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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금산 시인의 詩와 함께
시집: “불새”, “살구꽃 복사꽃” 등 수권
살아간다는 것은
눈물을 버리지 말아라
장모님
당뇨병으로 앓던 장모님
다향(茶香)앞에
가벼운 차잔을 들고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4호 |
나와 문학
림금산
꿈으로 아롱진 대학시절
나는 대학입시준비를 할때부터 문학전업을 가려고 윽 별렀다. 일찍 고중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한 나는도문시 장안진(위자구)에서 룡정고중사회반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룡정북신소학교 교정에서대학입시를 치렀다. 룡정의 공부를 마치고 숙소의 짐들을 꾸려가지고 장안진으로 올때 나는 아직 대학입학통지서도 내려오겠는지 미결인데도 연길에 들려 내가 제1지망으로 써넣은 연변대학조문학부가생각나 특별히 연변대학 언덕에 올라보았다. 나는 그날 연대언덕에 걸터앉아 가고 오는 대학생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조문전업에서 대학시절을 보낼 황홀한 꿈을 꾸어봤다.
과연 얼마 안지나 룡정으로 부터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문학창작의 꿈을 붙안고 계속 독서와 창작을 주업으로삼았다. 그때는 또 주위의 문학창작풍토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말그대로 최고의 창작분위기였다.조문전업만 보아도 우리 우학급으로 김호웅, 석화, 류연산, 김성우, 김관웅(한어전업),김장혁, 박문봉,김경훈, 조일남, 한창선… 리혜선(한어전업)조성희 등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있었고 우리 반급에는소설가 한정화, 수필가 최순희, , 남춘애, 시인 남상수, 윤영애, 김춘산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아래 학급으로는 수필가 리영애, 리춘희,남복실, 김창석,김옥희, 시인 주성화(수학학부), 김춘희, 윤경찬(수학학부) 평론가 우상렬, 리광일 등 분들이 많이도 포진해 있었다.
또 이 때 마침 김철시인을 주도로 한 연변작가협회에서 연변대학과 합의하여 본과학력의 문학반도 개설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미 창작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있던 김학천,전태균,김학송, 김철호, 우광훈,리선희, 윤림호, 권중철, 류흥식 등 많은 시인, 작가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이런 문학의 대호황기에 나는 그들속에서 진한 문학의 자양분을 맘껏 만끽할수가 있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니였다. 우리한테 문학지식과 창작열정을 한껏 불어넣어주었던 연변대학의 쟁쟁한문학교수분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로는 정판룡교수를 비롯하여 최윤갑, 현룡순, 림휘, 허호일, 허룡구, 김해룡, 리해산, 박상봉, 현동언, 최건, 김기종, 김만석 등분들이였는데 한쪽으로 문학리론저술과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학을 하였었다. 이런 하좋은 분위기는 나한테도 매일같이 시쪼각을 긁적이게 만들었고 베끼고 암기하고 랑송하도록 하였다. 나는 그때 연변대학도서관의거의 전부의 우리말 시집을 수차 뒤졌으며 문학신문, 만선일보 등 많은 우리 민족문학에 관계되는 자료들을 섭렵하였다.
그때는 문학의 풍토가 하도 농후하여 쩍하면 조문학부를 중심으로 문학동아리 활동을 거세차게 진행하였는데 해마다 몇차례씩 소설창작특강이나 시창작 특강, 시랑송모임을 조직하였다. 그때 자주 연변대학조문학부에 초청받아 오신 분들로는 김학철,김철, 김성휘, 림원춘…등 분들이였다. 우리는 연변대학 본교 4층청사에서 행사를 많이 가졌는데 지어 리욱시인까지 남의 부축임을 받아가면서 시낭송에참가하여 백두산과 사랑에 대하여 읊어 크나큰 감동을 주군 했다.
