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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詩를 기억하시죠??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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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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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 시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떠오릅니다... 암울했던 시절 해외 유학생들이 많이 드나들던 서울의 한 이름난 요정에서는 기생들이 상화 선생의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모두 암송을 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가짜 유학생들이 유학생 행세를 하며 공짜 술을 먹고 가는 경우가 너무 많아 당시 유학생들이라면 거의가 암송했다는 이 시를 손님들에게 외우게 하여 가짜 유학생들을 가려냈다고 하는 일화지요...
상화고택ㅡ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쉽게 계산성당과 옛 고려예식장 사이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진은 고택의 남편에서 바라본 상화고택의 전경입니다...
상화고택 동편 바로 옆에 복원해 놓은 서상돈 고택..
상화고택은 최근까지 사람이 직접 거주를 하면서 이 집이 이상화 선생의 말년 시기인 1939부터 1943년 위암으로 운명하는 순간까지 살았던 집으로 사실확인이 된 건물이지만 곁에 새롭게 복원이 된 서상돈 고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상돈 고택은 현재 구 고려예식장 부지에 새롭게 들어선 주상복합 ‘신성미소시티’부지 안으로 들어가 아쉽게도 대구의 巨富 서상돈 선생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죠.. 현재 복원된 서상돈 고택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규모가 많이 축소된 상태라는데..
흔히들 상화고택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내 세우는 키워드가 바로 ‘석류, 감나무, 장독대가 이쁜 집, 상화고택’이더군요.. 사진은 고택 안채의 모습이며 고택 좌측에 상화선생이 거하셨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ㄱ’형 한옥 이해가 되시죠..
사진 맨 좌측 대문 쪽에 서 있는 나무가 감나무이며,, 정원의 중앙부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석류나무입니다.. 본래 감나무는 사진 속 감나무 외에 화장실 옆과 창고 담장 쪽에 2그루가 더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이 한 그루만 살아 있죠.. 석류나무의 경우는 상화선생 생존 당시의 나무로서 몇 장의 사진 자료를 통해 검증이 된 사실입니다..
장독대 앞쪽에 조성된 조그만 정원에는 현재 맥문동이 심어져 있는데 이것을 두고 또 말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상화 선생 생존시 찍은 사진자료를 보면 상화선생 뒤쪽으로 안채가 보이고 앞쪽으로는 정원의 꽃나무들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의 그 석류나무와 장미넝쿨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 상화고택 최종 거주자로 알려진 이금주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정원에는 멋진 장미울타리가 조성되어 있었고 백장미, 붉은장미, 분홍장미 3종류의 장미가 심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꼭지가 복원되어 있는 바로 저 위치에는 상화 생존 당시 이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복원과정에서 정원과 우물을 정확하게 복원하지 못했다하여 말썽이 좀 있었다고 하네요.. 이에 중구청에서 정원과 우물을 정확한 고증을 통해 다시 복원키로 결정을 했다고... (뒤쪽에 사진자료를 하나 올려놓았습니다..참고하시구요..)
안채의 모습입니다... 전통 일자형 안채의 전형입니다.. 좌로부터 부엌,방,대청,방. 참고로 우리네 전통 일자형 안채의 경우 부엌을 항상 안방의 우측에 배치하죠.. 그 이유를 풍수에서는 부엌방위의 팔괘오행이 안방방위의 팔괘오행을 생하는 조건을 맞추려다보니 그러한 조합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합니다.. 바로 ‘相生’이죠..
자료를 뒤지다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을축년(1925)이라 적혀 있고 지은 사람은 1970년대에 경북대학교 황교수란 분이 오셔서 자신의 아버님이 지으셨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6.25요리집으로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한 미망인이 운영했으며 육군사령부의 백두진 장군의 부하가 전쟁통에 사망하자 그녀의 아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백두진 장군의 보호 아래 별자리가 아니면 술을 먹을 수 없었다 하고 집 앞에 백차(당시 지프형순찰차)가 즐비했다고 한다....(대구신택리지(260쪽),북랜드)”
왠지...
“용,봉,인,학...”
무슨 뜻일까???
“ 용봉인학은 상화선생의 4형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우 백기만 시인께서 자신의 저서(상화와 고월)에 밝히기를 상화 4형제를 용봉인학에 비유한 것에서 취한 것이죠..”
