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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인 ㅡ" 김득만":
● 1940년 9월 18일 함경남도 북청 출생, 1960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이사 및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위원장 23년 역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상무이사 및 부비서장,
연변교육출판사 <아동세계> 잡지 고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꽃동산>잡지 고문
일시: 2010년 6월 5, 6일
2010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민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계획된 제2회 한중시화전이 한국시민문학협회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도문시문학예술연합회의 공동주최로 두만강과 백두산에서 개최되었다. 한국문단에서는 성군경 시인을 비롯하여 총 6명 문인들이 訪中 참가하여 연변지역에서 활동하는 한민족 동포문인들과의 문학교류기반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그때 그 곳에서 만난 조선족 문인들 중 유난히 순수한 표정으로 열정을 다해 사회를 보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그 유명한 아동문학가 김득만 선생님이셨다. 연변지역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동시와 동요가 지속적으로 실리는등 명성이 자자했지만, 한국에서는 '방정환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외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평생을 동시에만 몰두하신 선생님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글을 쓰는 한국문인이라면 충분히 궁금증과 매력을 느끼고도 남음일 것이다. 한국문인과 중국문인이 공동개최하는 국제시화전에 참가하려고 몰려드는 문인들의 열의로 말미암아 김득만 선생님과 낙동강문학의 밀회는 넉넉하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백두산이 있는 안도현시 명월진광장 뙤약볕 아래서 그리고 우리가 여장을 푼 연길시 한 호텔로비에서 짧지만 두번의 면담이 가까스로 이루진 것은 뜻이 있으면 길이 있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김득만 선생님께서는 6월6일 아침 일찍 우리가 묵는 숙소로 걸음하여 귀국선물로 자신의 동시집을 주셨다. 그때 선물로 받은 김득만 선생님의 저서와 그곳에서 수집한 자료[ 연변라디오TV신문 예술인생편]를 토대로 중국연변조선족자치구 새싹 사랑의 대명사 "童시인 김득만"선생님을 사랑문학특집편으로 발간되는 낙동강문학 9호의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童시인 김득만
< 아동문학창작의 외길을 고집하는 사람--중국조선족 저명한 아동문학작가 김득만 선생님을 찾아서>
한 시골뜨기의 야심찬 문학꿈
1940년 9월 18일.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김득만은 세살 때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중극 왕청현 천교령진 신안촌으로 이주해 그 곳에서 꿈 많은 동년을 보내며 아동문학창작을 향한 꿈을 야심차게 키웠다.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석두촌 소학교로 통학하던 시절에는 도중에 사나운 개한테 쫓겨 엉덩이에서 달그락거리던 도시락을 빼앗기는 날이 비일비재였다. 그런 날이면 하루동안 쫄쫄 굶어야만 했던 힘든 고학길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김득만에게 학교는 커다른 유혹이었다. 다름아닌 한달에 한 번 어김없이 찾아주는 반가운 손님 '소년아동' 잡지와의 설레이는 만남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달랑 한 개 뿐인 잡지를 받아보는 날이면 김득만은 세상 모든 것을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잡지 속에 싫린 매 하나의 내용들을 거의 숙달할 지경으로 읽고 또 읽어 가노라니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아동문학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구가 순통치 않고 누구 하나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는 자신만의 창작수첩에 열심히 아동문학의 꿈을 그려갔다. 서발막대 휘둘러야 거칠게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살림에 7형제를 키우며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부모님들은 학업의 기회를 맏이인 김득만에게 주었고 그 때부터 여섯동생들은 공부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부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시작해야 했다.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김득만은 더욱 끈질기게 학업에 몰두했으며 방학이면 석탄 부리우는 일, 목재운반 등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체로 학비를 마련했다.
