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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물, 그리고 시
2015년 02월 19일 15시 27분  조회:4521  추천:0  작성자: 죽림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1

시쓰기는 제재(또는 사물), 언어, 시인, 독자, 미디어(잡지, 신문, 방송), 출판, 서점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상황을 구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점에 따라 輕重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 어느 한 가지인들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의 경중을 따져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사물'과 '언어'라는 두 요소에 집중하여, 이른바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라고 할까, 관계라고 할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마디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또는 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다. (1) 사물과 언어 또는 관념과의 일치 여부 또는 준별 가능성, (2) 사물(thing)이라는 개념의 범주 확정, (3) 이 문제에 불가피하게 관련되는 비유, 상징, 이미지, 지성, 정서, 상상력, 구조, (4) 시쓰기의 原點 또는 출발점 등이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면,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사실상 시의 모든 문제를 전부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고, (1)번 문제에 집중하되 나머지 문제도 관련되거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 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윤석산,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에서

 

 

이 시에서, 尹石山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물과 변하지 않는 언어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고, 따라서 사물과 언어는 다른 것이며, 변화하는 그 사물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을 부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尹石山은 사물과 언어, 사물과 관념과의 불일치 또는 구별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를 언제나 항상 '바다'라고 부르는 것, 빗속에 흔들리는 칸나꽃을 항상 '붉다'고만 하는 것은 확실히 사물과 언어와의 불일치를 무시한 언표일 수 있다. 하물며 연인의 경우,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는 그 이름이 마땅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집단(종족, 민족)이나 언어나 개인 등에 따라 달리 언표되는 사례는 늘 경험하는 일이다. '개 짖는 소리'에 대하여, 한국인은 '컹컹'이라고 하고, 일본인은 '완완'(ゆんゆん)이라고 하고, 미국인은 '바우와우'(bowwow)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일례다. 또 '컹컹'은 개가 짖는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沈相運은 "아직도 몇몇 목공들은 살아서 / 컹컹 기침을 하며 / 환한 속살의 각목을 켠다"(「木工幻想」에서)라고 하여, 목공들의 기침 소리를 '컹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침소리의 음성상징(의성어)에도 리얼리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매암, 매암'(준말은 '맴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시내, 아파트 틈새의 매미소리는 '맴맴맴'을 7번~10번 정도에서 끊고, '매애앰'하고 길게 뽑는다. 몇 년 전 강화도의 전등사에 갔었는데, 경내의 숲에서 들은 매미소리는 15번~17번이나 울고서는 그 다음에 '매애애애앰' 하고 길게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등사 경내의 매미는 '맴맴'이 아니라 '맹맹' 또는 '매앵, 매앵' 하고 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운이 없는, 또는 공해에 병든 매미는 '미미' 또는 '매매'로 울고, 건강하고 생기 있는 매미는 '맹맹' 또는 '매앵, 매앵'으로 탄력이 넘치는 소리로 들린다. 이러한 매미소리의 분석도 실제의 매미소리와 얼마만큼 일치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시인은 시쓰기에 있어서 사물과 언어와의 완전한 일치를 가장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분열,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한 답은 神의 몫이겠지만, 대충 말한다면 사물에 대한 언어의 양적 빈곤, 사물과 떨어져 있는 언어의 독자성, 그 可動性(mobility),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의 구조적 결함, 언어 사용자의 주관, 등등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이런 정도로 해둘까 한다.

 

 

2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잘 아는 시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문제를 사물 쪽에도 있고, 언어 쪽에도 있고, 그리고 언어 주체(사람) 쪽에도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1」에서

 

 

