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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제5의 변혁은 숙제...
2015년 03월 14일 21시 32분  조회:4284  추천:0  작성자: 죽림
"가오는 천년 길목에서 시조변혁의 命題" 

                                - 장 지 성(시조시인) 


이제 바야흐로 가오는 천년의 교차점에 선 우리들은 지나온 천년의 시조의 원류를 더듬어 보고 새롭게 다가올 즈믄해를 맞이할 대변혁의 옹골찬 마음가짐을 준비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시조의 역사는 처음부터 가(歌)에서 비롯되어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시작되었다. 
시대(시절)의 변천에 따라 자신의 감회 및 충절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목적의 수단으로, 창작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임제(1549~1587)가 당시 사대부의 체통을 접고 기녀(技女) 한우(寒雨)를 흠모한 염정시(艶情詩)가 최초의 일관된 시조풍에서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전후하여 황진이·매창 등 기녀들의 시조가 등장하면서 서민 계층이 시조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변혁은 평시조를 일탈한 당시의 파형시 격인 사설시조의 등장이다. 
정철의 「장진주사」가 최초로 기록되지만 사설시조의 형성은 17세기말 하층민들이 양반들에게 항거하는 형식으로 확대 발전되었음을 여러 문헌상 짐작할 수 있다. 

세 번째의 변혁은 1926년 최남선이 『조선문단』 5월호에 「조선 국민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발표, 시조 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당시 고시조로 답습하여 내려온 ‘하여라’, ‘있노라’ 등 과시적 표기법을 마감한 그의 시조집 『백팔번뇌』가 근대시조의 뿌리내림이다. 

네 번째의 변혁은 현대시조로서의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 내려오게 한 이은상·이병기·조운 등을 우리들은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문단에서 시조 장르의 위상은 어떠한가. 
어느 때부터인지 ‘시조하다’ 풀이는 “남이 말하는 것을 얕잡아 일컫는 말”로 그 어휘를 비하시켰고 그러한 사전적 의미를 떠나 느릿느릿 말할 때나 비꼬는 말투를 지적할 때 회자됨은 어인 일인가. 
이제 시조단 인구도 일천 명을 넘어섰다. 이 중에 혈기 충만한 새로운 지평을 열 많은 시조인들이 있음을 확신하며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아 우리 모두 거듭나는 변용의 깃발을 더욱 드높이 올려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가을 들판이 풍성하듯 이 달에 많은 시인들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을 여러 지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좋은 시, 읽히는 시조를 대할 때 전율 같은 흥분을 느낀다. 
『펜과문학』에 발표된 김준의 「아내의 얼굴」, 최종섭의 「靑山을 보며」, 박옥위의 「안개」, 김해석의 「까마귀의 은혜」, 신웅순의 「내 사랑은·16」과 『서울문학』 2호에 서벌의 「山行」, 엄미경의 「우포늪」, 정정용의 「그대 위한 설악」 및 『월간문학』 11월호에 민병도의 「戊寅日記」, 「粉靑의 노래」, 하순희의 「무학산」, 최혜숙의 「부활의 바다」 등 너무나 풍성하여 어떤 것부터 채과(採果)하여야 할지 지면 관계상 몇 작품만을 언급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언제나 생활 틈새에/가려 있는 아내 얼굴이/문득 한눈을 팔 듯/낯설게 떠오르다가/분주한 시간 속으로/자취도 없이 사라진다.//어느 땐 반만의 얼굴/초라한 그림자를/거울 앞에 마주앉은/낯익은 모습에서/그래도 잔잔한 호수/저녁놀이 고와라.//허물도 사람인 양/주체스레 넘긴 세월/곰곰이 헤아리면/태산준령도 무색하다/훔쳐본 아내의 얼굴에서/세상일을 알겠구나. 
― 김 준, 「아내의 얼굴」 전문 

