽을 거쳐 아이슬란드와 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흑사병이 이렇게 빨리 전염된 것은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인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환경, 병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흑사병은 페스트의 일종으로 폐에 병균이 침입하는 폐 페스트를 일컫는다. 일단 감염되면 별안간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하고 마는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리었다. 
  페스트의 발병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져 헛소리를 하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환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시체와 환자가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만이 유일한 예방책이었다. 
  환자가 발생한 집은 병균이 못 나오게 한다고 문을 닫아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때문에 산 채로 불타죽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소용없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쌓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환자를 위로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줄 의무를 지닌 사제, 수도원장 등 성직자들도 죽음의 흑사병을 피해 그 대열에 끼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주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 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유대인 학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이를 염려한 교황 클레멘스 6세가 학살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뭔가 불만해소의 출구를 찾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 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찍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 몸뚱이를 채찍질해 댔다. 이 사이비 종교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흑사병은 도시와 농촌, 신분 계급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아비뇽에서는 추기경의 절반이 쓰러졌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파리 시는 인구 15만 중 5만을 잃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흑사병의 창궐은 유럽 인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린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 장미전쟁 등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겹쳐 서양의 중세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2. 잔 다르크, 오를레앙을 구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9-1453)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48년/'서경별곡' '청산별곡' '가시리' '동동' 등장,
  1359년/홍건적 침입, 1363년/ 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가져옴
  
  1412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시작한 지 73년째 되는 해 프랑스 동부 
동레미라는 마을에서 잔 다르크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몹시 쾌활하고 명랑한 소녀로 자랐다. 
  13살 되던 해 여름, 그녀는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들었다. 이어 천사장 미카엘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지켜라, 잔. 오를레앙을 구하거라.'
  그러나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소녀인 잔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사의 소리는 그후로도 몇차례 들려왔다. 
  '찬, 왜 망설이느냐?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근처에 사는 기사 보르리를 찾아갔다. 그는 왕세자 샤를의 충실한 부하로 알려져 있었다. 
  잔을 만난 보르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게도 머리가 돈 모양이군. 어서 끌고 나가거라.'
  그러나 잔 다르크는 단념하지 않고 매달렸다. 
  '저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제발 왕세자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잔의 간청에 마침내 보르리는 그녀를 왕세자에게로 보냈다. 1429년 봄, 잔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네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데 무슨 증표라도 갖고 있느냐?'
  '제게 군대를 주세요. 그러면 오를레앙에서 승리하여 그 증표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영국군에게 포위왼 오를레앙은 시시각각 죄어오는 포위망 속에서 어렵게 버티며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량은 다 떨어져 사람들은 하루에 검은 빵 한 조각도 입에 넣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굶주림과 피로로 사람들은 쓰러져갔다. 
  그때 신기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소녀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온다.'
  사람들은 의심하면서도 기대에 부풀어 기다렸다. 드디어 잔 다르크가 백마 위에 높이 앉아 한 손에 신의 깃발을 들고 오를레앙 시민 앞에 모습을 드런자 사람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잔 다라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군을 공격해들어갔다. 마침내  승리는 프랑스 군에 돌아가고 오를레앙은 포위된 지 무려 209일 만에 자유롭게 되었다. 
  잔 다르크는 왕세자가 있는 시농성으로 돌아와 빨리 대관식을 올려야 한다고 재촉했다. 1429년 북프랑스의 랭스 대사원에서 대관식이 열리고 왕세자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 즉위하였다. 
  잔 다르크는 이번엔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 영국군 손에 넘어간 파리를 되찾고자 했지만 웬일인지 샤를 7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이 콩피에뉴를 공격해 오자 잔 다르크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그런데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그만 적진 깊숙히 들어간 잔 다르크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국은 그녀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7번의 재판 끝에 잔은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선고받았다. 1431년 5월 30일 루앙시 광장에는 군중이 가득 찼다.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쓰인 모자를 쓰고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 그녀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면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갔다. 열 아홉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년전쟁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간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1339년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나 무려 백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기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전쟁은 시종 영국이 우세했다. 영국군은  커다란 활을 지닌 보병부대와 대포를 동원,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전쟁기간 중 영국과 프랑스는 양쪽 다 왕권이 불안정하여 몇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죽자 영국은 대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이곳만 점령하면 프랑스 전역을 수중에 넣게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바로 이때 기적처럼 등장한 인물이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의 활약과 죽음은 프랑스 인들의 애국심을 드높여주었다. 용기백배한 프랑스 군은 영국군을 차례로 몰아내고 1452년 
보르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백년에 걸친 기나긴 싸움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백년전쟁은 봉건시대의 막을 내리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중세 기사층은 대거 몰락했다. 한편 사람들은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어렴풋하나마 국민감정과 민족의식, 즉 애국심을 갖게 되었다. 잔 다르크는 바로 그 애국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33. 로빈 훗과 농민반란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77년/최무선의 건의로 화약무기 제조 (직지심경)인쇄
  
  로빈 훗은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는 국왕의 사슴을 죽인 죄를 짓고 도망쳐 도적이 된 인물이다. 부패한 귀족과 성직자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그를 사람들은 '의적'이라고 불렀다. 
  로빈 훗의 이야기는 당시 농민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교회 특히 수도원장은 대표적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는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그들은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매우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부역을 강제했다. 
  세금을 걷어가는 것은 영주와 교회뿐이 아니었다. 백년전쟁으로 적자경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왕실 역시 농민에게 인두세를 걷어 그 적자를 메꾸어보려고 했다. 게다가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일손이 크게 부족하게 되자,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해두려고 농민들의 이동을 ?┠?막기에 이르렀다. 
  로빈 훗은 바로 이런 영주들과 부패한 성직자, 말단 관리들을 처벌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벗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일약 가난한 자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이다. 
  1381년 영국에서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 불리는 이 농민반란은 바로 로빈훗이 활약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과중한 인두세와 강제부역으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농민들은 와트 타일러 밑으로 모여들었다. 
  '영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바치는 세금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강제부역을 시키려 한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그렇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힘을 합해 싸우자!'
  농민들은 농노해방, 인두세와 강제부역의 폐지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에 가담한 것은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부패한 사회를 비판하던 진보적 성직자들도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존 볼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베를 짤 때 누가 귀족이고 누가 농민이었는가?'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으로 생활해선 안된다.'
  존 볼의 설교는 농민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었다. 
  반란의 불길은 급속히 번져나가 농민군의 숫자는 10만을 넘어섰고 잉글랜드의 3분의 2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런던으로 가서 국왕에게 우리의 고통을 알리자!'
  농민군은 런던을 점령했다. 그들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약탈행위란 찾아볼 수 없었다. 
  국왕 리처드 2세는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영주로부터 자신들과 자신들의 토지를 해방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농민군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왕은 농민해방 헌장을 발표했다. 목적을  달성한 농민군은 승리의 개가를 울리며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이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귀족들은 왕을 부추켜 와트 타일러를 죽여버리고 나머지 지도자들도 붙잡아 처형시키고 말았다. 
  존 볼 역시 처형되었다. 반항하는 농민군을 귀족들은 무자비하게 진압, 와트 타일러의 농민반란은 끝이 났다. 
  와트 타일러의 난 이외에도 유럽 각지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1323년 플랑드르 지방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은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처음엔 자신들에게 가해진 봉건적 부담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점차 사회제도 전체에 대한 반항의 양상을 띠었으므로 이에 위협을 느낀 영주들은 집단학살로 맞섰다. 
  1358년에는 북프랑스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자크리의  난'이라 알려진 이 반란은 순식간에 프랑스 전체로 번져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나 역시 귀족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가라앉았다. 
  14세기 말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중세 봉건사회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경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아픔의 시기를 겪으며 영주 세력은 점차 쇠퇴해갔고 농민들 중에는 자영농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 독립 자영농은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이었다. 
  

34. 대부호의 후원 받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작(14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88년/이성계 위화되 회군,  1389년/박위 쓰시마 정벌,
  1392년/고려 멸망하고 이성계, 조선 건국. 정몽주 피살
  
  르네상스란 '재생' 또는 '부흥'을 의미하는 프랑스 어이다.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하는데, 사실은 단순한 문예상의 부흥이 아니라 폭넓은 인간의식상의 개혁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꽃피게 된 이면에는 상업의 발달과 그로 인한 막대한 부의 축적이 있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들은 도시의 상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방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동서무역의 중개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에는 동방의 풍부한 물자와 문물이 쉴새없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러자 상인 가운데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피렌체 메디치 가도 그런 경우이다. 
  피렌체는 본래 모직물 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13세기경 피렌체는 봉건귀족 세력을 몰아내고 자치를 달성했다. 그런데 막대한 재력을 기반으로 하여 권력을 쥔 대상인이 시정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모직물 공업조합의 중심인물이자 금융업자인 메디치 집안이다. 메디치 가는 피렌체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로렌초 메디치는 전제군주와도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름난 예술가들과 동로마에서 온 학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고자 모여들었다. 피렌체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비견되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의 번영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것은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인간을 봉건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각자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고,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것이 르네상스의 기본정신이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봉건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음껏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상인세력의 이해관계와 훌륭히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대부호들은 르네상스를 아낌없이 후원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이탈리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 16세기 이후부터는 그 중심지가 북유럽으로 옮겨졌다. 
  르네상스는 뛰어난 예술가와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문학, 미술, 건축, 조각, 철학, 정치사상 등 각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한껏 기량을 발휘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고,미켈란젤로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성베드로 성당에서 99살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 그는 사물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문학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사람은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비롯하며, '켄터베리 이야기'를 쓴 영국의 초서, '돈키호테'를 써서 중세 기사의 몰락을 풍자한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햄릿'으로 유명한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있다. 이들은 라틴어 일색이던 당시에 과감히 모국어로 작품을 써서 국어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철학과 정치사상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적 내용의 글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말한 프랑스의 데카르트, '수상록'을 쓴 몽테뉴 등이 활약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지녀야 할 냉혹하고 비열한 처세술을 피력, 주목을 끌었다. 
  '군주는 인간인 동시에 야수로, 사자인 동시에 여우로 행동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상반될 때는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지킬 수도 없다. 정직은 언제나 불리하다. 반면 자비롭고 청렴하며 인도적이고 신앙이 돈독한 것처럼 보이면 유익하다. 덕망으로 위장하는 것만큼 유익한 일은 없는 것이다. '
  '군주론'의 한 대목이다. 그는 또 '종교란 통치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에게 도의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지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다.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의무이다. '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내분이 그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인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였다. 그들은 중세의 억압된 분위기로부터 해방된,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고대사회를 동경했지만, 사실은  중세사회에 남아있는 고대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르네상스는 고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대를 향해 내디딘 첫발자국이었던 것이다. 
  

35. 백성을 위한 글, 한글 -조선,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19년/세종 즉위, 1441년/측우기 제작, 1447년/'용비어천가' 완성
  
  한 민족의 말과 글은 민족의식의 표현이요 상징이다. 예로부터 정복자는 자신의 말과 글을 강요함으로써 피지배민의 의식과생활 감정을 통제하곤 했다. 어떤 말과 글을 쓰느냐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자신의 글을 갖게 된 것은 1446년 조선 제4대 왕 세종에 의해 한글이 제정, 반포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그러나 우리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외국의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 어에 속한다. 북아시아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을 언어학에서는 우랄 알타이 어라고 부른다. 그중 알타이 족의 일단이 동쪽으로 이주, 한반도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고대의 우리말은 크게 북방 한어, 남방 한어로 나뉜다. 만주와 압록강 일대에 살던 집단이 쓰던 부여어, 함경도 일대의 옥저어, 강원도 일대의 예맥어는 북방 한어에 속하고  경상도 동해안 일대의 진한어, 충청, 전라 일대의 마한어, 낙동강 하류 일대의 변한어는 남방한어에 속한다. 
  북방한어는 고구려의 판도하에서 고구려어로 통일되고, 남방한어는 백제, 신라어로 각각 통일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말이 커다란 차이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7세기 신라에 의해 부분적이나마 한반도가 통일됨으로써 신라어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은 말의 중심을 중부지방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고유의 말은 있지만 그 말을 표기할 문자를 갖고 있지 못했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한자를 빌어다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신라의 학자 설총이 만든 이두나 고려 때 향가를 표기한 향찰은 모두 한자로 우리말을 보다 더 온전히 나타내려는 몸부림이었다. 
  1443년 12월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을 완성했다. 그후 3년 동안 실제 사용여부를 실험한 뒤, 1446년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과 함께 정식으로 반포했다. 
  한글 만들기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인물만을 골라 세종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연구가 진행되었다.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강희안, 박팽년, 이개, 최항, 이현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몽고의 파스파 문자를 비롯하여 여러 외국 문자들을 연구한 끝에 한글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한글은 양반유생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올린 상소를 보자, 그는 반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를 이룬 마당에 새로이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에 부끄럽고, 둘째, 우리말이 중국의 방언으로 인정되는데, 방언으로 하여 따로이 글자를 만든 예가 없습니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장 등이 제 스스로의 글자를 갖고 있으나 이들은 오랑캐니 어찌 오랑캐와 같아지겠습니까? 셋째, 이두는 한자에 어조사만을 더하는 것으로 한문보급의 방편이 되기도 하나, 새 글자를 만들면 한문을 배우는 이가 없어져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넷째, 언문으로 글을 쓰면 옥사가 공평하게 될 것이라 하나 형옥의 공평은 옥리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당시 유생들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철저히 사대적이었다. 
  어쨌든 세종은 반대세력을 누르고 1446년 9월 한글 스물 여덟자를 세상에 발표했다. 해설서 '훈민정음'의 서문을 보자.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용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
  한글은 유생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고 살던 일반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좀더 효율적으로 민중을 다스리려는 통치술의 일환으로서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글이 완전히 일반민중에게 보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글은 언문,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여 몹시 천대를 받았다.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본과 서구열강의 침입을 받으며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부터이다. 
  

36. 활판 인쇄술과 비행기 -구텐베르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5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56년/세조, 성삼문 등 사육신 처형
  
  15세기는 발명의 시대였다.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 인류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동차부터 헬리콥터, 비행기에 이르는 다종 다양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일일이 손으로 써서  책을 만들었다. 이런 방법은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많이들고 잘못 옮겨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인쇄술이다. 초기의 인쇄술은 석판인쇄와 목판인쇄였다.
  독일 사람 구텐베르크는 어떻게 하면 좀더 편리하고 빨리 많은 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했다. 1450년경 마침내 그는 활판 인쇄술을 개발해냈다. 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우선 프레스라는 기계를 사용하여 선명하면서도 대량인쇄를 개발해냈다. 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획시적인 방법이었다. 
  우선 프레스라는 기계를 사용하여 선명하면서도 대량인쇄를 가능케 했다. 본디 프레스는 술을 만드는 데 쓰이는 기계였는데, 구텐베르크가 이를 응용하여 인쇄기계로 고안해낸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 인쇄술을 프레스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다음으로는 합금으로 모형을 떠서 활자를 주조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활자라는 말 그대로 한 자씩 떼어내어 몇번이고 판을 짤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인쇄용 유성 잉크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판인쇄술은 나침반, 화약과 함께 르네상스 3대 발명품으로 손꼽힌다.구텐베르크가 새로운 기술로 맨처음 찍어낸 책은 (성서)였다. 라틴어로 씌어 있는 이 책은 42행 2단으로 조판되었기 때문에 (42행성서)라고도 불렸다. 그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47권이다.
  15세기경 독일에는 200명 가량의 인쇄업자가 있었으며, 이탈리아에는 인쇄공장을 둔 도시가 무려 77개에 달했다. 이처럼 그의 활판인쇄술은 곧 유렵 각지로 전해졌으며, 최근까지 그대로 전해내려왔다. 그가 발명한 기계는 이후 180년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데 쓰이는 합금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다.
  1452년은 '인류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난 해이다. 그는 그림, 조각, 토목, 건축, 수학, 음악, 과학 모든 분야를 섭렵, 예술가인 동시에 과학자, 사상가였던 '만능인'이었다.
  과학 분야에서 그가 고안해낸 것들을 보면 자동차, 하늘을 나느 배를 비롯하여, 비행기, 헬리콥터, 대포, 전차 등 실로 그 풍부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쉴새없이 실험을 하고 사물의 원리를 탐구했다. 그는 인체에 혈액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인체 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인체의 구조의 신비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지저분한 습관과 편협한 판단을 지닌 저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지극히 완벽하고 치밀한 해부학적 구조를 가질 가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먹고 배설하는 자루일 뿐이다. 영양물의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모나 리자)등 그가 남긴 걸작품은 바로 이 같은 과학적 연구 결과가 예술로 승화된 것들이었다.
  한편 그는 비행기를 만들어 공중비행을 시도했다.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으나 그 수준은 상당한 정도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연구하고 실험했을 뿐 제자가 없었기 때문데 그의 연구는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연구업적을 이어받았더라면 비행기의 발명은 몇백 년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어 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기술이 발명해낸 문명의 이기들이 이미 그의 기록에 나와 있음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기록은 오늘날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자연은 그대가 세계 도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가만히 지켜 보고 있다'
  이 위대한 인간은 1519년 6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37.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149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93년/(악학궤범)완성
  
   오늘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5세기 사람들에게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는 편편한 대지이고 먼 바다에는 무서운 악마가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면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어 그 아래 지옥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같은 통념을 부인하며 '지구는  둥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인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황금으로 가득 찬 꿈의 나라였다. 웬만한 모험가라면 누구나 인도에 가서 일확천금을 하고 싶어했다. 이슬람 교도인 오스만 투르크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탓에 동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무역상들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었다.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가려는 결심을 하고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갔다. 항해에는 많은 돈이 들므로 후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에스파냐는 신황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다. 동방무역이 가져다줄 엄청난 부를 먼저 얻기 위해 양국은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포르투갈은 동쪽 항로를 택했고 에스파냐는 서쪽 항로를 택했다.
   1486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최초로 아프리카의 남쪽 끝까지 항해, 이곳에 희망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편 1492년 8월 3일, 이사벨라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3척의 배를 이끌고 에스파냐 남부의 팔로스 항을 떠났다.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을 격려했다.
   에스파냐를 출발한 지 69일, 드디어 콜럼버스 일행은 육지에 닿았다. 그는 기쁨에 못 이겨 그곳을 
산살바도르(성스런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 연해의 한 섬이었다. 오늘날 이 일대를 서인도제도라 부르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하는 것은 콜럼버스의 이 착각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인도에 왔다고 굳게 믿은 콜럼버스는 7명의 원주민을 데리고 에스파냐로 귀환했다. 그는 자신이 본 인도를 여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수많은 종류의 과실이 열린 평원과 넓은 벌판, 주민들은 애정이 풍부하고 욕심이 없습니다'
   다음해 콜럼버스는 다시 인도로 떠났다. 이번엔 17척의 배와 1,500명의 선원과 함께였다. 섬에 도착한 그는 요새를 쌓고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그에게 면화를 바치고 금광채굴에 강제로 동원되어 죽도록 일해야 했다. 3년에 걸친 정복지 사업의 결과, 원주민의 3분의 1이 죽거나 에스파냐에 노예로 팔려갔다.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도 서둘러 인도로 항했다. 포르투갈 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신항로를 두고 양국의 대립은 점차 치열해졌다. 그러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대서양의 아조레스 군도 서쪽 480킬로미터의 위치에 남북으로 선을 긋고 포르투갈은 동쪽을, 에스파냐는 서쪽을 각각 지배하라고 나누어준 것이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일부를,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전부를 손에 넣고 맘껏 식민지 무역에 열중하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498년과 1502년 두 번 더 서인도제도로 건너가 오늘날의 온두라스와 베네수엘라 지방까지 탐험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때까지 이곳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후 이탈리아의 
피렌체 사람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곳이 인도가 아니고 전혀 미지의 새 땅임을 밝혀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의 이름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38.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독일, 종교개혁과 농민전쟁(15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510년/삼포왜란
  
  16세기 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시기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전쟁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그가 95개조의 반박문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면죄부란, 이것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증표인데, 사실은 성베드로 사원을 지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짜낸 묘안이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는 교회 벽에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맹령히 비판했다.
  '....제6조, 교황은 신이 용서한 바를 선언하고 확증하는 외에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 제27조, 그들은 돈궤 속에 던진 돈의 소리로 영혼이 천당에 간다고 설교한다. 제37조, 참다운 기독교인은 교회의 축복을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사면장 없이 신이 그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의 반박문은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4주일 만에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알려졌다.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 교황과 성직자의 부패, 타락을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이 파문을 경고했지만 루터는 교황이 보낸 칙서를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1521년 마침내 그는 파문을 당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 역시 그를 국법의 보호 밖에 둔다는 선고를 내렸다.
  루터는 황제의 경쟁자인 작센 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숨어지내야 했다. 이때 루터는 라틴어로 쓰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이듬해 출간했다. 이제껏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민중에게 널리 읽히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앙의 근거는 (성서)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루터의 소개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된 그는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와 결별한 뮌처는 아르슈테트로 가 설교에 힘썼다. 군주, 지배자, 부자를 비판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농민과 광부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1523년 뮌처는 튀빙겐에 정착, 다음해 그곳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 선두에 섰다. 1525년 튀빙겐에서 시작된 농민전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농민군의 요구사항은 총 12개 조항이었다.
  '제1조 민주적인 교회 운영, 제2조 십일조 거부, 제3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농노제 폐지, 제4조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 제5조 자유로운 벌목, 제6조 세금 증대 거부,  제7조 부역 증대 거부, 제8조 토지세의 적절한 징수, 제9조 영주 마음대로 하는 처벌 금지, 제12조 이러한  조항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허가'
  그러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정신적 왕국을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인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응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농민전쟁은 1525년 가을 진압되었다. 루터는 특히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으므로 이에 힘을 얻은 봉건귀족들은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진압했다.
  '반도들은 유해유독하며 악마의 화신이란 점에서 그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대들은 농민 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개를 때려잡듯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면 그대의 토지를 모두 뺏어갈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귀족들에게 호소했다.
  농민들은 이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뮌처가 지도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뮌처도 1525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최후까지 저항한 일단의 사람들 역시 1535년 뮌스터에서 전멸당하고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실현해보려던 또 하나의 종교운동은 막을 내렸다.
  한편 농민의 지지를 잃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봉건제후와 도시민의 지원하에 계속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대타협을 이룸으로써 공인되었다. 이로써 카톨릭이 아닌 루터교가 성립,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루터교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 부르고 카톨릭은 구교라 부르게 되었다.
  

39. 생존자는 단 18명 -마젤란 일행, 세계일주 성공(1519-1522)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19년/을유사화로 조광조 처형됨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27명의 선원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했다. 그는 포르투갈 인이었지만 에스파냐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항해목표는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가려는 노력은 다시금 전개되고 있었다.
  3개월이 지난 12월 13일, 일행은 남아메리카 지금의 
리오데지네이로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이들이 떠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520년 4월 2일에는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5월에는 산디아고 호가 난파를 당했다. 게다가 11월에는 성 안토니오 호가 도망을 치고 말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 일행은 11월 28일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에 도착했다. 대륙과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무사히 건넌 이들은 이 
해협에 (마젤란)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제 그들 앞에 놓여진 것은 처음 보는 커다란 바다였다. 대서양에 비해 너무도 잔잔한 이 바다를 보고 마젤란은 
'태평양'이라 명명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직접 눈으로 본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북서진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항해였다. 보이는 것은 천지에 가득 찬 물뿐 어디에도 육지는 없었다. 식량은 다 떨어지고 괴혈병이 돌아 선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이듬해 3월 일행은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망망 대해를 떠돌아 다닌 지 무려 4개월 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마리아나 군도였다. 4월, 필리핀에 도착한 이들은 원주민에게 식량제공과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했다. 만일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처음엔 친절히 이들을 맞이했던 원주민들은 이들이 너무 거칠게 나오자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포와 화승총의 위력을 보여주자.'
  원주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지리를 십분 이용한 전술로 마젤란 일행을 공격해왔다. 전투는 원주민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마젤란은 이 전투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눠타고 급히 도망쳤다. 
  두 척의 배는 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들이 찾고 있던 것은 향료가 나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휘자를 잃은 이들은 해적으로 돌변, 중국 무역선을 공격하여 향료를 비롯 값진 물건들을 몽땅 빼앗았다. 
  1522년 9월 6일 에스파냐의 세빌랴에 낡은 배 한 척이 도착했다. 이름은 빅토리아호, 3년 전 마젤란이 인솔하여 떠났던 5척의 배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아프리카를 도는 머나먼 항해 끝에 마침내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277명의 승무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단 18명, 그러나 이들이 싣고 온 향료는 워낙 값이 비싸 항해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마젤란 일행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유럽 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새 항로의 발견은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와 에스파냐는 유럽의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금과 은이 유럽 전역으로 유출되어 물가가 폭등, 이른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봉건 영주나, 농민, 임금 생활자들의 생활은 어려워진 반면, 상공업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상공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국왕은 상공업을 보호 장려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 나섰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그 선두주자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나타났고 이어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말라카즈 군도에 이르렀다. 말라카즈 군도는 향료의 집산지로서 말라카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511년 말라카즈를 점령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향료와 동방산물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뜻밖에 아메리카를 발견, 막대한 이득을 취한 다음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1565년 필리핀 제도를 점령한 뒤 역시 말라카즈 군도에 도착했다. 
  유럽의 해외무역은 약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럽은 막대한 이익을 취한 반면 아시아와 아메리카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파괴당했다. 신항로는 세계를 하나로 잇는 데 기여한 바 컸으나, 그 주도권이 유럽 인에게 있었으므로 세계역사는 당분간 유럽 인에 의해 주도되기에 이르렀다. 
  

