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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시모음
2015년 03월 07일 21시 34분  조회:3876  추천:0  작성자: 죽림

보들레르

1821~1867 

 

초기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기

보들레르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é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ç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 검열).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É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후기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äuser à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é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 

주요작품: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평론집 -낭만파 예술,심미적 호기심 등

 

 

 

 

 

신들린 사나이

 

                     

해가 검은 베일에 가려졌다. 너도 해처럼

오, 내 생명의 달아! 그림자에 포근하게 싸여라;

 

네 멋대로 자거나 한 대 피우라; 잠자코, 시름에 겨워,

권태의 심연에 송두리째 잠기도록 하라;

 

 

나는 너를 이처럼 사랑해! 그러나 네가 오늘,

그림자 벗어나는 이지러진 천체처럼,

 

광란으로 붐벼대는 곳들에서 으스대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귀여운 비수야, 네 칼집에서 솟아나라!

 

 

샹들리에 불꽃으로 네 눈동자에 불을 켜라!

시골뜨기들 눈초리 속에서 욕망을 불붙여라!

 

병들었건 극성스럽건, 너의 모든 것이 내게는 기쁨이니;

 

 

네가 바라는 것이 되라, 검은 밤이건, 붉은 새벽이건;

 

소름끼치는 내 온몸에서, 오, 내 귀여운 베엘제불,

너를 숭배한다!고, 외치지 않는 세포는 하나도 없구나!

 

 

 

떠나가는 집시들

                     

어제 길을 떠났네,

미래를 점치며 불타는 눈동자를 한 부족

 

아이들을 등에 업지 않았으면,

혹은 축 늘어진 유방의 준비된 보물을

그들의 엄쳐흐르는 식욕에 내맡긴 체.

 

 

번들거리는 무기를 어깨에 멘 사나이들,

식구들이 옹기종기 탄 수레를 따라 걸어가네.

 

침울하게 미련을 갖고 이미 사라진 환상에

무거워진 눈으로 허공을 들러보며.

 

 

귀뚜라미는 감추어져 있는 모래 구멍 속에 숨어

그들의 행렬을 보며 한층 크게 노래 부르네.

 

대지의 신은 그들을 사랑하여

푸른 초목을 번창시키고.

 

 

그 길손들 앞에는 바위에서 샘이 솟고

사막이 꽃을 피우니,

 

그들을 맞기 위해

다가올 짙은 어둠의 왕국은 열려 있었네.

 

 

 

고양이

 

          

이리 오너라, 내 귀여운 나비야,

사랑하는 이 내 가슴에 발톱일랑 감추고

 

금속과 마노가 뒤섞인 아름다운 내 눈 속에

나를 푹 파묻게 해 다오.

 

 

너의 머리와 부드러운 등을 내 손가락으로

한가로이 어루만질 때에

 

전율하는 너의 몸을 만지는 즐거움에

내 손이 도취할 때에

 

 

나는 내 마음속의 아내를 그려보네.

 

그녀의 눈매는 사랑스런 짐승

너의 눈처럼 아늑하고 차가워

 

 

투창처럼 자르고 뚫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미묘한 숨소리, 변덕스런 향기

그 갈색 육체를 감도는구나.

 

 

 

돈 후안은 지옥으로

 

               

돈 후안이 삼도천으로 가서

샤롱에게 뱃삯을 치르자

 

한 우울에 젖은 거지가, 앙티스테느처럼 거만한 눈초리를

한 채

거센 복수의 팔로 노를 잡았네.

 

늘어진 유방과 구멍난 옷자락을 내보이고

여인들은 캄캄한 하늘 아래 몸부림치며

 

제물로 바쳐진 한 무리의 짐승들처럼

긴 신음소리 그의 뒤에서 내고 있었네.

 

스가나렐은 호탕이 웃으며 돈 내라 야단이고

한편에서는 헤매는 죽은 모든 인간들에게

 

백발로 덮인 자신의 머리칼을 비웃던 그 뻔뻔스런 아들을

가리키네.

 

 

 

이 밤에

                     

오늘 저녁 무엇을 말하리, 가엾고 외로운 넋이여.

내 전에 시든 가슴, 무엇을 말하리.

 

그 성스런 시선이 어느날 그대를 다시 환하게 한

너무나 아름답고, 지극히 어질고,

가장 사랑스런 그녀에게!

 

---그녀를 칭송함에 우리는 자랑으로 삼으리.

