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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2015년 02월 18일 19시 54분  조회:4666  추천:0  작성자: 죽림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조명제 (시인, 문학평론가)

 

 


  8월 8ㆍ9일에 있은 현대시인협회 세미나는 여러 모로 기억에 남을 행사였다. 우리 현대시 100주년 기념을 겸해 개최된 하계 세미나의 본 행사지는 안면도 자연 송림 속이었다. 100년은 좋이 묵었을 솔숲 아래에 모여 앉아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기조 강연 ?현대시 100년, 두 가지 제언?을 들었다. 선생님은 우리 시가 관념론적 역사주의와 관계론적 형식주의로 맞서 왔으나 지난 100여년 간 현실적으로는 관념적 실체론이 횡행하여 작품의 심미적 형식적 가치가 무시되어 온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앞으로 관계론이나 형식론 쪽으로 눈을 돌려 집중 탐구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두 번째로 나선 심상운 시인은 21세기 ‘하이퍼 텍스트 시’의 이해를 위한 주제 ?單線構造의 세계에서 多線構造의 세계로?를 발표하여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이퍼미디어의 특성에 바탕을 둔 다선구조적 하이퍼시는 디지털 문명 시대의 새로운 소통법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일부 원로 시인들은 비논리적, 비순차적, 비선형적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 링크의 불연속적 상상의 가지치기가 어떻게 원활한 소통이 되겠느냐고 반박하는 등 잠시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 번째로 나선 필자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정통 계보와 현실?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불행한 민족 문학의 사상 대립과 갈등을 허두에서 언급하고,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통 계보와 그 현주소를 짚었다. 특히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이퍼모더니즘으로의 전개가 문덕수ㆍ김규화 주재의 <시문학>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피력하여 공감을 얻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일행은 지역 시인들의 안내로 낯선 모감주나무 바닷가로 가서 휴식하고, 다시 샛별 해수욕장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일몰을 감상한 뒤 팬션 식당 ‘신밧드의 모험’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담론하였다. 참석자들은 알선자의 호언장담과는 별개인 음식과 서비스, 숙박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신밧드의 모험’에서의 모험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8월 30ㆍ31일 양일 간에 걸쳐, 가평군 북면 제령리 소재 김용언 시인의 전원주택에서 열린 한국시문학문인회 제28회 ‘주제가 있는 시 낭송회’ 에서도 토론의 주된 화제는 단연 하이퍼시였다.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시론 ?사물과 기호?를 읽고 자유로이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이었는데, 하이퍼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성, 창작 방법 등에 대해서 주로 신규호, 심상운, 오남구, 조명제(필자) 등이 해명에 나섰다.
 <시문학> 9월호는 비교적 전면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의 하이퍼 시집을 싣고 있다. <시문학> 4월호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가 예고되고, 5월호에 기획 특집으로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시인 등 동인들의 그 첫 번째 하이퍼시가 발표된 이후 두 번째의 기획 특집이다.

       

       할머니 바지 길어요
        짚뭉치가발 쓴 하송(下松) 마을 서낭당 돌머리 웃고 있다.
        허리가 짧아졌으니까
        면사무소 가는 길이 해발 오십미터 소나무고개로 휘는 시절
        네 바지가 길다, 얘
        상송(上松) 마을 동무와 하송 마을 고모의 수다
        몸 살을 뺐거든(요)

                      그만 Bar
                      Diet Bar
                      나의 슬림한 몸매가 부러워요?
                      너도 Diet Bar해!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
        추수가 끝나자 찾아든 농악대들
        동네 들머리에서부터 지신 밟는 그들의 숭얼숭얼한 웃음
        그대의 바지가 길구나
        제 높은 구두 뒤축을 부러뜨렸잖아요, 하느님
        바람, 햇볕, 볏단 그리고 하늘
        그동안 당신이 머리 위에서 누르고 또 눌렀어요
        신의 땅 라싸 해발 오천 미터, 경전을 외는 한 무리들
                                                    -김규화 ?과학적 이유 세 가지? 전문

 

