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뻬이따오: 혁명에서 유랑으로 뻬이따오(北島, 1949∼)를 만나는 건 문화대혁명(1966∼1976) 10년간 철저히 억압되었던 중국 현대시의 시적 자아의 부활과 그 미완의 초상의 확인이다. 그리고 그의 시를 읽는 것은 역사와 문학의 쉼없는 조우 속에서 빚어지는 시적 철학적 경구(警句)와 냉정한 서정을 음미하는 과정이다. 본명이 자오전카이(趙振開)인 뻬이따오는 공교롭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연도인 1949년에 뻬이징의 상류가정에서 나서 중국 제일의 명문인 뻬이징 제4중학교에 다니던 중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지식의 획득보다 노동자, 농민의 계급의식 획득이, 합리적 의사소통보다 운동적 성격의 정치의식화가 우선시되었던 그 시대에, 뻬이따오는 잠시 홍위병(紅衛兵)에 참가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노동자가 된다. 그래서 허뻬이성(河北省)의 어느 농촌에서 건축일에 종사하였고 나중에 뻬이징에 돌아와 일반기업에 입사한다. 혹독한 정치운동에 휘말려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당시의 모든 지식청년들처럼 그 역시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 못한 셈이다. 뻬이따오가 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 말이었지만 연대 확인이 가능한 작품은 1972년의 것이 최초이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인 시 창작을 드러내고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은 계기는 역시 지하간행물 {오늘(今天)}의 창간(1978)이었다. 하지만 고작 9호를 발행하고 폐간당한 {오늘}의 동인들 중 뻬이따오를 비롯한 꾸청(顧城), 망커(芒克), 수팅(舒 ) 등의 시인들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작품을 필사본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유통시켰으며 1976년의 제1차 천안문사건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였다. 그 사건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백만 군중들이 벌인 민주화 투쟁이었으며 그들은 기존 권력층을 비판하고 새로운 역사를 고취하는 격문과 시를 광장 곳곳에 게시하였다. 그 글들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필사되어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공개된 시들은 자그만치 만여 수에 달했으며 그 중에서 1500편을 엄선하여 엮은 {천안문시초(天安門詩抄)}가 1978년에 발행되기도 했다. 비록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뻬이따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래의 시도 천안문사건에 참여하면서 씌어졌다. [회답] 비열함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며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 보라, 저 도금된 하늘에 사자(死者)의 일그러진 그림자가 가득 비쳐 날린다. 빙하기는 벌써 갔건만 왜 곳곳이 다 얼음투성이인가? 희망봉이 발견됐건만 왜 죽음의 바다에서 온갖 배가 앞을 다투는가? 이 세계에 내가 온 것은 오직 종이와 밧줄, 그림자를 가져와 심판에 앞서 그 판결의 목소리를 선언하기 위한 것. 네게 말해주마, 세계여 나는 --- 믿지 --- 않는다! 네 발 밑에 천 명의 도전자가 있다면 날 천 한 번째 도전자로 세어다오. 난 하늘이 푸르다고 믿지 않으며 난 천둥의 메아리를 믿지 않는다. 난 꿈이 거짓이라 믿지 않으며 난 죽음에 대가가 없음을 믿지 않는다. 바다는 제방을 무너뜨릴 것이니 온갖 쓴 물이 내 가슴에 스며들게 하고 육지는 솟아오를 것이니 인류가 다시 생존의 봉우리를 선택케 하리라 새로운 계기와 반짝이는 별들이 거침없는 하늘을 메우고 있다. 그것은 오천 년의 상형문자이며 그것은 미래 세대의 응시하는 눈동자이다. [回答] 卑鄙是卑鄙者的通行證 高尙是高尙者的墓志銘, 看 ,, 在那鍍金的天空中, 飄滿了死者彎曲的倒影. 川紀已過去了, 爲什 到處都是 凌? 好望角發見了, 爲什 死海里千帆相競? 我來到這個世界上, 只帶着紙, 繩索和身影, 爲了在審判前, 宣讀那些被判決的聲音. 