40. 잉카 제국의 멸망 -에스파냐의 피사로, 잉카 정복(153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27년/'훈몽자회' 편찬
  
  1531년 에스파냐 인 피사로는 186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잉카 제국에 도착했다. 
  그는 제국에 일격을 가하고 황제를 체포, 감금해버렸다. 그리고 우상숭배, 근친결혼, 일부다처를 했다는 죄명으로 황제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잉카 인들은 화형당하면 영혼이 사멸한다고 믿고 있으므로, 황제는 피사로에게 간청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수형을 당했다.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1533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에스파냐의 코르테즈가 멕시코의 아즈테크를 정복했다. 그의 정복활동은 1519년에 시작되어 1521년 끝이 났다. 코르테즈와 피사로가 이처럼 쉽게 정복에 성공한 것은 총과 기마술 덕분이었다. 특히 총의 위력은 대단해서 원주민들은 불을 뿜는 총구 아래 힘없이 쓰러져갔다. 
  기원전 8천년경 아메리카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각각 독자적인 고대문명을 발달시켰듯이 아메리카에서도 독특한 문명이 일어났다.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고원의 
마야 문명,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잉카 문명이 그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몽고족이다. 몽고족의 일파가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들어갔으며, 차츰 남쪽으로 내려가 남아메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살게 된 것이다.
  6세기경 중앙 아메리카의 
유카탄 반도에 마야 제국이 세워졌다. 주인공은 마야 족, 이들은 화려한 궁전과 장대한 규모의 신전을 짓고, 토기와 금, 음, 동으로 된 세공품을 만들어 썼다. 복잡한 문양으로 건물을 장식하고 조각에도 능했다. 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고 달력을 만들어 농사에 활용했다. 마야 문명의 수준은 오리엔트 문명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으며, 10세기경까지 번영을 구가했다. 
  마야 족의 뒤를 이어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톨테크 족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계곡에 살면서 마야 문명을 흡수하여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톨테크 문명을 발전시켰다. 
  톨테크 문명이 쇠한 뒤 마야 문명과 톨테크 문명을 융합 발전시킨 것이 
아즈테크 문명이다. 아즈테크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신전을 짓고 태양신을 비롯, 농사와 관계깊은 비, 바람, 대지의 신과 조상신, 씨족신을 섬겼다. 농사는 옥수수가 주종이었으며, 각종 직물과 염색기술이 발달했다. 
  아즈테크 문명은 13세기에 시작되어 1521년 코르테즈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코르테즈가 당시 아즈테크의 인구는 약 5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잉카 제국의 문명은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 지금의 페루에서 일어났다. 피사로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잉카 문명의 수준은 유럽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완벽한 관개시설을 갖추어 고원지대인데도 대규모 농사를 지었으며, 토목기술이 발달, 곳곳에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다. 석조 건축술은 정교하고 건물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놓은 화려한 빛깔의 직물이 만들어졌으며 토기와 금, 은, 동기들이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술이 발달하여 뇌수술도 해냈다. 그러나 문자는 발명되지 않았고, 실의 색과 매듭에 의해 뜻을 나타내는 퀴푸를 사용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의 찬란한 문명도 피사로의 총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손에 넣은 에스파냐는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식민지 개발은 원주민에게는 하루아침에 살던 땅에서 쫓겨나 백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인의 우수한 무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식민지로 이주해온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나누어 갖고 원주민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또 광산개발에 나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원주민들은 가혹한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러자 에스파냐 국왕은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도록 하는 한편, 원주민을 보호하고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제가 성행했으며, 아울러 노예무역이 커다란 돈벌이로 등장하게 되었다. 
  

41. 근대과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154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43년/최초의 서원 백운동 서원 준공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폴란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은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자구와 다른 별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학설이었다. 이를 
(지동설)이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도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로 대표되는데, 교회와 카톨릭 신앙이 이 천동설을 확고히 떠받치고 있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품는 자는 성서를 위배한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태어났다. 그는 수학자로 출발, 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깊이 연구한 끝에 그 학설이 엉터리라고 깨달았다. 천동설은 별들의 움직임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지동설을 확신했지만 세상에 발설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그의 저서도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되었다.
   사실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중세에 이르러서도 소수의 학자들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했다.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다. 이들은 그럼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학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명성과 교회의 권위에가려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안쪽에서부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각각 원을 그러면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건 거룩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바로 그 같은 혁명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런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평생 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의 생애를 보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154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도미니크 회에 가입, 수도사가 되었으나, 왕성한 지적 욕구로 당대의 온갖 지식과  과학적 성과를 섭렵한 끝에 수도원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후 제네바, 파리, 옥스포드, 마르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떠돌며 강의와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단적인 이론은 선뜻 환영받지 못했고, 덕분에 그는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다.
   때마침 어떤 베니스 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오랜 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초청한 사람이 바로 그를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브루노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1600년 2월 17일 로마의 광장에 장작더미가 쌓이고 한 남자가 결박당한 채 세워졌다. 마침내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남자는 한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 십자가를 건네주자, 그는 말없이 뿌리쳐버렸다. 이것이 부르노의 최후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라는  종교재판소의 요구에 불응하고 7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화형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그의 사상이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우주는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의 체계로 충만된 무한의 경지이며, 우주는 한계도 중심도 없이 오직 운동을 계속할 뿐이라고 했다.
   이는 우주를 유한한 것이라고 본 코페르니쿠스를 한 걸음 앞지르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신은 곧 자연이었다. 교황청은 그의 사상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겨 그를 화형에 처하고 만 것이다.
   또 한 사람,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철저히 연구한 사람이다. 1600년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인 덴마크의 티코 브라에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티코 브라에가 죽은 뒤 브라에의 계승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를 존경한 그는 연구와 관찰을 거듭한 끝에 천체의 운동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유명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이다. 
   
첫째,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타원궤도를 그리며 돈다.  둘째,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속도는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각각 다르다. 케플러는 이 두 가지 원칙을 1609년에 발표했고 10년 만인 1619년 세번째 법칙을 발표했다. 즉, 임의의 두 행성간의 거리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지동설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지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케플러는 근대과학의 새 지평을 활짝 연 사람들이었다.
  

42.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 진자 등시성을 발견(158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538년/당쟁 격화됨
  
  1583년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장에 매단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즉시 실험에 매달렸다.
   얼마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추 무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계없이 추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같다'는 사실이다. 이를 물리학에선 
'진자의 등시성'이라고 한다. 갈릴레이의 나이 18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지 꼭 40년 만의 일이었다.
   갈릴레이는 1564년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수도원에 딸린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깊은 회의와 연관이 있다.
   3년 후 학교를 중퇴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갔다가, 몇 년 뒤 다시 피사로 돌아와 피사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는 자연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 '진자 등시성'을 발견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09년 그는 플랑드르 지방에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까이 보이게 하는 쌍안경이란 기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갈릴레이는 실물을 보지도 않고 즉시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완성된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목성의 주위를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잇다는 것, 은하수는 무수한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 달에 잇는 산맥, 그리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해냈다. 그의 나이 45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단박에 유명해졌다. 여러 학자들이 그의 관찰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동설을 고수하고 있던 교황청은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고 이교도적이라 하여 경고를 했다.
   1623년 그의 옛 친구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되었다. 갈릴레이는 안심하고 연구를 계속했다.
   1632년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아  (두 개의 주요한 우주체계의 대화)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그럴 듯한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33년 6월, 가릴레이는 마침내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재판관들은 그에게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죄와 오류를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브루노처럼 담대한 인물은 못 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가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그후 갈릴레이는 얼마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다가 1642년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과학적 연구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진정한 과학은 관찰, 실험, 그리고 수학의 결합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망원경으로 직접 보지 않고 책상 앞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또 카톨릭 교회가 정통으로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도전, 관성의 법칙을 발견해냈다. 그가 발견한 여러 법칙들은 뉴턴에게 전해져 근대 물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43. 영국과 에스파냐의 해상결전 -영국,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158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87년/왜구 전라도 침범, 1589년/정여립 사건
  
  16세기 말 해상무역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에스파냐 사이에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대식민지를 수중에 넣고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국왕 펠리페 2세는 1571년 지중해 무역을 방해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를 레판토 해전에서 물리쳐 유럽으로부터 영원히 몰아냈다. 에스파냐의 강력한 해군에게는 
'무적함대'란 별명이 붙여졌다. 
  에스파냐는 나아가 1580년엔 포르투갈을 통합, 그 광대한 식민지까지 손에 넣음으로써 명실공히 유러 최고의 부자나라요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한편 영국의 헨리 8세와 비운의 왕비 앤 볼린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국력을 키웠다. 
  에스파냐와 영국의 대립은 해묵은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 메리 여왕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 카톨릭을 옹호하고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녀가 얼마 후 병으로 죽자, 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과 달리 카톨릭을 억압하고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영국 국교회를 장려하는 한편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두 번째 문제는 해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다를 누비며 에스파냐 상선을 공격, 상품과 금은 보화를 빼앗아 왕실에 바치는 영국 해적을 은근히 지원하고 있었다. 해적선장 드레이크는 유능한 인물로서 여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드레이크의 활약으로 영국 왕실에는 금이 쌓였고 에스파냐는 큰 타격을 입었다. 화가 난 펠리페 2세가 드레이크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해오자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드레이크를  기사로 임명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특정 국가의 배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이른바 특허장을 주어, 드레이크의 활약을 지지했다. 
  
마지막 문제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네덜란드를 모직물 공업의 주요 수출지로 삼고 있던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어 펠리페 2세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에게 결혼을 신청함으로써 영국을 손안에 넣어보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펠리페 2세는 이번엔 영국 내에 있는 카톨릭 교도들을 이용했다. 불만세력으로 남아 있는 이들을 부추겨 엘리자베스를 내쫓고 사촌인 메리 스튜어트를 왕으로 세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시켜버렸다. 1587년의 일이다. 
  화가 치민 펠리페 2세는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130척에 달하는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함대를 편성, 영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싸움은 의외로 영국의  승리였다. 에스파냐의 커다란 배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좁다란 해협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작은 배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무적함대를 공략했다. 배에 불을 질러 그대로 에스파냐 함대에 돌진하는 기습작전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함대의 3분의 2를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유럽 최강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후 에스파냐의 해상권은 영원히 사라졌고 영국은 유럽의 새 별로 떠올랐다. 
  그후 영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 경영에 나섰고, 북아메리카에 식민도시를 개척, 대규모 식민지 무역을 시작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여왕을 기리는 뜻에서 
버지니아, 즉 '처녀의 도시'라고 명명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국민문화가 발달하여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이 활약했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로부터 '굿 퀸 베스'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러나 1603년 그녀가 후사 없이 죽자 
튜더 왕조는 끝나고 제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44.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영국, 인클로저 운동(16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92년/임진왜란 발발 한산도 대첩, 1593년/행주대첩,
  1598년/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 임진왜란 끝남
  
  '양이 인간을 잡아 먹는다. '
  
토마스 모어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당대의 학자 휴 라티머가 한 말이다. 
  이는 모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내몬
인클로저 운동에 대한 비난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농경지를 목장으로 만들기'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목장이 된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타인의 출입을 억제했기 때문에 인클로저란 이름이 붙었다. 
  인클로저 운동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는 중세 장원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주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영국 사회는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된 원인은 해외 식민지 무역의 확대와 그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었다. 도시는 더욱 번창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1540년 6만 명에 불과했던 런던 인구는 1640년 30만 명, 1750년에는 70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모직물 공업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본래는 양모를 그대로 수출했으나 14세기 중엽부터는 양모를 가공, 모직물을 짜서 이것을 유럽 각지에 수출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모직물 공업이 특히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왕조 시기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산업'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치있는 제조업'인 모직물 공업을 위해 각별한 보호정책을 썼다. 
  그러자 봉건영주, 귀족 등 토지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온 농사를 그만두고 목장을 만들어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목장은 농사보다 노동력이 덜 들고 이익도 많아 훨씬 유리한 산업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목양업에 뛰어들었다. 농경지는 물론 황무지, 공동 경작지까지 판자로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그런데 인클로저는 그 땅을 경작하던 농민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강제로 또는 폭력과 함께 진행된 것이었다. 비록 자기 땅은 아니지만 오랜 관습에 의해 대대로 농사짓고 살던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농민의 생활터전이던 농토는 양들이 사는 푸른 목초지로 변해갔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이 갈 곳 없이 떠돌고 촌락이 파괴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왕은 인클로저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법을 집행하는 당국자가 바로 인클로저에 열심인 토지 소유자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1622년 인클로저 금지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농민들은 반발했다. 1636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은총의 순례'라든가 '케트의 반란' 같은 농민운동은 기실 인클로저를 막으려는 농민들의 몸부림이었다. 
  인클로저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젠트리라 불리는 소지주들과 요먼이라 불리는 자영농, 그중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봉건 귀족처럼 봉건적 신분관계나 농경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과감히 개조,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새로운 유력자로 성장하여 나중에는 의회에 진출했다. 
  한편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 광범한 임금 노동자층의 값싼 노동력 덕택에 가능했다. 
  

45. 자유의 땅을 찾아서 -메이플라워 호, 북아메리카에 도착(162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07년/허균 '홍길동전' 지음,  1613년/허준 '동의보감' 간행,
  1614년/이수광 '지봉유설' 간행,  1627년/정묘호란 발발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 즉 청교도였다. 청교도란 신교중에서도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엄격한 교리와 금욕, 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중이었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지지하면서 신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의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신교도, 특히 퓨리턴들은 이에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메이플라워의 아메리카 행은 제임스 1세 하의 정치상황이 낳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청교도들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청교도의 시조는 
칼뱅이다. 그는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률공부를 하다가 1533년경 카톨릭을 버리고 신교로 개종했다. 카톨릭의 아성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간 칼뱅은 '기독교 요강'이란 책을 발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고전이 되었다. 
  그의 고민은 하나님의 '선택'과 '방관'에 대해서였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이 바로 
'예정설'이다. 즉 무수한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자를 구원하고 어떤 자를 그대로 둘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구원의 대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구원받으리라는 자기확신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자기확신을 갖는 방법은 절제와 금욕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근검절약하며 방종타락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유일한 자기확신의 길이다.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한 삶을 주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방관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경건해지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경건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칼뱅의 사상, 특히 자신의 직업을 신이 내린 '소명'이요 '천직'으로 알라는 직업관, 그리고 이윤추구를 정당한 것으로 보는 윤리 의식은 한창 부상중이던 신흥 상공업자들에게 복음처럼 생각되었다.
  자연히 신흥 상공업자, 신흥 지주들이 칼뱅 사상의 지지자가 되어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의회에 진출해 있었으며 또 법률가나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엄격한 교리, 절제된 생활, 부지런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태도 때문에 이들은 퓨리턴, 즉 청교도라고 불리어졌다.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생활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그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 
'메이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 '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헌법제도의 맹아가 되었다. 
  신앙과 생활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로 건너오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최초의 이주자들에 의해 
매사추세츠 주가 개척되고, 1732년이 되자 뉴 잉글랜드를 비롯,  13개 주의 식민지가 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건설되었다. 
  개척민들은 영국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투철한 직업관을 갖고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물론 그를 뒷받침해준 것은 청교도 신앙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그의 대표작에서 근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정신적 동력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의 사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청교도 교리가 새로운 부유층인 상공업자, 신흥 지주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지주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 이들을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라고 부른다. 이 
'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46. 처형당한 왕 -영국 청교도 혁명 발발(164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31년/정두원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가져옴,
  1636년/병자호란 발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가 독신을 고집한 것은 마땅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영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죽기 이틀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이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었다. 
  '짐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자로 짐의 사촌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유언대로 스코틀랜드 왕인 사촌 제임스가 영국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한 나라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 유명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598년 '자유군주제의 진정한 법'이란 글을 익명으로 발표했었는데, 여기서도 신성한 왕권을 주장하고 있다.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국왕은 곧 법이다.'
  의회는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본래부터 영국 의회는 국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영국 의회의 발달사는 곧 의회와 왕권간의 대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국내 사정에 어두웠으므로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의회의 자유와 권한은 이론의 여지없이 영국 신민이 옛날부터 상속받은 재산이다. 국왕, 국가, 국토방위, 교회에 관한 곤란하고 긴급한 사항들은 마땅히 의회가 토론해야 할 의제들이다. '
  이와 같은 의회의 주장에 격분한 제임스1세는 그 내용을 실은 의사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의원 7명을 체포했다. 
  한편 제임스 1세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이를 해결코자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런 정책은 신흥 자본가들의 불만을 높였으며, 신흥 자본가들을 대표하고 있던 하원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들 신흥 자본가들은 종교적으로는 대부분 청교도들이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의회를 무시하는 정치를 폈다. 그는 황태자 시절 에스파냐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왕이 되자 에스파냐와의 일전을 계획, 전쟁에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그의 제안을 번번이 부결시켰고 화가 난 찰스 1세는 두번이나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1628년 3월 찰스 1세는 제3차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가 열리자, 법률가 출신의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는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의회는 이를 기꺼이 승인했다. 이것이 유명한 '권리청원'이다. 찰스 1세는 6월 청원서를 재가하고 그 대신 필요한 돈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이후 11년간 그는 의회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영국을 다스렸다. 
  그런데 1639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찰스 1세는 진압비용을 얻기 위해 다음해 의회를 소집했다. 11년 만에  열린 의회는 왕을 신랄히 비난했다. 찰스는 또 의회해산을 단행했다. 
  반란군은 이미 영국 북부까지 진출, 신앙의 자유와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찰스 1세는 할 수 없이 그해 11월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경비조달을 승인하기는커녕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왕의 측근자들을 체포, 사형에 처했으며, 왕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에 한 번씩 의회가 열리도록 하는 3년 회기법, 의회의 승인 없이는 마음대로 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분노한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의회측도 군대를 모아 대항했다. 이리하여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8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처음엔 왕당파가 우세했다. 왕당파는 구귀족, 성직자, 독점 상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의회파는 자영농, 신흥 상공업자, 신흥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이다.  그는 1599년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중류 지주 출신인 그는 매우 독실한 청교도였으며 큰 키에 당당한 체구, 빛나는 눈빛을 가진 논리정연한 인물이었다. 
  그는 철기군을 이끌고 1645년 6월 네이즈 전투에서 왕당파를 격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를 부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철기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1646년 6월 왕당파의 근거지인 옥스포드가 점령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찰스 1세를 영국 의회에 넘겨주고 말았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마침내 처형되고  말았다.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의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 즉 청교도였기 때문이다. 
  

47. 짐이 곧 국가이다. -프랑스, 루이 14세 즉위(164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45년/소현세자, 청에서 과학, 카톨릭 교 관련 서양서적 수입,
  1653년/ 하멜, 제주도 표착
  
  1661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확대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 정원사가 총동원된 대공사가 2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완성된 궁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유럽 어느 나라의 궁전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1682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 제후들도 이곳에 와 살면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천명이 넘는 고위성직자들, 그 시종까지 합하여 도합 5천 명 이상이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들었다. 
  회의, 미사, 오찬, 산보와 사냥, 다시 회의, 야회, 만찬 취침-이것이 왕 이하 귀족들의 하루 일과였다. 취침은 보통 새벽 한 시였다. 귀족들은 왕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다 하였다. 왕에게 셔츠를 건네준다든지 촛불을 건네주는 일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이는 루이 14세의 교묘한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그는 칼로 귀족세력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귀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치와 낭비에 젖도록 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는 일부러 복잡한 의식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귀족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고, 쉴새없이 연회, 무도회, 축제, 연극공연 따위를 벌이게 했다. 귀족들은 점점 가난해져 갔고 그럴수록 더욱 비굴해 졌다. 
  베르사유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귀족에 대해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 모르네'
  '난 그런 사람 본 적 없네.'
  귀족뿐 아니라 후원자가 필요한 예술가들도 베르사유로 몰려들었다. 루이 14세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학술기관을 설립하여 문학, 과학, 조각, 건축, 음악, 회화를 연구케 했다.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 르네상스 3대 희곡작가가 여기서 배출되고,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이라는 새로운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베르사유는 일약 유럽 최고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 어는 유럽 공통의 사교어였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소우주였다. 그는 이곳에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며 
'태양왕'이라 자처했다. 
  루이 14세는 
1643년 5살도 채 못된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상 마자랭의 섭정을 받던 그는 1661년 마자랭이 죽자 친정을 선언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재상으로 임명,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식민지 확장에 주력하는 이른바 중상주의 정책을 폈으며, 에스파냐의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손자를 에스파냐 왕위에 앉혔다. 
  한편 신교도를 억압하여 많은 신교도가 국외로 빠져나갔다. 때문에 상공업이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는 절대군주의 대명사였고, 화려, 사치, 권력, 명예의 상징이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국왕의 절대적 권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찬란함은 일반민중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베르사유에서 만찬과 연회에 젖어 있는 동안 민중들은 굶주리다 죽어갔다. 당시의 한 기록을 보자. 
  '보베 지방에 코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가족이 있었다. 직조공인장 코퀴는 방직공으로서 그의 일을 돕는 아내와 세 딸-막내는 9살-을 두었다. 다섯 식구가 주당 7파운드의 빵을 소비하는데, 빵값이 파운드당 반 솔Sol일 때는 특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서 빵값이 급등했다. 
  1693년 흉년에다 일자리도 없었다. 이 두 가지 위기는 보통 겹치게 마련이다. 빵값은 처음엔 파운드당 1솔, 다음엔 2솔, 그 다음엔 3솔 이상으로 올랐다. 약간의 저축을 완전히 바닥낸 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저당잡혔다. 그 다음엔 건강에 해로운 음식과 곰팡이 슨 곡류, 동물의 창자, 쐐기풀을 요리해 먹었다. 영양실조와 조악한 식품으로 인한 질병으로 그들은 쓰러져갔다. 
  1693년 12월 그들은 구빈원에 등록되었다. 1694년 3월 막내딸이 사망하고 이어서 맏딸과 장 코퀴가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빵값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수확의 상당분을 영주에게 바치고, 십일조를 교회에, 세금을 왕의 관리에게 각각 바쳐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지만 농가는 결코 대가족이 아니었다. 사산과 유아 사망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사산이나 유아 사망은 너무 다반사여서 '천후나 폭풍우, 말의 죽음보다도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당시의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25살 정도, 100명의 어린이 중 4분의 1이 1살 전에 죽고 또 4분의 1이 20살 전에 죽었다. 마을 주민 100명 가운데 10내지 15명이 흑사병, 외국군대의 약탈, 흉작 등으로 죽어갔다. 
  이것이 루이 태양와 시대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48. 조선소 노동자로 일한 황제 -러시아, 표트르 1세 즉위 (168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678년/상평통보 주조,  1682년/금위영 설치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계몽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매우 급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표트르 1세는 1672년 태어났다. 바로 전해, 유명한 농민반란의 지도자 
스텐카 라진이 체포, 처형되었다. 그가 이끈 반란은 수년간 온 러시아를 뒤흔들었다. 
  표트르는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왕 알렉시스의 아들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알렉시스가 죽자 이복형제인 표도르 3세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표도르가 후사 없이 일찍 사망해, 왕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표도르의 동생 
이반 5세와 표트르가 이반의 누이 소피아의 섭정 아래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 1682년의 일이다. 
  1689년 표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그녀의 측근들을 처형한 다음 정권을 쥐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정사를 맡기고 공부에 몰두하다가 1694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비로소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697년 러시아는 25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다. 표트르 1세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의 목적은 서구의 발달된 군사기술, 특히 조선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인도회사 조선소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 일을 했다. 그런 다음 런던으로 가서 조선기술의 이론과 제도법을 공부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지식욕, 특히 기계공학에 관한 호기심은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병원, 목공소, 해군시설 등등 어디든지 관심있게 관찰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란을 진압한 표트르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삼아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궁정귀족들의 수염을 직접 잘라버린 다음, 수염을 기르는 자에게는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 동양풍의 긴 옷을 서양식으로 바꾸게 하고, 귀부인들은 무도회에서 유럽의 사교계 여인들처럼 가슴이 패인 드레스를 입도록 했다. 
  러시아 인들은 13세기 이후 200여 년간 몽고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표트르는 후진국 러시아를 부강케 하는 길은 몽고의 잔재를 완전히 떨어버리고 유럽화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 아래 탄탄한 육군과 해군의 양성, 서유럽과 러시아를 이어줄 항구 개척, 이 두 가지를 숙원 사업으로 삼았다. 
  1700년 마침내 표트르 1세는 발트 해로 진출했다. '서방으로의 창'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발트 해는 강대국 스웨덴의 활동무대였다. 러시아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북방전쟁'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1700년 11월 말 나르바 전투에서 4만 명의 러시아 군은 스웨덴의 찰스 12세가 이끄는 8천 명의 정예부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표트르 1세는 일단 후퇴해서 전세를 가다듬기로 했다. 그후 해군을 창설하고 21만의 육군을 키웠으며 군수물자 생산공장과 도로, 운하를 건설했다. 당시 군사비는 국가재정의 무려  3분의 2를 차지했다. 
  그러는 한편, 네바 강 하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의 이름은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인 
페테르스부르크로서, 나중에 레닌그라드로 불리었다. 
  신도시 건설에는 막대한 돈과 수천 명의 생명이 바쳐졌다. 동원된 사람들은 홍수와 열병으로 쓰러져갔고, 때로는 이리 떼에게 잡혀먹히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비꼬아 혹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신도시의 위치는 '한쪽은 바다, 한쪽은 슬픔, 한쪽은 소택지, 한쪽은 한숨'이라고.
  새 도시가 완성되자 표트르 1세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겼다. 이는 서구화 정책의 강력한 표현이었다. 
  1721년 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표트르 1세는
'차르' 칭호를 받고 '대제'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그이 꿈대로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49.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뉴턴, 만유인력을 발견(168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83년/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인 1642년, 영국의 링컨셔 주 
올즈소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날은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아이의 이름은 아이잭 뉴턴, 몸무게가 2kg도 채 안되는 미숙아였다. 그는 몹시 발육불량이어서 첫돌이 지나도록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 노는 아이였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노는 그를 보고 급우들은 '시골뜨기'라고 비웃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는 수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다.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수학적 재능만은 이미 돋보이고 있었다.
  1665년 말, 케임브리지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뉴턴은 고향 울즈소프로 내려갔다. 
  
