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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관한 시모음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2월의 시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시간을 아켜 쓰고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가라, 옛날이여~
강 건너 간 노래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냇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어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랫불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데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갔소
다시 성탄절에
홍윤숙
내가 어렸을 때 12월, 성탄절은 눈이 내리고 눈길 걸어 산타할아버지 오시는 밤 머리맡에 양말 걸어놓고 나비잠 들면 별은 창마다 보석을 깔고 할아버지 굴뚝 타고 몰래 오셨지
지금은 산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아들 2세 산타 아들이 백화점 대문마다 승용차 타고 오시지만 금테 안경 번쩍이며 에스컬레이터로 오시지만 꽃무늬 포장지에 사랑의 등급 매겨 이름 높은 순서대로 배급도 하시지만
이런 밤 홀로 2천 년 전 그날대로 오시는 예수 어느 큰길 차도에 발묶여 계신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 어찌 나를 저버리는가 이 세상 끝에서도 잊지 못하는 내 사랑 이리 아프게 하는가 몰래 몰래 숨어서 울고 계신가
동지
김영산
팥죽을 쑤다 어머니는 우신다 마당가에 눈이 쌓여 회붐한 저녁나절 시장한 식구들이 안방에 모여앉아 짧은 해처럼 가버린 언니를 생각한다 동생들 학비와 무능한 아비의 약값과 70년대 말 쪼든 양심을 위해 십년이 지나도록 구멍난 생계를 뜨게질하지 못한 딸들을 위해 긴긴밤 무덤들 위에 목화송이 흰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동지
조용미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 우레가 땅 속에서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비익총에 든 두 사람의 뼈는 포개어져 있을까요 생을 거듭한 지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붉고 노랗고 창백한 흰 달에 이끌려
나는 언제까지고 들길을 헤매 다니지요
사랑이나 슬픔보다 더 느리게 지나가는 권태로 색색의 수를 놓는 밤입니다
하늘과 땅만 자꾸 새로워지는 날 영생을 누리려 우레가 땅을 가르고 나오는 적막한 우주의 한 순간입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春風 니블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바밍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내여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이 오시는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동지 다음날
전동균
1 누가 다녀갔는지, 이른 아침 눈 위에 찍혀 있는 낯선 발자국
길 잘못 든 날짐승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간 흔적 같기도 한
그 발자국은 뒷마당을 조심조심 가로질러 와 문 앞에서 한참 서성대다 어디론가 문득 사라졌다
2 어머니 떠나가신 뒤, 몇 해 동안 풋감 하나 열지 않는 감나무 위로 처음 보는 얼굴의 하늘이 지나가고 있다
죽음이 삶을 부르듯 낮고 고요하게
ㅡ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ㅡ 밥은 굶지 않는가? ㅡ 아이들은 잘 크는가?
성탄전야
최영철
맛난 것 먹고 빵빵해진 일가족 오색 풍선 따라 땡그랑 땡그랑 배고프다 노래하는 자선냄비 따라 행복 몇 스푼 눈발로 내리고 있었대요 더운 국물이나 마셔 두려는 가난한 식탁에 저 멀리 하늘에서 뭉텅뭉텅 수제비 알로 오시다가 하얀 쌀 소록소록 눈발로 오시다가 그만 내려앉을 곳 잃고 성탄 폭죽 선물 꾸러미 어깨 위로 내리고 있었대요 하얀 쌀 수제비 빈 장독에 닿기를 기다리다 네 살 두 살 아이 재워주고 어마는 술집 나가고 아빠는 인형 뽑으러 가셨대요 인형 다 뽑으면 시름 다 가고 꿈 같은 새날 온다며 아이들 깰까봐 살금살금 문 잠그고 가셨대요 꿈결 아이들 구름 타고 다니며 하얀 쌀 수제비 받아 붕어빵 빚고 산새로 날리고 불살라 언 손발 쬐며 다 녹여버리고 엄마 아빠 오시면 야단 맞을까봐 그 불길 따라 하늘로 하늘로 올라 갔었대요 소방차 오고 아빠는 눈이 커다란 눈사람 인형 한 아름 뽑아 오셨대요 아이들 훨훨 날개를 단 줄 모르고 엄마는 실비주점 더러워진 접시를 닦으며 내년 봄 유아원 보낼 생각에 유행가 한 자락 흥얼거리고 있었대요
세모
엄원태
한 해가 저문다 파도 같은 날들이 철썩이며 지나갔다 지금, 또 누가 남은 하루마저 밀어내고 있다 가고픈 곳 가지 못했고 보고픈 사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생활이란 게 그렇다 다만, 밥물처럼 끓어 넘치는 그리움 있다 막 돋아난 초저녁별에 묻는다 왜 평화가 상처와 고통을 거쳐서야 이윽고 오는지를 ... 지금은 세상 바람이 별에 가 닿는 시간 초승달이 먼저 눈 떠,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세모 이야기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 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에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을 다듬고 계실 눈 어둔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일까
문경 새재 산막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그 소년의 염원이 멎어 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 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 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은 소생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에 어느 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끼리 인천바다 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 끼던 그 말없는 표정들처럼