동심에 물든 20대
20살이 되던 해 드디어 김득만의 처녀작인 동시 <내가 일하는 사양장>이 고고성을 울렸다. 잡지에 버젓이 찍혀나온 자신의 처녀작을 보며 눈굽을 찍는 부모님과 그런 오빠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여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꼈다. 20살 사나이가 하필이면 아동문학을 고집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득만 선생님은 어려서 맛보았던 아동문학의 묘미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며 고집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녀작을 시작으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5년간 그는 연속 13수의 동시들을 발표했다. 1966년 연변대학 중문계를 졸업하고 연변연극단에 취직했지만 잇달아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빈하중농재교육'과 '로동계급재교육'이라는 왕청현 복흥농장에서 1년간 감자농사를 지었고 또다시 왕청현 기름공장으로 옮겨 1년간 콩기름을 짰다. 2년 후 복귀한 그는 연변주영화발행공사에서 번역사업에 종사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에 몰두했다. 1972년 무더운 여름, 우연히 들린 한 농촌마을에서 그는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샘을 파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윽고 샘물이 퐁퐁 솟아오르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아이들이 환호하고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굽을 찍는 모습을 보는 순간, 김득만 선생님은 뭉클한 감동과 함께 거센 창작의 파도가 몰려옴을 느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는 부랴부랴 종이장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된 동요 <맑은 샘>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애창가요로 널리 보급되었다.
맑은 샘
모래알 굴리면서 솟아오르는 동구앞 청바위 밑 맑은 샘은요 삼복철 무더운 날 야영의 길에 해방군대 아저씨들 파주셨지요 아~ 수정같이 맑은 샘은요 군민의 정을 담아 솟아납니다
우리는 학교를랑 오갈때마다 쉼업이 솟구치는 샘물터에서 시원한 물 마시고 목청돋우어 3대규률 8항주의 노래불러요
김득만 선생님의 필끝에서 탄생된 건 동요동시 뿐 만이 아니었다. 1974년 가을, 저명한 작곡가 정준갑 선생님과 함께 찾았던 화룡현 숭선진에서 두 사람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드넓은 평강벌과는 달리 그 곳의 논은 대부분 아찔한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가을을 맞아 산꼭대기는 풍년든 벼파도로 설레이었다.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청바위를 동강내고 강물을 에워다가 양수기로 물을 산꼭대기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이곳 농사의 독특한 점이란다. 이같은 전설적인 장면에 두 사람은 동시에 끓어오르는 창작의욕을 느꼈다. 이틀 후 김득만 작사, 정준갑 작곡으로 된 <산골에도 만풍년일세>가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노래는 시작과 더불어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청중들의 에대를 받고 있다.
50성상에 영글진 창작의 열매
1980년 김득만 선생님은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문예편집부 주임으로 부임되어 발탁, 1996년에는 고급편집직함을 받았으며 장장 16년간 아동문학을 위해 몰두했다. 1985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2년동안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으로 활약하며 아동문학발전에 땀등이를 쏟았고 근 50여 명의 신인작가들을 양상해냈다. 따라서 김득만 선생님은 "연변진달래문예상", "중앙문화부상","백두아동문학상", "방정환 문학상" 등 국내외 도합 60여차의 상을 휘쓸며 일대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 동안의 영예를 증명이라도 하듯 8수의 동시가 소학교 조선어문교과서에 필수과로 수록되었으며 20여수의 동요는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아이들의 애창가요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된 동요동시는 무려 1500여수 <맑은 샘><야, 골이다><고드름>을 비롯해 16권의 동요동시집, 1권의 문집, 1권의 시가집이 출판되면서 그는 명실공히 아동문학계의 다산작가로 이름을 새겼다. 조선족사회의 일대 문호였던 고 김학철 선생님은 1990년에 발표한 "동심탄만"이라는 글에서 김득만이 꼬마들의 인기를 그는 대장이라고 표현하고 나서 "누가 만약 나더러 문학상의 시상자가 되어달라고 한다면 나는 첫 상을 김득만에게 수여하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는 아동문학창작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창작의 밑거름은 가족의 사랑
아동문학창작의 외길에 평생을 바쳐온 김득만 선생님은 자신의 창작생애에서 아내가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었단다. 아내 김봉선과는 대학시절 교내 배구장에서 처음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7년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홀몸으로 어린 두 딸을 키우며 힘든 인생을 살아오신 장모님에게 만년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위해 그는 결혼과 동시에 장모님을 신혼집으로 모셔왔고 수십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런 남편이 내심 고마웠던 아내는 남편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가정의 모든 중임을 가냘픈 어깨에 짊어진 채 원망 한마디 없이 든든한 뒤심이 되어 주었다. 그런 아내가 김득만에게는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었다. 매번 한 편의 원고가 완성될 때마다 그의 첫 독자는 항상 아내였다. 