그녀의 유연함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그녀의 정신에 싸인 육체는 천사의 향기를 지니고

그녀의 눈길은 우리를 광명으로 감싸주네.

 

어둠 속에서나 외로움 속에서나

거리에서나 군중 가운데서나

 

그녀의 환상은 햇불처럼 빈 하늘에서 너울거리네.

 

그 환상이 가끔씩 부탁하기를

"나는 아름다워 명하노니, 오직 나를 위해 아름다움만을 사랑하라

 

나는 수호 천사요, 뮤즈이자 마돈나이나니!"

 

 

 

깊은 심연 속에서 

 

                      

 

내 마음 떨어진 캄캄한 심연 밑바닥에서,

연민을 비나이다, 내 사랑하는 유일한 그대여.

 

이건 납빛 지평선의 침울한 세계,

거기서 어둠 속에 공포와 모독이 떠돌고,

 

 

열 없는 태양이 여섯 달을 감돌고,

또 여섯 달은 어둠이 땅을 덮으니,

 

이건 극지보다도 더 헐벗은 고장,

-짐승도, 개천도, 푸르름도, 숲도 없구나!

 

 

그런데 이 얼어붙은 태양의 차가운 잔인성과

태고의 <혼돈>과도 같은 이 광막한 어둠보다

 

더 끔찍스런 것 세상에 없어라.

 

 

멍청한 잠속에 잠길 수 있는

더 없는 더러운 짐승 팔자가 샘나는구나

 

그토록 시간의 실타래는 더디 풀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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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시인들이여, 수천의 박수소리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시를... 2017-09-14 1 2301
460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렇게 흘러보내야 하나" 2017-09-03 0 3161
459 "말똥가리 시인", 스웨덴 국민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2017-05-23 0 2971
458 시인은 나비와 함께 해협을 건너갈줄 알아야... 2017-05-23 0 3517
457 명문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2017-03-16 0 3308
456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2017-02-19 1 2846
455 "동주에게 편지를 보내고싶다..." 2017-02-08 0 2590
454 달문 여는데 보름 걸리고, 달문 닫는데 보름 걸리다... 2017-02-08 0 2669
453 하늘도 해를 팔다... 2017-02-04 0 2562
452 청산별곡 2017-02-02 0 2819
451 2017년 <<신춘문예>>당선작 시모음 2017-01-02 0 4273
450 백거이(白居易) 시를 재다시 음미해보다... 2016-12-31 0 6871
449 중국 古詩 10 2016-12-25 0 3033
448 "술타령" 시인 문학소년소녀들에게 꿈의 날개를... 2016-12-12 0 2592
447 [명시감상] - 자유 2016-12-05 0 3003
446 3 = 30 = 2 = 6 = 15 = 1 = 두줄 2016-11-28 0 2722
445 시인, 시, 그리고 번역... 2016-11-27 1 3432
444 [명시감상] - 황무지 2016-11-27 0 3172
443 詩에 독자들이 밑줄을 긋도록 써라... 2016-11-26 0 2909
442 "150 000 000" 2016-11-26 0 2998
441 테트 휴즈 시모음 2016-11-26 0 2862
440 미국 시인 - 알렌 긴즈버그 2016-11-26 0 3178
439 이육사 시 중문(中文)으로 읽다... 2016-11-15 0 2908
438 타고르 詩를 보다... 2016-11-14 0 3269
437 남미주 아르헨티나 문학 거장 - 보르헤스 2016-11-07 0 2675
436 미국 녀류시인 - 에밀리 디킨슨 2016-11-07 0 3897
43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사랑할 날 얼마나 남았을가... 2016-11-06 0 4330
434 해외 시산책 2016-11-06 0 2754
433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2016-11-06 0 2933
432 아름다운 세계 명시속에 흠뻑 빠져나볼가... 2016-11-06 0 3849
431 프랑스 상징파 시인 랭보 시 다시 새기다... 2016-11-05 0 3416
430 "세계는 소리와 맹위와 불로 가득 차고"... 2016-11-01 0 2661
429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2016-11-01 0 3026
428 장편 서사시 <<백두산>> / 조기천 2016-11-01 0 4197
427 미국 "생태주의" 방랑시인 - 게리 스나이더 2016-10-28 0 4234
426 아랍 "망명시인", 령혼의 나팔수 - 니자르 카바니 2016-10-28 0 2683
425 타이타닉호는 침몰되지 않았다... 2016-10-20 0 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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