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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휘시비(诗碑)의 시비(是非)문제
조성일
김성휘(1933―1990)씨는 우리 조선족이 낳은 대표적인 당대시인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55년에 처녀작 서정시 “첫 괭이”로 문단에 데뷔하여서부터 1990년 3월 타계하기전까지 파란 많은 세월에 시창작에 목숨을 걸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평생에 시집 《나리꽃 피였네》(1997. 7), 《들국화》(1982. 5), 《금잔디》(1985. 8), 《고향생각》(1989. 8), 《흰옷 입은 사람아》(1989. 8) 등과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1979. 9),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1989) 등을 출간하여 우리 조선족시단에 선물하였다.
김성휘씨의 시창작로정을 추적해보면 좌적사조가 살판치던 지난 세월, 특히 20세기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그 당시의 “조류”에 휘말려 이데올로기에 밀착된 “송가”창작에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한후 우리 시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성통(传声筒)으로부터 시문학의 본연에로 획기적인 전이를 해야 할 막중한 과제가 제기된 긴요한 관두에 시인 김성휘씨는 새로운 문학사조의 참조계에 기대여 지난날 자기 창작에 대한 치렬한 반성과 점검을 하면서 렴가적인 “송가”와 경직된 “팔고식”시풍을 버림과 더불어 현대시창작에 입문하려고 창의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는바 새로 창작하는 자기의 시작품에 현대시의 이미지 도입, 상징과 은유 등 기법을 활용하기에 신경을 세워 가시적인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창작성과에 대해 불만족하면서 인생과 창작의 길에서 더욱 새롭고 더 높은 고봉에로 등반하려고 마음속깊이 다졌다.
나는 걸어간다
죽음을 다 모르고
사랑을 다 모르기에
지금도 걸어간다
성실을 지팽이로
그것이 분질러지도록
멀리 가고만싶었다
갈수록 하늘은 높아지고
갈수록 별은 밝아져
걸으며 걸으며 부자가 되고싶었다
기차길, 자동차길 다 버리고
술놀이 꽃놀이 다 잊고
바람과 비와 한줄에 간다
먼저 간 친구들 무덤을 지나
동아선 이웃과 작별을 하고
기다려주는이 없는 길을
가다가 맥이 진하면
두만강 물새울음 가슴에 모아
선채로 굳어져 돌이 되려 나는 간다
―서정시 “나는 걸어간다”
(시 전문 1990. 2)
염라대왕은 시인의 삶에 너그러움을 베풀지 않았다. 시인 김성휘는 너무 일찍 우리와 영별하였다. 시적천부를 가졌으면서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너무 일찍 타계함으로 하여 자기의 새로운 시학관의 본격적인 실천화와 현대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할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시문학의 구태(旧态)에서 철저히 탈피할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조선족시문학이 지난날의 경직되고 직설적인 예술기법과 렴가적인 “송가풍”의 질곡에서 벗어나 현대시에로 전환함에 있어서 선두주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명한 “과도기 시인”이라고 조심스럽게 평가해본다.
김성휘씨의 시창작실천을 더듬어보면 그의 시의 대상과 소재를 대체로 자기의 고향사람들속에서 고향의 자연과 풍물속에서 구하고 선택하고 거기에서 시적령감을 퍼내고 미적정서와 향기로운 시취를 일궈냈다.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토시인”이라고도 일컫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김성휘씨는 새로운 력사시기의 초기에 시창작에서 선두주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 시문학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뿐만아니라 조선족문단 특히 조선족시단을 이끄는 인솔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시문학에서의 젊은 유망주들에게 애정을 몰부은 스승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그를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김성휘씨의 이런 성과를 피부로 절감한 감동된 림원춘, 림연, 최홍일, 최룡관, 김인선, 석화 등을 비롯한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은 김성휘시인의 공덕을 기리고저 그의 시비 세우기에 나섰다.