이 작품은 어떤 사물(절대 존재, 또는 사람, 연인 등)에 이름을 불러주기 이전과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사물, 이름(언어),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주체(사람) 등이 다 표면화되어 있으므로,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또는 일치 문제의 요인들이 다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물상'(物象)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물상'과 '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의 '이름'은 동식물이나 사람이나 무기물 등 상호간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명칭, 성명이나 명의(名儀) 등의 사전적 의미라기보다는, 특별한 관심(동정, 연민, 사랑, 믿음 등)을 가지는 어떤 존재(신, 절대자, 연인, 친구, 존경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의미나 가치에 대한 명칭, 또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호칭(명칭)은 언어화 또는 언어로 표출되는 명명행위라는 점에서, 견강부회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간략하게 '언어'라고 해둔다. 아담이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준 그런 의미의 이름 불러주기라고 하더라도 역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물상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꽃도 물상의 일종이지만, 金春洙의 이 작품에서는 물상과 꽃이 준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물상'은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꽃'과는 다른, 말하자면 이름 이전, 이름이 없는, 다시 말하면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만물을 창조한 이후,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기까지의 기간에 존재했던 사물이 물상이 아닐까. 그러한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니까, 그 사물이 모두 내게로 와서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꽃)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줄 믿는다. 또, 언어(이름)는 물상을 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애벌레가 나방으로 변신한다든지, 개구리가 땅 속의 동면에서 깨어나고 싶은, 그런 '변신'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물음이 내포되어 있고,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라는 부버(M. Buber)식의 존재방식임을 알 수 있다. '나'란 무엇인가 라는 근대적인 물음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방적'폐쇄적 코스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하여, '너'에게로 나아가는 쌍방적•개방적 코스를 통해서, '개인'이나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더불어' '함께' '共生'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버가 인간존재의 원범주로서의 인간의 '간'(間, das Zwischen)이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너를 대상화하여(즉 물상화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서로 '꽃'의 의미를 지닌 주체로서의 공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金春洙의 「꽃1」에서 이상과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하여 두 가지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름을 부르기 이전(즉 언어 이전)의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수는 그것을 '물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불렀던 간에, 아직은 이름이 없는 언어 이전의 적나라한 사물세계임이 분명하다. 둘째, 작자는 이 시에서 신화적•창조적인, 어떤 점에서 아담과 비슷하기까지 한 명명행위를 체험하고(?)있다.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이 없는, 언어의 인공적 가공의 퇴적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물의 원점에서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이나 선행언어들을 고친 것, 즉 개명도 추가도 아닌 새로운 명명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는 여러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러한 분열․불일치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여 일치시켜보려는 시도(즉, 진실과 진리의 추구나 노력)에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도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의 여러 원인 중이서, 사물을 관찰하는 주체 즉 시인의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큰 다른 양상을 가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먼저 어떤 관념을 정해 놓고, 그 관념에 알맞은 사물을 찾아 그 관념을 해석하거나 그 관념에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태도의 근원은 낭만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고 하나, 고전주의에도 있다. 사물보다 관념을 선행시키는 태도는, 사물을 이데아의 가상(假像)이나 모상(模像)이라고 하여 참된 실재로 보지 않고, 참된 사물의 실재는 '이데아'라고 주장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그 이론적 연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관념'을 먼저 만들지 않고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의식하려고 하는 리얼리즘의 방법이다. 이 경우, 그 사물에서 가급적이면 인생론이나 사회론 같은 관념을 배제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귀납적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에서, 낭만주의(휴머니즘)와 리얼리즘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음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먼저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겠다. 관념을 먼저 만들어 놓고(정해 놓고), 그런 다음에 사물을 찾아 연결시키는 방법을 관념의 감각화, 관념의 肉化(incarnation)라고도 말한다.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전형적인 예로서 이방원의 「何如歌」(관념을 설정한 후,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킨 것)와 답가인 정몽주의 「丹心歌」(관념 즉 일편단심이라는 의지를 의지 그대로 표현한 것)를 들 수 있다. 현대시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성공한 시인은 金顯承일 것이다.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黃金이 되어

                            불 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김현승, 「희망」에서

 

 