'이 당시가 나의 발명을 위한 인생의 봄이었기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그의 회상처럼 뉴턴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고향 울즈소푸에서 연구에 전념했다.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곳에서의 일이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대한 발견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사과는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왜 달은 궤도에서 떨어지지 않는걸까?'
  이것이 그의 의문이었다.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그는 두문불출, 혼자 연구에만 몰두했다. 오랜 고립생활 끝에 드디어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약칭 프린키피아)'를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책은 뉴턴의 연구업적을 종합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중력'이란 원리로 전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해냈다. 즉 우주의 모든 천체와 입자는 서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하는 힘'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중력이다. 중력은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듯이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중력은 우주의 모든 물체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이라 한다. 
  그뿐 아니라 뉴턴은 만유인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미적분의 기초를 세웠고,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냈다. 
  1689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시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따.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1696년 그는 조폐국장에 임명되고,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과학자로서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뉴턴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빛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무지개와 비누거품의 색깔 등 빛의 성질을 완벽하게 설명해냈다. 뿐만 아니라,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며, 백색은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스펙트럼 색채의 혼합물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만유인력미적분의 원리빛의 입자설을 뉴턴의 3대 발견이라 한다. 
  그의 업적은 당대는 물론 이후의 학문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학자들은 모두 뉴턴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의 연구방법은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그의 방법론은 영국 경험론을 낳게 했다. 경험론의 시조 
존 로크는 뉴턴보다 열 살이나 위였지만 뉴턴을 스승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18세기의 계몽 사상가들은 
베이컨, 로크, 뉴턴을 위대한 정신의 삼위일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뉴턴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혔다. 뉴턴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어온 17세기 과학혁명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1727년 3월 10일 뉴턴은 성대한 장례를 마친 후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당대의 철학자 볼테르는 이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민에게 선정을 베푼 왕과 같이'라고.
  

50. 유혈 없이 성공한 혁명 -영국, 명예혁명 발발(168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89년/남인 득세, 김만중, '구운몽' 지음,
  1696년/안용복, 독도에서 일인을 쫓아냄,  1699년/괴질로 25만여명 사망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다.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독립파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을 처형한 나라라 해서 유럽의 군주들은 영국을 두려움과 적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의 처형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왕정복고를 꾀하던 찰스 1세의 아들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한편 항해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대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거리는 꽃으로 수놓아지고 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깃발이 휘날렸다. 창문과 발코니마다 사람들과 트럼펫 소리가 가득 차고, 수많은 군중이 길을 메웠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1년 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찰스 2세는 돌아오자마자 부왕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 있던 13명을 처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그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가 하면 몰수되었던 왕당파의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카톨릭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왕당파가 왕의 비호 아래 다시 고개를 쳐들어 의회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이 의회를 '기사의회'라고 비꼬았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20만 파운드를 받는 외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원조를 받으며,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의 친불정책은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이었으며, 국민감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카톨릭 세력만이 그를 환영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 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1679년 이번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의회와 왕의 대립이 벌어졌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 형보다 더한 전제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배척파들은 망명을 떠났다. 철학자 존 로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 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명예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 당과 토리 당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선언'을 승인케 했다. '권리선언'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51. 노예무역은 국력의 보고 -흑인 노예무역의 절정기(18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701년/장희빈 처형,  1712년/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년/여오, 탕평책 실시,  1750년/균역법 실시
  
   아프리카 서해안의 기니 만 연안의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지명들이 나온다. 
호초해안, 황금해안, 곡물해안, 상아해안, 노예해안 등등. 이곳들은 이름 그대로 호초(후추), 황금, 상아, 곡물, 노예들이 배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던 장소들이다. 선진 유럽국에 의해 일찍부터 유린당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흑인 노예무역이 맨처음 시작된 것은 1530년경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실려간 흑인노예 수는 16세기에 90만, 17세기 275만, 18세기 4백만, 19세기 7백만, 총 1,465만인데 항해 도중 여섯 명 가운데 다섯 명 꼴로 죽었으므로 실제 끌려간 총수는 무려 6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좀디 좁은 갑판에 갇혀서 몇 주일 혹은 몇 달씩 걸리는 항해 끝에 신대륙 아메리카로 실려갔다. 쇠사슬에 묶여 누워있는 노예 한 사람당 허용된 공간은 겨우 길이 180 센치미터, 폭 40 센치미터였다.
   노예무역은 주로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예상인들은 대부분 국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의 
드레이크 선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공격하는 한편 흑인노예를 신대륙에 팔아 영국 왕실을 살찌워주었다.
   노예무역은 매우 수지맞는 장사였다. 유럽 인들은 노예무역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흑인은 농장의 활력이다. 밀짚없이 벽돌을 만들 수 없듯이 노예없이는 설탕을 생산할 수 없다'
   1764년 브리스틀의 설탕 상인 존 피니가 한 말이다.
   노예무역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국가적 이익이 큰 사업'이었으며, '국력과 해군력의 무진장한 보고'로 간주되었다. 유럽 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노예제가 '아프리카 야만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며 그들은 노예제 덕분에 훨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조차 했다.
   노예무역이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이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에게서 노예무역권을 빼앗은 영국은 이 무렵부터 노예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으로 번창한 대표적 도시로서, 1730년에 16척이던 노예무역선이 18세기 말엔 132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면직물 공업이 크게 발달, 원면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그 원면은 거의 대부분 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면화농장에서 지배되는 것이었다. 면화 재배에 동원된 흑인노예 수는 1790년에 69만 7천 명, 1861년에는 4백만 명이었다.
   19세기 초 영국 의회는 노예제도를  금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계속되었다. 감시를 피하느라고 흑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어 운반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운반된 흑인노예들은 면화농장, 사탕수수농장, 담배농장, 광산 등지로 팔려나갔다.
   당시의 한 광고문을 보자.
   
'5월 6일 화요일 애슐리 페리 항 밴스 아일랜드 호에서 250명 가량의 건강한 니그로를 판매합니다. 곡물해안과 와인드워드에서 막 도착한 이들은 마마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되고 있습니다. 찰스 타운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일절 금지됨은 물론 오가는 배도 없어 질병에 전염될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해변가에 유행하고 있던 마마를 피해 배 위에서 니그로를 판다는 광고이다.
   흑인노예들은 힘겨운 노동과 노예주의 잔인한 학대 밑에서 쓰러질 때까지 일을 했다. 그들은 어머니와 아내, 딸들이 백인 소유주에게 겁탈당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제대로 가족을 이룰 수도 없었으며 이루었다 해도 뿔뿔이 흩어져 팔려가야 했다. 글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조그마한 반항에도 가혹한 처벌과 죽음이 뒤다랐다.
   불구가 되어 거리에 버려진 흑인노예, 그들이 있었기에 유럽 인은 편안히 설탕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18세기 유럽의 번영 뒤에는 바로 이 흑인노예들의 참담한 희생이 가려져 있었다.
     

52. 보스턴 차 사건 -아메리카, 독립을 선언(177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763년/쓰시마 섬에서 고구마 전래,  1776년/규장각 설치
  
   
1773년 12월 16일 밤, 북아메리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 2척이 인디언 차림을 한 일단의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그들은 배에 가득 실려있던 차 상자를 몽땅 바닷속에 처넣고 도망을 쳤다. 물에 빠진 상자는 모두 342짝,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500파운드에 달했다.
   이 사건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정부의 식민지정책에 반대하는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이 벌인 해프닝이자 독립전쟁의 발단이었다.
   본래 영국의 아메리카 정책은 너그러운 편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다른 식민지와 달리 본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간 사람, 정치적 자유를 찾아간 사람, 죄를 짓고 유형당한 사람, 큰 돈을 벌어보려는 모험가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급차별 없이 소신껏 일하며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아메리카는 유럽 인에겐 여비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가고픈 매력의 나라이기도 했다.
   이주자들은 '개척정신'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인디언과 광활한 대자연이 이들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은 무자비한 살륙으로, 대자연은 끈질긴 도전으로 극복해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이 되자 지금까지 호의적이던 영국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영국은 당면한 재정난을 식민지에 대한 과세로 풀어보려 했던 것이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식민지 아메리카에 다종다양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이 인지세였다. 인지세란 신문이나 책, 공문서, 트럼프, 학위증명서 등 온갖 것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법으로서 1765년 제정되었다.
   분개한 식민지 대표들은 뉴욕에 모여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결의를 천명했다. 본토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는 한 한푼도 세금을 물 수 없다는 주장이없다.
  각지에서 본토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때문에 영국의 항구와 도시에 실업자가 급증하자 인지법은 시행 3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그후에도 아메리카에 대한 과세는 번번히 실패하고 오직 차에 대한 세금만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773년 영국정부가 동인도회사에게 차 무역 독점권을 주고 면세조치를  취하자 격분한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영국정부는 이 사건을 난동으로 간주하고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 보스턴 항이 봉쇄되고 군대가 외곽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식민지인들도 대처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본국과의 통상중지, 상품 배척을 결의했다. 최초의 무력충돌은 이듬해 4월 발생했다. 보스턴 서쪽 콘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일전을 벌인 것이다. 이 전투를 시발로 하여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는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조지 워싱턴은 경험 많은 군인으로서 영국을 위해 프랑스와 용감히 싸웠던 인물이다. 이제 그는 식민지 아메리카를 위해 영국과 싸우게 된 것이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이 '독립선언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 내용을 잠깐 보기로 하자.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리 가운데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은 정부를 만들었다.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가 이런 목적을 파괴했을 경우엔 그 정부를 변혁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민주주의의 참뜻을 명쾌히 밝힌 이 선언은 후일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는 충성파, 독립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때 식민지인들을 감동시켜 독립전쟁에 나서게 한 한 권의 책이 있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  그것이다.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한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무려 50만 부가 팔려나갔다. 당시 아메리카 인구가 300만이었으니, 그 중의 6분의 1이 이 책을 사본 셈이다.

  이 전쟁에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는 식민지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영국을 고립시켰다. 식민지군은 처음에 열세로 악전고투했지만 1777년 10월의 사라토가 전투, 1781년 10월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대세를 쥐었다. 
  마침내 영국은 
1783년 아메리카 식민지 13개주의 독립을  인정했다. 8년 여에 걸친 독립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나라 아메리카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7월 4일은 아메리카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53. 파리 시민,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프랑스 혁명 발발(17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784년/이승훈, 천주교 전도 시작,  1786년/서학을 금함, 

  1787년/프랑스 배 내항
  
  세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을 든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세계사를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은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자!'는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에 고무된 파리 시민들은 파리 시내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갔다. 그들의 목표는 감옥 내에 있는 다량의 화약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악명은 실로 대단했으며, 왕을 비판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파리 시민이 점령했을 때, 감옥에는 7명의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한편 바스티유가 점령당하는 순간, 루이 16세는 화려한 베르사유 궁에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7월 14일 : 없음'
  파리 시민의 봉기는 
'앙시앵 레짐'이라고 불리는 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었다. 낡은 제도란 신분제도를 말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람을 세 가지 신분으로 나누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로서 이들은 총 2,600만 프랑스 인구 중 0.4%에 불과한 10만 정도였으나 전 국토의 10%를 소유하고 세금을 변제받았다. 제2신분인 귀족은 10만 내지 25만으로 전국토의 20%를 소유했으며, 세금면제는 물론 고위관리직을 독점했다. 제3신분인 평민은 시민, 농민, 도시노동자로서, 그중 상인, 수공업자, 변호사, 문필가, 하급관리들로 이루어진 시민은 생활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으나, 농민과 노동자들은 간신히 생존할 정도였는데다가 각종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신분제 의회가 존재했는데 이를 삼부회라고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1614년 이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왕실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삼부회에는 1신분 대표 300명, 2신분 대표 291명, 3신분 대표 610명이 모였다.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제1,제2신분과 제3신분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에 제3신분은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3신분의 강경한 태도에 화가 난 왕은 의사당을 막아버렸고, 이들은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테니스 코트의 맹약'이라 한다. 
  격분한 루이 16세는 군대를 부르는 한편, 민중에게 인기 있던 재무상 
네케르를 전격 파면시켰다. 왕이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리란 소문이 나돌자 파리 시민은 분개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미국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이 문서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천명한 것으로서 전문 17조로 되어 있으며, 진보적 군인 라파예트가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 파리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해는 지독한 흉년이었다. 한데 그때 베르사유 궁에서 대연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게다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민중은 분노로 들끓었다. 한 젊은 여성이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가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행진하기 시작했다. 끼니 걱정에 애를 태우던 여성들이 맨 앞장을 섰다. 목적지는 베르사유 궁이었다. 
  루이 16세는 당황한 나머지 여태껏 미루던 '인권선언'의 재가를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성난 민중들은 왕에게 파리로 갈 것을 요구했다. 왕은 할 수 없이 왕비와 아들을 데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쥔 여성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파리로 와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왕비와 함께 왕비의 친정 오스트리아로 몰래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민중의 적으로서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역시 그해 10월 16일, 38살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 각국이 프랑스 동맹을 결성,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혁명의 불길이 파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 이들을 막아냈다. 젊은이들은 혁명을 지키려는 뜨거운 의지로 속속 자원을 했다. 
  그중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이 불렀던 진군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의 노래로 민중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다.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잠깐 그 노랫말을 보기로 하자.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무리들의 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은 '상퀼로트' 즉, 시민, 농민, 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민중'이었다. 상퀼로트란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란 뜻인데, 당시 민중들이 통바지를 입은 반면 귀족은 반바지인퀼로트를 입고 긴 양말을 신은 데서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혁명으로 부상한 세력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 즉 부르주아지였다.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 부르주아 혁명이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절대왕정과 봉건잔재는 스러지고 근대 시민사회가 막을 올렸다. 
  

54. 도구에서 기계로 -영국, 산업혁명 시작(18세기 후반)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797년/영국 군함 내항
  
  프랑스와 신대륙 아메리카가 정치 사회적 변혁을 겪고 있는 동안 섬나라 영국에서는 또하나의 거대한 혁명의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산업혁명이란 한마디로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소규모 수공업적 생산반식에서 거대한 기계를 사용하는 대규모 공장제 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당시의 공업생산은 기술자가 자기 집에서 몇 가지 도구를 갖고 물건을 만들어내거나, 얼마 안되는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함께 일하는 공장제 수공업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방식은 급증하는 수요를 따를 수 없었으므로, 좀더 빨리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기울어졌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기계'이다. 
  최초의 기계는 1733년 
존 케이가 만든 자동 베틀이다. 랭커셔의 직포공인 그는 지금까지 한 손에 북을 들고 세로로 맨 날실 사이를 일일이 통과하며 면포를 짜야 했던 것을, 북에다 줄을 달아 자동으로 왕복하게 했다. 그 결과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자 이번엔 실의 공급이 크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하그리브스이다. 역시 랭커셔 지방의 방적공인 그는 1764년 한꺼번에 8개의 추를 움직여 단번에 보다 많은 실을 뽑을 수 있는 방적기를 고안해냈다. 그는 이 다축 방적기에다 아내의 이름을 붙여 '제니 방적기'라고 명명했다. 
  제니 방적기는 
아크라이트에 의해 더욱 개량되었는데, 그는 제니 방적기에 수력을 이용해서 움직이게 하는 수력방적기를 고안해냈다. 그는 본래 이발사였지만 기계에 흥미를 갖고 여러 발명품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수력방적기의 등장으로 면직물 공업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 2,3백 명의 노동자가 모인 공장이 생겼다. 
  뒤를 이어 1779년에는 
크롬프턴이 제니 방적기와 수력방적기의 장점을 살려 뮬 방적기를 만들었다. 1787년에는 목사 출신인 카트라이트가 말이 끄는 동력 직조기를 발명, 면직물 공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수력을 이용한 이런 기계들은 곧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물가에 공장을 세워야 했으므로 자연 교통이 불편하고, 물의 증감에 따라 기계조작이 불규칙했을 뿐 아니라 마음대로 공장을 확장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은 제임스 와트이다. 기계기구상의  직공인 그는 1769년 증기기관을 발명, 기계의 새로운 동력으로 쓰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발명은 방직공업뿐 아니라 제철, 석탄공업에 널리 사용되어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의 출현 덕택이었다. 
  한편 공장제 기계공업의 발달은 교통의 발달을 불러일으켰다. 원료와 생산품을 나르려면 교통수단과 도로, 철도, 운하, 다리 등의 건설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1814년 기관공 
스티븐슨은 기관차를 발명했다. 그는 자신의 기관차를 거듭 개량한 끝에 1829년 90톤 이상의 열차를 끌고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시속 16-24km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그 기관차의 이름은 로켓 호였다. 
  이보다 먼저 미국 사람 
풀턴은 1807년 기선을 발명, 허드슨 강을 시속 4노트로 달렸으며, 1819년에는 대서양을 29일 만에 횡단했다. 바야흐로 '증기기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기선은 영국에선 별반 환영받지 못했다. 폭이 넓고 긴 미국의 강에서는 기선이 매우 효과적인 교통수단이었지만, 영국의 강은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지금까지의 사회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자본을 갖고 공장을 세운 공장주, 즉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대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규모 기계생산에 밀려 파산한 가내수공업자나 농촌에서 하루 아침에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의 공급원이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임금을 최대한 낮추는 데 혈안이 되었으므로 노동자들의 생활상태는 극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임금을 낮추는 한 방편으로서 숙련된 남자 대신 여자와 어린이들이 대거 공장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숨막히는 비위생적인 공장에서 '말하는 기계'로서 혹사당하다가 과로와 병으로 쓰러져갔다. 1840년 리버풀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불과 15살이었다 하니 그 노동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곧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유럽 각국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이며 산업혁명을 치렀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해갔다.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주의 역시 산업혁명이 낳은 결과 중의 하나였다. 산업혁명기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고, 이것이 인간 본연의 행복한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지옥임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55.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가 되다 -프랑스, 제1제정 시작(18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01년/신유박해로 천주교인 다수 체포 황사영 백서사건,
  1804년/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작, 평양, 대화재 발생,  1811년/홍경래의 봉기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지도한 
카미유 데물랭, 혁명시인 파브르 데글랑틴, 의사 출신으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던 마라, 웅변가 당통, 자코뱅 당의 영수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  등등,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서릿발 같은 혁명의 제물이 되어 암살당하거나 길로틴 아래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혁명의 와중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마침내는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이탈리아 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지원, 포병장교가 되었다. 기병이나 보병장교는 귀족가문 출신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관학교 졸업성적은 58명 중 42번째로 썩 좋지 않았으나, 역사와 수학만큼은 뛰어났다.
   1791년 22살이 된 그는 자코뱅 당에 가입,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정부의 포병 연대장이 되었으며, 2년 후인 1793년 툴롱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795년 세칭 테르미도르 반동, 즉 자코뱅 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2주일간 감옥생활을 했다.
   풀려난 그는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재기의 기회를 얻고, 이어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를 원정키로 하고 군대를 파견했는데, 나폴레옹이 그중 이탈리아 방면의 제3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제1, 제2군은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패했으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제3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육박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굴복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이제 프랑스의 적은 영국만 남은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번엔 이집트 원정을 단행했다. 이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악화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3만 5천의 군대와 3백 명의 과학자들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대동한 학자들은 이집트의 동식물, 풍속 등을 조사하는 한편, 귀중한 문화재와 고대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유명한 
로제타 돌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무렵 프랑스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했으며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 당이 이끄는 총재정부는 지도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몰래 이집트에서 돌아와 동생 루시앙의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년 11월, 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한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다. 새 헌법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통과되었고, 나폴레옹은 수석 통령이 되어 정권을장악했다. 
  프랑스 민중은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드높여 준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은 이같은 바람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또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1802년에는 숙적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평화를 맞은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종신통령에 임명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가 불과 10년 만에 다시 황제를 허락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이 낳은 개혁을 일정 정도 받아들여 '나폴레옹 법전'을 만드는 한편, 정복지에 혁명의 대의를 전파시켜 '정복자'아닌 '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힘을 썼다. 유럽 전체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으나, 유독 영국만이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과 영국과의 교역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러나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는 러시아는 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12년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곳은 유령의 도시처럼 텅비어 있었다. 게다가 화재로 식량은 커녕 잠잘 곳도 제대로 얻지 못한 나폴레옹 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처참한 후퇴였다. 몰아치는 눈보라, 시시때때로 습격해오는 카자흐 병, 살을 에이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프랑스 군은 쓰러져갔다. 나폴레옹도 말을 버리고 걸어서 간신히 러시아 국경을 넘어섰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의 군대들이었다. 이들은 1814년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체포,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시켰다. 새 황제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허둥지둥 도망을 쳤고, 전 유럽은 다시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 지 꼭 100일 만의 일이었다. 백일 천하는 끝나고 나폴레옹은 이번엔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영국군의 감시하에서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낸 그는 1820년 5월 마침내 그곳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56. 불태워진 아편 2만 상자 -중국, 아편전쟁 발발(184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39년/기해박해로 프랑스 신부 등 처형됨
  1840년/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시작,  1845년/영국 군함, 전라도 해안 측량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인에게 신비와 꿈의 세계 동방을 알려주었다. 유럽 인들은 앞을 다투어 동방진출을 꾀했다. 향료, 금, 은, 비단, 차 등 각종 특산물이 유럽 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런데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한 영국은 동방을 단순한 중개무역지가 아니라 원료공급 및 자국 상품을 수출하는 시장으로 삼고자 했다. 아편전쟁은 그 같은 영국의 야심이 불러일으킨 근세 동서양간 최초의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아편밀수였다. 다시 영국에서는 차 마시는 습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차와 비단은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언제나 수입 초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결재해 주어야 했다. 
  한편 청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중국은 영국이 바라는대로 호락호락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데다가 철저한 중화사상에 의거, 외국을 오랑캐로 여기며 조공국 정도로 대접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영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상품을 인도로, 인도의 아편을 중국으로, 중국의 차와 비단을 영국으로 수송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행한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하루아침에 수입초과국이 되고 다량의 은이 국외로 흘러나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여 국민 건강을 좀먹어 들어갔다.

  1839년 중국 정부는 임칙서를 황제의 특명을 받은 흠차대신으로 임명, 군사, 행정상의 전권을 주어 아편밀수의 본거지인 광동으로 파견했다. 호광 총독이었던 임칙서는 매우 단호하고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3월 10일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첫째, 현재 갖고 있는 아편을 모두 제출할 것. 둘째, 이후에 아편을 밀수하다 발각되면 아편은 관에서 몰수하고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곧이어 3월 19일부터는 외국상인들을 한 발자국도 광동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군사를 동원, 상관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인들이 임칙서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아편 실은 배를 멀리 항구 밖으로 도피시켰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며칠 동안 감금당하다시피 한 영국상인들은 아편 1,037상자를 내놓았다.  그러나 임칙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광동에 들어온 배가 20여 척, 한 척 당 아편 1천 상자를 실을 수 있으므로 총 2만 상자 가량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상무감독 엘리엇은 마카오에서 황급히 돌아와 갖고 있는 아편을 모조리 내놓도록 했다. 그리하여 도합 2만 283상자의 아편이 임칙서 앞에 쌓이게 되었다. 꼬박 두 달이 걸려 회수된 아편을 임칙서는 바닷물과 생석회로 처리, 모조리 마다로 흘려보내버렸다. 엘리엇은 영국상인들에게 마카오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전쟁발발의 기폭제가 된 
'임유회 사건'이 터졌다. 임유회는 홍콩 근처 첨사촌의 주민인데, 영국 수병들이 이 마을에서 술을 사려다 사지 못하자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해 그만 임유회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7월 7일의 일이었다. 
  임칙서는 범인을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엘리엇은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화가 난 임칙서는 마카오의 영국인들을 모두 추방, 
엘리엇의 가족을 포함한 57가구의 가족들이 바다를 표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11월 3일 엘리엇은 군함 수척을 이끌고 항구에 진입, 양국간에 전투가 벌어져 중국배 3척이 침몰당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0년 1월 5일, 황제는 영국과의 통상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이 시종 우세했다. 군함 20척, 대포 668문, 무장기선 14척, 포 56문, 수송선 30척, 병원선 9척, 보병 만여 명, 포병, 기타 측량선을 거느린 영국함대는 광동, 하문, 영파를 공격하고 양자강으로 진출, 상해 진강을 함락한 다음 남경으로 쳐들어왔다. 남경은 중국경제의 심장부일뿐더러 이곳을 빼앗기면 중국은 남북간 교통이 끊겨 반신불수가 되는 꼴이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청조는 굴복을 하고 강화를 청했다. 남경을 눈앞에 둔 양자강 상의 콘월리스 호에서 
1842년 8월 29일 조약이 맺어졌다. 이를 남경조약이라 한다. 
  그 주요 내용은 '중국은 영국에게 군사배상금 및 아편 배상금조로 2,100만원을 지불할 것, 홍콩을 영구히 영국에 할양할 것, 중국은 광동,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의 5개 항을 열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는 양국 협의에 따라 결정할 것'등이었다. 
  영국은 5개 항을 개방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데다 홍콩과 관세협정권까지 얻어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중국으로선 정작 문제가 된 아편에 대해서 책임을 묻기는커녕 거꾸로 배상금을 물어주고 치외법권을 인정, 향후 밀수를 해도 어떤 제재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경조약은 일방적으로 영국측에 유리하게 맺어진 조약이었다. 중국이 잠자는 호랑이가 아니라 허울만 좋은 호랑이임을 알아차린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 원칙을 내세워 조약 체결을 요구해 왔다. 그리하여 1842년 각각 
망하조약황포조약이 맺어졌으며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이리저리 잠식당하는 반식민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57.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한 홍수전 -중국, 태평천국의 난 발발(185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46년/김대건 신부 순교,

  1848년/이양선,함경도 해안에 출몰, 아편 흡입 금지


  홍수전은 1813년 1월 10일 광동성 화현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이복형이 둘 있었는데, 그는 형들과 달리 농사를 짓지 않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을 쳤다. 
  1833년 그의 나이 21살 때 광주로 시험을 치러 갔다 오다가 
양아발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홍수전에게 (권세양언)이란 책을 주었다. 그 책은 기독교 전도서였다. 하지만 홍수전은 그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4년 후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또 낙방한 그는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근 40여 일을 열병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궁궐처럼 으리으리한 큰 집에 이르니, 금발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속세의 마귀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형제자매들을 구제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키가 장승처럼 큰 선비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맏형이라면서 역시 속세로 가서 마귀를 쫓아버리라 하며 자기가 도와주겠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43년, 홍수전은 우연히 전에  받았던 (권세양언)이란 책을 발견하고, 자신의 꿈이 분명 하나님의 계시이며 키큰 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1844년 그는 친구 풍운산과 광서성 계평현 자형산으로 가서 
(상제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상제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다음 홍콩에 로버츠라는 유명한 미국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2개월 후 광서로 돌아와 교세를 늘리고 지도자가 되었다. 
  1850년 11월, 홍수전은 드디어 거병을 했다. 각지에서 농민들과 비밀결사들이 속속 가담해와 홍수전의 세력은 단박에 커져, 이듬해 여름 광서성 연안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의 건국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태평천국이란 이름은 홍수전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 보여준다.
  '무릇 천하의 토지는 천하인들이 다 같이 경작할 수 있다. ...천하 백성들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대복을 모두 받도록 하되, 밥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사용하여 어디나 고르고 또 의식이 넉넉치 않은 자가 없도록 한다.'
  '천국이란 천상천하를 총괄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도 천국이 있고 지상에도 천국이 있으며 천상 지상은 다 같이 하나님의 천국이니 오직 천상의 천국만을 가리킨 것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그가 세우고자 한 나라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의식이 유족한 이상사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린 지상천국이었다. 
  홍수전은 또한 
멸만흥한의 기치를 높이 들어 이민족인 청조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공공연히 내뱉었다. 그래서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금지하고 복식을 바꾸었다. 
  태평군은 가는 곳마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한족 출신 지식인 중에도 이들을 지지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태평군 1852년 12월 한양과 무창을 점령하고, 양자강 연안의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 1853년 3월 드디어 남경에 입성했다. 이들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천경이라 이름했다. 거병한 지 2년 3개월 만에 2백만의 대군을 거느린 태평천국은 중국 동남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게 되었다. 
  태평천국은 천조전무제도라는 법률을 반포하고 토지의 공유, 엄정한 기율, 일부일처제 실시, 창기 근절, 여성의 전족 금지, 여성의 참정권 인정, 아편 금지 도박 금지 등을 시행했다. 
  이들의 정책은 청 왕조는 물론 귀족, 관료, 지주, 상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냈으며, 유교교육을 받은 식자들은 이들이 숭배하는 기독교에 심한 반감을 품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청조의 탄압과 혁명군의 내분으로 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1864년 
증국번, 이홍장이 이끄는 토벌군과 영국인 고든이 이끄는 외인부대 상승군이 남경을 포위해 들어왔다. 위기에 몰린 홍수전은 4월 음독자살하고 태평천국은 무너졌다. 
  태평천국은 빈농들의 혁명운동이었다. 또한 기독교를 숭상하긴 했으나 서양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민족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훗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은 태평천국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외국에서는 다만 이론뿐이고 완전한 실행은 아직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홍수전 시대에 이미 실행한 바가 있다. 그가 실행한 경제제도는 공산주의의 실천이지 이론이 아니다.'
  
