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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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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 - 죽림"의 詩와 관련하여ㅡ(김관웅 평론)
2015년 03월 15일 23시 17분  조회:4457  추천:1  작성자: 죽림





 

《류행 따르기》와 《전통 지키기》


김 관 웅

 


회의 주최측(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 사전에 청하지도 않았고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도 없다가 두시간 전인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전화로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통지를 하여 전혀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귀만 가지고 배우려는 동기로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사회자님께서 발언을 해달 
라고 부탁하니 황송하고 당황하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사전에 김승종의 시집을 보았으니

할 말은 좀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에서 발언한 여러분들처럼 체계가 잡힌 론문 
이 아니라 피상적인 소감밖에는 말씀 올릴수 없음을 널리 량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평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리론으로 김승종의 시를 평하기도 하셨습니다 
만 저는 의견을 같이 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론현상 자체만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에 들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다싶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의 핵심적인물인 데리다(1931-- )의 헤체주의리론 
중에는 《열독의 해체(解構閱讀)》도 있습니다. 데리다는 전통적인 열독과 포스트 모던적 
인 열독을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열독방식의 목적은 진리를 
찾고 작자의 원의(原意), 즉 원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함으로써 독자와 작자 사이의 의사

소통을 도모하는것인데, 이렇게 하다 보면 독자는 작자의 노복(奴僕)이 되고 만다는것입니

다. 이런 까닭에 데리다는 열독을 쾌락을 찾는 유희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예작품에 대한 열독과 감상은 그 원의(原意)나 본의(本意)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독(誤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즉 독자의 주관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것을 강조하

면서 텍스트(즉 본문)중의 기의점( 意點)을 찾아내고 자기의 리해와 자기가 수요하는 내 
용을 덧붙이거나 부연(敷衍)하여 텍스트의 내용에 새로운 의의가 생겨나거나 본래의 
의의가 확장되게 함으로써 의의가 확산되게 하는 열독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승종의 시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해석한 것은 대단한 주관적창조성을 발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의 시작품에 담긴 원의와 본의와는 무관하게 김승종의 시를 해체주의적

으로 해석하셨는데 이는 분명히 김승종의 시에 대한 오독(誤讀)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 리

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김승종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은 알지 못하고 있을뿐만 해체주의시를 쓴는다는 
명확한 창작의식과 동기를 가지고 시창작을 한것도 아님은 본인도 승인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면 김승종이 비록 해체주의리론에 대한 의식적인 리론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예민한 직각으로 해체주의의 본질을 통찰했거나 해체주의리론대가 데리다

와 비슷한 사색의 경지에 오른것인가? 대답은 역시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러면 김승종이 마치도 눈 멘 고양이가 죽은 쥐와 맞부딛치듯이 해체주의시와 맞부딛 
치게 되였을가요?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아주 
낮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을 포함한 우리 연변 조선족들이 비록 아직은 후기공업화시회에서 살고있다고는 
할수 없으나 후기공업화사회, 정보화사회, 세계일체화 추세의 흐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 
고있는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붐이 일었습니다. 데리다의 해 
체주의는 철저한 회의주의(懷疑主義)와 허무주의(虛無主義), 상대주의 특징을 보여줌으써

포스트 모더니즘사조의 핵심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있는것 
만은 사실입니다. 영향을 미칠수 있는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양사회도 력사적전통으 
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해체주의의 사회심리적기반인 회의주의와 허무주의, 상대주의가

자생(自生)할수 있는 사회심리적인 토대가 마련되여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부 평자 
들이 김승종, 김문학 등 요즘의 많은 문학현상들을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으로 분석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 단적인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서방 후기공업사회의 산물인 해체주의가 우리 동양의 오늘날 현실사회에서도 공명을 일 
으키고있는 까닭은 첫째로는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가 봅니다. 가장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열독리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견해는 이미 2천여년전의 중국에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낡고 진부하다는 중

국전통문론이 가장 새롭다고 할수 있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보다는 2천여년이나 먼저 《해 
채주의 열독리론》과 비슷한 명제를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중국 고대 시론에는 《시무달고(詩無達 )》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 성구에서 달고( 
達 )는 해석이라는 뜻이니, 글자대로 풀이를 한다면 시에는 명확한 해석이 있을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시는 똑부러지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문학적용어로 풀이를 
한다면 시감상함에서의 심미적차이성이라고나 해야 할것이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라는 우리 속담과 통하는 말입니다. 
김승종의 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는 R와 일회용 삶》은 우선 제목부터가 제나름대 
로 해석할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혹자는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고

