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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상투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시계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해 둥근 시계판과 시간을 가르키는 숫자들, 그리고 시침을 반복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여기에 반복강박적인 집요한 사유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의 이미지들은 시간과 그리고 공간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다. 그것은 또한 운동과 정지에 대한 상상력이며, 나아가서 현실과 가상에 대한 고뇌의 얼룩들이다.
클로즈업된 극사실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매우 비사실적인 이미지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시지각은 사물의 대강의 이미지(윤곽과 특징)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결시킨다. 따라서 세부적인 극사실의 이미지가 클로즈업 되는 순간은 사물이 시간의 수평적 흐름을 벗어나서 수직적으로 비약하는 특이한 순간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시간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극사실은 오히려 환상적 효과를 낳는다. 그 곳은 시간의 입자들이 증발해 버린 비현실적인 순수 공간 같은 곳이다. 이석주는 이러한 무시간적 극사실의 공간 속에 시간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려 넣고 있다. 이것은 무척 이질적이고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시계판은 그 자체로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지속을 지시하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공간적 양으로 절단한다. 다시 말해서 시계판은 운동이면서 정지이다―이석주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판이나 바퀴 역시 시계판의 변형 이미지이다. 또한 형태상으로도 시계판은 원이면서 직선(침)이다. 가끔 화살표로도 표현되는 직선의 침은 원을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만 끊임없이 원으로 회귀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계판 앞에서 우리는 양가적 모순이 발생시키는 기이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시계판은 이석주가 탐색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가장 강렬하게 이미지화 한다.
이석주의 기차는 긴 연기를 뿜으며 먼 곳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극사실 기법으로 클로즈업된 기차의 이미지에서는 움직임이 사라진다(물론 원경으로 처리된 기차에게서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석주의 기차는 정지된 먼 여행이다. 시계의 시침처럼 직선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언제나 시계판의 원에 수렴된다(시계판의 원을 도는 기차 그림도 있다). 정지된 먼 여행은 회상이나 몽상의 동력학이다. 이것이 <일상>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석주의 비선형적이며 몽상적인 시공간이다.
그러나 그 몽상의 시공간은 순수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도처에 얼룩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얼룩이 몽상의 재현 공간을 방해하고 있다. 이석주의 그림을 일별하다 보면 극사실로 재현된 환영(가상)의 공간 속에 당혹스럽게도 마구 칠해진 초록색의 얼룩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얼룩은 몽상의 시공간을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으며, 얼룩을 통해 <일상>의 현실이, 현실의 시공간이 화면으로 끊임없이 개입한다. 마치 몽상을 가로막는 벽처럼. 그렇다. 그의 초기작인 <벽>은 이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가 창조하는 환영의 시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은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환영의 공간들이 사실은 어떤 벽면이나 판자의 표면임을 얼룩의 흔적들은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룩은 또한 환영의 공간이 사실은 화보의 한 페이지임을 보여주는, 접히는 중간선의 흔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허공에 떠 있는 깃털이나 낙엽도 얼룩의 변형태이다. / 이성희 (철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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