58. 소기름과 돼지기름 -인도, 세포이 항쟁 발발(185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54년/러시아 배, 함경도 영흥에서 주민 살상
  1856년/프랑스 군함, 충청도에서 소 약탈
  
  1857년 5월 인도 북부의 델리 지방에서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을 일컫는 이름이다. 
  세포이들은 전에도 종종 고용주에 대항하는 집단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이 해의 반란은 대규모였고,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도시 빈민들과 농민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민족항쟁으로 발전했다.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날 세포이들이 사용하는 소총의 탄약통에 영국군이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발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탄약통에 소기름과 돼지기름은 발랐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세포이들은 거의 대부분 힌두교도이거나 이슬람 교도였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한 동물로 숭상하여 절대 해치거나 잡아먹지 않으며, 이슬람 교도는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따라서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이들에겐 대단한 모욕인 셈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 이유는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대한 인도인으로서의 불만이었다. 
  인도는 17세기 말 무굴 제국이 약화되면서 토후들이 각각 나라를 세워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는데다가 이슬람 교와 힌두 교의 대립이 한창이었다. 
  1757년 동인도회사 서기 
클라이브가 거느린 영국군은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게 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처음엔 인도 고유의 풍속을 존중하는 체했으나 곧 정책을 바꾸어 철저한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19세기에 이르자 동인도회사는 명실공히 인도의 통치자가 되었다. 벵골 지방의 통치권을 얻어내고 마이소르 왕국, 마라타 동맹, 시크 교국 등 인도 전역이 동인도회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인도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 변했다. 이전까지는 면직물 수출국이었으나, 산업혁명을 치른 영국은 값싼 면직물을 대량으로 만들어 인도에 파는 한편 인도산 면직물에 높은 관세를 붙였다. 그러자 인도의 면직물 공업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실업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영국은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간의 대립을 은밀히 조장했다. 이는 영국의 교묘한 식민지 통치방법의 일환이었다. 
  세포이 항쟁이 전 인도인들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바로 이같은 영국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1859년 세포이 항쟁은 진압되었다. 영국은 항쟁에 무굴 황제가 가담했다 하여  황제를 버마로 추방하고 무굴 제국을 멸망시켜버렸다. 그런 다음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인도를 영국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인도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 총독이 총치하게 되었고 
1877년부터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함으로써 인도제국이 되었다. 
  영국의 진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차에 걸친 전쟁을 벌여 버마를 침략, 알라웅파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버마를 인도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싱가포르, 말라카, 말레이 반도 남부를  손에 넣어 말레이 연방을 만들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를 속령으로 만들어 죄수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뉴질랜드, 피지섬, 보르네오, 북부, 뉴기니아 남주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영국은 온 세계에 식민지를 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으스대기 시작했다. 
  

59. 세계관을 뒤바꾼 이론, 진화론 -다윈, (종의 기원)간행(185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59년/서원 사설 금지,  1860년/최제우, 동학 창시
  
  19세기는 과학의 세기였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당대에 가장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왕립 과학자협회 회원을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의사였다. 다윈도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에 빠지는 날이 출석하는 날보다 더 많았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에 들여보냈다. 의사가 아니면 성직의 길로 나가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의 3년간은 정말로 무의미했다.' 다윈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식물학자 
한슬러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다윈은 그의 권유에 따라 비글 호를 타고 탐험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다윈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다. 
  해군 측량선 비글 호는 영국을 출발,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오스트레일리아를 항해했는데, 다윈은 무보수 박물학자로서 동식물과 지질을 조사, 훗날 진화론의 기초가 된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갈라파고스 섬의 동물에 대한 관찰은 진화론을 세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다윈은 1839년 
'비글 호 항해기'를 써냈다. 그리고 20년 뒤인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 진회론을 주장했다. 
  그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도태 원칙에 의거, 다음과 같이 종의 진화를 설명했다. 
  
'모든 어린 생명이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며, 늙어 죽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연도태 원칙에 의해 생존에 적합한 종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예를 들면 기린은 살아남기 위해 목이 그처럼 길게 발달되었으며,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조직을 개발한 것이다. 아주 작은 생체조직의 변화로 인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계속 그 생체조직을 발전시켜, 수세대에 걸쳐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지구가 처음 생성되었을 때 존재한 종이 현재까지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종들은 원형에서 형질이 변화하여 현재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바뀐 것들이다. 인간도 이같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즉,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환경에 맞게 서서히 진화 발달하여 인간이 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엄청난 충격파를 각계각층에 던졌다. 가장 발끈한 것은 종교계였다. 다윈의 주장이 옳다면, 신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성경말씀은 거짓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사회의 최고 권위로 군림하고 있던 교회는 자신의 지위를 뿌리째 뒤흔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교회는 진리 수호를 다짐하며 진화론을 배척, 다윈의 책을 읽거나 가르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종의 기원'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초판 1,250부가 단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 그뿐 아니라 진화론은 여러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의 절대적 권위를 믿지 않게끔 되었다. 인간은 신의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의 진화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은 불안과 상실감을 안겨다주기도 했다. 진화 그 자체가 신의 창조 행위에 포함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전처럼 사람들을 교회에 절대적으로 복종케 하진 못했다.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래 또한번 사람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이다. 때문에 진화론을 모르고서는 19세기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의 발달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중, 다윈의 이론을 사회분야로 확대 적용한 이른바 사회적 다윈이즘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회적 다윈이즘은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사회적 다윈이즘에 의하면, 치열한 생존경쟁과 그를 뚫고 이룬 성공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또 진화가 단기간에 급속히 이루어지지 않듯, 사회의 진화도 급격하게 진행되어선 안되었다. 사회적 다윈이즘은 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의 버팀목이었다. 
  그뿐 아니라 인종차별, 서구 중심 민족주의를 정당화해주었다.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만이 생존할 자격이 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은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착취하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한 생명의 번성을 위해 다른 생명이 말살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리하여 앵글로 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 튜튼 계통의 독일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슬라브 족에 대해 인종적 우월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한 예로, 진화론의 동조자 
월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 인들은 신체적 자질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 도덕적 자질에서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 유럽 인을 오늘의 문화와 진보로 이끈 그 힘으로 유럽 인은 야만인을 정복하고 그 숫자를 늘려 나가는 것이다.'
  
60.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 남북전쟁 -미국, 남북전쟁 발발(186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61년/김정호, 대동여지도 만듦
  1862년/지주민란 발발, 전국적으로 농민반란 일어남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자 공화당을 반대하는 남부 11개 주는 합중국 탈퇴를 선언, 새로 아메리카 연방을 결성하고 민주당의 데이비드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메리카 연방의 수도로는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가 정해졌다.
  남부의 독립선언은 북부와의 오랜 대립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토지가 넓고 기름진 남부에서는 일찍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다. 남부인들은 흑인노예를 고용, 대농장에서 면화, 담배를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필수품을 수입했다. 따라서 남부의 경제는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영국과의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와 달리 북부는 철,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달,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온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으며 임금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남부는 지방분권 및 자치를 원했다. 19세기 전반에는 남부 농장지대에 기반을 둔 민주당에서 대통령을 많이 내었으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북부의 공화당이 강해졌다.
  남북 대립의 주요 쟁점 중에 하나는 흑인노예 문제였다. 본래 노예문제는 각 주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다. 때문에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서부개척으로 새로 주가 된 지역에 노예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1820년 남북은 미주리 협정을 맺어 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그 이남에만 노예제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협정도 1850년 무렵엔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이미 있는 것까지 없앨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 생긴 주에 노예제를 인정치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부는 이에 반발, 합중국 탈퇴와 남부 자치를 선언한 것이다.
  사실 노예제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은 신흥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의 산업자분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자본간의 대립이었다.
  
1861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했다. 영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부를 지원했다. 리 장군을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을 가진 남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인구나 물자 면에서 북부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1863년 1월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써 남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4백만 명에 달하는 흑인노예가 해방되었으며 전세는 북부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1865년 4월 남부 연방의 수도 리치먼드가 
그랜트 장군이 거느린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4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 것이다. 쌍방의 사상자는 무려 60만, 소모된 전비는 100억 달러였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합중국의 단결과 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워싱턴의 한 극장에서 남부 출신의 청년에게 저격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후 남부의 대농장은 해체되었다. 흑인들은 백인과 똑같은 시민으로서 자유와 선거권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그렇지만 흑인들이 얻은 자유는 실제로는 굶주림의 자유였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몸뚱어리 뿐인 흑인들은 북부로 이주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시 옛 주인들 밑으로 들어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노예해방과 함께 노예에 기반을 둔 남부 '면화 왕국'이 무너지자, 그에 기초를 둔 정치세력도 쇠퇴했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을 전개, 자본주의를 꽃피우게 되었다. 북부의 승리는 곧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61. 다이너마이트와 노벨 상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186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4년/흥선 대원군 집권,  1865년/경복궁 재건 시작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재산은 모두 돈으로 바꾸어 기금으로 만들고 해마다 그 이자를 지난 1년 동안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금으로 준다. 즉,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전쟁준비를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또는 평화회의를 열거나 확대하기 위해서 가장 훌륭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 이러한 부문의 상금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주어도 좋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약 9백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이 마련되었고, 상의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노벨 상으로 정해졌다. 최초의 노벨 상 수상식은 190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거행되었다.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네 형제 중 셋째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병약했다. 가난한 발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문학에 심취, 셀리의 시를 읽고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발명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1850년 17세 되던 해 노벨은 혼자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노벨의 아버지는 무기제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1862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연구를 시작했다. 액체로 된 니트로글리세린은 보통 화약의 몇십 배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두드리거나 문지르기만 해도 폭발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이것을 안전하세 사용할 수만 있다면 종전의 어떤 화약보다도 강력한 힘을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초의 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노벨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통 속에 보통 쓰이는 검정색 화약을 담은 유리관을 넣고 유리관의 뚜껑을 막으면 폭발력이 훨씬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듬해인 1863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에 대한 특허를 따내고 스톡홀름에 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 옴메베루그 광산에서 노벨이 만든 화약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구리 광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산 주인은 노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화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동생 에밀과 직공 세 사람,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공장은 물론 산산조각이 났다. 스웨덴 정부는 스톡홀름에서 화약제조를 일절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노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벨은 연구를 계속했다. 형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 근처에 공장을 세우고 알프레드 노벨 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여기서 제조된 화약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호주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1865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을 비롯, 파나마 운하를 지나가던 화물선이 폭발하여 476명이 사망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니트로글리세린 저장창고가 폭발, 14명이 사망하는 등 사고가 잇달았다.
  그러자 노벨은 액체인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체로 만들면 운반하기 쉽고 따라서 폭발사고도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1866년 드디어 노벨은 위대한 발명을 해냈다.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스며들게 한 것이다. 그해 10월 노벨은 이 화약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인간의 노동을 대폭 줄이는 데 기여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수로는 길이 17킬로미터, 그중 터널이 6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3만 명이 11년간 일을 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면 100명 정도의 인원으로 10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보다 화력이 강한 폭발성 젤라틴, 발리스타이트라는 무연화약을 연달아 발명했다. 그의 발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했지만 인간 생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로 상용되었다. 노벨은 만년에 이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듯, 평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희사하겠다고 말했다. 노벨 상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90년 그는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옮겨나 6년 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62.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위하여 -마르크스, (자본론)제1권 출간(1867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866년/제너럴 셔먼 호 사건. 병인양요로 프랑스와 싸움
  
  역사상 이름을 남긴 학자들 중 마르크스만큼 후대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혁명을 낳았으며 수많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케 했다.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철학'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라인 주 
트리에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망있는 법률가였으며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8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인 마르크스는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고 자잘이 뛰어나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트리에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1836년 본 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법률공부보다는 시와 철학에 열중했다. 1년 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그는 헤겔 철학이 풍미하고 있던 베를린에서 불타는 열정으로 지적 탐구에 몰두했다. 철학, 논리학, 언어학, 수학, 문학, 시 등등 그의 지적 섭렵은 온갖 분야에 미쳤다.
  그때 마르크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란 여성과 약혼 중이었다. 예니는 트리에르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은 마르크스의 재능을 아껴, 1838년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죽자 대신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두 사람은 7년간이나 약혼상태로 지냈다. 그 동안 마르크스는 공부를 계속했고, 예니는 온갖 소문과 주변의 악의에 찬 시선을 견디며 마르크스를 기다렸다. 예니는 의지 굳고 인내심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르크스 못지않는 열정으로 헤겔 철학을 비롯, 지적 세계를 섭렵했다. 이후 그녀는 평생 동안 마르크스의 충실한 비서요 동반자로 일했다. 마르크스의 원고를 정리해주고 적절한 비판을 가하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1841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라인 신문) 편집장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가 쓴 몇 개의 논설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임신 3개월의 예니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연구하는 한편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독불 연감)에 글을 썼다.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만나 것도 이때였다.
  1845년 2월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브뤼셀로 갔다. 그후 엥겔스와 영국을 여행하고 공동저술에 착수하는 한편 공산주의자 회합에 참석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했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몹시 힘겨웠다. 집세를 못내 쫓겨나야 했으며, 가난과 질병으로 두명의 아이를 잃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아내와 꼬마 제니도 병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네겐 치료비가 없으니 의사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근 열흘간 나는 가족들에게 빵과 감자만을 먹였고 오늘은 무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일 뿐입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867년 (자본론)제1권을 탈고했다. 그 책은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건강, 행복, 가족을 희생해서'이룬 작품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산업화가 낳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았고,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사회를 체험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통찰력으로 자본주의란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인간이 인간을 소회시키는 체제라고 간파했다.
  일찍이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는 부르주아에게만 유리한 사회일 뿐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건 굶주림과 사슬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사회, 지배계급도 피지배계급도 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자본론)은 바로 그러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쾌히 밝힌 필생의 업적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흡수하여 새로이 극복한 것으로서 종래의 관념론을 뒤집은 유물철학이다. 그는 인류사회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변화발전하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확신 아래 평생 혁명을 위해 일하고 글을 썼다.
  1881년 예니가 사망했다. 오랜 생활고와 망명생활에도 꿋꿋이 남편 곁을 지켜온 그녀는 장암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마르크스도 뒤를 다르듯 2년 후인 1883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보급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유럽 각지에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1917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63. 바다를 이은 최초의 운하 -수에즈 운하 개통(18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8년/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
  
  1869년 세계 교통사상 획기적인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아메리카에서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것이다. 그중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대운하라는 의의 외에, 유럽 선진국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총독은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후원을 요청했다. 1859년 총독은 수에즈운하 건설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켰다. 프랑스 인 리셉스가 그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영국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가 건설되면 인도양과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대폭 단축되어 식민지 경영이 훨씬 유리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운하 건설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운하의 규모상 영국의 자본만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프랑스에게 합작을 청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 손해를 볼 뿐이라고 생각하여 합작을 주저했다.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은 이집트에서 영국의 군사적 행동은 없을 거라고 약속,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869년 11월 17일 착공한 지 10년 만에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길이 162.5킬로미터, 바다와 바다를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런던과 싱가포르간의 항로는 2만 4천킬로미터에서 1만 5천 27킬로미터로 절반 가량 줄어들게 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이에 반발, 1881년 아라비 파샤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이 기회에 아프리카 남부로 진출하고자 했다.
  1883년 나일 강 상류에 있는 수단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이집트와 그를 배후조종하는 영국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다. 영국은 이집트 총독의 군대 만여 명을 동원, 영국군 장군 
윌리엄 힉시의 지휘하에 수단을 정복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은 수단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집트 군은 이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글래드스턴은 새로운 수단 정복 계획을 세웠다. 1885년 영국은 고든을 수단으로 파견했다. 그는 바로 중국에서 상승군이란 용병대를 지휘, 무력으로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든 역시 수단의 지도자 마흐디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의 목은 창 끝에 꿰어져 부도덕한 정복자의 말로로서 공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괸총으로 수단 인 11,000명을 무차별 사살, 고든의 복수전으로 삼았다.
  그후 영국은 보어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들어 식민지로 삼고, 
케이프카이로캘커타를 거점으로 하는 이른바 3씨정책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열강은 질세라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지금까지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아프리카 내륙지방에 대한 탐험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스코틀랜드의 의사 
리빙스턴과 영국인 기자 스탠리이다. 리빙스턴은 1840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약 30년 동안 아프리카 중남부 일대를 탐험했다. 그의 탐험기는 유럽 인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스탠리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를 탐험, 원주민과 협정을 맺어 벨기에를 콩고에 진출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어갔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으며, 벨기에는 콩고를,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독일은 카메룬,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들에게 유럽 백인들이 갖다준 것은 학살과 노예사냥, 착취와 굴종뿐이었다.
  

64.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달성(1871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871년/신미양요로 미국과 싸움. 처화비 건립. 호포법 실시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은 봉건반동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빈 체제로 불리는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였다. 각국의 국경선이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나라마다 일제히 봉건왕조가 부활되었다.
  독일은 빈 회의의 결정에 의해 35개 국가와 4개 자유시로 분립되었다. 프로이센은 그중의 한 소국이었다.
  1861년 즉위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융커 출신의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 독일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융커란 독일 북동부의 지주층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군대와 고위관리의 요직을 독점하고서 국왕의 충실한 지지기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 태어났다. 그는 독일이 통일되면 프랑스, 영국 못지않은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 무려 28번의 결투를 벌인 경력을 지닌 그는 32살에 의원으로 당선, 황제 통치라야 국민이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정치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왕은 그를 신임하여 독일 연방희회의 프로이센 대표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36살 때의 일이다.
  비스마르크는 이 직책을 7년간 수행했고, 그후에는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로 활약하면서 무력으로 누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오늘의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른바 철혈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눌러 4년 동안 그 권리행사를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 군비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스마르크는 참모총장 몰트케, 육군대신 론과 함께 독일통일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우선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합병을 인정받는다는 조건하에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는 7주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프랑크푸르트 등을 합병하고 라인 강 이북을 손에 넣어 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미리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에 비밀외교를 벌여 프랑스를 원조하지 못하게 하고 교묘하게 프랑스를 유도, 선전포고를 하게 했다. 1870년 7월 마침내 전쟁
(보, 불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황은 프로이센에게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데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경험까지 갖춘 프로이센 군을 프랑스는 당해내지 못했다.
  8월 프랑스 군의 본거지 메스 요새가 점령당하고 이를 구원하러 나선 나폴레옹 3세가 세당에서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는 즉시 휴전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거절하고 파리로 진격, 1871년 1월 파리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는 철과 석탄의 보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떼어주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해야 했다.
  파리 함락을 눈앞에 둔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상징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제국의 황제 취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수십 개로 분립해 있던 독일연방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호헨촐레른 왕가는 독일 황실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했다. 동맹정책을 써서 독일의 지위를 강화하고 프랑스의 부흥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유럽 정치는 기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움직여졌다. 때문에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은 독일의 팽창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카톨릭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 그를 위협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라살레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각각 이끄는 두 그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두 그룹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고타 강령)을 발표했으며, 1877년 12명의 의원을 하원에 내보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집회, 결사, 출판을 금지하는 한편, 질병보호법, 실업보장법, 노후보장법 등 일련의 사회복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지하로 들어가 도리어 확대일로를 걸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 끝에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불만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898년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던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65. 어둠을 몰아낸 제2의 빛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187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75년/운양호 사건, 1876년/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1879년/지석영, 종두법 보급 시작
  
  
1929년 10월 21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 그린필드 마을의 포드박물관에서 백열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 에디슨의 친구이자 자동차 왕으로 유명한 헨리 포드, 후버 대통령, 그리고 에디슨의 조수였던 프랜시스 줄 등이 참석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어 회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옛날의 조수에게 말했다.
  '줄, 천천히 발전기를 돌리게'
  그런 다음 에디슨은 전등 스위치를 넣었다.
  순간, 수백 개의 백열전구에 불이  켜지고 회장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후버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디슨 씨는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미국인입니다. 에디슨 씨는 세계에서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 위대한 미국인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이번엔 에디슨이 인사를 했다.
  '만약 우리들이 한 일이 이 세상에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을 가져올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2년 후 에디슨은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살이었다.
  토머스 엘버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5대호의 하나인 이리 호에서 약 13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간 휴런 강 유역이었다. 에디슨은 7남매의 막내였으나 위로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매우 호기심 많고 엉뚱한 짓을 곧잘 해서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는 일이 흔했다. 국민학교 성적은 맨 꼴찌를 면치 못했다.
  '네 머리는 썩어빠졌어!'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에디슨은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준 
(자연과학 학교)라는 물리학 책을 읽은 그는 과학실험에 몰두, 지하실에 실험실을 만들고 (에디슨 연구소)라 불렀다.
  1859년 12살이 된 에디슨은 열차 신문판매원이 되었다. 매일 아침 7시 포트휴런을 출발, 3시간 걸려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다음 저녁때까지 거기서 지내고 다시 열차를 타고 밤 9시 30분에 포트휴런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열차의 화물칸을 빌어 이동 실험실을 만드는 한 편, 여가 시간엔 디트로이트 시내 도서관에 가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어치웠다. 이 무렵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바람에 그는 귀가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2년 에디슨은 열차에 깔릴 뻔한 역장의 어린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에게서 전신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후 에디슨은 전신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험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곳저곳 직장을 떠돌면서 그는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1870년 에디슨은 뉴저지 주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가 발명한 '주식표시기'를 4만 달러에 팔아 그 돈으로 마음껏 실험에 몰두할 수 있는 장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일과 실험에 몰두했다.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그의 공장에 모여들었다. 2중 전신기, 4중 전신기, 등사판, 에디슨식 전시펜 등 갖가지 발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 에디슨은 멘로파크라는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축음기와 송화기를 발명했고, 벨이 만든 전화기를 한층 개량했다. 사람들은 에디슨을 
'멘로파크의 마술가'라고 불렀다.
  1878년 에디슨은 백열전구 연구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백열전구는 고작해야 5, 6초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에디슨은 에디슨 전구회사를 만들어 수학자 앱튼, 유리기술자 보엠 등 유능한 조수들과 함께 연구를 거듭했다.
  1879년 10월 21일 밤, 무명실을 태워 만든 필라멘트 실험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전구는 40시간 이상 계속 빛을 발했다. 그해 섣달 그믐날 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 전등을 켰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눈으로 보기 위해 각지에서 밀어닥쳤다. 멘로파크 언덕길 양쪽을 밝힌 전등불이 금방 내린 하얀 눈을  환히 비추었다.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리하여 전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밖에도 에디슨은 영사기, 전기철도, 축전지 등 무려 1,300여가지 발명을 해냈다. 그의 발명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인류문명을 발전시켰다. 무엇이 그의 발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느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상상력과 큰 희망,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의지이다'
  