혹자는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죄다 그 사람의 개인의 
의견일 따름이지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 아니더라고 해도 자기의 해석을 밑받침하는 
충분한 론거가 있으면 그런 시평은 그래도 수준급이라고 해야 합니다. 충분한 론거를 제시

히지 못하고 김승종의 시에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데 대

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돼지자리에서 개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될 룡꿈을 꾸었다고 해몽한다면 그것은 빗나가도 너무 빗나간 해몽 
일것입니다. 
시란 흔히 그 함의가 드러나있지 않는 함축미와 암시적기능을 높이 사기에 감상과정에 
서 독자의 련상적작용이 그 어느 쟝르의 문학보다도 더 절실히 요청되고 아울러 감상자들 
의 심리, 정감이나 지식수준 같은것이 부동하기에 동일한 시라고 해도 감상자들이 부동함 
에 따라서 부동한 해석이 나올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감상의 차이성을 반드시 승인해야 합

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감상의 공동성 혹은 감상의 객관적표준을 부인하는것은 언어도단 
이 아닐수 었습니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기는 하지만 꺼꾸로

먹으면 확실히 쓰고 또 그 맛이 쓰기에 대부분사람들은 꺼꾸로 먹지 않습니다. 
최룡관님은 김승종의 이른바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현대시 정초자의 한사 
람인 리상시인을 떠올리는 그런 스찔이 매우 다분하다》고 격찬하였습니다. 이 평가의 실 
사구시의 여부를 떠나서 김승종의 사부(師父)로서의 최룡관님의 편애정도는 문단의 제씨 
들도 리해하고 넘어가야 할줄압니다. 우리 속담에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리상(李箱)을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한 최룡관님의 말씀에는 좀 어페가 있는것 같 
습니다. 리상도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할수 없습니다. 표현주의나 초 
현실주의 같은 구미 모더니즘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런 이상한 시나 소설들을 쓰게 된것이

니, 리상의 완전한 창조나 실험은 아닙니다. 리상이 이상(異常)한 존재로 지금까지 조선현

대시문학사에서 줄곧 대접을 받아오고있는 까닭은 적어도 조선에서는 이전에나 그 당시에 
나 볼수 없었던 《이상한 시나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의 조선이라는 이 특 
정한 사회적시공간에서의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험정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해야 옳을가요? 필자는 《실험정신》은 《절대적실험정신》과 《상대적

실험정신》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전자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거나

세상에서 누구도 해보지 못한 바를 처음으로 실천해본것을 뜻하고, 후자는 선인들이 이미

실험을 해보았으나 자기가 처해있는 특정한 시공간속에서 선인들의 실험한바를 중복하거나

부연하거나 확장하거나 발휘하는것을 뜻한다. 
그러면 김승종에게 《실험정신》이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참으 
로 《절대적실험정신》은 없으나 《상대적실험정신》은 조금은 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실험정신》은 흔히 《실험정신》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고 답습이나 모방

또는 경우를 봐서는 표절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실례를 하나만 
들어 보기로 합시다. 
시를 문자부호의 단순한 라렬로 생각할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도형(圖形)을 도입함으로써 
시와 회화(繪 )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중국에서는 이미 천년도 넘는 옛날에 시작되였 
숩니다. 본세기초의 이딸리아나 로씨야의 미래주의 시문학창작에서는 문자부호로 이루어진

시행을 조작하여 도형을 만들어 보려는 실험이 백년전인 본세기초에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 그 첫사람은 이딸리아의 아폴리네르인데, 그의 시 《비가 내린다》는 시행을 하늘에서 
비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것처럼 배렬했습니다. 로씨야의 마야꼽스끼는 이폴리네르는 
이러한 실험을 계승하고 발휘하여 계단식으로 시행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