이 시의 제목은 「희망」인데, 그것은 앞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어떤 가망, 염원을 의미하는, 보편성을 띤 관념이다. "나의 희망(이) / 어둔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라는 선조적(線條的)•축자적 표현을 차례대로 분석해 보면, "어둠의 땅속"이나 "黃金"이라는 사물에 앞서서 먼저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 "나의 희망은 무엇이며, 너의 희망은 무엇일까" 등 일련의 의문이 결합된 문제 즉 관념이 형성되고, 그런 연후에 그런 관념에 적합한 '사물'(땅속, 황금)을 발견하여 연결시켜 감각적으로 구체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주지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상의 감각화"라는 것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경우, 혹자는 작자가 '희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이전에 "어두운 땅속에 묻힌 黃金"이라는 사물(또는 사물 이미지)을 먼저 발견하고, "이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숙고한 끝에 '희망'이라는 관념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작자의 심리세계, 즉 역순(逆順)이 자유로운 혼돈의 상상세계와, 그것을 정리하여 작품(텍스트)으로 일단 조직화한 후의 축자적․선조적 질서와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질의 해석과 분석이든, 어떤 관념(예를 들면 '희망' '자유' '고독' 등등)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 관념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그것에 결부시켜 표현할 작품임이 분명할 때, 그 작품의 축자적•선조적 질서를 뒤엎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념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것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 결부시키는 방법을 중시할 때, 그러한 작품의 의도나 목적은 '관념탐구'(또는 어떤 사상의 선전)에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재(참된 사물의 모습)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사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더 중시하고, 그 관념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先觀念 後事物의 방식을 취할 때, 관념(언어)과 사물과의 일치여부, 적합여부를 분석하는 기준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즉, 진리로 정립된 관념을 얼마만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그 기준을 둔다.

앞에 든 김현승의 작품을,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조금 살펴보자.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희망」)"라는 대목은 어떤가? 자기의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으면 도리어 고귀하고 아름다운 '黃金'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희망'이 실현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황금'과 같은 물질(상징)이 되고, '돌'이나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을까. 즉, 관념(내 희망)과 사물(황금)이 일치된 상태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다음에는 "너의 희망 /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 별이 되어"(「희망」)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관념(희망)과 사물(별)과의 일치여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즉 '별'만 되고 '달'이나 '태양'이나 '무지개'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는가. 또, 나의 희망의 경우에는 '황금'과 결부되는데, 너의 희망의 경우에는 '별'과 결부되는 까닭, 그리고 황금과 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런 의문도 제기된다.(이러한 의문 제기는 부질없는 것일까).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김현승, 「堅固한 고독」에서

 

 

'견고한 고독'은 이 시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개인 레벨을 초월하려고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고독'이라는 인간조건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삶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독을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며 확고부동한 자세로서 수용하고 고수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견고한 고독」이라는 제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껍질을 더 벗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깡마른 흰 얼굴은, 작자를 접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작자의 실제 몰골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것이다. 일종의 고독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작자는 고독을 사랑하고, 그러한 고독의 여러 양상 중에서도 '견고한 고독'을 특히 중시하고 강조하는 그런 인생태도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견고한 고독이란 어떤 고독일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의문에서, 작자는 삶의 어떠한 불리하고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고독'의 고수야말로 '진실한 삶'이라는 의지를 정립한 것이다. 아마 그러한 고독의 관념은 양심이나 정의와 연결되어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념(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사물로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을 연결시킨 것이다. 문제는 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더욱 더 적합한 다른 사물은 없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껍질을 더 벗길 수 없는,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만이 견고한 고독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를테면 '바위'나 '마른 논바닥'이나 '양철' 같은 사물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 경우 판단의 기준은 신념화된 '견고한 고독'이라는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4

시쓰기의 또 다른 중요한 하나의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방향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한 만물에 이름을 지어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명명행위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사물이란 되풀이되는 그런 명명행위의 축적으로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언어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염되어 진실한 모습이 은폐되거나 훼손되어 있다. 그러한 선행관념은 모두 인공적 가설(?)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시쓰기에 있어서, 그러한 선행관념의 부정은 물론이요, 사물의 체험에 앞서서 먼저 관념을 설정하는 일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접 체험하여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향하려고 한다. 그런 태도가 사물이나 세계의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기본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을 가리고 있는 누적된 언어적 인공물을 제거할 수 있는가, 또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물과 언어(또는 세계와 언어)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2분법 사고의 소산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 자연의 風景은 자연과 문화의 교환관계에 의한 매개적•이중적 장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 언어의 의미기능, 언어구조, 언어의 언급성(referentiality) 등의 문제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어서, 여기서 꼬치꼬치 따질 계제가 아니다.