66. 녹두 장군 전봉준 -조선, 동학농민혁명 발발(1894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876년 조선은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했다. 이씨 왕조는 왕비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하에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다 친청파, 친일파로 갈리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부패한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외세를 몰아내려는 민족혁명운동이 일어났으니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전라북도 고부군 궁동면에서 1855년 태어났다. 천안 전씨,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녔다. 그의 쏘는 듯한 눈빛은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향교의 장의였으며 전봉준도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그의 생활은 몹시 가난해서 논 세 마지기 농사에 여섯 식구가 의존, 아침엔 밥을 먹고 저녁엔 죽을 먹는 형편이었다. 
  그는 1890년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가 되었다. 동학은 1860년 경주 사람 최제우가 창시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천주고, 즉 서학에 맞서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의 근본 사상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요 평등하고 차별 없나니,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은 차별받는 이,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동학에는 
'삼불입'이라는 것이 있다. 곧 '양반, 부자, 서니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동학은 상놈, 노비, 백정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종교로 급성장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 이하 귀족들은 권세다툼에 눈이 어두워 있고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탐관오리들이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토를 버리고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외세가 물밀 듯 밀려들어와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일로를 걷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폭정 때문이었다. 
1894년 갑오년 음력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1천여 명의 농민들이 괭이 혹은 죽창을 들고 모여들었다. 매서운 새벽 바람도 잊은 듯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군은 단숨에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그러나 조병갑은 미리 알아채고 부호 은씨 집에 숨었다가 전주로 달아나버렸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갇혀 있던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으로 거뒀던 쌀을 빼앗아 도로 나누어주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가담해왔다.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오하영, 손여옥 등이 각각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했다. 
  백산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던 농민군은 3월 27일 '보국안민'의 깃발을 올리고 격문을 발표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주성이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멸하라. '
  이는 전봉준이 제창한 농민군의 4대 강령이다. 1만 3천 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 마침내 4월 27일 전주에 입성했다. 
  고종과 민씨 일파는 몹시 당황했다. 민영준은 비밀리에 청나라 군벌 원세개를 만나 청나라 군사를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을 완전히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은 이때 이미 출병준비를 시작한 뒤였다. 
  5월 2일 군함 2척을 이끌고  청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병력을 급파, 7일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가 420명의 병사와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날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1천 5백 명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일본군 6천여 명이 인천, 서울 일대를 장악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자국의 세력을 부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강화를 제안했다. 마침내 5월 9일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농민군은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세우고 농민자치를 실천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청,일 양군은 저희끼리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일본이 승리를 거둬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게 되고 말았다. 
  9월,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10만의 대군을 이루고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올린 혁명군은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무수한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농민군은 50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냇물이 되어 골짜기에 흘러넘쳤다. 
  11월, 7일간에 걸쳐 벌어진 공주 공방전은 몹시도 치열했다. 마지막 날, 우금치 전투에서 대포와 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맞아 농민군은 분투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논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재기를 계획했다. 서울로 잠입하여 내외정세를 살필 생각을 한 그는 순창 피로리의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전봉준을 주막으로 안내한 뒤 관가에 밀고하고 말았다. 포위당한 전봉준은 쌓아놓은 나뭇단을 밟고 한 발이나 되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순간 잠복하고 있던 관군이 총개머리판으로 그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전봉준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12월 2일의 밤이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 공사관 감방에 갇혔다. 전봉준은 두려워한 관군이 일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그를 회유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전봉준은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 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다섯 차례 법정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반봉건 반외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며 노래를지어 대대손손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67. 인류평화를 위한 축제 -제1회 국제 올림픽 개최(18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95년/을미사변으로 민비 피살, 단발령, 유길준 '서유견문' 간행,
  1896년/전국에서 의병 일어남. 고종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 독립협회 창립, 독립신문 발간
  
  올림픽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는 수많은 폴리스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폴리스는 독립국가였고 폴리스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만, 폴리스 인들은 언어와 종교, 문화에서 공통점을 지닌 동족이었다. 
  그리스 인의 종교는 다신교이다. 신성한 산 올림포스에 사는 제우스를 비롯한 12신이 세상만물을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폴리스들은 제각기 신전을 짓고 자기 폴리스를 수호하는 신은 모셨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폴리스 최대의 행사요 화려한 축제마당이었다. 
  그중 주신 제우스에게 드리는 제사가 4년에 한 번씩 올림피아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전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모두 모였다.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 엘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성역이다. 
  기원전 776년, 제전 기념행사의 하나로 체육경기대회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 올림피아 제전경기가 바로 올림픽의 기원이다. 경기에는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자기 폴리스의 명예를 걸고 승부를 겨루었다. 최후의 승리자에게는 젊음과 생명의 신 아폴로의 나무 월계수로 만든 관이 주어졌으며, 그는 전 그리스의 영웅이 되었다.
  올림피아 외에도 이스트미아, 네메아,  파티아 등지에서 제전경기가 열렸지만,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것이 올림피아 제전경기였다. 하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노예, 여자, 외국인은 철저히 배제되고 오직 '순수한 그리스 인'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종목은 단거리경주를 비롯하여 5종경기, 레슬링, 권투, 전차경주, 경마, 판크라티온(레슬링과 권투를 합친 듯한  격렬한 격투기) 등이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서기 393년까지 무려 1100여 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열렸다. 그러나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부터 점차 퇴락하기 시작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이교도의 제전이라 하여 393년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500여 년 후인 1896년, 제1회 국제 올림픽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회되었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명명한 이 국제대회를 탄생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쿠베르탱이다. 
  그는 1863년 프랑스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되려고 생시르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6살에 중퇴, 교육학을 공부했다. 영국유학 중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학교 교정에서 꽃피운 스포츠때문'이라고 공감하고, 청소년 교육의 중심은 스포츠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인들의 체육활동에 매료되었으며, 1892년 마침내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 그는 참가국들을 설득하여 정기적인 올림픽을 열기로 합의를 보았다. 
  2년 뒤인 
1896년 4월 6일,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올림픽이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육상, 체조, 펜싱, 사격, 테니스 등 10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고, 메달 수에 따라 순위를 결정, 1위는 그리스, 2위는 미국, 3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그후 올림픽은 1,2차 세계대전으로 세 번 중단된  것 외에는 4년에 한번씩 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올림픽 마크는 쿠베르탱이 직접 고안하여 1914년 IOC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첫선을 보였으며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서 최초로 나부꼈다.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였다. 경기장의 탑 위에 커다란 돌로 만든 접시를 얹고 불을 피워 대회기간 중 계속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후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때부터는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점화하여 개회식장까지 가져오는 성화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한편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8회 올림픽은 백인종 국가가 아닌 곳에서 개회된 최초의 대회였고, 1980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올림픽은 공산주의 국가가 개최한 최초의 대회였다. 
동계 올림픽이 시작된 것은 1924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겨울철 경기를 독립시켜 프랑스 남부 샤모니에서 열렸다. 
  우리 나라가 올림픽에 처음 나간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였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는 김은배, 권태하, 황을수 세 사람이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일본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 김은배와 권태하가 마라톤에서 각각  6위, 9위를 차지했다. 이어 36년 베를린 대회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자가 되자 유명한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계 올림픽에 첫 출전한 것은 1948년 스위스 생 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대회였다. 1988년, 
제24회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쿠베르탱의 염원은 건전한 스포츠 정신을 통한 세계평화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처럼 올림픽이 진정으로 '이념과 인종,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까지만 하더라도 흑인이나 기타 유색인종은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후 1921년 제정된 올림픽 헌장은 '...모든 나라의 아마추어를 공정평등하게 참가시킨다. 어느 국가나 개인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 차별대우해선 안된다.'고 천명했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성공 여부는 그가 승리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노력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은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경제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또하나의 국제정치무대가 된 감이 없지 않으며, 선진국의 독점화 현상이 두드러져 '스포츠는 곧 국력'이란 말을 실감케하고 있다. 
  

68. 노벨 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 부인 -퀴리 부부, 라듐 발견(189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97년/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침
  1898년/서울, 전차 개통,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처형
  1899년/경인선 개통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퀴리 부인의 처녀 시절 이름이다. 그녀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 사택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마리아가 10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직은 모두 러시아 인이 차지하고, 학교에서는 러시아 말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는 1남 4녀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언니 브로냐의 학비로 부쳐주었다. 브로냐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틈틈이 젊은이들이 당국의 눈읖 피해 몰래 갖는 모임에 참석, 철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했다. 
  1891년 마리아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프랑스 유학의 길에 올랐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들어간 마리아의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프랑스 어에 자신있었던 그녀였지만, 빠른 말씨로 진행되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기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독학으로 공부한 수학과 물리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른 학생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다락방에 세든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웬만한 추위에는 불을 때지 않고 견뎌냈다. 몹시 추운 날이면 세면기의 물이 꽁공 얼어붙었다. 몇주일 동안 빵과 물만 먹기도 했으며, 차만 마시면서 몇 끼를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1893년 물리학 학사시험에 1등, 이듬해 수학 학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 무렵 마리아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녀보다 8살 위로, 이미 명성을 얻은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마리아는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러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테마로 삼았다. 
  마리아는 우라늄보다 훨신 활성적인 다른 물질이 있어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했다. 피에르와 마리아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 
  1898년 6월 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아는 여기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폴로늄을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또다른 미지의 원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실험을 거듭, 마침내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을 함유한 원소의결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 우리는 방사능을 지닌 물질에는 새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새 원소에 라듐이란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퀴리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칵 뒤집혔다. 
  두 사람은 라듐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피에르가 근무하는 공업물리화학 학교의 바라크 건물을 빌려 실험실로 꾸몄다. 그후 4년간 마리아는 그곳에서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우라늄 광석을 20kg씩 꺼내어 체로 걸러서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분쇄하여 진한 황산으로 조려서 침전시켜 결정을 만든느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너무나도 고된 중노동이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라듐 결정을 추출해냈다. 4년의 세월을 바쳐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양은 겨우 0.1g이었다. 그녀의 나이 34살 때였다. 
  
1903년 퀴리 부인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총괄, '방사성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파리 대학에 제출했다. 파리 대학은 그녀에게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해 11월 스웨덴에서 한 통의 전보가 왔다. 퀴리 부부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벨 상이 생긴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퀴리 부인은 여성으로서 노벨 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퀴리 부부는 수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마리아는 남편 대신 파리 대학 이학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이 학교 강단에 선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39살이었다. 
  방사성 원소 라듐의 발견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원자력 시대는 라듐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퀴리 부인은 
1911년 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여, 노벨 상 2회 수상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 치료에 나섰다. 그후 파리 대학 라듐 연구소를 창설하고, 원자력 연구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34년 7월, 67살의 나이로 퀴리 부인은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악성빈혈, 오랜 세월 방사능에 노출된 채 연구에 몰두한 때문이었다. 
  

69.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 -러, 일 전쟁 발발(19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2년/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최초의 하와이
  1904년/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만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감행된 이 공격으로 약 1년 반에 걸친 러, 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 일 전쟁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제국주의 러시아와 이제 막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든 신흥 일본간의 힘겨룸이기도 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에 의해 개국되었다. 함대를 앞세운 전형적인 강제 개국이었지만, 그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란 정부 주도의 근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일본이 눈독을 들인 것은 중국과 조선이었다. 1876년 일본은 자기들이 미국한테 당한 방식 그대로 조선을 개국시켰다. 군함과 대포를 거느리고 강제로 조약을 맺게 한 것이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그러나 조선을 자신의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던 청나라가 이를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팽팽한 대결장이 되었다. 
  1894년 일본은 마침내 청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서둘러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명분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동학혁명군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청, 일 양군은 철수하지 않고 내정개혁을 빌미삼아 날카롭게 대립, 드디어 
1894년 8월 전쟁을 시작햇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공업화와 군비증강에 힘써온 일본을 청나라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넘겨받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일본의 세력팽창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 주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에게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로의 진출이 막히자 극동지방으로 눈을 돌려 만주와 조선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삼국간섭의 대가로 만주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낸 러시아는 1898년 여순, 대련의 조차권을 얻었으며,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18만 명의 군대를 파견, 만주를 장악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친러 정권이 들어서 일본세력이 위축당하고 있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고종의 황후 민씨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약 1년간 정무를 보았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이후 조선에는  박정양을 수상으로 하는 친러 정부가 들어서고 러시아의 보호국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 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온갖 이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삼림채벌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만 국경의 요지인 용암포에 군대를 파견, 이곳을 조차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용암포 사건'이라 한다. 
  러시아의 남하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손을 잡고 영,일 동맹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은 청나라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인정하며,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시아가 만주 철병을 하지 않자 일본은 협상을 제의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어 갖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여순항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5월, 일본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남산, 대련을 점령하고 이듬해 1월 여순을 함락시켰다. 3월에는 봉천에서 러시아 군을 대패시키고,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러시아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내의 고조된 혁명운동 때문에 장기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일본은 종전을 앞두고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즉,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권익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는다'는 내용이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므로 이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 한다. 또 영국과 영, 일동맹을 개정하여 같은 내용을 승인받았다. 
  이처럼 사전준비를 완료한 뒤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반도 지배권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가 일본에게 넘겨졌고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의 어업권이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경쟁자를 몰아낸 일본은 그해 10월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1910년에는 식민지로 합병했다. 그런 다음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70. 피로 물든 페테르스부르크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5년/을사보호조약 체결,  1906년/일본, 통감부 설치
  1907년/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1905년 1월 9일 일요일,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와 그 가족 20만명은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차르(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가 사는 동궁이었다.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을 보고 구경꾼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으며, 경찰은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이들은 자비로운 차르에게 자신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선두에서 이끄는 사람은 
가폰 신부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진리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가 되었으며, 억눌려 살았으며,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여달라는 것, 일당을 최소한 1루불만 달라는 것, 규정시간 이외의 노동을 없애달라는 것이 고작이나이다....저희들은 여기서 마지막 구원을 바라고 있사오니 신민들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노동자 대열은 동궁 앞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장한 군대와 바리케이드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광장은 총성에 뒤덮였다.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기마대가 쫓았다. 광장에 쌓인 하얀 눈 위에 사람들의 흘린 피가 붉게 물들었다.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발포 소식을 듣고 흥분한 군중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군대의 야만적 행동에 비난을 퍼부었다. 다시 발포, 그리고 붉은 피. 

  정부는 사망자 96명, 부상자 33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날 죽어간 사람은 500명 이상,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가폰 신부는 국외로 달아나 차르에게 저주 섞인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 결속은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흘러야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한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들어오려 했을 때,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중대한 무질서 사태가 발생했다. 여러 곳에서 군대는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날을 
'피의 일요일'이라 불렀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차르의 전제정치 아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은 짐승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노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더럽고 비좁은  방에서 남녀노소가 뒤엉켜 먹고 자야 했다. 콜레라, 티푸스 등 전염병과 직업병에 시달렸으며, 공장주는 제멋대로 임금을 지불했다. 
  게다가 1904년 1월 시작된 러, 일 전쟁은 민중들의 생활을 한층 곤란에 빠뜨렸다. 물가가 폭등하여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5%가량 떨어졌고, 징집으로 일손이 달린 농촌의 불만도 높아졌다. 
  1904년 1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프티로프공장 노동자들은 회사에 요구안을 제출했다. 공장주는 요구를 들어 주기는커녕 주동자 4명을 해고해버렸다. 1905년 1월,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다른 공장들도 이에 동조, 파업은 페테르스부르크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 4명은 가폰 신부가 이끄는 '페테르스부르크 공장노동자 동맹'의 회원이었다.
  노동자들은 가폰 신부에게 '자비로우신 아버지 차르'에게 자신들을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가폰은 차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사실을 알리고 자비를 구했다. '피의 일요일'사건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가폰 신부는 원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모아 도박 안하기, 술주정뱅이 없애기, 한가한 시간을 합리적으로 보내기, 종교적, 애국적 사상의 고취, 노동조건과 노동자 생활 개선 등등의 합법적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혁명가들로부터 노동자를 떼어놓아 노동운동을 온건한 것으로 만들려는 당국의 의도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에 당국은 그의 조직활동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지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노동자들은 차르가 그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한 압제자'임을 깨달았다. 자비를 구하러 왔다가 총탄세례를 받은 이들은 차르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차르의 총탄이 죽인 것은 바로 러시아 민중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차르 자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였다.
  총 파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불붙듯 번져나갔다.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 등 1905년 1월에만 44만 명이 파업에 참가, 차르의 전제통치와 싸웠다. 이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파업에 참여한 숫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후 약 1년간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니콜라스 2세는 마침내 굴복하고 '
10월 선언'을 발표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사상,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10월 선언'은 속임수였다. 차르는 노동자들의 열기가 식은 틈을 타서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에 노동자들이 재차 봉기하자, 또다시 무차별 사격으로 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906년 악명 높은 반동 정치가 
시톨리핀이 수상이 됨으로써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혁명은 실패로 마감되었다. 차리즘이 무너지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신해혁명 발발(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9년/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총살,
  1910년/한일합방, 조선총독부 설치, 토지조사령 발표
  
  거대한 중국대륙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러, 일전쟁이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의 청왕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서태후는 일본의 승리는 일찍이 입헌군주제를 채용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1908년 헌법대강을 발표하고 1911년 최초로 내각을 소집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만주족 출신의 황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인들의 불만을 샀고, 입헌군주제 아닌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혁명운동이 드높아갔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손문은 1866년 광동성 향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홍수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13살 때 맏형을 따라 호놀룰루로 간 손문은 1894년 그곳에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청, 일 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광동에서 청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손문은 미국, 영국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의 삼민주의는 이때 골격이 완성되었다.
  삼민주의란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말하는데 정치적 독립, 왕정타도와 공화정 수립, 경제조직의 개혁을 뜻한다.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이념이 되었다.
  1905년 러, 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를 발전적 해체하고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총재가 되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새로운 중국의  이름을'중국화민국'으로 정했다.
  동맹회는 기관지 (민보)를 발행하여 삼민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회원을 국내로 보내 활발한 조직활동을 폈다.
  
1911년 10월 9일 한구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혁명당원이 비밀리에 만들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다. 다음날인 10월 10일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중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사를 하고 이에 혁명당원들이 가세, 무창을 점령했다. 이를  '무한봉기'라 한다.
  이를 계기로 혁명운동은 각지로 번져, 한 달도 되기 전에 14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각 성 대표들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중화민국 임시정구 조직대강을 가결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손문은 급히 귀국, 이듬해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이를 신해혁명이라 한다. 이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이 되었다.
  한편 청왕조는 화북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원세개에게 혁명군을 물리쳐줄 것을 청했다. 원세개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내각총리 자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
  그때 혁명군은 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경정부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손문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와 밀약을 맺었다.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되 원세개를 초대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조건이었다.
  혁명군과의 타협에 성공한 원세개는 청조에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1912년 2월 황제인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뒤 국민당 해산령을 내려 사실상 국회를 정지시켰다. 그의 야심은 제정을 부활시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은 혁명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원세개는 제정취소를 포고하고 1916년 6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후 약 10년 간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제휴,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으며, 군대를 길러 군벌 축출을 꾀했다.
  그러나 손문은 혁명 완수를 보지 못하고 1925년 3월 12일 6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무릇 40년간을 국민혁명에 힘써온 목적은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데 있었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을 환기시키고 또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으로 대하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현재까지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동지들은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 의거하여 계속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72. 지구 최후의 자연보고, 남극 -아문센, 남극점 도착(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1년/조선총독부, 어업령, 삼림령, 교육령 발표. 105인 사건
  
  지구의 양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세기 초 북극과 남극이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러한 의문은 풀리기 시작했다. 북극은 바다, 남극은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인 대륙이다. 
  남극대륙은 면적 1,350만제곱킬로미터, 
한반도의 약  62배이며 평균 두께 2,450미터의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얼음의 약 90%가 이곳에 있는 셈이다. 평균 기온은 여름 영하 30도, 겨울 영하 70도에 이른다. 남극대륙은 불모의 땅으로 보이지만 실은 금, 은, 크롬, 니켈, 우라늄 등 지하자원과 석유, 천연가스가 풍부히 묻혀 있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최후의 자연보고이다.
  1961년 노르웨이, 뉴질랜드, 미국, 벨기에, 소련,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영국, 호주, 일본, 칠레, 프랑스 12개국이 남극조약을 체결, 남극대륙의 국제법상의 지위를 정하고 남극 이용의 원칙을 세웠다. 조약가맹국은 1986년 현재 28개국으로 늘어났다.
  세계최초로 
남극점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아문센이다. 북극점은 그보다 조금 먼저 미국의 피어리에 의해 정복되었다.
  
로알 아문센은 1872년 7월 16일 노르웨이의 작은 항구 보르게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사망했다. 아문센은 일찍부터 탐험가가 될 생각으로 축구, 달리기, 스키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문센이 의사가 되길 바랐으므로 그는 오슬로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893년 21살이 된 아문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탐험가가 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일등항해사 자격을 얻고, 이어서 선장이 되었다.
  1903년 6월 16일 밤, 아문센은 요어 호를 타고 북극으로 떠났다. 그의 항해목적은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9월 12일 킹 윌리엄 섬의 남쪽에 도착한 아문센 일행은 에스키모들과 겨울을 지내고 1905년 8월 13일 다시 항해를 떠났다.
  8월 26일 그들은 요어 호로 다가오는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베링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고래를 잡으러 가는 포경선이었다. 이로써 노르웨이 오슬로를 떠나 그린랜드와 알래스카 북안을 거쳐 베링 해협을 통과하는 북서항로가 처음 개척되었다. 아문센이 33살 때 일이다.
  아문센은 곧이어 북극점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탐험가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1911년 1월 17일 프람 호는 남극대륙 서쪽의 로스 섬 연안에 닻을 내렸다. 거기서 6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는 영국의 스코트 탐험대가 기지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 역시 남극점이 목표였다. 아문센은 스코트 일행을 앞지르기 위해 극점에 이르는 최단거리 코스를 선택했다.
  
1911년 10월 20일 아문센 일행은 네 대의 개썰매를 타고 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스코트 탐험대는 11월 1일 출발했다. 그들은 아문센과는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아문센 일행은 모두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있었다. 예정된 지점에 이르면 개를 차례로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전진했다. 한 달 후인 11월 21일 남위 85도 39부, 높이 3,2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12월에 들어서자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동상 때문에 아문센의 얼굴에선 피고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12월 14일 오후 3시, 일행은 드디어 남극점에 도달했다. 위도계의 바늘이 남위 9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문센은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꽃았다.
  극점에서 3일을 머문 후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아문센은 만약 돌아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뒤에 올 스코트 일행에게 증표를 남기고 출발했다. 그러나 일행은 2,976킬로미터를 걸어 무사히 프라미 호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문센 일행이 극점을 정복한 지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7일 스코트 탐험대가 극점에 도착, 바람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를 발견했다. 이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4명의 스코트 탐험대는 곧 귀로에 올랐다. 그러나 3월 대설폭풍을 만나 조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기를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행기는 얼음 위에 내릴 수가 없었으므로 비행선을 타기로 했다.
  