절대적실험정신》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원로시인 구상선생도 한때는 시행

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아무리 유명한 시인으로 대접을 받고있다고 해도

이런 장난을 실험으로 치부할수 없으며 모방이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국 
조선족시단의 박화나 최룡관 등 제씨들이 이미 이런 모방을 많이 해왔으니 김승종이 시행 
배렬 면에서 아무리 고심참담 경영을 한들 《실험정신이 있다》는 평가를 듣기는 아주 어 
려울것입니다. 그리고 수자를 시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이미 서양의 미래파 
시인 아폴리네르의 《69 6666…69…》라는 시에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리상도

이러한 서양 모더니스트들의 영향을 입어 1933년 서울종로거리에서 경영했던다방의 이름을

《69다방》이라고 시큰둥하게 짓기도 했거니와 몇년전에 연변의 석화시인도 자기의 시에 
난삽한 수학공식들을 삽입하여서 물의를 빚어내기도 했습니다. 
김승종 본인은 자신의 시행배렬과 아라비아수자나 수학공식의 도입을 두고 아주 새롭다 
고 자아감각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연변, 한국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안광으로 볼때 이러한

잔재주는 재주가 아니며 형편없는 낡투입니다. 재주를 피우려다가 메주를 쑬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할것입니다. 참새가 황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수도 있 
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지난 실험을 《실험》이라고 칭친하는것은 
동기여하를 불문하고 한 젊은 사람을 그르칠수 있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로신선생이 언 
녕 경고한적이 있는 봉살(捧殺)―올리춰주어서 죽이는것임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이는 욕 
해서 사람을 죽이는 마살(罵殺)보다 위해성이 더 큰것입니다. 
시는 기교나 형식 면에서 실험도 중요하지만 내용 면에서의 실험이 더욱 중요한 줄로 압 
니다. 내용 면에서의 실험정신은 모더니즘의 원조(遠祖)인 보들레르가 《나한테 똥을 달라

! 그러면 나는 그 똥으로 황금을 만들테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시의 소재와 내용 면에서

전통을 반대하고 세상을 놀래우는 《이상한 주장》이나 《괴상한 구호》를 부르짖는 방식 
으로도 체현할수 있지만, 또 전통을 고수하고 전통을 가꾸고 전통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체

현할 수도 있습니다. 표신립이(標新立異)--새로움을 표방하고 이상함을 내세우는것을 통해

체현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꾸밈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아무런 괴상한 재주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을 통

해서도 체현될수 있습니다. 후자의 가장 좋은 실례로는 한국의 천상병님이나 연변의 젊은

문학도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황송문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평상심은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하고, 동양시론에서는 《대기교(大技巧)는 무기교(無技巧)

》라고 한것 같습니다. 그러면 황송문님의 시 《간장》을 실례로 들어 보기로 합시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여나는 
부활의 륜회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황송문 《간장》 전문

이 시는 가장 토속적인 간장을 이미지화하였고 전통적인 상징수법을 사용한것 외에는 아 
무런 현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얼핏 보면 그야말로 토속의 간장처럼 아 
무 새로움이 없는둣 합니다. 그러나 가장 새로움이 넘치고 웅숭깊은 내용을 담고있는 시이

기도 합니다. 죽움과 재생(death ad rebirth)의 신화적원형의 암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 시입니다. 
우리 연변은 시골입니다. 시골사람들이 시골사람다운 시를 쓰면 그것이 오히려 세상사람 
들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설것입니다. 소화도 하지 못한 모더니즘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면서 시골에서 류행만 따르다 보면 오히려 중세기의 기사차림으로 모험길에 나선 동키 
호테처럼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동양의 시골 촌놈이 빠리의 패션쇼에

어색한 양장차림으로 나서면 빈축(嚬蹙)을 사기 십상입니다. 다들 세계적인 류행을 따를 
때 홀로 민족적인 전통을 지키는것도 하나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다들 양장을 할때 한복을 입고 나서면 오히려 그 차림새가 더 세인들의 이

목을 끌수 있습니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심의 해체》의 리론에도 맞는다고 생 
각합니다. 
가장 지역적인것이 가장 민족적인것이 될 수 있고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으로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래의 말로 저의 발언을 마치려고 합니다. 
새것이 낡은것일수 있고 낡은것이 새것일수도 있습니다. 새것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것 
은 아니고 낡은것이라고 해서 다 추한것은 아닙니다.


2002년 1월 29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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