告訴 , 世界 我 - 不 - 相 - 信! 縱使 脚下有一千名挑戰者, 那就把我算作第一千零一名. 我不相信天是藍的, 我不相信雷的回聲, 我不相信夢是假的, 我不相信死无報應. 如果海洋注定要決堤, 就讓所有的苦水都注入我心中, 如果陸地注定要上升, 就讓人類重新選擇生存的峰頂. 新的轉机和閃閃星斗, 正在綴滿沒有遮 的天空. 那是五千年的象形文字, 那是未來人們凝視的眼睛. 치졸한 권력투쟁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된 역사적 유토피아를 강요해 온 '세계'에게 시인은 "나는 --- 믿지 --- 않는다!"고 결연한 '회답'을 보낸다. 아무리 당연시되어 온 담론이라도, 혹시 그것이 "하늘이 푸르다"는 절대진리의 외표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해도, '빙하기'가 지난 대지에 '얼음'을 깃들게 하고 "온갖 배가 앞을 다투는" '죽음의 바다'를 만든 담론이므로 '나'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천한 번째 도전자'가 되어 싸우리라 맹세하고 결국 새로운 '생존의 봉우리'로 인류를 이끌 '미래 세대의 응시하는 눈동자', 그 냉철한 인류정신의 잠재력을 믿는다. 역사의 전환을 바라는 뻬이따오의 외침은 실제로 실현되는 듯했다. 문화대혁명의 실세였던 이른바 사인방(四人幇)이 축출되고 떵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의 중심부에 복귀하여 개혁개방의 노선을 고취했으며, 1978년 12월에 공산당이 발표한 '사상해방'의 원칙에 힘입어 문예계에도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화를 외치던 웨이징성 등의 지식인들이 체포, 투옥되는 등 "바다가 제방을 무너뜨리는" 국면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뻬이따오가 1975년에 초고를 완성한 이 시를 뒤늦게 이 시기에 발표한 것은 아직도 '시대와의 불화'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고 - 위루어커 열사에게] 최후의 시각이 와도 유언은 남기지 않겠다 오직 어머님께 말씀 전하련다 저는 결코 영웅이 아니에요. 영웅 없는 시대에 그저 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 고요한 지평선 산 자와 죽은 자의 줄을 가른다 난 하늘을 택할 수 있을 뿐 결코 땅에 꿇어앉아 자유의 바람을 막으려는 사형집행인을 커 보이게 하지 않겠다 별 모양의 총알구멍에서 핏빛의 여명이 흘러나오리 [宣告 - 獻給遇羅克] 也許最后的時刻到了 我沒有留下遺囑 只留下筆, 給我的母親 我 不是英雄 在沒有英雄的年代里, 我只想做一個人. 寧靜的地平線 分開了生者和死者的行列 我只能選擇天空 決不 在地上 以顯出 子手們的高大 好阻 自由的風 從星星的彈空里 將流出血紅的黎明 한 열사의 죽음에 대한 비장한 회고이면서 강렬한 이미지로 그의 미래지향적 신념을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위루어커는 1970년 '반혁명분자'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그의 친우이자 민주청년이었다. "별 모양의 총알구멍에서 / 핏빛의 여명이 흘러나오리"라는 시적 화자의 선언도 의미심장하지만, "영웅 없는 시대에 / 그저 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라는 시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알려진 대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중국은 노동자와 전사인 '영웅'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공산당은 철저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영웅'을 전형화하고 이에 맞는 인물들을 모범적 영웅으로 찬미함으로써 대중의 의식개조에 활용하였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 시대는 '영웅 없는 시대', 게다가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로 인식된다. 