1926년 5월 11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세 나라의 공동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북극해횡단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이탈리아의 노빌레가 다시 북극탐험에 나섰다가 행방불명 된 사건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즉시 그를 구조하기 위해 비행선을 타고 북극으로 향했다.
  6월 16일 오전 4시, 아문센이 탄 프랑스 비행선 라탐 호가 노르웨이의 도르모소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것이 
로알 아문센의 최후였다. 노빌레를 태운 이탈리아 호는 다른 탐험대에 구조되어 무사히 돌아왔지만, 아문센의 비행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73. 세계를 불사른 두 발의 총탄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3년/안창호,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사단 결성
  1914년/경원선, 호남선 개통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조세핀은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 카가 잠시 멈칫했다. 그때 길모퉁이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었다. 순간 총성이 울리고 차에 타고있던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태자 부부는 15분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범인은 
세르비아 인 카브리엘로 프린체프, 19살의 병약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르비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원으로서,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이다. 이를 세칭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전 유럽은 긴장했다. 발칸 반도는 각국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만큼 향후 정세가 어떻게 급변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발칸 반도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게르만주의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슬라브주의가 팽팽하게 맞서 문자 그대로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878년 투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세르비아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1908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당하고 말았다.
  세르비아 인들은 오랜 외세의 지배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 일어난 사건이다.
  황태자의 죽음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 황실은 냉담했다. 황태자가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황실의 냉대를 받고 있었다. 황태자비 조세핀은 보헤미아 백작의 딸로서 신분의 격이 낮아 공식 사교석상에서는 정식 황태자비로 대우받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두 사람의 장례식엔 황제도 황족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 것은 세명의 자식들뿐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취한 대외적 태도는 몹시 강경했다. 7월 23일 오후  6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 내의 반 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기 위한 협의회와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등 세르비아의 민족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세르비아는 그중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을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 동맹관계에 의해 급속하게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당시 유럽은 이른바 
삼국동맹 세력과 삼국협상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삼국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각기 동맹국으로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발칸을 잃고 싶지 않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차르 타도를 외치는 혁명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도 이에 대항코자 8월 1일 러시아에, 3일에는 그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단숨에 제압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8월 2일 이번엔 일본이 영, 일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처음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영국도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했다는 명목으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발했다.
  11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아라비아가 투르크에 대항하여 영국 편을 들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역시 참전하면 독립시켜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적극 협력했다.
  발칸의 여러 나라들도 각각 참전했다.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바야흐로 세계전쟁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편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 
프린체프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 그러나 자신이 불지른 세계전쟁의 종말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봄 지병인 폐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할 만큼 통찰력을 갖고 있진 못했지만, 그가 쏜 몇 발의 총탄은 제국주의 열강의 해묵은 모순을 일거에 터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7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러시아 혁명 발발(191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5년/박은식, (한국통사)간행,  1916년/박중민, 원불교 창시
  1917년/한강 인도교 완공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2월 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스부르크를 페트로그라드로 고쳤다)에서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이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자,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은 빵가게,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대부분 여성들인 이들은 가난한 병사의 아내, 그리고 여공들이었다.
  다음날 사회주의 단체들은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빵을 다오!'
  '아이들이 굶고 있다!'
  '차르를 타도하자!'
  이날은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인 2월 24일에는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이 숫자는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월 25일 총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내일까지 모든 환란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 시위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곧 자신들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교들은 발포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공포탄을 쏘았다. 그래도 15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2월 27일 마침내 병사들은 총부리를 장교들에게로 돌렸다. 시위군중은 환호했으며, 병사들과 함께 동궁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깃발을 꽃았다.
  시위를 주도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평의회)임시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 병사는 1개 중대당 1명, 노동자는 1천 명당 1명 씩 대표를 선출했다. 그리고 (이스베스챠(뉴스)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의회는 혁명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황제를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300여 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했다. 이것이 3월혁명(러시아 력으로는 2월이어서 2월 혁명이라고도 함)이다.
  4월 3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레닌이 망명지 독일로부터 도착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현실화시켜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한 혁명가이다.
  그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불거진 광대뼈와 낮은 코, 깊고 작은 눈,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를 한 다분히 도양적 풍모를 지닌 그는 1870년 4월 22일 볼가 강 연안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몽고계 타타르 인이었고, 아버지는 교육관리, 어머니는 교양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1887년 레닌으로 하여금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에서 동물학을 공부하던 형 알렉산더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기 위해 여섯 명의 청년들과 폭탄을 만들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그후 레닌은 혁명이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잔 대학에 입학, 법학과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교내 시위와 관련되어 사형수의 동생임이 밝혀지자 제적, 카잔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카잔에 복귀한 레닌은 1년 동안 대학 4년 과정을 독학하여 법대 줄업시험에 통과했으며, 1892년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이때 그는 이미 마르크스의 저작을 모두 독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동자들이 있는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온 레닌은 
1895년 노동계급 해방투쟁 동맹을 결성, 노동자와 혁명적 지식인간의 결합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크루프스카야도 8개월 뒤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결혼했다.
  1900년 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망명길에 올랐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전전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그는 한시도 쉼없이 혁명을 준비하고 지도해나갔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전쟁 반대''임시정부 반대'를 외쳤다.
  이윽고 10월 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11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짐으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고, 레닌 또한 러시아 혁명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레닌의 친구였던 
막심 고리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원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치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19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8년/이동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
  1919년/3, 1일 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8년 11월, 독일이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4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립을 천명하고 유럽으로부터의 주문으로 자국의 산업을 번영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던 미국은 1915년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에게 격침당해 타고 있던 미국인 백여 명이 사망하자,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17년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00만 명의 육군을 서부전선에 보내는 한편, 막대한 규모의 군수물자와 재정원조를 투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영행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종식을 추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으며, 유럽 노동자 계급의 지원 없이도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1918년 3월 3일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독일과 강화하고 연합군을 탈퇴했다. 이에 여유가 생긴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려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대패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동맹국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투르크는 영국에게 메소포타미아를 점령당한 뒤 10월 30일 항복하고, 불가리아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패하여 휴전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나 황제가 스위스로 망명, 합스부르크 가가 무너지고 11월 3일 항복했다.
  독일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킬 항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사회주의당이 이끄는 새 정부는 11월 11일 프랑스의 우아즈 강 연변에 있는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조약에 서명,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1919년 1월 전승국 27개국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중심인물은 미국의 윌슨,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클레망소였으며, 그중에서도 윌슨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파리 시민들은 윌슨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정의의 사도 윌슨에게 영광을!'이란 현수막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꽃을 던졌다. 윌슨이 이처럼 유럽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은 것은 그가 발표한 이른바 '14개조 원칙'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의 식민지 약소국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소수민족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가 독립하고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 남 슬라브 인의 거주지와 합쳐 세르보 크로아트 슬로벤 왕국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되었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헤자즈는 독립을 했다.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도록 약속받았다.
  그러나 승전국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1919년 일어난 3, 1운동은 일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일본에 대한한 중국의 5,4운동 역시 무시되었다. 영국을 도왔던 식민지 인도도 원하던 독립을 얻지 못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한편 윌슨은 패전국 독일에게 너무 가혹한 강화조건을 제사하면 오히려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독일에 대한 보복을 가벼이 하자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사실 서부전선의 전투는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이루어져 프랑스의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독일은 자기 나라 땅에선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파리 강화회의는 6월 28일 베르사유 궁에서 조인식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영토와 해외 식민지는 갈갈이 찢겨 승전국에게 넘어갔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러야 했다.
  한편 윌슨이 14개조 원칙에서 주장한 '대소 국가의 구별없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상호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이의없이 가결되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었다.
  1920년 11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1회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다. 국제연맹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평화기구였지만,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주창자인 미국이 상원의 조약 비준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으며, 러시아와 패전국이 제외되었다.
  그 뒤 패전국의 가입이 허락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등이 차례로 가입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어 침략의지를 누를 수가 없었다.
  1933년 일본과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 이들 파시즘 세력은 또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을이켰다.
  

76. '파쇼',로마로 진군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취임(1922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승리.(동아)(조선)일보

  창간,  1921년/이동휘, 상하에서 고려공산당 결성. 자유시 참변,
  1922년/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문화 운동 시작
  
  베르사유 조약 이후 유럽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보기 드문  경제적 부흥을 이뤄 채무국에서 일약 채권국으로 변신했다. 세계금융의 중심은 런던에서 미국의 월가로 옮겨졌다.
  미국의 참전과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승리를 거둔만큼 전후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미국은 세계경제의 정상에 앉은 동시에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겐 적잖이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는 가장 불만이 컸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의 일원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그 이유는 아드리아 해안지방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화회의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 이탈리아는 60만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그 대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승리의 열매를 도둑맞았다고 분개했다.
  1919년 
다눈치오가 이끄는 병사들이 피우메 항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시인으로서 철저한 국수주의자였다. 그의 행동은 이탈리아 국민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후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와 외채에 시달렸다. 국왕 
빅토르에마뉴엘 3세의 통치는 무능했고,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솔리니이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래서 19세기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대통령이였던 베니토 파레스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었다.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전진))의 주필로 활동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참전을 주장, 사회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했다. 그는 자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사회주의는 명확한 이론이 없었으며, 니체와 마키아벨리에게서 배운 권력지향적 개인주의와 뒤얽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파시스트 당을 결성했다. 이탈리아 어로 파쇼란 '결속'을 뜻한다. 여기서 유래한 파시즘은 후에 전체주의, 독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파시스트 당은 사회주의 반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 반대, 강력한 국가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들의 주장은 전후 무력감에 빠진 퇴역군인들과 사회주의 운동에 두려움을 느끼던 자본가, 지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거액의 자금을 주어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파시스트 당은 그 자금으로 
'검은 셔츠'란 행동대를 만들어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을 습격하거나 파업을 분쇄하고 다녔다.
  파시스트 당은 1922년 피우메 항에서 돌아온 다눈치오와 손을 잡고 총선에서 22석을 확보했다. 그해 10월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시스트 내각수립을 주장했다.
  
'우리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우리가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인수하자. 이는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낙담과 실의에 빠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무솔리니는 난국을 타개하고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아줄 영웅으로 생각외었다.
  무솔리니의 선동에 고무된 파시스트 당원들은 로마로 진군했다. 국왕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솔리니를 수상에 임명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다. 국왕 역시 무솔리니야말로 이탈리아를 구원할 인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선거법을 개정, 독재를 준비했다. 그러나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 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개정한 선거법에 기대지 않고도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국왕, 지주, 자본가의 지지를 받아, 파시스트의 테러를 비난한 사회주의자 
마테오티의 암살을 시작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해나갔다. 
  한편 무솔리니는 교회를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여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지지를 받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협정을 체결,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주었다.
  무솔리니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비단 무솔리니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공히 사용한 대중조작술이다.
  무솔리니는 강철 헬멧에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고대 로마제국의 영웅 
케사르를 연상케 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국민학교 교과서는 물솔리니를 가리켜 '민족의 구세주'라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77.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세계 대공황 발생(192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5년/조선공산당 결성,
  1926년/6, 10만세운동 발발.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1927년/신간회 발족,  1929년/원사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발발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미국 뉴욕의 증권가 월 스트리트의 한 빌딩 꼭대기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틀림없이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무려 11명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증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날은 치솟기만 하던 주식값이 별안간 대폭락을 기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들이 이날은 주식을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암흑의 목요일'이었다.
  5일 후인 10월 29일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불과 30분 사이에 325만 주가 팔렸고 그 손실액은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후 5시간 동안 쏟아져나온 주식은 무려 1,650만 주였다.
  이날을 역사는 '비극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하루 만에 43%나 떨어진 주가는 이후 계속 하락, 11월에는 9월의 절반 이하로, 다음해 7월에는 8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은행에서 돈을 꾸거나 살 주식을 미리 담보로 잡히고 대부받았던 투자가들은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그러자 이번엔 대출한 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은행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은행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부도를 낸 은행이 무려 5천 여개,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휴지로 변하고 수만 개 기업이 파산했다. 당장에 2,500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쫓겨났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상점과 창고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상품은 너무 많은 데 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너무 적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니 공장주들은 생산량을 줄였다. 실업자가 더욱 늘어났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를 배회했지만 돌아가는 공장은 너무 적었다.
  아이들은 석탄과 먹을 것을 훔치러 다녔다. 캘리포니아 농장주들은 오렌지 값이 곤두박질치자 오렌지를 땅에 묻거나 석유를 뿌려 썩였다. 그때 농장 밖에선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이 오랜지를 훔치려다 붙잡혀 감옥으로 가거나 경비원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성난 실업자들은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미국경제의 불황은 곧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의 왕좌에 앉은 미국은 매년 막대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각지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황이 시작되자 미국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였다. 세계의 금의 60%가 미국의 금고 속에 사장되었다. 케나다는 밀을 불태우고 브라질은 커피를 바닷속에 처넣었다.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불황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이후 약 4년 간 지속된 이 세계대공황은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와 공업생산력 저하, 무역감소를 낳았으며 농산물 가격폭락, 금본위제 정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의 평균지수를 100이라 할 때 1933년에는 공업 60, 건축 14, 고용 61, 노동자 임금 38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자는 1930년 3백만, 33년에는 1천 5백만으로 늘어났다. 지엔피는 1928년의 850억 달러에서 30년엔 680억 달러, 32년엔 37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세계 공업생산액은 1925년을 100으로 할 때 1932년에는 65.9를 기록했고, 세계무역량은  무려 70.8%나 감소했으며 실업자는 5천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의 독특한 현상이다. 공황의 근본원인은 '생산의 무정부성' 즉, 사회전체의 구매력을 계산하지 않고 개별 자본가의 이윤추구 욕구에 의해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능력과 관계없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판다.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이 오르면 생산량을 늘린다. 그러면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가격이 조절되고 상품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드가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완전한 자유경쟁''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신념이었다.
  그러나 공황은 실제로 10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왔다. 1929년 시작된 공황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세계적이었으므로 이를 세계대공황이라 한다.
  

78.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193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2년/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년/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
  
  1933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특별의회를 소집, 뉴딜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산은 반으로 줄고 실업자는 1,300만을 넘어섰다. 새 대통령의 임무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미국경제를 하루바삐 재건하는 일이었다. 
  뉴딜 정책의 골자는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공공사업을 일으켜서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기를 되살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담 스미드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철칙이 되어 온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뉴딜 정책의 이론적 지주는 
케인스 경제학이다. 영국 사람 케인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치명적인 약점, 즉 생산의 무정부성을 통찰하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한 최초의 부르주아 경제학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인되어온 과잉생산 공황을 이론적으로 입증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했다. 즉 정부가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용하면 국민소득이 늘어나며, 국민 소득이 늘면 소비재 수요가 늘고 수요가 늘면 생산설비를 늘이기 위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 그러면 다시 소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경제제도로 여기던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은 처음엔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자나 하는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케인스는 한동안 공산주의자냐는 질문을 기자드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이론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국가에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스벨트는 제일 먼저 농업의 부흥에 손을 댔다. 1933년 5월 농업 조정법을 제정, 정부통제하에 경작면적을 제한하고 과잉생산물을 사들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테네시 강 유역 종합개발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테네시 강에 16개의 댐을 건설하여 홍수를 막고 수력발전에 의해 종전의 3분의 1의 요금으로 전력을 공급하며 주변의 토지개량과 삼림조성을 꾀하는 대규모의 다목적 개발공사였다.
  6월에는 전국산업부흥법을 만들어 각 산업마다 생산제한과 최저가격을 정하고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며 최고노동시간, 최저임금을 규정했다.
  1935년 8월에는 사회보장법을 만들어 65세 이상 된 노인에게 양로연금을 지급하고 실업자에게는 일정기간 동안 실업수당을 제공하며 신체불구자, 무능력자 구제 및 의료시술 투자를 시행했다.
  그리고 중앙은행을 만들어 통화량을 조절하고 외환관리를 하여 은행의 신뢰도를 높였다.
  또 누진세 제도를 채택, 호경기에 소득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세율이 올라 소비를 억제하고 불경기에는 그 반대작용을 하게 하여 경기변동 폭을 줄였다.
  뉴딜 정책에 따라 대외정책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소비에트연방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외채를 지불하지 않고 각국에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공화타개책의 일환으로 1933년 11월 소련을 승인하고 34년 5월에는 보호국이던 쿠바의 독립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서린정책'를 천명, 중남미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뉴딜 정책으로 미국은 서서히 불황을 극복해나갔다. 루스벨트는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뉴딜 정책은 미국경제와 정치를 중앙집권화시켰으며, 자유방임원칙에 입각한 고전적 자본주의로부터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수정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세계대공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와 이론을 낳았다. 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고 식민지를 통해 나름대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영국은 수정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생겨났다.
  파시즘은 국내경기의 불황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또 한 차례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79.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히틀러, 독일총통에 취임(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4년/진닥학회 설립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24살 연하의 클라라와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아돌프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그림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 빈의 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190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3년간 빈의 무료숙박소에서 살면서 그림엽서나 작은 풍경화를 그려 팔았다.
  1913년 5월 그는 오스트리아의 징병검사를 피해 독일 뮈헨으로 도망을 쳤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독일제국 병사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부상당했어도 미처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전선으로 달려갔다. 독일은 그에게 무공훈장인 철십자훈장을 두 번이나 수여했다.
  전쟁중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웅변술에 뛰어났던 그는 곧 이름난 연사가 되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했다.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를 줄여서 나치라고 불렀다.
  나치의 지지자들은 군부와 바이에른 지방의 왕당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히틀러는 당의 이론가, 선동가로 급성장했다. 그는 돌격대를 조직, 나치의 집회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열린 왕정복고 연설회에 100여 명의 돌격대를 이끌고 나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맥주홀 폭동'은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고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재판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 사회주의자와 유태인 배척 등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주장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이때 감옥 안에서 그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다음해 11월 히틀러는 석방되어 당 재건사업에 착수했다. 1925년에는 2만 7천 명에 불과하던 당원이 1929년 거의 7배로 늘어났다. 그는 친위대 에스에스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당내 사조직으로 삼았다. 훗날 악명을 떨친 친위대가 바로 이것이다.
  독일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패전으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다가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실업자가 쏟아져나오고 기업과 은행이 파산했다. 1932년의 실업율은 무려 44.4%에 달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독일국민들에게 나치는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함과 독일국민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이에 호응한 것은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과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공포를 느끼는 자본가와 지주, 전후의 사회적 불안에 상처입은 퇴역군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등 실로 다양했다.
  그 결과 1932년 나치는 37.3%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1933년 1월 85세의 노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한달 후 나치는 이른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선전하여 81명의 공산당 의원들을 추방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1933년 3월 5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나치의 대승리였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마침내 대통령과 수상을 겸하여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키고 노동조합 운동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신문, 방송을 철저히 검열했다. 나치의 이념에 어긋나는 책들은 모조리 불태워졌고, 유태인이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교수들은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학교는 나치즘의 선전교육장으로 바뀌었다.
  나치의 문교장관은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의 이념에 일치하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한편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도로건설과 토지개량사업,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시작하고 기계 대신 사람의 노동력을 사용케 했다. 군대와 경찰을 늘리고, 감옥을 대폭 증설하여 징집제를 실시하고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일으켰다. 미혼여성에게 결혼대부금을 주어 직장을 떠나도록 한 다음 그 자리에 남자들을 고용했다. 이렇게 하자 무려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 몇 년 안에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나아가 합성고무와 석탄액화에 의한 인조석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나치의 경제정책에 독일국민은 환호했다. 게다가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교묘한 대중조작으로 독일국민을 사로잡았다. 선전상 
괴벨스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위대한 독일인의 신화를 만들어낸 다음 그 지도자 히틀러를 영웅화시켰다. 신문, 영화, 연극, 포스터 등등 그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대중매체를 총동원했다.
  그 희생물이 된 것이 유태인이다. 나치는 그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57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온갖 생체실험의 도구로 썼다. 이들에게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더럽고 위험스런 바이러스'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것이 나치즘의 특징이다.
  '...개인주의 및 마름크스주의의 인간개념을 없애고 한 핏줄의 유대와 조국의 흙에 기반을 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다'
  히틀러는 나치즘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4월 29일 새벽,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온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 오후,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했다. 에바는 독약을 마시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며칠 후 독일은 항복을 했고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라는 히틀러의 야심도 끝장이 났다.
  

80. 대도하의 영웅들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4년/부산-장춘 간 직통열차 운행 개시
  
  대장정,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대도하 횡단이다. 이곳을 무사히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에 중국 홍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자그뗑?2천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은 곧 홍군의 전멸을 뜻했다.
  1935년 5월 
임표가 이끄는 제1군단의 선봉대가 대도하에 도착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홍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들판의 곡식까지 남김없이 거둬들였다. 선봉대는 남아 있던 세 척의 배를 배앗는 데 성공했다. 빼앗은 세 척의 배로 1군단 병력이 강을 건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홍군은 속속 강가로 집결했다. 그러나 물살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도하작전을 끝내기 전에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 형편이었다. 임표, 주덕,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 등은 급히 군사회의를 열고 서쪽 4백 리 지점에 있는 노정교를 점령하기로 했다. 노정교는 수세기 전 노정이란 사람이 설치한 것으로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에 매달린 다리였다.
  홍군은 지체없이 출발했다. 수백 길까지 솟았다가 강 수면 높이로 낮아지는 험한 협로였다. 이미 강을 건넌 부대도 함께 이동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들은 서로 격려하듯 발길을 재촉했다. 때론 서로의 외침이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가 때론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로 멀어지는 협곡을 타고 홍군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밤이면 이들이 든 1만 개의 횃불이 강 수면을 꽃처럼 아름답게 수놓았다. 휴식은 10분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홍군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정치지도원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를 격려했다. 망설임도 피곤도 있을 수 없었다. 팽덕회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승리는 곧 삶이요 패배는 죽음이다'
  마침내 다리에 다다랐다. 강물은 깊고 물살이 매우 빨랐다. 노정교는 길이 약 900미터, 16개의 육중한 쇠고리줄이 강을 가로질러 뻗어있고 바닥에 두꺼운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적이 벌써 바닥판자의 절반 이상을 들어내 버린 후였다. 강의 중간지점까지는 쇠사슬만 노출된 채였다. 더욱이 강 저편에는 적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 1개 연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군이 미치지 않았다면 쇠줄만 밟고 이 다리를 건너진 않을 거라고 적은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바로 그 미친 것을 하고야 말았다.
  돌격대로 30명이 자원을 했다. 이 용감한 전사들은 쇠줄에 매달려 넘실거리는 강물 위로 나아갔다. 맞은편 언덕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맨앞장을 섰던 홍군이 총에 맞고 강물로 떨어졌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다른 용사들은 좀더 전진했다. 드디어 바닥판자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용사들 중 하나가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 진지에 던져넣었다. 적은 판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20여 명의 홍군 용사들은 차례로 수류탄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강기슭에서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홍군 만세! 혁명 만세! 대도하의 영웅들 만세!'
  적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격대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다리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적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었다. 그동안 홍군 병사들이 몰려들어 불을 껐다.
 도중에 적과 교전하느라 지체했던 1사단도 이때 도착, 측면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은 전면도주했다. 그중 100여 명이 홍군에 합세해왔다.
  몇 시간 후 홍군의 전병력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넜다. 대도하의 영웅들에게는 홍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훈장이 수여되었다.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1934년 10월 16일이다. 손문이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후 숙원사업인 군벌타도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병으로 죽자,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갑자기 총 부리를 함께 싸워온 공산당에게 들이댔다. 지주, 대자본가, 상인 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북벌이 성공을 거두자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한 것이다. 이 4, 12구데타로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살해당하여 1만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후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소공전은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봉쇄작전이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강서 소비에트 탈환 과정에서 100여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1934년 1월 서금에서 소집된 제2차 전중국 소비에트대회는 혁명 본거지를 서북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한 것이다.
  
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 끝이 났다. 그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이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12개 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6개의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이른 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명 중 하나 꼴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35명뿐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하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그러면서도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81. 노구교 사건 -중, 일정쟁 발발(193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6년/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 사건
  1938년/한글 교육 금지됨
  
  1937년 7월 7일 밤 10시 30분경, 북경에서 남서로 6km 지점에 있는 
노구교 근처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 훈련중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별안간 10여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전부대원에게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전부대는 일시에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사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었다. 그는 20분 뒤 대열로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군 대대장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주력을 현지로 급히 출동시
켰다. 당시 노구교에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중이었다. 새벽 5시 반,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노구교를 점령해버렸다. 
  7월 11일 양측은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는 일단 해결된 듯했다. 그런데 7월 28일 일본군은 갑자기 북경과 천진을 총공격했다. 이로써 노구교 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방직공업과 군수산업에만 치우쳐 산업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해졌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세력은 군부였다. 
  
1932년 5월 15일, 파시스트 청년장교 일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5,15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물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근교의 유조구에서 자기네가 경영하는 만주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다. 
  일본은 다음엔 화북지방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방적업 때문에 중국의 민족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배일감정에 불타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 5천리 장정 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6년 12월 7일,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끼리 싸워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 전술에 장학량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다. 뒷산 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 뿐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 '내전 정지'와 '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 사건이다. 
  사건이 터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 별을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륙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한, 광동, 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삼광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 태워버리고, 약탈한다는 뜻이다. 
  삼광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 수는 무려 1천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82. 5천만 명이 희생된 최대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3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 전시통제체제 시행
  1939년/ 강제징용,  1940년/ 창씨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장갑사단, 기계화부대, 공격용 전차를 앞세운 53개 사단과 고성능 폭격기를 동원한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 
  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1년 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폴란드 침공 7개월 뒤인 1940년 4월, 독일군은 이번에는 북쪽으로 화살을 돌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그러더니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시켰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측에 가담했다. 14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독일은 
페탱을 내세워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대해 드골을 중심으로한 저항세력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전결의를 표명했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를 2주 만에 정복하고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남방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전쟁으로 화했다. 지구상에 전화와 포염이 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군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금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월 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유태인 학살,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20만에 달하는 조선여성들, 그리고 가공할 신무기 원자폭탄 등...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린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83. '엄마 따라 갈 거야'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43년/학병제 실시,

  1944년/여자정신대근무령 공포, 20여만 명이 정신대로 끌려감,  1945년/8, 15해방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에 은빛 B29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8시 15분, 9천 6백미터 상공에서 비행기는 지름 71센치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원자폭탄을 떨구었다. 50초 후 섬광이 번득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히로시마의 60%가 파괴되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즉사했다.
  34만 가량의 히로시마 인구 중 7만 8천 명이 죽고, 부상자와 행방불명이 5만 1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후 5년 동안 24만 명이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한 순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한국인도 수만 명 포함되었다. 이들은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가난에 못 이겨 살길을 찾아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원폭 피해자라는 꼬리표였다. 그후 4만 3천 명이 후유증으로 앓다가 사망하고 현재 2만 명 정도가 살아 있다.
  어둠의 그림자는 2세, 3세에까지 전해졌다. 원폭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말과 달리 피폭 2세들은 기형적인 외모로 태어나거나 정상이더라도 갖가지 선천성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더욱이 이들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이들 한국인 피폭자들과 그 2세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시대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삶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는지.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이름: 이정자
  *일본 이름: 구니모토 사다코
  *당시 나이: 15세
  *주소: 히로시마 시 후쿠지마 마치 673
  *학교: 후쿠지마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덴마치 국민학교로 옮겨 졸업.
            천만 여자고등학교 2학년 중퇴
  *가족: 앵친과 5남매. 그 중 장녀.
  *피폭지: 집 앞 들판에서 맞은편에 있는 양피주머니 공장 여공들과 어울려 양털을 늘어놓

            다가 등에 불길을 느끼고 마차 밑으로 기어듦.
  *피폭상태: 등 전체 화상. 1주일 후 뒷머리에 풍선처럼 커다란 혹이 부풀어 절개수술을 받

            았는데 한 동이에 가까운 피고름이 쏟아진 후 계속 부풀어 2, 3회 더 수술을  받았

            음. 까까중 머리로 그해 10월 귀국.
  *피폭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섯째 동생 병준의 죽음. 7살이던 병준은 둑에서 피폭당했는

           데, 상처를 비집고 곧 창자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온몸에 주먹만한 물

           집이 생겨 가위로 잘랐는데 자꾸 생겨났다. 어머니가 쌀물이며 송진가루며 구해서 발

           라주고 필사적인 간호를 했지만 파리가 상처에 수없이 구더기를 슬었고 어린 동생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마치 시체에 달려들듯이 파리떼와 구더기가 무섭게 온몸을 뒤덮

           으며 기승을 부렸던 그 참상. 동생은 결국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 정자 여인은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그러나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도 차오르는 열기 때문에 알몸으로 냉방에서 지내야 했고 숨이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1970년 보다 못한 고1짜리 큰 딸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갱지 열장에 이르는 긴 사연이었다. 두 달만에 온 회신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는 내용이었다. 보사부장관 명의로 온 답장이었다. 그러나 달려간 협회에서는 신입회원 명단에 이름을 써넣었을 뿐이었다. 가난한 피폭자들의 이름뿐인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후 이 여인은 울산의 바닷가로 이사를 했다. 
  '큰딸애 직업요? 한동안 병원 청소부로 다녔는데 오래 못 가네요. 목과 눈이 튀어나오고 한동안 갑상선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다녔어요. 올해 서른 셋인데 날 닮았나 봐요. 큰아이뿐 아니라 모두 약해요. 성한 아이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 막내딸은 나 때문에 늘 밤잠을 잘 안 자요. 내가 혹시 숨이 막히지 않았나, 살아 있나, 흔들어보기 위해서지요. 그애의 제일 고약한 증세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겨드랑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증세예요. 온몸이 항상 습하고 냉한 그애는 엄동설한에도 그 땀 아닌 물 때문에 속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겨드랑이의 맨살이 꽁꽁 얼어붙고 만답니다. 
  난 그애가 조용해지면 겁이 덜컥 나요. 그러면 여지없이 '엄마 왜 날 낳았어요? '내가 제일 싫고 무서워하는 그 말을 하구 말지요. 아무 대답을 못하는 엄마에게 그앤 다짐하듯 말을 보탠답니다.
  '엄마 따라 갈 거야'
  8월 9일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이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인구 27만 가운데 2만 4천이 죽고 부상 4만 1천, 행방불명 2천, 기타 피해자 17만 7천을 기록했다. 
  두 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세례와 소련군의 선전포고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일본은 8월 15이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전후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원폭투하를 감행한 것이다.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세계 최초로 실험에 성공한 지 한달도 채 못되어서였다. 
  