‘궁하면 통 한다’더니..
드디어...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只”(중용 20장)
‘ 그래..모르는 건 묻고 묻고 또 물어야... 생각할 건덕지가 생기는 것 아닌가? 그래야 명쾌한 판단이 서고,,, 독행을 할 수 있는 것이지...’
43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상화선생입니다... 부부의 사진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요... 여담입니다만 ‘상화의 여성편력’에 대해 자료집에서 몇 자 인용해 봅니다...
“상화는 18세 충청도 서순애 여사를 아내로 맞이했다. 서순애 여사와 장남 용희, 차남 충희, 막내 태희를 가졌다. 혼례를 치르자마자 부인을 냉대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독립운동가 였던 손필연, 도쿄의 신전구 유학생회관에서 유보화, 송옥경, 예기 김백희와도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상화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쉬쉬하는 경향이지만 이제는 있는 것 그대로의 상화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는 상화에게 ‘고놈, 매삽고 차운 놈’이라 했다고 한다. (매일신문,최미화)
일천 선생님께서는 ‘가훈’이라는 표현을 사용치 말라 하셨는데... 마땅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가훈이라 표현합니다... 상화선생 친필 ‘가훈’이라고 합니다...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 묻어있는 게 참 좋네요...
우~~ 상화선생 ‘혼례사성’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었네요...
“日月之明, 江河之淸, 和平中正, 大韓之美”
(日月이 밝고, 江河가 맑구나, 비로소 화평중정을 이루니 대한의 아름다움이라)
해석이 제대로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서량장군이 상화의 백씨인 이상정장군에게 보낸 친필 휘호입니다.. 상화형제의 맏형인 이상정 장군에 대해 몇 자 요약 인용해봅니다...
“이상정(李相定,1897.6.10-1947.10.27)은 이상화 시인의 맏형으로 1921-1923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해 오다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였다......(중략)...... 서북국민부대에서 활약하다가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 시기에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김구, 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임되고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군 북지나 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고, 연합군 동경진주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 (이하생략) (대구 신택리지 262쪽)”
상화선생이 즐겨 탐독했다는 전등신화, 두시 그리고 서상기.... -
기타 당시의 책들....
그날... 유별나게 더 추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동쪽에 서 있는 고층 주상복합.....
남쪽을 가리고 있는 고층건물.... 이 둘로 인해 상화고택은 하루 중 정오 무렵 딱 한 시간 정도만 햇볕을 받을 수 있답니다... 또한 고층건물 아래쪽은 다들 잘 아시죠?? 건물에 부딪힌 바람이 아래로 곧장 쏠려 내려오기 때문에 엄청난 살풍(煞風)이 불어대는 지역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양택풍수라는 측면에서는 현 상화고택은 거의 흉지에 가까운 형국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드디어 고택에 볕이 들어오다........
위 사진이 바로 상화선생께서 정원을 앞에 두고 고택 안채를 배경으로 찍혀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앞에서 말씀드린 그 장미꽃과 석류나무가 보입니다...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보수되고 있는 상화고택의 모습....
이상화, 서순애 여사, 장남 용희, 차남 충희, 막내 태희
사진 맨 오른쪽 여성은 처제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예전의 우물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우리 곁.... 대구 계산동에서 살다간 민족운동가들...
맨 위 좌측에서부터 이상화 시인, 죽농 서균동(서양화가), 야청 최해청(청구대학설립자),이쾌대(화가), 이여성(월북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아래줄 좌측에서부터 서상돈(국채보상운동 주창자), 회산 박기돈(대구상업회의소 초대회장), 이상정 장군(이상화시인의 맏형), 최정희 소설가/김유영 영화감독, 백기만 시인
우측 하단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계산성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 정 중앙 중첩된 부분의 아래쪽이 바로 계산성당 일대가 됩니다... 위에 언급한 인물들이 거의가 다 이 지역에서 사셨던 분들이죠...
역천 / 이상화
이 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같은 바람은 길을 꺼려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 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 되어 꾀우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박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여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 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 되어지는 이 살이 ...... 꿈과도 같이 그림같고 어린이 마음과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하게 지쳤을 때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방명록흔적ㅡ...
“상화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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