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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per poetry 리해
2015년 02월 24일 21시 45분  조회:4091  추천:0  작성자: 죽림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시문학>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이퍼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 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시문학>(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사물시→디지털시→하이퍼시>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금요포럼>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4.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 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 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 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 ‘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 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아프로디테의 항아리>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화가와 모델>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 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 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 ‘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허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 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5.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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