한 필의 필육을 짤 때 씨줄과 날줄의 바디와 북의 조화로움이 있어야 질감 좋은 천을 생산하듯 이미지의 상호 연관성이 기·승·전·결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우리는 청정한 공기를 원하면서 산소 부족 현상이 있을 때에야 그 고마움을 느낀다. 유무형으로 평생을 뒷바라지하며 사는 고마움을 우둔하게도 아내의 의존도나 신뢰도가 높을수록 잊고 사는 모순을 범한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본 아내의 주름살에서 솟구치는 정을 저녁놀의 비단결로 옷 입히는 극히 제한적이고 수용하기 힘든 영역(?)을 다스린 작품으로 중후감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내운 저자 복판 숨이 막혀 빠져나와/산길 오르누나, 許浚 선생 탓을 길을/이런 녘 멧새 소리는 약초 뿌리 빛깔이다.//오르막 끝까지 올라 내리막 내려다본다/길은 꼬불꼬불 막히다가 트이면서/목숨 줄 저와 같음을 새겨 갖게 하는구나.//아무튼 아직은 내 이처럼 살아 숨쉬고/구름은 꼬리 매단 가오리연으로 떠/神醫가 살폈을 골짝 놓치잖고 눈여긴다.//비려라 이 세기말 毒 잔뜩 오른 가슴들/유리잔 대질리듯 맞부딪혀 금들 간다/神醫여, 산삼처럼 숨은 당신 어서 나타내소서.// 
― 서벌, 「山行」 전문 

그의 강점은 심연 깊은 서정성 바탕에 그만이 지니고 있는 모더니즘의 실사로 감각적 이면을 들추어내는 투시력에 있다. 그러한 사실성 이미지를 복원하는 주형과 그 주형 속에 용해되어 있는 神鍾의 울림 같은 시적 자아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산의 대상은 허준의 생체 실험으로 유명한 밀양의 얼음골이어도 좋고 서울 근교의 어느 산이라도 좋다. 

산에서 자생하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인체에 유익한 약초가 된다. 
그 약초 뿌리를 빛깔로 형상화해 멧새 소리로 비유한 청각적 발상이라던가 멀리 뻗어 있는 흰 오솔길을 생명줄로 그린 시각적 표현법이 동시에 어우러져 누구도 답습하지 못할 ‘구름은 꼬리 매단 가오리연으로 떠’ 있는 발원적 절창을 낳게 된다. 
그는 마침내 상처로 얼룩진 불신의 시대에 치솟는 분노를 곰삭이며 처방전을 내리는 화자는 어느덧 백발 성성한 신의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곳에 자라나던 햇살들을 보았는가/손끝을 투명하게 튕겨 내던 첫 비상의/우주로 관통하는 빛 날개 가득 눈물겹다.//어둠을 뿌리내린 가시연 걷은 새벽/수면 위로 자욱하게 뼈 울음 부서지고/사랑도 지금은 깊어 건져내지 못할 무게//노랑 부리 흰 부리로 마주 닦는 꽃의 형렬/역사를 다시 지나 맑은 피를 번지며/또렷이 우리를 향해 응시하는 오늘이여. 
― 엄미경, 「우포늪」 전문 

기계를 놓았다 그러나 그건 위장의/공복 같은 쓰라림을 버린 것뿐이다/주변을 삐걱거리던 기계를 나왔다. 
― 엄미경, 「기계를 놓았다」 
4수 중 첫째 수 

상반된 두 유형의 작품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늪은 숱한 세월의 매적 작용에 의하여 침전된 토사물로 뻘밭을 이루고, 그 퇴적물 위에 가시연 등 다양한 수초(水草)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산소 공급으로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온갖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며 특히 우포늪은 철새들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조금씩 문명의 기름띠에 훼손되어 가는 수면 위로 저어새들의 뼈 울음을 들으며 맑은 피의 수혈을 염원하는 ‘사랑도 지금은 깊어 건져내지 못할’ 애증으로 오늘을 직시하는 무게 실린 작품이다. 

반면 또 하나의 작품 「기계를 놓았다」에서는 정형의 틀을 거부하는, 요사이 새로운 변화의 미명아래 서툰 날갯짓을 하고 있는 일군의 선배 시인들의 몸짓을 답습하는 안쓰러움이 엿보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시에도 한 호흡과 두 호흡으로 여운(余韻)을 다스리는 내재율이 있듯이 세 호흡으로 응축시켜 마감되는 시조의 경우 이 시에서 어떻게 호흡을 구분하여야 하는지, 음수율을 제쳐놓더라도 음보율의 징검다리 간극을 확대 해석하려 하여도, 종장을 제외한 초장과 중장의 명확한 구분이 요구되는 기형시 형태로 무언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는, 감내하지 못할 이런 오류들이 오늘날 일부 시조풍에 편승되는 경계의 대상이 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상의 선명성도 곁들여 당부한다. 