즉 모든 개인들이 고유의 이성과 감성을 포기하고 '계급'의 그것으로 자리를 채워야 했으며 철저히 집단의 한 원자로만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영웅'을 거절하고 '한 인간'이 되는 것이 '진정한 영웅'이 되는 길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선언인 동시에 현대시사의 차원에서는 간접적으로 '시적 자아'의 복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49년부터 문화대혁명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중국 시단의 지배적 조류는 '송가(頌歌)'와 '전가(戰歌)' 두 양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장에서의 지배담론이 고스란히 문학예술의 장에 이식되어 자아의 표현과 개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순수지향적 현대시의 최초의 물결이었던 '몽롱시(朦朧詩)'의 대표주자이기도 했던 뻬이따오는 이 시를 통해 '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은유적으로 중국 현대시에서의 시적 자아의 회귀를 암시하였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뻬이따오의 시는 주지시의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철학적 성찰과 시적 상상력이 대등하게 교차되면서 독특한 알레고리의 시세계가 구축된다. 먼저 [태양도시의 메모]라는 시를 살펴보자. [태양도시의 메모] 생명 태양도 떠오른다 사랑 고요하고, 기러기떼 날아간다 거칠은 처녀지를 자유 흩날린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조각이 자손 바다 전부를 담은 그림이 접혀 한 마리 백학이 되었다 아가씨 아른대는 무지개는 나는 새들의 화려한 깃털을 모았다 청춘 붉은 파도가 외로운 노에 스민다 예술 억만 개의 빛나는 태양이 흩어진 거울조각 위에 빛난다 인민 달은 찢겨 빛나는 밀알이 되어 성실한 하늘과 대지에 뿌려졌다 노동 손,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운명 아이는 멋대로 난간을 두드리고 난간은 멋대로 밤을 두드린다 믿음 푸른 분지에 양떼 넘쳐 흐르고 목동은 단조(單調)로 피리를 분다 평화 제왕이 죽어간 곳에 저 낡은 창이 가지 쳐지고, 싹을 틔워 불구자의 지팡이가 되었다 조국 그녀는 청동의 방패 위에 주조되어 박물관의 검은 벽에 기대어 있다 생활 그물 太陽城札記 生命 太陽也上升 愛情 恬靜, 雁群飛過 荒蕪的處女地 自由 飄 碎的紙屑 孫子 容納整個海洋的圖畵 疊成了一隻白鶴 姑娘 顫動的虹 採集飛鳥的花翎 靑春 紅波浪 浸透孤獨的 藝術 億萬個輝煌的太陽 顯現在打碎的鏡子上 人民 月亮被 成閃光的麥粒 播在誠實的天空和土地 勞動 手, 圍擾地球 命運 孩子隨意敲打着欄杆 欄杆隨意敲打着夜晩 信仰 羊群溢出綠色的 地 牧童吹起單調的朴笛 和平 在帝王死去的地方 那支老槍抽枝, 發芽 成了殘廢者的拐杖 祖國 被鑄在靑銅的盾牌上 着博物館黑色的板墻 生活 網 이 시의 각 연의 소제목을 이루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현대사의 각 단계마다 다양한 의미작용을 가졌으며 그만큼 현대인의 고뇌와 성찰을 요구했던 시대적 표제어들이다. 뻬이따오는 시라는 문학양식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무모하리만큼 과감하게 그 표제어들을 나열하고 그것들마다 형상화된 해석을 부여한다. 이 해석은 물론 시인의 철학적 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모든 시니피앙들은 알레고리로서 독자의 눈에 다가온다. 하지만 그 시니피앙들은 본래 대상으로서의 물질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하지 않았다. 각각의 시어들은 추상적 관념의 시적 발현인 동시에 뻬이따오 자신의 서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푸른 분지에 양떼 넘쳐 흐르고 / 목동은 단조(單調)로 피리를 부는" 세계는 평화로움을 꿈꾸는 그의 '믿음'이면서 '믿음'의 시화(詩化)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평론가들은 그의 시의 특징을 '차가운 서정'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술'과 '생활'이다. 예술을 "억만 개의 빛나는 태양이 / 흩어진 거울조각 위에 빛난다"고 해석한 그의 시선이 생활로 옮겨져 그것이 '그물'이라고 끝을 맺는 방식은 향후의 그의 시적 노선을 가늠케 한다. 부연하자면, 숱한 거울파편마다 태양이 되어 빛나는 예술은 단순히 다원화된 현대적 예술의 본질에 대한 찬미나 기대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적 주체의 달라진 실존적 조건, 즉 정치영역과 일상영역이 거의 일치되었던 과거의 조건과는 사뭇 달라진, 각종 사회적 역할과 지향이 중첩되고 파편화된 현대적 주체의 조건을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생활은 '그물'이다. 