우리는 또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이면 교실에 모여 자체로 프린트지 “종소리”잡지를 자주 꾸려냈으며우리의 동아리들 잡지에 김철, 김성휘, 리상각 등분들의 시들을 학생작품과 함게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졸업할때까지 벌써 공개간행물에 시 20여수를 발표하여 대학생으로서는 최고의 발표률을 올렸고연변작가협회에서 아직 학생이기에 회원으로 받지 못하는걸 퍽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또 이 무렵 “아리랑”문학지 책임자였던 김성휘시인은 “아리랑”잡지에 머리말까지 달아서 자주 연변대학 학생특집을꾸려주어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눈부신 청년시회활동
사회에 나온 후에도 문학그루빠활동은 계속되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안도현에 배치받아 교편을잡았지만 문학창작은 끊지않고 줄기차게 진행하였다. 계속 각지의 잡지들에 시작품을 투고하고 원고비가 오면 교원들과 함께 술판을 벌리고 작품발표의 기쁨을 한껏 맛보군하였다. 내가 배치받은 학교는안도현 제2고중이였는데 나는 학교에 문학써클조를 꾸려놓고 매일이다 싶이 습작지도를 하는 한편 계속 자신의 글도 써나갔다. 연변인민출판사의 조룡남선생님과 료녕의 “새마을”잡지 박화선생님도 편지로 나의 창작을 많이 고무해주었다. 조룡남시인은 지어 나의 시작품을 “아리랑”잡지에다 한꺼번에7수를 발표해주기도 하면서 시가 잘 익었다고 고무해주었고 연변일보 문예부의 최룡관시인은 여러차나의 시묶음을 발표해주었다.
하여 나는 문인들이 극히 적은 명월진에서도 별로 고독한줄 몰랐었다.
한번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원고비가 왔는데 45원이였다. 옆자리교원들은 나더러 한턱 내라고 해서내가 전교의 남성청년교원들을 거의 불러모았는데 모두들 이상해 하였다. “원고비가 어떻게 45원이나되는가? 4원 50전이겠지…” 그들은 진짜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때 나의 한달 로임이 70여원이였으니 45원이면 반달 로임보다도 더 많으니깐 말이다. 나는 그 돈으로 청년교원들을 다 접대하고도 남았다.
그러던 1년후의 어느날 안도현의 소설가 김희철선생께서 나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비준되였다는것이였다. 당시 안도현에는 작가협회 회원이 조선족으로는 나까지 3명이였다. 즉김희철, 리룡득과 나였다. 김희철선생은 그때 당시에 “연변문예”지에 중편소설도 자주 련재하던 아주유망한 소설가였는데 나의 가담으로 안도현문인들의 력량이 가강되였다면서 학교교원숙소에서 홀로지내는 나를 자기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리룡득선생댁에도 자주 가서 음식이랑 얻어먹었고 리룡득선생님은 또 전 현 문학창작경색같은것이 있을때면 나를 심사위원으로 내세워 주기도 하였다.
이젠 작가협회 회원으로 발탁되였고 또 그무렵 내가 연길처녀와 결혼하였으므로 나는 연길에 자주 와서 문인들 회의에도 자주 참가하게 되였고 당시 연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청년시회활동에서도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석화를 회장으로 하는 우리 연길시청년시회에는 리임원, 김인선, 주성화, 리성비, 차영화 그리고 나까지였는데 후에 주룡이 가첨되였다. 우리는 한주일에 한번꼴로 계속 시토론,시작품합평회같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만도 경제여건이 안되여 집집을 순회하면서 맥주놀이를하였다. 지금은 집보다도 음식점이 더 편했지만 그때는 집이 더 편했다. 오늘은 석화네 집, 래일은 임원이네 집, 그 다음은 우리집 이렇게 집집의 술상이 문학교류의 제일 좋은 장소였다.
우리는 또 연길시청년시회를 대표하여 화룡시청년시회(당시 회장은 박장길시인)를 방문하고 도문시청년시회와 함께 들놀이도 가고 하면서 타현의 시인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타현에가면 거기의 청년시회에서 우리들을 접대하느라 정성을 보였고 그들이 또 연길에 오면 우리가 그들을접대하느라 돌아쳤다…
세월이 살같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연길시청년시회에서 활동하던 주요 맨버들은 그때 자식들을 업고안고 들놀이랑 다녔는데 지금은 자식들 모두가 대학까지 다 졸업하고 사회활동에 참가하였으니 말이다.