저무는 대지 위를 潑墨으로 다가오는/어둠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언덕에 서면/수건을 머리에 두른 녹두꽃은 지고 있었다.//추억이 되지 못한 잎새끼리 떨고 있는 밤/오랜 꿈을 갉아먹던 시간의 덧니처럼/빈 산을 뜯어먹으며 넘어가는 달을 보았다.//나뒹구는 고무신의 긴 사연에 지친 풀들/과거를 지니지 못한 자 별을 섬기지 못하듯/이별의 자리를 골라 향기나는 꽃을 피웠다.//상처 따라 가는 강이 갈대숲을 일으키고/팔다리를 잃고서도 무릎을 꿇지 않던/그리운 지평 밖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보았다. 
― 민병도, 「戊寅日記」 전문 

「粉靑의 노래」와 함께 『월간문학』 11월호에 발표된 민병도의 작품이다. 
그는 이 시대 시조의 한 영역을 일구어 낸 정형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혈흔으로 얼룩진 역사의 아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유시 형태를 흉내내는 형식의 미를 대부분 거부한다. 그러나 그를 보수적인 시인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참신한 시어의 안착은 작품 전체에 튕겨 오르는 감칠맛과 이미지의 결을 빛낸다. 
이 시의 화두가 되는 발묵(潑墨)의 의미는 무엇인가. 먹을 충분히 갈지 않을 때 먹물은 번진다. 먹물이 번지는 것은 그 자체가 미완(未完)이요, 녹두꽃과 파랑새의 등장은 동학(東學)의 교주 전봉준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꿈을 갉아먹는 시간의 덧니가 빈 산을 뜯어먹으며 넘어가는 달’의 소멸은 세기말의 쉼표 같은 의미로 넷째 수 초장의 고무신의 등장은 근대, 또는 현대를 클로즈업한 불의에 항거하다 쓰러진 우리들의 사랑하는 민초가 아닌가 한다. 
그의 시는 재벌구이로 끝을 내지 않는다. 한 점 티나 일그러짐을 거부하는 장인정신으로 그의 가슴을 데우는 시작의 불잉걸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리라 믿는다. 

간밤의 배설물이 하구를 포복한다/침묵을 강요당한 적의에 대하여/녹슬은 갈대 밑둥만 골다공증 앓고 있다.//바닷사람은 함부로 낭만을 말하지 않는다/비끄러맨 밧줄을 푸는 모험적 생의 의미로/아침 해 그물로 끌어 갑판 위에 올린다. 
― 최혜숙 「부활의 바다」 4수 중 
셋째 수와 넷째 수 

바다의 생태와 그 속에서 삶을 경작하는 작품으로 “잘 가꾼 일만 물이랑에 청어 떼가 툭툭 튀는” 영상 기법의 출렁이는 물결이 눈에 선히 들어온다. 또한 그는 뱃사람들의 허기진 딸국질을 ‘속이 빈 갈대의 골다공증’으로 풀이했고 외처 사람처럼 함부로 낭만을 말하지 않는 어부들의 바다는 여간 폭풍우 속에서도 밧줄을 풀어 출어를 하여야 하고 생명을 담보로 밤마다 집어등을 켜야 하는 고난과 아픔을 명시해 주는 시다. 그러면서 그는 아침이면 만선의 꿈으로 그물을 끌어올리는 희망과 터전의 바다임을 일깨워 주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현장 시조임을 알 수 있다. 
새 천년을 순 우리 나라 말로 즈믄해라 한다. 이제 천년의 세월은 무수한 역사를 남기며 서서히 저물어 가고 무언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미지의 새 천년의 문이 열린다. 이 달의 넘치는 작품들로 보아 우리 시조단의 앞날은 밝고 또한 많은 시조시인들이 21세기를 향해 선두 주자로 뛰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앞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일구어 온 시조의 변천사를 밝혔듯이 제5의 변혁(변용)은 우리 시조인 모두의 과제요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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