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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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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대상에 대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화부에 배당된 시골현장에만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대상을 바꾸어 문학계로 눈길을 돌렸다. 연변문학 30년의 성과보고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문학계는 개혁개방 30년 동안 그야말로 풍성한 성과를 안아왔고 그만치 성과를 따낸 문학인을 찾기도 쉬운 일이였다. 김학송시인을 찾은 계기는 금번 전국 제9회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평의에서 시집《사람속에서 사람 그리워》로《준마상(상금 만원)》을 수상했다기보다 타의추종을 불허할 다산시인이라는 점이 더 작용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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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송(56세)시인은 문학창작에 전전한 30여년 동안 26권의 시집, 에세이집을 펴낸 다산작가이다. 조선족시인중에서도 최다의 시집을 펴낸 김학송시인을 만난건 그가 근무하는 《연변문학》편집부에서다. 다음 취재의 편리를 위해서 그의 주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해가 석사연구생으로 공부하는 아들의 뒤바라지 하러 한국으로 갔는지라 요즈음은 홀아비생활이라고 서글픈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벽면을 메운 서재에서 시인의 서글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는 노래하는 시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1952년, 도문시 월청진 화평촌(곡수촌)에서 6남매 대가정에서 남자항렬 맏이로 태여나고 소학, 중학을 마치고 시골에 하향하던 시기는 10대 후반이였다. 하방한 아버지로 하여 하향지식청년으로 되고 시골에서 논물관리원, 과학시험소조 조장으로 7년을 두루 시골을 배우다가 행운스레 장춘야금학교에가서 지질탐사를 전공으로 배운것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첫번째 전환점이였다. 하지만 배운 전업이 싫어서 도문에 와서 술담배공사, 석유공사, 보위간사, 공청단서기 등 다채로운 직업에서 헤염치다가 그후 연변대학(작가반)에 입학한것이 관건적인 전환점이 된다. 여기에서 김학송시인은 문학이라는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지금까지 줄기차게 달려온다. 도문시가무단, 연변가무단 창작조를 거쳐 현재는 월간《연변문 학》지에서 시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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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문화대혁명》의 동란속에서 소년기와 청춘기를 잃어버린 홍위병 세대들을 일컬어서 우롱당한 세대라 한다. 말 그대로 저마다 혼돈씨가 되여 《볼품없이 망가진 얼룩 세월을》칠하면서 우매로 세례당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학송시인 역시 례외가 아니다. 아버지의 하방, 차도 통하지 않던 오지, 가난, 인간가치의 상실은 그의 젊은 시절의 초라한 초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세월은 후날 시인에게 김학송시인만의 시적언어 확립과 창작경지를 톱는 밑천이 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약간은 엉뚱한데가 있고 개성이 강한것만치 시창작에서도 전위에 나섰다. 시인의 말을 빈다면 자신의 경력과 천성에 맞는 언어적인 스타일을 빨리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독보적인것으로 만드는것을 소명으로 알던 시인의 시어는 쉬운 말로 말하면 벽계수가 흐르듯 경쾌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김학송의 아름다운 시어는 그의 투박한 성격과는 다르다고도 말한다. 영혼의 마찰과 울림이 담긴 소박한, 구체적 형상화의 시를 창작하고 순수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 독자와 호흡을 할수 있는 맑은시, 그러면서도 은은한 무게와 간절한 혼이 침투되여 고도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날개가 있는 시를 창작하여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현대시창작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현대문명에 찌든 이웃도 모르는 도시 , 각박한 인심, 영악한 인간관계에 대한 항변이 여울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 인류의 요람시대를 창조하려는 갈망 숨쉬고있다.》(조성일)《김학송시인의 절대적가치에의 탐구는 기대와 고통의 련속으로서 그 서정이 아로새겨지고 … 현실적고통을 감내하는 구도적자세가 보이며 전통에의 진진한 승화와 계승의식이 투철하다.》라는 평이 쏟아진다. 한 시인의 시창작과 그의 세계는 시인의 사고의 넓이와 이 세상을 포섭하는 시각의 깊이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특히 1990년대 초기 한국체류는 시인의 문학사고폭을 넓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인은 빈번한 한국문인들과의 교류, 독서에서 의식의 변화를 추진시켰고 현대시창작실험에 대담하게 달라붙었다. 2년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한국에서 10여권에 달하는 창작시집을 출판하였고 귀국후에도 15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펴내 최다 시집출판기록과 해외 출판에서의 최다기록을 보유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섭리와 질서속에서 인간의 내면공간의 실존적인 양태를 치렬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표출시킨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하기에 시단에 대한 기여도가 있는 시인으로 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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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송시인에 대해 자상한 소개를 차지하고 굵직한 소개를 하자 해도 편폭이 모자란다. 지금까지 200수에 달하는 가사를 썼는데 그중에는 조선족들이 즐겨부르는《아버지에게 드리는 노래》,《세월은 흘러도》,《고향은 청춘》 등 노래가 있는가 하면 조선족중학교의무교과서에 《태산에 오르며》란 수필이 등재되고 소학교 6학년 의무교과서(상권) 에는 《첫눈》, 하권에는《완두밥》,《박넝쿨》이 등재되였고 1984년-19 97년 동시 《봄비》가 등재되기도 했다. 열독교과서에 실린것까지 합치면 근 20여수(편)의 시와 수필이 등재되는 호황기를 맞기도 했다.