시인 김성휘가 타계(1990년 3월 25일)한 이튿날부터 김성휘시비를 세울 문제를 토의하면서 여러모로 되는 어려운 준비작업을 거쳐 1994년 5월 31일에 민간차원에서 김성휘시비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주임: 최룡관
부주임: 김인선, 석화, 조룡남
위원: 최삼룡, 림연, 김응준, 김동호,
주천을(당시 룡정고중 교장)
재무: 임만설
김성휘시비위원회가 성립되여 일을 시작하자마자 시비 세울 아이디어를 제기할 때부터 일어났던 찬반의론이 더욱 가렬화되였다. 어떤분들은 뒤에서 김성휘시비를 세우는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고 어떤분은 신문을 통해 반대의견을 천명하였다. 이를테면 한 문인은 “시비박물관”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김성휘시비건립에 반대의견을 토로했다.
단칸방 세방살이에 목을 걸고 죽을 지경으로 사는 우리의 겨레들이 수두룩한 이 마당에 산 사람의 렬악한 주택사정은 아랑곳없이 죽은 사람의 일에 인력과 물력을 아끼잖겠다는분들의 량식(良识)― 사회인으로서의 량식―에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수 없다. 한 지성인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한마디― 좀 아플지는 몰라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다.
당신들은 버젓한 살림집을 갖구계시니까 남의 일은 꿈만하시죠?
김성휘시비위원회는 여론의 비난, 경제적인 어려움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통지문을 낸다, 장소를 정한다, 설계도를 그린다, 모금한다, 조각한다 등등 복잡다단한 작업을 힘차게 밀고나갔다. 하여 한달 남짓한 짧은 시간내에 흰 대리석 김성휘시비를 제작하여 1994년 6월 28일에 김성휘시인 모교인 룡정고중교정에 세웠다. 이 시비는 동북3성 100여명 문인들과 기업인들의 정 배인 모금과 두터운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시비는 높이 2메터 25센치, 너비 1메터 60센치로 구축되였는데 비석 밑부분에는 생전에 자연을 즐기였던 김성휘시인의 기호와 그의 시집 제명을 따서 들국화송이가 각인되여있고 웃부분의 하얀 대리석에는 김성휘의 시편중에서 선정해낸 서정시 “시내물”(1980. 1. 23)의 전문이 새겨졌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시내물의
흐름을
찬히 보아라
천리만리
먼먼길도
자신만만타
흐르고
흐르고
내처 흐르며
한생을
말쑥하게
가는 나그네
김성휘시비제막식은 1994년 7월 22일 김성휘시인의 모교 룡정고중교정에 세워진 김성휘시비앞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였다. 제막식에는 동북3성에서 모여온 작가, 시인, 평론가, 기업가 및 시인의 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룡정고중 사생 등으로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에서는 림원춘의 개막사, 최삼룡, 김기형(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등의 연설이 있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류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龙)》은 비(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비란 비(埤)의 뜻이다. 상고시대의 제왕들은 하늘과 땅에 보고하는 말들을 기록하여 그것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의식을 거행했었다. 이때 비석을 세움으로써 산악의 높이를 더 늘어나게 하였으니 이를 가리켜 비(埤)라고 부르는것이다. 주(周)의 목왕(穆王)은 엄산에 올라갔을 때 산우의 돌에 기념으로 몇 글자를 적었는데 이것 역시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비라 할수 있다. 또 종묘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원의 뜰에 비가 있는데 이것은 동쪽과 서쪽에 해당하는 두 기둥사이에 세워진것으로서 단지 제사에 쓰일 희생(牺牲)을 메여놓기 위한것이였기에 거기에서 어떤 업적이나 미덕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수는 없다. 그러나 공훈을 기록할 그릇이 점점 부족하게 되자 후대에는 비석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금속 대신에 돌을 사용하게 된것은 그것 모두가 영원불멸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종묘안의 물건이던 비가 무덤에 세우는 물건으로 된것은 평평한 무덤에 흙을 쌓아올려 그 높이를 더한것과 같은 리치이다.
