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라미드 건축의 비밀 - 돌의 무게 6백만t 이상
"찬성"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 지역에
세계 최고(最古), 최대 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 건축물이 우뚝 서있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 전에 건축됐다고 인정하는 이 건축물이
과연 그 옛날 석기와 청동기만을 사용했을 미개인들이 만든 것일까?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사용된 돌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피라미드를
한변의 길이가 30cm인 정육면체 블록으로 쪼개면
지구 둘레의 3분의 2까지 늘어놓을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총 6백만t이 넘는다.
이정도 규모의 토목건축사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 구조가 뒷받침됐음을
의미한다.
토목건축사업은 여러 기술과 산업들이 총집결돼 이루어지는 것으로
건축 당시 과학기술력의 전체적인 수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축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초첨단 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대피라미드를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피라미드 건축에 적용된 오차의 범위가
오눌날의 건축물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 뺨치는 정밀성
예를 들어 오늘날 가장 정밀한 건축물의 대표격인 파리 천문대와 그리니치 천문대는
각각 정확히 자오선(어떤 지점에서 정북과 정남을 따라 천구에 상상으로 그은 선)과
일치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실제로 측정한 결과 각 천문대는 자오선 방향에 대해 6호분과 9호분씩 틀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대피라미드는 3호분 남짓 어긋나 있을 뿐이다.
또 오늘날 레이저빔을 이용한 초정밀 수준기(평면의 수평 정도를 측정하는 기계)로
건설되는 건물의 수준 오차는 전체 규격의 0.2% 남짓인데 비해
대피라미드는 전체 밑면적에서 겨우 0.03% 정도의 오차를 보여준다.
즉 대피라미드 건설에 적용된 기술과 기능이 오늘날보다 월등히 우수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당시 이집트인들의 기능적인 능력을 극찬하면서
그들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건축의 정밀도가 전적으로 기능에만 의존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보다 당시에 매우 발달한 기술 수준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그들의 초인적인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대피라미드가 건설될 때
오늘날의 정밀 측정기에 버금가는 기기가 사용됐음에 틀림 없다.
이런 증거는 초고대에 구현된 다른 기술적 업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까마득한 옛날에 현재와 같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선왕조 시대에 제작된 돌항아리의 신비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3천8백년 전에 건설되기 시작됐다고 한다.
즉 상·하 이집트가 통일돼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대피라미드와 같은
초거대·초정밀 건축을 할 수 있는 문명이 이집트 땅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이집트 통일 왕국은 씨족사회와 부족사회, 그리고
다음 단계인 부족 국가 형태를 거치면서 더욱 발달한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찬란한 수준의 고도 산업사회 붕괴 후에 다시 시작한 문명이었음이 명백하다.
이런 설명을 지지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대피라미드 건설 수준에 어울리는
정밀가공 기술이 그것이다.
정밀가공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증거물은
기원전 4천년 경 선왕조 시대에 발견되는
돌항아리다.
주류 고고학자들은 왕조 형성기 이전이 부족 국가의 신석기 시대였으므로
당시 신석기 항아리가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항아리에 적용된 기술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항아리가 미개 문명의 뉘앙스를 풍기는
신석기 시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조시대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돌항아리들은
현무암, 화강암, 섬록암과 같이 쇠보다 강한 암석을 깎아서 만든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돌항아리들이 제례 의식을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별히 제작한 수공업제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항아리의 수는 3만여개가 넘는다.
즉 그 옛날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항아리가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고성능 모터가 동원돼야
돌항아리의 안팎 표면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항아리를 회전시키며 가공한 것이 틀림없음을 증명해주는
미세한 동심원 모양의 가공 흔적이 발견됐다.
항아리 제작에 선반이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이는 우리 인류의 기술사에 일대 지각 변동을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발견이다.
선반 작업은 물체를 고속으로 회전시키면서 절삭 공구로 안팎을 깎아내는 공정이다.
하지만 현무암같이 쇠보다 단단한 돌을 절삭하는 일은 오늘날의 특수한 공구로도 불가능하다.
설령 그런 용도의 절삭 공구가 개발된다고 해도
공구와 물체 사이에 높은 압력을 걸어줘야 한다. 또 물체가 초고속으로 회전해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이집트학 학자 플린더스 피트리는
이런 가공에 최소한 2t 이상의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고 추정했다.
오늘날 석재 가공 전문가들은 이보다 훨씬 큰 압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압력을 공구로부터 받는 돌덩어리를 과연 초고속으로 회전시킬수 있을까.
이런 조건에 절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오늘날 기계 가공에 사용되는 고성능 모터같은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터는 오늘날처럼 전기에 의해 구동됐을까.
만일 그 옛날 이 모든 조건이 구비됐다면, 당시는 신석기 시대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것이 존재한 고도의 산업 사회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고도의 산업 사회를 가정하면,
6백만t의 돌들을 채석하고 운반하고 쌓아올린 기술의 수수께끼도 쉽게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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