84.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국제연합 성립(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45년/북위 38도선 남북에 미,소 양군 각각 진주. 송진우 피살
  1946년/신탁통치 문제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반탁운동 일어남
  1947년/여운형, 장덕수 피살
  
  1991년 9월 18일 새벽 4시 20분, 현지 시각으로 17일  오후 3시 20분 제46차 유엔 총회는 남북한 동시가입을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3시 10분경 회의가 속개되자 의장은 남북한 가입안을 시작으로 마셜군도, 미크로네시아 그리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가입안 등을 일괄상정했다. 그는 먼저 제1안건인 남북한 가입안에 대해 찬반여부를 물었다. 
  '남북한 가입안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가입심사 과정을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인도를 공동발의 조정국으로 한 120여 개 회원국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
  의장의 설명이 끝나자 회원국 대표들은 일제히 박수로 찬성을 표시했다. 이로써 영문표기에 따라 북한, 정식명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의 유엔 회원국이 되었고, 해방 이래 46년간 남북의 쟁점이 되어온 유엔 가입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국제연합, 약칭 유엔은 국제평화의 유지 및 확립과 사회적 인도적 문화적 제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1945년 설립되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에 대한 열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국제평화기구로 발족한 국제연맹이 출발부터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파시즘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국제기구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전쟁중 일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8개조로 된 대서양헌장은 영토병합 반대, 침략국에 대한 무장해제, 군비축소 등을 천명했다. 당시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 대서양헌장은 1942년 1월 29개국이 발표한 연합국선언의 기초가 되고, 이것이 발전, 국제연합이 되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국을 뜻하는 말로 제안한 United Nations가 그대로 명칭이 되었다. 
  그후 1945년 4월 51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고 10월 24일 정식으로 국제연합이 설립되었으며, 46년 1월 제1차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국제연합의 조직으로는 전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사무국과 그밖에 유네스코, 국제노동기구, 국제통화기금, 국제식량농업기구, 국제민간항공기구, 세계보건기구, 군축위원회 등 각종 산하 기구들이 있다. 
  총회는 국제연맹의 만장일치제와 달리 과반수 결의를 원칙으로하며,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의 상임이사국과 6개의 비상임이사국 총 11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이를 방지하는 조치를 결정하는데, 필요하면 무력사용도 할 수 있다. 절차상의 문제는 7개국의 찬성에 의해 가결되고 실제적인 사항은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7개국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된다. 그리고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있다. 
  국제연합 출범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었으나, 
1971년 대만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표로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총회에서 남북한을 비롯한 7개국이 새로 가입함에 따라 국제연합 회원국은 166개국이 되었다. 국제연합 본부는 현재 미국 뉴욕에 자리잡고 있다. 
  

85. 불씨 하나가 중원을 불사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48년/남한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승만 초대 대통령취임. 제주 4,3사건. 여

  순반란 사건, 1949년/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피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이 열렸다. 1927년 일단의 청년들이 정강산에 모여 적기를 꽂음으로써 시작된 중국 혁명운동은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사는 거대한 나라 중국에 소련에 이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팽덕회, 등발, 항영, 임표, 등소평 등등 이들 중 몇몇은 현재도 중국정치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모택동은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남성은 예로부터 혁명적 전통이 짙은 곳이다. 3남 1녀의 장남인 그는 6살 때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고, 글을 익히자 곡물장사에 나선 아버지를 도와 장부정리를 맡아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유교경전과 주산 같은 것을 배우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상향의 신식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6살때이다. 
  그는 이 학교에서 중국역사와 세계역사를 배우며 중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호남 혁명군에 가담했다가, 손문이 남경정부를 세운 후 면학에 힘써 호남 제1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그는 스승 
양창제의 딸인 양개혜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사에서 모택동의 여동생과 함께 국민당 군에게 처형당했다. 
  모택동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북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중국공산당 창설자인 
진독수를 만나고부터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등 공산주의 이론서를 섭렵한 모택동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고 당원이 되었다. 
  1927년 장개석이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기하자, 모택동은 호남성으로 돌아와 노동자, 농민부대를 조직, 9월에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하고 모택동은 천여명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최초의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정강산은 호나, 강서, 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모택동은 이 강서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행하고 홍군을 길렀다. 그는 정강산의 산적들까지 교화시켜 홍군의 전사가 되게 했다. 
  한편 장개석은 '악랄한 홍비'의 보금자리인 강서 소비에트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홍군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소비에트를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유명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연립정부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사실 중, 일 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1940년 상해 남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해 이동중인 홍군을 국민당군이 공격, 4천 명의 홍군이 전사한 사건이 일어낫다. 이후 국공합작은 사실상 깨어지고 양군은 항일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공공연히 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장개석은 1946년 11월 국민대회를 열고 신헌법을 제정한 다음 48년 5월 총통이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게 무기와 물자를 대규모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홍군에게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민중들이 국민당 아닌 홍군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홍군은 
서주회전에서 국민당 주력군을 무너뜨리고, 이듬해 대만과 티벳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1949년 미국은 '중국백서'를 발표, 국민당군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버렸다. 더 이상 장개석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원조를 잃은 국민당은 일시에 무너져 대만으로 도피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북경에 입성했다. 모택동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소집,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미군 중장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1947년 공산당의 승리를 이렇게 예견했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이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와 계층에서 정치적, 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모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가난한 농민과 민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이기려 하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오직 정치적, 
경제적 개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민중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영국, 소련,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는 이를 승인했으나 미국은 중국 주재 외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세력의 양대 지주로 국제정치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86. 한민족을 둘로 가른 비극의 전쟁 -6, 25전쟁 발발(195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51년/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1952년/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25일 새벽 4시경, 38선을 경계로 서로 맞대고 있는 옹진, 개성, 동부해안 지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로이타 통신은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의 시발을 이렇게 보도했다. 
  38선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연합군측이 그어놓은 임시 군사분계선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 이북에 소련군이, 이남에 미군이 각각 진주한 이래 남과 북의 정치상황은 급변했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3년간은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몹시도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은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점령하고 28일 서울시내로 진입했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명령했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호언장담하던 이승만 정부는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후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을 대신하여 미군의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에 북한을 제소했다. 26일 오전 3시, 현지 시간으로 25일 오후 2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소집되었고, 여기서 2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소련은 대만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참석을 보이코트하고 있었다.
  26일 밤 10시, 일본에 주둔중인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즉시 한국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트루먼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27일 한국에서 미군 개입 성명서를 발표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국이 최고 사령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른 것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원된 유엔군은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를 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기는 한편 주한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해주었다.
  한국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낙동강까지 후퇴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그리고 북진을 계속, 38선을 넘어 평양, 원산을 점령하고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8선의 원상회복이란 애초의 목표는 북한일대의 석권, 나아가 중국까지 겨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만주 일대를 폭격했다.
  만주폭격이 감행되자, 임표 휘하의 제4야전군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북한군 복장을 하고 싸웠다.
  유엔군은 북한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9월말까지 한반도에 쏟아진 폭탄은 9만 7천 톤, 네이팜 탄은 780만 갤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평양은 건물 두 채만 남기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으며, 40만에 달하던 인구는 종전 무렵 8만으로 줄어 있었다.
  1951년 6월 24일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개최를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지만, 1951년 7월 10일 유엔군 대표와 북한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휴전회담 본회의가 열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미국의 해리슨 소장과 북한의 남일 중장은 적대행쥐 중지,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는 군사분계선 설정, 비무장지대 설치, 휴전 이후의 병력증강 방지,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모색을 위한 참전 관계국간의 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한편 그보다 한달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부산, 마산, 논산에 수용되어 있는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 휴전회담을 난항에 빠뜨렸다. 이것이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다. 이는 중립국 감시하의 자유교환이라는 휴전회담의 합의내용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무마시켜 휴전을 받아들이게 하는 대신 몇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즉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200만 달러를 1회분으로 하는 장기경제원조를 준다, 정치회의가 90일 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한, 미 양국은 회의참가를 중지한다, 한국군의 증강은 계획대로 진행시킨다, 정치회의 개최 전에 고위급 한, 미 회담을 연다.
  1954년 4월 26일, 휴전협정이 밝힌 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열렸다. 남한대표 변영태 외무장관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북한대표 남일은 '남북한 대표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대표로 참석한 주은래는 '한국전쟁 교전 당사자의 하나인 유엔은 선거감시를 공정히 할 수 없으므로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며, 한반도는 그 상태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전쟁은 양쪽 군대와 민간인을 합쳐 도합 5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남북을 막론하고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상처는 남북이 각각 안게 된 뿌리깊은 대립과 불신감이었다. 남과 북을 적대국가로 만든 휴전선은 단지 지리적 군사적 분계선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차단하는 두꺼운 벽이 되고 말았다. 남과 북은 동족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사회를 휘어잡은 흑백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 외세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 민족주체성의 상실 등은 실로 그 연원을 6, 25에 두고 있다.
  

87. 떠오르는 제3세계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개최(195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54년/사사오입 개헌,  1955년/한, 미 잉여농산물 원조협정 조인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며 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파농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 인, 인도인, 황색 인종의 땀과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말은 제3세계의 등장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역사는 사실 유럽 인에 의해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며, 인도양 항로의 개척자는 바스코 다 가마이고,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마젤란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인도양 항로는 아랍 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의 무수한 섬들에는 각각 저마다의 문화가 꽃피어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새로 '발견'한 땅이 당연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를 앞세워 깃발을 꽂았다. 원주민의 존재란 이들에겐 거추장스런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용감무쌍한 서부개척사는 바꿔 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그 이름도 유럽 인들이 붙인 것이다)의 멸망사이고, 미국의 번영은 흑인노예의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이며,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의 부유함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대가였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그 본질상 이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약 80여 개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유색인종 국가이며 강대국의 지배 아래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해야했던 나라들이다. 이 신생국들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굳어진 서양 중심의 질서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는 자립은커녕 제대로 국내경제를 운용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과거 종주국이었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론 독립했지만 경제적, 내용적으론 여전히 예속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른바 냉전시대를 맞았다.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하는 사회주의권으로 양분되었다. 어제의 동맹국이었던 미, 소는 적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팽팽히 맞섰다.
  그러자 또다시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신생국들은 동맹과 단결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것이 
제3세계의 등장이다. 
  인도의 수상 
네루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6, 25전쟁을 보고, 냉전은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하여 '비동맹 중립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국제분쟁은 궁극적으로 강대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신생국은 이러한 분쟁을 없애도록 노력하여 세계평화 유지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루의 주장은 1954년 
'평화 5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평화 5원칙'이란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을 말한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국 29개국이 참가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륙간 회의'였다. 여기서는 평화 5원칙을 토대로 한 
'반둥 10원칙'이 채택되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국제연합에 의한 분쟁 해결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둥 10원칙'은 이후 신생국들이 국제정치에 임하는 기본철학이 되었다.
  1960년 유고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엔크루마,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5개국 수뇌는 국제연합 제15차 총회에 미, 소 양국의 수뇌회담을 요청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했다. 냉전을 지양하고 국제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양국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양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비동맹 5개국 수뇌들은 따로 수뇌회담을 열기로 했다.
  1961년 마침내 제1회 비동맹 수뇌회담이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렸다. 회의는 비동맹 회원국의 가입조건을 결정했다. 즉 비동맹과 평화공존에 입각한 독자적 정책, 민족해방운동  무조건 지지, 냉전에 휘말릴 수 있는 어떤 조약이나 동맹, 외국군 주둔, 군사기지 설치의 거부 등의 조건을 갖춘 나라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동맹 운동은 신생국들의 공감을 얻어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했고, 1980년 현재 회원국 수는 120여 개국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3세계'라는 개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을 제1세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을 제2세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들을 제3세계라고 했으나, 점차 경제적 측면이 강조 부각되면서 미국과 소련을 제1세계, 유럽과 일본을 제2세계, 경제적으로 후진인 개발도상국을 제3세계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제3세계의 존재는 선진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제3세계를 대변하고 나선 중국이 대만 대신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아랍 어가 국제연합 공용어로 채택되었으며, 국제연합의 다수를 제3세계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제3차 중동전쟁 발발(196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60년/4, 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1961년/박정희, 5, 16쿠데타 일으킴,  1965년/한일조약 비준
  1967년/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
  
  1991년 10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팔라시오  데 오리엔테 궁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소련이 주선한 이 회담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 협력협의회 대표가 모여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해묵은 문제들을 토의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한 이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주변 지역을 점령, 영토를 확대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빼앗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이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은 이곳에 거주하는 17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자치 또는 독립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분쟁은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두 민족은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가운데 유태인은 2만 5천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하는데,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산 시온에서 따온 말이다.
  1896년 빈의 유태인 언론인 
헤르즐은 (유태인 국가)라는 책을 집필,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따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오니즘의 출발이다. 유태인들은 어디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 찾던 끝에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당 가나안'이야말로 유태국가를 세울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은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아랍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팔레스타인을 아랍 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터키는 독일 편에 가담하여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메카의 수호자'후세인은 영국인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터키군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1917년 영국 외상 
발포어는 미국 내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참전시키려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유태인들은 영국의 비호하에 이민을 계속, 1936년에는 총인구의 28%를 차지하게끔 되었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시설을 갖추었다. 과격한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비밀리에 군대를 길렀다.
  독립의 꿈이 무산된 아랍 인들은 시오니스트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테러와 파업,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할, 유태인과 아랍 인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은 아랍연맹을 결성, 이스라엘에 대항키로 했다. 이에 영국은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기고, 철수를 선언해버렸다.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좀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은 마침내 철수했다. 같은 날,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한 아랍은 아랍해방군을 조직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100여 만에 달하는 아랍 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었다.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수많은 동족을 살던 땅에서 몰아낸 침략자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이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 속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내 유태인들이 보내는 성금과 미국정부의 차관 덕분이었다. 더욱이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삼아 적극 지원했다. 때문에 이후 아랍의 반이스라엘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으로 전화되었다.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다. 아랍 연맹은 이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인정했다.
  이스라엘과 그를 전폭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테러, 그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군과 민병대의 보복학살, 75년부터 계속되어온 레바논 내전 등으로 얼룩진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이 모든 중동사태의 밑바닥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가 면면히 흐느고 있다.
  1974년 11월 13일 게릴라 복장을 한 피엘오의장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목표는 유태인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에게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나는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 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89. 우주시대의 개막 -아폴로 11호, 달 착륙(19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68년/1,21사건 발발, 김신조 생포.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9년/3선개헌안, 국민투표로 가결
  
  
1969년 7월 16일 오전 9시 32분, 아폴로 11호가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기지를 출발했다. 1주일 후인 21일 오전 2시 47분, 아폴로 11호에서 달 착륙선이 떨어져나왔다. 닐 암스트롱 선장과 조종사 올드린이 탄 착륙선은 오전 5시 17분 19초 달 표면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달 표면에 왼발을 내디뎠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내린 '고요의 바다'에는 막 떠오른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겐 작은 일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비약이다.'
  암스트롱은 달을 밟은 첫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주에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을 맨처음 쏘아올린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10월 4일,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한달 후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렸다.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다. 1960년 8월 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17바퀴 돌았다. 
  미국도 뒤질세라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시대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물과 음료수ㅡ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그런데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왕복선 챌리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약 4,500개의 비행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통신이나 기상관측 위성 같은 실용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 즉  전략방위구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인공위성으로 미사일을 감지하여 공격위성이나 지상에서 레이저 광선 혹은 입자 빔을 쏘아 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다가올 우주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줄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독점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90. 상처입은 거인-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970년/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7,4남북공동성명 발표.10월유신

 

  1975년 4월 23일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11년 전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어 4월 26일 베트콩은 사이공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이공을 함락한 베트콩은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실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1964년 7월 30일 발, 미 해군은 북베트남의 영토인 통킹 만에 있는 두 섬을 공격했다. 북베트남은 이 같은 사실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지만, 미군은 이를 허위조작이라고 역공했다. 사흘 후인 8월 2일 밤 미국의 구축함대가 통킹 만에 접근해 들어왔다. 북베트남은 이를 공격했다. 그러자 8월 4일 오전, 미국 대통령 존슨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북베트남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 탑재기가 반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통킹 만 사건 이다. 다음날 미 공군은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와 석유 저장소 4개 지역을 폭격하고 선박 25척을 격침시켰다. 존슨은 의회에 전쟁권 부여를 요청했고, 의회는 이를 가결시켰다. 이로써 미국과 베트남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의 근대사는 매우 험난하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병합, 인도차이나반도의 절반 이상을 손에 놓고 냉혹한 지배정책을 실시했다. 베트남 인들은 의병운동, 게릴라전 등을 펼치며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에 대항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호지명이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19살에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1918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으며,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 국공합작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보로딘의 비서가 되었다. 그곳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내로 들여보내던 그는 국공합작이 깨지자 모스크바로 갔다. 그리고 1930년 2월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지배자 일본이 나타났다. 베트남은 이제 일본과 프랑스 두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야 했다. 공산당은 각계각층의 혁명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모으기 위해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조직했다. 독립을 얻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 나라도 계급적 이익도 영원히 잃게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베트민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8월 13일 일제히 봉기하여, 1945년 9월 2일 호지명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를 8월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은 프랑스였다. 연합군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엔 장개석군이, 남엔 영국군이 진주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들어와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베트민을 진압했다. 북의 장개석군은 일찌감치 손을 뗐다. 
  베트민은 다시 항전을 개시했다. 베트민은 1954년 봄, 디엔 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켰다. 프랑스는 휴전협정을 맺고 17도선 이남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총선거 시한을 3개월 앞두고 철수해버린 것이다. 전국적 총선거는 무산되고, 17도선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원수가 된 고 딘 디엠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이었던 17도선은 국경선이 되었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양단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수천 명의 장교를 파견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을 지었다. 
  디엠 정권의 전횡과 탄압, 무능, 부패는 남베트남 인들을 다시 저항의 길로 내몰았다. 이들을 디엠과 미국은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불렀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해방전선은 지지기반을 확대하여 심지어는 디엠 정부의 고위 공무원과 그 군대에도 상당수의 협력자를 갖게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주둔병력을 계속 증강시키고 나아가 통킹 만 사건을 조작, 전면전을 시작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베트남의 싸움은 당연히 미국의 승리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을 실컷 괴롭히고 공포에 떨게 한 다음 마침내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 무기는 첫째 교묘한 유격전술, 둘째 대중을 겨냥한 정치투쟁, 셋째 남베트남 군에 대한 설득공작이었다. 
  해방전선은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면서 전후방도 없이 기습공격을 벌여 미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정글 속에 소형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숨겨두고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남베트남 병사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총부리를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막대한 군수물자가
투입되고 애국심에 넘치는 미국 젊은이들이 베트남 정글에서 목숨을 바쳤지만 미군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고립되었다. 식수는 필리핀에서 공수해오고 음식은 통조림만 먹어야 했다. 베트남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아시아의 일개 후진 민족과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상처를 입고 물러갔다. 참전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전쟁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번민에 빠졌다. 미국이 하는 일은 무어든 정당하며 또 승리한다는 미국의 우월감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100여 년에 걸쳐 프랑스, 일본, 미국과 차례로 싸워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운 베트남, 세계 역사상 이들처럼 강대국과 맞서 끈질긴 싸움을 벌인 예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중화인민공화국, 유엔 가입(19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3년/6, 23평화통일 외교정책 공표, 김대중 납치사건

 

  1969년 7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태평양의 한 섬 괌에서 미국의
향후 아시아 정책을 밝힌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미국의 직접적인 정치, 군사 개입의 회피, 해외주둔 미국의 단계적 철수, 동맹국의 자주국방 노력의 강화와 미국의 측면 지원,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한 내란이나 침략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협력대처 등이다. 
  당시 미국은 과도한 해외군사비 지출과 베트남 전쟁 장기화로 인해 경제사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리잡은 냉전체제를 불식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데탕트란 풀림, 휴식 을 뜻하는 프랑스 어이다. 미국과 소련을 두 정점으로 하는 팽팽한 긴장관계로부터 벗어난 국제적 해빙 무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긴장완화 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상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경계하며 전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으로 갈라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주한 것도 소련에게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장개석이 패배하고, 거대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자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걸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불살라졌다.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근로자들은 익명의 투서나 밀고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당하고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트루먼 전대통령이 러시아 간첩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고, 심지어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의한 빨갱이 사냥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웃이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50년대를 휘어잡은 이 반공주의 선풍을 상원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와 관계있다고 생각되면 자유세게의 방위를 위해서 어디든지 개입했다. 자연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었고,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권으로 양분되어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은 뉴욕 트리뷴 지에 이같은 상황을 해설한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기사 제목을 냉전 이라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열전이라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란 의미이다. 이후 냉전이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한 매카시즘과 냉전체제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 정책과 함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고 1962년 10월 쿠바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21일 유엔 총회에서는 중국 대표권 문제가 표결에 붙여져 중공초청, 대만 추방의 알바니아 안이 찬성 51, 반대 49로 과반수를 얻었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미국의 탁구 팀이 처음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했다. 
  한편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본회의는 중국 초청안을 찬성 76, 반대 35, 결석 3으로 가결시켰다.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이어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1972년 2월 21일 마침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으로 날아가 모택동 주석, 주은래 수상과 회담하고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그해 5월 닉슨은 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체결했다. 두 나라 사이에 군축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비로소 데탕트가 제도화되었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 소 두 나라가 직접 충돌하지 않는 대신 제3세계에서는 끊임없는 국지전이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미,소 양국의 대리전이었다. 
  70년대는 화해의 시대였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데탕트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후 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대소강경책으로 전환, 국제질서는 신 냉전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 민족주의-제1차 석유파동 발생(197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4년/긴급조치 1,2,3,3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1975년/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찬성 73.11%), 1979년/박정희, 피격 사망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암살 당한 뒤 새로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10월 16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의 페르시아 만 6개 석유수출국은 OPEC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줄여나가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한다고 했다. 
  그해 말 원유가는 배럴 달 5.110달러에서 11.651달러로 다시 인상되었다.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치솟은 원유가는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휘말렸다.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단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는 아랍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석유를 무기로 한다는 견해를 갖고 공동활동을 한다.는 목적으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OAPEC를 결성했다. 그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연합,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집트가 가맹했다. 
이에 앞서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다.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으로 출발한 OPEC은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인도네시아, 아랍 에레미트 연합, 카타르, 에콰도르, 가봉이 차례로 가맹, 13개국이 되었다. 그 중에는 OAPEC회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석유자본, 통칭 메이저는 엑손, 모빌, 걸프, 소칼, 텍사코의 미국계 5개 사와 네덜란드, 영국계인 로열 더치 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7대 사를 일컫는다. 세븐 시스터즈라고도 불리는 메이저는 석유 탐사부터 채굴, 회수, 수송, 정제, 판매,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석유에 관한 각종 부문을 분할 독점하고 있었다. 
  석유를 무기로 단결한 아랍의 위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하루 1천 톤씩 매일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중동노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유럽, 일본이 이스라엘과 외교를 단절하고 급속히 친 아랍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집트는 3주일에 걸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종전까지 국제 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은 OPEC으로 넘어갔으며, 아랍 산유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OPEC은 자원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몇 년 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8년 12월 OPEC은 배렬달 12.7달러이던 원유가를 단계적으로 14.5% 인상키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란은 미국의 지지를 받던 팔레비 왕을 축출하고 
호메이니를 새 지도자로 추대, 민족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유가는 배럴당 20달러를 넘어섰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78년 4.0%에서 79년 2.9%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3%를 기록했다. 우리 나라 경제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9년의 경제성장률은 6.5%,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물가상승률은 30%에 달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채는 2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여 서방세계에 도전한 아랍 민족주의, 이것이 석유파동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0년/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1981년/제5공화국 출범
  1983년/KAL기 소련에 피격.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고

 

  1986년 2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만에 열린 이 대회에는 소련공산당 사상 처음으로 서방측 공산당과 사회당, 좌익정당 대표들이 초청되어 총 113개국 152개 정당, 대의원 4,993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정치보고에서 소련 경제의 타개와 정치 개혁을 위한 당의 기본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소련사회의 침체가 주로 주관적 요인들-타성, 관료주의, 관리형태와 방법의 경직성, 동적인 사업경향 감퇴-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현대 과학기술 진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경제 재편, 식량 문제의 최우선 해결, 새로운 경제관리 메커니즘 창출, 경제성장 잠재력 활성화, 인민의 복지증진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을 주장했다. 
  개혁의 골자는 경제제도 개편과 스탈린식 관료주의의 극복이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상품 품귀현상,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무시안일주의와 형식주의의 만연 등등 소련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스탈린식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마라크스-레닌주의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일약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가로 떠올랐다. 그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권은 물론 자본주의권에도 지대한 관심거리이자 중대한 변수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제일 먼저 받은 곳은 동유럽이었다. 동유럽 각국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 소련의 영향하에 전후 동유럽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대거 들어섰다. 소련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들은 고스란히 동유럽에 이전되었으며, 혹은 더욱 왜곡된 형태로 인민을 억눌렀다. 
  유고슬라비아의 화보잡지 오스미카에 실린 한 풍자기사를 보자. 사회주의의 6개 경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기존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첫째, 실업은 없으나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일하지 않으나 모두 임금을 받는다. 셋째, 모두 임금을 받지만 이것으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넷째,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만인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다섯째, 만인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만인이 불만이다. 여섯째, 만인이 불만이지만 선거 때는 모두 체제에 찬성투표를 한다.  
  동유럽 인민들은 개혁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에서 수십, 수백만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으며, 각국의 공산당은 자구책으로 개혁과 개편을 서둘렀다. 1989년 1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라는제목의 고르바초프 연설문이 실렸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동유럽의 개혁을 지지했다. 
 