디지텔시대에 직면한 우리의 후세들은 지금쯤 시같은걸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한테도 시가 우리때만큼은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을테고…
옹달샘 동시회
안도현 제2고중에서 연길에 있는 소년신문사에 전근되여 온후 나는 하는수없이 성인시창작을 위주로하면서도 동시창작도 곁들어 하게 되였다. 나는 동시가 한창 새롭게 번지고 있던 시점에 동시를 시작하였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옹달샘”동시회를 무었다. 내가 회장을 맡고 김학송, 김철호가 부회장을,김현순이 비서장을, 한석윤이 고문을 맡은 “옹달샘”동시회는 몇년간 우리의 동시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우리는 거의 매주마다 한차례씩 새동시 합평회를 가졌으며 중국조선족소년보, 별나라, 중학생신문, 등에 동시특집을 냈으며 또 이런 신문, 잡지사들에서는 우리의 동시회를 지지해주는 각도에서원고비도 톡톡히 주어 우리의 활동경비에 보태도록 하여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후에 우리 옹달샘동시회의 회원들은 많은 우수한 동시들을 창작해 냈고 많은 훌륭한 동시집들을 출판했으며 많은 동시문학상을 섭렵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나는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에 제6기부터 참가하였는데 처음엔 일반시인으로 참가하였고 후에는 한 10년정도 조직자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는 모임의 원래 명칭이고 몇년 지나니 “두만강여울소리”로 통하였으며 지금은 그냥 “여울소리”로 통한다. 모임의 명칭만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력력히 묻어난다.
한번은 룡정시 삼합진에서 1박 2일간 진행하였는데 나는 그때의 감수를 “비내리는 두만강”이란 수필로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두만강여울소리는 이젠 장장 29년간 28차까지 진행되였다. 해마다 한차씩 진행되는 우리 시단의 대성회이고 대교류의 장이고 시인들의 대만남의 장이다. 내가 참가했던 “두만강여울소리”활동은 정몽호,림연, 최룡관, 석화, 리성비 등이 제일 많이 책임자로 치렀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 우리도 이젠 50대에 올라섰고 시단의 중임을 맡았으며 여러가지 이번트를 조직할때가 되였다. 5년전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나를 시분과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미 20여년이나 이끌어온 시단의 성회-“두만강여울소리”도 이젠 우리들이 조직해야 하였다.
하지만 해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두만강여울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다채롭고 내용이 더 풍부하게 조직할것인가가 고민이였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두만강여울소리”라 하면 이젠 해외에서도 소문이 짱한 명브랜드활동인데 말이다. 더우기 동북3성을 포함한 전국의 우리 민족시인들이 대거 참가하는 그런 모임이였고 또 제24차부터는 우리가 처음으로 시가창작위원회의 중임을 맡은후의 첫 행사였으니 신경이 안쓰일수가 없었다.
마침 박장길씨가 화룡시민족식당으로부터 일정한 자금을 후원해 왔다. 우리는 기뻤다. 인맥이 넓은 김영건주임은 화룡시정부에 직접 련계를 달아 “제24차두만강여울소리”를 화룡시정부 회의실에서 거행하기로 협의를 보았으며 연변의 인기배우들과 가수들을 동원하여 회의에 멋진 공연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조직하는 일이 잘되게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김철시인부부도 마침 연길에 와 있을때라 우리의 초청에 의해 직접 화룡에까지 오셨으며 주당위선전부, 화룡시정부 등 정부차원에서 열정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의 첫날 저녁에는 민족식당에서 개를 앉히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소박하고 멋들어진 공연도 선보여 회의 분위기를 확 잡아왔다. 이튿날 오전에는 탐구시를 심사하는 날이였는데 우리는 김철시인한테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감독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회의군들은 이튿날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를 유람하였고 또 선경대아래동네에 있는 유동림장에 가서 사슴까지 잡아 잔디밭우에다 사슴고기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김철시인은 당장에서 유동림장책임자한테 일필휘지하여 족자까지 써주셨다. 대회는 진짜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늘 뿌듯한 마음이다.
제25차는 안도현만보진 국가급 생태골에 가서 치렀는데 안도현정부에서 최고급호텔을 배치하고 양을 잡아 접대하였는데 량성복부현장이 직접 회의장에 와서 친절한 관심을 보여주어 시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제26차 “여울소리”는 회의 참가자 전원이 먼저 도문시 두만강 강뚝공원에서 정몽호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량수진에 가서 1박2일로 치렀다. 끊어진 온성다리밑으로 두만강은 소리없이 흐르며 력사를 써내려갔고 우리들은 다리우에서 시상을 더듬었다. 그번 여울소리가 끝난후 나는 20여차의 “여울소리”정황을 개괄하여 수필을 써서 “여울소리인상기”란 제목으로 북경에 있는 “중국민족”잡지에 발표하여 영원한 력사자료로 남기였다.