 우리 현대시가 여전히 ‘2천여 년 전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오고 있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며 하이퍼텍스트 시운동에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적 시쓰기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가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는 적어도 <시문학> 출신 시인들이나 현대시협의 시인들은 그 동안 발표된 디지털리즘이나 하이퍼 시론과 작품들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시는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rhizome) 형태를 구축하며, 일방향적 단선구조에서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시문학> 5월호에 이어 이번에도 김규화 시인은 5편을 발표하면서 몇 가지의 하이퍼적 형식실험을 하고 있다. 인용시 ?과학적 이유 세 가지?는 세 가지 상황에서 바지가 긴 이유들을 중심으로 시 구문들의 모듈(module)화, 자유연상적 하이퍼 링크와 시상의 가지치기 등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우선 이 작품의 제1연은 조향의 ?아시체(雅屍體)놀이?처럼 외견상 행간의 연결이 무시된 이질적 이미지들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홀수행은 홀수행끼리, 짝수행은 짝수행끼리 의미 맥락이 연결되게 깍지끼듯 구성된 특성을 발결할 수 있다. 일종의 어긋매끼식 병치 구조 형식인 셈이다.
 홀수행을 보면 선문답처럼 간결한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할머니와 화자가 서로 상대방의 바지가 길다라고 하면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답변하는 형식이다. 제1연의 화자는 아마 날씬한 몸매를 위하여 다이어트를 한 게 분명해 보인다. ‘다이어트로 몸 살을 뺀 슬림한 몸매’는 곧바로 지하철 구내에서 보아온 광고 문구로 링크되고, 그 광고 문구가 그대로 몽타주처럼 편집, 연결된다. 언어유희적이며 경쾌한 문구의 그 ‘슬림한 몸매’의 주인공은 다음 연의 첫 행을 이룬다.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와 그 다음 행은 내적 맥락의 연속성을 볼 수 없는 단절적 구조로 되어 있다. 굳이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민다리를 꼰다’의 ‘꼰다’이다. 다리를 꼰다에서 새끼를 꼰다로 불연속적 하이퍼 링크가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수가 끝나고 새 지붕을 이거나 가마니를 짜기 위해 새끼꼬기에 들어가는 시절 농악대들이 지신을 밟으며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하 땅신(지신)에서 높은 곳의 신 하느님으로, 하느님에서 하늘로, 높은 하늘에서 누르기로, 신기(神氣)를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받게 되는 신의 땅 하면 해발 5천미터 티베트의 라싸, 가난한 그곳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건히 경전을 욀 때, 해발 5십미터 소나무 고갯길의 이 땅에서는 몸매 만들기(몸짱)에 목메고 있는 현실로 링크하여 시공과 의식, 무의식을 넘나들고 건너뛰며 집합적 결합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편의상 이렇게 해석해 보았지만, 작가의 자유분방한 하이퍼적 상상과 의식의 흐름을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할 수는 없다. 미국의 한 비평가는 “모든 글읽기는 오독이다.”라고 한 바 있지만, 특히 하이퍼시의 경우 글 읽기의 최종적 이해는 독자 각자의 즐거운 몫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다른 작품 ?달팽이와의 대화?는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건너는 사이 달팽이를 기른다는 맹인 아이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팽이 기르기의 특이함이나 신기함도 시읽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지극히 사실적인 대화에서 관념을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을 보인다. 마치 교통 신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고 캐릭터(달팽이)가 되어 아이는 ‘달팽이 길로 사라진다.’ 나머지 세 편 ?빨강보다 더 빨강? ?떡갈나무 많아? ?쪽공원의 쪽공간?들도 시어의 어감이나 감각적 이미지의 분방한 연상으로 다채롭게 완성시켜 놓았다.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 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꽃들과  어우려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종일 은백 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심상운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전문

 