각 주체들은 독립된 공간을 전유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공간들은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이 네트워크는 원활한 상호소통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권력담론의 미시적 전파와 지배기능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적 주체는 곧 생활의 주체인만큼, 그리고 시 텍스트는 생활이란 텍스트 위에 건축되는 만큼, 달라진 중국 현대의 조건은 민감한 뻬이따오로 하여금 새로운 철학적 성찰을 시도하게 하였다. 우화 그는 자기 우화 속에 산다 그는 더는 우언의 주인이 아니다 이 우언은 벌써 되팔리어 또 다른 살찐 손에 넘어갔다 그는 살찐 손에서 산다 카나리아는 그의 영혼 그의 목구멍은 장신구점에 있고 주위는 유리로 된 새장 그는 유리새장에 산다 모자와 구두 사이에서 저 사계절의 호주머니에 열두 개의 얼굴이 꽉 찼다 그는 열두 개의 얼굴 속에 산다 그가 배반한 저 강물이 바짝 그의 뒤를 쫓는다 개의 눈을 연상시키며 그는 개의 눈 속에 산다 온 세계의 굶주림과 한 사람의 풍요로움을 봤다 그는 자기 우화의 주인이다 寓言 他活在他的寓言里 他不再是寓言的主人 這寓言已被轉賣到 一隻肥 的手中 他活在肥 的手中 金絲雀是他的靈魂 他的喉 在首飾店里 周圍是 璃的牢籠 他活在 璃的牢籠中 在帽子與皮鞋之間 那四個季節的口袋 裝滿了十二張面孔 他活在十二張面孔中 他背叛的那條河流 却緊緊地追隨着他 使人想起狗的眼睛 他活在狗的眼睛中 看到全世界的饑餓 和一個人的富足 他是他的寓言的主人 [백일몽·6] 나는 광장이 필요하다 넓고 텅 빈 광장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 연 하나 외로운 그림자 놓을 광장을 차지한 자가 말한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새장 속의 새는 산보가 필요하다 몽유병자는 빈혈의 햇빛이 필요하다 길들이 서로 부닥치려면 평등한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충동은 압축되어 우라늄으로, 안전한 곳에 숨겨졌다 조그만 가게에서 지폐 한 장, 면도날 한 개 독한 살충제 한 봉 탄생했다 [白日夢·6] 我需要廣場 一片空廣的廣場 放置一個碗,一把小匙 一隻風箏孤單的影子 占据廣場的人說 這不可能 籠中的鳥需要散步 夢游者需要貧血的陽光 道路撞擊在一起 需要平等的對話 人的衝動壓縮成 , 存放在可 的地方 在一家小店鋪 一張紙幣, 一片剃刀 一包劇毒的殺蟲劑 誕生了 위의 두 시는 모두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씌어졌다. 신랄하면서도 해독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조합, 행과 행 사이에 조성된 넓은 의미론적 간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의 비장하고 의지적인 색채를 찾아보기 힘든, 건조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이런 시적 전환은 뻬이따오의 본래의 형식관에 비추어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1981년에 {상하이문학(上海文學)}이란 잡지에서, "나는 영화의 몽타쥬 수법을 나의 시에 응용해서 이미지의 충돌과 빠른 전환을 꾀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미지의 충돌'과 '빠른 전환'이라는 극도의 도약이 낳은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워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벌써 시적 낯설게하기의 독자수용적 측면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여전히 '시대성'이라는 코드를 떠나서는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위 시들은 분명 달라진 시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은 개인에 대한 시대의 억압과 이에 대한 항변을 책임지는 그의 시적 사명과는 무관한 '다름'이다. 오히려 달라진 시대는 더욱 그의 시선을 냉철하게 하고 세밀한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80년대 중반 이후의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현대화된 중국에서 인간은 비로소 독립된 공간을 획득했지만, 그 공간은 '우화'였기 때문이다. 우화는 그것 바깥에서 관조하는 인간에게만 우화일 뿐, 그것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활'이자 '삶' 그 자체이다. 