나도 먼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한 해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金 石 林
흐릿한 새벽종소리 열망의 찌꺼기를 토해낸다
덜 깬 잠 탓인지
하늘의 은총으로 주신 이제 마지막 남은 조촐한 식탁
차마 접기 아쉬워, 아쉬워
새 하늘과 새 땅
잉태하고 있는데
12월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래도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 것도 녹진 않았다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12월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 속에서 왕겨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 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12월
장석주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12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박정대
펄럭인다 또 몇 개의 바람을 흔들며 너는 펄럭이고 있다 겨울의 문 앞에 서서 외로운 파수병처럼 너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 눈발이 날린다 하얀 기절의 눈발이 날린다 밤의 한기류 속으로 사랑이 흐른다 낯선 느낌표를 찍으며 굴뚝새들이 날아가고 아마 누군가 너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잠시 기다려라 춥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바람이 분다 밤이 빛난다 몇 개의 등불을 달고 너는 물음표처럼 웅크려 잠잔아 오늘밤은 별이 없다 그래도 하늘은 있다 젖은 하늘을 덮고 네가 잠들 때 저 성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강물 소리 바람에 귀를 대어보면 멀리서 네게로 다가오는 소리 들리리니 잠시 기다려라 멀리서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너의 가슴팍에서 필사적으로 타오르는 불꽃 너는 외롭지 않다 다만 홀로 있을 뿐이로다 시간은 어디에서도 읽혀지지 않고 불면의 외로운 마침표를 찍으며 너는 아직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로다 바늘 끝에 맺힌 핏방울을 보듯 우리의 생활은 가끔씩 아프지만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늘 바람이 불고 잠시 기다려라 아프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12월 저녁의 편지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2월의 기도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황지우
눈맞은 겨울 나무 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 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12월의 아침 시간
헤세
비는 엷게 베일 드리우고, 굼뜬 눈송이들이 잿빛 베일에 섞여 짜여 위쪽 가지와 철조망에 드리워져 있다 아래쪽 창유리에 오그리고 앉아 있다 서늘한 물기 속에서 녹아 유영하며 축축한 땅 냄새에 뭔가 엷은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어렴풋한 것을 준다 또 물방울들의 졸졸거림에 머뭇거림의 몸짓을 주고, 대낮의 빛에게는 마음 상하게 하는 언짢은 창백함을 준다
아침에 눈먼 창유리들의 열 가운데서 장밋빛으로 따뜻한 흐린 광채가 어렴풋이 밝아 온다 외롭게 아직 창문 하나 어둠의 조명을 받아 간호원 하나 온다 그녀는 눈雪으로 눈眼을 축인다, 한동안 서서 응시한다 방으로 되돌아간다 촛불이 꺼진다 잿빛의 빛바랜 날 속에서 장벽이 늘어난다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천상병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
김사인
또 한 잔을 부어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넣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섣달 그믐
김은경(1976 - )
오래 전 붉은 그믐의 밤이 반죽한 한 몸이 있었는데 무딘 칼 한 자루에도 마음 곧잘 내어 주던 착한 영혼이 있었는데
잠깐의 목멤이 없지는 않았으나 모르는 척 식당에 혼자 앉아 팥칼국수를 먹는 저녁 내가 미처 음복 못하고 보낸 첩첩의 고통이 긴 실타래 풀어 마침내 나를 먹이는가 떠난 당신이 내 앞에 앉아 허연 국수사발 같은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데
살아야 한다고, 때로는 무심한 듯 살아야 한다고 왼손이 오른손에게 더운 손이 찬 손에게 몸이 일부를 내어 주며 숟가락을 내미는 시간, 핏빛의 당신을 물 한 모금 없이 후루룩 삼키는 저녁
목으로 넘어가는 이 따뜻한 어둠이 당신의 눈물인 듯 간간하다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12월의 노래
이효녕
한해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
인생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이테를 하나 더 만들어
북쪽에서 불어오는
눈이 내리기
가장 가벼운데도
차가워진 가슴과 들녘에 앉은
언제나 따스하게 안아주려는
한 해를 마무리해 보내는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오가는 세월을 안고
12월의 노래
박종학
마침내 달랑 한 장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때로는 마늘이 되고
부서지지 않고는
함께 있을 날도
한겨울 추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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