 견고한 이미지의 모더니즘 시를 써 오던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 시인의 디지털리즘 선언 무렵부터 동참, 디지털 시론과 최근 하이퍼 시의 이론을 함께 개척해 가면서 시적 경향을 그런 쪽으로 급선회하여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인용한 시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는 순간 포착의 한 이미지를 좇아 의식, 무의식의 자유분방한 연상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신록의 5월 북한산 산행에서 바람에 물결처럼 뒤집히며 비봉(碑峰)쪽으로 몰리는 나뭇잎들의 풍경을 ‘은백색의 깃털’ 이미지로 순간 포착한다. 그 은백색 깃털은 ‘은빛 부챗살’로 전이되고,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경쾌한 UFO’로 건너뛴다. 이 은빛 이미지의 파노라마는 어느 12월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먹으며 반 고흐의 그림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덮어 버린 강설(降雪), 곧 ‘은백색의 젊은 눈들’로 가지를 치며 링크된다. 
 그 ‘은백색의 축제’는 만년설의 나라 네팔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 고산지대’로 뛴다. 시인은 숨 쉬기조차 어려운 고지의 ‘새파란 공기층’이야말로 끝없는 공상과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UFO의 탄생지가 아닐까라는 상상으로 텍스트를 마감한다. 별이 빛나는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바깥은 어느새 구름끼고 소리없이 눈이 내려 도시를 덮어 버린 대조적 풍경과 약간의 가지치기 외에는 주로 연상에서 연상의 확산으로 이어진 하이퍼 링크를 보여 준 작품이다. 
시인의 다른 작품 ?사각 스크린?도 스크린 같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의 역동성을 모티브로 무한 상상을 환상적으로 펼쳐 낸 작품이며, ?그림 또는 링크? ?파란색 기차? ?헤드라이트? 등도 스타일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오남구 ?사과? 전문

 

 번쩍이는 의식과 감각의 오남구 시인은 일찍이 시의 관념 파괴와 시작 과정의 심리적 현상을 수학적 논리로 증명해 왔으며, 디지털 시대의 문화 논리를 재빠르게 접수하여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작품적 실천을 주도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리고 비록 미국보다 20여년 뒤의 일이요, 우리에게 하이퍼 문학이 소개된 이후 5?6년 뒤의 일이긴 하나 그는 우리 문단에 하이퍼텍스트 시를 논의의 중심에 올려 놓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더러 즉흥적이고 산발적이거나, 때로 단편적인 이론을 가다듬고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코치하고 논리적 뒷받침을 해 준 이는 문덕수 시인이다. 특히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당연히 전자하이퍼 문학을 말하는 것인데, 그와 구별되는 종이하이퍼 문학을 문덕수 시인이 천명해 줌으로써 하이퍼시 논의의 획기적 진전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시인은 이번에 ?사과? ?관광버스? ?젓가락? ?신호등? ?약수터?의 5편을 선보이고 있다. 시상 전개의 재치와 언어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문장의 팽팽한 긴장미가 오남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시 ?사과?를 보면, 자유로운 언어놀이, 의미의 전이와 전복, 풍자적 반전 등 하이퍼 링크의 두드러진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동진강 상류 ‘배들녘(조선 후기 조병갑이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의 저항을 받아 동학란을 자초한 만석보가 있는 들녘이다)’, 그 배들녘은 지금 한창 자라는 풋벼로 바다 같은 풍경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역동적인 동해의 일출처럼 풋벼의 아침 지평선 위로 해가 ‘풍!’하고 솟아올랐다가 서서히 빛을 확산하는 모양이 거대한 붉은 사과 같다고 인식한다. ‘배들녘’은 원래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고 해서 ‘배들이’ 들판이라 이름지어진 곳이다. 
 시인은 그 ‘배들이 들판’이라는 말에서 ‘들판’의 동음 어의 뒤집기의 연상 링크로 의미의 맥락을 전복시켜 동학란의 역사적 상황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그러니까 ‘들판(野外/平野)→들판(擧板)→피켓’으로 연상작용을 펼쳐 간다. 그 사이에 거룻배들이 드나들었다는 뜻의 ‘배들이’ 역시 의미 연상의 가지치기를 하여 ‘손해 난 배’ 들로 뒤집고, 그 적자를 본 배들은 빚 독촉에 ‘들들 볶일 판’의 ‘들판’으로, 다시 들판피켓을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의 ‘들판’으로 분방하게 링크해 간 것이다. 
 이렇듯 숨가삐 언어유희로 전의(轉義)시켜온 다음 고요한 바다(수평선) 같은 풋벼의 들판으로 돌아가 황혼녘 지는 해를 사과처럼 주먹 속에 받아 쥐고 굴린다. ‘주먹 속에 받아쥔 해 사과를 굴린다’의 ‘굴린다’는 말은 지금까지 어의를 연상에 의해 이리저리 ‘굴려’ 온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통합된다. 끝 부분의 가르마 같은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라고 표현한 대목은 이 작품의 집합적 의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 동학란 이미지로 결집됨을 말해 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약수터?는 마치 한 폭의 동영상의 상황화(狀況畵) 같기도 하고, 짤막한 상황극 같기도 한 재미를 던져 준다. 해돋이 무렵의 약수터 풍경은 그림 같다. 물을 받으며 (옆에 빈 자리가 있는) 장의자에 앉은 노인 셋이 기호화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캐릭터 ‘빨간 딸기코’가 침묵을 깬다. “왜 걔가 안 보여?”, 캐릭터 ‘낡은 골프모자’와 ‘굵은 테안경’이 지극히 간결하고 천역던스럽게 “그러게 말여” “갔나 벼”라고 주고 받고는 다시 말없이 앉아서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놓고 있다. 수다는커녕 이런저런 말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노년, 한두 마디로 수천 마디에 값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나이의 상황극을 완결짓는 것은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캐릭터 ‘반백의 꽁지머리’이다. 그는 ‘구릉에서 약수터로 내려와 페트병 하나를 놓고 몇 번 팔 굽혀 폈다가 빈 의자 끝에 앉는다.’ 사실적 상황의 절묘함은 더 이상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자의 말에 의하면, 셋째행에 있는 ‘해가 반사경처럼 약수터를 환히 밝혀 놓는다.’는 진술은 떠오르는 해가 한 캐릭터의 대머리에 비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숙연함과 코믹함이 작가 특유의 절제미로 잘 버물러진 한 편의 시로 보인다.