강제된 관념으로 획분되고 경계지어진 우화의 공간 안에서 사는 인간은 그 우화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주인'이 아니다. 관조하는 인간(시인)은 본다. 그가 '유리새장' 혹은 '살찐 손' 안에서 살고 있음을. 그래서 시인은 [백일몽·6](장편인 이 시의 23편의 단시들 중 하나)에서 우화를 벗어나 '광장'을 요구하는, 아직 무엇으로도 점유되거나 질서화되지 않은 '광장'에 자신만의 원초적인 삶(숟가락, 그릇)과 도약(연)을 이루려는 '나'를 상정한다. 하지만 광장을 차지한 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그 광장에서 '평등한 대화'를 나눠야할 개인들의 충동은 '우라늄'처럼 알지 못할 곳에 보관된다. 뻬이따오의 한층 깊어진 성찰의 시들은 1989년 6월 제2차 천안문사건 전후에 더욱 강화된 권력의 폭력성을 견뎌내지 못했다. 급진적 민주화세력의 주도자로 지목된 그는 결국 1989년 4월에 해외로 망명을 떠난다. 망명자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를 전전하다 1993년에 비로소 미국에 정착하였다. 다음 작품은 그 망명과정에서 창작되었다. 밤샘 달빛이 희미하게 잠을 비추고 강물이 우리 방을 뚫고 흐른다 가구는 어느 기슭에 닿으려는가 연대기만은 아닌 비겁함까지 깃든 기후 속에서 공인된 한편이 비오는 숲으로 우릴 몰았다 흐느끼는 방어선으로 유리 문진(文鎭)이 읽는다 문자들의 이야기 속의 상처를 얼마나 많은 산이 막아섰던가 1949년을 이름 없는 노래의 끝에서 꽃은 주먹을 쥐고 부르짖는다 守 夜 月光小于睡眠 河水穿過我們的房間 家具在 兒 岸 不僅是編年史 也包括非法的氣候中 公認的一面 使我們接近雨林 哭泣的防線 璃鎭紙讀出 文字述述中的傷口 多少黑山 住了 1949年 在无名小調的盡頭 花握握拳頭叫喊 뻬이따오는 1987년 한 스웨덴잡지의 방문기에서 다음과 같이 조국과 자신의 관계를 토로하였다: "나는 중국으로부터 떠날 수 없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하려 해도 중국은 멘탈리티, 언어, 역사, 그리고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는데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타국 땅을 헤매며 시를 쓰면서도 조국에 두고 온 자신의 뿌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세계가 어떻게 추락해서 사라지더라도 시의 사명은 영원히 숭고한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더더욱 조국의 현실을 잊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나 많은 산이 막아섰던가 / 1949년을"!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름 없는 노래의 끝에서' 주먹을 불끈 쥔다. '꽃'이 되어, 뿌리없는 꽃이 되어 가련하게 부르짖고 있다. 중국 현대시의 시적 자아를 복권하고 이른바 차가운 서정으로 시대적 메시지를 전했던 시인 뻬이따오는 현재 중국 현지에서는 과거의 인물이다. 망명 이후 4권의 시집을 타이완과 서구 각국에서 출간하였지만 중국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처음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문예지 {오늘}은 폐간되었고, 현재의 중국 시문학사는 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르고 있다. 그는 단지 {오늘}과 몽롱시파의 한 구성원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 그는 여전히 '오늘'의 인물이다. 스웨덴, 미국의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도 거명되고 있다. 지금은 뉴욕주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1990년에는 망명한 친구들과 함께 미국 현지에서 {오늘}을 복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활발한 그의 창작과 사회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뿌리 뽑힌' 시인일 수밖에 없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국에게서 버림받은 그의 삶이, 그의 시가 언제 "어느 기슭에 닿아" 쉴 수 있을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