언어를 거두어 낸 뒤의 사물, 또는 언어 이전의 사물의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시쓰기에 있어서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진실, 진리의 세계이고, 그것은 일단 있는 그대로 사물의 참된 실재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플라톤이 이데아와 가상<假像>을 구별하고,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식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는 일단 젖혀두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구약성서』 창세기 2장 19-20

 

 

시인이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는,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하여 사물(피조물)을 보고 듣고 체험한 행위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창조(창조설을 믿든 안 믿는 별문제로 하고 일단 창세기의 창조설을 상징적 의미로 수용한다)와 아담의 명명행위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이름 지어주기까지 사이로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무명의 사물세계)요, 다른 하나는 아담의 '이름지어주기'(명명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엿새 동안의 창조행위가 끝나고, 며칠 뒤에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성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명명 이전의 기간을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신의 창조행위가 완료한 직후의 하루만에 아담의 명명행위가 끝났다고 가정하자(하루만에 모든 사물의 명명행위가 다 끝났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엿새 다음은 일요일이니까 하루는 휴식한 셈이고, 월요일부터 아담의 이름지어주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주의 첫째날(월요일)에 창조한 사물(빛과 어둠, 낮과 밤)은 7일간이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있은 셈이고, 둘째날(화요일)에 창조한 사물(궁창 즉 하늘,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은 6일간, 셋째날(수요일)에 창조한 사물(뭍, 바다, 풀, 채소, 과목 등)은 5일간, 넷째날에 창조한 사물(궁창의 광명, 사시와 일자와 연한, 해, 달, 별)은 4일간, 다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물고기류, 조류 등)은 3일간, 여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땅의 생물 즉 짐승, 육축, 기는 모든 동물 등)은 2일간으로 각기 이름이 없는 사물 그대로의 세계로 있었던 셈이 된다. 즉 언어 이전의 사물, 또는 언어라는 의상을 완전히 벗어버린 적나라한 사물로서,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문제를 보기로 하자. 아담의 이름지어주기에 대해서, 성서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이 없다. 아담의 명명행위의 현장에는 명명행위의 근원인(이름을 지어 부르도록 지시한 주체) 여호와가 보고 있었고, 여호와신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명명방법'은 아담에게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명방법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신의 명령(지시), 신의 피조물에 대한 이름짓기, 신이 만든 인류 최초의 인간에 의한 이름지어 부르기라는 점에서, 적어도 神聖性과 神話性 및 창조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어떤 관념이나 언어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신 또는 창조라는 우주적 질서와의 동화 내지 일체가 된, 主客 미분의, 그리고 사물(피조물)에 대한 신성한 외경감 같은 순수직관에 의해 이름이 지어지고 불리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관념을 설정하고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직접적, 구체적 체험에서의 명명행위였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

이제, 鄭芝溶의 작품을 통하여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시쓰기의 한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정지용, 「春雪」에서

 

 

