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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모음
2015년 04월 05일 15시 24분  조회:4668  추천:0  작성자: 죽림

박노해 시 모음


시 제목에 클릭하세요 


 

하늘    

신혼일기

천생연분

그리움

통박

진짜 노동자

준비 없는 희망

그해 겨울나무       

민들레처럼

강철새잎

마지막시   

그대 나 죽거든

아직과 이미 사이    

거룩한 사랑

고난은 자랑이 아니다

줄 끊어진 연

겨울이 온다

참혹한 사랑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 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수도 살릴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만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짖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신혼일기

길고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슴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일주일의 노동
긴 이별에 한숨지며
쓴 담배연기 어지러이 내어뿜으며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주체못할 피로에 아프게 눈을 뜨면 
야간일 끝내고 온 파랗게 언 아내는
가슴위로 엎으러져 하염없이 쓰다듬고
사랑의 입맞춤에
내 몸은 서서히 생기를 띤다.

밥상을 마주하고
지난 일주일의 밀린 얘기에
소곤소곤 정겨운
우리의 하룻밤이 너무도 짧다. 






천생연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걸로야 TV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서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꽃이야 강사 따르겠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몇일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걱정 일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세일 샤스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션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더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들어 빨래, 연탄갈이,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죄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그만 당신 몸 어디에서 
그 큰 사랑이 ,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스고 
밤하늘 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햐여 우린 결말도 못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도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름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트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얘기 나누며
일찌기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꺽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을 짖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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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간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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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박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 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마다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해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날개 칼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이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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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노동자

한세상 살면서
뼈빠지게 노동하면서
아득바득 조출철야 매달려도
돌아오는 건 쥐씨알만한지

죽어라 생산하는 놈
인간답게 좀 살라고 몸부림쳐도
죽어라 쇳가루만 날아들고 콱콱 막히고
골프채 비껴찬 신선놀음 허는 놈들 
불도자처럼 정력좋은 이윤추구에는 비까번쩍 애국갈채
제기랄 세상사가 왜이리 불평등한지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켈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비암이라고 다 비암이 아니여
독이 있어야 비암이지
센방이라고 다 센방이 아녀
바이트가 달려야 센방이지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니제
동료와 어깨를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
불도자 밀어제께 우리 것 찾아 담은
포크레인 삽날 정도는 되어야 
진짜 노동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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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희망

준비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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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나무

1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소리도 순식간에 떠나 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빚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말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은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 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긁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부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을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귿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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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엽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요."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폴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주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 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서 ?줘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년 아름다은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로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둥이
쇠창살 너무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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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새잎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흑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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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

거대한 안기부의 지하밀실을 
이 시대의 막장이라 부른다.

소리쳐도 절규해도 흡혈귀처럼
남김없이 빨아먹는 저 방음벽의 절망
24시간 눈 부릅뜬 저 새하얀 백열등
불어 불엇! 끝없이 이어지는 폭행과 
온 신경이 끊어 터질 듯한 고문의 행진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된다
더이상 무너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아 그것은
우리들 희망의 파괴
우리 민중의 해방출구이 붕괴
차라리 목슴을 주자
앙상한 이 육신을 내던져
불패의 기둥으로 세워두자

서러운 운명
서러운 기름밥의 세월
뼛골시게 노동하고도 짓밟혀 살아온 시간들
면도날처럼 곤두선 긴장의 나날 속에
매순간 결단이 필요했던 암흑한 비밀활동
그 거칠은 혁명투쟁의 고비마다
가슴치며 피논물로 다져온 맹세
천만 노동자와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아로새긴
목숨 건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결의
지금이 그때라면 여기서 죽자
내 생명을 기꺼이 바쳐주자

사랑하는 동지들
내 모든 것인 살붙이 노동자 동지들
내가 못다 한 엄중한 과제
체포로 이어진 크나큰 나의 오류도 
그대들 믿기에 승리를 믿으며
나는간다 죽음을 향해 허청허청 
나는 떠나 간다.

이제 그 순간
결행의 순간이다.
서른다섯의 상처투성이 내 인생
떨림으로 피어나는 한줄기 미소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 
마지막 생의 외침
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
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

"가자 자본가세상, 챙취하자 노동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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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죽거든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보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 속에 길게 뿌리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가는그대.. 어느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평온한 그대 품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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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살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과 이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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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랑

성은 피과 능이다.