그외에도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등산팀을 발족시킨 장본인, 수석 (기의한 돌 수집)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돌에도 력사와 년륜이 있고 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시인이다. 수석관련전문저서도 출판했다.
개혁개방은 문화계에서 가장 빠르게 접수했고 작가들에게는 창작의 호황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상의 해방과 작가들의 창작대상에 대한 자유는 문화에서의 개혁개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학송시인도 문뜩문뜩 아버지의 하방년대와 그후 개혁개방이 가정에 가져다준 문학적인 실리를 비유하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보였다.
연변일보
시인의 가치와 효용성
김학송
감동이 증발하고 인정이 추방된 세상에 대체 시인은 필요한 존재인가?
물질만능의 세월에 시는 웬 뚱딴지같은 시란 말인가?
혹자는 이런 의혹을 제기해올수도 있다. 그렇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가고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쪽으로 급속히 기울어져간다. 정신적인 카오스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겉에 드러난 현상일뿐 삶의 전부의 본질은 아니다. 사람이 살자면 우선 먹을 밥이 있어야 하고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잠잘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이것은 삶의 기본조건들이다.
그밖에 공기처럼 해살처럼 만질수는 없지만 지극히 소중한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문학이요 음악이요 시이다. 시는 정신의 밥, 정신의 옷, 정신의 집이라고 할수 있다. 여느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때문이다.
단순 의식주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지표을 향한 몸부림이 인간을 시와 문학을 옹호하게 하는것이다.
시는 생활의 품위와 품격을 높여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그래서 유사이래 호연지기가 있는 영웅남아들은 거의 모두가 시를 써서 자신의 드넓은 흉금과 드높은 의기를 표현하였다.
허다한 사람들은 시를 가까이 하려다 다가설수 없으니 야릇한 분노와 시기심에서 타매할뿐이지 본심은 그게 아니다. 시가 중요하고 또 대단히 매력적이라는것쯤은 알고있다.
나의 작은 체험으로 보면 시는 시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마음이 보이잖는 곳에 꿈의 집을 짓는 까닭이다. 그 집에는 해와 달이 찾아오고 신선이 춤을 추고 바람이 놀다 간다. 시는 지상과 천상을 련결하는 신비로운 통로이다. 시인의 집은 가난해도 풍요롭다. 시인은 마음의 귀로 듣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하기에 그들에겐 꽃이 웃는 소리, 돌이 말하?소리가 들리고 새와 나무가 흘리는 눈물도 보인다. 모든 사물과 령혼의 대화가 가능하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듣기때문이다.
그들은 찰나속의 영원을 보아내며 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귄다. 무한히 작은것에서 무한히 크고 위대한것을 보아내며 작은 행복에서 큰 감사와 큰 의미를 깨닫는다. 하기에 속인들이 느낄수 없는 신성한 령역에서 마음은 독립하고 정신은 자유롭다. 하나의 완정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사는게 시인이다. 그들의 삶의 질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이잖는 거대한 재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기에 시인은 가난해도 행복하다.
<<연변문학>>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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