정지용의 「春雪」의 첫연인데, 그 다음에 "우수절 들어…"라는 말이 계속된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의 사이에 있고, 양력으로 2월 18일 무렵이다. 2월이면 아직도 겨울철이므로, 이 때에 내린 눈을 '춘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러나 달력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춘설'이라는 그때의 실제 계절감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겨울이 거의 다 끝난 계절이라, 눈이 내리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절기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자, 그 찰나 뜻밖에도 밤새 춘설이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가 이마에 선뜻 와 닿아 매우 차다(寒)는 것이다.('차게 느껴진다'가 아니라 바로 '차다'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문 열자"와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사이에는 단절이나 연장(延長)이 없는 찰나의 감각경험 뿐이다. 즉 동작(문 여는 것)과 풍경 및 감각(먼 산이 이마에 차라)이 연속되어, 미처 다른 생각(관념이나 사상)이 끼어 들어갈 틈이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어떤 동작이나 사태의 찰나적 신속성을 나타내는 부사 '선뜻'이 알맞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열자"는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동작이고, 그 찰나 간밤에 모르게 내려서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의 봄눈이 선뜻 이마에 와 닿는 찬(寒) 감각, 그 찬 느낌이 가득 차는(滿) 촉감은, 그 자체 어떤 인생론이나 자연철학 같은 관념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개념에 의한 조직이나 구성 같은 인위적 加工도 배제된 순간의 감각적 체험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 산봉우리에 내린 봄눈의 감각과, 작자인 시인이 느끼는 감각을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로 분리하여 구별할 수 있을까. 간밤에 내려서 덮인 산봉우리의 봄눈이 내게 차게 느껴지고, 차게 느껴지는 그 감각을 사유(思惟)하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산봉우리의 봄눈을 객체나 대상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마에 선뜻 와 닿는 찰나의 감촉을 주관적 사유에 의한 인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대상'과 '나' 사이에 티끌만큼의 간격이나 틈이 없다. 사물과 체험, 대상과 인식 사이의 분열이나 거리가 없다는 것은 主客未分의 상태, 언어 이전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까. 이러한 경지에서 시는 생명, 사물, 진실 그 자체의 참된 실재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몇 대목 더 실례를 들어보자.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정지용 , 「달」에서

 

 

                                      프로펠러 소리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정지용, 「아침」에서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정지용, 「毘盧峯」에서

 

 

앞에 든 「달」 「아침」 「毘盧峯」 등은 모두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그대로 드러낸 것들이다. 뜨인 눈에 하나로 영창에 가득 차버리는 달빛, 선연(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간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 물이 든 담장이, 숱이 짙은 다람쥐의 꼬리 ― 이러한 순간적•찰나적 감각체험 속에는 어떠한 사유도 분석도 판단도 끼어 들 틈이 없다. 이러한 감각체험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든지, "그렇게 느꼈다"든지, 그러한 체험 후의 관념 활동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지 않고, 또 "나는 이러저러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리고 사물을 본다"와 같은 관념의 선행활동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사물의 찰나적 체험 전이나 후에 그러한 관념활동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사물의 실재를 대상이나 객관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대상이나 객관을 의식하는 '나'나 '주관'과의 대립•대응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 타자와 자기의 분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든 정지용의 사물체험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분석해 낼 수 없다고 본다. 즉, 주객미분의 상태, 知情意 미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이전, 관념 이전, 주객분열 이전의 사물의 실재 그 현장 ― 이것이 정지용이 지향했던 시의 원점이고, 또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념으로 시를 쓰지 않고 '사물'로 시를 썼다. 정지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쟁론하고 좌단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견해는 논설 이전에서 이미 타당과 和協하고 있었던 것이요, 진리의 보루에 의거되었던 것이 오……"(「시의 옹호」). 사물에 대한 "정확한 견해"는,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여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논설 이전에서"는 기존의 퇴적된 언어 이전, 관념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지용의 말은(1) 관념을 먼저 설정한 뒤에 사물을 끌어다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를 감각적으로 직접 체험하는 사물주의, (2) 기존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버린 뒤의 발가벗은 사물 그 자체, (3) 주객미분의 사물세계 즉 사유나 사고나 분석이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찰나적 체험 ― 이러한 특징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정지용이 지향한 적나라한 사물과 그 현장이 그의 시의 원점이며 출발점이라면,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토포스는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즉 어떤 기존관념이나 기존 언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창조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관념을 거치지 않는다든지, 선행 관념을 설정하지 않는다든지, 또 누적된 기존 언어에서 벗어난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념•사고•분석•판단 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이 점을 곡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로(zero) 지점과 같은 원점, 또는 출발점 즉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와 그 현장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다시 관념이나 사고나 주객(主客)이 발생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의 참된 실재, 그 자유로운 원점의 체험이 없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추종한다든지, "나는 낭만주의자다, 근대주의자다, 모더니스트다"라고 하는 것은, 스타트 라인에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경주에 참가하는 반칙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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