 지금까지 하이퍼시 텍스트를 접해 온 시인들 가운데는 이념과 용어, 이론과 작품, 자기 모방과 유행어, 감동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하이퍼시를 쓰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난관을 차근차근 극복해 나갈 때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다 빨리 열릴 것이다.

 원로 김광림 시인의 ?바위벽에 드러난 얼굴? ?八旬이란? ?외톨이? 등 지극히 절제된 세 편은 세상과 사물을 대하는 연륜의 깊이와 무심,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흔히 보게 되는 요설이나 겉멋, 군더더기, 손끝 기교를 전혀 볼 수 없는 담백함과, 거울 같은 시심을 직면케 한다. 그 중 ?외톨이?는 세상 잡사를 초월한 아득한 시적 경지를 보여 준다.

  

 외가지/끝에/앉아 있는/새야/참 새야/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 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김광림 ?외톨이? 전문

 

 이것이야말로 정신의 하이퍼 링크이며 절제된 텃치의 자화상이요, 8순의 시인이 쓴 원숙한 자작시론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같은 경지에 매료되다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의 관심사인 하이퍼시 특집에 집중하게 된 까닭에 심도 있게 논의하지는 못하지만, 김기성의 ?천직?, 신작시집 중 김윤희의 ?비의 포식?, 김순진의 ?복어 화석?, 이선의 ?누드크로키? 등을 재미있게, 혹은 인상 깊게 읽었다. 그리고 현대시협 세미나 때 거론된 신인 김용인(7월호 당선) 시인과 시문학문인회 시낭송회 때 참석하여 의외의 면모로 주목받은 이옥교(7월호 당선) 시인의 데뷰 작품을 정독하였다. 김용인의 심오한 개성과 이옥교의 예리하고 간결한 시정(詩情)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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