남편의 작품을 한자 한자 곱씹어 읽으면서 그녀는 때로는 뼈와 살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때로는 모질도록 혹독한 평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의 엄격한 '심사관문'을 거쳐 하나 또 하나의 작품들이 속속 탄생되었으며 아내의 심사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이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진 작품들 또한 적지 않다며 김득만 선생님은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내의 신체가 요즘들어 자주 적신호가 울려 가슴이 아프다. 유달리 여행을 즐기는 아내가 남편에게 동반여행을 제의할 때마다 그 돈이면 책 한 권을 더 내겠다며 모질게 아내의 제의를 거절했던 자신이었고 그럴때마다 시무룩해 뒤돌아서던 아내의 뒷모습이 이제와서 더욱 짜릿하게 가슴에 와닿아 미안하기 그지 없단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미봉할까 싶어 요즘은 집안 청소를 도맡아 나섰으며 저녁 뉴스프로를 함께 시청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아내가 즐겨보는 의학방면의 서적들을 사다가 함께 연구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돼버렸다. 창작외에는 그 어떤 흥취나 애호도 가져 본적이 없다는 김득만 선생은 요즘 두 손자의 재롱에 노년생활이 더욱 풍부해졌단다. 아울러 2005년에는 책 갈피갈피에 손자들의 귀여운 모습을 사진재료로 담아 동시집 <빌딩>을 출간해 한 평범한 할아버지의 거룩한 손주사랑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를줄 모르는 창작의 샘
현시기 아동문학에 어떤 폐단이 존재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득만 선생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동문학작가대오가 점차 노령화에 진입하고 신생력량이 적어지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대부분 아동들이 민족문학의 중요성과 독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관계로 글짓기 수준이 현저히 차해지는 참담한 현실이 가슴아파 견딜수가 없다고 터놓았다. 아울러 현시대 아동문학작가를 꿈꾸는 햇내기 작가지망생들은 될수록 아이들과 많이 접촉하고 문학서적을 많이 탐독하며 늘 창작을 염두에 두어야 진정한 아동문학작가로 성장 할 수 있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한 동요동시 창작에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는김득만 선생님<365일 동요동시 여행>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해 아이들이 365일을 동요동시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활무대를 제공하고 싶다는 꿈과 함께 오늘도 내일도 동심에 살고 동심에 죽을것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김득만 선생님, 진정 아이들을 위한 문학창작의 길에서 하나 또 하나의 알찬 열매가 탱글탱글 영글어 가리라는 것을 가지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홍화 기자>
짧은 기사로 선생님의 70평생 삶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 돌아오는 날 아침에 받은 선생님의 동시집 세권 <고드름><빌딩><벙어리장갑>을 바로 펼쳐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다시 아이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 맑은 심성과 반짝이는 눈빛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글들이 나올 수 있을까?
동시집 <고드름> 머릿글로 한석윤 선생님께서 올려놓은 글을 참고해 본다.
『선생님은 우리 아동문단의 이름난 문인입니다. 1960년 4월 동시 <내가 일하는 사양장>으로 문단에 데뷔한 선생님은 지난 40여년간 동요동시집 <맑은 샘><야, 꼴이다!><새들아 꽃들아>를 비롯하여 아홉권의 동요동시집을 펼쳐내었는데 우리 조선족 아동문인들 치고 그처럼 많은 동요동시집을 출간한 동시인은 한명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쓰신 동요, 동시 가운에 80여수가 국내와 국외의 공모에서 각종 상을 받으셨고 그렇게 수상작품을 모아 <김득만수상작품집>까지 묶을수 있었습니다. 이는 선생님의 문학재능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이 쓰신 동요들에 많은 작곡가들이 앞다투어 곡을 붙이고 그런 동요곡들이 지난 40년간 아이들에게 애창되어 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동요로 <김득만동요200곡집>을 묶었는데 그 책을 펼쳐보면 동원된 작곡가만 하여도 작곡계의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허세록, 최삼명, 동희철, 김덕균을 비롯하여 백명이 훨씬 넘으며 그 가운데의 적지 않은 동요들이 주오학교 음악교재와 과외보충교재에 들어가 있습니다. 김득만 선생님은 이처럼 이름난 아동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저명한 청소년신문방송편집가이고 문학활동가이기도 합니다. <문화대혁명> 이후의 20여년간 선생님은 <연변소년보>의 북간과 조선족청소년방송의 부흥을 위하여 남다른 공헌을 하여왔고 또 이런 공적과 능력을 인정받아 청소년신문방송일군으로는 제일 첫사람으로 고급편집(정교수급에 해당함)직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1985년부터 지금까지 해수로 장장 20년 동안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분과의 주임을 연임해오면서 새로운 시기 아동문학의 부흥과 작가대오의 양성을 위하여 그 누구도 마멸할 수 없는 공적을 쌓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주도한 아동문학분과는 모두가 공인하는 모범분과로 칭송받았고 선생님 자신은 그런 공로로 우수조직자상, 청소년문화진흥상을 받아안기도 하였습니다.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는 반비례로 점점 삭막해만 가는인정세태속에서 선생님의 동시는 따스한 동심으로 우리 마음을 녹여주고 미래에 대한 한가닥 밝은 소망으로 우리 앞길을 헤쳐주면서 짜릿한 감동으로 우리 가슴에 안겨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동시집 <빌딩> 머릿글에서 선생님께서 겪으신 고민도 잠시 살펴보았으면 한다.