어린 시절 방학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뭍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깍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 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 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끊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을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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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자랑이 아니다

고난은 싸워 이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경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은 뒤어넘으라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눈 뜨라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려들거나
빨리 통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고통의 심장을 파고들어
그 안에 묻힌 하늘의 얼굴을 찾으리고

고난은 살아낸 그대여
그것은 장한 인간 승리이지만
맑은 눈 뜨지 못하면
철저히 무너지고 깨어져 내려
먼지만큼 작은 자신으리 실상을 보지 못하면
내세운 정의와 진리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면,

고난을 ?고 나온 자랑스러운 그대 역시
또 하나의 닻입니다. 슬픔입니다. 
고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사람이 아니라면
생의 가장 깊은 절망과 허무의 바닥에서 맑은 눈으로 떠오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앞을 비추이는 희망의 사람이 아닙니다.

행여 제가 고난받았다고 얼굴을 들거든 침을 뱉어 주십시요
고난받았기에 존경받는다면 그것은 나의 치욕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고난이 나를 키웠고 고난이 나를 깨우쳤고
고난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배웠고 그대를 만났습니다.
아- 나에게 고난은 자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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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끊어진 연

한겨울 바람이 맵찬 어느 날이었어요
창살 너머 어둑한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줄 끊어진 가오리 연 하나가 뒤척이며 고행중이더군요

스스로를 산채로 파묻고 인연 줄도 다 놓아 버려
깊어가는 감옥이 조금은 적막하지만
한사코 붙잡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의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난 지금 줄 끊어진 연처럼
홀로 빈 하늘 떠도는 듯해도
하하, 나는 나대로 고독한 긴장 속에
생명줄 내건 치열한 날들입니다.

보이는 줄만 줄일까요
세 손으로 거두어야만 삶일까요
이헐게 날면 되는 것을 
줄 없는 줄을 타고
허공 찬바람 속에 몸 던져주며

나는 홀로 날았습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내 목숨 같은 외줄을 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다시 이어지는 고투의 세월을 
참흑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이었습니다

아- 눈 맑게 열리고 마침내 내 인연의 때가 오는 날

줄 없는 줄을 통해
아직도 첫마음 밝혀든 그대에게
나 뜨거운 떨림으로 차전할 것입니다.

그래요 희망의 줄은 이미
저마다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고
좋은 세상은 이미 현실 속에 와 자라고 있고
외줄의 때가 있고 거미줄의 때가 있고

밤새 거미 한 마리가
제 몸 속에서 투명한 줄을 뽑아
쇠창살에 잘 짜인 집을 짓더니
아침 햇살에 이른 영롱한 팽팽한 거미줄망이 그대로 한 우주,
내 삶의 안과 밖이 이어지는 관계 그물망으로 확 비추어 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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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온다

와수수
가랑잎 쓰는 바람에
삭발한 머리 쳐드니
하늘은 저만큼 높아져 있다.
나는 이만큼 낮아져 있는데

시린 하늘 흰 구름은 
옥담 질러 사라지고
나는 컴컴한 독방으로 사라지고

맑은 가을볕도 잠깐
여위어가는 가을 설움도 잠깐
벌써 독방 마루 바닥이 찹다
의시시 몸 웅크리며
겨울 보따리 풀어 해진 옥 궤맨다

아 어느덧 저만큼
겨울이 온다 겨울이 온다

벽 속에 시퍼렇게 정좌한 채 
겨울 정진 깊어가는 날 온다
대낮에도 침침한 독거방 불빛 아래 
갑자기 바느질 손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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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사랑

그대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못 본지 벌써 7년인데
얼굴이 몹시 안되었더라고
그동안 크레 앓아 몹쓸 수술까지 받았다고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는다고
내 얘기 듣고 말없이 울기만 하더라고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시대앓이를 하다니
그냥 좀 살지 몸이라도 챙기지
다들 돌아가 따뜻한 자리를 잡는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다 바친 그대가
왜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나도 가끔은 웃으며 사는데

그래 내가 힘들까 봐 엽서 한장 없었나요
혼자서 여린 몸에 그 패배를, 가혹한 상처를
그렇게 지독히 앓아야만 했나요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움이 아까웠어요
맑은 열정과 가능성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 ?치울 때까지만 좀 떨어져 하라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도 울며 꽃 꺾어 던지며 현장으로 수배길로 오시더니
이렇게 쓰러지자고, 피투성이로 망가지자고
한사코 조은 길만 골라 걸으셨나요

이제는 더 울지 마세요
슬픔도 착함도 버리세요
떨리는 기다림도 버리세요
남들처럼 대충 잊어버리세요
그대 안의 나도 지워버리세요
많이 늦었지만 따뜻하게 둥그렇게 
이젠 부디 행복하세요.

바보같이... 바보같이 ...
아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꽃같이 싱싱하던 그대가 아니라 
다시는 필수 없는 흘러간 꽃이라도
그대의 좌절 그애의 상처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내 남은 목숨이 다하도록 
멀리서...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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