  ... 이제 우리는 처음에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즉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미래의 모델에 대한 서술에 노력을 집중해왔다. 그리고 그 모델에 따라 사회 속에서 진행되는 변화들을 짜맞추려고 했다. .... 하지만 삶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다른 길로 움직여갔다. 삶을 예정된 도식에 따라 강제로 움직여가려는 노력은 교조주의, 이데올록적 잔혹성, 폐쇄성, 자기기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억압을 초래했다. 인민은 기다리기에 지쳤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믿게 하려는 실행되지도 않는 호소와 약속이 너무 많았다. ... 결국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운 후에 국가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삶의 조건들을 대중에게 창조해주지 못했던 것이다.....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이는 마르크스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미래의 사회는 실현된 휴머니즘이다. 그러한 사회의 창조가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임을 단언한다. ... 
  페레스트로이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고르바초프의 예견처럼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결국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동유럽 최강의 부국 동독은 서독으로 흡수 통합되어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 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는 이름의 훨씬 느슨한 형태로 변모했다. 이전의 소련이 지녔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강력한 파워는 사라진 지 오래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미래, 이것이 어디로 갈 것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는 어떤 이념이든 간에 인민의 삶을 억누르고 그 자발성과 창조력을 무시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공평한 삶의 기회를 누리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6월항쟁, 6.29선언 공표. KAL858rl 폭파사건

 

  1986년 9월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통칭 가트GATT각료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여덟 번째 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이 협상을 우루과이 라운드라 한다. 87년 2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시작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주요내용은 농산물 분야와 서비스, 지적 소유권에 관한 교역문제이다. 
  가트는 
1948년 관세, 수출입규제 등의 무역장벽을 다각적인 교섭을 통해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미국 주도하에 발족되었다. 무력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협상과 조정으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폐지케하는 교섭의 장인 것이다. 전후 국제무역 질서는 가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국이 그 주도권을 쥐었다. 
  가트의 가맹국은 89년 12월 현재 96개국, 우리 나라는 67년에 가입했다. 가맹국은 협상을 통해 67년 
케네디 라운드에서는 공업제품과 농산물 관세를 평균 35% 인하했고, 73년부터 79년에 걸친도쿄 라운드에서는 평균 33%의 관세를 인하했다. 도쿄 라운드의 합의에 따른 관세인하가 87년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우루과이 라운드가 86년 9월 선언된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종전의 내용에 금융, 정보통신, 건설 등 서비스 분야를 새로이 협상대상에 넣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각료급으로 구성된 무역협상위원회이며, 그 산하에 관세, 비관세 농산물, 지적 재산권, 긴급수입제한 등 14개 분야의 상품협상 그룹과 처음 도입된 서비스 협상그룹, 도합 15개 협상 그룹이 있다. 
  1990년 7월 2일 농업협상 그룹 의장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초안을 제출, 선진 7개국의 동의를 얻었다. 그 내용은 모든 수입제한 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페지, 영농자금 융자 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다. 이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자국의 농업을 전혀 보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외 없는 전면개방을 주장하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 뒤에는 나름의 계산과 이유가 숨어 있다. 80년대 들어 농업공황, 제조업의 쇠퇴, 서비스 산업 팽창으로 산업구조가 변한 미국은 그에 따른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를 구축할 필요에 직면했다. 즉 농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세계적 자유무역 질서의 확립 이것이 우루과이 라운드르 통한 미국의 의도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자 미국은 세계유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걸프 전쟁으로 TEKA 후세인을 지칭했고, 이스라엘과 아랍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중동평화회의를 열게 했으며, 이어 로마에서 개최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은 유럽에서 물러설 것을 원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겠다. 는 태도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미국의 영향권을 고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인 것이다. 80년대 초 레이건이 주장했던 팍스 아메리카나가 실현되어가는 느낌이다. 한편 미국의 막강한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에 맞서 유럽은 경제통합뿐 아니아 정치통합까지 추진, 이른바 유럽 일가를 세울 전망이다. 유럽공동체 EC와 유럽 자유무역연합이 통합된 유럽 경제지역EEA 창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유럽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 유럽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의 17%에서 10년 뒤에는 37%로 대폭 증가, 미국과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미국도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경제 및 군사, 안보 블록을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를 앞둔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이기도 하다. 1991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제3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각료회의APEC가 열렸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한국, 아세안ASEAN 6개국, 그리고 중국, 대만, 홍콩의 중국 3국이 참석, 총 15개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방향에 대해 집중토의했다. 
  회의 직전, 말레이지아가 불참을 통고해왔다.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를 결성하자는 말레이지아의 주장에 미국이 보인 태도에 불만의 표시였다. 
  미국의 베어커 국무장관은 미국이 배제되는 무역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는 내용의 비망록을 일본에 보내는 한편, 한국에는 말레이지아는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랬다 며 압력을 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의사대로 말레이지아 안에 반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대해 말레이지아 마하티르 총리는 말했다. 
  미국은 작은 나라들의 미래에 위협이 돼가고 있다.


95. 루마니아 영웅 에서  독재자로-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8년/제6공화국 출범. 서울 제24회 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열림.

 

  1989년 12월 27일, 루마니아 텔레비전은 대통령 차우세스쿠와 그 부인 엘레나 부통령의 재판기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했다. 차우세스쿠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집어던지며 화가 난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으며, 옆에 앉은 엘레나는 시종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이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구국위원회는 두 사람이 12월 25일 비밀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형집행 직후의 두 사람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일간지 머릿기사를 크게 장식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부쿠레슈티 근교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33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반나치 운동을 벌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96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74년에 유럽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여타의 동유럽 사회주의국들과는 달리 분명한 독자노선을 걸었다. 68년 바르샤바 조약국의 체코 침공을 비난했으면,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추진한 중공업정책이었다.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수출 위주의 석유화학공업에 치중한 그의 중공업정책은 수출 비용의 엄청난 증가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화학 투자에 끌어들인 외채 110억 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차우세스쿠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외채상환에 두고 극도의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식량, 원자재 등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무어든 수출했다. 국민들은 희생과 인내로 견뎌야 했다. 1인당 육류 배급량 월 500g, 빵 하루 160g,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전력과 휘발유 공급까지 제한되어야 했다. 
  국민의 드높아지는 불만과 쿠데타 위협을 누르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군대가 미덥지 않자 보안군에게 각종 특혜를 주어 자신의 친위대로 키웠다. 보안군 내에는 비밀경찰을 두었다.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89년 12월 16일 루마니아 서부 티미시와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영토였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헝가리 인이다. 이날의 시위는 이들 헝가리인의 인권옹호에 앞장섰던 개신교 목사 
토에케스를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 경찰이 강제연행하는 데 항거, 주민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저항한 데서 비롯되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21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는 관제 궐기대회가 열렸다. 차우세스쿠의 사진과 그를 칭송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내걸린 가운데 수십만의 군중이 모였다. 
  차우세스쿠가 연단에 올라 지난 주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위를 제국주의자들과 그 스파이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격렬히 성토했다. 순간 군중 속에서 야유와 함께 차우세스쿠 퇴진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 호응했다. 궐기대회를 생방송하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텅 빈 하늘을 보여주더니 노래가 나오다가 이내 흰 브라운관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국영 라디오는 한동안 분노에 찬 군중들의 외침을 방송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함성은 곧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보안 요원들은 군중을 무차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현장에서 8명을 즉결 처분했다. 잠시 후 차우세스쿠는 다시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까지 부쿠레슈티시는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만명의 시위대로 들끓었다. 
  다음날 22일, 시위는 계속되었다. 보안군의 총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오후,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시위대에 가세한 루마니아 정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성난 시민과 함께 대통령 관저로 행진해왔다. 차우세스쿠는 군중에게 연설하려다가 야유를 받고 부인 엘레나와 함께 공산당 본부 건물 옥상에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했다. 이어 부쿠레슈티 라디오 방송국은 
마네스쿠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위워회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구국전선은 비공개 비밀 군사재판을 열어 차우세스쿠 부부를 전격적으로 처형시키고, 국민에게 녹화 테이프를 공개했다. 그러나 그 테이프는 절반 이상이 삭제되어 본래 2시간짜리가 45분짜리로 줄어 있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구국위원회는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마니아의 영웅에서 소름끼치는 독재자로 전락한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루마니아에는 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헬무트 콜로-독일 통일(19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0년/한,소 수교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자리잡은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삼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퍼졌다. 뒤이어 환성이 터지고 폭음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꽃이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동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 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2일 저녁 9시,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는 동독 정부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시종 무거운 분위기였다. 쿠르트 마주르의 지휘로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만 아니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착잡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일 기념행사는 의외로 차분히 진행되었다. 3일 오전 11시, 카라얀의 옛집인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홀에서는 통일 독일 출범행사가 개최되었다. 동독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가 맨 먼저 연단에 올라섰다.

  오늘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함께 하며 무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후가 되자 브란덴부르크 문과 제국의회 광장은 다시 인파로 뒤덮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두 건물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는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동독, 정식 명칭 독일민주공화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서독, 정식명칭 독일연방공화국이 면적 37만 5천km2, 인구 7천 760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탄생했다. 
  면적으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다음의 3위이지만 인구는 서유럽 제1위이며, 유럽 전체로 보아도 소련 다음 가는 대국이 된 것이다. 통일 이전의 서독은 국민 총생산 세계 3위, 제일의 수출국, 유럽 공동체 공업생산량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독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다. 
  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자유, 민주 를 외치는 10만 군중의 시위로 시작된 동독의 개혁은 꼭 일년 만에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에 의한 독일 통일로 종결되었다. 
  동독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았다. 90년 3월 18일의 총선에서 동독 노동자들의 63%가 서독과의 급속한 통합을 지지하는 기독교민주연합 등 우익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간 살아온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낳은 결과였다. 
  첫째, 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당의 선전매체들은 항상 동독이 최고라고 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동차를 사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고, 집을 얻으려면 1천 마르크의 뇌물을 줘야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노동자들 사이엔 다음과 같은 농담이 퍼져 있었다. 한 동독시민이 경찰에 가서 외국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여긴 경찰이 어떤 동독으로 가고 싶으냐고 묻자,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8만의 정규요원, 12만의 비정규요원을 거느린 슈타지는 직장뿐 아니라 사생활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비정규요원들은 월 1천 마르크와 자동차를 빨리 공급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진해서 슈타지에 협력했다. 
  셋째, 공장경영에 대한 불만이었다. 극단적인 획일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렸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보수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간부들의 무사안일주의, 관료적 태도는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넷째, 낙후된 서비스 산업과 질 나쁜 소비재에 대한 불만이 컸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서비스 산업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에만 영업을 하기 때문에 라디오나 자동차가 고장나면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한편 좋은 품질의 소비재는 모두 수출되고 정작 국민들에게는 질 나쁜 것만 공급되고 있었다. 
  동독 노동자들의 불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실업상태가 어떤 것인지 몰라 불안하기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일할 수는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독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들의 불만을 자유와 민주, 시장경제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독일인이 통일 직후 가장 많이 쓴 말은 당케, 고르비 였다. 동독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소련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통일에 결정적인 일조를 했다는 뜻에서이다. 탈출하는 동독인에게 국경을 개방하여 통독의 기폭제 역할을 한 헝가리도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 대학의 철학교수 바바라 안더스는 동독의 변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동독의 비극은 지난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민주혁명이 서독으로의 병합으로 끝났다는 데 있다.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끝났다. 


97. 아랍 민족주의의 화신, 후세인-걸프 전쟁 발발(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지방자치제 부활.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 미 공군 F15E 전폭기 중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어 2천 5백 대에 달하는 F15E 전폭기 편대가 잇달아 사우디 중부와 동부지방에서 이륙했다. 
  몇 시간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끝내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력 이외에는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떠나게 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미국민에게 이번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벽 3시,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왕과 그 가족은 재빨리 사우디로 도망을 쳤고, 이라크 군은 별반 저항도 받지 않고 7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주목거리가 되었다. 세계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던 중 10월 8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 팔레스타인 인 20여 명이 죽고 150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실탄, 고무탄,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한 것이다. 이는 유태인들이 통곡의 벽 위 예루살렘 신전 터에 새 신전을 세우려 한다는 보도가 있은 후 일어난 사건이었다. 67년의 중동전쟁 이래 최악의 유혈사태였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번 학살에 대한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1월 29일, 오는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전쟁 이후 40년 만에 유엔 사상 두 번째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미국은 20만의 병력을 페르시아 만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시한을 넘긴 지 24시간 후인 1991년 1월 16일 자정을 기해 미국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전면 공습,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뗀 지 25년 만에 다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서방측에는 잔인한 독재자요 아랍제국 건설의 야망에 들뜬 전쟁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랍 인들은 그를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아랍 인들은 수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수탈과 모멸을 받아왔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바빌로니아 영광과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 장군, 제국주의 열강과 맞섰던 나세르 대통령을 기억하는 아랍 인들은 후세인을 그 연장선상에 놓았다. 
  걸프 전쟁은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선을 보인 화련한 무기 전시장이었다. 30cm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레이더에도 포착되지 않는 F117A 스텔스 기,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위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미사일 공격을 미리 알고 경보를 발하는 조기경보 위성, 구름층은 물론 사막의 모래층까지 3m가량 투시할 수 있는 레이더 위성 라크로스, 적진관측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사진정찰위성 등 첨단 과학기술과 전자장비가 총동원된 전자오락 게임 같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다국적군은 이 최신무기로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 꼴로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2월 24일 미, 영, 프, 사우디 11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은 지상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중재로 이라크가 제시한 8개안의 종전 평화협의안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26일 새벽 1시 35분, 이라크는 쿠웨이트 주둔군을 철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무러 통보를 받지 못했다.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7일, 부시 대통령은 밤 12시를 기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휴전회담은 3월 3일 이라크 남부 사프완 공군기지에서 열렸다. 미국의 슈와르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 사우디의 할리드 빈 술탄 아랍군 사령관, 이라크이 아미드 국방부 작전국장, 마흐무드 3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전면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40일에 걸친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98. 핵과 인류의 미래-미국, 단거리 핵 폐기 선언 (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27일 대통령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TV중계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일방 폐기 또는 철수할 것을 선언했다. 
  미국이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핵무기는 유럽에 배치된 수천기의 핵폭탄, 지상 발사 미사일, 잠수함과 전함에 탑재된 4백기 이상의 토마호크 핵 크루즈 미사일, 항공모함의 핵폭탄 등이다. 여기에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에 배치되어 있는 핵무기도 포함된다. 미국의 핵무기 전문가가 펴낸  핵전장이란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군산 미공군기지에 핵폭탄 60개, 8인치포 핵포탄 40개, 155밀리 곡사포 핵포탄 30개, 핵지뢰 21개, 총 151개의 전술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미국 방위정보 센터는 주한 미군의 F4팬텀을 비롯하여 지대지 로켓, 지대지 미사일 등 핵무기 운반기능 무기에 운반가능 탄두 수를 곱하는 산출방식으로 계산, 661개 내지 686개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부시 선언으로 단거리 핵이 폐기되어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 ICBM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SLBM등 전략 핵무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 방위구상은 계속 추진되고 있어 핵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핵전쟁은 온 인류를 파멸시킬 아킬레스 건이다. 지금까지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을 경우, 인류의 반수가 즉사 혹은 단기간에 죽더라도 나머지 반수는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생존자의 앞날에 핵겨울 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결국 온 인류가 멸절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우선 원자폭탄 투하로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고 그 때문에 생긴 그을음 섞인 연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원폭 투하 후 약 10일쯤에는 두터운 연기층이 북반구를 뒤덮게 된다. 핵공격을 면한 지역에도 강한 편서풍에 의해 두터운 연기층이 몰려올 것이다. 몇 주일 후 이 연기층은 남반구에까지 퍼진다. 
  원폭투하 20일 후, 연기층이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북반구의 중위도 지방은 평균기온보다 약 50도 정도 기온이 떨어진다. 그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어둡고 지독히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 이러한 기온변화로 우선 농업이 괴멸된다. 북반구 중위도 지방은 농업지대이므로, 설령 핵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라 해도 세계농업의 파탄으로 인한 기아상태를 면할 수 없다. 이윽고 모든 동식물은 집단적인 멸종위기에 빠지고 만다.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현재 미국과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단 10분의 1만 써도 핵겨울이란 대규모 기후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초 그 충분량을 넘어섰다. 
  인류를 파멸시킬 또하나의 위험은 온실효과 이다. 지구를 알맞게 따뜻이 데워주는 것은 대기주위 이산화탄소이다. 이산화탄소가 태양광선의 적외선을 흡수, 열의 대기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기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계속 늘어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오랜 기간 석유,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대량 사용해온 결과이다. 아직까지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은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한다면, 21세기 중반에 이르러 지구의 기온은 전체적으로 몇 도쯤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온도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우선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지구상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면이 10m가량 높아져 연안의 도시들은 모조리 물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 원숭이로부터 인간을 진화케 한 것은 평균 5도 정도의 기온 변화였다.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는 이번엔 인류를 멸절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구 가까이에는 금성이 있는데 그곳 대기에는 실로 엄청난 이산화탄소가 함유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량의 태양열이 대기밖으로 방사되지 못해서 금성의 표면온도는 무려 섭씨 470도라는 고온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서양의 고전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지옥의 세계인 것이다. 지구도 이대로 이산화탄소를 계속 방출한다면 틀림없이 금성처럼 된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말이다. 
  온실효과를 막으려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여야 하고 현재로선 화석연료를 쓰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태양열, 지열, 조류, 핵융합 등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중 실용화에 따르는 경제성을 고려할 때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핵융합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절대로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기술 이다. 
1986년 5월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상 최악의 사고가 발생,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에 경종을 울렸다. 원자력 사용에 따르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도 커다란 문제거리이다. 원자력 발전에 사용된 핵연료에서 나온 플루토늄 239는 극히 적은 양으로 폐암을 일으키는 맹독성인데다가 10kg만 가지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그 위험이 없어지려면 반감기의 열 배인 무려 24만 년 동안 엄중히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원자로의 수명은 불과 평균 30년이다. 
  이렇게 볼 때 원자력의 이용은 분명 파우스트의 거래이다. 일시적인 편리의 대가로 후손들에게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을 남겨주는 셈인 것이다. 라듐 발견으로 원자력 시대의 문을 연 퀴리는 1903년 라듐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라듐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인간이 자연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인간정신이 성숙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99. 현대의 흑사병, 에이즈-제4차 세계 에이즈 날(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한반도 비핵화 선언, 서울 APEC 제3차 각료 회의 개최

 

  1991년 12월 1일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정한 제4차 세계 에이즈 날이다.
이날 160개국에서 이 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졌다. 미국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에이즈로 사망한 10만 명의 미국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날 밤 대형 빌딩과 교각의 불이 일제히 꺼졌으며, 프랑스에서는 파리 시내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에 8백 명의 어린이 에이즈 환자를 상징하는 8백개의 트리 장식물을 내걸었다. 영국에서는 수백 개의 교회가 예배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는 한편, 성공회의 조지 캐리 켄터베리 대주교와 가수 클리프 리처드 등이 에이즈 퇴치를 호소했다. 소련 모스크바 시 청사 부근에서는 러시아 동성연애자협회 회원들이 콘돔과 함께 안전한 성생활에 관한 책자를 무료로 배포했다.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91년 10월 현재 보고된 세계의 에이즈 환자 수는 약 42만 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50만 명의 환자와 800만 내지 천만의 보균자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서기 2000년에는 에이즈 환자 수가 1,200만 내지 1,800만으로 늘어날 것이며, 에이즈를 발병케 하는 HIV바이러스 양성 반응자 수는 무려 4천만에 다다를 것으로 내다보았다. 
  일단 걸리면, 신체의 면역성이 떨어져 급기야 사망하고 마는 불치의 병 에이즈, 에이즈가 맨처음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프리카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최초로 환자가 발견된 것은 미국에서라는 정도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전염되며 치료법이나 예방법이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그 전염경로가 주로 성적 접촉을 통해서라는 점에서 에이즈는 현대인의 도덕성 문제와 결부되어 현대의 흑사병, 신이 내린 천형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현재 세계 각처에서 매일 5천 명 꼴로 새로운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미국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으로 보고된 것은 1981년이다. 미국 공중보건 당국은 이 병은 반드시 피를 통하거나 성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전염되는 것이지, 공기나 음식으로는 절대 옮기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악수를 하거나, 화장실을 같이 쓰거나, 샤워를 같이 하거나, 음식을 같이 먹거나, 사무실 집기를 같이 쓰는 것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대단했다. 뉴저지 주 워싱턴보로에 사는 9살 된 소년은 누이 동생이 이 병의 증세를 갖고 있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소년의 학급 학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교회의 예배양식도 달라져야 했다. 성찬식 때 사람들이 빵만 받아들고 포도주 잔에는 입에 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90년 3월 현재 보사부에 공식통보된 주한 미군 에이즈 감염자는 33명, 그러나 이 숫자는 한국인 여성과 접촉한 사실이 있는 경우에 한하므로 실제 숫자는 50여 명에 달한다고 보사부는 발표했다. 우리 나라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 발생한 것은 1985년 6월이다. 외국인 교환 교수였던 그 환자는 본군으로 돌아가 사망했다. 이후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 수는 급증, 90년 3월에는 총 78명, 91년 12월에는 그 두배를 넘는 총 167명이 보고되었다. 그 가운데 15명이 사망하고 1명은 출국, 현재 151명이 있는데 남자가 134명, 여자가 17명이다. 
  에이즈는 성관계가 문란한 사람이다. 동성 연애자들이 걸리는 병으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에는 수술시 수혈받은 피를 통해 감염된 경우가 상다수 보고되었으며, 91년 11월 한달 동안에만 목사, 가정주부, 외향선원 등 5명이 새롭게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에이즈는 동성 연애자나 윤락여성만 걸리는 병이 아니라 누구든지 언제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 되어버린 것이다. 
  1991년 6월 21일 이탈리아에서 세계 에이즈 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96년경 예방백신이 개발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현재 에이즈 예방백신에 대한 연구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와 겉모양만 똑같은 바이러스를 반들어 항체형성을 유도하는 방법, 에이즈 바이러스를 대량 배양하여 바이러스를 죽인 다음 표면 단백질을 잘게 나눠 항원으로 만들어서 체내에 주입하는 방법, 에이즈 바이러스의 핵심 유전자를 죽여 바이러스를 불활성화시킨 다음 그대로 체내에 주입, 항체를 유도하는 방법 등 백신 개발을 위한 접근방법도 다양하나 그 어느 것도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쓰러뜨리고 중세를 몰락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20세기 말,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는 에이즈는 과연 어떤 역사적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심각히 대두되는 환경문제, 핵문제와 더불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진 않을까 생각한다.


100. 사가라드는 현존 사회주의-소연방해체, 독립국가공동체 출범(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국제노동기구ILO가입,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을 위한 합의서) 채택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크라프추크 우쿠라이나 공화국 대통령, 슈시케비치 벨로루스(구 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3인 독립국가 공동체 창설을 선언했다. 벨로루스의 부크 강변에 있는 브레스트에서 비공개 회담을 가진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대신 외교, 국방 핵 통제권을 공동관장하는 독립 공화국들의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3개국만의 합의로 소련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고 반대했다. 그러나 나머지 8개 공화국들이 속속 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대세가 기울자 고르바초프도 하는 수 없이 이에 승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발트 3국이 독립해 떨어져나간 후, 나머지 공화국들을 묶어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던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1917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로 당당히 출범한 지 꼭 74년 만의 일이다. 

  독립국가 공동체는 겉으로는 소비에트 연방과 비슷하지만, 실인즉 아주 다르다. 우선 공동체는 구 소련 같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갖지 않는다. 구 연방 하에서는 중앙정부 밑에 있는 행정단위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 데 비해, 이제는 각 공화국이 저마다 하나의 독립국이 되어 독자의 법률, 정책, 외교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본부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벨로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11개 공화국 가운데 가장 큰 러시아 공화국이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그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이 구 소련의 모든 채무를 승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보리스 옐친, 그는 1931년 2월 1일 우랄 산맥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건설기술자가 된 그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67년부터 85년까지 지방 당에서 일하다가 81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어 승진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창하며 소련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자,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도 더 진보적인 개혁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유의 기수로 자타가 인정할 만큼 각광을 받은 것은 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도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열변을 토한 순간부터였다. 이 순간 이후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누르고 새 시대를 열 주인공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후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지니고 있던 연방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차례차례 빼앗기 시작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은 구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헛된 노력에 불과하며, 연방이라는 껍데기를 고수해서는 결코 새로운 소련을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러시아 공화국이 패권을 행사하는 러시아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다. 각 공화국들의 독립주권을 인정하되, 러시아 공화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둔다는 구상인 것이다. 
  옐친의 계혹은 일단 성공한 듯하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6일 연방대통령 직에서 물러났으며, 
독립국가공동체는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미래와 옐친의 앞날이 장미빛인 것만은 아니다. 
  독립국가공동체가 우리를 배불리 먹여주기나 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모스크바에 사는 어느 부인의 말처럼, 소련인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옐친은 그 해결책으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해온 소련을 하루아침에 시장경제로 바꾸는 데는 무한정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옐친 자신을 비롯하여 소련 국민의 대다수는 시장경제 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구 소연방 시절에는 국가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대신 그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면, 앞으로 소련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냉혹한 시장경제체제에서 생존하는 법 부터 궁리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시장경제체제는 당분간 어떤 의미로든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다음과 같이 소련의 앞날을 우려했다. 
  ...소련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 양면에서 다 같이 자유로워졌습니다...저는 현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불만은 물론 전반적 전위체계와 저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수년간의 민주적 성과들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성과들은 많은 고통과 비극을 겪을 끝에 얻어진 역사적 산물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이유 아래서도 이들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보다 나은 장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땅 속에 묻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소련은 죽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붙인 민족주의 돌풍을 너무 과소평가한 건 아니었을까? 20세기가 사회주의의 시대였다면, 그 마지막 10년의 첫해는 현존 사회주의의 대거 참잠을 알리는 서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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