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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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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 두만강 례찬
2015년 03월 02일 00시 25분  조회:5159  추천:0  작성자: 죽림

두만강 예찬
                                                                            

강경애
 

 


두만강이라면 조선 · 만주 · 러시아의 국경이니 만큼 거기에 대한 역사나 재미있는 전설 같은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극히 난처한 일이다. 더욱 두만강이라면 우리로서는 예찬보다는 원한이 많을 것이다. 좌우간 예찬이 될지 원한이 될지 생각나는 대로 붓을 옮겨보자.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일천오백여 리나 되는 장강이다. 두만강수의 분량은 조선에서 흐르는 물의 분량보다도 만주에서 흐르는 분량이 더 많다. 간도 용정촌으로 흐르는 해란강이며 국자가의 연길강, 백초구의 백초구강, 훈춘의 훈춘강 등이 고려령(高麗嶺)을 넘어 두만강에서 합류된다. 그리고 두만강이란 이름도 만주어에서 나온 이름이니 즉 도문색금(圖門索禽)이란 만주어에서 색금을 떼고 도문만을 붙여 두만이라 하였다. 도문색금이란 뜻은 새가 많이 사는 골짜기로 해석이 된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아 두만강 일대에는 새가 많이 깃을 들이고 있던 모양이다. 역사적으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금국(金國) 당시에 천조제(天祚帝)가 신하를 많이 데리고 꿩사냥을 하곤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사천여 년 전에 만주는 부여족이 개척하였다. 부여족에서 갈라진 읍루족이 이 근방에서 살았고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일어나자 여기에는 발해 동경인 솔빈부(率賓府)가 되었으며 요나라가 흥하면서 이곳을 동변성(東邊城)이라 하였다. 다음에 요나라를 치고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여기를 동변도라 하여 전자에 말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고 꿩사냥을 하는 놀이터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몽고족이 원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중원에 호령하자 여기다 동변도 총독부를 두게 되었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되면서 회령(會寧)이라 하였다. 지금의 회령이란 이름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회령에는 모린위(毛嶙衛)라는 군대주둔소를 두게 되었으며 여전히 이 지방에는 부여족에서 내려온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명국이 망하고 청국이 성하자 그때 조선에는 이조 세종 3년이었다. 세종왕은 신하인 김종서를 이 지방에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한 후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 전에는 회령에서 청진까지 일직선을 그어 이남이 조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 당시에 여진족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죽지 못하여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권력자 앞에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불교를 강제로 믿게 하는데 너희들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믿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믿는 불교를 집에서 믿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항복의 기념으로 지은 종성(鍾城)에 있는 수항루(受降樓)를 그들은 얼마나 원망하였을까. 그리고 수항루를 끼고 굽비굽비 감돌아 내리는 두만강을 얼마나 넘고 싶었을까. 그러나 국경의 수비가 엄하니 어찌 감히 넘으랴. 달 밝은 밤 그들은 고달픔에 못 이겨 아마도 두만강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필경 이때로부터 두만강을 넘는 페이지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조선은 청국과의 국제문제를 두려워하여 국경을 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처치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통상조약이 성립되어 회령에 개시장(開市場)을 열게 되었으며, 두만강 이북으로부터 간도 국자가 근방까지는 완충지대라 하여 통상(通商)시에만 인마가 빈번할 뿐이요, 그 시기가 지나면 완충지대는 공지이었다. 그러므로 두만강 일대에 있는 여진족이야말로 이 자유천지를 날마다 밤마다 넘겨다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내려오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기사(己巳) 경오(庚午)년에 무서운 흉년을 만난 백성들은 이제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달했으니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두만강을 넘기 시작하였다. 죽이기로 당치 못할 것을 안 정부에서는 나중에는 방임하여 버렸다. 그러니 백성들이 막 쓸어 간도로 나오게 되었다.
  
지금의 간도라면 왕청, 연길, 화룡, 훈춘 이 4현을 말함이니 이 넓은 지광(地廣)에 조선인이 사십만이다. 이 사십만은 누구나 두만강과 인연이 깊을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두만강에 있다. 종성 대안(對岸)인 두만강 가운데는 간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었다. 그 섬은 아주 옥토이어서 곡식을 심으면 조선땅에서 나는 곡식보다 배나 더 나곤 하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몰래 건너가서 농사를 짓곤 하였다. 그러나 강국인 청국이 무섭고 국경의 수비가 엄하여서 그들은 마음을 놓고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밤중에 백성들이 모여서 간도를 조선으로 옮겨오자고 의논이 되었다. 그들은 즉시 두만강으로 나가서 조선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만주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로 옮기기 위하여 흙으로 메워서 종내는 간도를 조선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종성에 가보면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이렇게 간도를 조선땅으로 만들기 전에 몰래 이 섬에 와서 농사 짓는 것을 간도농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간도가 아니라도 두만강을 건너 농사 짓는 것을 모두 간도농사라고 하였다. 지금의 간도란 두만강에서 나온 말이다. 이 전설을 미루어 간도는 두만강이 낳아 놓은 듯싶다. 간도의 어머니인 두만강.
  
누구든지 간도를 알아보려면 이 두만강부터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었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무르익은 버들숲을 끼고 흐르고 흐르는 저 강수(江水)!
  
나는 문득 이런 노래를 생각하였다.

  여인은 애기 업고
  사내는 쪽박 차고
  지친 다리 끌면서
  강가에 섰소.

  강물에 발 담그며
  돌아다 보니
  강변엔 봄이오.
  버들가지 푸르렀소.

  강물은 무심히도
  흐르고 흐르는데
  애기는 울고 울고
  석양은 기오.

  아직까지도 이 노래가 내 머리에서 감돌다가 펜을 드니 술술 달려 나온다.

(1934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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