비를 세우는 이런 기풍은 후세에 전승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양되고있는것이다. 비의 종류는 그 재료에 따라 금비(金碑)와 석비(石碑)로 나누며 비문의 내용에 따라 순수비(巡狩碑), 기적비(记绩碑), 신도비(神道碑), 릉비(陵碑), 묘비, 송덕비(颂德碑), 기념비, 정려비(旌闾碑), 유허비(遗墟碑), 척경비(拓境碑)… 등으로 나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나 나라에 기여가 큰 저명인사의 기념비나 시비거나 송덕비를 세워 수비립전(树碑立传)하고 가공송덕(歌功颂德)하며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교양에 이바지하는것은 제창할바이다. 이런 기풍은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아름다운 기풍이요 정신문명건설의 하나의 장거이다. 한세기를 웃도는 파란만장한 세월에 훌륭한 문학거장이나 지성인들이 배출되였다. 하여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리욱시비, 김창걸문학비, 김성휘시비, 정판룡문학비, 채택룡문학비, 김학철문학비 등을 세워 그들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있는것이다. 이런 기념비 세우기에 앞장섰던 문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2007년 12월
시비(诗碑)의 시비(是非)
박 화
마침내 김성휘시비가 일어섰다. 문인, 기업인, 가족들의 뜨거운 마음들이 오뉴월 서리치는 말썽을 이겨내고 끝끝내 일떠세운 장거이다.
그것이 장거라 함은 “남에 김영랑, 북에 김소월하였더니 이제 연변에 김성휘”가 나왔다고 평하는 문인까지 있듯이 우리 글 문학권에 명성 높던 시인의 시비는 그 개인에 대한 기념비로 된다기보다도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그 공로와 로고를 옳게 평가하고 잊지 않는다는데 더 큰 뜻이 있기때문이다. 무릇 우리의 문학과 예술과 학술에 기여가 큰분들은 세세대대 존경하고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 형식중의 하나가 조촐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어떤분은 그러다가 기념비의 수풀이 일어서서 땅이 좁아지면 어쩔랴고 신랄한 풍자까지 하였으나 하늘이 무너질가 겁내는 기국사람으로는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오히려 기념비를 세워 길이길이 칭송할수 있는 작가, 시인, 예술가, 리론가… 등이 더 많이 나와 더 많은 기념비를 세울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문명건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 되겠는가?
면적이 연변과 어슷비슷한 한국에는 시비와 문학비만 해도 무려 80개가 세워졌지만 땅이 좁아지기는커녕 문학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도를 과시하면서 세계에로 진출하고있다. 비록 조촐한 기념비이지만 현역작가군에게는 고무력이 되고 후배들에게는 분투의 길잡이가 된다. 비여있는 공간에는 예술적인 장식물이 생겨나 자연환경을 미화하고 정신생산에 대한 사회적존경도를 높이는 사회정화작용을 하여 적어도 일거사득이 되는데 이 좋은 일을 왜 마다해야 하겠는가?
문인상경(文人相轻)이란 고질된 악습이 문인상경(文人相敬)이란 고상한 품격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정치가, 교육가의 기념비나 반신상이 세워질 때는 야단치지 않던것이 연변문단의 저명한 시인의 시비에는 왜 말썽도 많았는지 지금도 리해되지 않는다. 세세대대 그 정신적, 심의적 영향력을 일으킬 훌륭한 작품들을 깊이 남겼거나 문학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길에 새로운 기여가 있어 후세에 영향주는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기념할 가치가 있는것이다.
더구나 리해되지 않는 일은 민가차원에서의 이러한 장거가 한때는 정부차원에서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 산소에 비석을 세우는 기념은 간섭하지 않다가도 문단에서 자발적인 기념은 왜 간섭해야 하는가? 작가가 과연 “인체령혼의 공정사”여서 지식을 존중하고 지식인을 존중한다는 구호가 입에 발라맞춘 말이 아니고 피와 살이 되였다면 과연 이런 일이 생길것인가? 정신문명건설은 구호뿐만아니고 하나하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이루어질것이다.
무릇 유공자는 사회적존경을 받아야 하고 그 존경은 또한 말로만 그쳐서는 안될것이다. 무엇이나 실속있게 되여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기풍이야말로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훌륭한 기풍이다. 이러한 기풍을 수립함도 정신문명건설의 한 내용인것이다. 그래서 명성 높던 시인의 사후에 조촐한 시비 하나쯤 세우는 일은 마땅한 일이고 이런 형식에 내재된 정신적내용은 길이길이 이어가고 빛내여야 할것이다.
시비 하나만으로도 깊은 사색을 자아내거늘 다른 일에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문제인것 같다.
1994년 7월 31일
(《문학과 예술》 1994년 11,12월호 7페지)
<<연변문학>> 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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