선생님께서는 동요를 많이 쓴 것으로 하여 오히려 한시기 고민기를 겪기도 하셨다. 동시인들치고 동요와 동시를 병행하여 쓰지 않는이가 거의 없다. 동요와 동시는 모두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표현 형식상 운율면에서 기본율과 자유율의 구분으로 하여 갈라질 뿐이다. 동요는 어디까지나 시로 되어야 하지만 어쨌든 곡을 지어 불러야 하기에 기본적인 운율만은 지켜야 한다. 때문에 동요를 많이 쓴 사람은 동시를 쓸 때 그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힘겨워 한다. 김득만 시인은 한시기 동시창작에서 잠시 뜸을 두고 무던히도 고민하면서 재래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살을 깎고 뼈를 깎는 탈바꿈의 모지름을 썼다. 곡식을 많이 짖느라면 더러는 쭉정이가 있듯이 김득만 시인이 비록 많은 동요동시집을 펴냈지만 그 가운데 채 여물지 못한 쭉정이가 있는 것으로 하여 무척 가슴 아파하며 고민하기도 하였따. 고민이 있으면 해탈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펴낸 <고드름>이 바로 장기간 고민끝에 내놓은 해탈의 산물이며 이전의 동요동시집과 색다르게 탈바꿈한 동시집이었다. 그리하여 동시단의 반향이 대단히 컸다. 하기에 최룡관 시인은 평론에서 이렇게 썼다. <해탈은 어려운 일이며 아픈 일이며 아름다운 나방의 몸짓이다. 고드름을 통하여 김득만 동시인은 마침내 이 해탈을 완성하지 않았나 싶다.> - 최문섭 님의 머릿글 중 -
모든 곳에서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선생님의 삶을 엿보면서, 글을 쓰고 있는 우리들은 뼈마디의 고통을 느낄만큼 노력하였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일인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동시집 <고드름>을 펴내고 그것으로 한국 아동문학의 최고상인 <방정환 문학상>을 수상하셨다. 그 전문과 제16동시집 대표작 <벙어리 장갑>을 함께 감상해 보며 각박했던 삶에 잠시라도 순수하게 뛰어 놀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미흡하나마 선생님의 동시세계 꿈밭에서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며 건강과 행운과 또 멋진 다음작 열매를 기다려 본다.
*.고드름
김득만
두메골 초가집
처마끝에 매 달 린
하아얀 고 드 름
겨울할배 두고 간
하아얀 지 팽 이
*.벙어리 장갑
김득만
손가락 다섯 형제중
맏형은 보나마나 독방 차지
네 동생은 물으나마나 큰 방 하나
동생들은 함께하서 오순도순
맏형은 홀로라서 벙어리신세
김득만 童시인 ,김인강 낙동강문학 주필
童시인 김득만 선생님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다. 원래 삼살 또는 청주로 지칭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시"북청 물장수"의 마지막 구절(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이 1940년에 태어난 김득만 선생님을 백두산 천지물을 선물 하기 위해 낙동강문학 명예주필을 기꺼이 맡으신 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한민족의 숙명이자 이 시대 새로운 길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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