제27차 “여울소리”는 화룡시서성진 와룡향에서 치러졌는데 역시 특색을 살려 시인들이 모두 농민들집에 끼리끼리 숙박하도록 했다. 촌장이 시인들을 데리고 이집 저집 안배할때는 마치도 우리가 어렸을적에 해방군대오가 지나다 마을에 들러 하숙할때를 방불히 하였다. 역시 서성진의 진장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고 돼지와 소와 이튿날엔 양까지 잡아서 문인들을 대접하였다. 그번 여울소리는 또 김영건의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의 출간기념식까지 곁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28차 “여울소리”는 연길시한성호텔에서 진행되였는데 할빈에서 온 리홍규시인의 심련수문학상수상식까지 곁들어 보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날 술자리에서는 또 박송천의 소품과 송미자의 시랑송도 있어 분위기가 화끈하였다.
문학살롱 케스트
2009년 가을부터 연변인터넷방송 문학살롱프로에서는 나더러 시에 대한 생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건 해본일 별로 없어서 망설이였는데 그럼 몇번만 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한국현대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좋이 한국명시 200여수에 대한 분석과 명시인 40여명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러구러 1년이 지났다. 방송국에서는 계속 더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하는수없이 로씨야, 영국,독일, 인도의 일부 시인들에 대해서 소개했으며 중국의 “몽롱시”와 현대시인들에 대해서도 10여명을 소개하였다.
또 한해가 지나갔으나 방송국에서는 계속 하는데까지 해달라고 청들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시인 50여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시창작론에 대해서 강의해 달란다. 또 한해가 지났다. 그래서 이미 만3년째 나는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좋은 효과를 거둔 방송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방송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방송을 듣고 흑룡강성 녕안의 최화길, 할빈의 한영남, 리홍규, 산동성 청도의 김기덕,김혁일,심양의 리문호,북경의 전춘매, 연길의 리상각, 리순옥, 김철호, 김영춘, 김창희, 최기자, 리임원, 리성비, 화룡의 리근영,허옥진,김승종, 미국의 홍군식…등등 많은 시인들이 전화나 메일을 보내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역시 우리 시단의 홍보이고 시와 독자들과의 거리를 더욱 가까이 하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생각되여 오늘까지도 나는 계속 이 노릇을 해오고 있는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곤난도 많았다. 한쪽으로 단위에 출근해야 하고 또 기자이니깐 타성으로 외출도 해야하고 나의 글도 써야하고 …방송자료는 대부분 퇴근후나 휴식일에 하다보니 나는 련휴일을 기본상 쉬여보지 못하였고 저녁에는 11시-12시전에 자본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문학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미치는 나였으니 그런대로 매주 목요일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방송국에 달려가군 했다.
한번은 단위에서 도문시 월청쪽으로 들놀이를 갔는데 주임인 내가 안가면 우리 보도부의 성원들이 섭섭해 한다고 가긴 갔는데 그날따라 생방송이 있는 날이였다. 나는 술한방울도 못마이고 점심식사가 끝나자 곧추 택시를 잡아타고 연길로 질주하였다. 그날 생방송은 의외로 잘 되였지만 방송국분들은 내가 도문 월청으로부터 달려온건 누구도 모르고 있다…
또 한해가 다 지나 음력설이 코앞이다. 나는 설날휴식때문에 이번 목요일에는 두번치를 한꺼번에 준비하여 하나는 직접 생방송하고 하나는 록음해야 하기에 또 바빠야 한다. 하지만 문학을 위해서는 붉은 코피가 흘러도 이만한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매번 방송할때마다 방송재료 평균 8천자가량씩 쓰는데 이 3년간 이미 근 150여만자를 썼다…
오늘까지 장장 30년이란 창작생활에 별로 이렇다할 명작은 못써냈지만 그래도 시집 네권과 수필 50여편, 가사 30여수,실화 20여편에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한얼패수필상, 백두아동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전국청년월간지수필상 등10여차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지니게 되였다. 나는 내가 문학에 빠진걸 종래로 후회한적은 없다. 만약 문학이 없었다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슴슴하였을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만약 내가 문학을 떠났더라면 나의 생활은 부로 일정한 윤택은 가미했을지라도 령적으론 사막의 마른 바람같은 그런 생활을 해왔을건 뻔한 일이다. 문학은 나의 령적 삶에 차분한 오아시스를 펼쳐주었고 농익은 와인속에 피빛 장미꽃을 얹어주는 그런 짙은 멋을 주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또 래일도 문학에 감사를 드릴뿐이다.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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